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거삼득 (4)
세 무인이 동시에 땅을 박찼다.
누가 옳냐. 그런 것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백무량은 묵환과 양소천의 정체를 알아차렸고, 묵환과 양소천은 백무량이 가졌다는 기록이 필요했다.
단지 그뿐인 싸움. 서로가 서로에게 덤벼들었다.
일촉즉발의 순간.
누가 선공을 취했는가.
파지직!
백무량의 검에서 뇌기가 솟구쳤다. 분광검결의 검로가 두 도사를 서로 멀어지게 만들었다.
백무량은 두 도사, 묵환과 양소천을 흘겼다.
‘선공으로 한 놈의 목을 취한다.’
그것을 이루기 위해 무인의 감각이 명멸(明滅)했다.
순간을 수십으로 쪼갠 찰나. 백선신검의 검로가 한쪽으로 틀어졌다.
이에, 크게 한 걸음.
백무량이 나아간 걸음이다. 멀었던 간격이 단숨에 좁아져, 양소천의 눈동자가 커다래졌다.
“안 돼.”
육감이 경고를 발했으나 이미 늦었다. 양소천의 몸이 반사적으로 수세를 취했으나 결과는 명약관화했다.
주비창처럼 목이 베이는 것으로 끝이다. 유언 하나 남기지 못하겠단 생각에 양소천이 실소를 터트렸다.
백선신검의 칼끝이 양소천의 시야를 가득 채우는 순간.
쩌엉!
쇳소리가 양소천의 귀청을 짓이겼다. 사선에서 나타난 청송검이 백선신검을 막은 탓이었다.
“얼빠진 놈 같으니!”
옆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평소에 그토록 외팔이라고 무시했던 묵환의 목소리였다.
‘염병할.’
양소천은 자세를 갖췄다.
“풍뢰검으로 선을 취하마.”
“누구 마음대로.”
백무량은 그들을 비웃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곤륜산에서 했던 수련을, 업혀 오면서 예리해졌던 오감을, 태청신공의 절학을 어떻게 체화시키면 될지를.
모든 것을 떠올린 백무량은 눈을 한 번 감았다가 떴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진실하게 펼쳐진 호천풍연(昊天風煙)은 운검이라 불려도 모자람이 없다고 했지.’
백무량은 주자령의 가르침을 떠올렸다. 그때는 단순히 전설이라 여겼다.
어떻게 검기가 구름처럼 변하겠냐고 웃어넘기면서.
하지만 지금의 백무량은 안다.
‘나한테 정답이 있는데 헤매고 있었다니.’
쿠르르…….
백무량은 태청신공의 공력을 구름으로 유형화했다.
“……허!”
양소천의 입이 쩍 벌어졌다. 하지만 백무량을 향해 휘두른 검첨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건 묵환 또한 마찬가지였다.
지금이 아니면 죽일 수 없다는 생각이 두 도사의 뇌리에 벼락처럼 내리꽂혔다. 필살의 각오가 검기를 더욱더 날카롭게 벼렸다.
“…….”
백무량은 눈앞까지 짓쳐든 칼날 앞에서도 초연했다.
유형화한 구름을 심상에서 수련한 의념과 감각으로 깎아 낸다. 오직 그것에만 집중했다.
생사투라는 칼날 위에서 작두를 타는 꼴이었다. 하지만 백무량은 포기할 수 없었다.
지금이 바로 깨달음의 순간이었으니까.
“순순히 목을 내놓아라!”
두 자루의 검이 서로 다른 방향에서 백무량의 기해혈과 명문혈을 향한다.
양소천과 묵환의 합격은 그야말로 완벽에 가까웠다.
다만, 기량 자체가 다를 뿐.
백무량의 입술이 가늘게 열렸다.
“호천풍연.”
의념을 담은 한마디가 구름을 검의 형상으로 벼린다.
운검을 본 묵환의 눈빛이 강하게 흔들렸다.
세상 사람이 말하는 검기나 검강과는 달랐다. 오로지 곤륜파의 무학으로만 이루어진 무언가였다.
그렇게 벼려진 운검이 두 자루의 검과 얽히더니…….
투두둑!
검들이 일제히 토막 나 바닥을 뒹굴었다.
“커헉!”
“큽!”
양소천의 눈에서 실핏줄이 터지고, 묵환은 울혈을 뱉었다. 합격에 실은 내공이 역류하면서 생긴 내상이 무척 심각했다.
그러나 둘은 물러나지 않았다.
아니, 정확하게는 인정할 수 없었다.
더러운 짓까지 하면서 배운 청성파보다 곤륜파의 무공이 더욱 뛰어나다니. 그래서는 안 됐다.
양소천의 충격은 묵환보다도 심했다.
“마공이다! 세외의 마공이 아니고서야 불가능한 일이야!”
“…….”
더 이상 들을 필요가 없다.
백무량은 허리를 크게 비틀면서 단숨에 검을 휘둘렀다.
스걱!
묵환과 양소천의 옷이 피로 물들었다.
“허, 허억!”
촌로는 죽은 줄만 알았던 백무량이 멀쩡하게 돌아온 것을 보고 기절초풍했다.
그를 업어 갔던 청년이 말하지 않았나.
마을을 겁박하던 무림인이 사실 청성의 도사였다는 것을.
숫자가 무려 셋이나 되니 어린 도사인 백무량은 당연히 죽은 줄 알았거늘.
“어디의 고인이십니까?”
자연히 촌로는 백무량이 반로환동한 고수라고 생각했다.
그게 아니면 그들에게 살아 돌아온 것이나, 아까 시선이 마주쳤을 때가 설명되지 않았다.
그러나 백무량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오해십니다. 그러니 말씀을 편하게 하시지요.”
“제가 어찌 편하게 대하겠습니까. 마을을 위해서라고는 하나 생사람을 사지로 보냈는데, 백번 사죄해도 부족하지 않지요.”
촌로는 단어를 신중하게 골랐다.
백무량이 저렇게 웃으며 말해도 한순간 심기가 뒤틀리면 기꺼이 칼을 휘두를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촌로의 목소리가 한층 더 공손해졌다.
“이번에는 따스한 밥을 대접하겠습니다.”
“쉬고 있을 시간이 없습니다.”
“예?”
백무량이 본색을 드러내는 게 아닐까. 촌로는 길게 기른 눈썹을 들썩였다.
하지만 그것은 기우에 불과했다.
“마을을 겁박했던 도사들과 연락하는 이가 분명히 있을 터인데, 제가 여기 남아 있으면 마을에서 싸우게 될 겁니다.”
그렇게 되면 마을이 싸움터가 되고 만다.
백무량은 촌로의 기분이 상하지 않게끔 설명했다.
“그러니 노인장과 마을 사람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게끔 하나를 드리고 갈 생각입니다.”
백무량이 건넨 보자기에서 퀴퀴한 냄새가 났다.
촌로가 그것을 조심스럽게 열어 보니…….
“……이건!”
피로 붉게 물든 도복이 세 벌.
굳이 설명을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묻지 않으면 안 될 물건이기도 했다.
촌로는 떨리는 눈으로 백무량을 바라보았다.
“베신 겁니까?”
“곤륜신성 백무량이 했다고 말해 주십시오.”
“시신은 어디에 있습니까?”
“시신은…….”
백무량이 말끝을 흐리니 촌로의 등허리가 땀으로 축축하게 젖었다.
소년으로 보이는 도사가 사람을 죽이고도 저렇게 태연자약하니 등골이 오싹해질 수밖에 없었다.
‘운산보를 단신으로 멸문시켰다는 말이 허언이 아니었구나!’
한편으로는 안심이 되기도 했다.
마을을 겁박한 청성의 도사들과는 다르게 백무량은 마을의 안위를 진심으로 걱정하는 것처럼 보였으니까.
촌로가 어색한 웃음을 보이자 백무량이 입술을 어물거렸다.
“제가 이 근처 지리를 몰라서 정확히 모르겠습니다.”
“아닙니다. 저희가 모르는 쪽이 더 안전하겠지요.”
백무량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촌로에게 등을 돌렸다.
마을을 나가는 동안, 백무량의 얼굴에 씁쓸한 미소가 번졌다.
“예전에는 도사와 촌락민이 허물없이 지냈었는데…….”
시대가 변한 탓일까.
백무량은 하늘을 잠시 바라보았다가, 미리 봐 두었던 장소로 향했다.
“끄으으…….”
“차라리 죽여라.”
그곳에는 묵환과 양소천이 벌거벗겨진 채 묶여 있었다.
***
“송 노야, 말을 빌려주시면 안 될까요?”
송우현은 갑자기 찾아온 꼬맹이들을 가는 눈으로 흘겨보았다.
하나는 백무량의 사제인 현종휘. 다른 애는 당가에서 독연화라고 불리는 당문영.
가뜩이나 돌대가리인 우상벽을 가르치느라 바쁜데.
송우현의 손가락이 출구를 가리켰다.
“소꿉놀이하려거든 진짜 말이 아니라 목마(木馬)를 가지고 놀아라.”
“백 사형이 위험하다고요!”
“무량이가? 왜?”
“사천성은 괜찮아도 성도엔 당가의 눈이 산재해 있대요. 그래서 언제 하독을 당해도…….”
송우현은 현종휘 옆에 있는 당문영을 흘낏 바라보았다.
보아하니 저 애가 현종휘를 이곳까지 데려온 것이리라.
송우현의 표정이 심드렁해졌다.
“무량이가 당하겠대?”
“네?”
“그놈이 일부러 당하는 게 아닌 이상 독으로 쓰러질 일이 없다는 게다.”
“그걸 어떻게 확신하시죠?”
또랑또랑한 목소리에 송우현의 시선이 다시 당문영에게 향했다.
재기가 넘치는 것으로 사천에서 유명하다던가.
송우현은 인상을 구길 뻔한 걸 애써 참았다.
“얘야, 네가 몸담은 가문에 자긍심이 크다는 건 알겠다. 교육도 그만큼 받았을 거고, 같은 나이대 아이보다 조숙하단 자각도 있겠지.”
“…….”
“그렇다고 다른 문파를 얕잡아 봐도 된다는 건 아니다.”
“전 그런 생각 한 적 없어요.”
아니기는, 표정에서 생각이 다 드러나는데.
송우현은 턱까지 치솟은 말을 꾹 참고는 나긋나긋한 어조로 말했다.
“당가가 성도를 장악했다고 치자, 그러면 거기 있는 관인은 다 눈이 옹이구멍이더냐?”
“……예?”
“대낮에 무림인이 성도에서 살인을 벌여도 가만히 지켜만 보냐고.”
“그, 그건 아니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요.”
“무슨 상황?”
“그게 그러니까…….”
당문영의 이야기는 송우현이 듣기에도 무척 심각했다.
겨우 칠 년 만에 당가를 집어삼킨 괴물이라면 백무량도 안전할 순 없었다.
다만…….
“이 조그만 녀석들아, 내가 너희들의 뭘 믿고 보내란 말이냐?”
당장 현종휘를 보내면 현노윤이 진노할 터였다.
하물며 당문영은 어떤가. 당가의 금지옥엽으로 키워진 그녀의 마지막 행적이 자신이라면 어떤 문초를 당할지 몰랐다.
그런데 두 아이의 칭얼거림이 생각보다 심했다.
“보내 주세요!”
“비밀 통로를 백 소협한테 알려 드리면 안전해질 거예요!”
송우현은 당문영의 말에 헛웃음을 터트렸다.
얼마나 자신을 설득하고 싶으면 직계 자손만이 안다는 당가의 비밀 통로를 미주알고주알 말하는지.
‘말로 좋게 설득하기는 글렀는데 저 아이의 정보는 무량이에게 도움이 될 것 같으니…….’
고민을 마친 송우현은 전서구로 다가갔다.
“한 시진만 있다가 가자꾸나.”
그 말에 현종휘와 당문영의 표정이 밝아졌다.
“정말요?”
“어른이 그렇다고 하면 바로 믿을 것이지.”
파드득!
전서구가 창공을 향해 날아갔다.
앞으로 한 시진이면 친우가 대기시킨 호위가 도착할 터였다.
‘무림맹주란 녀석이 설마 삼류를 보내진 않았겠지.’
설마가 사람을 잡는다고 했던가?
송우현은 호위의 정체를 보고는 주판을 꽉 쥐었다.
일 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대노였다.
“믿을 만하던 무인이 너였느냐!”
“오랜만입니다, 송 노야…….”
개방의 이 결 제자, 주겸이 핼쑥한 얼굴로 뒷걸음질 쳤다.
***
백무량은 무심한 얼굴로 묵환과 양소천을 내려다보았다.
누구에게도 해코지할 수 없도록 단전을 폐한 차였다.
죽고 싶을 터다.
지금까지 패악질을 부렸던 만큼 죄업이 돌아올 테니까.
“크으윽.”
“평생 저주하겠다…….”
“말할 힘은 남아 있다니 다행이군.”
백무량은 둘을 비웃었다.
저놈들은 이게 끝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아니었다. 눈을 버려 가며 옷을 벗긴 까닭은 따로 있었다.
“비명초를 알고 있나?”
“쓸데없는 헛소리를…… 얼른 죽여라.”
묵환의 체념한 목소리에 백무량은 빙긋 웃었다.
삶의 의욕을 잃어버렸다면, 되찾게 해 주는 것도 일종의 선행이었다.
“음기가 가득한 산에서 자라는 약재인데, 신기하게도 쇠에 긁히면 비명을 지르는 듯한 소리를 낸다는 거야.”
“……뭐?”
묵환이 멀쩡한 다리로 땅바닥을 긁었다. 백무량에게서 재빨리 멀어지려는 심산이었지만, 어림도 없었다.
백무량은 묵환의 어깨를 짓눌렀다.
“한번 쇠에 닿은 비명초는 두 시진을 버티지 못한다고 해. 그 전에 빨리 약으로 달여야 하는데…….”
“무슨 헛소리를 주절거리느냐?”
“듣기 싫다니 서론은 여기까지 하지.”
백무량이 품에서 붓과 종이를 꺼내자, 묵환이 그것을 보고 비웃었다.
“정신이 나간 모양이군.”
“그래. 네 말이 옳다.”
“……뭐?”
백무량의 왼손이 백선신검을 쥐었다.
“네가 사람이 아니라 비명초로 보이기 시작하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