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청객 (3)
무림맹이 청룡대를 보내 사천 무림을 압박하고 있다!
그 사실을 전한 송우현은 곧바로 백무량에게 물었다.
“네가 그렇게 시켰냐?”
“그게 가능하겠습니까?”
“……하긴. 무당파가 그렇게 말해도 무림맹주는 그럴 필요가 없다고 배짱을 부릴 놈인데.”
검왕 남궁진.
그는 무림맹주로서 높은 명망만큼이나, 적이 많은 인물이었다.
무림맹에 이득이 되지 않을 일이라면 죽어도 듣지 않았으니까.
그렇기에 송우현은 무림맹의 행동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남궁세가랑 연이 있었느냐?”
“그런 게 있었다면 진즉 연통을 보냈겠지요.”
“이상한데…….”
송우현이 고민에 잠기자, 백무량은 현노윤을 돌아보았다.
“장문인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연유는 몰라도 무림맹이 우리를 돕고 있다고 봐야지. 청성파가 옴짝달싹도 못할 테니까.”
현노윤의 말은 지극히 정론이었다.
청룡대가 사천에 주둔하는 이상, 청성파는 계속해서 무림맹의 눈치를 살펴야 할 판국이었다.
하지만 여기에 의문이 있었다.
“송 노야, 무림맹에 청성파가 우리를 공격했다고 알렸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게 말이다…….”
송우현의 눈가가 가늘어졌다.
“시간을 벌어 줄 테니까 곤륜이 직접 벌하라는 걸지도 모르겠구나.”
“직접이라…….”
백무량이 말꼬리를 흐렸다.
솔직하게 말해서, 시간만 주어진다면 백무량은 직접 청성파에게 죄를 묻고 싶었다.
그것이 무림의 법도였고 정당한 복수가 될 테니까.
그러나 송우현의 생각은 다른 듯했다.
“자기 손은 안 더럽히고 뒷정리만 하겠다니!”
“송 노야…….”
“또 무슨 상인의 논리라고 그럴 생각이더냐?”
송우현은 현노윤에게 시선을 돌렸다.
“장문인은 어떻습니까?”
“으음.”
헛기침한 현노윤이 바깥을 바라보았다.
공사가 한창인 건물들과 연무장에서 수련 중인 제자들.
충분한 시간만 주어진다면 곤륜파가 옛 모습을 되찾고 제자들 또한 강성해지리란 판단이 현노윤의 뇌리를 스쳤다.
“굳이 부정적으로 볼 필요는 없을 것 같소.”
“어째 장문인까지 저 아이한테 물드시니…….”
송우현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무림맹이 시간을 번다고 한들 길어야 오 년입니다. 그동안 곤륜파가 잘 성장해도 사천에서 재산을 축적한 청성파의 규모를 넘을 순 없습니다.”
“규모가 중요하진 않지요, 노야.”
백무량의 말에 송우현의 인상이 일그러졌다.
“운산보야 사파지만 청성파는 구파일방의 일원이잖느냐! 이번에도 무슨 혼자서 다 싸우겠다는 게냐!”
“제가 왜 혼자서 싸우겠어요?”
그렇게 답하는 백무량의 표정이 어쩐지 여유롭다.
송우현은 인상을 누그러뜨리고는 조심스레 물었다.
“그러면 어찌할 생각이냐?”
“오 년이면 운산보주가 남긴 기록을 근거로 청성파가 얼마나 연관되어 있는지 알아낼 수 있지 않습니까.”
“……아!”
저번에 들어 놓고도 까먹고 있었다니!
송우현의 얼굴이 부끄러움으로 붉어지자, 백무량은 느긋한 어조로 하려던 말을 이었다.
“무림맹주가 곧바로 공격하지 않은 까닭도 거기에 있을 겁니다. 뭐, 어차피 얼마 지나지 않아서 전서구가 오겠지요.”
“과연…….”
고개를 끄덕인 현노윤이 송우현에게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차라도 한잔 드시겠소?”
“부탁합니다.”
스윽.
현노윤이 자리를 비운 사이, 백무량이 입술을 달싹였다.
“이번에 제가 서른여섯 명을 제자로 들인 사실은 아시겠지요?”
“그건 왜? ……아!”
“이것마저 물어보면 실망할 뻔했습니다.”
“참 얄밉게도 군다!”
말로는 백무량을 꾸짖는 듯해도 송우현의 얼굴엔 만족으로 가득했다.
“무림맹이 사천을 쥐어짜면 청성파가 세작을 심을 거다, 뭐 이거지?”
“예. 그들을 통해 역으로 청성의 동향을 파악할 겁니다.”
그 말에 송우현이 팔짱을 꼈다.
“참으로 용감무쌍한 이야기다만…… 그게 어디 말처럼 쉽겠냐?”
“송 노야가 돕는다면 쉽지요.”
“내가 뭘?”
백무량은 송우현의 심술궂은 표정을 보곤 피식 웃었다.
“전서구 말입니다. 전에 받으면서 느꼈지만 산하객잔에 대체 몇 마리를 기르고 있는 겁니까?”
“조금 많긴 하지.”
“그 숫자면 따로 관리하는 사람도 있을 테고, 곤륜파 근처 정도는 살펴 주실 수 있잖습니까.”
“허허, 이놈, 어르신을 아주 도구로 보는구나.”
“애교라도 부릴까요?”
백무량이 양 뺨에 두 손을 모으자, 송우현이 딱 질색이라는 듯 혀를 찼다.
“누가 그런 짓거리를 하라고 시키더냐!”
“아니, 바라시면 하려고 했지요.”
“요 녀석이…….”
백무량을 지그시 쳐다보던 송우현이 항복이라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됐다, 됐어. 도우면 될 거 아니더냐.”
“그렇게 말씀하실 줄 알았습니다. 노야와 곤륜, 아군이잖습니까.”
“클클.”
송우현이 걸걸한 목소리로 웃던 그때였다.
“무량아.”
“……?”
백무량이 고개를 돌리자, 한 손에 찻잔을 든 채 난처해하는 현노윤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참으로 기이한 일이었다.
‘웬만한 일에는 눈 하나 꿈쩍하지 않더니?’
필시 무슨 일이 생긴 것이리라.
판단을 마친 백무량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슨 일입니까?”
“너를 찾아온 손님이 있어서 말이다.”
“직접 만나 보지요.”
당당하게 다실(茶室)에서 나간 백무량은 불청객의 정체에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
불청객은 현종휘와 비슷한 또래의 여자아이였다.
“사천당가의 당문영(唐文英)이라고 해요.”
독연화(毒煙花) 당문영.
뛰어난 외모와 오성을 가지고 있어 사천당가에서 재녀로 불리는 그녀였지만, 백무량은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완전 애네, 그것도 존댓말을 하는.’
곱상하지만 어디까지나 어린애고, 백무량 입장에서는 갑작스레 찾아온 불청객일 뿐이었다.
백무량이 뚱한 표정을 짓자 당문영이 한쪽 눈을 찡그렸다.
“혹시 저를 모르시나요?”
“소저가 말씀하셨잖습니까, 사천당가의 당문영이시라고.”
“…….”
이런 반응은 난생처음이라는 듯, 당문영이 눈을 끔뻑였다가 미간을 좁혔다.
자신의 대답이 마음에 차지 않은 듯했다.
“곤륜은 강호의 소문에 밝지 않다고 하더니, 과연 그 말이 맞았네요.”
‘난처하네.’
자기를 모른다고 저렇게 말하다니, 사천당가에서 금지옥엽으로 자랐는지 철이 없어도 너무 없었다.
그녀의 나이를 생각하면 그저 웃고 넘어갈 수 있는 일이었지만 이대로 넘어가면 사문의 체면이 상한다.
그렇게 생각한 백무량이 상반신을 앞으로 기울였다.
“죄송합니다만, 소저.”
“……예?”
“제가 사천당가를 욕하면 기분이 어떻겠습니까?”
역지사지로 무례를 범하지 말라는 경고를 한 셈.
그 말에 당문영의 표정이 굳었다.
백무량으로선 최대한 성질을 누그러뜨린 것이다.
당문영이 사천당가의 여식이었고 어린아이였으니까.
무엇보다 그녀를 보고 있자니 현종휘가 생각나서, 괜히 짜증을 부리고 싶지 않았다.
다행히도 그 마음이 통한 것인지.
“으음. 죄송해요, 소협.”
입술을 우물거리던 당문영이 백무량에게 두 손을 모아 올렸다.
그 모습이 아이가 아니라 숙녀처럼 보였는데, 나이가 나이인지라 조금도 어울리지 않았다.
‘애가 애답지가 않네.’
당문영의 사소한 행동 하나하나에서 애어른이 느껴졌다.
필요하다면 친족마저 독살하는 악랄한 사천당가의 교육 때문이리라.
백무량은 그녀에게 달콤한 간식을 건네며 말했다.
“소개가 늦어 죄송합니다. 곤륜신성 백무량이라고 합니다.”
“알고 있었어요. 강서에서 워낙 유명한 이름이니까요.”
‘정말 사소한 부분에서 젠체하는 게 애 같은데, 행동은 어른을 따라 하니…….’
백무량이 헛웃음을 짓는 사이, 당문영이 화제를 바꿨다.
“최근 청룡대가 사천에 도착했다는 사실은 알고 계시는가요?”
“방금 들었습니다.”
“그럼 이야기가 빠르겠네요.”
당문영이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혹시…… 곤륜파와 연관이 있나요?”
알고 있어도 대답해선 안 될 질문을 던지다니.
‘일부러 나를 떠보려고 그러나?’
백무량의 눈가가 가늘어졌다. 하지만 입은 여전히 호선을 그렸다.
“그걸 저한테 물으면 어떡합니까? 장문인한테 여쭤보시죠.”
“갑자기 찾아온 것도 무례인데 어떻게 장문인과 독대할 수 있겠어요. 소협과 이야기하는 게 낫지요.”
그걸 아는 애가 왜…….
당문영을 어이없다는 듯이 쳐다본 백무량이 대뜸 물었다.
“그나저나 동행은 어디 있습니까? 혼자서 곤륜파를 찾아온 건 아닐 텐데요.”
“…….”
그 말에 당문영이 입을 꾹 다물었다.
방금까지는 어른처럼 행동하더니, 지금은 대답하기 싫은 질문과 마주한 애처럼 보였다.
백무량은 그녀의 침묵이 뜻하는 바를 자연스레 유추했다.
“혼자서 왔다고……? 그 먼 길을?”
“그래요.”
당문영이 당찬 목소리로 대답했지만, 백무량은 표정이 굳어지려는 걸 애써 무마했다.
‘사천당가는 자식이 자는 동안에도 감시를 붙이기 마련인데…….’
당문영이 거짓말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애초에 곤륜파에 누군가 몰래 침입했다면 기감으로 알아차릴 자신이 있었다.
‘그렇다는 건 그녀가 감시를 따돌리고 여기까지 왔다는 소리인데.’
어린아이가 감시역의 존재를 알아챌뿐더러, 그 사람을 재우고 홀로 곤륜파를 찾아간다?
이 나이에 성강의 경지를 이룬 자신만큼은 아니어도 당문영 또한 비범한 재기(才器)가 있단 뜻이다.
‘사천당가에서 보낸 어린 전령일지도 모르지.’
백무량은 그녀를 가볍게 대하던 마음을 똑바로 정돈했다.
“발은 괜찮고?”
그렇지만 곧바로 본론에 들어가진 않았다.
‘급하게 굴면 하수지.’
당문영이 왜 홀로 곤륜을 찾아왔는지, 그 용무가 얼마나 급한지 알아볼 필요가 있다.
백무량이 목표를 정리하는 동안 당문영이 인상을 찡그렸다.
“왜 갑자기 반말이시죠?”
“척 보니 나이도 비슷하니까. 혼자서 여기까지 온 것도 참 대단하고, 친구가 되었으면 해서.”
“그게 무슨…….”
“몇 살이야?”
백무량의 두 눈이 둥글게 휘었다.
반말부터 시작해서 지금까지, 당문영에게 억지를 부리고 있는 셈이다.
‘나이가 열다섯만 됐어도 치근덕거리지 말라고 화를 냈겠지만, 아직 그럴 때는 아니잖아.’
아무리 사천당가의 가르침이 엄하고 체계적이어도 이런 상황에 대한 대처는 모르리란 예감이었다.
과연 그 예감이 옳았던 걸까?
“어, 음. 열한 살.”
당문영의 태도가 흐트러진 게 한눈에 보였다.
백무량은 선반에서 금창약을 찾았다.
“발은?”
“아까 철유라는 선배께서 물을 떠다 주셔서 식히긴 했는데…….”
“선배 아냐, 내 사제지.”
“정말?”
믿기지 않는다는 듯 화들짝 놀라는 당문영의 모습.
그 모습을 보자니 백무량은 철유에게 조금 미안해졌다.
‘언젠가 내 신분을 밝히긴 해야 하는데, 흠.’
그걸 말해 주기는커녕 당문영한테 호감을 쌓으려고 철유를 이용하다니.
백무량은 그 속내를 숨긴 채 당문영과 대화를 이어 갔다.
“일단 상처부터 보자. 동행인이 없으면 계속 걸어 다녔을 거 아냐.”
“응.”
스윽.
오래 걸었다는 게 거짓말은 아니었는지, 당문영의 장딴지가 붓고 발바닥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금창약뿐만 아니라 화상유(火傷油)를 바르고 며칠을 두고 봐야 할 수준. 백무량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생각보다 훨씬 독한데.’
혼자서 발이 이 지경이 될 때까지 걸어왔다니.
대체 당문영의 용무가 무엇이길래, 가문의 감시를 따돌린 채 여기까지 온 걸까?
백무량의 의문이 깊어지는 가운데 당문영이 쿡쿡 웃었다.
“그대로 보기만 할 셈이야?”
“아냐.”
백무량은 당문영의 상처에 금창약을 바르면서 생각했다.
‘급하지 않나?’
이쯤이면 곤륜파에 찾아온 이유를 말해 줄 줄 알았건만.
그렇게 백무량이 약을 다 바르고 금창약의 뚜껑을 닫던 그때.
당문영이 도끼눈을 하고 자신을 바라보았다.
“……야.”
“왜?”
속으로는 쾌재를 부르고 있었지만, 백무량은 일부러 건조하게 대답했다.
그러자 당문영이 아까 물었던 질문을 되풀이했다.
“진지하게 물어보는 건데…… 청룡대. 곤륜파랑 상관없는 거지?”
“나도 몰라. 내가 그걸 어떻게 알겠어.”
자신의 거짓말을 믿은 걸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우리 가문에 이상한 사람이 있거든.”
당문영이 진실을 입에 담고 있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