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파 (3)
그로부터 닷새 뒤.
백무량은 거인(巨人)과 마주했다.
“자네가 곤륜신성인가?”
거인의 목소리는 침착하고 낮았다.
그의 반듯이 편 어깨와 깊게 가라앉은 눈빛에서 끌끌하고 점잖은 풍모가 느껴졌다.
그 모습이 자신의 사부인 주자령을 방불케 해서, 눈시울이 붉어질 것만 같았다.
백무량은 서둘러 두 손을 포개며 고개를 숙였다.
“후배 백무량이 공동파의 장문인을 뵙니다.”
“…….”
척준환이 잠시 침묵했다.
그 찰나 동안 백무량은 닷새 동안 품었던 예상들을 떠올렸다.
‘현천신장을 거두겠다거나 용인하는 대신 운산보의 영역을 조금 받겠다거나…….’
그 외에도 몇 가지가 더 있었지만, 척준환의 대답은 그것들을 훨씬 뛰어넘은 것이었다.
“뭘 그리 긴장하나?”
“……예?”
“잡아먹기라도 할 것 같았는가?”
백무량은 저도 모르게 눈을 끔뻑였다. 어떤 말에도 당황하지 않겠단 마음이 깔끔하게 무너져 내렸다.
그 모습을 본 척준환이 소리를 내 껄껄 웃었다.
“소문은 후배를 철혈의 검객처럼 말하지만, 실제로 만나고 보니 귀여운 구석이 있구먼.”
‘……내가?’
피라도 토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귀엽단 말도 문제지만. 아니, 애초에 항렬로 따지자면 척준환도 자신의 후배가 아니던가?
백무량이 뚱한 표정을 짓자, 척준환이 다른 의미로 받아들였다.
“무인으로 살아가려면 낯가림 정돈 없애야 할 걸세. 허허.”
“…….”
백무량은 순간 할 말이 없어졌다.
대화도 몇 마디 나누지 않았는데, 어느새 부끄러움이 많은 후배가 되어 버린 듯했다.
백무량이 서둘러 화제를 바꿨다.
“고 선배는 괜찮습니까?”
“몸 튼튼한 거 말곤 특출 난 게 없는 놈이니 금방 일어날 거네.”
척준환의 얼굴에 마뜩잖단 표정이 스쳤다.
그걸 본 백무량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다른 문파의 제자 앞에서 적전제자를 저렇게 말하다니…….’
놀라웠다. 일파의 장문인이 저렇게 말했단 사실이 신선하기까지 했다.
‘내가 강호를 떠돌던 시절엔 제법 엄격했던 것 같은데.’
백무량이 칠십여 년 전의 공동파를 떠올리던 그때였다.
“제자를 구해 줘서 고맙네. 진심일세.”
그렇게 말하는 척준환의 태도가 퍽 진지했다.
그가 공동파의 장문인임을 생각하면, 타문의 후기지수인 자신에게 성의를 다한 셈이었다.
백무량은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었다.
“아닙니다. 오히려 고 선배께 배운 게 많았습니다. 도사의 태도라든가…….”
척준환이 백무량의 말을 천연덕스럽게 받았다.
“현천신장을 배우지 않았더냐?”
“정당한 내기였지요.”
백무량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 말을 들은 척준환의 눈가가 호선을 그렸다.
“자네가 먼저 말했다지?”
“현천신장을 가르쳐 주겠단 건 고 선배였습니다.”
“허허…….”
척준환이 공력을 운용하자, 백무량은 마주 웃으며 태청신공을 일으켰다.
궁금했을 것이다.
자신이 현친신장을 능히 소화할 재목일지, 그 무공으로 패악을 저지르진 않을지.
그 속내를 이해하지만, 백무량으로선 헛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까마득한 후배가 자신을 시험하는 셈이니까.
‘내가 구천검이란 걸 말해 봐야 믿지도 않을 테고.’
백무량은 속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아무리 자신이 어려졌어도 그렇지, 쉬이 받아들일 수 없었다.
‘쉽게 져 주진 않아, 후배.’
태청신공의 공력이 구름으로 화했다.
그 구름이 백무량을 중심으로 똬리를 틀어, 정수리에 맴도니.
“저건……!”
과거, 곤륜파의 고수가 펼쳤다던 신묘한 절학이 아니던가?
척준환의 눈동자에 경악이 가득했다.
선배가 남긴 문헌을 읽지 않았다면 알아보지 못했을 만큼, 백무량이 펼친 기예는 몹시 오래된 절학이었다.
“곤륜파가 실전된 무공을 되찾은 것이냐!”
“…….”
척준환의 외침에 백무량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행동으로 보일 뿐.
쿠르르르.
태청신공으로 빚어진 구름이 곤륜산맥의 운해와 뒤섞였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선명했던 백무량의 얼굴이 희뿌옇게 일변했다.
“허! 대단하다, 대단하도다!”
연거푸 감탄을 흘린 척준환이 강한 호기심을 드러냈다.
“하나, 겉모양만 그럴듯해선 안 되는 법이지.”
“장문인의 인정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뭐라?”
척준환의 낯빛이 일그러졌다. 달싹이는 입가에서 금방이라도 호통이 떨어질 것만 같았다.
그럼에도 백무량은 무덤덤하게 말을 이어 나갔다.
“나는 강호가 인정하기를 바랍니다.”
“오만하다!”
몹시 우악스러운 목소리였지만, 척준환의 얼굴에는 어느새 짙은 미소가 맺혀 있었다.
“그러나 명문 거파의 후예로서 실로 옳은 태도이니, 묻겠다. 정녕 강호의 인정을 바라느냐?”
“그렇습니다.”
“단신으로 운산보주를 꺾은 것으론 모자란단 말이더냐?”
“세상이 넓음을 압니다.”
백무량의 대답에 척준환이 크게 감탄했다.
운산보주를 세상으로 향하기 위한 디딤돌로 여긴단 말인가!
그가 보기엔 백무량은 맹랑하단 수준을 넘어섰다.
그러나 충분한 자격이 없으면 애꿎은 목숨만 날릴 뿐.
그 사실을 아는 척준환이 굳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렇다. 운산보주는 드넓은 강호에서 숭어에 불과하니, 그보다 수십 배는 큰 이무기가 있고, 그 위에 용이 있기 마련이다. 그러니 다시 묻겠다. 너는 그들에게 인정을 받고 싶으냐?”
“천하가 감히 곤륜을 무시할 순 없습니다.”
그 말에 척준환의 눈이 깊어졌다.
“말에 담긴 무게를 감당할 수 있겠느냐?”
“자신이 없다면 이 자리에 서지도 않았을 겁니다.”
백무량은 척준환과 시선을 마주했다. 그의 눈에는 혼란스러움이 가득해 보였다.
자신이 보기에도 후기지수가 감히 꺼낼 말이 아니었다.
하지만 백무량에겐 진심이었다.
강호에 숨어 있는 백련교와 사형, 언제 공격할지 모르는 청성파까지.
혼란스러운 상황을 단번에 정리하고 싶었다.
‘나는 완벽하지 않아. 언젠가…….’
사람은 실수를 한다.
그 점에서 백무량은 실수를 경험했고, 패배로 인해 목숨을 잃었다. 도박 수는 어디까지나 도박일 뿐이다. 진정한 강자인 백련교주에겐 통하지 않았다.
그러나 사람은 성장하는 법이었다.
백무량은 도박 수에 불과했던 검해를 조금씩 깨우치고 있었다.
‘언젠가 백련교주와 다시 마주하더라도 패배하지 않도록, 조금씩 실수를 줄여 가면서.’
그랬다. 자신은 실수와 패배에서 성장한 무인이었다.
백무량이 그 사실을 곱씹던 그때.
공력을 한껏 끌어 올린 척준환이 자신에게 물었다.
“강호 십 대 고수로서 감히 강호를 대신하여 묻노니, 곤륜의 신성은 답할 준비가 되었느냐?”
“예.”
휘르르…….
척준환의 공력에 곤륜산맥을 뒤덮은 운해가 위로 부드럽게 넘겨졌다. 그가 공동파 무공을 대성했다는 증거였다.
백무량은 그것을 똑바로 직시하면서도 조금의 두려움도 품지 않았다. 단지 백선신검을 붙잡을 뿐이었다.
그 모습을 본 척준환이 나직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하면, 검으로 대답을 받겠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척준환의 공력이 자취를 감췄다. 그러나 그의 존재감은 여전히 태산처럼 무거웠다.
‘강호 십 대 고수라…….’
백무량은 그 모습에서 과거의 사부를 떠올렸다. 천하에서 태청선이라는 별호를 모르는 사람이 없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그 사부마저도 백련교주는 이기지 못했다.
따라서 목표를 수정해야만 했다.
‘저 경지보다 더 높은 곳으로 가야 해.’
누군가가 듣는다면 코웃음을 칠 이야기였다.
천하의 무인이라면 모두 강호 십 대 고수를 우러러보거늘, 풋내 나는 소년이 할 말이 아니라고 할 것이다.
하지만 해내야 했다. 그들의 비웃음과 질시 따위는 아무렇지 않게 무시하고 극복해야 했다.
이것은 척준환이 준 기회였다.
‘태청신공의 절학이 어떤 수준인지 확인할 기회야.’
백무량의 시선이 잠시 오른쪽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현씨 조손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한편으로는 주먹을 꾹 쥐면서.
자신을 지극히 신뢰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백무량은 그들에게 보여 주고 싶었다.
‘어떤 강자 앞에서도 물러나지 않는 곤륜의 정신과 태청신공의 위대함을.’
또한, 곤륜의 검은 바다[劍海]와 같다는 것을.
***
콰아앙……!
단 일 초, 비무광 사이에서 교검(交劍)이라 불리는 첫 합에 곤륜산맥의 운해가 일렁였다.
그 모습이 마치 구름 전체가 파도처럼 너울지는 듯했다.
그렇게 얇게 저며진 운해 사이로 두 그림자가 드러났다.
백무량과 척준환.
두 검객이 서로를 향해 칼날을 드러내고 있었다.
“저, 저게 말이 되는 건가요?”
그 광경을 본 현종휘는 입을 헤벌렸다.
언뜻 보면 백무량이 밀리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조차도 파격이었다.
현천신검이라 불리는 척준환에게 무덤가에서 깨어난 지 일 년도 되지 않은 백무량이 맞서고 있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 모습을 자세히 살피던 현노윤이 탄성을 터트렸다.
“사조는 늘 진실만 말씀하셨구나!”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종휘야, 똑바로 보아라!”
현노윤이 가리킨 곳을 따라 현종휘가 시선을 집중했다.
현종휘는 그제야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조금씩 밀려나고, 힘겨워하시지만.’
척준환과 비무를 시작한 순간부터 백무량은 그 자리에서 삼 장 밖을 벗어나지 않고 있었다.
깜짝 놀란 현종휘는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현노윤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아니, 더욱더 심했다.
“내 대에 이런 광경을 볼 수 있다니…….”
현노윤의 주름진 얼굴에 감격으로 가득한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러나 주저앉아 있던 현종휘는 이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저 평소처럼 친애하는 할아버지에게 여쭤볼 뿐이었다.
“사조님께선 무슨 생각일까요?”
“곤륜도라면 가슴에 곤륜운평천하(崑崙雲平天下)란 글귀를 품기 마련이다. 알고 있느냐?”
“예…….”
현종휘가 자신감 없는 목소리로 답하자, 현노윤이 곧바로 물었다.
“곤륜운평천하가 무슨 뜻이더냐?”
“곤륜의 구름이 천하를 다스린단 뜻이죠.”
현 강호에 이르러선 비웃음거리밖에 되지 않는, 과거의 영광에 지나지 않았다.
어린아이인 현종휘마저 그 사실을 알 정도였다.
그러나 백무량은 달랐다. 비웃음으로 가득한 시선을 공동파의 장문인인 척준환과 겨룸으로써 부정하고 있었다.
눈물을 슥 훔친 현노윤이 감동에 젖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사조님께선 그걸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보여 주시려는 게야…….”
그 말에 현종휘가 몸을 불쑥 일으켰다.
주저앉았던 흔적을 지우려는 듯 엉덩이에 묻은 흙을 털어 냈다.
그러고는 백무량과 척준환의 비무를 눈에 담았다.
조금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집요한 시선으로.
***
‘이게 약관도 채 되지 않은 후기지수라고?’
척준환의 눈가가 찌푸려졌다.
이것이 정녕 재능이라면, 어떤 수식어를 붙여도 부족하지 않은 재능이었다.
아니, 재앙이라도 불려도 이상하지 않았다.
검을 쥔 무인이라면 모두 백무량을 보고 질투에 몸부림칠 테니까.
“후기지수가 맞긴 하느냐?”
척준환에게 별다른 생각은 없었다.
그저 농담이나 칠 요량으로, 가볍게 던진 물음이었다.
그 물음에 백무량이 대답했다.
“아니게 될 겁니다.”
“뭐라?”
“천하가 인정하는 사람을 무어라 하는지 아십니까?”
그 말에 척준환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천하제일인(天下第一人).
백무량은 틀림없이 그것을 논하고 있었다.
“건방지기가 하늘을…….”
“농담이었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백무량의 눈이 요사스러운 빛을 드러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