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검해-37화 (37/275)

격동 (2)

“언제 처형하겠답니까?”

“그 미친 새끼 마음을 어찌 알아?”

백무량의 말에 주겸이 난폭한 말을 쏟아 내며 씩씩거렸다.

“몰래 엿듣다가 방금 탈출한 거다. 언제일지는 나도 몰라.”

“…….”

백무량의 속내가 복잡해졌다.

서녕에 도착한 지 한 시진도 되지 않았는데, 처형이라니.

충격적인 소식이 차가웠던 머리를 단번에 덥혔다.

“어딥니까?”

“뭐?”

“지금 가서 구출하겠습니다.”

“거기가 어디라고 가? 죽으려고?”

주겸이 어이가 없다는 듯 눈을 끔뻑였다가, 백무량의 행적을 떠올리고는 표정을 굳혔다.

“일개 지부랑 같은 줄 알아? 거기 갔다가는…….”

“구해 주길 기다리는 사람이 있지 않습니까?”

그렇게 말하는 백무량의 표정이 몹시 단호해서, 주겸이 당황할 정도였다.

“아니, 아니아니…… 이 곰 같은 놈아. 내가 당해 봐서 아는데, 거기 십새끼들이 수십은 넘어요. 너처럼 얄쌍한 애가 뭘 어떻게 할 곳이 아니라니까?”

“가 보면 알겠지요.”

“네 머리엔 냉정이나 뭐, 침착 같은 거 없냐?”

“…….”

“와! 이거 골 까는 놈이네.”

“이만 가 보겠습니다.”

백무량이 터벅터벅 걸어가자, 주겸의 속내가 복잡해졌다.

자기는 살아남겠다고 발버둥을 쳤는데, 저 어린놈이 죽으러 가다니.

한쪽 입술을 씰룩거린 주겸이 그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어딘지는 알고 가는 거냐?”

“시장에 있는 무인한테 물어보면 알겠지요.”

“……야.”

어쩜 저렇게 대책이 없을까?

주겸은 옷에 손바닥을 슥슥 닦고는 백무량을 붙잡았다.

“뭡니까?”

백무량이 무표정한 얼굴로 주겸을 바라보았다.

그 시선에서 서늘한 한기가 느껴졌다. 시간이 아깝다는 강렬한 의지가 듬뿍 담겨 있었다.

주겸은 침을 꿀꺽 삼켰다.

한편으로는 울컥하는 마음이 들기도 했다.

“인마, 너는 같이 가자는 말도 안 하냐?”

“선배는 몸부터 씻으십시오. 냄새가 너무 심해서 백 리 밖에서도 코가 저릴 것 같습니다.”

“씁.”

자기 옷에 코를 박은 주겸이 우웩거리며 침을 뱉어 댔다.

아무리 개방도라도 역한 냄새는 참기가 어려운 듯했다.

그를 흘낏 바라본 백무량이 입술을 달싹였다.

“탈출해 본 경험이 있으니, 침투도 가능하겠지요?”

“그게 무슨 말이냐?”

주겸의 눈빛이 예리해졌다.

사람이 허술하고 못나 보이긴 해도, 그는 개방의 이 결 제자였다.

쓰레기 더미에서 탈출했을지언정 길은 모두 외웠을 터였다.

‘내가 시선을 끌면…… 구출해 줄 수 있겠지.’

문제는 주겸이 자신의 의도대로 따라 주냐는 건데.

백무량은 머릿속에서 잡생각을 지웠다. 송우현과 대화를 나누며 늘어난 지혜만큼 의심병도 생긴 듯했다.

뒤이어 그를 바라보며 입술을 달싹였다.

“시선은 제가 끌겠습니다.”

“야! 내가 언제 간댔냐? 야!”

그의 외침을 무시한 백무량은 시장 한가운데로 향했다.

“……후우우.”

지극한 호흡이 용천혈을 통해 온몸을 휘돌아 전신의 기혈을 넓히니, 진기가 벽력과 같은 속도로 대맥을 내달렸다.

고된 강행군으로 쌓인 피로가 일거에 날아갔다. 반쯤 감기려던 눈이 환히 뜨였다.

뒤이어 백무량이 입술을 크게 벌린 순간.

손등의 운룡이 환한 빛이 발했다.

오직 자신만이 가지고 있는 특별한 공능이었다.

“운산보주, 네 이놈! 당장 튀어나오너라!”

서녕 시장 전체에 백무량의 고함이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후드득…….

담벼락 위에 쌓인 모래 따위가 바닥에 떨어졌다.

“……!”

“뭐, 뭐야?”

하물며 시장바닥에 흐르는 흥정이나 실랑이, 하다못해 마차의 바퀴 소리마저도 단숨에 잡아먹혔다.

수백 명이 만들어 내는 잡음이 단 한 명, 백무량의 고함에 짓이겨진 것이다.

경천동지할 충격에 모든 상인의 눈이 동그래졌다. 엄청난 크기의 이명이 귀를 울리고 있었다.

그렇게 짧은 시간 동안 적막이 흐르고 나서야.

“웬 놈이냐?”

무인들의 움직임이 부산해졌다.

고함을 친 놈을 그대로 두었다가는 운산보의 위신이 나락까지 떨어질 터였다.

설령 그놈이 고수라고 할지언정, 눈을 부릅떠 볼 생각이었는데…….

“애새끼잖아?”

헛웃음이 흘렀다.

겨우 저런 꼬맹이가 그 고함을 내질렀을 리가 없었다. 어쩌면 특이한 물체를 써서 목소리를 돋웠을지도 몰랐다.

자신감을 얻은 무인은 백무량에게 서슴없이 다가갔다.

“야, 어떻게 한 거냐?”

‘용모파기를 안 본 건가?’

서녕으로 오면서 습격한 무인 모두 자신의 얼굴을 알고 있었거늘.

백무량이 대답하지 않고 손가락을 꼼지락거리자, 무인이 한쪽 입술을 이죽거렸다.

“안 때릴 테니까 일단 대답부터…….”

“…….”

백무량은 꼼지락거리던 손가락을 모았다.

쩌억!

백무량의 주먹이 무인의 하복부를 때렸다. 급소는 피했다지만, 어린아이답지 않게 주먹이 투박하고 무거웠다.

“우윽.”

무인의 입에서 고통 어린 신음이 새었다.

백무량은 무표정한 얼굴로 팔꿈치를 장절하게 휘둘렀다.

쩍, 고통을 이기지 못한 무인의 허리가 굽어짐과 동시에 백무량이 오른발을 감아 찼다.

“커헉!”

무인이 옆으로 나동그라지며 생각했다.

이게 대체 무슨, 겨우 저런 애한테 이런 꼴을 당하다니? 어미 배 속에서부터 무공을 배웠단 말인가? 창피함이 무인의 얼굴을 붉게 물들였다.

하지만 이제는 인정해야 했다.

“제, 제법 강하…….”

변명을 주절거린 무인이 몸을 일으키려고 했으나.

빠악!

백무량의 발이 무인의 안면을 강타했다. 모골송연한 소리와 함께 콧대가 뭉개지고, 피가 모랫바닥을 적셨다.

한차례 부르르 떨던 무인이 바닥에 축 늘어졌다.

“얼마나 더 망신을 당해야 나올 테냐?”

백무량의 외침에 시장을 감시하던 다섯 검객이 일제히 달려들었다.

한데 땅을 내딛는 보보(步步)가 하나같이 무거웠다.

‘만만치 않아.’

상대의 기량을 어렴풋이 느낀 백무량은 마른 입술을 핥았다.

송우현이 말하길, 일백의 운귀가 운산보에 있다고 했던가?

자신이 곤륜 지부를 들쑤셨으니 운귀를 서녕에 소집했으리란 생각은 미리 해 두었다. 하지만 그들의 기세가 생각보다 매서웠다.

다섯 검객 중 넷이 적산 이상이었고, 하나는 폭혈단으로 변했을 때의 적산 정도였다.

‘차륜전이 가능하다면 할 만할 텐데.’

백무량의 눈이 사방을 훑었다.

과거에 서녕을 제법 많이 오가긴 했지만, 그건 칠십여 년 전의 기억이었다.

지금으로썬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

이점이라고는 적들이 자신을 얕잡아 보고 있다는 점, 오직 하나.

“후우…….”

숨을 가다듬는 백무량을 향해 다섯 검객이 일평생 갈고닦은 절초를 아낌없이 쏟아 냈다.

흑상검(黑祥劍).

충마일연검(充魔一聯劍).

백본검(百本劍).

삭월만검(朔月萬劍).

일보십검(一步十劍).

다섯 개의 직선. 그것으로부터 흩어지는 수십의 줄기가 허공을 수놓았다. 짙은 살기가 백무량을 향해 꿈틀거렸다.

“……허.”

안타깝다.

백무량은 한순간 아랫입술을 짓씹었다.

저놈들의 성품과 행적은 쓰레기 같은 것이라지만 일신의 무공은 무용(無用)하지 않았다. 나름의 가치를 품고 있는 무학이었다.

‘왜 그런 무공을 가지고 운산보에 투신한 거냐?’

백무량의 눈가가 좁아지는 사이.

다섯 개의 검법은 서로 부딪침이 없이 오직 자신을 해하기 위해 날아들었다.

등 뒤에서 비명이 들렸다. 언뜻 보기에는 다섯 검객이 소년의 전신을 찢어발길 것처럼 보였을 터였다.

다만…….

‘합격이 저렇게 어정쩡해서야.’

다섯 개의 직선과 수십의 줄기를 꿰뚫는 일수(一手)가 백무량에게 있었을 뿐이다.

“일섬운월.”

인상을 찡그린 백무량은 백선신검을 위에서 아래로 휘둘렀다.

하지만 거기에 담긴 힘은 전혀 가볍지 않았다.

“크학!”

선두에 서 있던 흑상검의 허리가 공벌레처럼 굽어졌다.

그의 손목에서 핏물이 후드득 떨어졌다. 과일과 당과의 단 냄새가 공존하던 시장이 단숨에 피 냄새로 질척거렸다.

그걸 본 백본검이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저런 일수에 손목이 잘리냐는 퀴퀴한 감정이 칼끝에서 빚어졌다.

퉁.

흑상검의 등을 밟은 백본검이 칼을 내질렀으나.

“멍청하기는.”

조소를 머금은 백무량이 흑상검을 어깨로 후려쳤다.

그의 등을 밟았던 백본검의 중심이 마구잡이로 흔들렸다. 자연히 칼이 허공을 누볐다.

그것이 백본검이 본 마지막 장면이었다.

촤악!

백선신검의 검신에서 핏물이 뚝뚝 떨어졌다.

백본검과 흑상검의 목숨을 동시에 취한 것이다.

“……놈!”

이를 지켜본 충마일연검이 삭월만검과 일보십검에게 눈짓했다.

저들과는 다르게 두 검객은 형제였기에 합격에 능했고, 뛰어난 실력을 갖춘 협객을 열 명이나 죽인 바 있었다.

그 시선을 알아차린 삭월만검과 일보십검이 백무량의 양옆을 점했다.

“…….”

“…….”

네 무인의 호흡이 허공에서 얽혔다.

한순간에 불과했으나 백무량은 상대의 의도를 호흡에서 읽어 냈다.

양옆을 점한 무인이 합격하면, 정면에 선 충마일연검이 결정타를 가한다.

고루하지만 정석이다. 즉흥으로 펼쳐지는 합격으로썬 뛰어난 발상이었다.

“……하.”

백무량이 숨을 뱉어 내는 순간.

삭월만검과 일보십검이 검을 발출했다.

카가강!

백선신검과 두 검이 부딪쳤다. 무시무시한 소음이 백무량의 귓전을 두들겼다.

날카롭게 벼렸던 감각이 순간 무뎌졌다.

백무량의 눈이 가늘어졌다.

‘같잖은 음공을…….’

삼류에 불과한 음공이었으나, 격렬한 전투 속에선 사소한 변화가 전황을 바꾸기 마련이었다.

일보십검의 검이 만들어 내는 소음이 바로 그런 종류였다.

키기깅……!

칼에 단 고리가 백선신검에 부딪힐 때마다 소음이 울린다.

문제는 소음뿐만이 아니었다.

‘진동인가.’

일보십검이 소음이라면, 삭월만검은 진동.

백선신검을 타고 흐르는 진동이 백무량의 기혈을 조금씩 두드리고 있었다.

백무량은 본능적으로 몸을 뒤로 빼냈다.

“어딜!”

두 검객의 검이 백무량의 가슴팍을 파헤치기 위해 맹진했다.

그것을 본 충마일연검이 다급히 외쳤다.

“멈춰!”

“……?”

결정타를 가할 기회인데, 대체 왜?

삭월만검과 일보십검은 충마일연검이 겁을 먹었다고 단정했다.

시선을 교환한 둘이 오른손을 내지른 순간, 그들은 깨달았다.

백무량의 눈동자가 태청신공의 내공으로 인해 시퍼렇게 물들어 있었다.

스걱!

백무량이 펼친 검뢰벽천이 두 손바닥을 쪼갰다.

“끄아악!”

손바닥이 불타는 듯한 고통이 두 검객의 정신을 잠식했다.

불행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소, 손가락이…….”

삭월만검은 왼손으로 자신의 오른손을 더듬거렸다.

엄지를 제외한 모든 손가락이 잘렸으니 검법은커녕 농사도 짓지 못할 터였다.

일보십검도 그와 마찬가지로 멍한 표정이었다.

그때, 충마일연검의 종아리가 부풀었다.

“이놈!”

콰앙!

충마일연검이 내디딘 땅거죽이 뒤집히자, 백무량은 그의 내력(來歷)을 깨달았다.

‘투력보(鬪力步)인가.’

상충하는 힘을 좁은 단면에 담아 반발시키는 보법으로, 익히기가 대단히 어렵다고 들었거늘.

백무량은 충마일연검이 하는 모양새를 보며 흥미롭다는 듯 관찰했다.

그걸 본 충마일연검의 눈동자에 깊은 모욕감이 담겼다.

“감히, 애새끼가!”

투력보가 연속으로 펼쳐지자, 달려드는 힘이 더욱 강해졌다.

그 기세가 마치 황소와 같으니.

‘칼날이 상할지도 모르겠군.’

명검이라고는 하나, 사문의 역사가 담긴 물건을 상하게 할 순 없는 법이다.

백무량은 백선신검을 휘두르는 대신 쌍수의 장심을 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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