곤륜재인(崑崙在人) (2)
“……후우.”
“으하하하!”
폭혈단의 힘에 취하기라도 한 걸까.
적산이 홍소를 터트리며 대도를 두어 번 휘둘렀다. 한데 그 속도가 전보다 비교하여 두세 배는 더욱 강맹했다.
저러다 팔뚝이나 손목이 끊어질까 걱정될 정도.
백무량의 얼굴에 냉소가 도드라졌다.
“삿된 방법으로 힘을 취하니 좋더냐?”
“칼질은 개백정처럼 하더니 아가리는 도사구나!”
후우웅!
적산이 휘두른 대도에서 풍압이 일었다.
본래 가지고 있던 외공과 약간의 내공이 폭혈단을 통해 증폭한 듯했다. 실제로, 그의 팔뚝에서 힘줄이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것처럼 보였다.
백무량이 백선신검을 쥔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곤륜의 오랜 가르침대로.’
식견이 짧은 자라면 웃음을 터트릴 말이었다.
무당에겐 유려한 태극검이, 화산에겐 화려한 매화검이 있으며 청성에게는 단단한 복마검이 있다고들 한다.
-그렇다면 곤륜파는?
-그들만이 가지고 있는 고유의 검술이 있는가?
팔십여 년 전, 백무량은 강호행에서의 행보로 대답했다.
“있다, 그것도 그 어떤 도문도 흉내 낼 수 없는 검이.”
기수식 하나 없이, 모든 초식이 살초로만 이루어져 지독히도 실전적인 검법.
그 검이 바로 구천화우검이요, 백무량에게 구천검이란 별호를 준 무공이니.
스슥.
보폭을 넓힌 백무량의 기도가 확연히 달라졌다.
지금까지 펼친 살초가 장난처럼 느껴질 정도로 짙은 살기가 주변 삼 장을 먹어 치웠다.
이에 적산이 호응하듯, 다시금 홍소를 터트렸다.
“하하하, 놈! 드디어 본색을 드러내는구나!”
“…….”
“너는 도사가 아니었어! 그러니까, 다른 방파에서 보낸 자객일 것이야!”
사특한 힘에 취한 탓인가.
적산의 어투가 조금씩 어눌해지는 게 확연히 느껴졌다.
일다경도 채 지나지 않았는데 저 정도라면, 일식경이면 이지가 날아가리라.
대화가 불필요하다 느낀 백무량은 적산에게 살기를 겨눴다.
“혀로 싸울 테냐?”
“응? 아니. 내가 왜?”
적산이 실실 웃으며 앞으로 터벅터벅 걸어갔다.
“저리 꺼져!”
거슬리는 무인은 모조리 대도로 밀어냈다. 말이 밀어냈다지, 사지가 뒤틀린 병신이 되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걸 본 무인들의 모골이 송연해졌다.
“대, 대장, 왜 우리를……!”
“갈!”
무인들의 간곡한 외침이나 분노에도 적산의 대도엔 자비가 없었다.
평소 그가 부하와 절친한 걸 고려하면 너무나도 무자비한 모습이었다.
그걸 알 리가 없는 백무량은 조소를 머금었다.
‘과연 사파인가. 뭐, 자기편을 죽인다는데 오히려 좋지.’
백무량이 적산에게 다가가며 운산보의 무인을 하나둘씩 베었다.
그렇게 가까워질수록 적산의 웃음은 짙어졌고, 백무량의 얼굴은 차가워졌다.
그렇게 서로가 마주했을 때.
“…….”
“…….”
둘 주위에 남아 있는 무인은 하나도 없었다.
병신이 되어 끙끙대거나, 시체가 되었을 뿐이다.
주위를 둘러본 적산이 어깨를 으쓱이고는 백무량에게 물었다.
“뭐 궁금한 거 없나?”
“……?”
“내가 뭘 먹었는지, 누구에게 얻은 건지?”
“그건…….”
백무량이 입을 열기가 무섭게, 대도가 날아들었다.
쿵!
백선신검으로 재빨리 막아 냈지만, 어깨가 내려앉는 것 같았다. 우드득거리는 소리가 전신에 울리고 시야가 흔들렸다.
그럼에도 백무량의 집중은 깨어지지 않았다.
도리어 적산을 죽여야겠단 의지만 강렬해질 뿐이었다.
스릉!
태청신공의 내공을 머금은 백선신검이 검명(劍鳴)을 흩뿌리더니 시퍼런 검기를 빚어냈다.
“허, 허!”
적산에게 있어 경악의 연속이었다. 저렇게 어린놈이 검기를 이뤘다는 건 현 무림에서 다섯 명도 되지 않을 터였다.
물론 그가 제정신이었다면 말이다.
적산의 눈이 살기를 머금은 채 희번덕거렸다.
“건방져, 건방지도다!”
압도적인 힘으로 으깨 버리겠다는 듯, 적산의 대도가 백무량의 정수리를 향해 쇄도했다.
하나 백무량은 미동도 없었다.
“놈!”
이지가 사라져 가도 감정은 느낀다는 걸까?
얼굴을 일그러뜨린 적산이 온 힘을 대도에 집중시켰다. 손잡이를 감싼 가죽이 찢어지는 소리가 들릴 정도였다.
그걸 본 백무량이 뒤늦게 백선신검을 휘둘렀다.
기이하게도 그의 검로가 적산이 휘두른 대도와 같았다.
‘오만하구나!’
적산의 얼굴에 희색이 짙어졌다.
제 놈이 아무리 무공이 뛰어나도 그렇지, 폭혈단을 취한 자신에게 검력(劍力) 싸움을 걸다니.
웃음소리가 입술을 비집고 나올 것만 같았다. 저 같잖은 검을 부수고, 어린놈의 수급을 취한다면 죽어도 좋았다.
그때 백무량이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구천화우검의 이 초, 창천명월.”
***
그리운 사부, 주자령이 말하기를…….
초식명이란 무공의 창안자가 그린 심상을 뜻한다며, 형을 닦는 것뿐만 아니라 무학(武學)에도 노력을 기울이라고 했다.
그 말을 듣던 팔십여 년 전에는 알지 못했다.
초식명이란 그저 멋있으라고 지은 게 아니던가? 왜, 삼류 무공도 그럴듯한 이름을 가진 게 많으니 말이다.
하나 주자령은 말했다.
-세월이 흐름에 따라 가르침이 유실되었으니, 천하제일의 무공도 잊히다 보면 삼류가 되기 마련이지.
그렇게 말하는 사부의 목소리가 쇠잔하게 느껴졌다.
마교와 싸울수록 유실되는 곤륜파의 무공 또한 언젠가 삼류가 될지도 모른단 공포 때문임을, 그때는 알지 못했다.
그때의 백무량은 무학의 깊이를 모른 채 구천화우검이라는 명망에 취해 있었다.
초식명이라는 화두를 깊게 생각지 않고 행동했다. 그랬다. 자기가 가진 재능이 얼마나 귀한지, 어떻게 닦아야 하는지 고민하지 않았다.
‘답답하셨겠지.’
선대가 힘겹게 지켜 온 무공을 전수했거늘, 바깥에 자랑하고 다니는 제자가 얼마나 한심하게 보였을까.
그러나 지금은 안다.
몰락한 곤륜파를 보고 나서야 가까스로 깨달았다.
‘사부님은 곤륜파가 이렇게 될지도 모른다는 걸 알고도…… 백련교와 맞선 거야.’
시대는 다르나 항상 마교와 초전(初戰)을 치러 온 정신. 회피하지 않은 강인함.
그 고귀함이야말로 곤륜파임을 죽는 순간에야 깨달았다.
주자령이 초식명을 강조한 까닭도 거기에 있다는 것 또한.
‘수없이 몰락하더라도 명맥을 지킬 수 있도록, 이름에 수많은 의미를 담으셨으니.’
이름조차 기록되지 않은 곤륜의 선배들이 고뇌했으리라.
곤륜산맥에서 순환하는 구천(九天).
검기가 화려한 빗줄기를 수놓으니, 화우검(花雨劍).
따라서, 무공의 이름을 구천화우검이라 칭하니.
구천 중 창천(蒼天)은 몇 년에 한 번 찾아오는 맑은 하늘.
항상 운해로 뒤덮인 곤륜산맥에서 유일하게 명월(明月 : 밝은 달)을 볼 수 있는 날.
그러나 구천화우검의 이 초, 창천명월은 몇 년에 한 번을 기다리지 않는 검이다.
‘곤륜산맥의 운해를 가르는 검.’
극성에 이르면 언제든 창천에 뜬 명월을 볼 수 있다던가.
백무량은 창천명월이란 이름을 곱씹으며 심상을 구체화했다.
뒤이어 태청신공의 내공이 백선신검에 맞물리며 검기가 시퍼렇게 변했다.
태청신단의 공능이 발현한 것이다.
그때 백무량이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구천화우검의 이 초, 창천명월.”
진의를 담은 일검이 적산을 향해 쇄도했다.
쏴아아…….
심상 속 검해의 잔물결이 백선신검을 타고 흘렀다. 손등에 새겨진 운룡도 빛을 발하고 있었다.
“……!”
완벽에 가깝게 펼쳐진 창천명월 앞에서 적산의 검력은 무용했다.
그가 아무리 힘이 강하고 폭혈단을 취했다고 한들, 낮은 경지에서의 강함이었다.
운해를 가르는 검이 어찌 칼 하나를 못 베랴.
스각!
불똥이 실선처럼 이어지더니 적산의 대도가 잘렸다.
그러나 거기에서 끝이 아니었다.
“끄아악!”
기세를 잃지 않은 백선신검이 그의 가슴팍을 찢어발겼다.
단숨에 심맥이 끊어지지 않은 건 어디까지나 백무량의 의지 때문이었다.
이를 깨달은 적산이 피를 한 됫박이나 토해 내며 물었다.
“왜, 왜…… 죽이지 않은 것이냐?”
“누가 그런 약을 줬는지 말해라.”
백무량은 차가운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청해에서 그딴 약이 돌아다니는 걸 볼 수 없으니까.”
“카, 크흐흐…… 흐하하하! 나 하나 죽였다고 청해의 주인이라도 된 양 떠드는 모습이 참……!”
적산이 눈물까지 흘리며 박장대소를 터트렸다.
물론, 그럴수록 적산의 목숨은 더더욱 위태해질 뿐이었다.
그걸 아는 백무량은 무덤덤한 목소리로 물었다.
“말하지 않고 갈 테냐?”
“우리가 오순도순 친하게 지낼 사인가?”
“그건 아니지만, 더욱 고통스러울 순 있겠지.”
그 말에 적산이 쿨럭거리며 어이없단 표정을 지었다.
“도사란 놈이 고문하겠단 말이냐?”
“강호에서 굴러먹다 보면 여러 가지를 익히기 마련이거든.”
“거참, 애새끼가 아주 노강호처럼 주둥이를 놀리는 게 영…….”
적산이 창백한 얼굴로 히죽 웃고는 입술을 달싹였다.
“눈깔이 이상한 놈.”
“어떻게 이상하단 말이냐?”
“아, 보면 알아, 보면.”
거기까지 말을 마친 적산의 칠공에서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
한계 이상의 잠력을 억지로 끌어낸 최후가 다가오는 것이다.
적산이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백무량에게 물었다.
“편하게 해 줄 테냐?”
“…….”
“부하 죽인 건 잊어 줄 테니까, 응?”
“네가 지금까지 괴롭힌 청해의 선인에게도 그러했느냐?”
백무량의 물음에 적산이 피식 웃었다.
“아, 거, 칼질은 호쾌하게 해 놓고 진짜. 됐다. 개 같은 새끼야.”
그 말을 끝으로 적산의 고개가 아래로 떨어졌다.
백무량은 그에게 아무런 동정도 품지 않았다. 그는 사파로서 평생 부당한 이득을 취하고, 사람을 괴롭혀 왔을 악인이었다.
다만 아쉬운 점이 있다면…….
‘저놈에게도 내 사부나 사형처럼 좋은 사람이 있었다면 달라지지 않았을까.’
괜한 미련이다.
생각을 정리한 백무량은 고개를 위로 쳐들었다.
그러자 곳곳에 숨어 있던 청해인과 송우현이 모습을 드러냈다.
“대, 대단해!”
“어떻게 저 나이에 저런 무위를……!”
무공이라곤 쥐뿔도 모르는 범부였지만, 이번 싸움을 지켜보고 깨달은 바가 있었다.
비록 나이는 어릴지언정 백무량은 영웅이었다.
장정 서른 명을 상대로 물러나지 않은 용맹과 압도적인 검술은 청해인의 용기를 북돋기에 충분했다.
그 소영웅(小英雄), 백무량이 큰 목소리로 외쳤다.
“이 자리에서 나, 백무량이 세상에 선언한다!”
“……!”
청해인이 숨을 죽였고, 송우현은 글썽거리는 시선으로 백무량을 바라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어쩐지, 그가 무슨 말을 할지 알 것만 같았다.
“곤륜! 아직 살아 있음을!”
곤륜재인(崑崙在人)이라!
네 글자가 청해인의 마음에 새겨지니.
“와아아!”
청해인의 함성이 백무량의 귓가에 꽂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