협력자 (3)
다음 날.
예고했던 대로 공동파의 도사가 곤륜파 현관에 들어섰다.
“하이고, 힘들다. 여긴 뭐가 이리 높냐?”
더벅머리에 낡아 버린 검은 옷.
거기에 늘어지는 말투까지, 수더분한 인상의 남자였다.
그를 미리 살피고 있던 현노윤이 물 한 잔을 건넸다.
“고생했네.”
“아, 감사…… 혹시 장문인이십니까?”
“맞네. 이십팔 대 장문인인 현노윤이라는 사람일세.”
“허!”
깜짝 놀란 도사가 두 손을 모아 올렸다.
“저는 공동의 이 대 제자 고성진(鼓性眞)이라고 합니다. 제가 견문이 좁아서, 무례한 모습을 보여 죄송합니다.”
“뭐가 무례하다고 그러나. 늙은이가 소일거리가 없다 보니 먼저 기다리고 있었을 뿐이지.”
“그, 그렇습니까? 하하, 그러면 다행이지요. 물도 감사히 잘 마셨습니다.”
두 손을 어색하게 내린 고성진이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그나저나 그 소문의 신성은 어디 있습니까?”
“그 아이는 왜 찾는가?”
“아이, 그게…… 저희 장문인께서 도문에서 간만에 걸출한 놈…… 아니, 소협이 나왔다고 이것저것 봐 보고 오라고 하지 뭡니까!”
고성진이 껄껄 웃으니 현노윤도 그제야 마음이 놓인 듯 마주 웃었다.
전에 들이닥친 등자평과는 아예 다른 사람이었다.
‘그렇다고 아예 마음을 놓을 건 아니지만.’
현노윤은 가장 궁금했던 점을 그에게 물었다.
“한데 공동은 모르고 있었는가?”
“무엇을 말입니까?”
“청해에 운산보라는 사파 무리가 설치고 있음을 말일세.”
그 말에 고성진의 표정이 굳었다.
“알았다면 공동이 나섰을 겁니다. 저희 옆에 그런 쓰레기 잡놈이 준동하고 있는 꼴은 도저히 못 보니까요.”
“…….”
“장문인께서 저를 보내신 건, 곤륜에 도움을 주러 온 것도 있지만…… 죄송하단 말을 전하고 싶었습니다.”
털썩.
고성진이 제자리에서 무릎을 꿇자, 현노윤은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불과 며칠 전에 등자평이 오만함을 드러낸 것과는 달리 고성진은 공동을 대표한 자로서 정중히 사죄하고 있었다.
“몇 마디 말을 해도 진심을 전할 수 없으니, 땅에 머리라도 박으라는 장문인의 명이 있었습니다.”
고성진의 늘어졌던 말투가 어느새 진지하게 변했다.
현노윤은 그의 행동과 어조에서 진심을 느꼈다.
“됐네. 그만 일어나게.”
“공동의 고수와 함께 오고 싶었지만, 본 파에도 사정이 있기에 그러지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현노윤의 만류에도 다시금 사죄한 고성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품에서 은자로 꿰어진 뭉치를 꺼냈다.
“당장 챙겨 올 수 있을 만큼 가져왔습니다.”
“미안하지만 금전 문제는 이미 해결했네.”
현노윤이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말하니, 고성진이 당황한 표정으로 물었다.
“예? 죄송한 말씀이지만…… 곤륜의 재정이 어렵지 않습니까?”
“자네를 속이거나 무안을 주려는 말이 아니라, 정말 은자(隱者) 덕택에 재건을 시작하고 있다네.”
현노윤이 손가락으로 한곳을 가리키자, 고성진의 시선이 거기에 뒤따라갔다.
그곳에는 이미 공사가 진행 중이라는 듯 주춧돌과 일정한 크기로 잘린 나뭇더미가 있었다.
그런데 그것이 한둘이 아니다.
“하, 하하…… 이런 돈은 푼돈이나 마찬가지겠네요.”
“사죄를 위한 보상일지라도 공동파에게 빚을 지고 싶지 않아서 그러니 이해해 주게.”
“이해라니요. 뭐, 상황이 좋다니 오히려 다행입니다.”
어깨를 으쓱인 고성진이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그 모습을 본 현노윤은 그가 아까 했던 말을 떠올렸다.
“무량이를 찾는가?”
“무공이라도 한 수 가르쳐 주어야 마음이 편해질 것 같아서 말입니다.”
“무공을 한 수 가르쳐 준다?”
현노윤은 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가 아무리 공동파를 대표해서 온 제자라지만, 상대는 자신의 사조인 구천검 백무량이었다.
‘하지만 상대의 호의를 두 번이나 거절할 순 없나.’
뒷일은 사조에게 맡기면 되리라.
“따라오게.”
“예!”
고성진의 얼굴에 기대 어린 미소가 맺혔다.
***
“가르침요?”
백무량은 뜻밖의 말을 들었다는 듯 고성진을 쳐다보았다.
공동파에서 왔다는 도사가 갑자기 자신을 가르치겠다니?
고성진의 뒤에서 현노윤이 고개를 가로젓고 있었다.
계속 거절하기가 뭐해서 데리고 왔다, 이런 용무이리라.
백무량의 얼굴에 장난기가 어렸다.
“어느 무공에 능하십니까?”
그 물음에 고성진이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말했다.
“공동파 하면 역시 권장 아니겠느냐. 현천신장의 일 초를 배워 둔다면 위급한 순간에 절초로 써먹을 수 있을 것이다!”
“현천신장요?”
백무량의 눈동자에 큰 파문이 일었다.
솔직히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의 말대로 공동파에서 현천신장이란 문파를 대표하는 무공 중 하나니까.
자신의 반응에 우쭐해진 건지, 고성진이 피식 웃었다.
“그래. 너처럼 어린아이도 아는 공동파의 절학이지!”
“알려 주셔도 되는 거예요?”
“일 초 정도야 뭐. 장문인한테 혼나면 그만이야. 현천신장의 일 초는 속가 제자도 알려 준다고.”
그 모습에 백무량은 과거의 자신을 엿보았다.
“혼나는 거로 끝날까요? 사지근맥을 폐…….”
“내가 괜찮다는데 걱정해 주기는!”
슥슥.
고성진이 백무량의 머리카락을 헝클어뜨리자, 현노윤이 눈을 부릅뜨는 모습이 보였다.
물론 백무량 자신의 기분도 좋진 않았다.
‘걱정해 줬더니만 자기 태사조뻘 되는 선배의 머리를 막 만져 대?’
적당히 어울려 주기만 하려던 마음이 싹 사라졌다.
부아가 미친 백무량은 입술을 달싹였다.
“고 선배, 내기 하나 하시겠습니까?”
“내기?”
“제가 선배의 권장을 꺾으면 초식을 더 알려 주시는 겁니다.”
“호오, 이놈. 그래. 어디 한번 해 보아라. 선수를 양보하마.”
고성진이 짙은 미소를 지었다.
열세 살쯤 되어 보이는 어린 후배가 맹랑한 소리를 하니, 그게 퍽 귀엽게 느껴지는 듯했다.
하지만 그는 아직 모른다.
‘머리를 막 만져 대는 것으로도 모자라, 우습게 보신다?’
아이라고 생각했던 자신이 사실은 칠십여 년 전 백련교와 싸운 영웅이라는 사실을…….
이를 백무량도 알고 있었지만,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무엇보다 등자평 이후로 타문의 도사에 대한 인상이 나빠진 차였다.
“곤륜파에게도 권장법이 있음을 알려 드리지요.”
백무량이 오른 주먹을 휘둘렀다.
***
소청권(小淸拳).
유운검과 곤륜파에서 익히는 기본공 중 하나로, 초식이 단 두 개밖에 없었다.
쌍청장(雙淸掌)과 우청격(右淸擊).
쌍수의 장심으로 일으키는 장력과 오른 주먹으로 후려치는 타격이 전부였다.
달리 말하면 그 두 가지를 정심하게 익히는 셈이다.
소청(小淸). 그 이름에 걸맞도록.
쿵!
한 손으로 우청격을 받아 낸 고성진의 눈가에 경련이 일었다.
‘이게 무슨…….’
저 나이의 아이가 뿜어낼 힘이란 말인가?
힘으로만 따지면 최소한 약관에서 이립 아니, 백무량의 안정된 손목을 보면 단련된 무인의 근골이었다.
“제법 맵구나!”
고성진은 즐겁다는 듯이 웃었다.
곤륜신성이란 칭호를 받고 오만해진 줄 알았더니만 이유가 있는 자신감이었다.
“하면, 이제는 내 차례겠지?”
고성진의 보폭이 한순간 어깨만큼 넓어졌다.
그와 동시에 백무량에게 우장(右掌)을 내지르니, 운해가 팔뚝에서부터 휘감긴다.
“통천장(通天掌)이라는 것이다.”
수백에서 천에 이르는 연습으로 만들어진 완숙함.
고성진의 몸에 녹아든 공동의 기예가 운해를 휘감은 채 백무량에게 쏘아졌다.
그걸 본 백무량이 멈칫거렸다.
‘……이런.’
고성진은 곧바로 통천장을 거둬들이기로 했다.
통천장이란 살상력이 강한 침투경(浸透經)을 가미한 공동파의 무공.
마지막 타점에서 손바닥에 실은 공력이 화약처럼 터지는 것으로 유명했다.
‘아이에게 쓰기엔 너무 위험한 무공이었나.’
고성진이 통천장을 회수하려던 순간, 백무량이 어깨를 앞으로 젖히며 오른손을 내질렀다.
그 속도가 얼마나 빠른지 통천장의 내공을 거둬들이지 못할 정도였다.
“이놈!”
“선배가 한 수를 보여 줬으면, 나도 보여 줘야 수지가 맞지요.”
백무량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최선을 다하는 게 좋을 겁니다.”
그 말을 끝으로 태청신공의 내공이 백무량의 손바닥에 맺혔다.
이를 지켜보던 현노윤이 깜짝 놀라 외쳤다.
“운룡비뢰장(雲龍飛雷掌)!”
구천화우검이 실전된 무공이었다면 운룡비뢰장은 대부분이 소실된 무공.
강하기는 황보세가의 권법과 같고, 빠르기는 사천당문의 독침과 비슷하다던가.
현노윤의 목소리를 들은 고성진이 인상을 찌푸렸다.
‘곤륜에 그런 무공이 있다고 들은 적이 없는데…….’
백무량의 주먹에 실린 경력이 예사롭지가 않다.
그렇게 판단한 고성진은 멈추려던 우장에 힘을 실었다.
이윽고.
꽈광!
부딪친 두 손바닥을 중심으로 운해가 흩어지고, 두 무인의 머리카락이 이리저리 흩날렸다.
고성진의 얼굴에 짙은 미소가 맺혔다.
“과연, 과연…… 곤륜신성이라!”
후배에게 이런 호승심을 느끼게 된다니!
고성진은 자세를 다시 잡으며 백무량에게 말했다.
“대등했을지언정, 꺾지는 못하였다. 어때. 더할 테냐?”
“그렇게 나오신다?”
백무량이 피식 웃었다.
사실 백무량도 어느 정도 고성진에게 흥미를 느끼고 있었다.
되살아난 이래로 처음으로 만나는 정통 도가의 ‘고수’.
같은 이 대 제자라지만 수련이 부족했던 등자평과는 경지가 달랐다.
몸을 푼다면 고성진보다 좋은 상대는 없으리라.
생각을 정리한 백무량이 자세를 고쳤다.
“이번에는 선배한테 선수를 양보하지요.”
“하하, 이놈!”
유쾌한 웃음소리를 터트린 고성진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좋다. 그 양보, 받아 주마!”
선풍인(旋風引)을 운용하자, 고성진의 신형이 앞으로 쏘아졌다. 속도가 얼마나 빠른지 짙은 운해가 뒤로 밀릴 정도였다.
하지만 백무량의 눈동자는 침착하게 고성진의 행로를 포착하고 있었다.
그 사실이 너무나도 즐겁고, 재밌어서.
고성진은 선풍인을 운용했던 내공을 다른 무공으로 전환했다.
“……!”
그걸 본 백무량의 표정에 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다음으로 펼칠 무공은 절대 예사롭지 않다.
방금 보여 준 통천장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그 예감은 아주 정확했다.
쩌적!
운해의 흐름이 일그러지고, 허공에서 쩌적거리는 파공음이 일었다. 십 년 공력으로 빚어진 웅대한 기척이 백무량의 머리를 짓눌렀다.
‘무공의 정체’를 확인한 백무량이 곧바로 백선신검을 쥐었다.
“이런……!”
처음 보는 후배에게 펼친다는 무공이 현천신장이라니?
백무량의 표정을 본 고성진이 히죽 웃었다.
“내가 진 거로 치고, 네가 배울 무공과 한번 마주해 보아라!”
현천신장의 일 초, 천회망룡(天回蟒龍).
파공음을 동반한 장력이 백무량의 발아래를 향해 쏘아졌다.
과연 고성진의 말처럼 마주해 보기만 하란 듯했다.
그러나 백무량은 달랐다.
“선배가 말했지요, 꺾지는 못했다고!”
그 말에 고성진이 크게 당황해서 외쳤다.
“다치기 전에 뒤로 물러나라!”
“하면, 꺾어 주지, 선배가 그토록 자랑스러워하는 현천신장을!”
호흡을 정돈한 백무량이 백선신검에 내공을 담아 휘둘렀다.
구천화우검의 삼 초, 호천풍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