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검해-64화 (64/275)

입성 (5)

바람을 머금은 비검이 번개처럼 쏘아진다. 비검이 노리는 목표는 백무량의 급소뿐이었다.

백무량은 눈을 부릅뜨면서 백선신검을 휘둘렀다. 시시각각 불똥이 튀며 비검의 검로가 틀어진다. 하지만 진자충의 노림수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검이 허공을 노니는 동안 몸은 무얼 하겠나.]

진자충은 희소를 머금은 채 백무량에게 파고들었다.

왼발을 축으로 오른 정강이를 크게 휘둘러, 풍삼퇴(風三腿). 백무량의 수구혈과 기해혈, 대퇴를 향해 휘둘러졌다.

비검과 퇴법의 조화는 그야말로 완벽했다.

짙은 피 냄새가 백무량의 콧등을 스치는 듯했다. 수많은 무인이 저 수법에 핏물로 화했을 터였다.

백무량은 호흡을 골랐다. 빈틈이 없어 보이지만, 결국 인간의 무공이었다. 괴력난신처럼 느껴지던 백련교주와는 격이 달랐다.

그러니 능히 파훼할 수 있다.

태청신공의 진기가 백무량의 눈에 깃들었다. 진자충이 펼친 풍회뇌동의 검로가 익숙해질 때까지, 백무량은 서두르지 않고 백선신검을 휘돌렸다.

까가강!

비검과 백선신검이 부딪쳐 만들어진 불똥이 허공에 흩날린다. 비검을 쳐 낸 백무량은 뒤로 물러나며 풍삼퇴를 피했다.

이에 진자충이 도발해 왔다.

[실망이군. 자격을 증명한다고 하지 않았나?]

백무량의 눈살이 한순간 찌푸려졌지만, 진자충에게 달려들지는 않았다.

[선배를 꺾기 위해선 물러나야 했습니다.]

[허세인가?]

[이번에는 제가 선공을 양보하지요.]

백무량은 어깨를 으쓱였다. 아주 얄팍한 도발이었지만, 어린 몸으로 하면 느낌이 다른 법이었다.

진자충의 얼굴에서 웃음이 떠났다. 용기와 오만은 다르다고 했던가. 그가 흩뿌린 기세에서 말이 들려오는 듯했다.

[더 봐주면 안 되겠군.]

파지직!

뇌연결(雷聯訣)의 뇌기가 사납게 폭사했다. 비검에 담긴 내공은 조금 전과는 완전히 달랐다.

그것을 본 백무량은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흘렸다.

‘무림맹의 대주가 이 정도 수준이라면, 대체 척준환은 나를 얼마나 봐준 걸까.’

하물며 진자충은 백무량을 쉬이 인정하지 않았다. 당장 뇌기를 뿜어 대고 있는 비검을 보면 호승심을 불태우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여러모로 귀찮은 상대다.

백무량은 빠르게 검을 휘둘렀다.

꽈아앙!

뇌기와 검이 부딪친다. 백무량의 반격이 전과 다를 것 없자 진자충이 의아하단 표정을 지었다.

백무량이라면 절초를 숨기고 있을 줄 알았다. 그래서 당가에 혼자 침입하겠다고 말했으리라 여겼다.

하지만, 이게 뭔가.

진자충의 얼굴에 짙은 실망감이 내려앉았다.

[여기서 그만하지.]

뇌연결을 머금은 풍화뇌동이 펼쳐진다. 백무량의 손아귀가 금방이라도 찢어질 듯이 백선신검이 흔들렸다.

이대로 후배의 헛된 오만을 꺾어 두자. 진자충이 내력을 비검에 집중시킨 그때였다.

쿠르릉……!

태청신공의 구름이 칼끝에 모였다.

비검이 힘을 견디지 못하고 뒤로 튕겨 나갔다. 언뜻 보면 검환(劍丸)과 형태가 비슷했으나, 본질이 오리무중이었다.

심지어 무림맹의 청룡대주인 진자충이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다.

“무서운지고.”

진자충은 저도 모르게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저 나이에 성강의 경지를 이뤘을 뿐만 아니라, 형식에 얽매이지 않는다니. 나중에 백무량이 얼마나 강해질지 오한이 들었다.

그랬다. 어디까지나 나중이었다.

“분수에 맞지 않는 무공을 펼치려는구나.”

백무량의 뺨을 타고 식은땀이 비 오듯 쏟아진다. 메마른 단전이 비명을 질렀고, 대맥이 쩍쩍 달라붙었다.

그 모습을 본 진자충이 혀를 찼다.

“이대로 내가 허를 찌르면…… 대체 어쩌려고 그러느냐?”

“찌르실 수 있겠습니까?”

“……!”

진자충은 깜짝 놀라서 뒤로 물러났다.

의념을 한계까지 끌어 쓴 줄 알았건만, 육성을 낼 여유가 있다는 게 기이하게 느껴졌다.

“도전할 기회를 드리지요.”

“무엇을 말이냐?”

“이것이 구천화우검 사 초, 염천일원입니다.”

백무량의 말에 진자충은 잠시 침묵했다.

어쩌다 이렇게 어린 후배를 상대로 진심을 다하게 됐는지, 낯이 부끄러웠다. 부끄러움에 현기증이 일 정도였다.

그러나 호승심은 조금도 가라앉지 않았다. 백무량과 싸우면서 고대했던 순간이 눈앞에 있었다.

‘과거 구천검이 펼쳤던 무학, 구천화우검을 목도하게 되다니!’

진자충은 무인의 본능에 충실했다.

뇌연결과 풍회뇌동에 이어 적우염천(赤雨染天)까지!

자신의 무학을 꺼낸 진자충이 앞으로 쇄도했다. 누군가 본다면 청룡대주가 후기지수를 상대로 살초를 펼친다고 기겁했을 장면이었다.

실제로, 틀린 말은 아니었다.

평범한 후기지수였다면 단숨에 고혼이 되었을 테니까.

단지 백무량이 평범하지 않을 뿐이다.

“이건…….”

염천일원과 마주한 진자충이 침을 꿀꺽 삼켰다.

검환과 비슷하지만, 본질이 다르다. 그렇게 느낀 까닭이 눈앞에 있었다.

검경(劍境).

칼끝에 맺힌 검기 덩어리가 백무량의 심상에 따라 변화했다.

그것은 곧, 검해(劍海)였다.

곤륜파 무학의 총화이자 백련교주를 꺾기 위한 기연.

백무량은 염천일원으로써 검해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이를 모르는 진자충이 다른 경지를 떠올렸다.

“대해검(大海劍)인가?”

“아직 완성하지 못한 검일 뿐입니다.”

백무량은 검을 장절하게 휘둘렀다.

***

콰콰쾅!

전각이 무너지는 소리에 청룡대의 무인들이 다급히 뛰어왔다.

“대주님이랑 곤륜신성이 있는 곳 아냐?”

“설마 청성파가 공격해 온 건가?”

그들은 전력으로 신법을 펼치면서 여러 가지 가능성을 점쳤다. 하지만 어느 하나 진실에 도달하지는 못했다.

누가 예상하랴.

백무량의 검 아래에 청룡대주인 진자충이 쓰러졌으리라고.

이를 맨 처음 발견한 무인이 크게 대소했다.

“하하, 대주님도 참, 후배의 기를 얼마나 세워 주려고 이런 짓을 했답니까?”

“기를 세우자고 전각을 부수겠냐?”

“……그럼 아닙니까?”

무인들이 백무량의 눈치를 살폈다.

숨을 헐떡이는 모습에 여유가 없어 보였다. 오히려 쓰러져 있던 진자충의 상태가 훨씬 나았다.

진자충은 그 사실이 너무나도 부끄러웠다.

“만일 저 아이에게 동등한 내력이 있었다면 필패했을 것이다. 나이는 어리지만, 나보다 뛰어난 무인이야.”

“예?”

질 나쁜 농담을 들었다는 듯, 무인들의 시선이 백무량에게 향했다. 여전히 백무량은 호흡을 고르는 데 여념이 없었다.

사실은, 기쁨을 억지로 참고 있었다.

‘답보하는 게 아니라 조금씩 나아가고 있었구나.’

곤륜파를 재건하는 일이 너무 바빠서, 당가에 있는 백련교도와 싸우기 위해서.

여러 가지 일 때문에 수련에 집중하지 못했다. 백무량으로선 늘 불안한 나날이었다.

이러다 전생의 경지에도 도달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공포.

그 공포가 지금은 씻은 듯이 사라졌다.

‘이립에 이뤘던 경지를 약관 이전에 이룰 수도 있겠어.’

검해를 완벽히 소화한다면 괴력난신처럼 느껴지던 백련교주도 이길 수 있으리라는 자신감으로 충만해졌다.

영웅담의 영웅이 이제는 그리 멀게 느껴지지 않는다.

백무량은 히죽 웃으며 진자충을 일으켜 주었다.

“이만하면 자격은 충분하겠지요?”

“사천당가는 무공만으로 통하지 않는다는 걸 아느냐?”

“예.”

“네 무공을 보고 나니 말리고 싶은 마음이 더욱 커지는구나.”

진자충이 진심으로 아쉽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비무를 두고 벌인 약속을 깰 순 없는 법.

청룡대의 무인들이 모두 모인 것을 확신한 진자충은 한 가지를 선언했다.

“청룡대는 곤륜신성이 당가에 침입하는 것을 묵인한다.”

“……!”

“또한, 곤륜신성의 부탁에 따라 그의 사제와 독연화를 보호하도록 한다.”

“대주님, 그게 무슨 말입니까?”

무인들이 대경실색하여 진자충을 설득하려고 했다.

그러한 노력에도 진자충의 결정은 변하지 않았다. 되레 백무량에게 한 번 더 묻기까지 했다.

“하고 싶은 말이 더 있나?”

“제가 침입하는 동안 청룡대가 청성파를 향해 가고 있단 소문을 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이목을 완전히 돌리고 싶단 게지.”

백무량이 고개를 끄덕였다. 진자충은 너털웃음을 흘렸다.

참으로 바라는 게 많은 후기지수였다.

“좋다. 그러하마. 그 대신에…… 반드시 살아 나와야 한다. 알겠느냐?”

“저도 죽고 싶지는 않습니다.”

백무량은 진자충과 마주 웃었다.

***

“흐아아, 녹는다, 녹아.”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근 백무량이 한껏 늘어졌다.

정오부터 칼부림하고 나니 피곤함이 몰려왔다. 대장간에 들르려던 계획도 포기하고 부리나케 객잔으로 올 정도였다.

‘당가 침입까지 앞으로 이틀인가.’

백무량은 진자충의 충고를 떠올렸다.

사천당가는 무공만으로 통하지 않는다. 무림에선 상식처럼 여겨지는 말이었다.

이유야 간단했다.

‘독물.’

엄청난 무공을 지녔다 한들 독에 당하면 일곱 걸음을 넘기지 못한다. 그렇기에 당가의 무인과 싸우는 걸 꺼리는 게 대다수였다.

하물며 그들의 본가라면?

온갖 함정으로 가득할 터였다.

‘한데 나는 본가의 지하에 침입해야 한단 말이지.’

독물의 연구가 이루어지는 금지.

백무량은 당가의 직계마저도 쉽게 출입할 수 없는 곳까지 가야 했다.

‘대체 어떤 놈이기에 당가의 존속까지 위협한단 말인가.’

단서가 딱 한 가지 있기는 했다.

백무량에게 백련교도의 위치를 알려 준 흑마.

그만한 무위를 지닌 마인이 자신의 손을 빌리려고 한다는 게 영 꺼림칙했다.

무엇보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청룡대와 함께 가라고.”

당가의 지하에 있는 백련교도가 그만큼 강하단 뜻이리라.

백무량은 뜨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위험함이 여실히 느껴졌지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성도로 들어올 때 궤짝에 숨어 통과하지 않았듯. 이번 일도 오로지 자신의 의지로 해결하고 싶었다.

‘마인의 의도대로 움직여서야 어찌 곤륜도라고 할 수 있을까.’

백무량의 시선이 천장으로 향했다.

앞으로 다가올 위협을 대비해, 조금씩 꾀를 내 볼 생각이었다.

***

사방이 붉은색으로 칠해진 방.

오로지 백팔 개의 촛불만이 빛을 밝히고 있는 공간에서 요안의 남자가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구석에 있는 남자를 흘낏 바라보았다.

“석두(石頭)야.”

“예, 주인님.”

석두가 몸을 일으켰다. 한데 그의 몸이 특이했다.

기골이 장대하다는 표현으론 부족하다. 그의 근골은 완벽한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마치 불가에 세워진 금강역사처럼, 인간의 범주를 넘어선 외공이었다.

“성도에 불청객이 온 듯하니, 네가 며칠 동안 주변을 살펴 주었으면 하구나.”

“알겠습니다.”

항상 충돌이 일어나는 흑마와는 다르게, 요안의 남자는 석두를 존중하고 있었다.

별다른 이유가 있는 건 아니었다.

“청노(靑老)는 잘 계시나?”

“청노께서 걱정하고 계십니다. 곤륜파가 다시 득세하여 대계에 지장을 줄지도 모른다고 말입니다.”

석두의 목소리에는 고저가 없었다.

이에 요안의 남자는 걱정하지 말라는 듯 빙긋 웃었다.

“걱정하지 말게. 당가를 취하고 나면 곤륜파는 손쉽게 처리할 수 있을 테니까.”

“그동안 제가 잘 보필하겠습니다.”

요안의 남자와 석두가 서로를 바라보았다.

다만 그 눈빛이 곱지만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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