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검해-62화 (62/275)

입성 (3)

다음 날.

“끄어어어…….”

백무량은 잠에서 깨어났다. 상반신을 일으켜 눈을 비비니 환한 햇볕을 얼굴을 두드리고 있었다.

어제 쏟은 심력이 컸던 걸까.

한참 동안 고개를 꾸벅이고 나서야 백무량이 침소에서 일어났다.

“일어나셨는지요?”

때마침 문밖에서 들려오는 옥음에 백무량은 대답했다.

“다른 사람은 어떻습니까?”

“일 층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내가 제일 늦었군.”

백무량은 간단히 세면하고는 일 층으로 내려갔다.

현종휘와 당문영, 그리고 어제 처음으로 만난 중년인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많이 피곤하셨나 봐요?”

당문영의 눈웃음에 백무량은 피식 웃었다.

“얼굴은 잘 씻었고?”

“누구 덕분에요.”

당문영이 새초롬한 표정을 지었다.

그것으로 백무량은 그녀가 지난밤 얼마나 얼굴을 빡빡 씻었을지 짐작할 수 있었다.

“여기, 밥이 잘 나온대요.”

현종휘는 늘 그렇듯이 밝아 보였다. 식탁에 놓인 음식을 보면서 젓가락을 매만지는 모습이 귀엽게 느껴졌다.

‘저런 애가 어제는…… 대체 언제 그런 걸 배운 거야?’

헛웃음을 터트린 백무량은 중년인을 바라보았다.

“도와주신 덕분에 잠을 편안히 이룰 수 있었습니다.”

“괜찮습니다. 감우상인께서 값을 치르셨으니까요.”

송우현의 상명(商名)을 언급한 중년인은 젓가락을 들었다.

살집이 적당히 붙은 얼굴에 비단 혁대.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상인처럼 보였다.

하지만 송우현이 미리 말해 주었다.

중년인은 만금상단에 속한 상인이라는 것을.

‘우리가 도착한 당일에 객잔을 빌렸다고 했었지?’

지금쯤이면 객잔 주인은 강 위에서 풍류를 즐기고 있을 거라며, 중년인이 어젯밤에 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백무량은 천연덕스럽게 중년인에게 말을 붙였다.

“저를 도우러 오셨다고 들었는데, 이름이 어떻게 되시는지요?”

“…….”

중년인이 백무량에게 보라는 듯이 얼굴을 꼬집었다.

기이할 정도로 길게 땅겨지는 피부.

백무량의 표정이 굳었다. 그가 말하려는 바가 무엇인지 단번에 깨달았다.

“깊게 간섭하고 싶지 않다는 겁니까?”

“상인은 적을 만들지 않는 게 최선이라고 하지요. 저에겐 당가나 청성도 귀중한 손님입니다. 물론 감우상인께서 부탁하신 일엔 적극적으로 움직일 겁니다.”

“당가와 청성을 거스르지 않는 방향으로만 돕겠다?”

“이해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옛날의 백무량이었다면 자리에서 당장 일어났을 터였다.

하지만 지금은 생각이 달랐다.

“며칠 동안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만금상단에 속한 상인이니만큼 가진 능력이 뛰어날 테고, 원칙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뭐든지 돕겠다고 했다면 되레 중년인을 의심해야 했다.

‘말만 그럴듯한 어중이떠중이거나 중요할 때 뒤통수를 칠 배신자라는 뜻이니까. 당분간은 믿어도 되겠어.’

백무량은 그런 내심을 드러내지 않았다.

굳이 중년인에게 신뢰를 보여 봐야 좋을 게 없었다.

곤륜파에 애착을 가진 송우현과는 달리, 중년인은 엄연한 타인.

근거 없는 포부나 신뢰를 믿을 사람이 아니었다.

‘이 판은 청성이나 당가가 아니라, 내가 주도하고 있다는 걸 알려 주면 자연히 넘어오겠지.’

생각을 정리한 백무량은 중년인에게 물었다.

“식사 중에 대화를 나누어도 되겠습니까?”

“편하신 대로 하시지요.”

중년인의 표정은 인피면구에 가려져서 보이지 않았다.

***

“저, 저희가 하는 일을 왜…….”

주방에 들어선 점소이가 크게 당황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하루 동안 객잔을 빌렸다는 중년인이 설거지하고 있었으니까.

“내가 하지.”

“하이고! 제가 하겠습니다요!”

재빨리 달려간 점소이가 물에 손을 집어넣던 찰나였다.

“내가 하겠다는데 무슨 참견인가?”

중년인은 점소이를 어깨로 밀쳤다.

선을 넘지 마라. 중년인의 싸늘한 눈초리에 점소이가 침을 꿀꺽 삼켰다. 그는 자신의 눈치를 살피다가 밖으로 나갔다.

고요가 중년인을 감쌌다.

쏴아아…….

달그락거리는 소리와 찬물의 촉감이 복잡한 머릿속을 씻어 주고, 들떴던 마음을 차갑게 만든다.

중년인에게 있어 설거지는 일종의 무장(武裝)이었다.

‘처음에는 뭐 이런 버릇이 들었나 싶었지만.’

지금은 나름대로 만족하고 있었다.

큰돈을 가진 상인답지 않게 소탈하단 소문이 돌았고, 실제로 이득을 보기도 했다.

설거지가 절반 정도 끝났을 때쯤.

중년인은 며칠 전에 품었던 생각을 떠올렸다.

‘미친 줄 알았지.’

솔직하게 말해서, 중년인은 처음에는 만금상단의 판단을 의심했었다.

상계에서 은퇴한 감우상인을 도와주러 가라니.

만금상단에서 자신을 심부름꾼으로 여기는 것 같아 더더욱 불쾌했지만, 송우현에게 상황을 듣고 나서 생각이 달라졌다.

‘만금상단 내부에서 이 건을 과소평가하고 있었어.’

빠드득.

중년인은 대접에 묻은 기름을 힘줘서 닦아 냈다.

사천당가에 닥친 위협, 곤륜파와 청성파 사이의 다툼, 곤륜파를 돕기 위해 온 청룡대.

어느 하나 가볍지 않았다. 특히 청룡대와 안면을 틀 수 있다면 대박을 터트릴 수 있었다.

‘그러니까, 적당히 애들 비위나 맞춰 주자.’

하지만 그런 마음은 백무량과 식사를 마친 후 완전히 사라졌다.

“사천당가에 빚을 지우겠다니…….”

발상이 달랐다. 누가 생각하더라도 곤륜파가 당가에게 도움을 받으면 받았지, 반대라고는 생각하지 않을 터였다.

중년인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그 웃음이 점차 커지더니 종국엔 앙천대소하고 말았다.

백무량이 헛꿈을 꾸고 있다고 생각해서?

그게 당연한데, 아니었다. 백무량에겐 계획이 있었다.

‘만일 실패하더라도 큰 손해는 아니야.’

청성파의 부정이 담긴 기록.

그것 하나만으로 강서 무림의 판도가 달라질 테니까.

중년인은 곤륜파와 청성파를 두고 셈했다. 당장은 곤륜파가 약소했지만, 그렇기에 투자할 가치가 있었다.

하물며 지금의 청성은 곪아 가고 있지 않던가?

‘가만히 두어도 썩을 곳이다. 그러니…… 이번 기회에 새로운 상로를 개척한다.’

중년인의 마음이 조금씩 백무량에게 기울었다.

“설거지를 혼자 한다더니만, 왜 갑자기 크게 웃는 거래?”

“기벽(奇癖)이라도 있는 모양이지.”

평소엔 얼굴도 보기 싫던 객잔 주인이 오늘따라 그립다.

두 점소이는 한마음 한뜻으로 중얼거렸다.

“어울리지도 않는 풍류는 그만두고 빨리 돌아왔으면 좋겠구먼…….”

***

객잔 뒤, 공터.

주변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백무량은 직언했다.

“당가엔 나 혼자 가겠다.”

“……네?”

“이견은 받지 않아.”

백무량은 현종휘와 당문영을 빤히 쳐다보았다.

두 녀석 모두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좋게좋게 물러나진 않을 듯했다.

백무량이 눈살을 찌푸렸다.

“각오를 시험하려는 게 아니야. 그냥 물러나라는 거다.”

“아무리 사형이라도 그 말은 들을 수 없어요.”

현종휘가 분명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 목소리에서 백무량은 무인의 각오를 보았다. 그렇기에, 평소처럼 찍어 누를 수 없었다.

‘아이가 이렇게 빨리 성장하는 거였나.’

백무량은 짐짓 노한 듯이 말을 씹어 뱉었다.

“내가 불허한대도?”

“예.”

“이유가 무엇이냐?”

“저는…….”

현종휘의 눈이 불안함으로 흔들렸다.

뜻을 분명히 말하는 것. 그건 현종휘에게 있어 무척 어려운 일이었다.

예전엔 현노윤의 가르침을 따랐고, 지금은 백무량의 등을 좇았다.

자신만의 도(道)를 따라야 한단 말은 귀로만 들었을 뿐, 진정으로 이해하지 못했다.

앞서가는 사람을 뒤따라가는 것이 편하고 좋았으니까.

그것만으로 현종휘는 항상 만족했었는데…….

“언제까지고 등을 볼 순 없잖아요.”

현종휘가 고개를 들었다. 불안함으로 흔들리던 눈빛이 맑게 개어 있었다.

백무량은 그 눈을 보았다.

“내가 언젠가 말했을 거다, 강함 없는 의지는 반드시 꺾이기 마련이고, 약한 무인의 외침은 하찮은 소리로 치부된다는 것을.”

“압니다.”

“나는 지금 네 말이 하찮게 들린다.”

“사형에게 강함을 증명하겠습니다.”

현종휘가 내린 답에 백무량이 기수식을 취했다.

“준비는 되었느냐?”

“곤륜산에서 내려올 때부터 줄곧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

백무량은 부드럽게 웃었다. 온기가 담긴 눈빛에 현종휘가 희미한 웃음을 드러냈다.

그렇게 서로 시선을 교환한 순간.

두 무인이 땅을 박찼다. 재빠르게 선수를 점한 백무량은 주먹을 주저 없이 현종휘를 향해 휘둘렀다.

앞으로 내달리던 현종휘는 찰나 동안 많은 생각을 했다.

두렵고, 무섭다. 백무량이 가진 무력은 현종휘와 비교도 되지 않았다. 어떻게 받아치더라도 부서질 터였다.

‘그래도.’

현종휘가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쿵!

땅을 내리찍은 현종휘는 백무량과 마주 서서, 있는 힘껏. 주먹을 내질렀다.

주먹과 주먹이 부딪쳤다. 백무량의 기세는 변하지 않았지만, 현종휘의 주먹은 아래로 꺾였다.

예견된 결과에 현종휘는 절망하거나 굴하지 않았다.

앞으로 반보. 현종휘가 앞으로 나아가며 팔꿈치를 휘둘렀다. 쩌억 하는 소리와 함께 백무량의 팔뚝이 붉게 물들었다.

“첫 유효타라…….”

백무량의 혼잣말에 현종휘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랬다. 처음이었다, 백무량에게 처음으로 공격에 성공해 본 것이.

현종휘는 들뜨는 마음을 애써 가라앉혔다. 자신을 격동케 하기 위한 말일 터였다.

자신을 흘깃 살핀 백무량의 눈이 둥글게 휘었다.

“기뻐해도 돼.”

“……!”

“싸움이 아직 끝나지 않았을 뿐이지.”

백무량의 발이 현종휘의 발등을 강하게 짓눌렀다. 현종휘의 시야가 고통으로 새하얗게 물들었다. 잔뜩 긴장하고 있던 근육이 저절로 풀리려고 했다.

그랬지만, 현종휘는 귀에 감각을 집중했다.

스슥.

땅바닥이 발에 긁히는 소리, 바람에 나부끼는 옷깃, 백무량의 뜨거운 숨…….

현종휘의 감각이 경종을 울렸다. 세 치에서 네 치, 그 사이에서 최적의 반격을 날려야 했다.

‘어떻게?’

현종휘는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하지만 자신에게는 백무량과 같은 경험이 없었다.

하물며 골목에서 동년배와 싸워 본 적도 없었다.

모든 것이 막막하게 느껴졌다. 시야는 돌아오고 있었지만, 백무량의 일격에 당할 게 자명했다.

‘그래도 나는…….’

최선을 다한 게 아닐까.

현종휘는 갑자기 떠오른 생각에 소름이 돋았다. 자기도 모르게 현재에 안주할 뻔했다.

‘십초지적도 못 되면서 무슨……!’

제정신을 차린 현종휘는 본능에 몸을 맡겼다.

그 모습을 본 당문영의 입술이 쩍 벌어졌다.

“마, 막았어!”

백무량의 주먹이 중간에서 막혔다. 박치기였다. 현종휘의 이마가 백무량의 권로(拳路)를 예측한 셈이었다.

조금 놀라운 광경이긴 하지만, 그뿐이다.

백무량은 현종휘의 복부를 강하게 후려쳤다.

“큭!”

신음성을 흘린 현종휘가 뒤로 물러났다. 백무량이 손에 사정을 두긴 했지만, 현종휘의 다리가 덜덜 떨리고 있었다.

이에 백무량은 선언하듯 말했다.

“종휘야, 네 마음은 정말 고맙고 대견하게 여기고 있어.”

“…….”

“하지만 지금은 나설 때가 아니다. 나중에, 네가 평소에 말했던 것처럼 약관 전에 고수가 된다면, 그때부터 도와도 늦지 않아.”

“그래도, 나는…….”

현종휘가 울음을 참으며 말했다.

“곤륜산에서 보고만 있고 싶지 않았어요.”

“당가에 가지 않더라도 도울 방법은 있어. 그러니까, 울지 마라. 알겠느냐?”

“네. 알겠어요.”

백무량이 서글픈 마음을 다스리는 현종휘의 어깨를 두드렸다.

당문영은 두 도사를 보며 생각했다.

‘한 장로님, 장로님이 틀렸던 것 같아요.’

곤륜운평천하의 위명은 백련교와 함께 사라졌으며, 곤륜신성은 잠시 타오르다 사라질 혜성일 뿐이라고.

한 장로가 했던 말을 이제는 부정해야 했다.

“비밀 통로를 알려 드릴게요.”

당문영의 말에 백무량이 고개를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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