곤륜재인(崑崙在人) (4)
다음 날이 되니 그의 말이 괜한 허세가 아니었음을 알 수 있었다.
창밖을 흘낏 봐도 알 수 있을 만큼 많은 인파가 마을을 가득 메운 것이다.
촌락답지 않은 북적거림이 산하객잔 이 층. 백무량이 몸을 숨기고 있는 곳까지 들릴 정도였다.
“울타리를 넓혀야겠는데?”
“나무는 어쩐답니까?”
“아이고, 어르신들, 외지인인 제가 하겠습니다.”
청류강 근방의 어부들과 외지인이 서로를 격려하며 촌락의 너비를 넓혀 갔다.
이를 본 창틀 아래에서 훔쳐본 백무량은 곧장 송우현을 불렀다.
“저들 중에 운산보의 첩자가 섞여 있으면 어떡합니까?”
“첩자? 그게 뭔…… 내가 그리 녹록한 사람으로 보였느냐?”
송우현이 별소리를 한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건 그렇다 치고, 뭐가 그리 쑥스러움이 많나? 다 너를 보기 위해 모였을 터인데.”
“……예? 그게 뭔 잡소리랍니까?”
백무량의 반문에 송우현이 단언했다.
“청해에서 유일하게 운산보의 지부가 없는 곳이니까.”
“하면…….”
백무량이 말을 잇기도 전에 송우현이 요약했다.
“네가 곤륜 지부를 박살을 낸 사실을 모두가 안단 말이다.”
“너무 빠른 것 아닙니까?”
“옛말에 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하지 않았느냐.”
그 말에 백무량은 송우현을 다시 볼 수밖에 없었다.
‘청해의 촌락끼리는 뭉치기가 쉽지 않은데…….’
워낙 산이 많은 지역인지라 옆집처럼 가까운 촌락이 아니고서야 서로를 밀어내기 일쑤였다.
그들을 일거에, 그것도 하루 만에 불러모은다는 건 예전부터 송우현의 인망이 두텁다는 뜻이었다.
“전서구도 곧 청성과 공동에 도착할 것이야. 뭐, 그것으로도 시원치 않아서 사람을 몇몇 보내긴 했다만…….”
송우현이 심드렁한 목소리로 말했다.
“편지를 받아 놓고 못 받았다 지랄하는 꼴을 보느니 불이라도 내는 편이 낫지 않겠느냐?”
“점잖은 어르신인 줄 알았는데요.”
“사내가 일을 벌이는데 깨작거려서야 뭐가 되겠나.”
송우현은 백무량의 등을 두드렸다.
그가 보기엔 오히려 백무량이 대단하게 느껴졌다.
“나야 산전수전 다 겪은 늙은이라지만, 넌 무슨 애가 사람을 그렇게 죽이고 다녀서야 천수를 누릴 수 있겠느냐?”
“그거야 상대가 사파이지 않습니까.”
“사파면 무조건 죽여도 되느냐? 그런 놈이 나한테 점잖지 않다 뭐라고 그래?”
“저야 점잖은 도사처럼 살긴 한참 늦었지요.”
백무량의 말에 송우현이 혀를 찼다.
“누가 보면 나이가 서른은 된 줄 알겠다.”
“……하하.”
백무량은 멋쩍다는 듯 뒷머리를 긁었다.
곤륜파인 현씨 조손에겐 자신의 정체를 밝혔지만, 다른 사람에게까지 그러고 싶지 않았다.
무엇보다. 밝히지 않는 편이 앞으로의 행보에 이로울 터였다.
‘괜히 나 때문에 곤륜파가 좌도방문으로 몰릴 수야 없지.’
천리와 그릇된 도술을 펼친다고 하여 좌도(左道).
과거에 멸문당한 모산파의 예를 떠올리면, 구파일방에게 공적으로 몰려도 할 말이 없었다.
백무량이 잠시 고민하던 와중에 송우현이 창가로 다가갔다.
끼이익…….
창문이 열리자 이른 여름의 상쾌한 바람이 백무량의 뺨을 두드렸다.
“갑자기 뭡니까?”
“아까 말하지 않았더냐, 너를 기다리는 사람이 많다고.”
기다리는 사람이라…….
백무량은 자신의 작은 손을 보고는 입을 열었다.
“실망하거나 의심하지 않겠습니까? 저라도 꼬마가 문파의 지부를 없앴다고 하면 안 믿을 텐데요.”
“너를 믿고 싶은 거라고 말하면 이해하겠느냐?”
“…….”
순간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백련교주에게 죽고 다시 태어난 이래로 백무량은 현씨 조손과 송우현을 만났다.
그들 모두 자신의 터무니없는 말과 행동을 믿어 주었다.
그 이유는 지금 송우현이 말한 것과 같았다.
자신을 믿고 싶었기 때문이다.
현노윤은 곤륜파의 부흥과 청해의 미래를 위해 ‘백무량 사조의 환생’을 믿었고, 송우현은 과거의 은혜를 갚기 위해 ‘은인을 안다는 도사’를 믿었다.
하면 청해인은 어떨까?
겨우 지부 하나 무너졌다고, 그곳을 찾아오는 청해인은 대체 얼마나 간절한 걸까?
백무량은 피식 웃음을 머금고는 송우현에게 농을 던졌다.
“이거 참, 운산보가 보통 악독한 게 아닌가 봅니다.”
“어부가 자기 배를 내준다고 할 때 이상하지 않았느냐?”
삯을 쳐준다고 해도 배란 어부에게 있어 생명줄.
어부들은 그 생명줄을 곤륜 지부를 무너뜨리는 데 내던진 셈이었다.
백무량은 그제야 이해했다.
바깥에 모여든 청해인의 고통이 얼마나 클지.
“그러면 어쩔 수 없지요.”
백무량이 앞으로 걸어갔다.
기꺼이 되어 주리란 생각이었다.
사형 주백천에게 말했던 것처럼, 영웅담의 주인공이.
창문 밖으로 고개를 내민 소영웅이 큰 목소리로 외쳤다.
“나, 곤륜의 도사 백무량이 말하니!”
“……!”
백무량의 등장에 순간 웅성거림이 멎었다.
그들의 눈빛에는 여러 가지 복잡한 감정이 얽혀 있었다.
백무량이 미리 걱정한 대로, 소문의 주인공이 어린아이였냐는 실망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간절함이 있었다. 운산보의 지배가 미치지 않는 곳에서 새 삶을 살아가고 싶은 희망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성정이 괴팍한 무인이라면 이렇게 말하리라.
-자기가 싸울 생각은 않고, 왜 소문에 의지한단 말인가!
그러나 백무량은 알고 있었다.
무인과는 달리, 양민은 힘에 힘으로 대항하는 방법을 알지 못했다.
게다가 십수 년간의 고통으로 운산보에게 대항할 의지조차 말라 버렸을 것이다. 도피만이 그들에게 있어 유일한 방법이었을 터였다.
곤륜파의 도사로서 그들을 이해했다.
그렇기에…….
“운산보의 폭거를 더는 좌시하지 않겠다!”
백무량이 진심을 담아 외쳤다.
이렇게까지 청해인을 위해 외치는 까닭은 간단했다.
맨 처음 우중과 마주했을 때, 그에게 말했듯이.
“곤륜이 다시 무림에 돌아왔으니, 곤륜의 구름이 천하를 다스릴 것이다!”
“……!”
곤륜운평천하(崑崙雲平天下)라!
나이가 지긋한 어부가 눈을 크게 떴다.
어린 외견을 보고 내심 무시했던 마음이 한순간에 달아났다.
“정녕, 정녕 곤륜이…… 돌아온 게로구나.”
그 말이 어떤 신호가 되었던 걸까?
나이를 막론하고 운산보에게 고통받았던 청해인 모두가 백무량을 향해 고개를 숙이고 두 손을 모아 절을 올렸다.
청해 곤륜.
백련교라는 강적 앞에서도 의연했던 도문이 무림에 돌아왔음을 천명하는 모습은 어떤 구파일방보다도 소박했으나, 고결했다.
‘보고 계십니까, 사부님?’
백무량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육신이 쇠하고 넋이 하늘로 날아갔지만 칠십여 년이 흐른 지금도 사부님, 당신이 이끌던 곤륜을 청해는 잊지 않았습니다.’
백무량은 죽는 순간까지도 의연했던 동문을 회상했다.
그는 두 눈을 끔뻑이며 소리 없이 흐느꼈다.
***
“곤륜 지부가 함락되었다?”
“예.”
부하의 말에 운산보주가 술잔을 만지작거렸다.
그의 얼굴에 아쉬움은 눈곱만치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파문 하나 없는 술잔의 표면에서 맹렬한 분노가 느껴졌다.
부하의 양 뺨에 식은땀이 알알이 맺혔다.
“지금부터 자초지종을 알아보겠습니다.”
“굳이 그럴 필요가 있겠느냐. 이미 청해에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거늘.”
운산보주가 무정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산하객잔, 그곳에 거주하는 송 노인만이 가능한 일이었다.
“예전에 분명 소란스러운 일은 저지르지 말라고 경고하였을 텐데…….”
드드드드…….
운산보주가 공력을 일으키니 술상이 조금씩 덜덜 떨렸다.
성강의 경지를 이룬 이후로 폐관 수련에 들어가려던 계획을 미룰 수밖에 없게 되었으니, 분노가 차오르는 것도 당연했다.
이를 알고 있던 부하는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며, 명만 내려 주신다면 운귀를 모두 소집하겠습니다!”
“송 노인이 그럴 시간을 줄 것 같으냐. 누군지는 몰라도 까다로운 남자를 자기편으로 삼았군. 훌륭하도다.”
과거에 만금상단에서 불리기를, 감우상인(甘雨商人).
가뭄 끝에 내린 비마저 팔아 치웠다는 악독한 성정의 상인이었다.
청해에 안착한 이후로는 많이 바뀌었다고는 하나, 얕볼 상대는 절대 아니었다.
운산보주가 한 손으로 술잔을 깨뜨리던 그때였다.
“아래로 내려와라, 불청객.”
말을 꺼낸 순간, 운산보주가 허리에 찬 검을 발검했다.
그러자 수십에 가까운 검기가 천장을 분쇄했다.
콰과광!
천장에서 떨어지는 잔해에 부하는 뒤통수를 감쌌다.
그 위로 유쾌한 목소리가 들렸다.
“제법 날래군. 변방이긴 해도 대장 노릇 할 정도는 되겠어.”
“누구지?”
“알 필요가 있겠느냐?”
흑의를 입은 노인, 흑마가 쌍수를 모았다.
“뭐, 십 초를 버틴다면 이름 정도는 말해 주지.”
“그거 좋군.”
운산보주가 검을 휘둘러 잔해를 떨쳐 냈다.
***
퍼드득!
도관의 창가에 한 마리의 전서구가 날아들었다.
그걸 본 도사의 눈에 이채가 일었다.
“송학검(松鶴劍) 사백한테도 전서구가 오네?”
외부에서 사백에게 전서구가 온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도사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기가 무섭게, 등 뒤에서 서늘한 존재감이 느껴졌다.
“나한테 왔단 말이냐?”
“예…….”
도사는 어색한 표정으로 송학검, 등자평(燈紫萍)에게 전서구를 건넸다.
그러자 등자평이 입술을 비틀었다.
“오랜만에 보는 전서구군.”
“아시는 분입니까?”
“알다마다, 한때는 호광의 삼분지 일을 차지하던 친구다.”
도사는 깜짝 놀랐다.
“무, 무림맹주신 겁니까?”
“녀석. 내가 어찌 무림맹주님을 친구라고 부르겠느냐? 무공은 조금도 모르는 상인이다.”
“……아!”
“요즘 애들은 만금상단을 아는지 모르겠군.”
“처, 처음 듣는 이름입니다.”
“그럴 만도 하지.”
등자평이 피식 웃고는 전서구의 다리에 묶인 종이를 펴 보았다.
-오랜 우정에게 곤륜의 영웅을 도와주길 청하오.
-청해 곤륜, 산하객잔.
등자평이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곤륜이라……. 참으로 오래간만에 듣는 이름이구나.”
“현성이가 간 곳 아닙니까?”
“그랬지. 내가 보냈지.”
그 말에 도사가 가볍게 웃었다.
“하하, 근데 뭐가 그리 좋은지 연락 하나가 없습니다.”
“연락이 없어?”
등자평이 한숨을 내쉬자 도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하면 계율원주께 말씀을 드리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럴 필요가 있겠느냐. 괜히 분란을 일으켰다간 아미나 당가에서 청해에 눈독을 들이냐며 시비를 걸어올 것이다.”
“알겠습니다.”
“일하는데 건강은 괜찮더냐?”
등자평의 말에 도사가 억지로 웃었다.
“예! 건강합니다!”
“그래?”
등자평이 약지에 낀 옥가락지를 만지작거리고는 그곳에서 떠났다.
그로부터 일각 뒤.
“에취!”
도사가 재채기를 시작했다.
그것을 멀리서 지켜본 등자평이 희미하게 웃었다.
“곤륜의 영웅이라…….”
송우현이 남을 그렇게 평할 줄 아는 남자던가?
감우상인 시절의 그를 회상한 등자평은 도사에게 받은 편지를 불태웠다.
***
곤륜파가 긴 침묵 끝에 강호를 향해 포효하니.
이에 청성과 공동파가 움직이고, 개방이 코를 벌름거리기 시작했다.
한데 모습을 드러낸 소년의 행보가 상식에 벗어날 정도로 뛰어났다.
서른이 넘는 장정을 홀로 무찌른 것으로 모자라, 수많은 청해인의 고개를 저절로 숙이게 만든 소년이라!
정보의 진위를 조사하던 개방의 삼 결 제자가 백무량을 직접 대면하고 크게 감동하여 중얼거렸다.
“곤륜에 신성(新星)이 있었음을 알지 못했구나!”
곤륜신성(崑崙新星).
그것이 어려진 백무량에게 붙은 첫 별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