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장 (2)
겨우 셋뿐인 문파.
평범한 가족만도 못한 숫자였지만 화목함은 어떤 문파에 비할 바가 못 되었다.
그러나 빛이 있으면 그림자가 있다고 했던가.
“사조님, 따로 말씀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백무량은 현노윤의 얼굴에서 평소답지 않은 격정을 느꼈다.
전에 종휘가 그러했듯, 그에게도 마음의 짐이 있는 듯했다.
그 모습을 보니 저도 모르게 헛웃음이 나왔다.
“어째 너희는 사람이 좋아도 너무…….”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감사를 표하고 끝날 일을, 너나 종휘는 제 일처럼 여기고 있지 않느냐.”
“당연하지 않습니까.”
현노윤은 툭 튀어나온 배를 두드리는 현종휘를 보며 하려던 말을 이었다.
“저희나 사조님이나 곤륜의 동문(同門)이요, 같은 무학을 공유하는 가족입니다. 백 사조의 어려움을 등한시해서야 근본을 잃은 잡배와 같지요.”
“…….”
“어려움에서 벗어났음인즉 사조님을 저희에게 보내 준 삼청의 은혜가 아니겠습니까? 믿고 따르며 걱정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현노윤의 말은 정말이지, 사부나 사형이 할 법한 도가(道家)의 이야기였다.
예전에는 그렇게 지겨워했거늘. 지금 들으니 무언가 그리운 기분이 들었다.
백무량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삼청께서 왜 죽은 사람을 되살리느냐. 됐다. 너나 종휘나 뭐가 그리 걱정이 많아서는. 듣는 내가 부담스러울 정도다.”
“허, 그렇습니까.”
백무량과 현노윤이 미소를 교환했다.
찰나에 불과했지만 서로를 더욱 이해할 수 있었다.
“한데 송 노야가 왜 곤륜파를 돕게 된 겁니까?”
“그게 어떻게 된 거냐면 말이지…….”
백무량은 현노윤에게 산하객잔에서 있었던 일을 말해 주었다.
그러자 그가 깜짝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사조님께서 말씀하신 사형이 송 노야와 인연이 있었단 말입니까?”
“그래. 그러니 이제 믿을 때도 되지 않았느냐?”
백무량이 저도 모르게 눈을 흘겼다.
외인인 송우현이 주백천의 존재를 아는데, 장문인인 현노윤이 부정한단 사실이 내심 불쾌했던 탓이었다.
그 심정을 알아차린 현노윤이 수염을 만지작거렸다.
“……과연, 제가 부덕했습니다.”
“아니다. 그 사람을 보니 확실해지더구나.”
백무량은 한숨을 내쉬며 깨달은 바를 내뱉었다.
“너를 포함해서 많은 사람이 사형의 존재를 잊었을 거다. 애초에 내가 살아난 것 자체가 이상하다 여기긴 했지.”
그렇게 속내를 털어놓는 백무량의 목소리는 그답지 않게 낮고 고요했다.
무공을 회복하면 반드시 찾아가겠노라 외쳤지만, 현노윤과 송우현의 반응을 보면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
자신의 어두운 마음을 현노윤이 알아차린 걸까?
그가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었다.
“어렸을 때부터 그렇게 인상을 구겨서야, 나중에는 이마에 층운(層雲)이 쌓일 겁니다.”
“곤륜 아니랄까 봐 비유가 구름이더냐?”
“그러다 사조님이 저보다 늙어 보이게 될지도 모르지요.”
“……허!”
터럭이 하얗게 센 노인이 저렇게 말하니 백무량도 할 말을 잃었다.
현노윤의 웃음이 짙어졌다.
“모든 무림인이라면 꿈꾸는 반로환동을 겪은 셈인데, 기뻐하기보다 걱정이 많으신 것 같습니다.”
“기뻐할 때가 아니잖느냐.”
백무량이 보인 초조함에 현노윤은 담담함으로 답했다.
“마주한 어려움을 잠시 잊고 가진 것에 기뻐하는 게 보약일 때가 있지요. 그때가 지금입니다. 송 노야의 도움으로 곤륜파가 재건되고, 부족한 식재가 보충되어 종휘와 사조님의 살이 붙고 있지 않습니까?”
“……그건.”
“나태해지지 않고서야 살은 언젠가 질긴 피부가 되고, 근육이 될 겁니다. 다가올 싸움은 사조님의 명성이 늦춰 주고 있지요.”
현노윤이 목소리에 힘을 주어 말했다.
“저는 사조님께 감사하다, 그렇게 말하고 싶었습니다.”
“그랬더냐.”
그제야 백무량은 자신이 너무 초조해하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쓸데없는 심려에 마음이 흔들리려고 했는데, 네 덕분에 중심을 잡게 되는구나.”
“아닙니다. 괜히 제가 사조님을 가르치려 든 게 아닌가 걱정스러운 참이었습니다.”
“가르치기는 무슨.”
“운산보와 싸우실 때 저희는 그저 도망만 다니지 않았습니까. 노심초사할 쪽은 오히려 저였습니다.”
“뭘 노심초사한단 말이냐?”
“앞으로 재건될 곤륜파에 과연 현노윤이라는 학도사가 장문인으로서 적합할지 고민했지요.”
현노윤이 그 화제를 입에 담는 순간, 백무량의 눈이 커다래졌다.
“그게 무슨 소리냐! 쓸데없는 심려를 품은 건 오히려 너였구나!”
“명맥만 이어 간 역사를 양지로 끌어 올린 건 사조님이셨지요.”
현노윤의 얼굴에 세월이 있었다. 오래도록 무시당하고, 운산보에게 두들겨 맞은 시간이 피부에 주름으로 자리했다.
그 시간 동안 조금씩 의문이 쌓여 갔을 것이다.
과연 곤륜파의 명맥을 제대로 이었다고 할 수 있을까?
학도사인 자신이 장문인이었기에 무시당한 건 아니었을까.
그런 자잘한 망념이 수십 년 동안 쌓였을 터였다.
백무량은 그에게 낮은 목소리로 꾸짖었다.
“나를 입문시키지 않겠다고, 사조의 이름을 사칭햐냐며 분노하던 모습은 어디 가고 유약한 노인만 남았구나.”
“운산보에게 쫓기고 종휘가 앓는 모습을 보니 무력함이 치밀더군요.”
“무력함이라…….”
백무량이 현노윤의 말을 그대로 받았다.
“몰락한 도문의 장문인으로서 그걸 수십 년 동안 감내한 네가 있었기에, 나는 곤륜의 도사로서 다시 살아갈 수 있었다.”
“…….”
“하물며 종휘는 어떠하더냐? 내 보기에는 정종 도가의 가르침을 받아들인 선한 아이였다.”
“바른 아이지요.”
그 말에 백무량은 현노윤의 의표를 찔렀다.
“무공의 고하가 그리 중요하더냐? 도문의 명맥을 이었다 함은, 선대의 가르침을 흐트러짐 없이 전하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었느냐?”
“…….”
“종휘를 완벽히 길러 낸 네가 장문인감이 아니라면 대체 곤륜산에 누가 있단 말이냐? 하루가 멀다고 곤륜산을 떠났던 나에겐 어림도 없는 일이지.”
가벼운 농담을 던졌던 백무량이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곤륜의 도사라면, 유약함은 버려라. 늙어서도 산취(山取 : 고산병)를 이겨 낸 장정답지 않은 말이었다.”
“다 늙은 사람에게 너무 무거운 짐을 떠넘기시는군요.”
“능력이 있으니 중용해야지.”
“……하하.”
헛웃음을 흘린 현노윤이 두 손을 모아 올렸다.
“이십팔 대 장문인, 현노윤으로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고민이 끝났다니 다행이구나.”
백무량은 수련장이 있는 곳으로 걸어가며 입술을 달싹였다.
“나도 네 덕분에 보약을 먹은 것 같으니, 서로 도운 셈 치자.”
잠시나마 어려움을 잊고 가진 것에 기뻐하라고 했던가.
백무량은 운산보와의 싸움에서 얻은 것들을 떠올렸다.
사형이 남긴 그림, 태청신단, 백선신검, 게다가 자신에게 남긴 편지까지…….
송우현이 마지막에 준 약병은 삼 년의 공력을 안겨다 주었다.
‘얻은 것이 이렇게나 많은데도 불안해하고 있었다니.’
백무량의 얼굴에 짙은 미소가 맺혔다.
앞으로 다가올 위기는 잠시 잊었다. 그저 미래를 보았다.
많은 이들이 왕래하는 대도명문, 청해 곤륜.
재건한 삼청궁에 도경을 수학하는 학도사가 가득하고, 수련장에서 외친 무인의 기합 소리가 운해에 맴돈다.
삼청궁에선 현노윤이 서예를 뽐낼 것이며, 수련장의 무인들 사이에서 장성한 현종휘가 교두(敎頭) 역할을 할 것이다.
그때가 되면 사형에게 당당하게 밝힐 수 있으리라.
“영웅담의 주인공이 되었다고.”
백무량이 하늘을 향해 중얼거렸다.
***
백무량이 매일 수련에 임하는 동안, 산 아래에 수많은 행렬이 이어지고 있었다.
-감우상인이 상계에 돌아온다!
그 소식이 일파만파로 전해진 탓에 선연과 악연 모두 열렬한 환영을 보내오고 있었다.
강호의 변방인 청해, 그것도 곤륜산맥 주위임에도!
“골치 아프게 되었군.”
송우현이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하여간 상인 놈들은 쉽게 잊는 법이 없어. 쪼잔한 놈들.”
칠십이 넘은 노인에게 양보해 줄 생각은 못 할망정, 다치기 싫으면 조용히 은거나 하라는 글귀가 적혀 있었다.
‘만금상단에서 떠나기 전까지만 해도 솜털이 보송한 놈이었거늘.’
언제 대가리가 굵어진 건지, 자신을 상대로 대범한 소리를 찍찍 내뱉고 있다.
송우현은 그것이 불쾌하다기보다 안쓰러웠다. 그깟 몇 전 때문에 인의를 버리는 상계에 지쳐 떠났던 그이기에 더욱더 그러했다.
물론, 소싯적의 송우현 또한 만만치 않았지만.
그렇다고 선배에게 함부로 대하진 않았다.
그 이유야 간단했다.
“선배의 앞길을 방해했다간 어떻게 되는지 아직 모르는 모양이구먼.”
너털웃음을 흘린 송우현이 과거의 인연에 편지를 쓰던 그때였다.
“송 형!”
문이 벌컥 열리더니 어부 하나가 큰 목소리로 외쳤다.
“운산보주, 그놈이 어떤 고수한테 습격당했다는데?”
“……뭐?”
전혀 예상하지 못한 급보에 송우현의 인상이 찌푸려졌다.
그 급보가 길이 될지 흉이 될지, 당장은 알 수 없었다.
***
소식을 들은 백무량은 눈을 가늘게 떴다.
“운산보주가 습격을 당하다니?”
“말한 대로다. 외부에서 온 고수가 운산보주를 습격했단 모양이야.”
송우현이 부채를 펄럭이며 숨을 헐떡였다.
“대체 이런 곳에서 어떻게 사는 거냐? 매번 올라오려니 힘들어서 원, 중간에 쓰러질 뻔했다.”
“그러지 말고 다음부턴 사람을 보내십시오.”
“내가 직접 알려 주는 편이 믿기 좋은 거 아니냐.”
그 말에 백무량이 간단히 답했다.
“농담이 아니라, 정말 쓰러질 겁니다.”
“거참.”
“제가 노야를 왜 못 믿겠습니까? 주백천의 이름으로 묶인 인연이 있는데 말입니다.”
백무량의 말에 송우현이 한쪽 입술을 씰룩였다.
“그 이름을 가볍게 부르지 마라.”
“노야한텐 은인이지만 저한텐 가까운 사이라서요.”
“……요놈이.”
잠시 인상을 구겼던 송우현이 피식 웃었다.
“그래, 그건 그렇다 치고. 수장이 습격당했으니 당장은 우리한테 신경 쓸 겨를이나 있겠느냐?”
“그거야 그렇지요.”
백무량은 저도 모르게 턱을 매만졌다.
“시간이 있을 때 빨리 토대를 굳히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노야나 우리 곤륜이나…….”
“떽! 장문인이 멀쩡히 계시거늘, 오만한 말투로다!”
송우현이 강하게 꾸짖자, 백무량의 얼굴에 어색한 미소가 도드라졌다.
‘사실 내가 장문인의 사조라는 걸 알면 어떻게 될까.’
미친놈으로 취급하거나, 믿는다 한들 곤륜파의 평판이 안 좋아질 거란 건 자명한 사실.
백무량은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하려던 말을 이었다.
“뭐, 어쨌든 운산보가 혼란스러울 때 상황을 굳혀야겠지요.”
“어떻게 말이냐?”
“백련교의 난 때 곤륜파는 분명 멸문했었지만, 기명제자 말고도 속가 제자나 강호행을 하고 있던 도사도 분명 있었지요. 그들을 다시 본산으로 불러들이면 될 겁니다.”
물론 그날로부터 무려 칠십여 년이나 지났다.
하지만 가르침은 이어졌을 것이다. 곤륜파에 돌아오지 않은 채 강호에 남아 있는 제자가 있을 터였다.
그들을 불러모을 도움은 청성과 공동파에게 요청할 수 있을 터였다.
그 이야기를 듣던 송우현이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불러모으는 거야 좋다. 단기간에 비약적인 성장을 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들이 순순히 네 말을 들어줄 것 같더냐?”
“그거야 먼저 예상했지요.”
백무량은 무덤덤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백련교의 난에서 칠십여 년이나 지난 지금. 그들이 어떻게 변화했을지 아무도 몰랐다. 도가적인 성향은커녕 잔인무도한 악인으로 변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무엇보다 굴러 들어온 돌멩이가 바위를 건드리는 상황쯤, 약소 문파에선 흔한 일이었다.
이에 백무량은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었다.
“제가 찍어 누르면 되지 않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