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검해-67화 (67/275)

침입 (3)

‘저놈이었어.’

요안의 남자는 백무량의 기척을 좇으며 생각한다.

운명(運命).

한두 달 전, 만리청의 술법이 깨졌을 때부터 그는 무언가 기이한 감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있어선 안 될 일이 자꾸만 생긴다. 천리(天理)에 희뿌연 안개가 매일 일렁였다.

그 존재가 백무량이었다면?

요안의 남자는 백무량의 전신을 집어삼킨 기운을 떠올렸다. 마공을 거스르는 내가기공은 많았지만, 정심함에서 차원이 달랐다.

‘대계를 그르칠 적이다.’

어린 외견에 속아서는 안 된다. 요안의 남자가 백무량이 사라진 방향을 집요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가 바로 하늘이 점지한 대적자다.’

***

백무량은 뒤를 흘낏 바라보았다. 집요하게 자신을 쫓는 마인의 존재가 목덜미를 서늘하게 훑었다.

‘상황이 좋지 않아.’

구파일방의 일 대 제자를 압도적으로 능가하는 두 마인. 그들을 상대로 승리를 확신할 수 없었다.

아무리 백무량이라도 불가능을 뒤집을 순 없는 법이니까.

송우현이 보면 꾸짖었을 것이다, 뭐 하러 위험을 자초하냐고. 그저 적기를 기다리면 되었을 텐데.

백무량은 피식 웃고 말았다. 송우현과 대화를 자주 하다 보니 상인의 도에 물들어 버린 듯했다.

‘확실히, 계획은 완전히 그르쳤지.’

성도에 이어 당가 지하까지, 완벽하게 정체를 숨기고 잠입했다. 곤륜을 주의 깊게 살피던 청성파마저도 사천성의 육로를 살피고 있을 뿐이었다.

따라서 백련교도를 죽이고 나오면 되는 일이다. 단지 그렇게 생각했는데…….

일이 쉽게 풀리지 않았다. 백무량은 석두의 외견을 떠올렸다.

‘백련교도가 하나가 아니고 둘일 줄이야.’

하물며 그토록 무시무시한 외공의 소유자라니.

지금 생각해도 오한이 밀려왔다.

검기가 아니면 생채기조차 나지 않는 몸. 소림사의 무승도 그렇게까지 무식하게 수련하지 않을 터였다.

‘자, 그러면 어떻게 할까.’

백무량은 마인이 점차 가까워지는 걸 느꼈다.

정체 모를 안공(眼功)을 가진 놈이었다.

‘이대로 도망칠까?’

상처를 감수한다면 지하에서 벗어날 방법이 없진 않았다.

당문영이 준 지도에는 수많은 기관과 옛 장로들이 남긴 비밀이 있었으니까.

목표는 이미 이뤘다.

태청신공의 무학을 재정립할 기연을 얻었으며, 당가의 지하에 짙게 내리깔린 마기라면 청룡대가 움직일 명분도 있다.

‘사천당가에 빚을 지우고 백련교의 존재를 강호에 드러낼 수 있겠지.’

당장 떠나서 후일을 도모하는 것이 이성적이었다. 백무량은 그것을 알면서도, 그러지 못했다.

불퇴(不退).

곤륜의 도사는 어떤 강자 앞에서도 물러나지 아니하니.

백련교의 난에서도 곤륜파는 숭고한 정신을 지켰다. 백무량은 그때 유일하게 살아남은 곤륜도였고, 구천검이라는 이름을 남겼다.

‘…….’

백무량은 침묵했다.

어떻게 보면 아집이었다. 그것을 버리면 더 많은 것을 쥘 수 있는데도 그러하지 못했다.

‘백련교주 앞에서도 당당했던 사부의 얼굴을 어떻게 본단 말인가.’

백무량은 도망치던 걸음을 멈췄다. 그러고는 뒤로 돌아서서, 단전의 남은 내공을 긁어모았다.

곤륜의 호흡이 적은 숨으로 무한을 다스리듯. 태청신공의 청운 또한 그러하리라 믿었다.

그것이 곤륜의 가르침이었다.

“이제 단념했나?”

요안의 남자가 물었다. 백무량은 실소를 터트렸다.

백련교라는 놈이 곤륜파를 저리 몰라서야. 얼빠진 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놈은 늦는 모양이군.”

“상관없다. 나 혼자로도 충분하니.”

요안의 남자가 서늘한 눈을 드러냈다. 그것만으로 백무량의 뇌리에 죽어 가는 아이의 환상이 일렁였다.

한데 그 아이의 얼굴이 익숙했다.

‘종휘가 죽어가는 모습이라.’

눈앞이 아찔하다. 참으로 위험한 힘이었다.

그저 보는 것만으로 사람의 심령을 뒤흔드니, 마공을 수련하면서 얼마나 많은 살업을 쌓았을지 가늠이 되질 않았다.

여기서 죽이지 않으면 더 많은 사람이 고통받을 것이다.

백무량은 검을 쥐었다.

“그래. 어디 한번 봐 볼까.”

백무량의 의지에 따라 청운이 강하게 맥동했다.

따악!

가볍게 벽을 두드리는 소리. 사람을 죽이기는커녕 피부나 두들기면 다행인 타격이었다.

하지만 이곳은 당가의 지하였다.

쿠구궁……!

기관이 작은 지진을 일으켰다. 갑자기 나타난 벽 하나가 요안의 남자의 뒤를 막았다.

“정말 혼자로 충분한지.”

백무량은 땅을 박찼다. 검을 앞으로 내지르는 충검세(衝劍勢). 요안의 남자가 짙은 실망감을 드러냈다.

도주로를 막고서 돌진이라, 너무 진부하지 않은가.

요안의 남자는 마기를 왼팔로 집중시켰다. 관일의 묘리가 담긴 일 수로 충검세를 비껴내고 복부에 장타를 꽂을 요량이었다.

백무량은 그 일 수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쩌억!

청운으로 빚어진 장력이 요안의 남자의 명치를 후려쳤다. 밀운경천(密雲擎天). 태청신공의 무학에서 비롯된 초식이었다.

커헉, 요안의 남자가 소리 없이 비명을 내질렀다. 왼팔의 마기가 집중력을 잃고 흩어졌다.

‘지금!’

이대로 검을 내지를 수만 있다면 단숨에 절명시킬 수 있다. 백무량의 검이 그의 살갗에 닿을 때였다.

“놈!”

요안의 남자가 내지른 노호.

마기로 이루어진 호신강기가 백선신검을 튕겨 낸다. 백무량은 먼저 예상이라도 한 듯이 더욱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그 경이적인 몸놀림에 요안의 남자가 놀랐다. 석두와 싸우고도 저런 여력이 있다는 것도 놀랍다. 백무량의 장력에 분노했던 이성을 식혔다.

그러다가 문득, 그의 시선이 백무량의 손등에 향했다.

“손등의 운룡은 어찌하여 생긴 것이더냐!”

요안의 남자가 백무량에게 살기를 드러냈다.

아는 것인가. 백무량은 반사적으로 주먹을 꽉 쥐었다.

사형이 남긴 안배를 볼 정도라면 여기서 깔끔하게 죽이거나, 단전을 폐한 뒤 쇠사슬로 묶어야 했다.

‘후자를 택하기엔 여유가 없어.’

요안의 남자를 죽이는 데 최선을 다한다. 백무량의 결의가 곧 심의가 되어 청운을 주먹에 긁어모았다.

현천신장의 일초인 천회망룡(天回蟒龍)이 시퍼런 빛을 흩뿌린다.

그 위로 청운이 덮더니 마기로 이루어진 호신강기를 도도히 밀어낸다.

“……!”

요안의 남자가 이맛살을 찌푸린다. 역시나, 그가 소리 없이 중얼거렸다. 처음 볼 때부터 예사롭지 않더니만, 백무량은 마를 멸하기 위한 운명을 지닌 도사였다.

태청신공에 운룡, 그리고 선기를 품은 백선신검.

어느 하나 빠지지 않는다. 일세의 기연을 한 몸에 품은 도사, 백무량이 요안의 남자 앞에 서 있었다.

“여기서 죽이지 않으면 안 되겠군.”

“나도 마찬가지야.”

백무량은 우장(右掌)을 휘둘렀다.

구름을 머금은 현천신장에 요안의 남자는 욕지기를 억지로 참았다. 정심한 기운 앞에서 마기가 조금씩 힘을 잃고 문드러지고 있었다.

구천화우검 말고도 현천신장까지 펼친 후기지수라니, 저게 무슨 신성(新星)이란 말인가.

한두 걸음 뒤로 물러난 요안의 남자가 쌍수를 휘둘렀다. 마기가 소용돌이치며 창의 형상을 그리기 시작했다.

지희마창(地戱魔槍)의 초식이 허공을 흩뜨린다. 기교를 한껏 머금은 창이 천회망룡을 밀어내기 시작했다.

‘이길 수 있다.’

백무량은 조금씩, 발가락 한 마디씩이라도 앞으로 향했다. 이대로 벽까지 요안의 남자를 밀어내면 결정타를 먹일 수 있었다.

그 구도를 바꾼 것은 작은 소음이었다.

쿵, 쿵……!

동굴 끝에서 울려 퍼지는 듯한 소음이 두 무인의 귓가를 간지럽혔다. 내공 하나 느끼지 않았지만, 그들은 동시에 깨달았다.

“젠장.”

석두가 기관과 벽을 부수고 접근하고 있다.

백무량의 표정이 구겨지고, 요안의 남자가 희색을 머금었다. 일대일이라면 몰라도 이 대 일이라면 십 초 안에 승패가 갈라질 터였다.

백무량은 저 웃음을 지우고 싶었다.

“생각해 보니 곱게 싸워 줄 필요가 있던가?”

백무량이 천회망룡의 장력을 억지로 터트리자, 요안의 남자가 뒤로 밀쳐졌다. 불식간에 벌어진 일에 그가 눈을 부릅떴다.

그것으로 백무량은 알아차렸다.

‘저놈은 싸워 본 경험이 몇 없다!’

만일 백무량이었다면 곧바로 거리를 좁혔을 터였다.

내상을 각오하고 장력을 억지로 터트린다는 건 여유가 없다는 뜻이니까. 백무량은 속에서 올라오는 울혈을 억지로 참으며 청운을 움직였다.

따악!

운룡이 기관을 때리는 소리에 요안의 남자가 호신강기를 운용했다. 벽에서 튀어나온 수십 개의 독침이 마기를 뚫지 못하고 바닥에 떨어졌다.

“겨우 이런 짓을 하려고 했느냐?”

“아니.”

백무량은 웃음을 씩 머금었다.

“칠 년 동안 지하에 있었다고 했던가?”

“……?”

“여기가 암기실이라는 걸 몰랐던 모양이군.”

청운이 벽에 설치된 기관을 연거푸 두드렸다. 상하좌우, 방향을 특정할 수 없을 만큼의 독침이 요안의 남자를 노렸다.

요안의 남자가 독침을 튕겨 내는 사이에 백무량은 뒤로 물러나 호흡을 골랐다.

“후우.”

석두가 합류하기 전에 요안의 남자를 무력화시킨다. 답을 정한 백무량이 청운을 백선신검에 집중시켰다.

이에 손등의 운룡이 공명하듯이 청명한 빛을 흩뿌렸다. 익숙한 감각이 백무량을 감쌌다.

백련교주에게 마지막 일 초를 펼쳤을 때의 그 감각.

백무량은 감각에 몸을 맡겼다.

곤륜검해, 무명식.

검기로 이루어진 파도가 칼끝에서 휘몰아쳤다.

“……!”

요안의 남자가 대경실색하며 호신강기를 거뒀다. 독침이 몸 곳곳에 꽂혔지만, 억지로 꾹 참아 냈다.

독침이야 후일 해독하면 그만이나 백무량이 펼친 일 검은 나중이 없다. 요안의 남자가 마기로 주변을 까맣게 물들였다.

번마염천(繁魔染天)의 기공이 파도를 짓눌렀다. 백무량의 내공은 한 줌에 불과하니, 단숨에 제압하겠단 의도였다.

하지만 그 의도는 통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검해가 번마염천을 먹어 치웠다.

“곤륜의 검해는 바다와 같으니…….”

백무량은 낮은 목소리로 읊조렸다.

“몸으로 견식해 보아라.”

투쾅!

일점으로 집중된 검해가 요안의 남자를 꿰뚫었다.

***

투쾅!

요안의 남자를 꿰뚫은 검해가 그 뒤에 있던 벽까지 파헤쳤다.

석두는 반사적으로 그것을 피하고는 벽 너머를 훔쳐봤다.

“……!”

석두의 얼굴에 경악이 흘렀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이럴 수가.”

설마 요안의 남자가 백무량에게 당하다니?

청노조차 예상하지 못한 결과가 벽 너머에서 벌어졌다. 석두는 혼원벽력쇄를 펼쳐 반쯤 부서진 벽을 깡그리 밀어냈다.

그러자 얼굴이 새하얗게 변한 백무량의 모습이 보였다.

‘전력에 손실이 간 건 안타깝지만.’

여기서 백무량을 제거한다면 미래에 있을 우환을 제거할 수 있다.

요안의 남자를 힐끗 쳐다본 석두가 앞으로 나섰다.

“여력은 남아 있나?”

“아니.”

백무량이 소탈한 웃음을 보였다. 석두는 피식 웃었다. 사실은 아쉬움이 컸다.

정말 오랜만에 금제를 풀 만한 강자와 마주했는데, 재미는 요안의 남자가 다 봤으니까.

하지만 이대로 백무량을 보내 줄 순 없는 법이다.

“하면 여기서……”

석두가 입을 열던 그때였다.

“이만 작별이다.”

청운이 기관을 두드리자, 백무량의 몸이 아래로 푹 꺼졌다.

한 장로가 당문영을 위해 만들었다는 암실을 향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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