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검해-60화 (60/275)

입성 (1)

퍼걱! 퍼걱!

녹림도가 땅을 열심히 파긴 했지만, 백무량은 내심 조급했다.

보통 사람이 열심히 판다고 한들 무림인만 못했으니까.

그렇다고 백무량이 직접 팔 순 없었다.

‘앞으로 있을 일을 생각하면 체력을 아껴 둬야 해.’

단전을 폐했다고 한들 묵환과 양소천은 무림인이었다.

백무량이 잠들면 무슨 짓을 벌일지 몰랐다.

적어도 다음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는 긴장을 늦추면 안 된다.

‘괜한 욕심을 부린 건 아닐까?’

백무량의 속내에 후회가 싹텄지만, 구덩이에서 조금씩 드러나는 재물을 보고 말끔하게 지워졌다.

“뭐가 이렇게 많아?”

생각보다 많다는 뜻이 아니다. 많아도 너무 많았다.

백무량은 쇠줄에 엮인 은자를 보고는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저 돈이면 그럴듯한 무관을 사고도 남을 정도였다.

매일 생색을 부리는 송우현에게 적절한 한 방이 되리라.

백무량은 녹림도를 잠시 휴식시켰다.

“녹림도가 언제부터 이렇게 유망해졌지?”

“그게, 사실은…….”

녹림도의 이야기는 간단했다.

운산보가 망한 이후로 청해성 각지에서 상인들이 모든 재물을 싣고 나르는데, 유난히 대호채에 방문이 잦았다는 것이다.

백무량은 녹림도의 등짝을 거세게 내리쳤다.

“방문이 아니라 너희가 찾아간 거겠지!”

“아악! 미친 꼬맹이가!”

“은자가 이렇게 많은 걸 보면 통행세만 받진 않은 모양이야?”

“……그게, 다짜고짜 화살을 쐈으니까.”

“모두 죽었겠구나.”

백무량은 녹림도의 이야기에서 무상함을 느꼈다.

운산보와 결탁한 상인들이 미운 건 사실이지만, 도적놈한테 목숨을 잃길 바란 건 아니었다.

역지사지라고. 자기가 남에게 그랬듯 가산을 빼앗기고 후회하는 삶을 바랐을 뿐이다.

“흑풍도가 시켰느냐?”

“당연…….”

“당연은 무슨. 너희도 좋다고 화살을 쏴 댔을 텐데.”

“아, 아니.”

“이만한 재물이 있으니 흑풍도가 모두 들고 나르지 않을까 걱정도 했을 테고?”

녹림도의 눈동자가 세차게 떨렸다.

“어떻게 그걸 다 알아차렸지?”

“도둑놈 심보가 다 거기서 거기지. 그래도 자기가 잘못했단 생각은 있는 모양이구나.”

녹림도가 고개를 끄덕였다. 백무량은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청성의 도사라는 놈들이 녹림도보다 됨됨이가 뒤떨어질 줄이야. 사부가 보았다면 청성파에 친교를 빙자한 도전장을 보냈을 터였다.

백무량의 시선이 은자 아래로 향했다.

“마저 더 파라.”

“애가 자꾸 반말하니까 기분이…….”

모두 제압만 해 놨더니 녹림도가 자꾸 장난을 쳐 온다.

백무량은 백선신검을 뽑아 들었다.

“어허.”

“예.”

살기를 느낀 녹림도가 곧바로 땅을 파헤쳤다.

다기(茶器)라 적힌 상자와 금불(金佛) 따위가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사람을 얼마나 쥐어짰으면 사천성보다도 변방인 청해성에서 저런 재물을 가지고 있었던 걸까.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했던 게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

백무량은 착잡함을 감추지 못했다.

“그냥 물어만 보는 건데, 녹림도 중에 상인한테 데인 사람이 있나?”

“있기만 하나, 엄청 많지요.”

“……후우.”

백무량은 한숨을 내쉬었다.

세월이 흐르면 얼마나 흘렀다고, 개판이 된 청해성을 보면 속이 시커멓게 변했다.

바로 그때.

녹림도가 구덩이 밑바닥에서 한 권의 책을 꺼냈다.

“채주가 여기서 터를 잡을 때부터 있던 건데, 뭔지 아나……요?”

“보여 줘야 알지.”

그 말에 녹림도가 책을 위로 던지니, 백무량은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완전히 삭을 대로 삭은 고서(古書)였다.

‘약한 바람에도 흩어질지도 모르는데!’

백무량은 황급히 단전의 내공을 운용했다.

휘르르…….

구름으로 화한 공력이 바람을 차단하고 고서를 감쌌다.

나머지는 의념의 문제였다.

손아귀에 떨어질 때까지 얼마나 천천히 움직이는가.

백무량의 이마에 식은땀이 흘렀다. 너무 갑작스레 운용한 탓에 집중력이 떨어질 뻔했다.

“책을 던져?”

백무량의 목소리에서 분노를 느낀 녹림도가 지레 겁먹었다.

“보, 보여 달라길래.”

“됐다!”

백무량은 조심스럽게 고서를 잡았다.

보관 상태가 너무 처참한지라 내용을 볼 엄두도 안 났지만, 표지에 적힌 글자는 그대로였다.

아미복호검(峨嵋伏虎劍).

처음 보는 무공이었지만 아미파와 연관이 있는 건 확실했다.

‘가져다줘도 누군가가 위조한 비급이면 큰일인데…….’

오해라고는 하나 곤륜파의 후기지수란 놈이 위조 비급을 들고 오면 좋지 않은 인상이 길게 남을 터였다.

진짜일 경우엔 천재일우의 기연이라고 볼 수 있었다.

주자령의 제자였던 백무량이 모를 정도면 아미파에서도 귀중한 비급일 가능성이 클 테니까.

‘아미파에 큰 빚을 지우면 나중에 큰 도움이 되겠지.’

백무량은 왼손으로 식은땀을 닦고는 아미복호검을 세심하게 보관했다.

“최대한 챙겨! 이제 산채를 떠날 거다!”

녹림도를 닦달한 백무량은 다음 목적지를 떠올렸다.

그곳은 바로…….

***

“숫자가 생각보다 많구먼.”

녹림도와 두 도사를 합해서 총 열셋.

송우현은 밧줄에 줄줄이 묶인 놈들을 흘깃 곁눈질했다.

하나같이 인상이 더러운 것이 계획했던 대로 술술 잘 풀릴 것 같았다. 특히 도사들은 후천적으로 더러워진 상태였다.

송우현은 백무량에게 물었다.

“멀쩡히 데려올 생각은 없었느냐?”

“몇 번을 죽이고 싶었는지 노야는 모를 겁니다.”

“네가 그런 말을 하면 소름이 돋아. 애면 애다운 구석을 보이란 말이다.”

백무량은 가볍게 웃어넘겼다.

송우현에게 적절한 한 방을 날릴 때였다.

“하하. 그나저나 제가 뭘 가져왔는지 보시겠습니까?”

“싸움밖에 못 하는 놈이 가져오긴 뭘 가져와?”

송우현이 은연중에 드러낸 무시에 백무량은 고개를 까딱거렸다.

그러자 녹림도 몇몇이 품 안에 있던 주머니를 일제히 쏟아 냈다.

촤르륵!

상자는 미처 챙겨 오지 못했다지만, 금불과 은자가 무수히 많았다.

“허어, 이게 무슨?”

“보셨습니까? 이게 접니다.”

백무량은 껄껄 웃고는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물었다.

그러자 송우현의 표정이 조금 심각해졌다.

“근데 계획이 조금 달라졌다.”

“달라지다니요?”

“그게 말이지…….”

송우현이 백무량의 귓가에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백무량은 큰 충격에 빠졌다.

‘종휘랑 당문영이 사천성을 향해 떠나다니?’

백무량의 목소리가 자연히 낮아졌다.

“말리실 순 없었습니까?”

“너도 알잖느냐. 당가의 비밀 통로라면 쉽게 지하로 향할 수 있다는 것을.”

“그러면 저를 기다려서 함께 출발하게끔…….”

“그건 안 돼.”

송우현은 곧바로 단언했다.

이유야 간단했다.

“당문영의 얼굴은 사천성에서 너무 유명해. 너와 함께했다가는 금방 들킬 거다.”

“그럼 종휘가 위험하지 않습니까.”

“내가 그렇게 얼빠진 놈처럼 보이더냐?”

송우현이 손가락으로 마당 구석을 가리켰다.

백무량의 눈이 크게 떠졌다.

청성파를 돕기 시작한 이래로, 항상 두 대 이상을 유지하던 마차가 모두 사라졌다.

“상단을 통해서 보낸 겁니까?”

“짐짝으로 가겠지만, 안전하게 가려면 그 수밖에 없지. 너랑 만날 곳은 미리 말해 줬다.”

백무량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문제가 있었다.

“장문인은 알고 계십니까?”

“그 문제는 네가 조금 도와줘야…….”

“그건 안 됩니다. 노야가 생각해 보십시오. 손자를 위험한 곳에 가도록 도와줬는데 쉽사리 용서할 수 있겠습니까?”

“……하아.”

“아마 고성부터 내지를 겁니다.”

“그래, 다 내 죄지.”

백무량은 대화 중에 떠오른 의문을 털어놓았다.

“근데 마차가 없으면 우리 계획은 어떡합니까?”

“인덕을 쌓았잖느냐.”

“그게 무슨 말입니까?”

송우현이 휘파람을 불자, 산하객잔 뒤쪽에서 마차들이 우르르 나타났다.

백무량은 그들을 몰랐다.

하지만 그들은 백무량이라는 도사를 알고 있었다.

운산보에 의해 줄곧 고통받고 있던 선량한 청해인을 구한 영웅!

나이가 어리다고 한들 백무량을 존경하는 사람은 많았다.

열흘 동안의 장사를 포기하더라도 돕고 싶어 하는 상인들 또한…….

“너를 돕고자 찾아온 사람들이다.”

송우현의 말에 백무량은 마차들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실감이 나질 않았다. 항상 바쁘게 뛰어다녔고, 사람을 경계하거나 의심하다 보니 타인의 감사를 진실로 받아들인 적이 없었다.

그러니 이런 상황에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제가 시간을 헛되이 보내진 않았군요.”

뚱딴지같은 소릴 중얼거리면서, 백무량은 두 손을 모아 올렸다.

“곤륜도 백무량이라고 합니다. 저를 도우러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곤륜도 백무량……? 곤륜신성!”

백무량의 정체를 깨달은 녹림도들이 크게 경악했다.

그런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백무량은 송우현에게 물었다.

“대호채의 목에 걸린 돈은 그대로지요?”

“살려 준다면서!”

구덩이를 파헤쳤던 녹림도가 배신감에 몸부림쳤다. 하지만 백무량은 거짓말을 한 적이 없었다.

“감옥에 있다 보면 자기 잘못을 제대로 깨우치게 될 겁니다.”

“인마! 야!”

“공수래공수거. 죄짓지 말고 사십시오.”

백무량의 말에 송우현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명색이 곤륜의 도사인데 백무량이 저런 말을 하는 게 어째 어울리지 않았다.

백무량 자신도 그것을 알기에, 고개를 슬쩍 옆으로 돌렸다.

“도사들은 여기에 두고 가겠습니다.”

“그래야지. 이 계획을 위해서 밑밥을 많이 깔았으니까.”

백무량과 송우현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

아패현에서 있었던 일을 통해 눈이 흐려진 청성파는 산길과 평야마다 도사를 보내 놓은 상태였다.

이와 마찬가지로 관도(官道)에도 수많은 청성도가 있었다.

무림인이 절대 간섭할 수 없는 곳인 데다, 통과만 된다면 성도에 곧바로 들어서니까.

현종휘나 당문영처럼 상자에 들어간다면 무척 손쉬운 일이었다.

하지만 백무량은 그 방법을 택하지 않았다.

일종의 고집이었다.

‘옳은 일을 하려는데 왜 쥐 새끼가 되어야 한단 말인가?’

백무량은 민낯을 드러낸 채로 마차 안에 타고 있었다. 그러고도 들키지 않을 거란 확신이 백무량에게 있었다.

“다음!”

경비병의 목소리가 들렸다.

백무량의 손아귀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용무는?”

“대호채의 산적들을 잡아 왔습니다.”

마부석에 있는 상인이 대답했다. 백무량은 이대로 넘어가길 고대했다.

“대호채?”

경비병이 뜻밖이라는 듯 되물었다. 이내 마차 안을 살피겠다는 말을 상인에게 통보했다.

흑풍도가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모든 게 네 마음대로 될 것 같았냐?”

“시끄러워.”

다행히 경비병이 들이닥치기 전에 백무량은 모든 녹림도의 아혈을 점했다.

스르륵.

마차의 천막을 들춘 경비병이 인상을 찌푸렸다.

“대호채가 네놈들이렷다?”

“…….”

“대답하지 않는다고 죄가 감춰질 것 같더냐!”

녹림도들이 원망스러운 눈으로 백무량을 노려보았다.

점혈하지 않았다면 곤륜신성 백무량이 여기에 있다고 수백 번은 외쳤으리라.

백무량이 속으로 가슴을 쓸어내리던 그때였다.

“이놈들이 왜 너만 쳐다보느냐?”

경비병이 불쑥 물었다. 백무량은 순간 당황했지만, 침착하게 대응했다.

“제가 밀고했거든요.”

“그래?”

경비병은 녹림도끼리의 배신에 별 관심이 없어 보였다.

그에겐 뻔한 일처럼 보였을 터였다.

산채에서 심부름꾼으로 부려지던 아이가 남의 힘을 빌려 탈출했다는 이야기는 변방에선 제법 흔했으니까.

스르륵, 탁.

경기병이 천막이 닫으니 어둠이 찾아왔다.

“누가 먼저 맞을 테냐?”

백무량이 주먹을 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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