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검해-57화 (57/275)

일거삼득 (3)

“안에 계십니까? 실례가 아니라면 하룻밤만 쉬어 가도 되겠습니까?”

사천과 청해 사이에 있는 아패현의 이름 모를 마을.

그곳에 도착한 백무량은 탱탱 부은 종아리를 매만지며 집마다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

“…….”

하나 누구도 반응하지 않았다.

신기한 일이었다. 이제 막 쪄낸 곡물의 냄새는 안쪽에서 흐르건만, 누구 하나 얼굴을 내비치지 않으니.

백무량은 한숨을 내쉬었다.

‘근래 무슨 일이 있었던 모양이구나.’

촌락이 외지인을 배척한대도 이만큼 심하지는 않았을 터인데.

삯을 내야겠단 생각에 백무량이 주머니를 매만지던 순간이었다.

“어디의 도사요?”

눈곱이 잔뜩 낀 촌로가 자신에게 선뜻 말을 걸어온 게 아닌가!

백무량은 촌로에게 예를 표하며 대답했다.

“곤륜도입니다.”

“곤륜이라…… 참으로 멀리서 찾아오셨구려.”

어린 외견을 보고 얕잡아 볼 만도 하건만 촌로는 자신을 공손히 대하고 있었다.

백무량은 그것이 신기하기도 하고, 감사하여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실례가 아니라면…….”

“이미 듣고 온 차요. 어린 도사님이 지내기 괜찮은 곳인진 모르겠지만 말이요.”

“몸 누일 곳만 있으면 어디든 괜찮습니다.”

“흘흘.”

촌로가 등을 보이며 웃는데 백무량이 듣기에 어째 시원한 웃음처럼 들리지 않았다.

대체 뭐가 시원하지 않은 건지. 백무량은 스스로 생각했다.

‘태청신공의 절학을 원숙하게 익힌 뒤로 묘하게 육감이 발달한 것 같긴 한데…….’

자신을 이토록 살갑게 대해 주는 촌로를 의심해서야 쓰겠나.

백무량은 고개를 내저었다. 모든 걸 의심하면서 살다가는 진정한 도(道)에서 멀어지는 법이었다.

그렇게 촌로를 따라 걸으니 바깥채가 따로 있는 집이 눈에 들어왔다.

“이곳이네.”

촌로는 성큼성큼 앞서 걸어가더니, 미리 나와 있는 하인에게 명했다.

“귀한 손님이 왔으니 쌀알을 골라서 드리거라.”

“알겠습니다요!”

‘내가 잘못 생각했구나.’

눈곱이 잔뜩 낀 걸 보아 평범한 촌로인 줄 알았건만, 백무량은 부끄러움에 자신의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러나 촌로는 아무렇지 않게 손님방이 있는 바깥채로 자신을 안내했다.

“그 어린 몸으로 여기까지 왔으니 몹시 시장하고 피곤할 텐데, 먼저 가서 쉬시지요.”

“감사합니다.”

촌로에게 고개를 숙인 백무량은 봇짐을 풀고 이부자리를 폈다.

몸을 누일 자리가 있으니 이곳이 극락이나 다름없다.

백무량의 눈이 슬슬 감기려다가, 바깥에서 들려오는 발소리에 번쩍 뜨였다.

“저녁거리를 가져왔습니다요.”

“감사합니다.”

하인이 가져온 상차림에 백무량은 속으로 신음을 삼켰다.

대관절 무슨 일인지, 반찬은 간이 되다 말았고 밥알도 성기다 못해 거칠어서 입안이 따끔거렸다. 피는 흐르지 않았으나 잇몸에 고였을 터였다.

‘바깥채가 따로 있는 집이 이렇게 가난할 수가 있나? 일부러 이렇게 준 게 아니고서야…….’

백무량의 심증이 확신으로 굳어지고 있었다.

아무리 촌락이라지만 얼굴 한번 보이지 않았던 사람들과 촌로가 자신에게 준 밥상.

백무량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단서는 이만하면 충분하니, 긴장을 늦추지만 않으면 그만이라는 판단이었다.

“후우.”

방 안의 촛불을 끈 백무량은 이부자리에 누운 채 필사적으로 잠을 참았다.

그렇게 일식경.

바깥에서 장정들의 속삭임이 들려왔다.

“정말 잠들었을까?”

“촌장님이 말씀하셨잖냐.”

“이게 잘하는 짓인지 모르겠다.”

스르륵.

방문이 열리는 소리에 백무량의 어깨가 움찔거렸다.

평소라면 칼을 휘두를 텐데 잠든 척을 하자니, 전신에 배긴 긴장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근육이 파르르 떨릴 지경이다.

“이런 아이를…….”

“누군 좋아서 이러고 있어?”

장정의 숫자는 둘. 백무량은 오감을 집중하면서 순간순간마다 고민했다.

당장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저들을 꾸짖어야 하나?

아니면 저들이 말하는 ‘짓’이 무엇인지 확인할까?

백무량이 고민하는 사이에 상반신이 슬쩍 들어 올려졌다.

까슬까슬한 감촉이 등에서 느껴진다.

‘줄이다.’

재질은 모르겠으나 자신이 가진 공력이라면 단숨에 찢어발길 수 있었다.

백무량이 잠자코 두고 보는 사이, 장정들은 백무량이 깨지 않게끔 밧줄로 살살 묶었다.

“그놈 참, 깨지를 않네.”

“이대로 들고 가면 어떻게 될까?”

“야, 그러면 우리가 굶어죽으리? 얘는 하나고 우린 수십 명이잖아.”

“……그렇긴 하지.”

두 장정의 대화에 백무량은 이제야 마을이 왜 이상했는지 깨달았다.

‘나를 노리고 있었구나.’

자신이 아패현을 지날 걸 알고서 마을 사람들을 협박한 것이리라.

그렇게 백무량이 장정에게 들린 채 열두 걸음쯤인가.

“촌장님, 무슨 일이십니까?”

백무량은 눈을 가늘게 떠서 주변의 동정을 살폈다.

자신을 집으로 들인 촌로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심지어 눈이 마주쳤는데도.

“…….”

촌로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백무량은 그의 눈빛에서 무엇인가를 읽어 냈다.

‘왜 도망치지 않았냐는 건가.’

까칠한 밥을 준 까닭도 자신이 곧바로 잠들지 않게끔 조처한 것이리라.

무림인에게 촌로가 할 수 있는 대항이라곤 그것뿐일 테니까.

백무량이 눈을 두어 번 깜짝이자, 촌로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리고 입술을 어물거렸다.

그것을 본 장정 하나가 촌로에게 답답한 마음을 토로했다.

“하실 말씀이 있으면 빨리해 주십시오.”

“아니다. 됐다. 얼른 가 보아라.”

“……후우.”

한탄 섞인 한숨을 내쉰 장정들은 촌로의 집밖을 나섰다.

모래, 자갈, 나무뿌리.

장정의 발이 땅을 짓밟을 때마다 백무량의 오감은 곧바로 신호를 보냈다.

그 감각이 어찌나 생경한지. 백무량은 자신이 누군가에게 들려 가고 있음에도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검해에서 수련할 때 이 감각을 끌어낼 수 있다면…….’

더욱 큰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 테니까.

백무량이 조금씩 가닥을 잡아 가던 그때, 장정들의 발걸음이 멈췄다.

청송(靑松)의 냄새.

코를 벌름거린 백무량은 어떤 상황에서도 백선신검을 뽑아서 휘두를 수 있도록 손가락을 구부렸다.

“검을 회수하지 않고 묶다니.”

“그, 그것이 워낙 마음이 급했던지라…….”

“됐다. 내려놔라.”

“예.”

툭.

자신을 땅바닥에 내려놓은 장정들이 뒤로 조금씩 물러나자, 앞쪽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저벅, 저벅.

이제 움직여야 하는가.

백무량이 내공을 운용해 밧줄을 끊어 내려는데 발소리가 멈췄다.

“누가 가도 좋다고 했지?”

“예?”

“보아선 안 될 것을 보고, 말을 걸어선 안 될 때 입방정을 떨었으니 응당 눈과 혀를 내놓아야 하지 않겠느냐?”

그렇게 말하는 남자의 목소리가 몹시 비열했다.

“글로 쓸지도 모르니 팔도 잘라 내야겠군.”

“이, 이보시오! 약속이 틀리지 않소!”

“내가 언제 그런 약속을 했느냐?”

비소(誹笑)가 백무량의 귓가를 스쳤다.

저 웃음이 자신을 향한 것이 아님에도 까득, 하고 어금니를 꽉 앙다물 정도였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을 겁박하여 나를 납치시키고, 살인멸구까지 시키다니…….’

대체 누구기에 이리도 악독하단 말인가!

백무량이 치를 떠는 동안 남자가 검을 뽑았다.

“염라가 왜 죽었냐고 묻거든 양소천이 보냈다고 답하거라.”

인위적으로 빚어진 검풍이 장정을 향해 쏘아졌다.

무공을 모르는 자라면 가슴팍이 단번에 찢어질 강맹함이라.

백무량은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빠드득!

몸을 묶은 밧줄을 힘으로 찢어 버리고, 백선신검을 위에서 아래로 장절하게 휘두른다.

구천화우검 이초, 창천명월.

검기를 머금은 백선신검이 검풍을 흩뜨렸다.

자세를 추스른 백무량은 서늘한 눈으로 남자를 노려보았다.

“양소천이라고 하였나?”

“…….”

남자, 양소천은 묵묵부답으로 일관했다.

하지만 백무량의 눈썰미는 피할 수 없었다.

방금까지만 해도 오감이 칼날처럼 예리했던 그였기에 더더욱.

“검풍의 완성도를 보아 평범한 무가나 흑도 방파는 아닐 터인데, 사천에서 청송의 진액이 옷에 밸 정도면…….”

“그만!”

백무량의 말을 중간에 끊은 양소천이 낮은 목소리로 으르렁거렸다.

“애송이가 겁이 없구나!”

“나는 겁이 없는데 네놈은 촌락의 범부를 겁박할 용기가 있으니, 참으로 대단하다! 대단해!”

백무량이 얇은 목소리로 깔깔거리며 웃었다.

그 모습을 본 양소천은 진한 살기를 드러냈다.

“놈…….”

‘전에 만난 흑마에 비하면 지나가던 개만도 못해.’

백무량은 양소천의 평가를 바닥까지 낮추며 소리쳤다.

“숨어 있는 두 놈도 모습을 보여라! 청성의 제자란 놈이 지저분하게 굴어서야 되겠느냐?”

“……!”

그 말에 깜짝 놀란 두 무인이 나무에서 내려왔다.

염소수염과 외팔이.

전자야 도사라면 흔한 인상이라지만, 후자는 백무량으로선 의아한 일이었다.

청성파가 어디던가.

사대사행이라는 고행을 통해 자신을 단련하는 문파가 아니던가!

‘청성이 외팔이를 입적시켰다면, 비범한 실력을 가지고 있겠지.’

백무량의 시선이 외팔이에게 박혀 있자, 양소천이 눈살을 찌푸렸다.

“어딜 보고 있느냐!”

양소천의 일검이 백무량의 명문혈을 향해 내질러졌다.

그걸 본 백무량은 어렵지 않게 반보를 옆으로 움직이며 쳐 냈다.

뒤이어지는 반격.

파직!

백선신검에 순간 뇌기가 치솟더니, 분광검결의 검로를 따라 휘둘러졌다.

“헉!”

양소천의 얼굴에 낭패가 어렸다. 너무 성급했다기보다, 백무량과의 역량에서 큰 벽을 느꼈다.

이대로 끝이라는 생각에 양소천이 눈을 감았지만, 백무량은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역시.”

“…….”

백선신검을 막아선 외팔이의 뺨에 식은땀이 흘렀다.

단 한 걸음으로 거리를 좁힌 것으로 모자라 분광검결을 막아 내다니.

“역시 평범하진 않을 거라 생각했지.”

외팔이의 실력을 칭찬한 백무량은 눈을 질끈 감은 양소천을 비웃었다.

“한데, 합격을 펼쳐야 할 놈이 저러고 있으니.”

백무량의 발이 땅을 때리니 몸이 위로 떠올랐다.

운중용형보의 공타식(空打式)과 공정식(空停式)이 유려하게 이어지니 백무량은 외팔이의 검을 사뿐히 지르밟았다.

하지만 외팔이가 느낀 무게는 사뿐한 정도가 아니었다.

“……크윽!”

만근의 무게가 몸을 짓누르는 듯하다.

외팔이는 몸이 앞으로 기울어지자 앞으로 나려타곤을 펼쳤다.

그제야 양소천이 눈을 떴고.

핏물이 눈앞에서 비산하고 있었다.

“비창아!”

백무량의 일격을 받아 내지 못한 염소수염이 바닥에서 허물어졌다.

백무량은 그를 알지 못했지만, 청성의 묵심검은 수세에 능한 검사로 유명한 후기지수였다.

그런 그가 일초에 죽다니!

양소천이 몸을 부르르 떨자, 외팔이가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네가 평소에 나를 마뜩잖게 보는 건 알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야.”

“외팔이 병신 놈이…….”

“여기서 죽고 싶은 거냐? 아니지. 다르게 말할까.”

외팔이, 묵환은 양소천에게 최악의 경우를 설명했다.

“살아서 붙잡히면, 우린 청룡대에 넘겨질 거다.”

“……!”

양소천의 표정이 삽시간에 굳어졌다.

그 모습을 본 백무량은 쓴웃음을 머금었다.

“도학을 배운 청성의 제자가 범부를 겁박한 걸 부끄러워하기는커녕, 자신의 죄과가 밝혀질 걸 두려워하다니…… 세상이 혼란하구나.”

청성파가 운산보와 연루되었을지언정 비틀린 대의라도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리 생각하지 않으면 분통이 터질 것만 같았으니까.

하지만 지금 저들의 모습은 어떠한가?

‘그저 한탄스럽고, 부끄럽다.’

청성의 검을 배웠으되 무지렁이만 못하고.

청송의 냄새가 밴 도복을 입었으되 알몸만 못하다.

“네놈들이 차라리 백련교였다면 이런 기분이 들지 않았을 터인데…….”

백무량은 명예를 잃은 도사들에게 백선신검을 겨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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