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입 (4)
쾅쾅!
석두가 애꿎은 땅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린다. 백무량은 희소를 머금은 채 미끄러졌다.
‘사천당가가 음험한 것이 이렇게 도움이 될 줄이야.’
처음에는 청운으로 위기를 모면했고, 지금은 장로가 당문영을 위해 만든 암실로 향하고 있었다.
물론 최악의 상황이기는 했다.
시간을 질질 끌면 석두가 이곳까지 쳐들어올 테니까.
그때가 되면 어떤 수를 쓰더라도 탈출하지 못할 터였다.
‘그 전에 탈출하면 그만이지.’
혼란한 마음을 잠재운 백무량이 바닥에 착지했다. 빛 한 점 없는 곳이라 그런지 일일이 손으로 더듬어야 했다.
그렇게 일각쯤인가.
화섭자와 횃불을 찾아낸 백무량은 불을 조심스레 붙였다.
화르륵!
횃불을 이리저리 비추니 그제야 윤곽이 드러났다.
“수련실인가.”
벽곡단과 비급, 이부자리 등. 장소 자체는 협소했지만 있을 것은 모두 있었다.
특히 이부자리를 봤을 때 피로가 몰려들었다.
“……으음.”
청운을 운용하면서 쓴 의념은 물론이고, 무명식까지 펼친 뒤라 온몸의 근육이 비명을 내지르는 듯했다.
정말 딱 일식경만 잠들고 싶었으나 백무량은 눈을 부릅떴다.
“문영이가 일부러 표시했던 만큼 무언가가 있을 텐데.”
이곳저곳을 뒤지던 백무량은 마침내 단약 하나를 발견했다.
소환단.
소림의 영약이 여기에 왜 있단 말인가?
백무량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왠지 부정한 방법으로 취득했을 것 같아서 꺼려지긴 했지만, 지금 당장 몸을 다스려야만 했다.
‘나중에 물어봐야겠다.’
백무량이 소환단을 취하고는 태청신공을 운용했다.
주르륵.
그의 전신에서 땀이 조금씩 배어 나오기 시작했다.
***
“대체 무슨 일이오!”
당가의 가주인 만독수(萬毒手) 당호(唐浩)가 석두를 다그쳤다.
“이 야밤에 지하가 시끄러울 뿐만 아니라 마기라니…… 제정신이오!”
가뜩이나 청룡대가 성도에 주둔하고 있어 골치가 아프거늘.
당호가 날카로운 시선을 보내자 석두가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했다.
“조용히 처리할 테니 나가 주길 바랍니다.”
고저가 없는 목소리에 당호가 순간 움츠러들었다. 하지만 요안의 남자와 비교해 석두는 외공이 뛰어날 뿐 심후한 마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무엇보다 지난 몇 년 동안 억눌렸던 분노가 있었다.
“청룡대가 온다면 책임질 거요?”
“물론입니다.”
“……?”
“제가 죽일 테니까 걱정하지 말란 말입니다.”
석두의 눈동자가 차갑게 내려앉아 있었다.
그와 시선을 마주한 당호가 팔을 쓸어내렸다.
어느샌가 팔뚝이 닭살이 돋아 있었다. 그제야 당호는 반파된 벽을 바라보았다.
‘어찌 인간의 몸으로 저런 짓을…….’
주변을 둘러보아도 망치와 같은 도구는 보이지 않았다. 오로지 피와 벽의 잔해만이 너저분했다.
당호는 저도 모르게 웃었다. 비록 마인을 집 안 내부에 들이게 되었지만, 아무도 모르면 그만이다. 어차피 사천당가를 정파로 생각해 주는 사람은 아예 없다시피 했다.
그들의 힘을 빌려서 강서 제일가가 된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당호가 석두에게 고개를 숙였다.
“하면 일이 모두 끝나면 말씀해 주십시오. 저희가 처리하겠습니다.”
“아닙니다. 제 말이 너무 과격했습니다.”
사과를 논하는 목소리에 조금의 감정도 엿보이지 않는다. 당호는 석두의 눈치를 살피고는 지상으로 올라왔다.
‘일이 끝나면 언제든 털어 버릴 수 있도록, 저들을 죽일 독을 미리 준비해야겠어.’
당호가 배신이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
“……으음.”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백무량은 가부좌를 풀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몸이 가뿐하고 개운했다.
‘내공이 십 년은 늘었어.’
약효의 절반을 치료에 소모했는데도 내공이 십 년이나 늘다니!
소환단이 괜히 영약으로 불리는 게 아니었다. 백무량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어깨를 휘돌렸다.
쿵, 쿵!
머리 위에서 커다란 진동이 울렸다. 온몸이 근육질이던 그놈이 땅바닥을 파헤치고 있는 듯했다.
그에 비해 백무량은 서두르지 않았다.
‘방금은 상황이 급했으니까 억지로 싸웠지만, 지금은 아니지.’
당장 위에 올라가면 당가의 무인이 도열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백무량이 기감을 돋웠지만, 이곳이 얼마나 깊은 건지 어떠한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단지 위에서 마인이 내려치는 진동만 울릴 뿐.
혀를 찬 백무량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내상을 소환단으로 다스렸으니 이제는 이곳을 나갈 때였다.
“오, 여긴가.”
백무량의 시선이 안쪽 벽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밧줄 하나가 매달려 있었다.
시야가 워낙 어두운지라 어디로 연결된 밧줄인지는 알지 못했다. 하지만 어느 정도 확신은 있었다.
‘당문영은 당가에서 후계 순위가 낮아.’
그녀를 지지하는 장로가 만든 암실이라면 이 밧줄은 위험에서 벗어나기 위한 방책일 확률이 높았다.
그렇다고 확신은 금물이니, 백무량은 약간의 아쉬움을 느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자세하게 물어볼 걸 그랬나.”
두 아이를 청룡대로 보낸 이후로 이틀 동안 가 본 것은 한두 번에 불과했다.
현종휘가 워낙 서운해하는 데다, 당문영이 꺼리는 눈치였다.
혹여나 자기 위치가 누출될까 봐. 겁먹지 않은 척하면서.
그런 모습을 보니 백무량도 청룡대에 자주 찾아갈 수가 없었다.
“뭐, 이미 지난 일을 가지고 어쩌겠나. 소환단도 그렇고…….”
이런 곳에 있는 영약이라면 장로가 당문영을 위해 둔 영약일 테니까.
백무량은 웃음이 나올 뻔한 걸 꾹 참고는 밧줄을 잡았다.
끼익, 끼이익.
밧줄이 흔들리니 저 위에서 녹슨 쇳소리가 울렸다. 비교적 오랫동안 관리를 하지 않은 듯했다.
그 소리에 백무량이 내심 불안해졌다.
혹여나 밧줄을 묶어 둔 쇠가 끊어지면 나갈 방도가 막히는 것이다.
끼긱, 끽.
쇳소리가 점차 심해진다. 백무량은 서둘러 올라가며 내공을 미리 끌어모았다.
빠각!
몸이 아래로 쏠리는 감각. 밧줄이 아래로 떨어졌다.
백무량의 어금니가 꽉 깨물어졌다. 끌어모았던 내공을 일시에 다리로 흘려보냈다.
파앙, 허공에서 대기가 터지는 소리가 울렸다.
‘예전에는 운중용형보의 형태만으로 만족했지만…… 내공이 충분한 지금은 다르지.’
공타식(空打式)이 왜 공타식이겠는가.
곤륜의 걸음은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도 계단을 밞듯 내디딜 수 있었다. 그 모습마저도 운룡대팔식의 기초를 이루는 초식이었다.
백무량은 평평한 벽을 지르밟았다. 위로 붕 뜨는 감각이 전신을 휘감았다.
뒤이어서, 공정식(空停式).
내공이 아래로 내리꽂히려는 몸을 붙잡는다. 백무량은 서두르지 않고 느긋한 자세로 호흡을 골랐다.
‘어떤 상황에서도 당황하지 않으며, 침착함으로 호흡을 다스려야 함이라.’
마치 구름의 운행처럼.
백무량은 곤륜의 가르침을 복기하며 운중용형보를 연거푸 펼쳤다. 처음에는 오래간만인지라 어색했지만, 네 번째가 되자 제법 익숙했다.
탁, 탁.
일정한 박자를 지키듯이 한 발자국씩, 백무량의 걸음은 인세의 상식을 벗어나는 듯했다.
줄 없이 깎아지른 절벽을 오르는 셈이다.
“후우.”
마침내 천장에 도착하자, 밧줄이 묶여 있던 고리가 느껴졌다. 백무량은 고리 옆에 있는 손잡이를 아래로 잡아당겼다.
드르륵!
거친 쇳소리와 함께 작은 철판이 열렸다.
철판 너머에는 방이 있었다.
‘문영이의 방인가?’
인체가 그려진 도해와 수십 가지의 침.
그 외에는 잠자리밖에 없었다. 무미건조함을 넘어서 아예 텅 비어 있었다.
백무량의 눈이 가늘어졌다. 아무래도 이상했다. 당문영이 숙녀인 것처럼 굴긴 하지만, 자기 방에서까지 그럴 필요는 없었다.
바로 그때였다.
“문영이가 보낸 후배인가.”
등 뒤에서 들린 목소리에 백무량이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빼빼 마른 몸, 성마른 목소리, 봉두난발…… 그야말로 녹슨 쇠와 같은 노인이었다.
그가 바로 당문영이 말했던 한 장로이리라.
백무량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언제부터 거기 계셨습니까?”
기감을 돋웠음에도 기척이 희미했다. 만일 노인이 목소리를 내지 않았다면 끝까지 알아차리지 못했을 공산이 컸다.
백무량이 경계심을 드러내자, 노인이 가래 끓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한참 전부터.”
“저는 곤륜신성 백무량이라고 합니다.”
“신성?”
노인의 눈이 무신경하게 백무량을 훑었다.
“네가 신성이면 후기지수 태반이 나가 죽어야겠구나.”
“칭찬 감사합니다.”
“감사는 무슨, 그나저나 청룡대는 어디에서 대기하고 있느냐?”
“…….”
백무량은 대답을 머뭇거렸다. 많은 노도사와 만났던 경험이 경고성을 발하고 있었다.
그 침묵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노인이 오른손을 꼼지락거렸다.
“이…… 천둥벌거숭이가!”
어느새 노인의 손가락에 침이 쥐여 있었다. 백무량은 노인에게 두 손을 모아 올렸다.
“노선배께서 생각하시는 대로 저 혼자 왔습니다. 하지만 유의미한 성과가 있습니다.”
“유의미?”
“요안을 가지고 있던 마인을 죽였습니다.”
노인이 흥미를 보였다.
“어떻게 죽였느냐?”
“가슴을 찔렀지요.”
“찔렀다? 벤 것이 아니라?”
“예.”
백무량의 말에 노인이 껄껄 웃어젖혔다.
“마무리를 확실하게 했어야지!”
“그게 무슨 소립니까? 심장이 두 개라도 된답니까?”
“클클클…….”
노인이 백무량을 흘낏 바라보았다.
확실히 대단하긴 했다. 저렇게 어린놈이 요안의 남자를 베었다는 것 자체가 재능을 넘어섰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운이 좋지 않았다.
“그놈 옆에 거한이 있지 않더냐?”
“금강역사 같은 놈 말입니까?”
“그래. 그놈.”
노인이 자기 가슴팍을 두드렸다.
“석두의 몸은 근육만 특이한 게 아니거든.”
“……!”
“그놈이 바로 칠 년 전에 찾아온 ‘손님’이다.”
요안의 남자가 아니라 그놈이 사천당가를 위협한 마인이었단 말인가!
백무량은 생각지도 못한 반전에 깜짝 놀랐다.
***
만독불침 혹은 금강불괴.
무림인이라면 누구나 꿈꾸는 경지이자 전설의 영역이라 불리는 신체였다. 석두는 어린 시절부터 그 전설에 매료되었다.
그래서 그는, 청노에게 몸을 맡겼다.
“으아악!”
하루하루가 생지옥이었다. 후회와 분노가 이를 닳게 만들고 정신을 물들였다. 그러나 석두는 포기하지 않았다.
평생 농노로 사는 것보단 고통을 인내하여 무림인의 전설이 되고 싶었다. 치기 없는 꿈이 생각보다 독했다.
그렇게 삼 년이 지났을까.
청노가 석두를 처음으로 사람처럼 대했다.
“사람이라면 몇 번이고 혀를 깨물고 죽었을 터인데…… 그것도 재능이라면 재능이겠구나.”
“어……떻게 되고 있습니까?”
“순조롭지. 정말 많은 것을 시험해 볼 수 있었어.”
청노가 석두의 손을 매만졌다. 석두는 신음을 내뱉었다. 저번에 찢어진 피부가 아직 재생되지 않은 상태였다.
“노부가 내공심법을 하나 알려 줄 터이니, 한시도 빠짐없이 행하거라.”
청노의 말에 석두는 순종했다.
철혈공(鐵血功).
청노는 석두가 익힐 내공심법을 그 이름으로 불렀다. 수련할 때마다 온몸이 찢어지는 고통이 일어날 거라고 경고하기도 했다.
무수한 시간이 지나 석두의 피부가 붉은색으로 변했을 때.
청노가 석두에게 금제를 걸었다.
“철혈공이 항상 열려 있으면 세 시진 안에 몸이 터져서 죽을 것이다.”
그러니까, 금제를 풀 만큼 강자거나 백련교도를 살릴 때가 아니면 풀지 마라.
석두는 청노의 경고를 충실하게 지켰다.
“으으윽……!”
심장이 재생된 요안의 남자가 상반신을 일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