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검해-59화 (59/275)

일거삼득 (5)

“그놈이 떠난 이후 한동안 끔찍한 비명이 들렸다고 합니다. 그것도 한 시진 동안이나요.”

청성의 장문인인 화도인(火道人) 유연걸은 제자의 손에 들린 도복을 빼앗았다.

손가락에서 느껴지는 진득한 촉감, 붉게 물든 색채.

한순간 치솟은 살심이 전신을 휘감는다. 유연걸의 손이 부르르 떨렸다.

“시신은 회수하였느냐?”

“찾을 수 없었습니다. 한데 선발대가 묘한 것을 발견했답니다.”

“묘한 것이라니?”

“위치를 안내하겠습니다.”

제자가 앞장서서 걸었다. 유연걸은 도복들을 보자기에 넣고는 뒤따랐다.

자연스레 살심을 거두니 유연걸의 시야가 넓어졌다.

사천성의 변경인 아패현은 나무가 울창한 곳이었다. 사람이 닦아 놓은 흔적 따위는 없었다.

걸음마다 돌이나 나무뿌리가 발아래 느껴지는 곳.

그야말로 무량청정한 잡목림이었다.

은연히 풍기는 혈향(血香)만 없었다면…….

“천하에 육시랄 놈을 보았나!”

화공이 자신의 그림에 재주를 부리듯. 고목에 핏방울이 호쾌하게 흩뿌려져 있었다.

유연걸은 핏방울을 손으로 더듬었다. 유연걸의 인상이 확 찌푸려졌다.

검에 일부러 피를 묻혀서 휘두른 흔적이었다.

“발견했다는 게 그놈의 행방이렷다?”

“저도 지금 가서 확인을 해 봐야…….”

“허! 청성의 기강이 떨어지기는 했구나! 전대 장문인께 보고를 올릴 때면 항상 두세 번은 살피곤 했거늘!”

“죄송합니다, 장문인.”

제자가 고개를 숙였다.

유연걸은 그 모습조차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도사란 놈이 정수리를 함부로 보이면 되겠느냐? 속발(束髮 : 상투 머리)의 의미를 설명해 주랴?”

“…….”

“대답, 대답!”

“앞으로 조심하겠습니다.”

제자가 진심으로 반성하는 모습을 보이니, 유연걸은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안 그래도 상황이 좋지 않은데 제자마저 정신이 해이해지면 안 될 일이다.

유연걸은 제자의 어깨를 두드렸다. 앞으로 청성의 미래를 책임질 제자이기에 특별히 아끼고 있었다.

“아직 멀었느냐?”

“곧 도착…… 아, 저기입니다.”

제자가 껍질이 조금 벗겨진 나무를 가리켰다. 유연걸은 세류표(細柳飄)를 펼쳐 단숨에 다가갔다.

유연걸의 입에서 한숨이 저절로 나왔다.

“썩을 놈들아, 살아 있기는 한 것이냐.”

손톱으로 나무껍질을 벗긴 걸까.

찢어진 피부와 손톱 조각 따위가 껍질 사이에 박혀 있었다.

유연걸은 욕을 중얼거렸다. 청성의 장문인으로서의 체통은 피에 젖은 도복을 본 순간부터 생각하지 않았다.

“제자야, 너도 보아라.”

“…….”

뒤늦게 나무에 도착한 제자가 눈을 부릅떴다.

청. 대. 룡. 위험. 청성.

나무에 남겨진 넋이었다.

이 대 제자들이 남겼을 흔적은 한 가지를 의미하고 있었다.

청룡대에 의해 청성파가 위험에 처한다.

유연걸은 곧바로 곤륜신성 백무량을 떠올렸다.

“그 육시랄 놈이 청룡대에 기록을 넘겨서, 청성파에 찾아오겠다는 거겠지!”

“그때가 되면 곤륜신성의 목을 칠 수 없을 겁니다. 청룡대가 지켜보고 있을 테니까요.”

유연걸의 살기가 열화(熱火)와 같다면 제자는 차가운 독심이었다.

“아패현과 성도는 거리가 있습니다. 그놈의 신법이 뛰어날지언정 아직은 꼬마이니 내공은 심후하지 않을 겁니다.”

“신중하게 움직이잔 말은 왜 하지 않느냐?”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니까요.”

유연걸은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평소 우유부단하게 보였던 제자에게서 장문인의 재목이 보였다.

그렇게 두 도사가 백무량을 죽일 계책을 세우던 그때.

멀리서 그들을 지켜보는 자가 있었다.

‘지랄들 하네.’

백무량은 나무 위에서 건량을 씹었다.

유연걸과 그의 제자라는 진귀한 구경거리가 있으니 싱거운 건량도 제법 짭짤하게 느껴졌다.

구경거리는 그들뿐만이 아니었다.

“으으…….”

“웁!”

어떻게든 소리를 내려고 발버둥을 치는 묵환과 양소천.

숨쉬기 어려울 만큼 천으로 입가를 싸맸는데도 노력이 아주 가상했다.

백무량은 둘의 귓가에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저들이 물러가면 약을 발라 줄 테니까 진정하라고.”

“우웁!”

“손톱의 상처가 곪으면 무공에 이어 손가락까지 잃겠군.”

그 말에 두 도사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들이 느끼기에 백무량은 마인이었다.

그것도 구전에서나 전해지는 천마. 그런 존재가 아니고서야 저 나이에 이렇게 악독할 수가 없었다.

“잘 보라고. 너희가 남긴 흔적에 휘둘리는 청성의 모습을…….”

백무량은 웃었다.

유연걸과 그의 제자가 허상을 뒤쫓을 모습이 눈에 선했다.

피로 젖은 도복과 손톱으로 쓰인 음절들, 마을 사람들의 증언까지.

셋이나 되는 증거가 이어지면서 오해가 확신으로 굳었다. 만일 유연걸의 자리에 백무량이 있더라도 마찬가지였을 터였다.

‘나나 저놈이나 똑똑하진 않으니까.’

차이가 있다면 오직 하나.

유연걸이 성질이 더럽고 시야가 좁다면 백무량은 더러운 성질을 꾀로 승화시킬 잔재주가 있었다.

그 잔재주는 송우현이라는 조언자를 통해 더욱 발전했다.

백무량은 유연걸이 시야에서 사라지는 것을 보고 나무에서 내려왔다.

툭툭.

백무량이 엉덩이에 묻은 먼지를 털었다.

“장문인에게 구해지는 방법은 이제 사라졌고. 더 하고 싶은 말이 있나?”

백무량의 말에 묵환과 양소천이 고개를 열심히 끄덕였다.

“차라리 죽이라는 말은 하지 마. 뭐, 이미 여러 번 겪어 봐서 알겠지?”

“…….”

두 도사가 침묵으로 대답했다. 어깨를 으쓱인 백무량은 도사들의 입을 싸맨 천을 벗겼다.

“뭐든 하겠다. 살려만 다오.”

체념했다는 듯 묵환이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백무량은 입술을 살짝 씰룩일 뿐이었다.

‘저놈은 쉽게 포기할 놈이 아니야.’

백무량의 시선이 양소천에게 향했다.

“다른 놈은?”

“어차피 이렇게 된 이상 우리가 어찌 살아가겠느냐.”

양소천의 표정이 몹시 음울했다. 사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단전이 망가지고 손톱 뿌리가 다쳤다.

무인으로서의 생은 이미 끝난 셈이다. 그렇다고 백무량이 청성에 가게 둘 리가 없었다.

양소천이 고개를 떨궜다. 음영이 진 그의 얼굴엔 절망만이 가득했다.

그걸 본 백무량은 분노를 잊었다. 헛웃음이 나왔다.

“청성이 사파만도 못한 족속임을 새삼 개안하게 되는구나.”

운산보를 이용해 청해를 도탄에 빠트리고, 어린 도사를 죽이겠다고 장정 셋이 마을 전체를 겁박했다.

잘못된 행동을 해 놓고도 반성이라는 게 없단 말인가.

백무량의 눈썹이 뒤틀렸다.

“정말, 정녕…… 자기밖에 모르느냐?”

분노를 토했지만, 끝엔 한탄이 남았다.

겨우 이런 놈들을 지키고자 곤륜파가 백련교와 싸웠다는 게 후회스러웠다.

아직 쓸모가 남아서 이들을 당장 죽이지 못함이 사부와 사형에게 죄스럽게 느껴질 정도였다.

‘성도에 안전하게 진입하려면 필요해.’

백무량은 당장 양소천의 천령개를 내리찍고 싶은 마음을 짓눌렀다.

그렇다고 저들을 편하게 둘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꽈아악.

백무량은 묵환과 양소천을 밧줄로 묶고서 아패현에서 떠나갔다.

한데 그 방향이 기이했다.

“어, 어디로 가는 것이냐!”

사천성의 성도로 향하는 길이 아니었다.

오히려 반대. 청해성의 험지로 진입하는 소로였다.

“둘 중 하나가 죽을지도 몰라.”

그러니까, 백무량은 뒷말을 덧붙이면서 두 도사를 약 올리듯이 웃었다.

“긴장 좀 해야 할 거야.”

“이 망할 애새끼가!”

양소천이 악을 내지르는 한편, 묵환의 눈동자가 낮게 가라앉았다.

백무량의 눈은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

다리를 절뚝이는 외팔이와 그를 부축하는 어린아이라.

대호채의 채주인 흑풍도(黑風刀)는 둘의 얼굴을 살폈다.

‘처음 보는 얼굴인데…….’

녹림도 사이에서 상단이 아닌 외지인은 양날의 검이라 불린다.

명가의 자제일 경우엔 산채가 풍비박산이 나기 마련이고, 어쩌다 운이 좋으면 일확천금을 취하게 되니까.

녹림도라면 늘 후자를 노린다.

그건 흑풍도나 그의 부하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채주님, 아무래도 돈이 많은 관상은 아닌데요?”

“관상을 볼 줄 알면 산적을 접고 좌판을 깔지 그러냐? 하긴, 보는 눈이 그래서야 거짓말로도 돈을 벌긴 글렀어.”

흑풍도는 부하의 실언을 꼬집었다.

“내 보기에 어린놈은 외팔이의 아들일 거다.”

“왜요?”

“눈깔이 있으면 봐라, 좀.”

“……아!”

부하 하나가 어린아이의 허리를 가리켰다. 그제야 다른 부하들도 눈을 빛냈다.

명검은 허투루 봐도 명검이라던가?

검에서 비범한 영성이 느껴졌다. 하물며 손목에 묶인 주머니는 두툼하다 못해 터질 지경이었다.

‘저게 모두 엽전이라고 한들 기가 막힌 한탕이다.’

흑풍도가 오른팔을 들었다. 이에 부하들이 부스럭거리며 자리를 잡았다.

뒤이어 외팔이와 어린아이가 길목 중간에 도달한 순간.

“쏴라!”

허술하기 짝이 없는 화살이 외팔이를 향해 날아갔다.

외팔이가 죽으면 어린아이는 산채에서 심부름꾼으로 써먹으면 그만이었다. 흑풍도는 그런 식으로 대호채를 꾸려 왔다.

하지만 그는 알지 못했다.

언젠가 한 번은 틀리게 된다는 것을.

“각자도생해!”

외팔이를 앞으로 밀친 어린아이가 칼을 뽑았다.

그게 어찌나 자연스러운지 앞으로 뛰쳐나가던 부하 몇몇이 어깨를 움츠렸다.

“무공을 배운 놈입니다!”

“애새끼가 그리 두렵더냐?”

한두 대 쥐어박으면 질질 짤 놈이다.

흑풍도는 콧방귀를 뀌며 풀숲을 헤쳐 나갔다.

아니, 나가려고 했다.

팅!

어린아이가 튕긴 돌멩이가 흑풍도의 미간을 강타했다.

“윽.”

흑풍도의 시야가 단숨에 어두워졌다.

***

“어디 산채 구경 좀 할까?”

백무량은 휘파람을 불며 이곳저곳을 둘러보았다.

정말 오랜만이었다.

“옛날에는 내 얼굴만 보면 도망을 가서 이러기가 쉽지 않았는데 말이야.”

“미친놈…….”

녹림도의 중얼거림에 백무량이 다가갔다.

“약탈품은 어디에 보관하지?”

“당연히 채주실…….”

“산적 놈들 수법을 내가 모를 줄 아느냐? 따로 두는 데가 있잖아.”

녹림도에겐 최악의 경우가 있다.

산채를 점령당하는 때.

그게 흔치는 않지만, 관군의 토벌령이 내려질 것을 대비해 딴 구멍을 파 놓기 마련이었다.

요컨대 채주가 따로 챙긴 뒷돈과 귀중한 재산을 따로 두는 셈이다.

백무량이 가만히 쳐다보자 녹림도가 욕을 중얼거렸다.

“어떤 집구석이면 이런 새끼가 태어나지.”

“입으로 몸을 해하고 싶은 거냐?”

백무량은 백선신검을 뽑았다.

역시나 녹림도에겐 특효약이었는지. 녹림도가 비굴한 표정을 지었다.

“내, 내가 잘못했다.”

“얼른 말해.”

“저쪽으로 쭉 가면 나오는 벼락 맞은 나무를 파. 상당히 깊으니까 도구가 필요할 거야.”

녹림도의 대답에도 백무량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애초에 백무량이 움직일 필요가 없었다.

“내가 하리?”

“산적 놈 그 자체네. 쌍놈.”

녹림도가 도구를 챙기는 동안 백무량은 다른 사람들을 모두 꽉 묶었다.

“대체 무슨 생각인 거냐?”

묵환이 서늘한 목소리로 물었다.

내공이 없는 몸으로 눈먼 화살에 맞을 뻔했으니 기분이 좋진 않을 터였다.

백무량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절대로 안 알려 주지.”

“끝까지 농락을…….”

“살려만 달라고 했던 놈이 지금은 팔팔해 보이는 게 보기가 좋네.”

그 말에 묵환이 입을 꾹 닫았다.

떠들어 봐야 자기가 손해인 것을 깨달은 모양이다.

백무량은 묵환의 정수리를 거칠게 매만지고는 녹림도를 재촉했다.

“뭐 해, 얼른 가지 않고?”

“꼬맹이, 우린 살려 주는 거냐?”

“물론이지.”

백무량의 즉답에 녹림도가 멍청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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