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청객 (2)
“내가 왜 피를 봐야 하오?”
백무량은 노도사가 바라는 대로 백선신검을 뽑지 않았다.
현노윤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기꺼이 그의 근맥을 끊어 줄 생각이었지만, 새로운 기틀을 세우려는 자리에 피를 볼 필요가 없었다.
“먼저 무례를 범한 건 당신인데.”
현노윤이 노도사의 부덕함을 꾸짖었으니 자신은 그저 편승만 하면 그만이었다.
백무량은 그를 실컷 비웃으며 다른 무인들을 훑어보았다.
그들의 얼굴에 묘한 긴장감이 얽혀 있었다.
‘봤군.’
저 노도사야 뒤에서 불시의 일격을 당했으니 모르겠지만, 태청신공은 평범한 내공심법이 아니었다.
곤륜파의 진실한 정수이자 장문인의 적전제자만이 익힐 수 있는 신공.
그 신공에 의해 운해가 어지러이 일그러지는 모습을, 그들은 보았을 터였다.
백무량은 무인들의 눈에서 욕심과 향상심을 읽어 냈다.
“이자처럼 곤륜의 법도를 어지럽히지 않는다면, 그리고 명예를 지킨다면 무공을 베푸는 데 차별은 없을 겁니다.”
“……!”
무인들의 눈에 열의가 일어났다.
현노윤이 본다면 혀를 강하게 차겠지만, 백무량의 생각은 달랐다.
‘마음의 수양은 나중에 해도 늦지 않아. 일단은 무학을 닦아서 청해에서 자리를 확고히 해야 해.’
선명후성(先命後性)이니 선성후명(先性後命)이니, 일단은 곤륜파가 자리를 잡아야 가능한 일이었다.
‘물론 운산보주와 같은 사고는 일어나면 안 되겠지만…… 내가 있는 이상 그럴 일은 없어.’
백무량은 열의를 불태우고 있는 무인들을 바라보았다.
노도사를 제외하고 총 서른여섯.
숫자가 제법 많긴 하지만, 무인들을 교정할 자신이 있었다.
그러니 지금 당장은 문파의 계율을 어지럽힐 미꾸라지부터 쳐 내는 것이 옳았다.
‘바로 저 도사처럼.’
백무량이 노도사를 턱짓했다.
“내려가지 않고 뭐 하시오?”
“이, 이보게, 이대로 저 학도사와 어린아이들 아래에 있겠단 말인가?”
노도사의 외침에 무인들은 딴청을 부리거나 휘파람을 불었다.
명백한 무시였지만, 몇몇은 그를 향해 말을 던지기도 했다.
“어린아이라니! 사부인데!”
“나잇값도 못 하는 사람이…… 쯧쯧.”
얼굴이 붉어진 노도사가 제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곤륜산 아래로 터벅터벅 걸어갔다.
‘꼴좋네.’
호탕한 미소를 지은 백무량은 노도사에게 핀잔을 던진 무인의 얼굴을 기억했다.
‘앞으로 자주 봐야겠어.’
상황이 변하면 곧바로 태도를 달리할 사람일 테니까.
백무량의 시선에 왠지 모를 한기를 느꼈는지, 노도사에게 빈정댔던 무인들이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그때 현종휘가 옆으로 다가왔다.
“앞으로 괜찮을까요?”
현종휘의 얼굴에 불안함이 태동하고 있었다.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할아버지와 단둘이 살던 자리에 사람이 계속해서 늘어 가는 데다, 다들 자기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들이니까.
열 살 아이가 칭얼대지 않은 것만으로 대견했다.
백무량은 현종휘에게 전음을 보냈다.
[나도 모든 사람을 데려가진 않을 거야.]
“……예?”
[쳐 낼 사람은 분명히 있어.]
거목의 썩은 가지를 자르듯이.
서른여섯 명의 제자를 들이기는 했지만, 모두가 선할 순 없었다. 곤륜파의 명예를 더럽힐 사람은 반드시 있을 터였다.
그렇기에 백무량은 저들을 기회로 여겼다.
[만약에 말이야. 곤륜파에 사람을 심으려는 적이 있다면…… 저 사람들을 꾀지 않겠느냐?]
“……!”
현종휘가 깜짝 놀라서 백무량을 올려다보았다.
왜 그런 위험을 감수하느냐는 궁금증과 두려움이 공존하는 표정이었다.
그 표정과 마주한 백무량은 미소를 지었다.
[뭐가 겁나느냐? 내가 있는데.]
“그래도…….”
[처음부터 첩자인 사람을 들이는 것보다 훨씬 안정적이지. 곁에서 계속 지켜볼 수 있잖아.]
“미덥지 않은 사람이랑 같이 수련하고 밥을 먹는 게 그렇잖아요.”
그 말에도 현종휘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입술을 삐쭉였다.
‘하기야, 어린아이가 이해하기는 어려운 이야기이긴 하지.’
백무량은 현종휘의 머리카락을 매만지고는 무인들을 향해 외쳤다.
“자, 다들 따라오너라!”
“……예.”
“목소리가 작구나!”
“예!”
그렇게 서른여섯 명의 제자가 곤륜파에 입문한 당일 밤.
백무량은 송우현이 준 전서구를 하늘에 날려 보냈다.
무더웠던 더위가 가시고, 점차 가을이 다가오고 있었다.
***
“정말이지 대담한 후배군.”
무림맹주. 검왕 남궁진은 백무량이 보낸 전서를 보고는 보름도 전에 찾아왔던 척준환을 떠올렸다.
참으로 불쾌한 시간이었다.
강호 십 대 고수가 침소에 몰래 찾아와서는 대뜸 한다는 말이 백련교라니.
뒤이어진 말이 없었다면 매병(呆病 : 치매)에 걸렸다고 생각했을 터였다.
“곤륜파를 미끼로 삼으라니, 그것도 곤륜파의 장문인이 허락했다고…….”
게다가 청성파가 백련교와 연관이 있을지도 모른단 말까지!
무림맹주로서 결코 좌시할 수 없는 정보였다.
‘하물며…….’
남궁진은 전서 끄트머리에 적힌 문장을 바라보았다.
-청성파를 정리하고 나면 무림에 빚을 받을까 합니다.
백련교의 난 때 곤륜파가 흘린 혈채(血債)를 청산하러 오겠다는 뜻이리라.
남궁진은 소리 없이 웃었다.
그답지 않은 행동이었지만, 곤륜신성이라 불리는 백무량의 행동이 너무나도 특이했다.
“아무리 전서라지만 말이 이렇게 짧아야겠나, 후배.”
실전된 무학을 익혔을 뿐만 아니라 무림맹주를 상대로 저런 말을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범인(凡人)은 아니었다.
마음에 들었다.
자신이 무림맹주임을 알고도 주눅 들지 않고 다가오는 후배는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너무 과한 걸 바라지만 않았으면 좋겠는데 말이야.”
남궁진은 곤륜파가 있는 방향을 바라보다가 일 군사인 제갈후를 호출했다.
“무슨 일입니까, 맹주님?”
“청룡대를 사천에 주둔시키게.”
“청성파를 공격하실 생각입니까?”
“아니.”
남궁진은 백무량의 나이가 열셋임을 떠올리고는 말을 이었다.
“시간을 벌어 줄 생각이네. 곤륜파가 직접 청성파에게 죄를 물을 수 있도록 말이야.”
“알겠습니다.”
제갈후가 고개를 끄덕이고 며칠 뒤.
“무림맹주님의 명령이오.”
청룡대의 등장에 사천 무림이 뒤집혔다.
***
백무량은 날카로운 시선으로 무인들을 노려보고는 입술을 달싹였다.
[호흡이 얕아서야 일 검조차 제대로 펼치지 못할 거다!……라고 말해.]
백무량의 전음을 들은 현종휘가 제자들에게 외쳤다.
“호흡이 얕다! 집중해!”
처음에는 낯가림에 큰 목소리를 내지 못하던 현종휘였는데, 며칠이 지나니 제법 자신감이 붙은 듯했다.
물론 자신이 전음으로 할 말을 전할 때만 그랬지만 아무렴 어떤가.
‘익숙해지면 스스로 해낼 수 있을 거야.’
그때까지는 옆에서 도와주면 될 일이다.
백무량은 연무장 외곽에서 태청신공을 운용하며 분광검의 검형을 연습했다.
스르릉…… 꽈광!
뇌기가 운해를 내리치니 굉음이 연무장을 울렸다.
호흡의 기본을 배우던 제자들의 시선이 자연히 백무량에게 몰렸다. 그 시선에 경외와 질시가 질척하게 뒤섞여 있었다.
곤륜파에 입문하고 나니 알게 되었을 것이다.
자신이 펼치는 분광검이 얼마나 원숙한지, 태청신공의 공력이 얼마나 뛰어난지를…….
‘한참 멀었다, 이놈들아.’
눈웃음을 지은 백무량이 반보를 밟으니 첩풍이 발아래에서 휘몰아쳤다.
이제 막 입문한 제자들로선 흉내조차 낼 수 없는 기예였다.
그들이 첩풍을 부럽다는 듯이 쳐다보니, 현종휘가 자연스레 백무량의 모습을 흉내 냈다.
[……녀석.]
백무량의 전음에 현종휘가 환히 웃었다.
무덤에서 나오고 보름 뒤에 자신의 동공을 따라 하던 때와 비슷했다.
백무량은 그와 마주 웃으며 내공을 운용했다.
[어디까지 가능한지 한번 볼까?]
“물론이죠.”
현종휘가 갑자기 혼잣말을 중얼거리자 제자들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현종휘는 자신을 집요하게 바라볼 뿐이었다.
“허, 녀석.”
가르치던 제자까지 내팽개치고 나와 놀고 싶다는 건가.
혀를 가볍게 찬 백무량은 현종휘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수련은 잠시 멈추고, 제자리에 앉아라!”
“……예?”
“기본만 수련하자니 지루하지 않더냐?”
그제야 제자들은 백무량과 현종휘가 모종의 대화를 나누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두 도사가 대련할 거란 사실 또한.
그들의 얼굴에 기대감으로 물들어 가는 사이, 백무량은 현종휘의 전신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선공을 어떻게 취할 게냐?’
현종휘라면 알고 있을 터였다.
자신에겐 웬만한 무공도 통하지 않을뿐더러, 곤륜의 무공이라면 더더욱 통하지 않을 거란 걸.
백무량은 어깨를 당당히 편 채 넉살을 부렸다.
“맨손으로 상대해 주마.”
“……!”
그 말에 현종휘가 입술을 삐죽거렸다.
자기를 너무 하수로 치부하는 게 아니냐는, 어린아이 특유의 뾰로통함이었다.
백무량은 헛웃음을 터트렸다.
“내가 너를 우습게 봐서 그러는 게 아니란다.”
“그럼 뭔데요?”
현종휘가 가볍게 되물으면서 달려들 준비를 시작했다.
파삭.
현종휘의 엄지발가락이 신발 안창을 긁는다. 무릎은 탄력 있게 굽혔다.
백무량은 그 과정을 지켜보면서 대견하단 생각을 했다.
‘진짜로 나를 이길 생각이구나.’
예전이었다면 지레 포기했을 텐데.
현종휘에게 따스한 시선을 보낸 백무량이 그를 살짝 도발했다.
“맨손이 아니면 너를 살살 상대할 수가 없거든.”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파앙!
현종휘의 신형이 앞으로 미끄러졌다. 내공을 머금은 목검의 끝이 명치와 목젖 사이에서 흔들렸다.
목검을 쥔 악력이 부족한 게 아니라, 자신을 속이기 위한 움직임이리라.
요체를 알아차린 백무량은 재빠르게 뒤로 물러났다.
“기습치고는 너무 얕지 않으냐.”
현종휘를 위한 조언 뒤에는 태청신공의 공력이 담긴 주먹질이 있었다.
콰득!
옻칠한 무색하게, 백무량의 주먹질이 스친 것만으로 목검이 쪼개졌다.
“……큿.”
항거할 수 없는 힘.
전신을 내리누르는 압력에도 현종휘는 자세를 바로 했다.
일순간 느낀 위압감에 몸이 저렸지만, 그대로 굳어 있진 않았다.
그저 배운 걸 그대로 펼칠 뿐.
그것이 바로 현종휘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이었다.
“균천관일.”
최근에 배우기 시작한 구천화우검의 일 초.
검형에서 부족한 부분이 보이기는 했지만, 최적의 판단이었다.
‘검이 부서지긴 했어도 내가 가까우니까 찌르기로 변용하겠단 거지.’
그저 어리숙한 줄 알았더니 생각보다 실전적인 검술을 펼치고 있지 않은가.
“잘 배웠구나.”
백무량은 웃으며 현종휘의 일 초를 받아들였다.
다만, 쉽게 받아칠 수 있을 뿐이었다.
툭.
반신을 오른쪽으로 비트는 것만으로 균천관일은 허공을 갈랐다.
현종휘의 어깨가 순간 움츠러들었다. 반드시 통할 줄 알았던 초식이 파훼당하니 자신감이 떨어진 모양이었다.
“여기까지.”
백무량은 대견스럽다는 듯 웃었다.
근기만 뛰어난 줄 알았던 현종휘가 무럭무럭 자라나는 모습을 보니 무언가 든든해졌다.
“훌륭하다. 나중엔 나를 이길지도 모르겠어.”
“정말요?”
“그럼.”
그렇게 백무량이 현종휘를 독려하던 그때.
“백 가야, 게 있느냐?”
술이라도 걸친 듯이 걸걸한 목소리가 곤륜파 대문에서 들려왔다.
얼굴을 보지 않아도 누군지 알 것 같다.
‘송 노야인가?’
백무량은 대문을 향해 큰 소리로 외쳤다.
“연무장에 있습니다!”
“어른이 오면 자기가 올 생각을 해야지. 여기까지 올라오는 고생을 생각이나…….”
“무슨 일이기에 직접 오신 겁니까?”
“직접 올 일!”
송우현의 말에 백무량은 얼굴에서 웃음을 지우고는 현종휘의 어깨를 두드렸다.
“내가 없는 동안 잘 가르칠 수 있지?”
“네. 걱정하지 마시고 얼른 가 보세요.”
“그래. 너만 믿는다.”
그 말을 남긴 채 백무량은 대문을 향해 빠르게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