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파 (5)
백련교의 난이 무엇이던가!
무려 칠십여 년 전, 백련교주를 위시한 마교도들이 천산산맥을 넘어 무림으로 침공했던 사건이 아니던가!
후기지수가 알 만한 사안이 아니라고 판단한 척준환이 진중한 목소리로 백무량을 다그쳤다.
“바른대로 대답하거라!”
“다시 말씀드리지만, 믿어 주셨으면 하는 이야기입니다.”
백무량은 척준환과 시선을 마주하고는 곤륜 지부에서 마인과 마주했던 일을 상세히 설명했다.
물론 운룡에 대한 건 빼놓았다.
그걸 설명하려면 자신이 구천검임을 밝혀야 할 테니까.
‘갑자기 태도를 달리할 사람은 아니라지만…….’
아직은 이르다.
그렇게 생각한 백무량은 마인을 태청신공의 공능으로 알아챘다고 설명했다.
“잡아가려던 차에 또 다른 마인이 나타나서 놈을 죽이고 자진하더군요. 이는 즉, 강호에 백련교가 암약하고 있다는 증거가 아니겠습니까?”
어린 도사의 착각이라기엔 꽤나 자세하고, 섬뜩한 이야기.
그것을 모두 경청한 척준환이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솔직히 믿기 어려운 이야기구나. 청성파의 문제처럼 증거가 남은 게 아니고, 네 경험일 뿐이니 말이다.”
“하지만…….”
백무량이 무언가 말을 잇기도 전에, 척준환이 현 상황을 꼬집었다.
“하물며 네가 백련교도를 마주하고도 살아남았단 소린…… 어느 무림인도 믿지 않을 것이다. 기껏해야 음모를 좋아하는 극소수의 괴짜만 경청하겠지.”
“그렇습니까.”
백무량은 아랫입술을 짓씹었다.
인정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척준환의 말은 명료하게 한계를 꼬집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척준환이 허심탄회하게 사설을 늘어놓았다.
“만약 곤륜이 아직 구파일방에 적(籍)을 두고 있었다면 그 명망을 믿었겠지.”
“……하.”
백무량의 인상이 일그러졌다.
마인과 마주했음에도 누구도 믿어 주지 않을 거란 사실이 분했고, 곤륜의 몰락을 타인에게 들으니 의분이 북받쳤다.
‘이런 미래를 위해서, 이깟 강호를 위해서…… 사부와 동문이 죽어야 했나?’
백무량의 머릿속에서 표류하던 분노가 점차 강호를 향하던 그때였다.
“곤륜의 도를 어찌 헛된 명망에 비한단 말이오?”
그 말에 백무량의 시선이 옆으로 향했다.
곤륜파의 장문인, 현노윤이 무덤덤한 표정으로 이곳을 향해 저벅저벅 걸어오고 있었다.
학식은 뛰어나나 무공을 모르는 학도사.
백무량은 현노윤을 그렇게 생각했다. 도가적으론 존중받아야 마땅할 도사지만 내심 약자로 여기고 있었다.
그 판단이 틀렸음을, 스스로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척준환도 마찬가지였다.
“……으음.”
척준환의 눈동자에 놀랍단 감정이 흘렀다.
현노윤이 곤륜산맥의 운해를 등진 채 가파른 벽을 내려오는 광경.
그것을 보니 그가 약자로 보이지 않았다. 내공이 없는 몸임을 알기에 더욱 강건해 보였다.
“곤륜은 늘 의를 행함에 있어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소. 뒤에서 누가 침묵한다고 한들, 따진 적도 없었지.”
현노윤의 말에 척준환이 인상을 찌푸렸다.
언뜻 보면 곤륜의 역사를 논하는 듯해도 공동을 꾸짖는 가시가 있었다.
백무량이 저도 모르게 웃음을 머금는 사이, 척준환이 현노윤에게 경고했다.
“함부로 말하지 마시오.”
“이번엔 어린 도사가 홀로 사마외도와 싸우고, 귀 문파의 제자를 구하기까지 했지. 진정으로 개탄할 일이오, 현천신검. 하늘이 얼마나 어지러우면 이런 일이 벌어진단 말이오? 백련교가 개입했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은 일 아니오?”
현노윤이 척준환의 코앞까지 다가서며 낮은 목소리로 그를 꾸짖었다.
‘……허.’
그 모습에 백무량은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강호 십 대 고수인 척준환조차도 현노윤에게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작은 체구의 노도사일 뿐일진대, 풍화된 바위와 같은 시선과 목소리엔 상대를 은연중에 압박할 힘이 있었다.
그렇게 척준환이 침묵하자, 현노윤이 하려던 말을 이었다.
“백련교란 단어가 강호에 일으킬 파장이 얼마나 클지 나도 알고 있소. 확실한 증거 없이 분란을 일으키고 싶지 않겠지요. 하지만 있었던 일을 없애선 안 되는 법이오.”
그 말에 척준환이 고개를 떨어뜨렸다.
백무량이 보기엔 그가 현노윤에게 진정으로 승복한 듯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가 보기에 장문인은 자신을 키워 낸 스승이었고, 실전된 무공인 구천화우검을 되살린 무학자(武學者)였다.
하물며 조금 전에 보인 존재감은 어떻던가?
척준환에게 곤륜의 거인으로 보였을 것이다.
자신의 예상대로, 척준환은 신중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장문인께서도 백련교의 존재를 확신한단 말이오?”
현노윤이 담백하게 대답했다.
“나는 곤륜의 소영웅(小英雄)을 믿소.”
현노윤이 보낸 신뢰에 백무량은 환한 미소로 화답했다.
하지만 그의 말은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
“그러니 확실하게 알아볼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척준환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하면 되겠소?”
곤륜파에 당도했을 때만 해도 가벼웠던 척준환의 태도가 어느새 진중하게 변해 있었다.
***
무려 두 시진 동안의 대화를 마친 뒤, 척준환이 지친 표정으로 곤륜파를 떠났다.
그 뒷모습을 지켜보던 백무량은 현노윤에게 시선을 돌렸다.
“상대가 강호 십 대 고수인데 떨리지 않았느냐?”
농담처럼 말하긴 했지만, 다시 생각해도 놀라운 일이었다.
현 강호를 대표하는 노고수를 꾸짖었을 뿐만 아니라, 한순간이지만 그를 압박하기까지 했으니까.
현노윤이 정면을 바라본 채 입을 열었다.
“제가 왜 떨겠습니까?”
“……?”
“현천신검은 백련교란 단어에도 기겁했지만, 사조님은 그들과 직접 싸웠던 영웅이 아닙니까?”
현노윤이 특유의 어투로 자신의 말을 강변하니, 백무량은 실소를 흘렸다.
“그래도 지금은 그가 더 강하지 않느냐? 만일 그의 성격이 유하지 못했다면 어쩌려고?”
현노윤이 고개를 내저었다.
“유하기는요. 사조님한테 현천신장에 대해 따지려고 들지 않았습니까.”
“허. 생각해 보니 그렇군.”
백무량의 기분이 나빠지려는 차에 현노윤이 서둘러 말을 덧붙였다.
“그래도 사조님과 비무를 하면서 전력을 다하지 않았으니 농담이었을 겁니다.”
“학도사가 꾸짖는데도 가만히 있었으니 인내심도 상당하다고 봐야겠지?”
그렇게 서로 농담을 던지던 백무량과 현노윤은 약속이라도 한 듯 껄껄 웃어젖혔다.
과거에 있었던 어려움이나 실패, 좌절 따위를 모두 털어 버리기 위한 웃음이었다.
“앞으로가 중요할 거야.”
“예.”
어린 사조와 늙은 장문인.
나이와 살아온 시간이 완전히 달랐지만, 두 도사는 서로를 존중했고 같은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백련교의 난 이후로 강호 전역에 흩어졌던 곤륜도가 돌아올 거고.”
“그중에 십중팔구는 걸러내야겠지요.”
“앞으로 반년이면 곤륜파의 조사전이나 삼청궁도 수복할 수 있을 것이야.”
“팔선도와 태상노군상도 송 노야를 통해 수복할 예정입니다.”
“돈은 운산보의 재산으로 충당이 되더냐?”
“그 점에선 송 노야가 물심양면 도와주고 있습니다.”
송 노야인가.
백무량은 그가 사형으로부터 이어진 인연임을 떠올리곤 혼잣말을 뇌까렸다.
“백련교의 난 이후로 몰락했다고 하나, 청해는 곤륜을 잊지 않았고. 은혜 입은 남자는 노인이 되어서 은인을 위해 왔으니…….”
“…….”
현노윤은 백무량의 말을 조용히 경청했다.
사실, 백무량이 말하는 사형의 존재에 대해 떠오르는 건 여전히 없었다. 막연히 사조를 존중하고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송우현과 백무량이 갔다던 동굴의 존재를 보니 믿을 수밖에 없었다.
하물며…….
‘십 대의 나이에 현천신검과 검을 나누시다니.’
주씨 성을 가진 사조님이 삼청의 명을 받아 백무량을 도와주고 있다는 게 믿어질 정도였다.
‘게다가 사조님이 가져온 시서화는…….’
보통 수준이 아니었다. 호광성에서 날고 긴다는 명필을 데려와도 단시의 유려함에 비할 수 없을 터였다.
현노윤은 백무량의 했던 말을 떠올렸다.
“사조님이 수련하시는 동안 제가 한번 알아보겠습니다.”
“무얼 말이냐?”
“사조님의 사형이 남겼다던 다섯 점의 그림 말입니다.”
백무량의 표정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기억이 난 것이냐?”
“실망하게 해 드려서 죄송하지만, 그렇진 않습니다. 그래도 그림을 보다 보면 떠오르겠지요.”
“……그렇더냐.”
백무량이 실망한 표정을 짓자, 현노윤은 저도 모르게 눈을 꾹 감았다.
어떻게 사조님을 위로해야 하나.
막막함이 현노윤의 가슴께까지 차오르던 그때였다.
“현사조님!”
멀찍이서 달려오는 현종휘가 밝은 목소리로 분위기를 환기했다.
“얼른 저랑 철 사제 좀 가르쳐 주세요! 사람들이 오기 전에 많이 배워 두고 싶단 말이에요!”
그 말에 백무량이 근엄한 표정을 지었다.
“사람들이라니……. 잠시 본산을 비웠을 뿐, 동문이라고 하지 않았더냐.”
“칠십여 년 동안 들르지도 않았는데요?”
“어허! 말대꾸하는 걸 보니 오늘은 무공보다 예의범절을 가르쳐야겠구나!”
“……잉.”
현종휘가 두 눈을 끔뻑거리자, 백무량과 현노윤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앞으로 조심하거라.”
“이따가 도적(道籍)에 대해 다시 알려 주마.”
그 말에 현종휘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백무량의 앞섶을 잡아당겼다.
“저도 고수 될래요, 되고 싶어요.”
현종휘는 백무량이 척준환과 검을 겨루던 순간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걸 내심 알아차린 백무량이 피식 웃었다.
“그게 쉬우면 무림인 모두가 강호 십 대 고수지!”
“그럼 전 안 돼요?”
“이 현사조만 믿고 따라오면 돼.”
그렇게 말한 백무량은 현종휘와 어깨동무를 하고는 연무장으로 향했다.
***
그로부터 보름 뒤.
모두가 잠을 이룰 시간에 한 남자가 무림맹에 몰래 숨어들었다.
환한 달빛이 복도를 비추는 가운데, 남자의 걸음은 소리 없이 고요했다. 이곳이 무림맹임을 고려하면 무척 놀라운 일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걷던 남자가 복도 끄트머리에서 멈춰 섰다.
금색의 칠성(七星)이 화려하게 장식된 문.
무림맹 내에서 이렇게 자존을 내세우는 무인은 단 한 명뿐이다.
제대로 찾아왔다고 생각한 남자는 문을 강하게 열었다.
그러자 안쪽에서 미리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연통 하나 없이 이 야밤에 어쩐 일이오?”
상반신을 일으킨 무인의 얼굴에 불쾌함이 가득했다.
남자는 그를 달래기 위해 두 손을 모았다.
“중대사를 논하고자 하오, 검왕.”
전신에 흐르는 정광(正光), 현천(玄天)이라 수놓아진 도복.
현천신검 척준환은 고개를 꼿꼿이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