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파 (4)
“농담이라?”
척준환은 인상을 찡그렸다. 백무량이 괘씸했다. 어디 감히 어르신에게, 그것도 일문의 장문인에게 저런 태도를 보인단 말인가?
그 생각은 조금씩 사라져 갔다.
‘오호라?’
생각보다 백무량의 검술이 뛰어나다.
척준환의 입가가 점차 호선을 그리기 시작했다.
까가각……!
백무량의 검과 맞물리니 시뻘건 불똥이 튀었다. 두 검이 서로 붙었다 떼어지기를 반복하며 허공에서 붉은 나비를 그렸다.
공동과 곤륜, 두 도문의 검술이 경합을 벌이는 순간이었다.
“요놈!”
어린 후배를 대하던 척준환의 얼굴에 흥미가 동했다.
백무량이 단순히 자신의 검을 걷어 낼 뿐이라면, 그저 찰나에 불과할 흥미였을 터였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자신의 검과 마주한 백무량에겐 분명한 의지가 있었다.
불퇴(不退), 곤륜의 도사는 어떤 강자 앞에서도 물러나지 아니하니.
백무량은 저 어린 몸으로 곤륜파의 정신을 증명하고 있었다.
‘허!’
척준환의 눈동자에 격한 풍랑이 일었다.
겨우 십 대에 불과한 백무량이 강호 십 대 고수인 자신을 진심으로 이기려 하고 있었다.
척준환은 그 모습에서 울컥하는 감정이 들었다.
청심(淸心).
공동파의 장문인이 된 이래로 잊고 살았던 것이었다.
그렇게 척준환이 옛 추억에 잠긴 그때.
“집중하십시오.”
백무량의 경고성이 척준환의 귓가를 스쳤다.
뒤이어 허공에서 기괴한 소음이 일었다.
파직!
삼절광식의 이 초, 일섬운월이 척준환의 검을 향해 휘둘러졌다.
‘나이에 맞지 않게 완숙하도다!’
오래된 절학을 체득했을 뿐만 아니라, 사문의 무공까지 높은 성취를 이뤘단 말인가?
‘공동파에 저런 제자가 두셋은 있었다면 강서 무림을 주름잡았을 텐데. 쯧.’
척준환은 공동파에 있는 제자들을 떠올리곤 혀를 강하게 찼다.
그만큼 척준환에겐 여유가 있었다.
깡!
척준환이 일섬운월을 강하게 맞받아치자 백무량이 십 보 이상 밀려났다.
누구라도 검을 떨어트릴 만한 충격이었고, 척준환이 의도한 것이기도 했다.
후배의 각오는 충분히 보았다. 후배가 보인 의연함이나 재능은 지금까지 본 후기지수 중 최고라며 칭찬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백무량은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끝까지 버티겠단 게냐?”
“…….”
자신의 질문에 백무량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한쪽 입가에 흐르는 핏물이 척준환의 일 검을 가까스로 흘렸음을 짐작하게 했다.
척준환의 얼굴이 수심에 젖었다.
“휘어지느니 부러지겠단 뜻이냐?”
“곤륜은 나에게 그렇게 가르쳤습니다.”
“강호에서 비명횡사하기 딱 좋은 소리구나. 강자의 양보조차 거절하는 미련함이라니.”
“저도 그렇게 생각했지요.”
“……?”
백무량의 대답에 척준환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기도 그렇게 생각했었다니, 그건 소년에 불과한 백무량이 할 만한 대답이 아니었다.
하지만 백무량의 눈빛과 말에서 느껴지는 무게가 은연중에 척준환을 납득시켰다.
“애늙은이가 따로 없구나. 좋다. 하면…… 강호의 대답이 어떠한지 직접 알려 주는 수밖에 없겠구나.”
척준환이 기수식을 취하자 백무량 또한 태청신공을 끌어 올렸다.
스르르륵…….
그 모습이 마치 구름이 백무량의 검을 휘감는 듯했다.
‘오만할 자격은 갖추었는가.’
척준환은 저도 모르게 떠올린 생각에 경악했다.
후기지수. 그것도 겨우 십 대에 불과한 나이의 소년에게 품을 감정이 아니었다.
어쩌면, 정말, 천하제일인이 될 재목일지도 모른다.
“허.”
척준환의 헛웃음에 복잡한 심경이 담겼다.
백무량이 곤륜도임이 아쉬웠고, 곤륜도이기에 연민할 수밖에 없었다.
‘하늘에 비할 재능을 가졌다고 한들 꽃피울 수 없다면 봉오리에서 썩기 마련이니.’
자신은 어디까지나 공동파의 장문인일 뿐. 곤륜파를 청성파와 적대하면서까지 도울 이유는 없었다.
백무량을 바라보는 척준환의 시선에 아쉬움이 내려앉았다.
‘이 녀석이 만약 곤륜도가 아니라, 공동파의 제자였다면…….’
청성파와 대적하는 한이 있더라도 지켜 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러기가 애매했다. 겨우 사파 잡배가 남긴 일지를 신뢰할 수 없을뿐더러, 두 문파 간에 끼어들 명분이 부족했다.
그렇게 척준환이 복잡한 이해관계를 생각할 때였다.
“가겠습니다.”
백무량이 자신에게 검을 겨눈 채 말했다.
척준환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 복잡한 것에 사로잡힌 자신과는 다르게 백무량은 무척이나 경쾌했다.
마치 제비와 같았다.
그 모습을 보자니 흉중에 품은 협의(俠義)만을 믿고 움직이던 과거가 떠올랐다.
‘장문인이 되니, 어느새 협의보다 사문의 안위를 챙기게 되었구나.’
척준환의 입가에서 자조 섞인 실소가 터졌다.
“그래, 오너라.”
척준환이 검을 들었다.
그 모습을 본 백무량은 호흡을 가다듬고는 그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머릿속으로는 구천화우검의 형을 그리며 그를 이길 검로를 상상했다.
일 보 그리고 일 보.
척준환과 가까워질수록 압력이 거세진다. 짓무른 땅에 발자국이 새겨지고, 백무량의 팔뚝에 힘줄이 두드러졌다.
그렇게 세 걸음을 남겨 두고 백무량은 생각했다.
‘없다.’
불가능하다.
그것이 백무량의 답이었다.
현 무림의 강자, 강호 십 대 고수 척준환에게 이긴다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구천화우검이 아무리 고절하고, 태청신공이 현묘한 묘리를 지녔다고 한들 역량의 차이가 있는 법이었다.
단지 보여 줄 뿐이다.
자신을 지켜보고 있을 현씨 조손에게, 그리고 현 무림을 대표하는 척준환에게.
‘곤륜의 의는 여전히 살아 있음을.’
할 수 있는 것부터 차근차근하면 되는 것 아니겠는가.
마음을 정리한 백무량이 검을 쥐니 태청신공으로 유형화한 구름이 부옇게 흩어졌다.
“호천풍연.”
백무량은 초식명을 낮지만 분명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멀리서 보고 있을 현종휘를 위한 것이기도 했지만, 자신의 심상을 분명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첩첩이 쌓인 검기가 구름으로 화해, 운해에 뒤섞여 녹아드니.
-그것이 구천화우검의 삼 초이며, 운검(雲劍)의 절초다. 강함에 집착하면 호천풍연이란 본의(本意)를 잃고 평범한 검기로 전락할 것이다.
백무량은 주자령의 가르침을 떠올리며 검을 휘둘렀다.
스르륵.
구름으로 화한 검기가 척준환에게 쇄도했다.
“……!”
인상을 찡그린 척준환이 단숨에 검을 휘둘렀다.
운해에 뒤섞인 무형의 검기를 쳐 내는 게 쉽지 않을 텐데도, 과연 강호 십 대 고수다운 솜씨였다.
백무량은 곧바로 다음 초식을 쏟아 냈다.
카앙!
백무량이 펼친 창천명월과 척준환의 검이 부딪쳤다.
그와 동시에 백무량의 어깨에서 비틀리는 소리가 났다. 이마저도 척준환이 손 속에 사정을 두어서 가능한 일이었다.
까득, 백무량은 어금니를 앙다물며 눈에 힘을 가득 주었다.
‘더 정밀하게, 더 강하게.’
백무량의 눈에서 실핏줄이 터지고, 근육이 비명을 내지르는 듯했다. 어린 몸으로는 너무 과한 움직임이었다.
하지만 그럴수록 백무량의 움직임은 전보다 정교해졌다.
백련교주와의 싸움에서 얻은 심득과 주자령의 가르침이 진정한 강자와 겨루면서 조금씩 전신에 녹아들고 있었다.
그러다, 종래엔…….
스슥.
척준환의 발이 반보 뒤로 움직였다.
“……이럴 수가.”
척준환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애써 무덤덤한 척하지만 그의 눈동자에는 경악으로 가득해 보였다.
당연한 일이었다.
후기지수가 순수하게 검술만으로 척준환의 반보를 움직이게 하다니, 참으로 말도 안 되는 기량이었다.
자신을 한참 동안 바라보던 척준환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진정으로 곤륜에 신성이 나타났단 말인가.”
‘그야 놀랍겠지.’
백무량은 흡족한 미소가 지어지는 걸 애써 숨겨야만 했다.
아직 어린 나이임에도 높은 경지를 이뤘을뿐더러, 곤륜파의 무공이 공동파에 뒤지지 않단 사실을 깨달았다.
‘이대로 정진한다면 정말, 백련교주가 다시 나타난대도 이겨 낼 수 있어.’
“머지않은 미래엔 나와 맞수를 겨룰지도 모르겠구나.”
척준환이 진실로 감탄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도 예상하지 못했을 터였다.
자신의 목표는 강호 십 대 고수가 아니라 그 위에 있다는 것을…….
이를 모르는 척준환은 백무량이 왜 이렇게 필사적으로 싸웠는지, 그 의도를 잘못 이해했다.
“네 뜻은 잘 알았다.”
그의 시선이 하늘로 향했다.
운해가 시야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범인(凡人)이라면 모두 같은 구름일 거라 지레짐작하겠지만, 자신은 달랐다.
저 운해가 항상 변화하고 있음을 안다. 바람이 오래된 구름을 흩어 내고 빈자리를 채워 감을 알았다.
‘그랬구나!’
그제야 척준환은 백무량의 진의를 깨달았다.
곤륜신성이 강호의 인정을 받길 청한다.
이는 즉 곤륜파가 청성파의 부정을 밝혀 강호의 정의를 바로 세우겠다는 뜻이거늘!
‘소년에 불과한 후기지수가 이토록 필사적인데, 나는 이해관계나 따지고 있었다니…….’
척준환의 얼굴이 붉어졌다.
공동파의 장문인이란 자리에 있기에 문파 간의 이해관계를 따지는 거야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도사로서는 그래선 안 됐다. 백무량의 모습에서 과거의 자신을 보았기에 더더욱 부끄러워졌다.
‘협의가 먼저임을 잊었단 말이냐!’
자신을 책망한 척준환은 애써 무덤덤한 목소리로 운을 떼었다.
“내가 도우마.”
“예?”
백무량이 어이가 없다는 듯이 두 눈을 끔뻑거렸다.
하지만 하늘을 바라보고 있던 척준환은 그걸 알아차리지 못했다.
“청성파가 부정을 저질렀단 이야기를 듣고도 현천신장에 대해 떠들고 있었으니, 네게 얼마나 한심하게 보였겠느냐?”
“……저, 그게 아니라…….”
백무량이 입술을 어물거렸다. 하지만 척준환의 말은 쉼 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강호의 선배가 되어 추한 꼴이나 보였으니 부끄럽기 짝이 없도다.”
“무언가 큰 오해를…….”
“내 면을 세워 주려거든, 되었다. 네 덕분에 나도 크게 개안했으니 말이다.”
백무량은 척준환에게 겨눴던 검을 엉거주춤하게 회수했다.
공동파의 장문인이 저렇게까지 말했는데, 이제 와서 제 무공이 어디까지 통용되는지 싸우고 싶었단 말을 해 봐야 욕만 들을 뿐이었다.
바로 그때.
백무량의 뇌리에 커다란 영감이 스쳐 지나갔다.
“장문인, 그렇다면 부탁을 하나 드려도 되겠습니까?”
“부탁?”
“예.”
그렇게 말하는 백무량의 표정이 몹시 진지해서, 척준환은 잠시 침음을 흘렸다.
공동파가 전폭적으로 돕겠다고 말하던 찰나에 부탁이라?
호기심이 동한 척준환이 백무량에게 물었다.
“한번 말해 보아라.”
“강호 전역에 흩어져 있는 곤륜도를 모을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척준환이 홍소를 터트렸다.
“과연 곤륜의 신성이로다! 그래, 들어주마!”
백무량은 척준환과 마주 웃으며 속으로 생각했다.
‘예전에 사형이 농담처럼 말했었지. 곤륜파가 과거 이상의 성세를 이루기 위해서는 한 가지가 필요하다고…….’
그건 시간이었다.
마교와 싸울 때마다 곤륜파는 항상 반 토막이 나거나 멸문하기 일쑤였다.
세력을 제대로 키우기는커녕 재건하는 것만으로도 하늘의 뜻이라 여겼었다. 사실 지금까지 무림이 곤륜파를 잊지 않고 있다는 것 자체가 기적이었다.
무림맹이 곤륜파를 존경하여 생긴 일이라지만, 글쎄.
‘직접 호광성으로 가 봐야 알 일이지.’
따라서 백무량은 생각했다.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조용히 성장할 시간만 주어진다면 최강의 곤륜을 일굴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앞으로는 곤륜파가 모든 업을 짊어지지 않도록 하겠다.
백무량은 그 마음을 담아서, 진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믿어 주셨으면 하는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편히 말해 보아라. 내 경청하마.”
일문의 장문인임에도 스스로 자세를 낮추는 모습에, 백무량은 한결 가벼운 목소리로 물었다.
하지만 그 내용은 절대 가볍지 않았다.
“장문인께선 백련교의 난을 기억하십니까?”
“……네가 그걸 어찌 아느냐?”
척준환의 표정이 심각하게 일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