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검해-29화 (29/275)

협력자 (2)

“말이 건방지긴 하나, 죽을 놈의 투정으로 듣겠다.”

등자평이 허리에서 칼을 빼 들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청성의 장인이 잘 갈고 닦은 양검(良劍)이었다. 칼이 모두 고철 수준인 곤륜과는 질적으로 달랐다.

단 하나.

백선신검을 제외하고는…….

“어떻게 곤륜신성이 되었나 했더니만, 분수에 어울리지 않는 검을 가지고 있었구나.”

등자평의 눈동자에 욕심이 번들거렸다.

그토록 군자인 척, 도와 예를 따지던 모습은 사라지고 사파의 잡배와 다를 바 없었다.

“기어코, 끝까지 추한 모습만 보여 주느냐.”

백무량의 미간이 좁아졌다.

분노를 넘어서 이제는 처연했다.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청성파가 청해인을 괴롭히는 데 가담하고, 곤륜파의 귀물인 백선신검을 탐한단 사실이 강호에 지독한 환멸을 가져왔다.

그 모습을 본 등자평이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목이 잘리고 나면 보지 못할 터인데, 조금만 참아라.”

“…….”

더는 들어 줄 수 없다.

백무량이 호흡을 가다듬으며 태청신공을 운용하던 그때였다.

빠악!

별안간 주먹만 한 짱돌이 등자평의 등을 강타했다.

백무량이 보기에는 그의 등골에 금이 갔을 듯했다.

“크윽!”

“다, 당신은 나쁜 사람이에요!”

멀리서 구경하고 있던 현종휘가 떨리는 목소리로 등자평에게 외쳤다.

현종휘의 떨리는 손에서 쥐어짠 용기가 절절히 느껴졌다.

“네 이놈!”

등자평이 대노하여 외쳤다.

과거의 현종휘였다면 겁을 집어먹고 뒤로 물러났을 터였다.

하지만 자신과 함께 수련한 이후로 현종휘는 달라졌다.

그가 꿋꿋이 선 채로 등자평을 노려보고 있었다.

현종휘의 모습에 백무량은 속으로 흐뭇한 웃음을 머금었지만, 어린 제자의 성장을 독려할 때가 아니었다.

백무량이 낮은 목소리로 등자평을 도발했다.

“선수를 양보하겠다.”

“감히!”

불의의 습격을 당해서일까, 아니면 자신을 얕잡아 본 걸까?

등자평이 수비를 도외시한 채 달려들었다. 단 일 초 만에 상대를 죽여 버리겠다는 살기가 곤륜산 중턱을 어지럽혔다.

“……후우.”

백무량은 운해를 모두 삼킬 듯이 깊게 호흡했다.

현재 그의 감정은 되살아난 이래로 최고조로 격앙되어 있었다.

심지어 사형이 남긴 편지를 발견했을 때보다도.

백무량의 정념(情念)이 시리도록 차갑게, 만지면 베일 듯이 타올랐다.

“죽어라!”

등자평의 칼날이 백무량의 정수리를 향해 휘둘러졌다.

검로에 담긴 무공은 청풍검으로, 쾌한 베기가 일품이었다.

-상대가 발검하기도 전에 죽인다.

그 일념이 담긴 검이 절반쯤 다가왔을 때.

백무량이 백선신검을 쥔 우수(右手)를 뒤늦게 휘둘렀다.

구천화우검의 이 초, 창천명월.

곤륜산맥의 운해를 가르는 검.

창천명월의 초식이 등자평이 먼저 펼친 청풍검을 완벽하게 깨뜨렸다.

그와 동시에 등자평의 손아귀가 찢어졌다.

“크아악!”

등자평이 칼을 떨어뜨리며 고통 어린 비명을 내질렀다.

그가 이 대 제자임을 고려하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하나…… 기이한 일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다시.”

백무량은 무정한 목소리로 등자평을 채근했다.

그의 손아귀는 찢어졌으되 칼은 실금 하나 없이 멀쩡했다.

백선신검이 절세의 신검임을 생각하면, 손아귀를 찢는 것보다 칼을 자르는 게 더욱더 쉬운 일이었다.

“이, 일부러…….”

등자평이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방금 현종휘가 용기를 쥐어짰다면, 등자평은 끝을 모르는 고수에 대한 공포였다.

백무량은 그를 향해 다시금, 분노를 담아 외쳤다.

“다시라고 말했다!”

“크으윽……!”

등자평의 오른손에 강한 경련이 일었다.

창천명월의 초식과 맞부딪쳤을 때 느낀 육중한 검력(劍力)이 몸에 새겨진 탓이었다.

하지만 백무량은 용서라는 것을 몰랐다.

“네놈의 뼛속 깊이, 공포라는 것을 새겨 주겠다. 이십 년 동안 청해인이 운산보에게 느꼈을 티끌만 한 공포일지언정, 네놈의 뇌수까지 때려 박아 주마!”

그 말에 등자평이 허리를 곧추세웠다.

반쯤 이성이 흐려진 건지, 그의 눈동자가 좁쌀만큼 작아져 있었다.

“감히 곤륜의 애새끼 따위가! 청성의 도사에게 무슨 망발이더냐!”

“하면, 검을 들어라, 등자평.”

“……뭐?”

공포로 몸이 멈춘 등자평을 향해 백무량이 짙은 살기를 담아 말했다.

“무인이라면 검으로 멈춰 보란 말이다!”

“끄윽, 크흐흐…….”

신음과 웃음소리를 흘린 등자평이 덜덜 떨리는 손으로 검을 집었다.

그러고는 백무량을 향해 달려들었다. 오로지 상대를 죽이기 위한 살의만이 가득한 검이었다.

“다시!”

……그러나 백무량에게는 통하지 않는다.

등자평의 상처는 더더욱 벌어졌고, 피가 땅을 적시기 시작했다.

“정녕 이러고도 무사할 것 같더냐?”

등자평의 발악에 백무량은 조소를 머금었다.

“세상을 바꾸겠다고 말한 백련교와 맞서 싸운 곤륜파가, 어찌 청성을 두려워하겠느냐?”

“……!”

“무인으로서 죽고 싶거든, 검을 들어라!”

그 말에 등자평이 땅에 떨어진 검을 망연히 바라보았다.

무슨 감정으로 바라보는지, 솔직히 궁금하지도 않았다.

백무량으로선 그저 검을 들어 주길 바랐다.

-검을 들지 않은 사람을 베는 건 도사로서 명예를 버리는 일이다.

모든 도가에서 엄중히 다루는 율법이었다.

그것을 등자평이 모를 리가 없었다. 검을 버리고 두 손을 든다면 어떻게든 삶을 연명할 수도 있었다.

“건방진 애새끼가.”

하지만 등자평은 검을 들었다.

백무량에겐 그것으로 충분했다.

“다시, 다시!”

그렇게 등자평이 제자리에서 쓰러져 죽을 때까지.

그의 비명이 곤륜산맥에서 메아리쳤다.

***

다음 날.

백무량은 마을로 내려가 등자평이 있었을 법한 곳을 둘러보았다.

“그 도사가 무얼 하던가요?”

“뭘 하긴요. 그냥 도사님이셨지.”

“……예?”

“말씨가 얼마나 부드럽고, 행동거지가 점잖던지, 깜짝 놀랐다니까.”

한 어부가 그렇게 말했다.

“그놈이 뭐 어쨌다고?”

“수상한 짓을 하던가요?”

“수상한 짓은 무슨, 그냥 조용히 있다가 갔지.”

산하객잔의 송우현이 그렇게 말했다.

어딜 가든 등자평이 악한 짓을 했다는 말은 없었다.

누구에게도 반말하지 않았다고 하니, 백무량으로선 어처구니가 없었다.

“평생을 가짜로 살았느냐.”

백무량은 등자평의 약지에서 빼낸 옥가락지를 매만졌다.

일견 투명해 보이는 반지 안쪽에 사파의 무인이 흔히 쓰는 화채분(火瘥粉)이 담겨 있었다.

기본적으론 기침과 오한, 심하면 죽음에 이르는 독.

도사가 쓸 만한 물건은 아니었다. 게다가 은밀한 곳에서 숨겨 두고 쓰는 걸 보면 온당하게 사용하지도 않은 듯했다.

“죄를 물어야 할 자가 이렇게 많구나.”

운산보에 이어 청성파까지, 하나같이 자신에게 실망과 환멸을 안겨다 준다.

하물며 어딘가에서 암약하고 있을 백련교는 어떠한가.

백무량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곤륜파로 돌아갔다.

그러자 현노윤이 입구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사조님.”

“무슨 일이라도 있느냐?”

“내일 공동파가 온다고 합니다.”

“공동파라…….”

백무량이 턱을 매만졌다.

어쩌다 보니 단 한시도 그들과 접점을 가진 적이 없었다.

따라서 그들이 어떤 기질을 가졌는지 알지 못했다.

그런데 현노윤은 다른 걸 걱정하고 있는 듯했다.

“말씀하실 겁니까?”

“무얼 말이냐?”

“청성파가 운산보를 돕고 있다는 사실을 빨리 알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가능한 한 빨리 부정한 결탁을 폭로하여 청해를 평화롭게 만들고 싶다.

그 마음이 현노윤의 얼굴에서 보였다.

그러나 백무량은 고개를 내저을 수밖에 없었다.

“지금 당장은 힘들지 않겠느냐.”

“증거와 명분입니까?”

현노윤이 착잡한 목소리로 물으니, 백무량의 표정도 어두워졌다.

“너도 잘 아는구나. 그래. 구파일방의 치부를 드러내는 데 결정적인 증거 없이 머리만 들이대면 목이 따이는 법이다.”

“여기서 대놓고 칼부림을 하지 않았습니까?”

“나도 안다. 그래서 마을로 내려가서 그놈의 행적을 조사한 거다.”

혹여라도 그놈이 운산보와 만났다는 흔적과 문서가 있다면 이런 거로 고민할 필요가 없을 테니까.

하지만 마을 아래의 등자평은 그저 타지에서 온 도사님이었다.

이곳에서 부린 패악질과는 달리, 청해인에게는 아주 살갑게 군 듯했다.

“빌어먹을 놈이지.”

백무량은 그 이야기를 간략하게 하며 등자평을 씹었다.

“그래도 방법이 아예 없는 게 아니다.”

“그게 뭡니까?”

“어차피 운산보를 멸문시키기로 하지 않았느냐. 그러다 보면 반드시 증거가 나올 거다. 사파가 구파일방과 결탁하는데 그런 걸 준비하지 않았을 리가 없으니까.”

“……과연!”

백무량의 말에 현노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걸 본 백무량은 입술을 달싹였다.

“그 증거를 공동파를 통해 보내면 충분하겠지.”

“공동파가 우리를 돕겠습니까?”

“사소한 잘못이라면 덮어 주겠지만, 이건 도를 넘었다! 이깟 변방을 차지하기 위해 사파가 자리 잡는 걸 돕고, 그걸 숨겼지 않느냐!”

격앙된 목소리로 말을 쏟아 낸 백무량이 뒷말을 덧붙였다.

“물론 내일 찾아올 공동파의 도사가 어떤 사람인지 봐야겠지만 말이다.”

“저도 지켜보겠습니다.”

백무량과 현노윤이 서로 의지를 다지던 그때였다.

“저도요!”

문 뒤에서 대화를 조용히 엿듣던 현종휘가 갑자기 쾌활한 목소리로 외친 것이다.

“예끼! 이놈!”

당황한 현노윤은 현종휘의 그릇된 행동을 꾸짖었고…….

“나도 그러다가 많이 혼나고는 했지.”

옛날 일을 회상한 백무량은 낄낄거리며 웃었다.

“내가 사부에게 어떻게 맞았는지 알아?”

“말해 주세요!”

현종휘가 눈을 빛내자, 현노윤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체통을 지켜 주십시오, 사조님.”

“뭐 어떠냐? 이미 돌아가신 분인데, 이런 식으로라도 기억되면 좋아하시겠지.”

백무량의 말에 현노윤이 순간 아차 하여 표정을 고쳤다.

하지만 백무량은 쾌활하기만 했다.

‘과거의 후회나 미련은 심상에서 털어 냈으니까.’

그저 잊지만 않고, 현재의 삶을 열심히 살아가면 되지 않겠나.

자신이 기억하는 사부 주자령이라면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생각을 정리한 백무량이 피식 웃었다.

“그래서, 그게 어떻게 된 거냐면…….”

백무량의 이야기는 밤이 될 때까지 이어졌다.

“와, 진짜요?”

“……크흠.”

이야기가 계속될수록 현종휘의 눈가에 어린 총기는 더욱 강해졌고, 현노윤은 들은 체 만 체 하며 엿들었다.

아무래도 과거의 기록보다는 그때 살았던 선배의 이야기가 더욱 정확할 터였다.

그러나 들으면 들을수록 과거의 백무량이 철이 없었다는 결과로 귀결되었다.

“주 선배께서 얼마나 고생하셨을지…….”

현노윤이 한숨을 내쉬자, 백무량이 빙긋 웃었다.

“이제는 네가 내 뒤치다꺼리를 해야 할 게다.”

“노년에 파란만장한 여생이라니, 즐겁진 않겠군요.”

“그래서, 싫더냐?”

그 말에 현노윤은 평소답지 않게 짓궂은 미소를 지었다.

“저는 종휘가 사조님처럼 자랐으면 좋겠습니다.”

“다 들어 놓고는, 뭐?”

“철도 없고 잘못도 많이 저질렀지만, 결국 바른길로 돌아오지 않았습니까?”

“……허?”

백무량이 할 말을 잃은 순간, 현종휘가 찰떡같이 대답했다.

“네! 그럴게요!”

“그러지 마!”

백무량은 다급한 목소리로 외쳤다.

“마지막에 죽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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