곤륜산의 정상 (1)
“혀, 형, 이런 사람이었어요?”
자기 또래인 백무량이 할아버지인 현노윤에게 거리낌 없이 하대한다니?
큰 충격을 받은 현종휘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생애 처음으로 불어닥친 분노가 턱 아래까지 치달았다.
그 모습을 본 백무량의 눈가가 둥글게 휘었다.
“아직 곤륜파의 항렬에 밝지 않은 모양이구나.”
“그게 뭔 상관이에요! 형이 지금 할아버지한테 무례하게 굴고 있잖아요!”
“무례?”
어린 현사손의 분노가 퍽 우습다.
백무량은 가벼운 웃음을 흘렸다.
“무례는 지금 네가 부리고 있지.”
“그게 무슨……!”
현종휘가 다시 분노를 토해 내려던 차에, 현노윤이 노도 같은 고함을 내질렀다.
“그만!”
“하, 할아버지?”
“저분은 이십육 대 제자인 백무량 사조시다. 너에겐 현사조로, 나보다 높은 존장으로서 극진히 모셔야 하니라!”
현종휘가 반사적으로 백무량을 손가락질했다.
“예? 저런 꼬마가 어떻게 현사조라는 거예요?”
“삼청께서 곤륜파를 가엾이 여기신 게 아니겠느냐.”
현노윤도 정확한 답은 알지 못했다.
다만 지금까지 배운 도학으로 유추할 순 있었다.
‘죽은 사람이 되살아나는 건 천리를 거스르는 일이다. 우도방보단 좌도방에 가깝지…….’
과거 무림공적으로 여겨졌던 모산파.
대표적인 좌도방문으로, 강시술을 부렸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하지만 백무량의 모습은 강시처럼 보이지 않았다.
‘하늘이 일으키지 않았다면 이런 일이 어찌 가능하겠는가!’
현노윤이 생각을 정리하는 사이, 백무량은 숨을 가다듬고 있었다.
‘내가 곤륜의 존장이라.’
과거의 자신은 곤륜파의 탕아로, 곤륜의 규율을 밥 먹듯 어긴 데다 호전적인 성격 탓에 무림에서 적을 많이 만들었다.
가끔 곤륜산에 들러도 사부와 사형의 안부만 확인하고 나서 바로 떠났다.
그런 자신이 지금은 존장이 되었다.
그 무게가 조금 부담스럽긴 하지만…….
‘곤륜의 대소사에 개입할 수 있는 위치라는 게 중요하지.’
몰락한 곤륜파를 광명으로 이끌려면 그에 걸맞은 신분이 필요한 법이다.
백무량은 자신이 높은 신분을 갖췄음을 인지하고는 현노윤에게 물었다.
“백련교의 난 때 죽은 도사를 수습한 곳이 있나?”
“곤륜산 정상에 모셨습니다.”
현노윤의 대답에 백무량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백련교에 끊겼던 명맥이 다시 이어지는 걸 놓치지 않고 모두 보셨겠구나.”
곤륜산의 정상.
그곳은 운해가 무한히 펼쳐져, 곤륜파의 전경을 항시 내려다볼 수 있는 곳이었다.
백무량의 시선이 안개로 가려진 정상으로 향했다.
‘제가 지금 그리로 가겠습니다, 사형, 사부님.’
백무량의 얼굴에 한가득 그리움이 담겼다.
***
사부와 사형과 재회하러 가는 길.
착잡함을 필두로 온갖 복잡한 마음이 백무량을 괴롭혔다.
한편으로는 위안이 되기도 했다.
‘비록 어려졌다곤 하지만, 죽었던 내가 되살아나서 사부와 사형의 위패를 모실 수 있게 되었으니 그나마…… 다행은 무슨!’
백무량의 얼굴이 시무룩해졌다.
어찌 되었든 사부와 사형이 백련교에 죽었다는 건 변하지 않는 사실이었다.
‘얼른 가서 인사를 드리고, 사과도 드려야 하는데…….’
오랫동안 관리를 하지 못해선지 평탄했던 길이 꽤 험해져, 발에 피로가 급격하게 쌓였다.
그래도 백무량이 누구인가.
곤륜파의 이십육 대 제자로서, 강호에 무명을 떨친 고수이자 영웅!
어려져도 수십 년 등산의 비결이 몸에 녹아 있었다.
그러면 정상으로 향하는데 왜 늦어지느냐?
“허억, 허억.”
짐을 짊어진 현종휘가 반쯤 녹초가 된 탓에 등반 속도가 끔찍하게 느렸다.
그 걸음에 현노윤과 백무량이 맞춰 주다 보니 필연적으로 느려질 수밖에 없었다.
‘곤륜산이 왜 운해로 유명하겠냐. 올라가다가 구름 위 무릉도원에 갈 정도로 높아서지.’
백무량은 현종휘를 짠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자신이 어렸을 때와 비교하면 저것보다 더하면 더했다.
문제는 그때와 지금의 상황이 다르다.
“약관이 되기 전에 고수가 되겠다면서 체력이 그러면 되겠느냐?”
“으으. 죄송해요, 현사조님. 짐이 꽤 무거워서…….”
현종휘가 울상인 표정으로 고개를 꾸벅였다.
백무량은 그런 현종휘를 복잡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부족하다, 부족해.’
몰락한 곤륜파가 다시 발돋움하기 위해서는 뛰어난 후기지수와 고수가 필요한 법.
무엇보다 자신이 본산을 비웠을 때, 곤륜파가 위험하지 않게끔 대비를 해야 했다.
‘내가 아이에게 너무 무리한 수련을 시키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이 불쑥 들긴 했지만, 백무량은 고개를 휘휘 저었다.
원망을 받아도 좋다.
백무량의 마음이 굳건해진 순간, 현종휘의 종아리를 후려 깠다.
“아흑!”
“기초 수련은 뗐으리라 생각한다.”
“아, 아파요!”
“곤륜의 호흡이 무엇이냐?”
백무량의 얼굴에 한 줌의 정도 없었다.
그렇기에 현종휘는 아무런 투정도 부릴 수 없었다.
“어, 어떤 상황에서도 침착함으로 다스려야 하지요.”
“그래, 그러하다. 곤륜의 호흡은 적은 숨으로 무한을 다스린다. 어떤 상황에서도 당황하지 않으며, 침착함으로 호흡을 다스려야 함이라. 이는 구름의 운행과 같다.”
백무량은 현종휘의 호흡을 곧바로 지적했다.
“한데 지금의 너는 돼지처럼 숨을 헉헉대고 있지 않으냐?”
“노, 노력해 볼게요.”
현종휘는 후들거리는 다리를 애써 붙잡으며 숨을 가다듬기 시작했다.
근데 그게 너무나도 어려웠다.
짐을 메고 가는 것도 힘든데, 현사조란 사람이 호흡을 다스려야 한다며 숨을 잘 쉬라고 닦달하고 있었다.
“너무 힘든데요…….”
“호흡을 다스리라고 하지 않았느냐.”
현종휘가 부단히 노력했지만, 백무량의 성에는 차지 않았다.
따악!
종아리를 얻어맞은 현종휘의 눈가가 점점 촉촉해졌다.
이를 본 현노윤은 백무량을 말리려다가, 기이한 감정에 사로잡혔다.
‘틀어졌던 균형이…… 다시 맞춰지다니?’
현노윤의 눈가가 가늘어졌다.
다리가 풀린 현종휘가 넘어지려 할 때면, 백무량이 절묘하게 정강이를 때린다. 그러면 다시 균형이 맞춰진다. 마치 백무량이 힘의 방향을 바꿔 버린 것처럼 말이다.
그 과정에서 현종휘의 숨은 점차 고르게 변했다.
“……허어, 저런 수련법이 있었단 말인가?”
현노윤은 수염을 쓰다듬으며 감탄했다.
비록 수련법이 괴팍하고 험하긴 하지만, 단기간에 실력을 크게 증진할 수 있었다. 백무량의 독특한 교습법이 두 눈을 개안시키는 듯했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현종휘가 소처럼 두 눈을 끔뻑이며 현노윤을 바라보았다.
“할아버지…….”
바로 뒤에 있는 망종. 백무량을 말려 달라는 것처럼 보였다.
무척 애처로운 눈빛이었으나, 현노윤은 애써 고개를 돌렸다.
“고행이 곧 수련인 게다.”
“끄으으…….”
현종휘가 신음을 흘렸다. 하지만 방금처럼 호흡이 흐트러지진 않았다.
“과연 곤륜의 대제자답게 근기가 뛰어나구나.”
백무량은 현종휘가 나이답지 않게 대견하다 생각했다.
저 나이 때 자신이었다면 못하겠다고 도망쳤을 것이다.
“호흡을 계속 챙기는 걸 보면 재능도 있어. 내가 보장하마.”
백무량이 집안의 장손이 대성할 기재라는 것을 확인한 할아버지처럼 기꺼워하며 웃었다.
그에 반해 현종휘는 죽을 맛이었다.
“그럼 그만 때리면 안 돼요?”
“요체를 깨달아야지.”
“요체?”
“호흡만 잘 고른다고 능사가 아니야. 천지에서 길어온 호흡을 몸의 중심으로 잘 끌어와야 할 게 아니냐.”
백무량의 말에 현종휘는 두 눈을 끔뻑였다.
“몸의 중심……?”
“호흡이 배가 아니라 발까지 간다고 생각해 봐라.”
쉽게 말하자면 용천혈이지만, 백무량은 현종휘가 언문이 아니라 실제로 체득하길 바랐다.
하지만 이각이 지나도 현종휘는 용천혈까지 길어올 수 없었다.
부족한 체력과 무학에 대한 이해가 모자랐기 때문이라.
백무량은 혀를 강하게 찼다.
“내가 직접 보여 주는 게 빠르겠다.”
백무량은 한 점 남은 진기를 이끌어 용천혈로 보내어 가볍게 진각을 밟았다.
그 순간, 손등에서 강한 빛이 발하더니 전신의 내공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이윽고 대지가 흔들렸다.
쿵-!
“뭐야!”
진각을 밟은 백무량이 큰 충격에 휩싸였다.
둔중한 충격과 함께 사방의 운해가 씻은 듯이 씻겼다. 마치 용이 구름을 휘감고 지나간 것처럼, 원을 그리며 구름이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강호 십 대 고수나 가능한 신위(神威)를 백무량이 펼친 것이다.
“엇? 뭐냐! 산사태인가-?”
저 멀찍이 앞서 나가던 현노윤이 큼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현노윤은 산등성이 모퉁이를 먼저 돌아갔기에 뒤를 보지 못하고 있었다.
백무량은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외쳤다.
“내, 내가 그런 것 같은데?”
“사조께선 농담도 잘하십니다.”
현노윤이 가볍게 웃으며 걸어갔다.
백무량은 순간 울컥했지만, 저게 정상적인 반응이긴 했다.
‘아이의 무공으로 일어날 일이 아니었어.’
한 점, 진짜 한 점의 진기만 실었을 뿐이었다.
진각도 별 보법을 밟은 게 아니다.
그런데…….
‘황보세가의 권왕도 이런 건 못했는데.’
제 발자국을 바라보는 백무량의 등골에 소름이 오싹 돋아 올랐다. 차라리 땅이 갈라지기라도 했으면 이 정도로 놀라지는 않았을 터였다.
백무량의 발자국은 무른 진흙에 새겨진 발자국처럼 움푹 들어가 있었다. 마치 땅을 녹여 버린 것처럼.
만약 구천화우검을 펼칠 근골과 내공을 완성한다면 어떻게 될까?
‘강호 십 대 고수와 필적할 만하다.’
전생에도 이르지 못했던 경지를 어린 몸으로 펼치다니?
백무량의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곤륜 무공에 이런 건 없어. 이거 제대로 된 거야? 아니, 무공이긴 한 건가? 주화입마인가?’
이것이 정말 위력이 강해진 것인지, 아니면 주화입마의 전초 증상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정상이 아니라는 것만은 확실하다.
‘사부님과 사형을 뵙고 오자마자 내가 체득한 무공을 정립해야겠어. 뭔지는 몰라도 해결할 답은 분명 곤륜 무공에 있을 거야.’
백무량이 냉정하게 가라앉은 눈으로 생각할 때였다.
“봤어요? 방금 구름이 슥 사라졌어요!”
현종휘는 그것이 백무량이 행한 일이라고는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발걸음 하나로 구름을 물리칠 수 있다면 그건 사람이 아니라 신선이니까.
아무리 구천화우검을 할 줄 안다고 해도 어린 현사조가 그것을 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백무량은 얼른 표정을 수습했다.
“구름을 봤느냐, 내 발을 봤느냐?”
“응? 구름 봤죠. 구름이 신기해서…….”
“내 발을 봤어야지!”
“아악!”
백무량이 다시 현종휘의 정강이를 후려쳤다. 구름 구경에 균형을 잃었던 현종휘의 신형이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무서워…….’
현종휘는 슬슬 현사조가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그 뒤로 한 시진의 시간이 흘렀다.
등정로(登頂路).
‘그대로 있었구나.’
칠십이 년이 세월이 지났어도 여전히 존재하는가.
백무량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일 뿐이었다.
백무량의 표정이 심상치 않게 변해 갔다.
“장문인!”
“왜 부르셨습니까?”
“조사전 앞의 석등은? 현판은? 아니, 팔선도는 고사하고 태상노군상도 없잖아? 다 어디 간 것이냐?”
백무량의 말에 현노윤은 무덤덤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모두 떼어다 팔아치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