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검해-31화 (31/275)

협력자 (4)

-호천(昊天)은 넓고 큰 하늘, 사천(四天) 중 여름이며.

-풍연(風煙)이란 허공에 서린 흐릿한 기운을 뜻한다.

사부에게 처음 들었을 땐 이게 무슨 소린지 알지 못했다.

허공에 불처럼 피어오르는 아지랑이처럼, 흐릿한 검기를 발출하는 초식이라 여겼다. 칠 초식인 주천암성(朱天暗星)과 비슷하면서 다르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제는 안다, 그 생각이 완전히 틀렸다는 것을.

검해가 알려 주었다.

호천풍연에는 창안자의 검의(劍意)가 있다.

“검해가 말하기를.”

백무량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호천은 매서운 여름 속, 운해가 가장 짙어지는 곤륜산맥의 선경(仙境)을 의미하며.’

백선신검의 검봉에 맺힌 태청신공의 공력이 구름처럼 희끄무레한 검기로 화한다.

마치 운해처럼.

휘르륵…….

첩첩이 쌓인 검기가 허공에 뒤섞이며 녹아들었다.

‘풍연이란 내공으로 이루어진 검기의 운해를 의미하니.’

백무량의 생각이 멎었다.

그의 칼끝에 맺힌 호천풍연의 검기가 운해에 녹아들었다.

‘진실하게 펼쳐진 호천풍연은 운검(雲劍)이라 불려도 모자람이 없다.’

극성에 이르면 청명한 하늘 아래에서도 호천풍연의 검기를 알아차릴 수 없다던가.

백무량은 호천풍연의 검기를 현천신장에 흩뿌렸다.

***

“맙소사……!”

고성진은 할 말을 잃은 채 제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내심 곤륜파를 무시하고 있었냐고 묻는다면, 사실이었다.

최근인 백련교를 비롯하여 항상 마교와 싸우다 보니 많은 무공이 유실되었다고 들었다.

-존경할 문파이긴 하나, 맞상대는 되지 못한다.

장문인이 곰방대를 피우며 했던 이야기가 아직 고성진의 머리에 남아 있었다.

하지만 방금 백무량이 펼친 무공은 어떠한가?

“현천신장이 파훼당하다니?”

기실 파훼 정도가 아니었다. 현천신장을 깨뜨린 검기가 땅바닥에 수십 갈래의 검흔(劍痕)을 남겼다.

현천신장을 깨뜨리고도 남은 힘이 대지를 찢어발긴 것이리라.

고성진은 저도 모르게 허리를 숙여 검흔을 살폈다.

“신성 정도가 아니었구나! 네 나이는 물론이고, 청년 사이에서도 너보다 뛰어난 사람은 없을 거다!”

고성진은 진심으로 백무량에게 탄복했다.

맹랑한 후배라고 여겼던 걸 사과하고 싶을 지경이었다.

전력을 다하진 않았으나 천회망룡을 깨뜨린 것 자체가 놀라운 일이었다.

고성진이 두 손을 모으고는 백무량에게 물었다.

“무공의 이름을 물어도 되겠느냐?”

백선신검을 회수하던 백무량이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구천화우검의 삼 초, 호천풍연.”

“……구천화우검?”

백무량의 실력에 놀라긴 했지만, 이번 충격은 혼백이 날아갈 정도였다.

고성진은 반사적으로 현노윤을 돌아보았다.

“서, 설마 장문인께서 실전된 무공을 수복하는 데 성공하신 겁니까?”

“그래.”

현노윤의 표정이 어딘가 떨떠름했지만, 상관없었다.

“허, 허허…… 허허허…….”

실소를 터트린 고성진은 다시금 검흔을 쳐다보았다.

구천화우검이 무엇이던가!

곤륜파의 영웅, 백무량 이래로 실전된 곤륜파 최고의 검법이 아니던가!

그제야 고성진은 후배의 이름이 왜 백무량인지 깨달았다.

“곤륜의 장문인께선 영웅을 길러내고 있으셨군요!”

“구천검 사조처럼 바른 사람으로 자라나길 바랄 뿐이네.”

현노윤이 무덤덤한 목소리로 대답하면서, 백무량의 표정을 곁눈질했다.

고성진은 그것을 사제 간의 정으로 생각했다.

“저희 장문인께서 듣는다면 정말로, 정말 감탄할 겁니다! 구천화우검이라니요! 와하하!”

“진심으로 기뻐하시는 겁니까?”

백무량이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묻자, 고성진이 피식 웃었다.

“안 기쁘겠냐? 가까운 도가가 잃었던 무공을 되찾았다는데!”

“…….”

백무량의 표정이 묘해졌다.

그걸 본 고성진은 그에게 얼굴을 들이댔다.

“그럼 내가 저주라도 하면서 집이라도 때려부수랴? 그걸 원했느냐?”

“아니, 그건 아닌데. 전에 보았던 도사와는 반응이 달라서요.”

“어땠는데 그래?”

“죽일 것처럼 칼을 휘둘렀죠.”

그 말에 고성진의 표정이 순간 굳었으나, 이내 유쾌한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무인의 기질이 강했던 모양이다! 하긴, 나라도 구천화우검을 익힌 도사와 싸워 보고 싶긴 해!”

“진심이었는데요?”

백무량의 말에 고성진이 인상을 찌푸렸다.

“세상에 그런 도사가 어디 있어? 축하해 주지는 못할망정 칼부림을 하는 미친놈이 도사일 리가 없잖느냐.”

“그러게나 말입니다.”

백무량이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선배께선 앞으로 어떻게 하실 겁니까?”

“장문인께 양해를 구하고, 본 파의 고수가 올 때까지 이곳에서 있어야지.”

고성진은 표정을 고치고는 현노윤에게 두 손을 모아 올렸다.

“제가 여기 있으면 아무리 운산보라도 건드리지 못할 겁니다. 공동의 주먹이 매서운 건 강호의 모두가 아니 말입니다. 하니…… 여기 있어도 되겠습니까?”

“같은 도사로서 어찌 공동의 인재를 바깥에 재우겠는가?”

현노윤의 허락에 고성진은 환한 미소를 지었다.

“감사합니다, 장문인!”

“자네가 빨리 왔으면 좋았을 것을.”

현노윤의 말에 고성진이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죄송합니다, 장문인. 제가 곤륜은 초행인지라…….”

“아니야, 괜찮네.”

“여독을 풀고 싶은데 숙소가 어딥니까?”

“저곳이네.”

현노윤의 손가락이 가리킨 방향에 허름한 집이 있었다.

“감사합니다, 장문인!”

현노윤에게 감사를 표한 고성진은 백무량에게 외쳤다.

“약속대로 현천신장의 두 초식은 내일부터 알려 주마!”

“예, 선배.”

백무량이 피식 웃었다.

그날 밤.

세 곤륜도가 한자리에 모였다.

***

모두가 모였을 때, 침묵을 깬 사람은 막내인 현종휘였다.

“나쁜 사람처럼 보이진 않았어요.”

“돌을 던지지 않아도 괜찮은 사람이란 거지?”

백무량의 농담에 현종휘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현사조님, 그게…… 그때는 제가 너무 화가 나서…….”

“잘했다.”

“……예?”

현종휘의 눈이 커지는 동안, 백무량은 현노윤에게 고개를 돌렸다.

“장문인이 보기엔 어땠지?”

그 말에 현노윤이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구름처럼 흐리고 가벼운 사람처럼 보여도, 공동파가 대표로 보낸 이 대 제자입니다. 무엇보다…… 현천신장의 초식을 가르친다고 말했을 때나 공동의 장문인을 언급한 걸 보면 유명한 고수일 겁니다.”

“내 생각에도 그래.”

백무량은 현천신장을 펼쳤을 때 고성진의 손바닥을 떠올렸다.

일반적으로 무인이 권장술을 익히면 손목을 비롯해 주먹과 손바닥, 손가락을 단련하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고성진은 달랐다.

쓸린 자국으로 인해 생긴 굳은살만 있을 뿐, 손톱의 흔적은 없었다.

‘주먹이 아니라 다른 걸 쥐는 수련을 더 많이 한 거겠지.’

그게 어떤 무기일지는 몰랐다. 적어도 고성진의 허리나 어깨에는 아무것도 매여 있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가 익힌 권장술의 성취가 낮은 것도 아니었다.

최소한 일류 이상.

현천신장을 펼친다면 고수의 경지에 발을 걸칠 수 있었다.

백무량은 오늘 보았던 고성진의 모습을 떠올렸다.

“뭐, 건방지긴 해도 성격이 괜찮긴 했지.”

“예.”

“제가 보기에도 그래요.”

현노윤과 현종휘가 고개를 끄덕였다.

보통 유명한 고수는 불어난 명성에 심취하여 자기 아래를 깔보고는 했다. 하물며 구파일방의 도사라면 더더욱 그러했다.

그걸 고려하면 고성진은 다른 도사와는 달랐다.

“사문의 무공에 대한 존경심은 가지고 있되 타문을 깔보지 않고, 베풀기를 좋아하니…… 등자평 같은 놈이랑 비교가 안 돼.”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고개를 끄덕인 현노윤이 심유한 눈으로 백무량을 바라보았다.

“하면 어떻게 하실 겁니까?”

“송 노야를 통해 공동파의 고수가 곤륜산에 있다는 걸 일단 청해 전역에 알려야지.”

이번 기회에 운산보의 목줄을 확실하게 움켜쥐어야 한다.

백무량은 다시금 입술을 달싹였다.

“시간은 우리 편이야. 이대로 버티고만 있어도 무림맹에서 운산보를 토벌하기 위한 고수를 보내올 거다.”

“하지만…….”

“그래, 그 전에 내가 운산보주를 죽여야지.”

무림맹의 도움을 받는 것도 좋지만, 곤륜파의 명예를 되살리는 게 급선무였다.

백련교의 난 이후로 흩어진 도사들을 다시 모을 기회이기도 했지만, 앞으로의 행보를 위해서도 더더욱 중요했다.

물론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그래야 청성파에 당당하게 따질 수 있지 않겠느냐.”

“……그렇지요.”

현노윤이 침중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강호의 불문율, 강자존(强者尊).

만약 지금 청성이 운산보와 결탁한 증거를 가지고 있다 한들, 직접 따지면 깔아뭉개질 뿐이었다.

현재의 곤륜은 그 정도 수준에 불과했다. 아무리 백무량이 강하대도 청성파 전체와 싸울 순 없었다.

그렇다고 무림맹에 맡기면 남에게 자신의 싸움을 미루는 셈이었다.

그건 곤륜의 방식이 아니었다.

“이름만 남은 문파가 아니라, 중추로 직접 올라서는 거다. 알겠느냐?”

백무량이 진지한 눈빛을 드러내자, 현종휘가 손을 번쩍 들었다.

“네, 저도 노력할게요!”

“녀석.”

백무량이 피식 웃는 동안, 현노윤이 주먹을 꽉 쥐었다.

“송 노야와 함께 곤륜파를 재건하겠습니다.”

“믿겠다.”

수십 년 동안 몰락한 도문의 명맥을 이은 현노윤을 믿지 않으면 누굴 믿으랴.

백무량이 보낸 신뢰에 현노윤은 감격할 수밖에 없었다.

“……예.”

“좋다. 그러면 고성진은 곤륜에 머물게 두도록 하고, 나는 곤륜산맥 주변에 있는 운산보를 물리치마.”

그렇게 조금씩 중심부로 가다 보면 운산보주와 마주할 수 있으리라.

백무량은 운산보주가 있을 서녕, 동쪽을 바라보았다.

***

다음 날.

고성진에게 동의를 구한 백무량은 송우현을 통해 청해 전역에 소문을 퍼트렸다.

-곤륜파를 돕기 위해 공동파가 고수를 보냈으며, 건드렸다가는 운산보를 곧장 공격할 것이라고.

이에 곤륜파를 불안하게 살피던 몇몇 청해인도 한시름 내려놓았다.

“곤륜신성이라고 하지만 아직은 아이잖아. 공동파면 믿을 만하지.”

“이제 운산보가 벌을 받을 때가 된 게야! 암!”

먹구름으로 가득했던 청해에 드디어 볕이 드는가?

청해인의 희망이 곤륜산에 있었으며, 공동파의 도움은 그 희망을 북돋는 증거가 되었다.

늦어도 일 년 내에 운산보는 끝난다.

그 사실이 청해 오지까지 널리 퍼졌을 때.

“발버둥을 치니, 목을 비트는 수밖에 없겠구나.”

운산보주가 붕대를 찢었다.

“여기 모인 운귀는 모두 들어라.”

“예!”

“곤륜파에 대해 말하는 자의 혀를 자르고, 귓불을 찢어라.”

운산보주, 노태랑(怒台郎)은 무표정한 얼굴로 하명했다.

“청해의 주인은 운산보임을, 모두가 알도록!”

서녕을 중심으로 청해 각지에 전서구가 날아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