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입 (2)
촤아악!
백무량은 땅을 강하게 굴렀다. 흙먼지가 뒤섞인 호수 물이 남자의 눈을 향해 튀겼다.
현재를 모면하기 위한 일수이자, 선공을 취하기 위한 일격. 백무량의 우수(右手)가 백선신검으로 향했다.
“무의미한 짓을.”
앞으로 반보. 남자가 크게 나아간다. 바닥에 깔린 벽돌이 그의 발아래에서 짓뭉개졌다. 내공은 쥐뿔도 느껴지지 않았기에 경이로웠다.
쐐애액!
남자의 팔뚝이 채찍처럼 휘둘러진다. 공격 자체는 며칠 전 현종휘가 펼친 것과 대동소이했다.
다른 것은 힘. 일격에 실린 힘에서 백무량의 간담이 서늘해졌다. 직격당하면 통째로 몸이 갈려 나갈 듯했다.
이에 백무량은 곧바로 분광검을 펼쳤다.
콰쾅!
정녕 인간의 살과 검이 부딪친 소리란 말인가?
백무량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백선신검에 부딪친 남자의 팔뚝이 잘리기는커녕 붉게 물드는 것이 전부였다.
타다 남은 뇌기의 흔적이 허공에 나비처럼 흩날리고 있을 뿐이다.
“좋은 검이군.”
남자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부러뜨리는 것이 아까울 정도야.”
“……!”
괜한 허세가 아니다. 백무량은 남자의 근육이 살아 있는 것처럼 꿈틀거리는 모습을 보았다.
그의 몸 자체가 호신강기며 명검이니, 그저 휘두르고 내지르는 것만으로도 위협적이다.
숨을 고른 백무량이 뒤로 물러났다.
‘이대로 시간이 끌면 다른 무인들이 합류할 거다. 그러니 빨리 이놈을 처리해야…….’
“누구도 오지 않는다.”
남자는 마치 백무량의 생각을 읽는 것처럼 행동했다. 아니, 실제로 남자의 안력(眼力)은 극에 달한 외공만큼이나 정밀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약간의 틈만 있다면 사람의 감정을 쉽게 읽어 낼 정도로.
남자가 천천히 발을 끌었다. 백무량의 눈이 격동하는 것을 바라보면서, 한참 동안 식어 있던 육체를 달구기 시작했다.
‘쉽게 따라잡을 수 있는 차이가 아니야.’
아이와 어른, 혹은 내공의 고하.
되살아난 이래로 백무량은 항상 불리함을 극복했다.
백선신검이라는 명검이 있었고 사형이 남긴 기연이 있었다. 그렇기에 어렵지 않게 상대를 꺾을 수 있었다.
하지만 눈앞의 남자는 달랐다.
마치 바위산을 눈앞에 둔 듯한 강인함이 그에게 있었다.
백무량의 눈이 가늘어진다. 대체 어떻게 해야 이길 수 있을까. 수많은 궁리가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러나 마땅한 답은 나오지 않았다.
백무량은 검을 쥐었다. 이에 남자가 검의 간격을 코앞에 두고서 멈췄다.
먼저 해볼 테면 해보라는 것처럼 보였다.
“……후.”
백척간두에 선 기분이다. 마음이 몹시 떨리고 울렁였다. 검을 휘둘러도 손쉽게 막히고, 가슴팍에 주먹이 처박힐 것 같았다.
남자처럼 압도적인 상대를 만나 본 적이 있었던가?
백무량은 호흡을 가다듬었다. 부정적인 감정을 지우고, 오로지 살의만을 꽃피운다. 단전의 내공을 끌어 올리니 백선신검에 구름이 맺혔다.
“제법 괜찮은 내공이군.”
남자가 제멋대로 평했다. 마음대로 지껄여라. 백무량은 백선신검을 휘둘렀다.
쿠르릉!
구름을 머금은 검기가 수십 갈래로 흩날렸다. 남자는 그것을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뇌기에 이어서 구름이라니. 후기지수치고는 여러 가지 재주를 가지고 있다. 단지 그것뿐이었다.
몸을 꿰뚫지 못하는 검은 녹슨 농기구만도 못한 법이니까.
남자는 조금의 주저도 없이 구름을 맨몸으로 꿰뚫었다. 살갗이 긁히는 고통이 전신을 두드렸지만 개의치 않았다.
백무량이 주먹에 닿을 거리에 있다. 단지 그것으로 충분했다.
꽈아앙!
주먹과 백선신검이 충돌했다.
남자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의외였다. 자신의 일격을 보고도 정면승부를 피하지 않은 무인은 딱 두 가지였다.
반응하지 못하거나, 힘에 자신이 있거나.
남자가 보기에 백무량은 어느 쪽도 아니었다.
“대단한 호기로다.”
“마인 주제에, 마음대로 지껄이지 마라.”
백무량의 손안에서 검이 꿈틀거렸다. 한 번의 움직임으로 십자의 검기가 만들어졌다.
거기서 한 걸음. 백무량은 발을 앞으로 끌면서 전진했다.
검뢰벽천에서 일섬운월로 이어지는 검격에 호천풍연의 깨달음이 실린다.
스걱!
남자의 손등에 상처가 새겨지는 순간이었다.
“……!”
남자가 저도 모르게 우뚝 멈춰 섰다. 백무량은 웃음을 터트렸다. 난공불락으로 여겨지던 바위산에 송곳을 박아 넣은 기분이었다.
이에 몇 걸음을 더 내디딘다. 운중용형보의 공타식과 구천화우검의 균천관일.
유려하게 이어진 무공이 남자의 명문으로 쏘아졌다.
그걸 본 남자는 처음으로 씨익 웃고는 양팔을 벌렸다.
‘저게 무슨 짓이지?’
백무량은 남자의 행동에 의아함을 느꼈지만, 초식을 중도에 멈추진 않았다.
이변은 그 순간에 벌어졌다.
남자의 몸이 붉게 물들더니 김이 피어올랐다.
“이대로는 안 되겠어.”
카가강!
균천관일은 가슴팍을 꿰뚫지 못하고 아래로 미끄러졌다.
백무량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저 바위산처럼 보이던 게 지금은 곤륜산맥처럼 보였다.
더욱 극적인 변화는 따로 있었다.
“지금 펼친 것이 네 전부는 아니겠지?”
조금 전까지만 해도 고저가 없던 남자의 목소리가 흥분으로 들끓고 있었다.
뒤이어 백련교의 사이한 기운이 지하를 가득 채웠다.
백무량은 그것을 밀어내면서 며칠 전 객잔에서 떠올렸던 가능성을 떠올렸다.
진자충의 풍회뇌동.
그것을 구천화우검이나 태청신공의 무학에 접목할 수 있다면 적어도 두 단계는 발전시킬 수 있을 터였다.
‘내공이 충분했다면 육 초인 양천대소를 펼쳐서 쉽게 꺾었을지도 모르지만.’
전생처럼 구천화우검의 형에 집착하면 큰 발전을 이룰 수 없다.
백무량의 우수가 백선신검을 틀어쥐었다.
아직도 백무량은 한 가지를 착각하고 있었다.
당가 지하에 있는 백련교도가 바로 남자일 것이라고…….
***
“바깥이 소란스럽군.”
요안의 남자가 몸을 일으켰다. 오랜만에 움직여서인지 관절 마디마다 뿌드득거리는 소리가 울렸다.
기감을 돋우니 바깥의 상황이 머릿속에서 그려졌다.
내공이 전무한 석두와 싸우는 중인 무인. 그에게서 마공과는 완전히 상극인 기운이 느껴졌다.
“정심한 내가기공을 익힌 도사라…….”
요안의 남자는 곧바로 문밖을 나섰다.
***
백무량은 검을 늘어뜨렸다. 가만히 있기만 해도 칼끝이 흔들리고, 호흡이 가빴다.
“……후우.”
남자에게 펼친 초식의 횟수가 어언 기백인가.
수많은 공세를 펼쳤음에도 남자는 전혀 지치지 않은 듯했다. 아니, 오히려 점점 팔팔해지는 것 같았다.
기세만 보면 전신에서 피를 흘리는 사람처럼 보이지 않을 정도다.
“날다람쥐 같은 놈!”
남자가 단 한 걸음으로 백무량의 보법을 따라잡았다. 육체적으로는 지금까지 만난 어느 무인보다도 강력했다.
사형이 남긴 기연이 없었다면 진즉에 내공이 고갈되었을 터. 백무량은 단전에 남은 내공을 가늠했다.
염천일원은 단 한 번이요, 호천풍연도 다른 초식에 싣는다면 서너 번으로 끝이었다.
‘이놈을 어떻게 꺾지?’
백무량의 눈앞이 차츰 깜깜해지던 그때였다.
“네가 성도에 침입한 불청객이렷다?”
“……!”
별안간 들려온 목소리에 백무량이 고개를 돌렸다.
기이한 눈을 가진 사내가 자신을 노려보는데, 정신이 빨려 나가는 듯한 기분이었다.
‘하나도 벅찬데 두 명이라니…….’
백무량은 망조의 암운을 보았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대답했다.
“그렇다.”
“당가의 지하엔 무슨 일이더냐?”
사내, 요안의 남자가 보내는 시선에 백무량은 한순간 움츠러들었다. 태청신공을 극성으로 발휘하지 않으면 단숨에 정신이 좀 먹힐 것 같았다.
쿠르르…….
태청신공이 구름으로 유형화하자 요안의 남자가 서늘한 눈빛을 드러냈다.
“곤륜도였구나.”
“그렇다.”
백무량은 고개를 당당히 들었다.
그 모습을 본 요안의 남자가 백무량을 비웃었다.
“객기만은 절세 고수처럼 구는 꼴이 가엽기만 하다.”
“곤륜도가 백련교도에게 엎드려서 목숨을 구걸할 줄 알았더냐?”
“흥, 곧 그렇게 될 터인데 명을 재촉하는구나.”
요안의 남자가 백무량의 위아래를 훑었다.
백무량은 침을 꿀꺽 삼켰다.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전신에 소름이 쫙 돋았다.
그의 시선은 치명적인 급소를 향한 것이 아니었다.
‘내 몸으로 강시라도 부릴 생각인가?’
백련교가 마교이기는 하나, 좌도방문의 사특한 술수를 부리지는 않았거늘.
칠십여 년의 세월이 또 다른 타락을 불러온 걸까?
백무량은 잡스러운 생각을 지웠다.
이곳에서 나가거나, 저들을 죽일 각오만이 필요했다.
“덤벼라.”
백무량의 도발에 요안의 남자가 기운을 끌어 올렸다.
파스슥.
지하를 밝히던 촛불이 모두 꺼졌다. 어두컴컴한 마기가 점차 주변을 잠식하더니 호수 물을 시꺼멓게 물들였다.
눈앞에는 전신이 붉게 물든 남자.
그의 몇 걸음 뒤에 존재하는 요안의 남자.
어느 쪽이나 난공불락의 적이다. 백무량이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방도가 있을 거다. 무언가, 방도가.’
백무량은 필사적으로 어둠을 노려보다가, 한 가지를 깨달았다.
“……아!”
진자충의 풍회뇌동이 그러했듯. 요안의 남자가 자아내는 어둠도 의념과 연결되는 접점이 있었다.
좀 더 치밀하고, 복잡하다. 어둠의 흐름을 파악하니 백무량의 머릿속이 단숨에 맑아졌다.
‘풍회뇌동을 따라 하는 데 그치는 게 아니라, 그 너머를 봐야 했던 거야.’
백무량은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흘렸다.
완전히 벼랑 끝에 몰렸다고 생각했다.
단 십 초라도 합공을 당했다면 사로잡혔을 터였다. 그것이 당연했는데, 적에 의해서 실마리를 깨달았다.
백무량의 웃음이 짙어지자 두 마인도 피식 웃고 말았다.
“포기한 건가?”
“그럴 리가.”
백무량은 검을 강하게 쥐지도 그들과 거리를 벌리지도 않았다.
좌선을 통해 심상에 들어서듯이, 심의(心意)를 태청신공에 집중했다.
쿠르릉…….
구름으로 화한 내력이 한곳에 모여들었다. 주변을 어둡게 물들이던 마기가 그곳만은 침범하지 못하고 움츠러들었다.
“이놈…….”
요안의 남자가 표정을 구겼다.
그걸 본 백무량은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었는지 깨달았다.
‘구천화우검의 초식 명이 각각 진의(眞意)를 품고 있는 것처럼, 태청신공의 무학에도 진의가 있을 터인데.’
곤륜파에 옛 기록이 남아 있지 않은 이상 태청신공을 창안한 조사의 뜻은 알 수 없었다.
이제부터는 백무량이 직접 해 나가야 했다.
태청신공을 창안한 조사의 뜻을 헤아리거나, 그와는 다른 길을 찾아 떠나는 여정이 될 것이다.
백무량은 한곳에 모여든 구름을 바라보았다.
‘심의가 태청신공에 통(通)하여 공력이 구름으로 화하니…….’
청운(靑雲).
백무량은 무학의 이름을 정했다. 아주 세속적인 의미였다.
곤륜파가 과거의 영광을 되찾게 만들겠다는 의지.
앞으로 백련교와 같은 마교에게 당하지 않겠다는 각오.
그 두 가지 의념이 청운과 백무량의 단전을 이었다.
‘사부나 사형이 봤다면 도사답지 않다고 꾸짖었겠지.’
언젠가 다른 깨달음을 얻게 된다면 무학의 이름이 달라질 터였다.
백무량이 정한 이름, 청운은 지금의 상황을 모면하려는 발버둥에 지나지 않으니까.
그러니까 지금은 이것으로 충분하다.
“단숨에 끝내 주지.”
백무량은 선언하듯 말했다.
쿠르릉!
청운이 백무량의 전신을 집어삼키자 두 마인은 마기를 끌어 올렸다.
백무량이 어떤 검로를 날려도 단숨에 반응할 작정이었다.
다음 순간.
“……!”
백무량의 신형이 그 자리에서 눈 녹듯이 사라져 있었다.
“젠장, 속았구나!”
석두가 치를 떠는 동안 요안의 남자는 곧바로 백무량을 추격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