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동 (3)
장타(掌打)인가.
충마일연검의 입술이 작게 달싹였다. 그의 얼굴에는 혼란으로 가득해 보였다.
그야 당연했다.
팔이 길어 봐야 검보다는 짧고, 칼날과 피골의 강도는 비교할 바가 아니었다. 백이면 백. 칼에 베이기 마련이다.
뒤이어 그는 비릿한 조소를 빼물었다.
백무량도 마찬가지로 피식 웃었다.
‘뻔하네.’
경험 없는 애송이가 큰 실책을 범했다고 생각하고 있을 터였다.
백무량은 저 비릿한 미소가 언제, 어떻게 바뀔지 알고 있었다.
“……후우.”
가늘게 연 입술 사이로 피 냄새가 섞인 바람이 흘러 들어갔다.
짧은 들숨이 전신을 휘돌았다. 피 냄새는 태청신공 특유의 청량하고 맑은 기운이 지운 지 오래였다.
백무량의 눈이 확 뜨였다.
후우웅!
세 번의 투력보를 거친 충마일연검의 발검(拔劍)은 생각보다 빨랐다. 그가 다다른 경지의 한 단계를 건너뛴 듯한 속도가 가히 압도적이었다.
그때까지도 백무량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저 착실히, 충마일연검의 움직임을 좇고 있었다.
충마일연검은 그런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어수룩한 놈!”
그는 어린아이에게 가르침을 내리는 듯한 선생 같은 표정으로 칼을 휘둘렀다.
근육이 강직되었고, 시선은 오로지 자신의 백회를 향해 있었다.
저 모습에서 달라지지 않는다.
그렇게 판단이 든 순간, 백무량이 뒤늦게 움직였다.
스슥.
짧게 반보를 밟으니 발아래에서 바람이 휘돌았다. 투력보의 속도에 맞추기 위해 삼보 중 회풍의 묘리를 펼친 까닭이었다.
투덕거리는 소리와 함께 모래 알갱이 따위가 발톱을 긁었다.
백무량이 오른쪽으로 몸을 비틂과 동시에 충마일연검의 검이 허공을 갈랐다.
“……!”
충마일연검의 눈동자에 큰 파문이 일었다.
그는 이제야 깨달았을 것이다.
정녕, 저놈이 자신의 움직임을 좇고 있었다고.
하지만 그 예상은 틀렸다.
백무량은 이미 그가 어떻게 움직이고 언제 검을 휘두를지, 모든 걸 꿰고 있었다.
몸을 비틀었던 백무량이 쌍수를 앞으로 내질렀다.
‘먼저 손목부터다.’
소청권의 일 초, 쌍청장이 충마일연검의 손목을 강타했다.
빠득거리는 소리와 함께 그의 뼈가 으스러졌다.
“끄으윽……!”
끔찍한 고통에 인상을 찡그린 충마일연검이 곧장 팔꿈치를 휘둘렀다.
“무의미한 짓을.”
백무량은 그의 발악을 가볍게 피하고는 백선신검을 뽑았다.
촤악!
충마일연검의 몸뚱이가 허물어지며 핏물이 시장 바닥을 적셨다. 그제야 삭월만검과 일보십검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양 손가락이 잘린 충격이 걷히고 나니 모두가 전멸한 상황에 직면한 것이다.
“오, 오지 마!”
삭월만검이 그르렁거리며 뒷걸음질 쳤다. 그의 얼굴에는 끝이 보이지 않는 공포가 담겨 있었다.
백무량은 둘에게 다가가며 중얼거렸다.
“다른 사람이 네게 그렇게 말했을 때, 그런 적이 있었나?”
“다, 다음부터는 그러지 않겠습니다, 대협!”
일보십검이 두 무릎을 꿇고는 넙죽 엎드렸다.
그 모습을 보자니 저도 모르게 적산의 최후가 머릿속에서 떠올랐다.
‘적어도 그놈은 추하게 죽진 않았는데…….’
어째서 이놈들은 구질구질하게 삶을 연명하려고 하는가?
자기한테 피해를 보았던 양민에게 돌이나 맞다가 죽을 여생일 텐데.
백무량은 목숨을 구걸하는 두 무인을 내려다보며 아무런 표정도 짓지 않았다.
비웃음조차도 아까웠다.
스걱!
백선신검이 또다시 두 목숨을 취하니, 소음이 완전히 멎었다. 젊은 상인의 딸꾹질도 입을 꽉 틀어막은 듯했다.
‘똑같은 놈들이었나.’
백무량의 눈이 반쯤 감겼다. 한바탕 싸우고 나니 피로가 몰려왔다.
무엇보다 이곳에 있는 상인의 반응이 제일 피곤했다.
‘운산보의 죽음에 환호하는 사람이 없어. 게다가 몇 사람은 운산보로 달려가는 모양이고…….’
백무량은 시장 중심부로 터덜터덜 걸어갔다.
산하객잔에서 나와 닷새 동안 걸으면서 하나의 의문을 품었었다.
-아무리 운산보가 청해를 완벽하게 틀어막고 있다고 한들, 그게 이십 년 가까이 가능한 일일까?
그 의문은 금방 지웠다.
설마 자기 배를 불리기 위해 같은 지역 사람의 고혈을 쥐어짤 리가 없다고, 인간의 선의와 도리를 믿었다.
“어림도 없는 생각이었지.”
백무량은 힘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청해는 무림 이전에 중원의 변방이요, 북적이 자주 출몰하는 지역이었다. 그렇다고 땅이 비옥한 것도 아니었다.
‘항상 배고픈 곳에서 각자도생은 당연시 여겨지기 마련이라지만…….’
한숨을 내쉰 백무량은 한 가게의 가판대를 바라보았다.
싱그러운 과일과 향신료가 잔뜩 발린 길거리 음식.
냄새를 맡기만 해도 식욕이 돋아날 정도였다.
백무량은 저도 모르게 과일을 한 입 깨물었다.
와삭.
달콤한 과즙이 입안을 가득 맴돌았다.
“…….”
계속해서 씹어도 달콤함이 밀려들었다.
우스운 일이었다.
고통과 분노, 슬픔에 몸부림치며 잠도 이루지 못하는 사람은 있는가 하면 이곳의 사람은 달콤함을 향유하고 있었다.
백무량의 시선이 상인들에게 향했다.
“쟤, 쟤가 그럼 곤륜신성인 거야?”
“들리겠다, 야…….”
어딜 봐도 자신의 눈치를 살필 뿐이었다.
분명 우스운 일인데도,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차라리 다섯 검객을 상대할 때가 나았어.’
생사를 가르는 전투 속에선 모두가 진심이 되기 마련이었고, 온 힘을 다해 적을 죽이는 게 전부였다.
하지만 저들은 아니었다.
운산보에게 잘 보이기 위해 머리를 굴리거나, 서둘러 자리를 피하려는 기색이 역력했다.
-검을 들지 않은 사람을 베는 건 도사로서 명예를 버리는 일이다.
백무량은 도문 역사상 불변의 율법을 떠올렸다.
‘명예가 무슨 상관이야?’
저도 모르게 그런 생각이 떠올랐다.
언제는 도사처럼 살았던가?
칠십여 년 전엔 무림을 떠돌며 사문이 고리타분하다,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이제 와서 명예는 무슨.’
생각을 굳힌 백무량이 백선신검을 만지작거리던 그때.
과거에 했던 말들이 떠올랐다.
-나는 불의를 두고 볼 수 없습니다.
-선한 행동을 하는 건 돈이나 명예를 얻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송 노야.
-나는 철유라는 사람의 의기를 믿소.
고성진과 송우현, 철유에 이르기까지 부끄러운 말을 줄줄이 하고 다녔다.
‘지랄 염병을 하고 다녔구나.’
백무량의 낯이 붉어졌다. 하지만 그것으로 욱한 마음이 잦아들었다.
만일 여기서 양민에게 칼날을 들이댄다면, 자신뿐만 아니라 곤륜파의 명예가 실추되는 셈이었다.
사부와 사형을 생각하면 더더욱 그래서는 안 됐다.
‘나중에 송 노야랑 이야기를 해 보자. 그때, 이들의 처우를 결정하자.’
뜨거운 분노를 냉정으로 벼려 낸 백무량은 다시금 큰 목소리로 외쳤다.
“겁이라도 먹은 것이냐, 운산보주!”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시장 전체를 뒤덮었다.
그 순간, 백무량의 시선이 손등으로 향했다.
미약한 빛을 흩뿌리던 운룡이 더욱 밝아져 있었다.
***
백무량이 다섯 검객과 격돌하는 사이, 주겸은 이미 운산보의 담벼락에 몸을 기대고 있었다.
‘씨벌, 진짜 가야 해?’
백무량한테 쪽팔려서 말하지 않았지만, 운산보에서 몇 년 동안 감금당한 채 살아온 주겸이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수모를 당했던가!
운산보주의 면상만 떠올리면 이가 갈리고 분통이 터질 정도였다.
그런데…… 얼굴도 모르는 도사를 위해 다시 저 지옥으로 들어가자니 그게 너무나도 거지 아니, 개 같았다.
“얼마나 더 망신을 당해야 나올 테냐?”
저 멀리서 백무량의 고함이 들려왔다.
그 목소리를 들은 주겸이 헛웃음을 머금었다.
‘무슨 물건을 썼는지 몰라도, 목청 하나는 기가 막히는구먼.’
내공을 운용해서 저런 고함이 나왔을 리 없다.
속으로 단언한 주겸은 두 손을 땅바닥에 대었다.
그러자 땅을 두드리는 진동이 미세하게 잡히기 시작했다.
‘하나, 둘, 셋…….’
주겸은 숫자를 셈하며 미약한 무게감을 분간해 갔다.
오랜 시간 동안 운산보에 갇혀 있다 보니 걸음만으로 상대가 누군지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일다경이 지났을 땐 절반 이상이 사라졌다.
‘문제는 그 새끼가 안 나갔다는 건데…….’
주겸의 인상이 찌푸려졌다.
저번에 본 그라면 백무량의 도발에 쉽사리 넘어갔을 터였다.
구파일방에 가진 열등감이 강했고, 타인에게 인정받고자 하는 마음이 강해 보였으니까.
하지만 그는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실제로 담벼락 너머에서도 이상해하는 눈치였다.
“운산보주께서는?”
“술을 마시고 있다는데?”
“……허, 별일이네. 보통 곧바로 때려죽이지 않았나.”
“나이를 먹으니 성격이 유순해진 모양이지.”
“나중에 어떤 새끼가 보주한테 도전할지도 모르겠네. 큭큭.”
시시껄렁한 대화였다.
주겸은 담벼락에 더 바싹 기대며 소리 없이 입술을 달싹였다.
개새끼가 갑자기 철이 든 것도 아니고 왜 가만히 있는 거야.
뱉고 나니 답답했던 마음이 조금은 가라앉았다.
‘이대로 계속 시간을 지체할 순 없는데…….’
이곳에서 나간 무인만 하더라도 스물은 넘었다.
하물며 사파 새끼들이 혼자서 갔을 리가 없었다. 가면서 마주치는 무인들과 합류했을 것이다.
-시간을 끌면 끌수록 백무량의 부담이 늘어난다.
결론을 내린 주겸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백무량이 일으킨 소란이 얼마나 큰지, 운산보의 담벼락 주위에 사람이 없었다.
‘좋아.’
손가락을 꼼지락거린 주겸은 담벼락 틈새를 매만졌다.
어젯밤 얻어맞은 허리가 시큰거리긴 했지만, 이까짓 벽쯤이야. 주겸에겐 아무런 장해도 되지 않았다.
미리 봐 두었던 대로 담벼락 뒤에는 후원이 있었다.
“엇차.”
벽에서 내려온 주겸은 황급히 넙죽 엎드렸다.
후원이기는 하나 어떤 정신 나간 놈이 이곳으로 올지도 몰랐다.
스륵, 스르륵…….
땅바닥을 기어 다니던 주겸의 눈동자에 이채가 일었다.
지면을 타고 흐르는 신음.
그것은 자신이 탈출하기 전까지만 해도 없었던 잡음이었다.
‘저쪽인가.’
주겸은 품에서 주머니 한 쌍을 꺼내 양발에 끼웠다.
자신처럼 진동에 민감한 무인이 있을지도 모르기에, 행동은 비교적 신중해야 했다.
그렇게 신음이 흐르는 건물 앞까지 도달했을 때였다.
“넌 뭐냐?”
기둥 뒤에서 나타난 무인이 당황한 표정으로 외쳤다.
허리춤을 주섬거리는 걸 보아, 소피를 보다가 온 듯했다.
낭패라는 단어가 주겸의 머릿속을 스쳤다.
하지만 거기서 몸이 굳어 있는 병신은 아니었다.
따악!
주겸의 두 손가락이 무인의 목젖을 강타했다.
컥, 하는 소리와 함께 무인의 동공이 뒤흔들렸다.
자칫 잘못하면 전신이 마비되는 혈도였으나 주겸의 손 속엔 자비가 없었다.
“거지다, 새끼야.”
주겸의 수도가 무인의 아문혈을 강타했다.
무인의 코에서 피가 주르륵 흐름과 동시에 몸이 허물어졌다.
‘누가 보기 전에 구출부터 해야겠어.’
주겸은 무인을 바닥에 눕히고는 문을 열어젖혔다.
그곳에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