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동 (1)
“누가 누구를?”
노태랑이 차갑게 조소했다.
고성진의 무공과 의지는 인정한다. 지금까지 싸워 온 모든 무인, 협객을 통틀어 한 손에 꼽을 정도였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아무리 그의 무공이 뛰어나고, 의지가 강인할지언정 경지라는 벽을 넘을 순 없었다.
그 당연한 사실을…….
“내가 네놈을 죽이겠다고 말했다.”
고성진은 인정하지 않았다.
물론 목숨을 내던질 생각으로 싸우려는 건 아니었다.
단 한 가지, 이길지도 모르는 가능성이 있었다.
척준환이나 사문의 고수와 비교하여 노태랑의 강기는 아직 미숙해 보였다.
그가 경지를 넘은 지 얼마 안 됐다는 뜻이었다.
그렇다고 하여, 검기로 검강을 꺾을 수는 없다.
‘……그걸 해내야 해.’
고성진의 오른손이 저렸다.
노태랑과 손을 섞으면서 참아 왔던 통증이 팔 전체를 경련시켰다.
사부에게 인내를 배우지 않았다면 검을 놓았을 터였다.
‘이럴 줄 알았으면 칭얼대지 말 걸 그랬어.’
고성진은 새삼 사부, 척준환에게 속으로 감사를 표했다.
어쩌면 돌아가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그런 생각 때문에.
갑자기 스며든 유약한 마음을, 고성진이 고개를 흔들어서 버렸다.
머릿속을 비우니 허(虛)함이 전신을 감돌았다.
휘르르…….
고성진의 검이 허공을 갈랐다. 그 검로를 따라 현천신공의 내공이 도도히 흘렀다.
“……!”
노태랑의 미간이 좁아졌다.
언뜻 보면 평범한 검무와 같았지만, 보이지 않는 실체가 중심에 있었다.
‘절초인가?’
고성진에게 먼저 달려들어선 안 된다는 예감이 노태랑의 머릿속에서 경종을 두드리고 있었다.
꽈아악.
노태랑이 달려들지 않고 검무를 관망하자, 고성진은 조소를 흘렸다.
“오지 않겠다면 내가 가겠다.”
“……!”
“검을 들어라, 운산보주…….”
검무를 일순 멈춘 고성진이 단숨에 운산보를 향해 맹진했다.
보법은 경쾌하나 사나웠고, 숨은 깊으나 정심하진 않았다.
고등한 무공의 절초치고는 성급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노태랑은 선택해야 했다.
그대로 받아 낼 것인지, 아니면 흘려내어 빈틈을 노리던지.
노태랑의 칼끝에 망설임이 일자, 고성진은 한쪽 입술을 비틀었다.
이것이 대주천복마검의 마지막 절초.
‘파천행(破天行).’
손목이 부러지는 것과 동시에 고성진의 신형이 크게 휘돌았다.
그 순간, 노태랑은 보았다.
자신을 향해 떨어지는 수많은 검기를…….
***
“그게 무슨 소립니까!”
백무량은 송우현에게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고성진, 그 사람이 왜 곤륜산에서 내려갑니까?”
“난들 알겠느냐? 아니, 근데 이놈은 나한테 왜 지랄이야? 누구 성깔이 더 더러운지 한번 볼까?”
“……미안합니다.”
“씁, 아냐, 됐다. 너도 당황할 만하겠지.”
욕지거리를 투덜거린 송우현이 물 한 잔을 백무량에게 건넸다.
“서녕 쪽으로 갔다는 말이 많아.”
“서녕이라면…… 운산보주가 있는 곳 아닙니까?”
“그래. 개장수랑 개새끼들 모여 있는 곳이지.”
백무량이 물을 마시고 감정을 가라앉히자, 송우현이 입술을 달싹였다.
“그놈이 개장수랑 짝짜꿍하러 간 거 아니냐?”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도사라고 너무 믿지 마라. 청성 그 새끼도 도사였잖냐?”
“……하지만.”
“내가 누구 이간질하려는 게 아니라, 곤륜파가 지금 약하잖느냐. 무공을 보고 욕심이 났을지도 모르지.”
백무량의 눈가가 가늘어졌다.
확실히, 송우현의 말이 맞았다.
고성진이 구천화우검을 보고 터트렸던 감탄은 진심이었고, 그게 욕심으로 변질하였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 정도만 하십시오.”
모든 걸 의심해서야 누구를 믿을 수 있단 말인가?
백무량이 단호하게 말하자, 송우현이 가볍게 혀를 찼다.
“막돼 먹은 새끼가 쓸데없이 정만 많아서야, 잠깐 어울리니 친구처럼 보이더냐?”
“그렇게 생각하면 노야도 곤륜파를 어느 순간 집어삼킬 수도 있잖습니까?”
“야, 인마.”
“일개 상인이 말석이라고는 하나 구파일방이었던 문파를 차지할 기회니까…….”
백무량의 지적에 송우현이 피식 웃었다.
“전에 한 번 가르쳐 놓으니까 아주 씨알이 굵어졌네, 괜찮은 가정이었어.”
“난 도사지 의심암귀가 아닙니다.”
“그래, 그래. 알겠다. 나도 그 새…… 아니, 그 도사를 일단 믿어 보마.”
“일단 그가 어디 있는지 알아보아야겠지요.”
송우현이 고개를 끄덕이던 그때였다.
“크, 큰일 났습니다!”
문이 벌컥 열리며 한 남자가 뛰어 들어왔다.
객잔 바닥에 진흙이 듬뿍 묻히자, 송우현의 미간이 찡그려졌다.
“뭔데!”
“그…… 곤륜파로 갔던 도사님께서 운산보주한테 붙잡혔답니다!”
“뭐라?”
송우현이 눈을 치켜뜬 순간, 백무량이 출구로 한 걸음 내디뎠다.
그 모습을 본 송우현이 목소리를 돋웠다.
“저, 저 무식한 새끼! 듣자마자 가겠다고?”
“지금 가지 않으면 죽을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말하는 백무량의 기세가 몹시 격앙되어 있었다.
“야! 너까지 잡힐 생각이냐?”
“아직 모르지 않습니까.”
“발목 잘라 버리기 전에 당장 돌아와! 내가 어떡하면 좋을지 방법을…….”
“송 노야.”
뒤를 돌아본 백무량은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번에는 노야의 말을 따랐으니, 지금은 내 방식을 존중해 주십시오.”
“……저, 썩을.”
송우현은 할 말이 없어졌다.
“어디 네 맘대로 해 봐라!”
“고맙습니다, 노야. 제가 없는 동안 곤륜파를 잘 봐주십시오.”
덜컥.
백무량은 산하객잔을 나갔다.
***
백무량은 잠시간을 줄여 가며 서녕에 향했다.
도중에 운산보의 무인들과 엮이기도 했지만, 단칼에 죽였다.
서녕에 가까워질수록 운산보 사이에서 곤륜신성의 악명은 높아져 갔다. 혹자는 그가 어린 나이에 검기상인의 경지에 올랐다고 추측하기도 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 추측은 틀렸다.
‘무리하면 강기를 빚어내는 것도 가능할 거야.’
백무량은 이미 오른 경지를 답보하는 멍청이가 아니었다.
하물며 사형이 남긴 안배 덕분에 부족했던 내공을 보충하고, 백선신검이라는 희대의 명검을 얻지 않았던가!
남은 것은 오로지 의지뿐.
기혈이 뒤틀리더라도 강기를 빚어내, 운산보주를 꺾어 버리겠단 강인한 의지였다.
‘그놈과 마주하기 전까지는 내 경지를 감춰야겠어.’
백무량은 운산보주를 자극할 요량으로 하루에 일정한 거리만 걸었다.
말이 일정한 거리지, 웬만한 장정이 전력 질주를 해야만 가능한 속도였다. 호흡이 어떤 문파보다도 정심한 곤륜파가 아니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물며 자신은 그 곤륜파에서 차기 강호 십 대 고수로 거론되던 고수.
운산보의 무인을 격파하면서 걷는 건 아주 여유로웠다.
“드디어 도착인가.”
산하객잔에서 나선 지 닷새째 되던 날.
백무량은 서녕에 도착했다.
“여기 좀 보세요!”
“오늘 아침에 따서 신선합니다!”
서녕 시장은 청해의 중심답게 온갖 소음으로 가득했다.
중간중간에 운산보로 보이는 무인이 뒷짐을 지고 있는 걸 빼면 번화하고 밝은 거리였다.
그 광경을 멀찍이 지켜보던 백무량은 어두운 골목으로 향했다.
“어이!”
등 뒤에서 들려온 외침에 백무량이 고개를 돌렸다.
기름기가 번들거리는 머리카락, 흙먼지가 얼룩덜룩한 복식.
백무량의 눈가가 가늘어졌다.
“누구시오?”
“네가 왜 여기에 있어?”
백무량이 자연스럽게 백선신검에 손을 가져가자, 남자가 두 손을 내저었다.
아침부터 뭘 한 건지 그에게서 쓰레기 냄새가 났다.
“아니, 도사란 놈이 칼부터 꺼내려고 하네?”
“용무부터 말하시오.”
“같은 정파인데, 남궁 뱀 새끼처럼 차갑게 굴진 말자고.”
남자가 히죽 웃으며 허리춤을 매만졌다.
처음에는 그가 뭔 짓을 하는가 싶어 긴장했지만, 허리에 두른 끈에 매듭이 있었다.
백무량은 그제야 남자의 정체를 깨달았다.
“거지?”
“하, 요 녀석. 알면서 그러는 것 같은데…….”
주변을 확인한 거지가 머리를 벅벅 긁으며 말했다.
“개방의 이 결 제자, 철골개(鐵骨丐) 주겸(周兼)이다.”
“청해를 담당하고 있으십니까?”
“그걸 네가 어떻게!”
주겸의 눈동자에 이채가 일었다.
개방이 지역마다 제자를 파견한다.
이건 겨우 어린 도사가 알 만한 정보가 아니었다.
그와는 다르게 백무량은 속으로 한탄하고 있었다.
‘아무리 강호의 변방이라지만 겨우 이 결 제자를 두다니…….’
운산보가 청해를 지배하고 있는데 왜 개방이 가만히 있었나 했다.
인상을 찡그린 백무량이 주겸의 옷자락을 움켜쥐었다.
그러자 주겸의 푸르뎅뎅한 피부가 드러났다.
“뭐, 뭐야?”
“얻어맞은 겁니까?”
백무량은 주겸을 한심한 눈으로 바라보자, 주겸이 변명을 줄줄이 쏟아 내기 시작했다.
“나도 맞고 싶어서 그랬겠냐? 여기가 벽지고, 날 항상 지켜보는 새끼가 있으니까…….”
“항상?”
백무량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 모습을 본 주겸이 고개를 도리질했다.
“지금은 아냐. 방금 따돌렸어.”
“어떻게 따돌린 겁니까?”
“음.”
주겸은 길게 대답하는 대신 손바닥을 백무량에게 폈다.
언뜻 보니 보통 쓰레기가 아니라, 과일 껍질이나 비계 같은 게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아니, 씹…….”
백무량은 곧바로 세 걸음 이상 물러났다.
그걸 본 주겸이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더러운 건 알겠는데, 나름대로 위기를 극복하려고! 어? 기지를 발휘한 거거든.”
“어째 만나는 거지마다 발휘하는 기지가 다…….”
그 말에 주겸이 반색하며 물었다.
“다른 개방도를 만났느냐?”
“만나긴요, 그냥 거지들이지.”
백무량은 곧바로 말을 수습했다.
아무래도 칠십여 년 전에 만난 개방도라고 말할 순 없었다.
그러자 주겸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하긴, 네 견문에 뭘 바라.”
‘한 대 때릴까?’
백무량이 진지하게 고민하던 그때, 주겸이 눈을 끔뻑였다.
“아 참! 근데 이번에 잡힌 도사는 어떻게 된 거야? 공동파 출신이라던데, 왜 여기 있어?”
“개방도라는 사람이 왜 견문 없는 애한테 묻습니까?”
“내가 이곳에 억류된 병신이니까.”
주겸이 당당하게 말하자, 백무량은 어이가 없어서 혀를 찼다.
“뭐가 그리 당당합니까? 청해가 운산보의 손아귀에 있는 동안 당신은 뭘 했는데?”
“나도 온 지 얼마 안 됐어! 원래 여기 있던 거지가 죽어서 대신 온 거라고!”
대신이라…….
이상함을 느낀 백무량이 주겸에게 물었다.
“원래 있던 사람은 누굽니까?”
“삼 결 제자…… 아, 왜 나를 그렇게 무시하나 했더니! 내가 이 결 제자라 그랬냐?”
“그건 그냥 당신이 병신이라 그랬을 뿐인데…….”
“…….”
주겸이 입술을 삐쭉거렸다.
자기가 했던 말이라 부정하기가 애매한 모양이었다.
그가 입을 꾹 닫자, 백무량은 즉각 다른 화제로 돌렸다.
“죽었습니까? 그 사람.”
“아직 몰라, 모르는데…… 나한테 온갖 지랄을 하는 걸 보면 뒈졌겠지. 결탁했다가 배신당했을 가능성도 있고.”
그 말이 다소 의외였다.
백무량이 조심스러운 어조로 물었다.
“동문인데 그렇게 함부로 의심해도 됩니까?”
“야, 강호에 거지가 얼마나 많은데 그중에 개새끼가 없겠냐? 다 너희처럼 선비 같으면 거지새끼로 안 불리지.”
충격적인 말을 서슴없이 주절거린 주겸은 백무량에게 고개를 들이밀었다.
“근데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어린 도우야.”
“……?”
“운산보주 그 미친 새끼가, 잡아 온 도사를 공개적으로 처형하겠단다.”
백무량의 인상이 일그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