곤륜산의 정상 (3)
어찌 이런 일이 생긴단 말인가!
백무량은 눈이 찢어져라 주백천의 비석이 있었던 곳을 노려보았다. 모든 감정을 넘어선 충격이 백회를 내리친 것만 같았다.
백무량의 고개가 천천히 뒤로 돌아갔다.
“정녕 모르느냐?”
“주백천이라는 선배의 이름은 알지 못합니다. 사조님을 구할 땐 주자령 태사조의 묘소를 정돈하고 있었지요.”
겨우 반 시진에서 한 시진 사이.
그사이에 무언가가 바뀌었다. 백무량은 현노윤이 했던 말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사조님을 어찌 구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때 저는 주백천 사조님의 묘소를 정돈하기 위해 왔었습니다.
천지가 뒤집힌 게 아니고서야 존재했던 사람이 왜 사라진단 말인가?
“내가 되살아나서, 그래서인가?”
백무량은 자신의 두 손을 내려다보았다.
알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답답함이 가슴을 꾹 짓누르고, 시커먼 것이 눈앞을 가렸다.
“대체 이게 무슨, 무슨…….”
백무량이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그때.
츠즈즛……!
백무량의 손등에 불로 지져지는 듯한 고통이 일었다.
“크으윽!”
깜짝 놀란 백무량은 습기에 젖은 붕대를 황급히 잡아당겼다.
사르르 풀린 붕대 사이로 기이한 문양이 보였다.
운룡(雲龍).
구름을 거느린 용이 하늘을 날고 있는 모습이 손등에 새겨져 있었다.
그걸 본 백무량의 미간이 좁아졌다.
저도 모르게 한 가지 기억이 떠올랐다.
‘운룡패……!’
주백천과 헤어지기 직전에 자신에게 건넸던 패.
그때 주백천은 똑똑히 말했다. 이 패가 자신을 지켜 줄 것이라고 말이다.
백무량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아직은 억측에 불과하나, 운룡패와 지금의 현상에 연관성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백무량은 현노윤에게 물었다.
“내 손등에 보이는 게 있느냐?”
“아까부터 무슨…….”
“묻고 있지 않느냐!”
백무량이 재차 다그쳐 묻자, 현노윤은 백무량을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다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찢어졌던 상처가 잘 아물었군요. 특별한 건 보이지 않습니다.”
이로써 백무량은 한 가지를 확인했다.
자신의 손등에 생긴 문양은 타인에게 보이지 않는다.
백무량이 현노윤에게 재차 물었다.
“이상하게 보일 건 알겠다만, 한 가지만 더 묻자.”
“말씀하십시오.”
“사람을 되살리는 대법이 존재하느냐?”
현노윤은 턱수염을 매만졌다.
“사실, 처음 사조님과 마주했을 때 좌도방문의 그릇된 술법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건 없습니다. 어떤 대법일지라도 사람을 멀쩡하게 되살릴 순 없습니다.”
“정말 없느냐?”
백무량이 진지한 표정으로 되묻자, 현노윤은 수염을 매만지며 골똘히 생각했다.
하지만 답은 없었다.
“만일 그런 대법이 있었다면 누군가가 펼치지 않았겠습니까.”
“내가 있지 않느냐.”
백무량은 마른 입술을 핥으며 하려던 말을 이었다.
“내가 이렇게 살아난 것도 이치에 어긋나지 않느냐.”
“……사조님.”
“분명히 있었다. 나와 같은 항렬에, 주백천이라는 학도사가 있었단 말이다. 내 사부인 주자령의 아들이고!”
걷잡을 수 없는 감정이 홍수처럼 몰아쳤다. 백무량은 분기를 이기지 못하고 주먹으로 땅을 내리쳤다. 거칠게 풀었던 붕대에 모래가 지저분하게 달라붙었다.
멀쩡히 존재했던 사람이 사라졌다.
이건 예삿일이 아니었다. 무언가가 잘못돼도 단단히 완전히 그릇되었다.
마치 자신이 칠십여 년 후에 되살아난 것처럼.
‘무슨 짓을 하신 겁니까, 사형…….’
백무량은 주백천의 선한 얼굴을 떠올렸다.
“내려가자꾸나.”
하루라도 빨리 강해져서 어떻게 된 일인지 알아봐야 한다.
무엇보다, 사부와 사형이 소중히 여기던 곤륜파를 다시 일으켜야 했다.
백무량은 주먹을 꽉 쥐었다.
각오는 굳건히 다졌다.
***
이른 아침.
세 곤륜도가 연무장으로 향했다.
그러던 중 현종휘가 현노윤에게 물었다.
“제가 정상에 다녀올 때마다 느끼는데, 곤륜파에서 수학한 선배님들은 저곳을 다니는데 얼마나 힘들었을까요?”
현종휘의 말에 현노윤이 빙긋 웃었다.
“왜 곤륜의 운룡대팔식이 천하제일의 경공술이라 불리는지 아느냐?”
“잘 모르겠어요.”
“곤륜산이 이토록 높은 데다, 길을 한번 잘못 들면 절벽과 마주하기 마련이다. 하물며 운해는 시야를 희롱하기 마련이지.”
현노윤은 곧바로 정답을 말하지 않고 현종휘가 유추하기를 기다렸다.
그 뜻을 이해한 현종휘는 할아버지의 말을 곱씹다가, 밝은 목소리로 답했다.
“선배님들께서는 곤륜산에서 자유로이 운신하기 위해 운룡대팔식을 지극(至極)하게 익혔다는 말씀이군요!”
“그래, 그러하다. 곤륜이 경공으로 이름을 떨친 까닭은 바로 그 때문이야. 십삼 대 조께서는 실제로 구름을 밟고 걸으신 적이 있었다더구나.”
현노윤이 손자를 따스한 눈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지금은 힘들고 더디게 느껴지겠지만, 원래 정종의 무학이 그러하니라. 느린 듯 보여도 멈춰 섬이 없고 어려워 보여도 어긋남이 없지. 빠르고 편하게 가지 않는 것은 세상의 이치가 그러하기 때문이니라. 파종도 하지 않았고 물을 대지도 않았으며 잡초를 뽑아내지도 않았는데 당장 수확하려 한다면 그게 가당키나 하겠느냐?”
“아하!”
“지금은 파종하는 과정이니 서두르려 하면 안 될 것이야.”
현노윤의 이야기에 현종휘가 감명받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백무량에겐 아니었다.
‘칠십여 년이 지나도 무론은 여전하군.’
파종이라…….
사부, 주자령에게 귀가 따가울 정도로 들은 소리였다.
‘그때가 그립냐면, 그립지.’
쓴웃음을 머금은 백무량은 연무장 구석으로 자리를 옮겨 마보세를 취했다.
뒤이어 자신이 아는 모든 무공의 형(形)을 펼치기 시작했다.
소청권, 운중용형보, 삼보, 분광검, 종학금룡수…… 가장 기본인 육합권에 이르기까지.
백무량의 움직임은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이 이어졌다. 특히 운중용형보의 공타식(空打式), 공정식(空停式), 허류식(虛流式)을 이어 갈 때 유려함이 극대화했다.
‘몸이 가볍다!’
백무량의 얼굴에 화색이 짙어졌다.
어려진 몸인데도 근골은 완성된 무인의 그것이었다.
이대로라면 전생에 이뤘던 경지를 빠르게 이룰 수 있다.
한참 동안 무공을 펼치던 백무량은 제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가부좌를 틀었다.
‘동공은 충분히 펼쳤으니, 이번에는 좌선좌공을 펼칠 차례다.’
태청신공(太淸神功).
곤륜파의 정종, 그것도 장문인의 적전 제자만이 익힐 수 있는 내공심법이었다.
“후우우…….”
백무량은 숨을 가볍게 들이 내쉬며 연공을 시작했다.
그러자 전신의 대맥과 세맥이 도해(圖解)처럼 펼쳐졌다.
“……!”
백무량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신체가 어려졌으니 어른일 때 타통했던 경맥이 다시 막혀 있어야 정상 아닌가?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그토록 힘겹게 타통했던 임독양맥이……!’
근골과 경맥 모두 죽기 직전 그대로였다.
즉, 신체는 차기 강호 십 대 고수로 불리던 구천검 시절과 같았다.
호사가들이 만들어 낸 경지로 따지자면 화경.
내공의 수발이 자유로운 데다, 삼류 심법으로도 절정의 성취를 얻을 수 있었다.
백무량은 자신의 상황을 냉정하게 파악했다.
‘대접만 한 그릇에 담긴 게 아무것도 없는 꼴이군.’
신체는 완성되었으나 내공은 단 한 줌도 없다.
하지만 앞으로 태청신공을 지극하게 연공한다면 서너 배 이상의 효과를 얻을 수 있다.
백무량은 좁쌀만 한 내공을 운용하여 소주천을 시작했다.
스륵, 스르르…….
잘 닦인 길에 마차를 타고 가듯.
겨우 한 점에 불과한 내공임에도 소주천은 빠르게 이루어졌다. 남들이 첫 소주천을 이루는 데 이각이 걸린다면, 백무량은 호흡 네다섯 번의 시간에 불과했다.
백무량이 수십 년 동안 쌓은 깨달음과, 완성된 몸.
다시 쌓는 데 시간이 걸릴 뿐이지, 골조는 이미 완성되어 있는 셈이다.
‘이걸로 만족해서는 안 돼.’
몰락한 문파를 일으키기 위해서는 화경보다 더 높은 경지에 다다를 필요가 있었다.
무엇보다, 곤륜파는 지금 당장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았다.
백무량의 시선이 두 조손에게 향했다.
‘고수의 격체전공을 받거나 영약을 취하면 과거의 경지를 회복할 수 있을 텐데…….’
몰락한 곤륜에 고수가 남아 있을 리가 없다.
영약?
그게 더 말이 안 된다.
‘있었으면 진즉에 팔았겠지.’
백무량은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했던 가옥을 떠올렸다. 만일 귀한 영약이 있었다면 살림에 보탰을 터였다.
냉정하게 말해서 현재의 곤륜파는 군소 문파만도 못한 상태다.
‘학도사인 장문인과 아이 둘이면 문파라고 칭하기도 그래.’
자신이 되살아나긴 했지만, 어느 누가 자신을 구천검 백무량이라 믿어 주겠는가?
미친놈이란 소리를 들어도 싸다. 설령 그걸 믿더라도 곤륜파가 사특한 술법을 펼쳤다는 소문이 퍼질지도 모른다.
도가로서는 아주 치명적인 소문이다.
‘이런 상황을 극복할 방법이 있을까?’
백무량은 태청신공의 연공을 멈추고는 턱을 매만졌다. 사부, 주자령과 자주 수련하다 보니 무공과 함께 전해진 버릇과 같았다.
그러던 중, 어제 현노윤과 나눴던 이야기를 하나 떠올렸다.
운산보.
갑자기 청해를 먹어치운 사파라…….
‘석연치 않아.’
백무량의 눈가가 가늘어졌다.
아무리 곤륜파가 망했더라도 구파일방이었다. 역사가 긴 문파의 무공을 익히고 싶은 건 무인이라면 당연하다.
그런 곤륜파를 마다하고 운산보가 득세했다면 무언가 이유가 있을 터.
아니, 그런 게 없더라도 운산보는 반드시 처리해야 한다.
‘곤륜파가 강성해지는 걸 가만히 보고 있진 않겠지.’
비록 자신이 강호를 활보하던 때에서 칠십 년이 흘렀지만, 백무량은 한 가지를 확신하고 있었다.
사파는 늘 영악하다.
한 대를 때리면 눈이 시뻘게져서 수십 대를 갈기려는 게 사파의 생리다. 그런 놈들을 상대했던 시절을 생각하면, 아직까지 치가 떨린다.
하물며 운산보는 청해를 먹어 치우고 대가리가 커져도 엄청나게 커졌을 것이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영감 하나랑 애 둘 있는 곤륜파는 치워 버리고 싶겠지.’
사실, 지금까지 명맥을 유지하고 있던 것도 천운이라면 천운이었다.
운산보가 무인 서너 명만 보냈어도 곤륜파는 그날로 멸문당했을 테니까.
그 천운이 계속될 린 없었다. 안온한 생각에 잠겨 있을 겨를이 없었다.
‘하루라도 빨리 무공을 회복하는 수밖에 없어.’
백무량은 숨을 고르며 태청신공을 연공했다.
***
무림맹 청해 지부 옆.
그곳에 운산보라는 사특한 사파가 득세하니.
불과 십 년 전까지만 해도 청해에서 내로라하는 협객들이 나섰으나, 도리어 운산보의 악명을 드높이게 되었다.
운귀(雲鬼).
협객을 셋 이상 벤 운산보의 무인을 운귀라 칭한다.
하나 그들도 공포에 젖은 채 우러러보는 자가 있으니.
운산보주(雲散堡主).
그는 일백의 운귀 위에서 군림한다.
“소문을 퍼트린 놈은 잡았느냐?”
“아직 수소문 중입니다.”
운산보주가 인상을 찡그리자, 무인은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시간을 그토록 주었거늘.”
“청해의 문파가 개입한 흔적은 없었습니다.”
“타지에서 온 놈이 퍼트렸단 말이냐?”
“계속해서 알아보고 있습니다.”
무인의 말에 운산보주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무엇 하나 제대로 밝혀내지 못하였구나. 그래, 어떻게 할 작정이냐?”
“일단은 곤륜파를 주시하고 있습니다. 소문을 듣고 나면 반드시 산에서 내려올 테니 말입니다.”
운산보주의 물음에 무인은 무덤덤한 목소리로 답했다.
하지만 그 내심은 긴장으로 축축이 젖어, 시선이 한곳에 집중되어 있었다.
운산보주가 쥐고 있는 빈 잔.
그가 술을 마실 때, 심기를 거스르면 오랫동안 충의를 바친 부하도 목이 달아나고 만다.
“적가(赤家)야.”
운산보주의 말에 무인, 적산은 빈 잔에 술을 따랐다.
“예!”
“갈 곳 없던 너를 거둔 까닭을 아느냐?”
“말해 주지 않았으니, 모르지요!”
적산이 큰 목소리로 답하자 운산보주가 차갑게 웃었다.
“보여 주고 싶은 사람이 있었다.”
“무엇을 말입니까?”
“잘 먹고, 잘 산다! 무능력한 당신과 나는 다르다! 그 모습을 보여 주고 싶었지.”
운산보주의 내력을 아는 적산은 입을 꾹 다물었다.
그것을 본 운산보주의 눈동자가 차갑게 변했다.
“이제는 질렸다.”
운산보주가 술로 가득 찬 잔을 빙글빙글 돌렸다.
기이하게도, 잔을 아무리 기울여도 술 방울 하나 떨어지지 않았다.
내공의 수발이 무척 자유롭다는 뜻.
운산보주가 매만지던 술잔을 아예 뒤집었다. 그러나 술 표면에 작은 파문이 일 뿐. 어떤 변화도 없었다.
극에 달한 정이라!
‘강(罡)의 경지에 다다르신 모양이구나!’
적산은 운산보주가 보인 무용에 입을 쩍 벌렸다.
쿵!
나무가 쇳덩이에 짓이겨지는 듯한 소리.
운산보주가 내려놓은 잔이 책상을 찌그러트렸다.
“잔학마도(殘虐魔刀) 적산!”
“예!”
“나흘의 시간을 주겠다.”
운산보주의 목소리가 착 가라앉았다.
“청해를 혼란케 만든 백선신검의 소문에 대해 알아 오너라. 만일 그 소문이 사실이라면, 청해의 패자인 운산보가 취해야 할 것이야!”
백선신검.
백련교의 난 이후로 유실된 곤륜파의 유물로, 신원 미상의 학도사가 챙겼다는 기록이 남아 있었다.
운산보주가 그 검을 원했다.
백선신검이 있다면 향후 운산보가 청해의 지배자가 됨에 있어 곤륜을 능가했다는 증표가 되리란 계산이 깔려 있었다.
“곤륜파를 멸문시키는 한이 있더라도!”
“명심하겠습니다!”
적산은 두 다리에 힘을 가득 줘, 떨리는 것을 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