침입 (5)
“그놈은 어디로 갔지?”
“저도 모릅니다.”
석두가 찌그러진 송곳을 바닥에 내던졌다. 요안의 남자는 석두의 팔뚝에 맺힌 피를 보고 작게 감탄했다.
“몸을 찌르느라 고생이 많았겠군.”
“그것보단 그놈이 멀리 도망쳤을 겁니다. 피를 내느라 주변을 시끄럽게 했으니까요.”
요안의 남자는 석두의 상처 부위를 바라보았다.
겉보기엔 보통 사람과 다를 바 없으나, 그의 피는 재생 능력을 가진 영물이나 마찬가지였다.
청노에 의해 개조된 영물.
그렇기에 석두는 사천당가에게 특별한 손님이었으며, 독을 연구하는 이라면 매료될 수밖에 없었다.
완전히 외부인인 자신을 지하로 들이는 걸 허락할 정도로 말이다.
‘특히 철혈공의 금제가 풀렸을 땐…… 재생력이 극대화하지.’
일다경 안이라면 꿰뚫린 심장도 재생할 정도였다.
머리나 심장이 파괴되었을 땐 석두일지라도 불가능했지만, 그것만으로도 인간의 껍질을 벗었다고 할 수 있다.
요안의 남자는 인상을 한가득 쓰며 몸을 일으켰다.
“반드시 찾아야 한다.”
“그놈이 곤륜도인 건 알았으니 이곳을 벗어나는 편이 낫지 않습니까?”
후일 곤륜파를 습격하는 편이 낫다. 석두의 말은 일견 현명했다. 평소라면 요안의 남자도 고개를 끄덕였을 터였다.
백무량이 평범한 무인이었다면.
요안의 남자가 입술을 달싹였다.
“그 곤륜도가 하늘이 내린 대적자다.”
“……!”
석두의 눈이 크게 뜨였다. 하지만 놀람은 오래 가지 않았다.
운명이 점지한 대적자라면 그 나이에 높은 경지를 이루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여기서 죽이겠습니다.”
석두가 주먹을 꽉 쥐었다.
“대적자가 천명(天命)에 다다르기 전에.”
***
“왜, 믿기 어려우냐?”
노인은 백무량의 얼어 버린 표정을 보고는 피식 웃었다.
하기야, 구주에 기인이 많다 한들 석두 같은 괴인은 당대에 하나뿐일 테니까. 후기지수가 감당하기 어려운 놈이었다.
그런데 백무량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
“둘 다 죽이면 되겠군요.”
백무량이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노인은 어이가 없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요안의 남자를 죽이는 게 대단키는 하지만, 석두까지 동시에 상대하겠다는 건 자살이나 마찬가지였다.
“오만함이 하늘을 찌르는구나!”
“처음엔 그들이 펼치는 마공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알고 있지요.”
“그게 말처럼 쉬운 줄 아느냐?”
노인은 가소롭다는 듯 콧방귀를 뀌었다.
걸레짝이 되어 버린 앞섶과 멍든 손등.
백무량의 몸에는 사투를 벌인 흔적이 남아 있었다. 소환단으로 내상을 다스렸다고 한들 피로가 아예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하물며, 서두를 뗀 노인이 백무량의 행동을 꾸짖었다.
“네가 그놈들의 마공을 알듯이, 그놈들도 네 무공을 보았을 것이다. 어린 외견을 보고 경시하는 마음도 버렸겠지. 하면 누가 더 불리하겠느냐?”
“제가 불리하겠지요.”
백무량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 모습이 너무도 답답해서, 노인은 성을 버럭 내질렀다.
“그걸 알고도 가겠다고! 차라리 죽으러 가겠다고 하여라! 그러면 말리지도 않을 터이니!”
백무량은 노인의 눈을 보았다. 잔뜩 성이 나고, 답답함에 짜증이 난 눈. 다시 살아난 이후로 자주 마주한 시선이었다.
송우현과 주겸, 앞에 있는 노인.
그들은 백무량에게 합리를 권했다. 왜 사지로 걸어가려고 하냐며 짜증을 부리거나 걱정해 주었다.
그 마음을, 백무량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앎에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죽으러 가는 게 아닙니다. 저는 그저…….”
백무량은 말을 이으며 많은 것을 떠올렸다.
백련교주에게 살해당한 사부와 사형과 헤어지기 직전에 했던 약속.
곤륜산에서 걱정하고 있을 현노윤과 현종휘에게 무공을 가르쳐 주기로 한 약속.
칠십여 년 전만큼이나 현재도 백무량에게 소중했다. 어떤 것을 딱 잘라서 선택할 수 없을 만큼 정이 들어 버렸다.
그러니까…….
백무량은 과거의 현재 모두를 짊어져야 했다.
그것을 하나로 묶는 단어는 오직 단 하나.
“곤륜의 정신, 그것을 이어 가고자 합니다.”
“…….”
노인은 침묵했다.
평소였다면 실컷 비웃고 나서 엉덩이를 차 주었을 것이다.
정파의 후기지수란 놈이 의(意)보다 말이 앞선다며, 노인이 지금까지 봐 온 대부분의 후기지수가 그러했다.
하지만 백무량의 말에는 뜻이 담겨 있었다. 그것이 너무나도 기묘했다.
“말은 그럴듯하구나.”
하지만 노인은 솔직하게 말하지 못했다.
사실, 부럽기도 했다. 곤륜파가 아니라 당가였다면 소가주로서 밀어주었을 텐데……. 노인이 입맛을 다셨다.
그때 백무량이 불쑥 물었다.
“한데 존장께서는 이름이 어떻게 되십니까?”
“나는 구환신수(九幻神手) 당문천(唐紊泉)이다.”
당문천이 심드렁한 목소리로 말했다.
“당가에서는 나를 한 장로라고 부르지.”
“백 모가 한 장로님을 뵙습니다.”
백무량이 겸양을 보이자 당문천이 질색했다.
“괜한 허례는 됐다. 이제부터 어쩔 생각이더냐?”
“방금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바로…….”
“혼자서 둘을?”
“일단은 해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백무량의 대답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당문천은 그것이 퍽 기괴하게 느껴졌다.
어린놈이 목숨 아까운 줄 모르고 달려드는 꼴을 처음 볼 땐 부아가 치밀었는데, 조금씩 압도당하는 기분이었다.
달마나 장삼봉도 저 나이에 저런 기개는 보이지 못했을 터였다.
당문천이 뚱한 표정을 지었다.
“어린놈이 혼자 나설 줄만 아는구나.”
“예?”
“나한테 도와 달라는 말은 안 하느냐?”
“그야…….”
당연히 따라올 줄 알았다.
백무량이 차마 그 말을 잇지 못하고 있을 때, 당문천이 말꼬리를 붙잡았다.
“지금이라도 해라, 마음 바뀌기 전에.”
“도와주십시오.”
“그래. 이제야 좀 어린놈 같네. 연장자한테 도와 달라고 인간미라도 있어야지.”
당문천이 씩 웃었다. 백무량은 속으로 억지란 단어를 떠올렸지만, 도움의 손길을 거절할 만큼 멍청하지 않았다.
“감사합니다.”
“석두는 네가 맡아라. 다른 놈은 내가 상대할 터이니.”
“이유가 뭡니까?”
“칠 년 동안 석두는 당가의 온갖 독을 실험하고, 만드는 데 도움을 줬다. 게다가 그 몸이 보통 몸이더냐?”
“검기가 아니면 상처 하나 나지 않지요.”
당문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가에 수많은 암기가 있다지만 그놈은 밑천까지 아는 놈이다. 쉽게 당해 주지 않겠지. 하지만 다른 놈은 달라.”
“쉽게 이기실 수 있겠습니까? 그놈은 마기를 원숙하게 다룹니다.”
백무량은 방금 있었던 싸움을 떠올렸다.
요안의 남자가 펼쳤던 지희마창은 잠깐이었지만 현천신장을 밀어냈고, 번마염천은 주변을 마기로 물들였다.
이런 설명에도 당문천의 표정은 달라지지 않았다.
“알 게 뭐냐.”
“예?”
“네 걱정이나 해라. 그놈쯤, 아무렇지 않게 상대할 수 있으니.”
그 말을 끝으로 당문천이 앞서 걸어갔다. 백무량은 왠지 모르게 든든해졌다.
‘합공당할 일은 없겠네.’
당가의 장로라면 구파일방의 장로와 동격(同格).
하물며 구환신수라는 별호를 가진 이상 뛰어난 무공을 지니고 있을 터였다.
백무량은 저도 모르게 생각했다.
후일, 장성한 현종휘와 함께 싸우게 된다면 어떨까.
‘나도 참, 별생각을 다 하는군.’
백무량의 걸음에 활기가 감돌았다.
***
끼이익…….
이중으로 잠긴 철문이 열리며 엄청난 소음을 냈다.
열자마자 팔뚝을 기어오르는 짙은 마기. 백무량과 당문천의 얼굴이 굳어졌다.
특히 당문천의 분노가 컸다.
“당가의 지하에 독기가 아니라 마기가 가득해지는 날이 오는구나!”
“마인을 들인 게 당가였지요.”
“뭐, 이!”
백무량의 일침에 당문천이 고개를 홱 돌렸다. 순간 욱하였는지 욕지거리를 입에 한가득 품고 있는 듯했다.
하지만 끝내 내뱉진 않았다. 어쨌든 당가의 과오로 인해 생긴 문제였다.
당문천이 입술을 삐쭉거렸다.
“석두 그놈은 내공이 없어서 마인인지도 몰랐다. 가주의 판단이기도 했고, 나중에 요안을 가진 마인을 보고 나서야…….”
“뒤늦게라도 수습했다면 이런 꼴이 나지 않았겠지요.”
“그래! 잘나서 좋겠다!”
당문천이 성을 질렀다. 백무량은 저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괴팍하긴 하지만 속내를 숨기는 사람은 아니었다. 차라리 당문천 같은 사람이 대하기가 편했다.
그렇게 일다경 동안 지하를 수색하던 때였다.
“구환신수께서 여긴 어떤 일입니까?”
석두가 길모퉁이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백무량에게 당한 상처는 모두 사라지고, 넝마가 된 옷만이 싸움의 흔적으로 남아 있었다.
그의 시선이 한곳에 못 박혀 있었다.
“말은 나한테 걸어 놓고, 자기랑 싸울 놈만 노려보는구나.”
당문천이 백무량의 어깨를 두드렸다.
백무량은 조용히 앞으로 나섰다. 사실, 당문천이 어깨를 두드렸다는 것도 느끼지 못했다.
석두는 백련교주 이후로 가장 까다로운 난적이었으니까.
제대로 집중하지 않으면 당한다. 백무량이 백선신검을 쥐었다.
그것을 본 석두가 고저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도망치지 못하도록 두 다리부터 분지르겠다.”
“그게 가능하다면 말이지.”
백무량은 긴장감 어린 기색으로 석두를 노려보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당문천이 갑자기 암기를 던졌다.
“……!”
석두가 황급히 몸을 옆으로 틀었다. 피하기 위한 행동이 아니었다.
퍽!
검기로도 뚫리지 않던 팔뚝이 단숨에 찢어져서 피가 주르륵 흘렀다. 한데 그 색깔이 보라색으로 물들어 갔다.
“아쉽군. 바로 제거할 수 있었는데.”
석두가 나타난 모퉁이 안쪽에 있을 요안의 남자를 노린 것이거늘.
당문천이 혀를 차는 동안 석두가 암기를 뽑아냈다.
“견혼수(牽魂水)를 적신 흑접(黑蝶)이라…… 제가 아니면 즉사했을 겁니다.”
“죽으라고 던진 것이다.”
당문천의 눈이 가늘어졌다.
“개눈깔, 이대로 석두를 고기 방패로 세울 생각이냐?”
“……예전부터 저한테 그런 식으로 말했었지요.”
모퉁이에서 모습을 드러낸 요안의 남자가 마기를 운용했다.
복도에 걸어 놓은 횃불이 금방이라도 꺼질 듯이 휘청인다. 이에 백무량의 손등에 새겨진 운룡이 빛을 흩뿌렸다.
그걸 본 요안의 남자가 눈을 빛냈다.
“반드시 죽여라.”
“알고 있습니다.”
대답을 마친 석두가 철혈공의 금제를 풀자, 피부가 붉게 물들었다.
그동안 백무량도 가만히 있진 않았다.
쿠궁!
백무량이 철산고로 옆에 있던 벽을 허물었다. 이대로 같은 공간에서 싸운다면 난전이 될 가능성이 높았다.
‘저놈이야 암기를 도외시하겠지만, 난 아니야.’
단 한 번이라도 당문철의 암기가 백무량의 몸에 꽂힌다면 즉사할 가능성이 높았다. 마기를 자기 몸처럼 다루는 요안의 남자도 문제였다.
백무량의 판단이 과연 옳았는지, 철두가 인상을 한가득 썼다.
“이런……!”
요안의 남자가 두 손을 휘저었다. 복도에 짙게 깔려 있던 마기가 붉게 물들더니 한곳에 모여들었다.
적련신장(赤鍊神掌).
백련교의 난 때, 백무량이 직접 목도한 무공이었다.
‘역시 운룡의 반응이 옳았어.’
백무량은 백선신검을 강하게 휘둘렀다. 호천풍연의 검기가 단숨에 적련신장을 찢어발기고 석두의 미간을 향해 쏘아졌다.
다만 닿지 않을 뿐이다.
파앙!
석두가 휘두른 우수에 검기가 뭉개졌다.
마기도, 내공도, 심지어 기교조차 없는 움직임이었지만 거기에 담긴 힘은 현천신장과 비견될 정도였다.
“겨우 이 정도인가!”
석두가 기세등등하여 외치자, 백무량은 두 개의 심상(心象)을 떠올렸다.
사형이 남긴 안배를 취하러 갈 때 동굴에서 마주한 돌풍.
녹림도가 던진 아미복호검을 구름으로 감쌌던 광경, 그때의 감각.
“후우.”
호흡을 고른 백무량이 청운을 휘돌리기 시작했다.
쿠르르르…….
진자충의 풍회뇌동에서 시작했던 의문이 점차 완성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