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검해-5화 (5/275)

곤륜산의 정상 (2)

백무량이 눈을 부릅떴다.

“왜, 왜? 대체 왜?”

“흉물스럽게 탄 집을 그대로 두느니, 남은 기둥이나마 팔아서 재건에 힘쓰는 것이 옳다 여겼습니다.”

“백련교가 불을 놓았던 게냐?”

“……칠십이 년이나 지난 일입니다. 등정로가 이 모양 이 꼴이 된 이유 또한 거기 있지요.”

그렇게 대답하는 현노윤의 얼굴에 작은 균열이 일었다.

고된 세월에 풍화되어 버린 바위가 되었을지언정 사조에게 몰락을 고하는 건 너무도 힘겨운 일이었다.

그 모습을 백무량은 허탈함과 동시에 엄청난 분노를 느꼈다.

‘진짜로 쑥대밭이 되었구나, 빌어먹을 백련교 놈들.’

백무량의 미간이 사납게 뒤틀렸다. 추억의 장소조차 온전치 못하다는 사실에 심기가 마구잡이로 헝클어졌다.

미련이 남은 백무량은 터만 남은 황무지를 둘러보았다.

사람이 만든 것은 온데간데없으나 자연이 만든 것은 칠십이 년 전이나 지금이나 다를 것이 없었다.

마음이 복잡해진 백무량은 벼랑 끝에 서서 드넓은 운해를 두 눈에 담았다.

“곤륜운평천하라…….”

백무량의 눈동자에 새하얀 세상이 담겼다.

자신의 발아래에 구름으로 이루어진 바다가 지평선까지 이어져 있었다. 보기만 해도 가슴이 벅차고, 사람의 마음이 광대히 넓어지는 광경이었다.

곤륜파의 무공은 이러한 운해를 닮았다.

‘내가 되살려야 할 무공이지.’

백무량은 백련교주와 싸울 때 보았던 검해를 떠올렸다.

곤륜의 실전된 무학으로 이루어진 바다.

죽었다 깨어난 지금도 매일 꿈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마치 백무량 자신에게 수련을 종용하는 것처럼…….

‘생각해 보니 제대로 된 수련을 하지 않았구나.’

백무량은 스스로를 반성했다.

곤륜파의 명맥이 끊겼다고 하여 보름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았던 자신이 너무도 한심하게 느껴졌다.

사형, 주백천이 자신을 보았다면 강하게 꾸짖었을 것이다.

어찌 됐든 가슴이 뛰고 있지 않으냐고, 얼른 일어나서 곤륜도로서 도리를 다하라고.

지금의 백무량은 당당하게 대답할 수 있다.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길을 마침 찾은 참이오, 사형.’

검해와 다시 마주하여 실전된 무학을 되찾고, 몰락한 곤륜파를 광명으로 이끈다.

‘다만…….’

그 길을 걷기 전에 당신이 어디에 묻혔는지 봐야 하지 않겠소.

백무량은 속으로 그 말을 우겨 삼키며 앞으로 걸었다.

사락, 사라라락…….

안쪽에서 분 바람이 백무량을 마중하러 나왔는가.

무더운 여름. 나뭇잎이 무성한 가지가 서로 부딪쳐, 녹음(綠陰)의 소리가 귓등을 스쳤다.

‘사형이 좋아하는 소리였지. 집중이 잘된다면서 말이야.’

백무량은 복잡한 표정을 지은 채 앞으로 걸었다.

안쪽으로 향할수록 녹음이 짙어졌다. 그늘과 운해가 뒤섞여 시야가 어두워졌다.

그렇게 서른네 번의 걸음을 걸었다.

정말 공교롭게도, 죽기 직전의 나이와 같았다.

그 걸음 끝에서 어두웠던 시야가 밝아졌다. 백무량의 표정 또한 눈이 부시게 변해 갔다.

“하, 하하…….”

“무슨 일이십니까?”

현노윤이 물었다.

“무림맹이나 다른 무인이 이렇게 해 준 거냐?”

“그들이 도움을 주긴 했으나, 곤륜산 정상에 이러기는 쉽지 않은 법이지요.”

현노윤은 백무량이 바라보는 곳을 따라 고개를 들었다.

“곤륜의 선현을 모시는데 어찌 남한테만 기대겠습니까.”

“그렇지. 그게 곤륜도의 기상이지.”

백무량은 한껏 격동된 눈으로 운검묘(雲劍墓)라 적힌 사당을 바라보았다.

그 앞에는 수십 기(基)의 무덤이 있어, 무덤마다 이름과 업적이 적힌 비석이 세워져 있었다.

백무량이 말없이 앞으로 걸어가자 현노윤이 입술을 달싹였다.

“그야말로 천운이었지요.”

“그게 무슨 말이냐?”

“사조님을 어찌 구할 수 있었겠습니까?”

백무량은 잠시 고민에 빠졌다.

여기까지 오면서 의아하기는 했다.

가옥과 서너 시진이나 떨어진 데다 심심찮게 올 만한 곳이 아니었으니까.

백무량이 대답을 잇지 못하자 현노윤이 답을 말했다.

“그때 저는 주백천 사조님의 묘소를 정돈하기 위해 왔었습니다.”

“……!”

백무량이 주먹을 꽉 쥐었다. 무언가 뜨거운 감정이 욱 하고 올라왔다.

그걸 본 현노윤의 얼굴에 씁쓸함이 담겼다.

“먼저 들어가서 정리하고 있겠습니다.”

현노윤이 현종휘와 함께 운검묘로 들어갈 때까지, 백무량은 아무런 말도 잇지 못하고 한 비석을 바라보았다.

주백천.

도학에 정통한 학도사로, 나이가 어림에도 타문의 존경을 받아 각운도사(覺雲道士)라 칭해졌으니 그의 죽음을 누가 슬퍼하지 않으랴.

“……사형.”

감정을 추스르기까지.

백무량은 비석을 고집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다가, 운검묘 안으로 향했다.

그 때문에 백무량은 그것을 보지 못했다.

……쿠르르.

점차 재가 되어 사라지는 주백천의 비석을.

***

운검묘 내부.

그곳에서 백무량은 네 척 크기의 비석과 마주했다.

“…….”

척.

백무량은 말없이 손을 뻗어 비석을 더듬었다.

맨 윗줄에 새겨져 있기를.

추모비(追慕碑).

그 아래로 수많은 이름이 나열되어 있었다. 이름들을 더듬는 백무량의 손끝에 한기가 맺혔다.

그중엔 자신의 이름도 적혀 있었다.

‘마음이 복잡하구나.’

꽈악.

백무량은 비석을 더듬던 손을 꽉 쥐었다.

칠십이 년이란 세월이 흘렀다는 쐐기가 가슴을 관통한 것만 같았다.

그 모습을 본 현노윤이 정적을 깼다.

“앉으시지요.”

비석 앞에 주저앉은 현노윤은 애써 웃으며 왼손으로 옆자리를 두드렸다.

“사조님과 할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야기? 백련교의 난 말이냐?”

“그것 말고도 이후에 생긴 일도 있지요.”

현노윤은 헝겊으로 비석의 귀퉁이를 닦으며 하던 말을 이었다.

“먼저, 이 비석은 백련교의 난이 끝나고 무림맹이 곤륜파의 영웅을 기리기 위해 세운 추모비입니다.”

“……영웅이라.”

저 두 음절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운지, 백무량은 잘 알고 있었다.

백무량이 영웅이라는 단어를 중얼거리자, 현노윤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예. 백련교를 막아 준 대가로 받은 칭호지요.”

그 말을 들은 백무량이 비석에서 눈을 떼고, 강하게 기함했다.

“막아 주다니? 후세엔 그렇게 기록되었단 말이냐?”

“그게 아니란 말입니까?”

현노윤의 얼굴에 큰 충격이 일었다.

그걸 본 백무량은 헛웃음을 흘렸다. 그러지 않고서야 현노윤에게 윽박을 내지를 것 같았다.

“허, 허허…….”

바로 말해, 곤륜파는 백련교를 이기지 못했다.

어디 그뿐이랴?

그들의 수장인 백련교주는 당시 곤륜의 장문인이자 강호 십 대 고수였던 주자령을 손쉽게 죽였다.

‘쌍욕이 나올 정도로, 떠올리기조차 싫은 일이지만…….’

자신에게서 등을 돌린 채 떠나가던 백련교주의 뒷모습이 아직도 선하다.

백무량은 고개를 휘저어 감정을 정리했다. 그래도 목소리에서 응축된 격정이 배어 나오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서로 아는 바가 다른 듯하니, 먼저 너부터 말해 보아라.”

“알겠습니다, 사조님.”

여태까지 알고 있던 역사가 사실 거짓이었다니.

현노윤은 한숨을 거듭 내쉬며 입술을 달싹였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백련교는 곤륜파와의 싸움 이후로 종적을 감췄습니다.”

“생존자는?”

백무량이 진지한 목소리로 묻자, 현노윤은 순간 긴장했다.

백무량에게 있어 이보다 중요한 질문은 없을 테니까.

현노윤은 단어를 신중하게 골라 냈다.

“아직 밝혀진 건 없습니다.”

“모호하게 말할 생각인가?”

백무량은 조소를 머금었다.

자신을 염려한 거겠지만, 칠십 년이 지난 이때 생존자가 나타날 리가 없었다.

“괜한 기대도 품지 않도록 확실하게 말해 줬으면 좋겠어.”

“그렇습니까.”

현노윤은 백무량의 얼굴에서 각오를 읽었다.

어떤 말을 듣더라도 동요하지 않겠다는 각오.

‘내가 쓸데없는 걱정을 한 모양이야.’

아무리 어려지고, 큰 충격을 받았었다지만 백무량은 곤륜의 영웅이었다. 그것도 백련교라는 대적을 만나고도 도망치지 않은 영웅.

현노윤은 백무량을 직시했다.

“가장 궁금할 분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현노윤의 오른손이 비석 상단에 있는 이름을 쓸었다.

“이십오 대 장문인, 주자령 태사조께서는 후발대로 도착한 무림맹주에 의해 시신을 수습할 수 있었습니다. 위대한 희생이라 칭송받았으며 사후에 곤륜검선이라 불리셨지요.”

“곤륜검선이라…….”

주자령 본인이 들었다면 계면쩍어하면서도 좋아할 별호다.

백무량은 허심탄회한 한숨을 내쉬었다. 오랜 세월이 지났고, 곤륜의 명맥이 끊겼단 말을 들었지만 자세한 이야기를 들으니 창자가 끊어지는 기분이었다.

“계속 말해 봐라.”

백무량은 아랫입술을 짓씹었다.

자신에겐 불과 보름 전 일이란 게 너무나도 슬프고 우스웠다.

“그에 비해 사조의 시신은 많이 훼손되어 있었습니다. 당시 무림맹의 제갈 군사가 판단하기를, 백련교도가 의도적으로 검상을 입힌 듯 보였다는군요.”

“그랬느냐?”

백무량은 무덤덤한 음색으로 대답했다.

그 목소리에 현노윤이 헝겊을 꽉 쥐었다. 백무량이 삭히고 있을 감정은 자기가 겪어 온 고난과 비교해도 부족하지 않을 것이다.

“다음은…….”

현노윤이 재차 설명을 이어 갔다.

현노윤에겐 먼 선배의 이름이었으나, 백무량에겐 아니었다. 한때 매일 곤륜의 무공으로 비무를 나눈 선배였고, 후배였다. 정은 그러면서 첩첩이 쌓였다.

백무량은 피부가 찢어질 정도로 주먹을 꽉 쥐었다.

슬픔이 몰아쳤다.

“그래, 그랬구나.”

백무량은 산사태처럼 몰려오는 눈물을 꾹 참았다.

“사부처럼, 모두 백련교도 앞에서 당당했구나.”

백무량의 말에 현노윤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숙였다. 백련교도 앞에서 끝까지 저항했던 선배에게 이런 얘기를 하자니 마음이 너무나도 쓰렸다.

숙연한 분위기가 주변을 짓눌렀다.

“계속해라.”

백무량은 괴로워하면서도 현노윤의 이야기를 끝까지 듣기를 원했다.

눈앞에 불이 붙든 말든 곤륜파의 유물을 챙기던 주백천의 모습처럼.

껍질은 아이였지만, 속은 칠십여 년 전의 영웅과 다를 바 없었다. 현노윤의 이야기를 들을수록 하루라도 빨리 검해의 무학을 수습해야겠다는 갈증이 솟아났다.

“…….”

“…….”

현노윤의 이야기는 반 시진이 넘도록 이어졌다.

그만큼 칠십이 년의 세월은 길었으며, 깊었다. 무림에서 산전수전을 다 겪었다고 자부하는 백무량조차 불가해하게 느껴졌다.

그중, 가장 충격적인 이야기가 있었다.

“청해가 사파 소굴이 되었다니?”

“운산보(雲散堡)라는 곳입니다.”

현노윤은 얼굴을 들 면목이 없다는 듯 고개를 푹 숙였다.

하지만 백무량이 생각하기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백련교의 난 이래로 명맥이 한번 끊겼다면, 곤륜파의 재인(才人)은 아무도 없었다는 뜻이니까.

‘문제는 단기간에 청해를 제 영역으로 삼았다는 건데.’

백무량은 신경질적으로 땅바닥을 두드렸다.

곤륜파가 청해에 자리를 잡은 지 어언 삼백 년이 넘는다.

그동안 역대 마교와 싸우면서 멸문되었다 되살아나길 반복했지만, 청해에 성공적으로 자리를 잡을 수 있었던 건 청해인의 신뢰 덕택이었다.

하지만 운산보는?

‘사파에 호의적인 사람은 조금도 없을 터.’

백무량의 인상이 찡그려졌다.

“운산보를 도와준 세력이라도 있는 게냐?”

“제 능력이 미력하여…….”

“아니, 그 문제가 아니야.”

백무량이 두 눈을 반개했다.

“무림맹이 왜 그놈들을 좌시하고 있냔 말이다.”

그랬다.

청해는 천산산맥에서 내려오는 마교와 처음 마주하는 접경지였다.

게다가 북적은 어떠한가.

역사가 증명하는 중원의 숙적이다. 그래서 무림맹은 수많은 지부 중에서 청해를 특히 신경 썼다.

청해가 사파 소굴이 되었다면 당연히 무림맹이 나서야 정상이다.

그래야 하는데…….

현노윤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운산보에 의해 완전히 통제되고 있습니다.”

“그게 가능하단 말이냐? 무림맹에서 주기적으로 사람을 보낼 텐데?”

“그래서 한 가지를 확신하고 있습니다.”

현노윤이 무거운 목소리로 진언했다.

“운산보의 협력자가 구파일방에 속한 문파라고 말입니다.”

“……허.”

백무량은 뜨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부정하고 싶은 말이지만, 현노윤의 의심은 분명 합당했다.

‘그게 아니고서야 무림맹의 눈에 안대를 채울 순 없지.’

아무리 운산보가 청해의 패자라도 무림맹은 중원 전체를 아우르는 집단이니까.

고개를 끄덕인 백무량이 다른 화제를 꺼냈다.

“한데 이상하구나. 네 이야기도 그렇고, 비석에 왜 주백천의 이름이 없는 것이냐?”

현노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뭐? 모르느냐? 나와 같은 항렬의 학도사이자 사형인…….”

“처음 듣는 이름입니다.”

“지금 나랑 장난하느냐?”

백무량은 대노하여 고함을 내질렀다.

“나를 구할 때 주백천 사조의 묘소를 정돈하고 있었다고 말한 건 바로 너다!”

“사조님…….”

현노윤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백무량을 바라보았다.

그 시선과 마주한 백무량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나한테 미쳤다고 하더니, 정작 미친 건 너였구나! 허! 당장 따라 나와라! 내가 똑똑히 보여 주마!”

자리에서 일어난 백무량은 운검묘 밖으로 나가, 주백천의 비석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런데 없었다.

“……!”

털썩.

두 무릎을 꿇은 백무량은 허망한 표정으로 텅 빈 토지를 내려다보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존재했던 주백천의 비석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푸른 잡초만이 무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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