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검해-25화 (25/275)

성장 (1)

곤륜파의 포효가 강서 무림을 떠들썩하게 만들었지만, 백무량은 조금도 나태해지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전보다 더욱 진지하게 수련에 임했다.

이유야 간단했다.

‘겨우 셋에 불과하지만, 절대 우습게 봐선 안 된다는 인식을 강호에 심어야 해.’

자신이 곤륜신성이란 별호를 얻었다고 한들 어디까지나 한때다.

열기와 관심이 식고 나면, 호사가들은 말할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고작 소년이 아닌가?

-문파를 지탱하는 고수는 곤륜에 전무하지 않은가?

지금도 어디선가는 곤륜파를 금방 사라질 문파 따위로 무시하고 있을 터였다. 백무량이 아는 강호는 다정(多情)한 만큼 무정(無情)한 곳이었다.

그렇기에 운산보를 무찔러야 했다.

곤륜파가 다시 청해의 주인이 되고 나면, 규모는 금세 커지기 마련이었다. 한 지역의 패자라는 명성 또한 중요했다.

‘다행히, 무림맹이 도와줄 것 같긴 한데…….’

잠시 수련을 멈춘 백무량은 턱을 매만졌다.

백련교의 난 이후로 곤륜파가 멸문당했지만, 무림맹은 여전히 빈자리를 채우지 않고 있었다.

해남파나 황산파, 태산검문의 집요한 요구를 무시해 왔단 뜻이었다.

‘곤륜을 존중하기 위함이면 좋겠지만, 그게 아니라 경쟁자를 늘리지 않기 위해서라면?’

백무량은 무림맹과 구파일방의 저의가 몹시 궁금했다.

그때 옆에서 낭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현사조님, 지금 바쁘세요?”

자신에게 보내는 열렬한 존경이 꽤나 부담스럽다.

백무량의 얼굴에 어색한 미소가 도드라졌다.

“종휘야, 왜?”

“제가 펼치는 무공의 형이 제대로 된 건지 봐주셨으면 해서요! 아, 호흡도…….”

백무량이 대답을 하기도 전에 현종휘가 삼재검과 분광검을 펼쳤다. 초식 사이를 누비는 삼보가 특히 일품이었다.

등정로를 오르며 시켰던 훈련을 계속해서 곱씹은 듯했다.

백무량이 손자를 흐뭇하게 바라보는 할아버지와 같은 미소를 지었다.

전에도 확인했지만, 재능만큼이나 근기가 뛰어난 재목이었다.

하지만 너무 착실해서 문제인가.

백무량의 눈가가 가늘어졌다.

“초식의 역순대로 펼쳐 볼 수 있겠느냐?”

“……예? 아, 네.”

순간 버벅거린 현종휘가 백무량이 시킨 대로 분광검을 역순으로 펼쳤다.

그러고 나니 녀석의 단점이 보였다.

“도사의 검으로썬 훌륭하나, 무인의 검으로 볼 순 없겠구나.”

“왜요?”

“너무 곧아.”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백무량이 삼절광식의 삼 초, 분광검결을 펼쳤다.

일자로 베는 일 초 검뢰벽천과 위에서 아래로 가르는 이 초 일섬운월과는 다르게, 삼 초 분광검결은 일정한 형 없이 펼치는 팔 자결이었다.

쉽게 말해, 일 초와 이 초를 잇는 이음매.

무형(無形)이기에 자유로우나 자칫 잘못 이해하면 이도 저도 아닌 검이 되어 버리고 만다.

현종휘에게 이것을 알려 주기 위해 백무량은 완벽한 삼 초와 잘못된 삼 초를 연거푸 보여 줬다.

그렇게 다섯 번을 펼쳤을 때쯤.

“……아! 이제 이해했어요!”

진의를 이해한 현종휘가 탄성을 터트렸다.

그러고는 검을 휘두르니, 분광검이 한층 유려하게 바뀌었다.

그걸 본 백무량은 엄한 목소리로 경고했다.

“네 성격상 어쩔 수 없는 흠이었으나, 실력이 뛰어난 검객이라면 반드시 그 틈을 노릴 것이다. 알겠느냐?”

“네! 명심할게요!”

씩씩하게 대답한 현종휘는 깨달은 진의를 놓치지 않기 위해 다시 수련에 전념했다.

‘하나를 말해 주면 그것을 완숙하게 익히니, 어떤 선배가 싫어하랴.’

현종휘를 볼 때마다 백무량은 흐뭇한 미소를 감출 수 없었다.

타고난 근기나 재능도 좋지만, 선량함이 사형 주백천에게도 밀리지 않았다.

‘저 아이를 가르치면서 기본을 다시 다지게 되는구나.’

곤륜의 지극한 호흡과 형식에 얽매이지 않는 표홀한 심상.

어디까지나 기본에 불과했지만, 그것이야말로 상승의 경지에 오르는 지름길이었다.

백무량은 현종휘의 뒷모습을 보며 은근한 기대를 품었다.

“내가 전에 말했지, 가르쳐 주는 대로 잘 따른다면 정말 약관이 되기 전에 고수가 될 거라고.”

“그럼요! 그렇게 될 거예요!”

현종휘가 해맑은 표정을 지으니, 백무량도 웃음으로 화답했다.

하지만 그 속내까지 웃을 순 없었다.

‘곤륜은 아직 약소 문파에 불과하니, 분명 잡놈들이 시비를 걸어올 텐데…… 종휘가 피를 보는 것도 시간문제구나.’

안타까운 마음이 스쳤지만, 무인으로 살아감에 있어 언젠가는 극복해야 할 일이다.

무엇보다 백무량 자신이 곤륜파를 비울 때 본산을 지킬 고수가 필요했다.

과연 저 아이에게 그런 막중한 짐을 주어도 되는 걸까?

그런 고민을 불과 어제까지 했었다.

그날은 백무량이 곤륜산맥에 다시 돌아온 날이었다.

***

“마을에서의 일은 잘 해결하였느냐?”

며칠 만에 현노윤의 얼굴에는 피로가 가득했다.

그여서 피로로 끝났지, 우중과 현종휘는 상태가 좋지 않아 보였다.

언제고 운산보가 추격하리란 압박 속에서 있었을 터이니 당연한 일이었다.

“물론이지요.”

백무량은 그들 앞에서 묵직한 봇짐을 내려놓았다.

퉁 하는 소리와 함께 군침을 돌게 만드는 냄새가 퍼졌다.

“오……!”

우중이 제일 먼저 손을 뻗었지만, 백무량이 가볍게 걷어 냈다.

백무량은 그를 밀어내면서 현노윤에게 물었다.

“별다른 일은 없었습니까?”

“수십 년 동안 있었던 곤륜산에서 겨우 며칠일 뿐이다. 고생이랄 것도 없지.”

그렇게 말하는 현노윤의 시선이 현종휘에게 향했다.

“손자는 그렇지 않지만…….”

“흐우, 후.”

발갛게 달아오른 피부와 얼굴.

열기가 있는지 현종휘가 두 팔로 몸을 매만지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백무량은 우중을 찌릿 노려보았다.

“뭘 한 거지?”

“아니. 애가 몸이 약해서 노숙을 못 견딘 걸 어떡해!”

자기는 무척 억울하다는 듯이 우중이 손을 내밀었다.

그의 손가락에 약초를 빻은 흔적이 있었다.

그건 식견이 얇은 백무량도 아는 해열초였다.

“흐음.”

현종휘가 걱정스러웠던 백무량은 그의 이마를 매만졌다.

그러자 현종휘의 눈이 가늘게 뜨였다.

“현사…….”

“사형이다.”

백무량이 중간에 말을 고쳤다.

“……사형?”

고열로 앓는 와중에도 우중의 멍청한 표정을 본 모양이다.

현종휘가 하려던 말을 고치며 방긋 웃었다.

“그래요, 사형. 잘 다녀오신 거죠?”

“곤륜의 기상을 세상에 보여 주고 왔지.”

“다행이다. 저는 사형을 걱정하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그럴 필요가 없었나 봐요. 저와는 다르게 강하시니까요.”

열이 올라서인지 현종휘의 목소리가 덜덜 떨렸지만, 자기 뜻은 분명히 밝혔다.

“근데 저도 만만치 않게 강해질 거거든요. 지금은 부끄러운 모습을 보이긴 했지만, 정말 약관 전에 고수가 될 거예요.”

“……녀석.”

백무량은 복잡한 감정에 사로잡혔다.

저렇게 열로 끓으면서 한다는 생각이 고수가 되겠단다.

대체 무엇이 종휘를 간절하게 만들었는가.

그것이 너무 궁금해져서 물었다.

“고수가 되려는 이유가 뭐냐?”

백무량의 물음에 현종휘가 잠시 주저하다가 대답했다.

“처음에는 할아버지를 위해서였는데요, 지금은 조금 달라요. 사형이 내려가고 나서 바뀐 것 같아요.”

“그게 뭔데?”

“저야 할아버지와 함께 있었지만, 사형은 마을에서 혼자서 싸우셨잖아요. 저와 곤륜파를 위해서요.”

현종휘는 백무량을 올려다보았다.

“저는 고수가 되고 싶어요. 사형이 믿고 의지할 수 있을 정도로요. 그렇게 되면 사형의 마음도 편해지지 않을까 싶어서요.”

“…….”

백무량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

종휘가 정녕 아이가 맞나 싶어서. 자신을 생각하는 저 마음이 너무나 고맙고, 대견해서.

“왜 남을 그렇게까지 배려하는지 모르겠다.”

“뭐가요?”

“내가 열흘 동안 무시했는데도 끈질기게 들러붙었잖냐.”

“그랬던가요?”

기억이 나지 않는 건지, 눈을 굴리는 현종휘의 모습에 백무량은 복잡한 한숨을 내쉬었다.

자기가 행한 선행조차 잊어버린 모양이다.

‘내가 괴팍한 노인이었어도 그렇게 행동했겠구나.’

성정이 저렇게 온화해서야 잡벌레 하나도 베지 못하리라.

그 모습을 보던 백무량은 심지를 굳혔다.

“넌 그냥 고수가 되면 안 되겠다.”

“……네?”

“악에 받친 고수까지 제압할 수 있는 게 아니고서야 안 되겠단 말이다.”

“그게 가능할까요?”

그 말에 백무량이 자신 있는 표정으로 씩 웃었다.

“당연하지.”

사부가 직접 증명하지 않았던가.

강호 십 대 고수, 태청선 주자령이라는 이름으로.

백무량은 현종휘를 바르게 앉히고는 태청신공의 내공을 일으켰다.

휘르르…….

태청신단을 취한 공능이 일거에 드러났다.

날씨에 따라 무한히 변화하는 곤륜산맥의 운해처럼, 태청진기가 백무량의 의지에 반응했다.

그 태청진기에 맞닿은 현종휘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이를 본 우중이 깜짝 놀랐다.

“냉기가 떨어져 나가다니?”

그 말대로 태청진기가 현종휘를 감싸니, 혈맥을 수축시켰던 냉기가 떨어져 나가고 창백한 안색이 복숭앗빛을 띠었다.

웃음을 머금은 현종휘에게 백무량이 말했다.

“내가 그렇게 만들어 주마.”

곤륜파를 위해서, 그리고 현종휘 자신을 위해서.

‘손이 많이 가는 동생이구나.’

백무량은 자신이 현종휘에게 정이 붙고 있다는 걸 아직은 알지 못했다.

***

그날 이후로 백무량은 자신의 수련 시간마다 현종휘를 불러서 직접 가르쳤다.

자신의 성정이 워낙 급해서 좋은 사부가 되지 못할 거라 자평했지만.

“그게 아니라! 이렇게!”

“다시 해 볼게요, 현사조님!”

그만큼 현종휘의 인내심이 깊었다.

하나를 가르치면 그것을 진득하게 매달리는 성정 또한 대단히 뛰어났다.

그게 어느 수준이냐 하면, 형이 완숙하지 않으면 밤을 새워 가며 수련을 이어 갈 정도였다.

백무량은 현종휘를 지켜보며 혀를 내둘렀다.

‘나한테 저런 근기가 있었다면 후회나 미련 같은 걸 품지 않았겠지.’

저러고도 백련교주에게 졌다면 정말로 역량이 부족했다는 뜻이니까.

백무량은 현종휘의 근기에 혀를 내두르며 운함석에 다가갔다.

거기에는 그가 며칠간 운룡대팔식을 펼친 흔적이 남아 있었다.

처음 삼 장까지는 발자국이 고르게 나 있었지만, 그 위로는 불규칙하고 엉성했다.

‘내가 지금까지 쌓은 무학 체계와 어려진 신체가 합일하지 않아서 그런 거겠지.’

여기서 가장 편한 길은 육체가 성장할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었다.

성년의 몸으로 펼치는 운룡대팔식이야말로 무적(無敵)이거늘, 괜히 성급하게 굴었다가는 균형이 무너질 수도 있었다.

하지만 백무량은 그것을 택할 수 없었다.

‘운산보가 언제 쳐들어올 줄 알고 빈둥댄단 말인가.’

특히, 운산보주.

아무리 거파의 도움을 받았다고 한들 무공이 고강하지 않으면 협객의 칼날에 죽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그는 십구 년 동안 수많은 도전을 받으면서도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평범한 놈은 아니야.’

그놈을 꺾기 위해서는 가진 모든 패를 꺼내어 점검할 필요가 있었다.

운룡대팔식 또한 마찬가지다.

백무량이 그렇게 생각을 이어 가고 있을 때였다.

“현사조님, 점심시간이래요!”

“그래?”

현종휘의 말에 백무량은 서둘러 곤륜파 가옥으로 향했다.

임시로 짓긴 했지만, 송우현이 신경을 써 준 덕분에 지내기가 상당히 편했다.

그곳에는 예전에 먹었던 감자나 미음이 아닌 진수성찬이 차려져 있었다.

“먼저 드시지요.”

현노윤의 깍듯한 예의에 백무량이 입술을 달싹였다.

“식사하기에 앞서 영보천존과 원시천존, 도덕천존께 예를 올리자꾸나.”

“…….”

젓가락을 붙잡았던 현종휘가 슬며시 내려놓았다.

그걸 본 백무량이 피식 웃었다.

“됐다. 삼청께서도 도학을 잇는 자가 배불리 먹길 바랄 것이다. 게다가 이곳은 곤륜이지 않으냐.”

워낙 산세가 험하고 운해가 짙은지라 채식으로 살기가 불가능한 곳.

송우현이 적극적으로 지원해 줘서 그렇지, 본래라면 이런 진수성찬은 꿈도 꿀 수 없었다.

인내심이 깊은 현종휘가 아쉬워한 까닭이 거기에 있었다.

백무량이 한쪽 눈을 찡긋거렸다.

“자, 어서 들어라.”

“감사합니다, 현사조님!”

곤륜파의 점심은 화목한 공기로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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