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입 (1)
“이대로 눕고 싶다…….”
피곤함이 사라지니 나른함이 찾아온다. 백무량은 흐느적거리며 젖은 몸을 닦았다.
뒤이어 방 중앙에서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지금이 아니면 무공을 정립할 시간이 없었다.
청성파의 도사들과 싸우면서 처음으로 펼친 운검.
그리고 진자충의 풍회뇌동.
두 가지의 무공은 백무량에게 있어 새로운 경험이었다. 특히 풍회뇌동은 파격적이었다.
‘검을 내공과 의념으로 잇다니.’
마치 정기신(精氣神)을 무공에 체화시킨 것과 같다.
거기에서 백무량은 한 가지 가능성을 떠올렸다.
‘태청신공의 내공이 유형화한 구름을 단순히 검에 싣는 것뿐만 아니라 다른 무공에 접목시킬 수 있다면 어떨까?’
그 가능성은 단순한 허상으로 끝나지 않는다. 백무량은 어제 양소천과 묵환의 합격을 깨트렸던 걸 떠올렸다.
운검(雲劍).
진실하게 펼쳐진 호천풍연이 두 자루의 검을 토막 내는 광경은 그야말로 전율적이었다.
그에 비해 진자충에게 펼쳤던 염천일원은 어떻던가.
‘부족해.’
백무량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형(形)에서 벗어나기 시작한 구천화우검의 초반부에 비해 중반부는 터무니없이 부족했다.
그러다 문득, 헛웃음이 나왔다.
검해를 몰랐을 땐 형태에 집착해서, 구천화우검을 판에 박힌 듯이 펼치지 않았나.
‘그것만으로 만족했었지.’
백무량은 이제야 이해했다.
주자령이 어째서 곤륜산에 자주 찾아오라고 했는지, 그때마다 가르침을 내리려고 한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그것이 모두 부족한 제자를 가르치기 위한 사부의 애정이었다. 백무량의 얼굴이 과거에 대한 후회로 젖어 들었다.
그렇다고 과거나 후회에 얽매이진 않았다.
‘지금 당장은 염천일원을 호천풍연처럼 숙(熟)하게 펼칠 순 없어.’
어제 있었던 일처럼 깨달음이 찾아온다면 단기간에 가능할지도 모른다.
백무량도 내심 그런 것을 바람과 동시에 경계하고 있었다.
그릇이 단단하지 않은데 물을 너무 많이 담으면 어찌 되겠는가?
무게를 버티지 못한 그릇이 산산이 쪼개지고 말 것이다.
하물며 당가 지하에 있을 백련교도는 양소천처럼 약하거나, 진자충처럼 손에 사정을 두지도 않을 터였다.
‘하면, 지금은…….’
구천화우검의 초반부를 완벽하게 펼치는 데 집중하자.
백무량은 진자충이 펼쳤던 풍회뇌동을 떠올리며 천천히 내공을 끌어 올렸다. 내공은 곧 구름으로 유형화하며 청명한 기운을 드러냈다.
거기에 심상을 구체화하며 의념을 덧붙인다. 백무량의 이마에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구름을 또 다른 수족으로 떠올려 보는 거야.’
백무량의 노력이 헛되지 않았던 걸까?
구름이 슬슬 움직이기 시작했다. 느릿느릿하긴 했지만, 구천화우검을 발전시킬 단초를 발견한 셈이었다.
그렇게 한 시진 동안.
심력을 모두 쏟았지만 그보다 나아지진 않았다. 백무량은 이마에 맺힌 땀을 훔쳤다.
“역시 하루아침에 되는 건 아닌가.”
백무량의 눈앞이 핑 도는 순간, 문밖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형, 안에 계세요?”
“종휘냐? 들어와라.”
끼이익.
현종휘와 당문영이 방 안으로 들어섰다.
현종휘는 땀으로 젖은 백무량을 보고 흠칫 놀란 듯했지만, 태청신공의 현묘한 기운에 감탄한 표정을 지었다.
그에 비해 당문영은 백무량의 몸에 달라붙은 옷을 보고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제가 괜히 방해한 건 아니죠?”
“방해는 무슨, 그나저나 너희는 뭘 하고 있었느냐?”
“아, 그게…… 소협한테 도움이 될 것 같아서요. 최대한 기억을 떠올려 봤어요.”
백무량은 당문영에게 지도를 건네받았다.
그저 한번 펴 봤을 뿐인데, 눈앞이 어지러웠다.
“개미굴이나 다를 바 없구나.”
“출입구 말고는 나갈 수 없도록 설계했으니까요.”
당문영이 무덤덤한 얼굴로 주의사항을 설명했다.
“검으로 천장을 부수면 엄청난 양의 토사가 쏟아질 거예요. 무게도 무게지만 당가에서 키우는 독지네가 뒤섞여 있을 거라, 해독제를 손에 쥐고 있지 않으면 곧바로 독에 당하기 십상이죠.”
거기까지 말한 당문영이 씨익 웃었다.
“비밀 통로를 모른다면 말이죠.”
“본가의 기밀을 그렇게 당당히 말해도 되는 거야?”
“아무렴 어때요. 지하에 있는 남자한테 당가가 하루아침에 무너질지도 모르는데…….”
곤륜산에서 쓰고 있던 가면은 어디 가고, 여걸이 눈앞에 있는 듯했다.
백무량은 헛웃음을 머금었다가 금세 지웠다. 사뭇 밝게 말하긴 했지만 당문영의 눈동자엔 불안함으로 가득했다.
지금도 당문영은 연기를 하고 있는 셈이다.
어떻게든 잘 해결되리란 희박한 희망을 품고서. 백무량의 표정이 순간 진지해졌다.
“청룡대에 당분간 몸을 의탁하고 있거라.”
“알겠어요.”
냉큼 대답한 당문영과는 다르게 현종휘의 안색은 편치 않았다.
“당가에 가는 것 말고도 도울 방법이 있다면서요.”
현종휘가 백무량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백 마디 말보다 묵직한 항의가 눈동자에 담겨 있었다.
차라리 울상이었다면 달래는 것으로 끝났을 텐데, 백무량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청룡대와 함께 있으란 것이 그리도 싫으냐?”
“……네.”
현종휘의 목소리에서 섭섭함이 그대로 묻어 나온다. 백무량 그것을 알았지만, 마음을 바꿀 생각은 없었다.
“하면 다르게 생각하자.”
“무엇을요?”
“오늘 아침에 나와 싸웠을 때를 떠올려 보아라.”
백무량은 현종휘의 문제점을 짚었다.
“내 권로를 읽었지만, 대응이 미숙하여 패배하지 않았더냐. 그것을 청룡대에서 배울 수 있을 게다.”
“…….”
현종휘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백무량은 그것으로 만족했다. 그렇지 않아도 속이 상한 아이를 꾸짖고 싶진 않았다.
“이해해 줘서 고맙구나.”
백무량은 그렇게 현종휘와 당문영을 청룡대에 보냈다.
***
이틀 뒤.
밤거리가 취객으로 가득해지는 술시, 수염이 거뭇거뭇한 장한 여섯 명이 사천당가로 다가갔다.
그들은 일찍이 백무량에게 도움을 약조했던 대호채였다.
“흑도 놈들이 감히 당가를 몰라보고……!”
이를 알지 못하는 무인들은 대호채를 흑도로 오인했다.
“여기가 어디라고 오느냐! 썩 꺼지지 못할까!”
“아이고, 여기가 무슨 관아라도 됩니까요?”
한 놈의 말에 나머지 녹림도가 낄낄거리며 웃었다.
그러자 당가의 무인이 서늘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놈…… 보름 동안 고통 속에 몸부림치다가 죽고 싶은 모양이구나.”
“아유, 무셔라. 무서워.”
“정녕 관을 보아야만 눈물을 흘릴 놈이로다!”
녹림도의 무례를 보다 못한 무인이 침을 꺼낸 순간.
“으으……끅! 소피를 볼 터이니 기다리라고 하지 않았나?”
호리호리한 남자가 대호채 사이에 섞였다.
무인의 눈에 이채가 스친다. 익히 아는 얼굴이었다.
“관리께서 여긴 웬일입니까?”
“무슨 볼일이 있어서 왔겠나? 다 이 친구들과 놀자고 여기까지 온 게지.”
관리가 엷은 목소리로 웃자 녹림도 몇몇이 벌레를 씹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 모습이 퍽 기이하게 느껴진 무인은 관리에게 다가갔다.
“하면 이놈들이 여기까지 끌고 온 게 아닙니까?”
“끌고 오기는! 이 근처에 괜찮은 홍루가 있다고 해서 왔거늘!”
“홍루라?”
무인의 눈이 가늘어졌다. 사천당가라면 두려움에 벌벌 떠는 흑도 놈들이 본가 근처에 홍루를 세웠을 리가 없었다.
장한들이 관리에게 거짓말을 친 게 분명하다.
무인은 동료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이를 지켜보고 있던 다른 문지기가 독침을 매만졌다.
“이런, 개씹…….”
무례를 범했던 녹림도가 욕지거리를 중얼거렸다.
이대로라면 잡히고 만다. 흑풍도가 다급히 앞으로 움직였다.
“어르신, 소피를 다 못 보고 오셨다지 않았습니까?”
“그랬지?”
“성도가 나리의 영역이나 마찬가진데, 여기서 시원하게 볼일이나 보심이 어떻습니까?”
제정신이었다면 눈을 번쩍 뜨고는 흑풍도를 꾸짖었을 관리였다.
하지만 한계 이상으로 마신 탓인지, 관리는 눈조차 제대로 뜨지 못했다. 여기가 사천당가인지도 모르는 눈치였다.
흑풍도가 황급히 외쳤다.
“나리가 볼일 좀 보겠다는데 덩치 큰 것들이 뭘 하고 있느냐! 어서 가려 드려라!”
“예!”
눈치 빠른 녹림도가 곧바로 관리 뒤로 붙었다. 술에 취한 관리는 그저 지금의 상황이 즐거울 뿐이었다.
“허허, 잠깐이나마 나를 두고 갔던 무례는 이걸로 잊어 주도록 하지!”
“감사합니다, 나리!”
“하지만 미리 약조했던 건…….”
“당연하지요. 나리께 드리는 돈이라면 천금, 만금이어도 아깝지 않습니다.”
“좋아, 좋아.”
관리가 허리에 손을 가져가자, 당가의 무인들이 크게 기겁했다.
차라리 무인이라면 단숨에 기절시키거나 죽였겠지만, 관인은 함부로 건드릴 수 없었다. 하물며 본가가 위치한 성도의 관인이라면 더더욱 그러했다.
“이런 정신 나간 것들이……!”
관리가 물러나면 흔적 하나 남기지 않고 독살시키리라.
살심을 품은 무인들이 노려보자, 대호채 모두가 시선을 슬슬 피했다.
그들은 동시에 한 아이의 얼굴을 떠올렸다.
‘우리가 떼죽음을 당하기 전에 어떻게든 해 주겠지……?’
곤륜신성 백무량.
지금쯤이면 그 아이가 담벼락을 넘었을 터였다.
***
“후.”
담장을 넘은 백무량은 줄과 갈고리를 회수했다.
짐이 다소 많아지긴 했지만, 신법으로 넘었다가는 소음이 발생할 터. 위험할 가능성이 높은 건 최대한 배제해야 했다.
일차적인 목표는 지하에 침입하기 전까지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는 것이다.
자세를 낮춘 백무량이 주변을 살폈다. 주변이 완전히 어두워져, 촛불을 제외하고는 어두컴컴했다.
잠행하기에는 최적의 조건이다.
‘평소라면 이렇게까지 감시가 느슨할 리가 없지만…….’
백무량의 시선이 잠시 정문으로 향했다.
“이런 근본도 없는 녹림도 새끼들이!”
“어허, 그만 싸우시게나!”
요란한 고성이 오가는 소리가 귓전을 스친다. 백무량은 씩 웃고는 비밀 통로가 있다던 호수로 다가갔다.
청명한 수면 위로 달빛이 고요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흐읍.”
숨을 머금은 백무량이 물속으로 들어서니.
당문영이 말했던 대로 수압으로 막힌 문이 밑바닥에 깔려 있었다.
유일하게 안채 외부에 있는 비밀 통로라고 했던가.
백무량은 문고리를 조심스럽게 붙잡았다.
스륵, 스르륵…….
호수의 물이 빠지지 않게끔, 최대한 빠르게.
태청신공을 운용한 백무량이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그렇게 생긴 조금의 틈으로 단숨에 비집고 들어갔다.
촤아악!
호수의 물이 바닥을 두들겼다.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는 소음이라지만, 백무량의 내심은 크게 떨리고 있었다.
‘혹여나 백련교도가 먼저 들었을지도 모른다.’
백무량은 기감을 사방에 퍼뜨렸다.
최소한 일다경은 가만히 서서 주변을 감시할 생각이었다.
지금처럼 지하에 처음 들어왔을 때.
그때만 조심하면 두려워할 건 백련교도밖에 없으리란 판단이었다.
“…….”
일다경 후, 긴장감에 젖은 백무량은 차분히 백선신검을 매만졌다. 봇짐 안에 챙긴 물건들도 떠올렸다.
당문영에게 받은 여분의 해독제와 줄, 갈고리…… 미끄럼을 방지하기 위한 백석 가루와 은침까지.
모든 것을 헤아린 백무량이 지하의 지도를 폈을 때였다.
“당가의 직계에게 받은 겁니까?”
“……!”
옆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백무량은 황급히 운중용형보를 펼쳐 뒤로 물러났다.
콰앙!
벽면이 무너지며 주먹이 모습을 드러냈다.
권갑을 끼고 있지 않았음에도 주먹의 크기가 투구를 쓴 병사의 머리만큼 컸다.
피하지 않았다면 단번에 관자놀이가 뭉개졌을 터였다.
“너는 누구냐?”
백무량의 질문에 남자가 전신을 드러냈다.
금강역사를 방불케 하는 근육과 칠 척에 가까운 체구.
전생과 현생을 통틀어도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시체가 될 사람에게 남길 이름은 없습니다.”
남자의 목소리에는 고저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