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신재생 315화>
315. 내 적수가 아니다
언제부터였을까.
천둔검법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체득했을 때?
다섯 성물의 선기를 흡수했을 때?
세 개의 단전이라는 전무후무한 위업을 달성했을 때?
그도 아니면, 신체 자체가 하나의 단전이 되어 버렸을 때?
천무백조차 사실 딱 정확한 답이 나오지 않았다.
검극(劍極).
자신이 서 있는 위치가 가장 날카로운 칼날 위, 마지막 지점이란 자리가 맞을까.
‘모르지.’
천무백은 무덤덤하게 웃었다.
그저 느꼈을 뿐이다.
군천악과 검을 나누면서 절실하게 느꼈다. 이미 창천검신의 무위와 동수를 이룬 군천악은 천무백이 보기에도 대단한 수준임이 틀림없다.
하지만 그런 군천악의 검이 모두 훤히 보였다.
어떻게 움직일지 전부 느껴졌다.
그제야 천무백은 지금 자신이 검극에 도달했을지도 모른다는 깨달음을 자각했다.
‘지금의 경지 너머에 또 다른 경지가 있다기엔 그것도 두려운 일 아닌가.’
천무백은 씁쓸하게 웃었다.
검극이란 개념 자체가 애당초 존재하지 않는다. 세상 그 누구도 검극에 이르지 못했다. 검선으로서 신선이 된 여동빈조차 검극에 이르지 못했다.
신선이 된 자도 검의 끝에 닿지 못했는데, 그 개념을 누가 이해할까.
하나 천무백은 본능적으로 느꼈다.
지금 서 있는 곳에서 더 나아갈 수 없음을.
여기가 마지막임을.
만일 더 나아간다면.
‘훌쩍 어디론가 사라져 버릴 것 같은 기분이야.’
그래서 군천악의 목을 베며 단언했다.
“나는 끝에 이르렀다.”
수십, 수백의 전생을 거듭하며 단련된 감각의 확신.
천무백은 검극에 이르렀다.
“뭐, 제대로 확인하려면 그 달걀 놈하고 붙어 봐야지.”
지금 당장 죽을 일도 없고, 죽기엔 너무 젊은 나이니까.
놈을 베고 저승길로 갈 수 있는지는 나중에 판단해야 한다.
천무백은 이번 삶이 거듭되는 전생의 마지막임을 거의 확신했다.
천무백의 시선이 바닥에 굴러다니는 군천악의 머리에 닿았다.
그때였다.
감겼던 군천악의 두 눈이 갑자기 번쩍 뜨였다.
“……그건 또 무슨 사술이냐?”
머리가 신체에서 절단됐건만, 눈을 뜨는 머리라니.
기괴한 장면에 천무백마저 눈살을 찌푸릴 정도였다.
군천악의 머리가 입을 열었다. 끔찍한 광경이었다.
“창천검신이여. 이제야 알겠다. 너는 나와 달리 죽어 새로이 환생한 것이구나.”
“어쭈, 이제 말도 하네? 숨은 쉬어지냐?”
“그랬던 건가. 삼재검성, 암천검제, 패천검마…… 역사에 이름을 남긴 위대한 무인들이 다 그대였던 건가.”
군천악의 목소리는 어쩐지 처연했다.
천무백은 어깨를 으쓱였다. 사실 군천악이 무슨 말을 하든지 신경도 쓰지 않았다.
‘머리를 부숴? 말아? 아니면 불로 태워?’
뒤처리를 어떻게 해서 깔끔하게 끝낼까 고민 중이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군천악의 입은 연신 움직였다.
“그래서 이길 수 없었던 거였어. 내가 상대하는 이는 단순히 한 시대의 절대고수가 아니라, 모든 시대의 천하제일인이었으니까.”
“왜, 억울한가?”
하늘을 바라보던 군천악의 눈이 서서히 내려와 천무백을 똑바로 주시했다. 천무백이 끔찍한 표정을 지었다.
“거, 시선은 돌리지. 잘린 머리의 눈이 날 바라본다고 생각하니까 소름 돋아서 말이야.”
“억울하진 않다. 그저 나도 한 무인으로서 순수한 경의를 표하고 싶어서 억지로 내 영혼을 붙잡고 있을 뿐이다.”
“경의?”
“무(武)를 갈고닦는 길은 절대 쉽지 않다. 몸이 부서지고, 뼈가 부러지고, 살이 찢어지고, 고통을 거듭하며 겨우 한 치 앞으로 나아가는 길. 그대는 그 한 치를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무수한 전생을 거듭하며 단련했다는 뜻 아닌가.”
“…….”
“이것이 내가 그대에게 바치는 순수한 경의다.”
천무백은 묘한 표정을 지었다. 군천악에게 저런 소리를 듣다니.
자신의 거듭되는 전생을 고통이라고 이해까지 해 주는 모습에 천무백은 묘한 감정마저 들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적이었던 사내에게서 저런 소릴 듣다니.
“유혹도 있었겠지. 힘든 무학의 길이 아니라, 마음만 먹으면 배부르게, 인생 방탕하게, 즐겁게 놀 수 있었겠지. 그렇지 않은가.”
“못할 것도 없지.”
“하지만 그 모든 걸 저버린 채, 그대는 매 삶에서 절대고수로 군림했다. 한 번쯤은 방탕하게 할 수 있을 터인데, 모든 유혹을 떨쳐 내고 오로지 검을 붙잡아 무학의 길을 걸었다. 이유가 뭐지? 어떤 이유가 그대를 검만 붙잡게 했나?”
군천악의 눈이 화르륵 타올랐다. 천무백은 그것이 마지막 질문임을 깨달았다. 군천악의 머리에 보이지 않게 연결되었던 어떤 실들이 툭툭 끊기고, 하나만 아슬아슬하게 이어져 있는 게 선안으로 보였다.
저 끈이 끊어지면 군천악은 이제 끝나리라.
천무백은 담백하게 답했다.
“검이 내 옆에 있었고, 나는 검을 잡았을 뿐이다.”
그 외의 이유는 없다.
군천악은 침묵하다 간신히 한마디 뱉었다.
“그대가 이겼다.”
“너 빼고 다 알고 있었어, 새끼야.”
“그래서 마도를 어떻게 할 생각인가? 전부 죽일 셈인가?”
“그래.”
“무서울 정도로 잔혹하군.”
“걱정 마, 한 수백 명은 살려 둘 거야. 그리고 새로운 마도를 열거다. 교리도 싹 다 뜯어고치고, 오로지 무공만 갈고 닦는 순수한 새외문파로서.”
군천악이 웃었다. 어쩐지 냉소에 가까운 웃음이었다.
“가능할 것 같은가?”
“못할 것도 없지. 나는 이미 불가능을 개척하는 사내다.”
“광오하군. 하지만 힘들 거다.”
“이미 거의 다 끝났다.”
실제로 거의 다 끝났다. 귀마만 어떻게 견제하다가 정리하면 구 부 능선은 넘은 셈이다.
하나 군천악은 그리 생각하지 않았다.
“마도가 왜 끊임없이 중원을 침공했는지 아나.”
“왜긴 왜야. 지네끼리 궁벽한 곳에서 살기 싫어서 중원 노린 거지.”
“틀린 말은 아니다. 새외인들이라면 누구나 풍요로운 중원을 탐내기 마련이다. 하지만 새외에서 유일하게 마도만이 중원을 공격하는 걸 실제로 행한다.”
천무백은 눈살을 찌푸렸다. 어쩐지 군천악의 말에 담긴 숨겨진 의미가 보였다.
“누군가 충동질한다는 말이냐?”
“그렇다.”
군천악은 답하지 않았지만, 천무백은 어렵지 않게 짐작해 낼 수 있었다.
“곤륜이군. 곤륜의 노괴들이야.”
“그렇다. 저번 대전에서도 곤륜을 불태웠지. 가장 먼저.”
“그러니까, 곤륜의 그 추악한 늙은이들이, 너흴 충동질해서 자기네 터전인 곤륜을 불태우게 한다고?”
이해가 가지 않는 처사다. 하나 천무백은 이내 헛웃음을 터뜨렸다.
곤륜은 전쟁이 끝나면 사실상 금지(禁地)가 된다.
중원의 재건에 모든 백도무림이 집중하면서, 비교적 외곽인 곤륜의 재건은 뒤로 미뤄지기 마련.
그리고 그동안에는 마도의 잔여 병력이 도사리니, 사실상 금지가 되어 출입하는 이들이 없어졌다.
곤륜파가 아예 세상에서 지워진 지는 오래다.
“그런데도 아무런 문파도 안 세워졌다. 곤륜은 중원과 새외를 통틀어 천혜의 기맥이다. 가만히만 있어도 일갑자의 내력을 쌓을 수 있다는 농담이 허언이 아닐 정도다. 그런 곤륜에 문파가 세워지지 않는 이유가 무어겠나.”
“중원오재중 하나인, 곤륜의 노괴들이 마도를 충동질해서 정마대전을 일으키고, 그사이 곤륜을 아무도 접근하지 못하게 한다?”
“시간이 흘러 차츰 곤륜을 찾는 도인들이 많아질 때가 되면, 다시 정마대전이 벌어지곤 했다. 전쟁이 벌어지고, 전쟁이 끝나고도 재건이 이뤄지는 동안 그 누구도 곤륜에 접근할 생각을 떠올리지도 못하는 거지.”
“허.”
천무백은 짧게 헛웃음을 터뜨렸다.
별 신경도 안 쓰던 놈들이 뒤에서 그런 공작질을 하고 있었다라…….
물론 군천악의 말 전부를 신뢰할 순 없다.
하지만 저 말 중 일부가 진실이라면.
“내가 만든 마도를 충동질할 가능성이 있다는 얘기네.”
아, 그럼 귀찮은데.
물론 천무백이 살아 있는 동안에 감히 그런 짓은 하지 않을 거다.
다만 이번 삶이 끝나 시간이 흐른다면.
“내가 이 고생을 했는데 또?”
천무백은 혀를 내둘렀다. 그렇게 내버려 둘 수야 없지.
그때 군천악의 머리를 이어 준 마지막 남은 실이 끊어졌다.
군천악의 눈이 일순 부릅떠지더니, 간신히 한마디를 토했다.
“그, 그대여…… 나는 그대의…… 호적수였는가?”
천무백은 간절한 눈빛을 바라봤다. 저놈의 원래 목표는 마도천하였겠지.
하나 그 목표는 바뀌었으리라.
바로 자신으로.
오로지 창천검신이란 그 무게를 이기는 것으로. 그래서 역천을 행하고, 몸까지 바꿨겠지.
어쩌면 저 말 한마디를 듣고 싶어서, 죽기 전에 곤륜의 노괴들에 대한 비밀도 밝혀 준 것일지도 모른다. 죽을 사람에게 듣고싶은 말 한마디 못해줄 거야 없다. 하지만 천무백은 냉정했다.
“애석하지만 넌 내 적수가 아니다.”
“……!”
“그저 꽤 흥미로웠던 상대였을 따름이다.”
“아…… 아아.”
군천악은 고통스러운 신음을 내뱉다가 눈을 감았다.
정마대전은, 종결됐다. 천무백의 칼날에 의해서.
* * *
“주군!”
얼마 지나지 않아 능허가 찾아왔다.
능허뿐만이 아니다. 검존 유백기와 대막의 늑대들인 혈랑까지.
그들은 굴러다니는 군천악의 머리를 보고 탄식을 터뜨렸다.
“이제 끝난 겁니까? 주군? 저 새끼 천마 맞죠? 와, 씨. 진짜 천마 목을 벴네.”
“내가 못 벨 줄 알았냐?”
천무백이 미간을 좁히자 능허가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아휴, 그럴리가요. 그런 생각 단 한 번도 한 적 없습죠.”
능청을 떠는 능허를 보던 천무백의 고개가 모로 꺾였다.
슬쩍 보니 유백기는 단명왕과 귀자모왕의 잘린 목을 들고 있었다.
“마인들을 규합하던 두 호법마왕입니다. 제가 베었습니다.”
유백기가 담담하게 말했다. 비록 군천악에게는 한 방 먹여 주진 못했지만, 단명왕과 귀자모왕은 유백기가 가뿐하게 해치웠다.
슬쩍 시선을 돌리니 두 사람과는 달리 완전히 오체투지한 혈랑의 허리춤에는 애염명왕의 사나운 머리가 매달려있었다.
“텡그리시여! 텡그리의 뜻을 어긋난 존재를 해치웠나이다.”
“음, 그래. 알겠소.”
천무백이 조금은 떨떠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을 추종하는 세력이지만, 천무백이 굳이 대막의 늑대들을 찾지 않았던 이유가 이것이다.
자신을 신으로 모시며 종교를 만드니. 그래도 그 충성심만큼은 확실해서, 천무백의 비장의 수였다.
천무백의 시선이 이내 다시 능허에게 닿았다.
능허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천무백은 어쩐지 그 웃음이 얄미웠다.
“능허야.”
“예, 주군.”
“왜 넌 아무것도 없냐.”
“어휴, 징그러워서 머리를 어떻게 들고 다닙니까.”
“들고 다닐 머리는 있고?”
다 늙은 유백기와 저 멀리서 온 혈랑도 제몫을 했는데, 능허 이놈은 또 어디서 뺀질거린 게 틀림없다. 천무백이 한마디 하려는 찰나, 능허가 가슴을 편 채 소리쳤다.
“염왕을 죽였습니다!”
“염왕? 그 천마 옆을 호종하던 애? 호법마왕 중에서 가장 강한 놈?”
천무백이 불신의 시선을 보냈다.
하지만 능허는 당당했다.
“천하가 지켜봤고, 천하가 증인입니다. 제가 염왕을 죽여서 화산의 장문인을 구했지요!”
“…….”
이거, 이렇게까지 말하는 거 보니 거짓말은 아닌 것 같은데.
믿을 수가 있어야지.
천무백이 불신하자 능허는 억울한 기색이었다.
“아니, 솔직히 제가 주군 모신 게 몇 년인데, 못 믿으십니까?”
“너 같으면 믿겠냐?”
능허가 정색했다.
“물론 저여도 못 믿죠.”
“그치?”
그 만담을 지켜보던 유백기가 쓰게 웃으며 끼어들었다.
“주군, 지금 마인들은 진법에 갇혀 헤매고 있습니다. 수뇌부를 모두 죽였으니, 이제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어떻게 하긴. 전부 죽여야지.”
“……!”
잔혹한 말이었다. 하나 천무백은 단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오늘 여기서 나가는 마인은 단 하나도 없다. 전부 죽여.”
“그럼…….”
능허가 말끝을 흐렸다.
그러다 이내 허탈한 표정으로 말했다.
“마도가 정말 사라지는 것이군요.”
“그래.”
“마도가 끝난 거군요.”
“그래.”
“주군의 싸움이 끝난 거죠?”
“너의 싸움도 끝난 거지.”
“…….”
천무백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부터 지금까지의 마도는 아예 사라진다.
“끝난 거다.”
전쟁은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