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검해-61화 (61/275)

입성 (2)

침묵으로 잠긴 마차 안에서 눈동자 굴러가는 소리만이 요란했다. 백무량은 피식 웃고는 손을 털었다.

“농담이야, 농담. 어떻게 도사가 되어서 사람을 무자비하게 때리겠어?”

묵환이나 양소천이 들으면 게거품을 물 말이었다.

하지만 녹림도들은 백무량이 살인을 하는 장면을 보지 못했기에 수긍하는 눈치였다.

무엇보다 범죄자라곤 하나 그들 역시 청해인이었다.

백무량이 점혈을 풀자, 녹림도들이 거짓 찬사를 쏟아 냈다.

“여, 역시 운산보를 몰아낸 대협의 풍모십니다.”

“하하, 곤륜신성을 이렇게나마 만나게 되어 영광입니다.”

만일 백무량이 죽이고 싶을 만큼 밉다면 경비병에게 들리도록 소리를 내질렀을 터였다.

백무량은 녹림도들을 둘러보았다.

“부탁 하나만 할 수 있겠습니까?”

조금 전까지와는 달리 백무량이 몹시 진지한 태도를 보이자 녹림도들이 침묵했다.

하물며 그들의 두목인 흑풍도조차 떫은 표정을 유지할 뿐 시비를 걸진 않았다.

백무량은 도탄에 빠진 청해를 구한 영웅이었으니까.

그들의 표정을 본 백무량이 진심을 담아 부탁했다.

“제가 이곳에 있는 걸 다른 사람한테 말하시면 안 됩니다. 이곳, 사천에 운산보를 이용해 청해를 도탄에 빠트린 무리가 있기에 몰래 잠입해야 했습니다.”

“뭐야?”

“그걸 빨리 말해 줬으면 도와주려고 했을 거 아냐! ……감옥에 가는 건 당연히 싫다고 했겠지만.”

자기들은 잡범, 그놈들은 대악인.

죄과의 경중을 따지는 것도 웃긴 일이지만 녹림도들은 생각보다 진지하게 반응했다.

그렇다고 모두 백무량에게 호의적인 건 아니었다.

“태도가 손바닥을 뒤집듯이 바뀌는 놈의 말을 어찌 믿겠느냐?”

“글줄은 읽을 줄 압니까?”

“흥! 무림인이 까막눈이겠냐?”

백무량은 봇짐에서 책 한 권을 꺼냈다.

운산보주가 남긴 비망록. 내용을 본 흑풍도의 눈이 순간 커졌다.

“가짜는 아니겠지?”

“녹림도를 설득하자고 책 한 권을 필사합니까?”

“재수 없는 소리를 하는군.”

흑풍도가 혀를 찼다. 하지만 백무량의 말에는 허점이 없었다.

마치 미리 계획하기라도 한 것처럼……. 흑풍도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우린 너한테 놀아난 셈이구나.”

“아니라고는 못 하지요.”

백무량은 빙긋 웃었다.

송우현과 함께 접경지에 있는 산채를 알아냈고, 대호채의 목에 현상금이 걸렸음을 확인했다.

흑풍도가 청해인인지도 중대한 문제였다.

‘운산보에게 고통받은 청해인이라면 비망록을 보고 무조건 도와주게 될 테니까.’

백무량이 비망록을 봇짐에 다시 넣는 내내, 흑풍도는 뒷머리를 긁적였다가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가만히 있질 못해서 안달이 난 것처럼 보였다.

“우리도 도우면 안 되겠나?”

“풀어 달란 말입니까?”

“아니, 그게 아니야.”

흑풍도가 자기 가슴을 때렸다. 일신의 무공에 자신이 있다는 행동이었지만 백무량이 보기엔 자살행위나 마찬가지였다.

하물며 지금 당장 청성파를 치러 가는 것도 아니지 않나.

백무량은 흑풍도를 진정시켰다.

“괜찮습니다. 저 혼자서도 충분하니 감옥에서…….”

“우리가 감옥에 오래 있을 것 같아?”

흑풍도가 이건 몰랐냐는 듯 짓궂게 웃었다.

“중원도 아니고 변방에 있는 사천성의 관리가 돈을 안 먹을 리가 없지. 안 그래?”

“대장 말이 맞소!”

“그래!”

다른 녹림도들이 흑풍도의 말에 맞장구치니, 백무량은 호기심이 들어서 물었다.

“얼마나 주면 되는데요?”

“우리가 모은 돈 대부분은 줘야겠지.”

“그건 내가…….”

“구덩이가 그거 하나만 있는 건 아니거든.”

백무량은 눈을 끔뻑였다. 역시 녹림도 아니랄까 봐 이런저런 곳에 대책을 마련해 둔 모양이었다.

흑풍도가 백무량의 표정을 보곤 히죽거렸다.

“관리 하나 구슬린 다음에 구덩이 하나 알려 주고, 우릴 풀어 주면 그때 하나 더 알려 주면…… 밑천은 다 날아가겠네. 너희들은 어떠냐? 동의하지?”

“물론입니다, 두목!”

녹림도들이 일제히 큰 목소리로 대답했다. 마차 안이 시끄러워지자 백무량은 반사적으로 검지를 입술에 댔다.

하지만 그들을 보는 시선이 한층 부드러워졌다.

“정말로 뭐든 돕게만 해 달라……?”

“어차피 우린 곤륜신성처럼 무공이 뛰어난 게 아니니까.”

“주정뱅이 짓이라면 무조건 가능하지!”

“야, 그 역할은 내가 먼저 찜했어!”

흑풍대와 그의 부하들이 왁자지껄하게 떠들었다.

운산보를 뒤에서 조종한 대악인을 골려 줄 생각에 무척 기쁜 듯했다.

백무량은 그들을 지켜보며 계획에 빈틈이 있는지 떠올렸다.

써먹을 수 있는 숫자가 열한 명이나 늘어난 이상, 써먹지 않으면 손해였다.

‘……아!’

백무량은 한 가지 빈틈을 떠올렸다.

당문영이 비밀 통로를 말해 준다곤 했으나, 그게 평범한 위치는 아닐 터였다.

최소한 담벼락 주변을 감시하는 무인들을 한곳에 몰아 둘 필요가 있다.

“이것도 할 수 있나요? 그게, 그러니까…….”

생각을 정리한 백무량이 흑풍도에게 말했다.

“뭐어?”

“감옥에서 나와서 죽으라는 거냐!”

계획을 들은 흑풍도와 그의 부하들이 일제히 기함했다.

***

처음에는 개소리는 집어치우라고 말했지만, 이야기를 듣고 나니 나름대로 이해한 모양이었다.

사천당가의 보편적인 인상도 대호채를 설득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역시 그 독물이나 만지작거리는 악독한 것들이 문제였어.”

“무림맹은 뭐 하나 몰라. 쯧쯧.”

그들이 무언가 단단히 오해한 듯싶었지만, 백무량은 굳이 설명하지 않았다.

완벽한 연기를 위해서는 적개심이 필요한 법이니까.

“사흘 뒤, 술시(戌時 : 19~21시)입니다.”

“알겠다. 그 전까지 어떻게든 감옥에서 나가 보마.”

흑풍도와 작별을 나눈 백무량은 마차에서 내렸다.

‘성도는 예나 지금이나 시끌벅적하네.’

사천성의 중심이자 청성파와 아미파의 속가가 즐비하게 있는 곳.

백무량은 행동거지를 조심하며 걸음을 옮겼다.

‘종휘와 합류하기로 한 곳이…… 여기군.’

두보객잔이라.

시성의 이름을 멋대로 빌린 객잔답게, 점잔을 빼는 손님으로 가득했다.

“여기 행간을 보면…….”

“어허. 이 사람아, 겉만 읽어서야 어찌 안에 담긴 진의를 알겠는가?”

문인끼리의 자존심인지 입구에서 서성이는 백무량에게 누구도 눈길을 주지 않았다.

다른 객잔이었다면 입이 더러운 놈들이 시비를 걸어왔을 터였다.

백무량은 송우현의 판단에 내심 감탄하고는 마구간으로 향했다.

“여기 있느냐?”

백무량의 말에 대답하는 건 콧김은 내뿜는 말들뿐.

사람의 형상은 눈을 씻고 봐도 없었다.

백무량은 마구간 안쪽으로 다가서며 입을 열었다.

“종휘야, 나다. 거기 있느냐?”

“……형.”

“그래. 사형이다.”

“여기, 여기예요.”

백무량은 목소리가 들린 곳으로 다가섰다.

“……큭.”

대소할 뻔한 것을 꾹 참았다.

갈기에 윤기가 좔좔 흐르는 말 하나가 여물이 든 상자를 발로 차 대고 있었다.

“내가 조금만 늦었으면 침에 범벅이 됐겠구나.”

“그만 놀리시고 빨리 구해 줘요.”

“그, 급해요.”

현종휘와 당문영의 목소리가 매우 축축했다. 조금만 더 놀렸다가는 토라질 것 같았다.

백무량은 말을 조심스레 밀어냈다.

“워, 워워.”

끼이이…….

상자를 열자 현종휘와 당문영이 허겁지겁 고개를 들었다.

백무량은 웃음을 꾹 참았다.

“어서 나와라, 누가 보기 전에.”

“알겠어요.”

그렇게 두 명 다 상자에서 나왔을 때였다.

드르륵!

마구간의 문이 열리는 소리였다. 백무량의 표정이 단번에 굳어졌다.

자신과 현종휘는 어떻게든 넘어갈 수 있었지만, 당문영은 경우가 달랐다.

‘당문영이 여기 있다는 걸 들킨다면…… 계획이 완전히 망가질지도 몰라.’

백무량의 머릿속이 맹렬히 돌아갔다.

정답은 가까운 곳에 있었다.

“더러워도 참아.”

“……예?”

백무량은 볏짚을 한 주먹 쥐고는 당문영의 얼굴에 문댔다.

온갖 더러운 것들이 미색을 지우고 피부를 검게 물들였다.

당문영은 비명을 지르려고 했다. 그녀가 평생 당해 본 것 중에서 한 손에 꼽을 정도로 치욕적인 일이었다.

하지만 백무량의 표정이 몹시 진지해서, 뿌리칠 수가 없었다.

“허억, 헉. 이 일은 절대 잊지 않…….”

“거기 누구냐!”

점소이로 보이는 매부리코가 백무량을 사납게 노려봤다.

“여기서 몰래 자려고 했느냐?”

“그, 그게…….”

백무량은 눈을 두어 번 끔뻑였다. 백련교주에게 죽은 사부를 떠올리니 저절로 눈물이 나왔다.

“바깥이 너무 춥고 그래서…….”

“감히 어른에게 거짓말을 해?”

매부리코가 코웃음을 치며 세 아이의 옷가지를 가리켰다.

“거지가 옷이 그렇게 깨끗하다고? 하물며 네 허리의 칼은?”

“……!”

낭패다. 백무량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

수도로 목덜미를 내리치면 손쉽게 기절시킬 수 있었지만, 매부리코가 깨어난 뒤가 문제였다.

‘그렇다고 종휘 앞에서 험한 모습을 보이기는 싫은데.’

백무량이 고민에 빠진 순간.

현종휘가 앞으로 나섰다.

“죄송해요…… 형이랑 누나가 가출하면 원하는 걸 얻을 수 있다고 그래서요. 제가 잘못했어요.”

현종휘가 갑자기 코를 훌쩍이자 매부리코가 당황했다.

어딘가 위화감이 있었던 백무량과는 다르게, 현종휘는 정말로 선량해 보였다. 당장 지금만 봐도 죄를 뉘우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만, 그만 울어라. 나도 소란이 생겨 봐야 좋을 게 없단 말이다.”

“알겠어요, 형.”

눈을 쓱 닦은 현종휘가 두 손으로 매부리코의 손을 붙잡았다.

“집으로 돌아갈 테니까 못 본 거로 쳐주면 안 돼요?”

“정말 집으로 돌아갈 테냐?”

“네.”

“거짓말이라면 너희를 잡아다가 채소를 다듬게 시킬 거다!”

“헉!”

매부리코의 으름장에 현종휘가 뒷걸음질 쳤다.

그 모습을 본 백무량과 당문영은 무언가…… 한두 마디로 설명할 수 없는 감정에 휩싸였다.

‘선량함에 가려졌을 뿐, 사실 나보다 임기응변이 뛰어난 게 아닐까?’

백무량은 현종휘의 천연덕스러운 연기에 진심으로 감탄했다. 당문영도 별반 다르지 않은 듯했다.

그때 매부리코의 시선이 백무량에게 향했다.

“형이라는 것이 동생한테 참 좋은 걸 가르치는구나!”

“죄, 죄송해요.”

“집이 어디냐? 일이 끝나면 정말 돌아갔는지 확인해야겠다.”

“서문에 있는 판잣집이에요.”

백무량은 무난한 답을 택했다.

매부리코의 표정이 구겨졌다.

“판잣집이 어디 한둘…… 하아. 됐다. 애한테 이게 무슨 짓이야.”

매부리코가 손을 가볍게 흔들었다.

“썩 꺼져라! 다시 보이면 궁둥짝을 때릴 테다!”

“예!”

백무량은 황급히 현종휘와 당문영을 잡아끌었다.

바깥으로 나오니 당문영이 입술을 삐죽거리고 있었다.

“빨리 얼굴을 씻고 싶어.”

“……그래. 이야기는 내일 하자.”

내일이라는 단어를 꺼내고 나니 짙은 피로가 백무량의 발을 아래로 잡아끌었다.

청성파의 도사들, 대호채, 그리고 입성까지.

오늘 하루만 해도 대체 몇 개의 사건을 헤쳐 나갔는지 모른다.

‘이러다가 키가 안 크면 어떡하지?’

백무량은 실없는 생각을 한숨과 함께 비웠다.

그 대신, 자신을 돕겠다고 한 상인들을 떠올렸다.

“내가 잘하고는 있구나.”

“무슨 말씀이세요?”

백무량은 현종휘의 선량한 얼굴을 쳐다보았다.

자신을 도우러 여기까지 왔을지언정, 성년이 되기 전까지는 종휘에게 어떠한 살인도 시키고 싶지 않았다.

“아냐, 아무것도.”

“백 소협, 어디로 가면 되죠? 피부가 썩는 기분이에요.”

“이쪽이야.”

백무량은 송우현이 미리 연락해 놓은 객잔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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