곤륜재인(崑崙在人) (3)
제자리에 털썩 주저앉은 백무량이 폐부에 고인 숨을 뱉어 냈다.
“허억, 헉.”
소모한 심력이 너무나도 컸던 걸까.
백무량의 시야가 한순간 시꺼메졌다가 밝아지길 반복했다.
그러나 그의 얼굴에는 환한 웃음이 맺혀 있었다.
‘조금씩, 도달하고 있다.’
백선신검의 도움으로 검해에 보다 가까워졌으며, 사부 주자령의 가르침도 조금씩 소화하고 있었다.
칠십여 년 전의 구천검이었다면 이루지 못할 성취였다.
무엇보다, 구천화우검의 진의를 습득하고 있다는 사실이 큰 만족감을 가져다주었다.
이제는 단언할 수 있다.
언젠가 강호 십 대 고수를 넘어서 더 높은 경지에 이를 수 있음을.
‘그리고 백련교주와도…….’
백무량의 눈동자가 가라앉으며 차가운 빛을 드러냈다.
검해에 가까워진 지금, 그가 어떤 경지에 도달해 있었는지 어렴풋이 깨달았다.
요컨대, 전인미답(前人未踏).
강호 십 대 고수였던 주자령마저 그의 공세를 당해 내지 못할 정도였다. 하물며 다른 이는 어떠하랴. 소림의 고승이 있더라도 백련교주를 당해 내지 못했을 터였다.
그에게 대항하기 위해선 검해를 완성(完成)해야 했다.
‘여기서 만족할 수는 없어, 하지만.’
백무량이 고개를 들어 청해인과 송우현을 바라보았다.
우레와 같은 함성과 기쁜 웃음소리가 아직도 귓전을 때리고 있었다.
하물며 어떤 이는 비단으로 감싼 상자를 든 채 자신에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운산보가 얼마나 악독하게 굴었으면 저럴까.’
양민에게 그럴 정도면 몰락한 곤륜파에겐 얼마나 지독했을까.
백무량은 현노윤의 풍화된 바위와 같은 얼굴을 떠올렸다.
내색하지 않았지만, 필설 하지 못할 고통이 그에게 있었으리라.
그렇게 생각을 이어 가고 있을 때쯤이었다.
“괜찮으냐?”
송우현이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에 백무량이 피식 웃었다.
“다 침 바르면 나을 상처지요.”
“침은 무슨…….”
“어디 보십시오, 나한테 상처 하나 있는지.”
“네가 무슨 검선도 아니고, 이만큼 날뛰고도 멀쩡할 리가 있겠느냐?”
혀를 가볍게 찬 송우현이 품에서 작은 약병을 꺼냈다.
“내상을 다스리는 데 좋은 약이다. 자, 받거라.”
“공짜지요?”
백무량이 샐쭉한 표정으로 농담을 던지자, 송우현이 껄껄 웃었다.
“네 문파에서 내줄 돈이나 있겠느냐? 그 약 정도면 청해에선 가문 대대로 내려오는…….”
“됐습니다. 귀한 물건 감사히 먹지요.”
꿀꺽.
약을 삼키자마자 청량한 기운이 백무량의 전신을 휘돌았다.
어디 그뿐이랴.
내상을 치유한 기운이 대맥을 통해 하단전으로 스며들었다. 태청신공을 펼치면 적어도 삼 년의 내공을 수습할 수 있었다.
백무량은 깜짝 놀란 표정으로 송우현을 올려다보았다.
“진짜 귀한 거였습니까?”
“글쎄. 창고에서 있는 걸 대충 집어 왔다만, 운이 좋았던 모양이지.”
척 듣기에도 거짓말처럼 들렸다.
백무량의 두 눈에 장난기가 배었다.
“정말 운이 좋은 겁니까? 저한테 주려고 들고 온 게 아니고요?”
“떽! 어른이 그러면 그런 줄 알 것이지, 말대꾸는!”
그러면서 송우현이 고개를 홱 돌리는 걸 보니 의표를 제대로 찌른 듯했다.
백무량은 그를 향해 두 손을 모아 올렸다.
“감사합니다. 어르신께 많은 은혜를 입었습니다.”
“은혜는 무슨.”
거기까지 말한 송우현이 피에 젖은 백무량의 옷가지를 곁눈질했다.
“챙겨 온 옷이 있으니 빨리 갈아입어라. 애가 그런 꼴을 하고 있으니 보기가 꺼림칙하구나.”
금방이라도 재액이 올 거 같다며, 여러 말을 투덜거린 송우현이 한 의복을 건넸다.
그것은 백무량에게 있어 아주 익숙한 옷이었다.
백련교와 싸우기 이전.
대도명문(大道名門)으로서 존재하던 곤륜파의 도복이었다.
“시간이 이틀뿐이라 제대로 만들지는 못했다만, 제법 비슷하지 않으냐? 어떠냐?”
송우현이 이를 드러내며 웃는 동안, 백무량은 옷을 자세히 뜯어봤다.
그러다 무심한 척, 한마디를 툭 던졌다.
“어떻게 만든 겁니까?”
“내 객잔에 있는 그림이랑, 뭐, 어렴풋한 기억이지.”
“…….”
백무량은 누더기처럼 변한 옷을 벗고는, 송우현이 건네준 도복으로 갈아입었다.
이 옷을 현노윤에게 반드시 보여 주고 싶었다.
‘곤륜파가 몰락하기 이전에, 이러한 시절이 있었다는 것을.’
백무량이 도복을 모두 갖춰 입자, 송우현이 만족스러운 얼굴로 웃었다.
“괜찮으냐?”
“예.”
“이렇게 갖추고 나서, 곤륜재인을 외치면 누구도 무시하지 못할 것이야. 그렇지?”
“물론이지요.”
“그래. 너라면 그렇게 말할 줄 알았다.”
백무량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린 송우현이 좌중에 외쳤다.
“자, 뭣들 하시오! 여기 있는 도사에게 환호성을 지르지 않고!”
“멋있다!”
“와아아!”
억지에 가까운 호응이 마치 희극처럼 보였다. 물론 진심으로 백무량에게 감사를 표하는 이 또한 적지 않았다.
그들을 바라보던 송우현이 진지한 어조로 말했다.
“은인의 이름을 잊은 부덕한 몸이나마, 곤륜에 의탁해도 되겠느냐?”
백무량은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만금상단의 상인을 누가 마다하겠습니까.”
“전에도 들었지만…… 참, 어린놈이 만금상단도 아느냐?”
거기까지 말하던 송우현이 헛웃음을 흘렸다.
“뭐, 놀랍지도 않구나.”
“앞으로 더 바빠질 겁니다.”
“왜?”
송우현의 물음에 백무량이 짧게 대답했다.
“청해에만 머물러 있을 생각은 없으니 말입니다.”
철없이 행동했던 과거와는 달리, 이번에는 진정한 강호행이 될 것이다.
백무량의 각오를 엿본 송우현이 수염을 매만졌다.
일다경 뒤.
송우현의 산하객잔에서 세 마리의 전서구가 서로 다른 방향으로 날아갔다.
***
이튿날, 산하객잔의 뒷마당.
몸을 가볍게 푼 백무량은 어제 있었던 전투를 회상했다.
강한 상대와 생사투를 치른 건 아니었지만, 많은 경험이 있었다.
‘검해, 그리고 창천명월이라…….’
어제는 진의를 깨달았단 사실에 마냥 기뻐하기만 했다.
하지만 지금 돌이켜 보니 조금 부끄러워졌다.
백무량은 애꿎은 백선신검을 매만졌다.
‘옛날엔 그저 형에만 집착했을 뿐이구나.’
그랬다. 과거의 자신은 구천화우검을 익혔다는 것에 도취해 강호행을 다니고, 협행을 다녔다.
마땅히 땅에 심어야 할 씨앗을 남에게 던지고 다닌 셈이다.
‘사부님이 얼마나 한심하게 보셨을까.’
떠올리고 나니 백무량의 얼굴이 부끄러움으로 붉어졌다.
“앞으로 안 그러면 되지, 그럼.”
혼잣말을 중얼거린 백무량은 보폭을 어깨만큼 넓혔다.
뒤이어, 백선신검으로 자신이 익힌 검법의 형을 따라 휘둘렀다.
……과거였다면 이것으로 만족했을 테지만.
“후우우.”
호흡하는 찰나에 여덟 초식을 휘둘렀다. 그 사이사이에 심상을 새겼다.
백선신검에 넘실거리는 검기가 심상을 따라 허공을 수놓았다.
적산에게 펼쳤던 때처럼 패도적이진 않았으나, 그것으로도 충분했다. 백무량이 지금까지 쌓아 온 무학의 토대에 심상이 하나씩 쌓였다.
‘그것이 먼지 한 톨에 불과할지라도.’
조금씩 쌓이다 보면 언젠가 씨앗은 개화하기 마련이다.
백무량은 곤륜의 가르침을 회상하며 백선신검을 연거푸 휘둘렀다. 운중용형보의 보보(步步)가 마당에 팔 자를 그렸다.
혹자는 이를 보면 사문의 무공이 유출되는 게 두렵지 않냐고 할 테지만, 애초에 틀린 생각이었다.
‘곤륜의 지극한 호흡을 잊어선 안 돼.’
과거에 현종휘의 정강이를 때리며 가르쳤듯, 곤륜의 정종 무학은 운해와 닮은 호흡이 동반되어야 했다.
그것이 없다면 곤륜의 무공은 바람에 흔들리는 부평초와 다를 바 없었다.
타문이 아무리 엿본다고 한들 훔칠 수 없는 것.
그 호흡이야말로 대도명문의 자존심이니.
그렇기에 백무량은 호흡을 조금도 놓치지 않았다.
“허허, 아침부터 야단법석이구나.”
이를 지켜보던 송우현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어조는 퉁명했으나, 마음속엔 어린 손자를 바라보는 듯한 따스함이 담겨 있었다.
그 시선을 알아차린 백무량이 수련을 멈췄다.
“무슨 일입니까?”
“이런, 내가 수련을 방해한 것이냐?”
“뭐, 무공을 모르니 그 정도 무례는 제가 이해하지요.”
“원, 녀석 참. 네 사부가 누군지 몰라도 고생깨나 하셨겠구나.”
송우현의 너털웃음에 백무량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많이 하셨지요.”
“그럴 줄 알았지. 그나저나 곤륜산맥에는 언제쯤 돌아갈 작정이더냐?”
“가능하면 빨리 돌아갈 생각입니다.”
“나도 같이 갈 수 있겠느냐?”
송우현이 뜻밖의 말을 하자, 백무량의 눈가가 커졌다.
“굳이 그러실 필요가 있겠습니까? 짐은 저 혼자 들고 가도 괜찮은데요.”
진심을 진득하게 담은 말이었다.
전에 우중이 녹초가 되었듯, 곤륜산맥은 웬만한 장정도 탈진하게 되는 지역이었다.
하면 나이가 많은 송우현은 어떠하겠는가?
열 걸음을 떼기도 전에 높은 경사를 이기지 못할 터였다.
백무량의 심려를 느낀 송우현이 자기 손으로 가슴팍을 두드렸다.
“아무리 그래도 안쪽 어르신이 어떻게 지내는지 봐야 하지 않겠느냐? 게다가, 앞으로 곤륜산에 물건을 대는데 책임자인 내가 지리를 몰라서야 어떡하라고?”
“……아.”
확실히, 송우현의 말은 정론을 짚고 있었다.
백무량은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면서 다른 방법을 제시했다.
“하면 지도를 그릴 줄 아는 사람과 제가 대동해서 가면 되지 않겠습니까?”
“거, 거. 괜찮다니까 그러네.”
“후회하실 텐데요.”
“끌끌끌…….”
웃음소리를 흘린 송우현이 숨기고 있던 본제를 꺼냈다.
“그나저나 네가 부탁한 대로 전서구를 세 군데에 보내 두었다.”
청성파, 무림맹, 공동파.
이 중 무림맹은 여러 지부를 거쳐야 해서 시일이 오래 걸렸다.
이르면 일주일, 늦으면 열흘.
그동안 운산보가 쳐들어올 가능성이 크니 근처에 있는 도문에게 도움을 받아야 했다.
그게 바로 청성파와 공동파였다.
‘위험이 크긴 하지.’
백무량의 표정이 짐짓 심각해졌다.
거리가 멀긴 해도, 운산보가 청해를 집어삼키는 동안 두 도문이 아예 몰랐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답은 하나였다.
“저는 둘 중 하나가 운산보에게 도움을 주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흠.”
백무량의 말을 들은 송우현이 수염을 매만졌다.
“확실히, 나도 무림맹에 운산보를 좀 정리해 달라고 부탁을 해 본 적이 있었지.”
“왜 그걸 이제야 말씀하십니까?”
“보내는 족족 죽었다, 사람이고 새고.”
“……!”
백무량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은 게 무색하게, 송우현이 짙은 웃음을 드러냈다.
“물론 그때와 지금은 상황이 다르지.”
곤륜 지부가 백무량에게 박살이 난 지금.
아무리 견고한 철벽이어도 빈틈이 뚫리기 마련이었다.
그 빈틈은 수십 년 동안 곤륜에서 지내온 사람만이 발견할 수 있으며, 송우현은 만금상단에서 일했던 유능한 상인이었다.
“내일이면 강서 무림 전체가 네 이름을 알 것이다.”
송우현이 자신만만한 목소리로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