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검해-50화 (50/275)

불청객 (1)

척준환이 곤륜파를 떠나고 삼십 일 뒤, 아침.

어깨를 당당히 편 백무량은 높게 설치한 단상에 올라갔다.

숫돌로 막 벼린 칼날과 같은 눈. 백무량의 시선이 장원에 모여든 장정 수십을 훑었다.

공동파의 도움으로 불러들인 곤륜파의 제자들.

정확하게는 백련교의 난 이후로 강호 전역에 흩어진 후예들이었다.

“곤륜신성이 저 아인가?”

“저렇게나 어린데도…….”

“이대로 있어도 되는 건지 모르겠네.”

“아버지가 무공은 배우고 돌아오라고 말씀하셨잖아. 꼬맹이 아래로 입문하는 일이 있더라도 말이야.”

작은 쑥덕거림이 백무량의 귓가를 간지럽혔다.

백무량은 그곳을 바라보았다.

더러운 의복에 비해 깨끗한 신발. 백련교의 난 때 침묵한 속가제자의 두 후예에게서 어설픈 기만이 엿보였다.

백무량의 심기를 건드린 것은 외견만이 아니었다.

“무슨 건물도 세우다 말아서는…… 몸을 누울 자리나 있을까?”

“야, 듣겠다.”

“애잖아.”

서로를 바라보며 웃는 둘. 백무량의 얼굴이 무표정해졌다.

당장이라도 저 둘을 꾸짖고 싶었다. 하지만 다른 산에서 수양을 쌓다가 돌아온 도사들도 있었다.

그들까지 포용하려면 위엄 있는 모습을 보는 것이 좋았다.

‘사부나 사형이었다면 넓은 도량으로 용서했겠지.’

하지만 백무량은 그럴 수 없었다.

그들의 얼굴을 기억한 뒤, 장정들을 향해 무언가를 외치려던 순간.

“곤륜신성이라고 해서 적어도 약관은 될 줄 알았더니, 저런 아이였다고?”

송곳처럼 툭 튀어나온 중얼거림이 좌중을 흔들었다.

저런 아이를 스승으로 모셔야 하냐는 분위기가 장원에 감돌더니, 현노윤을 곁눈질하는 자가 있었다.

그건 사문(師門)의 존장(尊丈)에게 보일 태도가 아니었다.

‘다른 사람이라고 해서 다를 게 없구나.’

백무량은 쓴웃음을 머금었다.

이럴지도 모른다고 예상은 하고 있었다.

‘칠십여 년은 너무 길었던 거야.’

그것도 사문에 대한 존경을 잃기 충분할 만큼.

분노가 한순간 솟구쳤으나, 백무량은 꾹 내리눌렀다.

사형이라면 현명하게 대처했을 터였다. 그에겐 일다경 안에 저들을 승복시킬 연설을 할 지혜가 있었다.

자신에게 그런 능력은 없었지만, 사문을 존중하게 만들 방법은 한 가지 알고 있었다.

“일단 가볍게 걷지요.”

그것은 오래전부터 곤륜파에서 전해 내려온 방법이었다.

“종휘야, 너도 따라붙거라.”

“……예?”

예상치 못했다는 듯, 현종휘가 멍청한 표정을 짓자 백무량은 한쪽 눈을 찡긋거리고는 전음을 흘렸다.

[후배들에게 네가 만만하지 않다는 걸 보여 줘야지.]

“예!”

현종휘가 짓궂은 미소를 지었다.

***

백무량의 뒤를 따라서 일다경이나 걸었을까?

“허억, 허억!”

장정 서넛이 몸을 휘청거렸다. 턱 끝까지 숨이 차오르고, 시야가 점점 희미해진다.

그건 다른 장정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았다.

“별로 걷지도 않은 것 같은데.”

땅을 내디딘 발이 녹아내리는 감각이라.

이토록 심한 산취(山醉 : 고산병)를 겪어 보지 못한지라, 장정들은 점차 혼미해지는 정신을 이겨 내지 못했다.

몸을 휘청이던 서넛은 제자리에서 허물어지기까지 했다.

“더, 더는 못 간다. 여기서 쉬어야겠다.”

“멈추는 건 자유지만, 실망입니다. 겨우 칠십여 년 만에 곤륜파 무학의 기본을 잊었단 말입니까?”

“뭐라?”

허물어졌던 장정들이 벌떡 일어나서 백무량을 노려보았다.

어린놈이 다짜고짜 자기를 꾸짖으니 화가 난 모양이었다.

백무량은 그들을 바라보았다가, 현종휘에게 시선을 돌렸다.

“종휘야, 네가 보여 주어라.”

그 말에 장정들의 시선이 자연스레 현종휘를 향했다.

산취를 이겨 내지 못하는 그들에 비해 현종휘는 산책이라도 나온 듯이 여유로워 보였다.

그저 자기에게 쏠린 시선을 부담스러워할 뿐이었다.

“어, 음. 그…… 일단은요.”

현종휘가 지은 어색한 미소에 백무량이 전음을 흘렸다.

[저들이 오기 전에 연습하지 않았더냐.]

“…….”

현종휘의 침묵에 백무량은 억지로 엄격한 표정을 지었다.

사실, 자신이 나서도 되는 일이었다.

태청신공을 운용하고 구천화우검을 펼치면 저들을 단숨에 휘어잡을 수 있었다. 그러한 힘이 백무량에게 있었다.

하지만 백무량은 그러지 않았다.

‘열 살 아이에게 너무 무거운 짐이고, 일찍 철들게 만드는 것 같아 미안하지만…….’

현종휘는 작금의 곤륜파에서 단둘뿐인 무인이었고, 백무량과 현노윤에게 정종의 무학을 배운 적전제자였다.

지금의 성취는 미력할지언정 누군가를 대하고 가르침에 있어 당당해질 필요가 있었다.

그런 점에서 이 자리는 기회였다.

어리고 여린 사제를 성장시킬 기회.

백무량이 말없이 바라보기만 하자, 현종휘가 침을 꿀꺽 삼키고는 줄곧 품고 있던 생각을 꺼냈다.

“곤륜파의 무공을 배우시긴 한 건가요?”

차가운 질타가 좌중을 침묵시켰다.

현종휘의 눈동자에 담긴 실망을 무인들은 어렵지 않게 읽어 냈다.

“우리가 이런 대접을 받자고 온 건 아니거늘…….”

어딘가에서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다. 불만과 짜증이 섞인 한숨들. 현종휘가 그것과 마주하며 주먹을 꽉 쥐었다.

저도 모르게 죄송하다고 할 뻔했다. 평소였다면 그렇게 말했을 터였다.

백무량에게 미리 가르침을 받지 않았다면 말이다.

“……후우우.”

현종휘는 숨을 폐 깊숙이 욱여넣었다.

왜소하게 보였던 현종휘의 상복부가 한순간 팽창했다. 삽시간에 무인들의 불만이 잦아들었다.

그들은 깜짝 놀란 표정으로 현종휘를 바라보았다.

“허어, 호흡이 저렇게 깊다니.”

“정(静)의 극이로다!”

한 노도사가 탄성을 터트렸다.

그제야 무인들은 보았다.

현종휘가 들이쉰 호흡이 주위에 흐르던 운해를 멈추게 했음을.

그러나 현종휘의 시범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리고 동(動)이라.”

백무량의 혼잣말에 현종휘가 한 발을 앞으로 떼었다.

그 움직임은 깃털처럼 가벼우나 태산처럼 무거웠다.

쿵!

겨우 열 살 남짓한, 그것도 잘 먹지 못해 왜소하기까지 한 현종휘가 땅에 깊은 발자국을 남겼다.

이곳에 모인 무인이라면 누구나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모두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히 그것을 지켜보았다.

내공 하나 없이.

오로지 호흡만으로 펼친 동공(動功)이었으니까.

“저것이 정종의 무학인가?”

무인들에게서 아이라고 업신여기던 시선이 씻은 듯이 사라져 갔다. 나이가 어떻든 간에, 현종휘가 보인 기예는 존중받아 마땅한 것이었다.

그들을 지켜보던 백무량은 다시금 현종휘를 향해 중얼거렸다.

“곤륜의 호흡은 적은 숨으로 무한을 다스린다.”

이는 구름의 운행과 같으니.

현종휘가 백무량의 가르침을 떠올리며 주먹을 내질렀다.

그것을 본 무인들이 내심 생각했다.

운해라고 한들 결국 구름 덩어리에 불과하니, 위아래로 갈라지거니 흩어질 거라고 말이다.

하지만 현종휘의 출수는 달랐다.

“……!”

“어찌, 저게?”

현종휘의 출수는 운해를 거스르지 않고 곧게 나아갔다.

마치 구름 사이에 섞여 드는 듯한 모습에 무인들의 입이 쩍 벌어졌다.

퉁!

마지막 타점에 도달했을 땐 주먹이 구름을 흩어놓았지만, 무인들의 충격은 쉽사리 가라앉지 않았다.

그중에서도 다른 도문에서 수양을 쌓아 온 노도사가 혀를 내둘렀다.

“지극한 호흡이 일 장의 운해를 멈추고, 아이의 발걸음이 수백 년 동안 다져진 곤륜산의 지맥에 흔적을 남길 정도였으나, 마지막에 보인 일수야말로 곤륜 도맥의 진수로구나!”

그 말에 무인 몇몇이 눈을 끔뻑였다.

현종휘의 일수에 현묘한 조화가 담겨 있긴 했으나, 무당파만큼의 정심함은 느껴지지 않았던 탓이었다.

‘저런 반응을 의도한 건가.’

백무량은 노도사를 흘깃 쳐다보았다.

언뜻 보면 순수하게 감탄하는 것처럼 보여도, 은근슬쩍 종휘의 경지가 아직 낮다는 걸 비꼬고 있었다.

‘내가 직접 나서야겠군.’

백무량이 현종휘에게 고개를 돌렸다.

“아직 수련이 부족하구나.”

“죄송합니다.”

“괜찮다. 앞으로 정진하면 되니까.”

“감사합니다, 현…… 아니, 사형.”

저 대화를 들은 무인들이 눈치를 살폈다.

저 나이에 저만한 기예를 쌓고도 꾸지람을 듣는 게 참 기이하게 보인 탓이다.

그것은 감탄을 터트렸던 노도사도 마찬가지였다.

“도우, 대화에 끼어들어 미안하네만 저 나이에 저만큼의 기예를 쌓았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일이 아닌가?”

“대단하지만 곤륜파를 대표하여 가르칠 수준은 아니지요.”

백무량의 대답에 노도사가 빙긋 웃었다.

“도우의 포부는 알겠네만, 본도를 가르치려면 무척 힘들 걸세.”

“왜 가르치기 힘들단 겁니까?”

“그야, 내가 도우보다 항렬이 높으니 말일세.”

백무량은 노도사와 시선을 마주하며 웃었다.

‘있을 줄 알았지.’

곤륜파의 도학이나 무학은 쥐뿔도 모르면서 강하다는 이유만으로 높은 항렬을 자처하려는 자.

백무량의 고개가 삐딱하게 기울어졌다.

“곤륜파의 진전을 잇지 못하셨지 않습니까?”

“그거야 사손에게 배우면 되지 않겠나!”

노도사가 보인 뻔뻔함에 백무량은 입술을 비틀었다.

“벌써 제가 사손이 된 겁니까?”

“나이만 따지자면 장문인과 비슷하니 말일세.”

“연세가 있다니 아시겠군요. 타 문파의 무공을 탐내다 어떻게 되는지요.”

백무량이 대놓고 비아냥거리자 노도사가 껄껄 웃었다.

겉으로는 자신의 도발을 흘리는 것처럼 보여도, 그의 작은 눈에서 서릿발 같은 냉기가 느껴졌다.

꽈악.

백무량이 백선신검을 움켜쥐는 순간.

뒤쪽의 언덕에서 급한 외침이 들려왔다.

“당장 멈춰라!”

백무량과 노도사가 동시에 언덕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얼굴이 붉어진 현노윤이 노도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사문에 돌아오겠다고 하여 기꺼이 맞이했더니, 감히 문 내의 항렬을 어지럽히려고 들다니!”

“그것이…….”

“시끄럽다!”

노도사를 강하게 꾸짖는 현노윤을 보며 백무량은 백선신검을 쥐었던 손을 놓았다.

상황이 심각하게 바뀌고 있음에도, 백무량은 저도 모르게 튀어나오려는 웃음을 꾹 참았다.

‘내가 잘못 생각했구나.’

처음에는 이들을 곤륜파의 무학으로 찍어 누르고 현노윤의 권위를 세울 생각이었다.

그래야 곤륜파의 질서가 제대로 돌아갈 것만 같았다.

하지만…… 지금 보니 그것은 착각에 불과했다.

‘운산보주가 죽어서 내심 슬퍼하고 있을 줄 알았는데.’

백무량이 만났던 누더기 차림의 노인은, 풍화된 바위와 같던 모습은 이제 현노윤에게서 보이지 않았다.

“사문의 장문인 앞에서도 변명을 주절거리려 드는구나!”

척 보기에도 수양을 오래 쌓은 노도사를 앞에 두고도, 현노윤은 고개를 뻣뻣이 든 채 책망을 멈추지 않았다.

“당장 내려가지 않고 무얼 하느냐!”

“……후회할 것이오, 장문인.”

노도사가 작은 목소리로 뇌까리자, 백무량은 그의 엉덩이를 발로 찼다.

쩌억!

태청신공의 공력이 담긴 일격에 노도사가 두 무릎을 꿇었다.

얼굴이 시뻘게진 그가 자신을 향해 고개를 홱 돌렸다.

“비겁한……!”

“장문인이 내려가라고 하잖소.”

백무량은 노도사의 복장이 뒤집히길 빌면서 히죽 웃었다.

“네 이놈! 정녕 피를 보고 싶은 게냐!”

백무량의 바람대로, 노도사가 당장이라도 칼을 뽑겠다는 듯이 부들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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