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재생-316화 (316/318)

<검신재생 316화>

316. 조금은 늦은, 그러나 많이 늦지는 않은

천무백은 조용히 주위를 둘러봤다.

자신의 방이었다. 자신이 각성한 순간 눈을 뜬 그 방.

청성표국의 작은 방은 그때와 똑같았다.

온갖 그림과 글이 고아한 먹물 향을 풍겼고, 한쪽엔 여러 악기가 놓여 있었다.

어쩐지 천무백은 이 구도를 바꾸고 싶지 않았다. 특별한 장식으로 더 채우고 싶지 않았다. 그냥 이대로면, 늘 마음이 편해지는 기분이었다.

유유자적한 기분을 느끼는 도중, 누군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이미 누가 밖에 누가 와 있는지 알고 있던 천무백은 무덤덤하게 맞이했다.

“신색이 좋아 보이오, 하오문주.”

“전쟁이 끝나지 않았소? 그야 좋을 수밖에. 우리 같은 하류 인생들은 전쟁 한번 나면 일자리가 없어져 곤란해지거든.”

곡지흠이 넉살을 떨며 맞은편에 앉았다. 천무백이 희미하게 웃었다.

“이것도 마지막이군.”

곡지흠이 시원섭섭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 정말 마지막이오. 하오문주의 절기도 모두 이어받았으니, 이게 천룡겁협께 올리는 마지막 보고요. 다음부터는 정세를 알아보려면 정보를 사 가셔야 할 것이오.”

“싸게 해 주시는 것이오?”

“그야 당연한 일이지. 일 년 전에 끝난 정마대전의 종결자에게 비싼 값을 치를 수가 있나! 천마를 베어 강호를 구한 영웅이잖소.”

“고마운 얘기로군.”

“그럼 그간 정세에 대해 말씀드리겠소.”

천무백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선 화산의 장문인이 내상으로 말미암아 더는 무공을 사용하기 힘든 처지가 되어, 자리에서 물러났소. 차기 장문인은 수호검 청현진인이 맡게 됐소.”

“예상된 바로군.”

“종남 장문인은 저번 대전에서 전사하고, 그 자리에 풍운검군 종리홍이 올랐는데, 종남을 잘 정리하는 모양새요. 한데 비교적 화산에 적대적이었던 인사였는데, 이번 화산의 장문인 선출에 직접 가서 축하했다고 하오.”

“풍운검군 그 작자가? 그건 의외로군.”

“이게 겉으로만 그런 건지 모르지만, 어쨌든 화산과 종남도 과거와 같이 적대적이지 않소. 독안사 능허에게 죽은 염왕을 상대로 두 문파의 장문인이 함께 싸웠고, 종남 장문인이 화산을 구하다가 희생하였으니.”

“좋은 일이군. 화산과 종남이 화합하면 섬서성은 금세 안정을 되찾을 것이니.”

그 외에도 여러 사정이 전해졌다. 정마대전이 끝나고 천무백은 조용히 칩거했다. 자신이 천마를 죽였단 소식이 퍼지며 떠들썩했지만, 천무백은 나서지 않았다. 정리할 생각이 많았고, 시간이 필요했으니까.

그저 조용히 집에 머물며, 곡지흠을 통해 세상을 보고 있었다.

“아, 곽용 어른과 제갈선 어르신, 약선 어른과 검존이 함께 떠나신 여행은 천축으로 방향을 잡았다고 하오.”

“멀리도 유람 떠나는군.”

“그 양반들이야 중원에서 안 가 본 곳이 없으니 그런 것 아니겠소?”

천무백이 피식 웃었다.

투신 곽용, 괴이천뇌 제갈선, 약선, 검존 유백기까지.

이 넷은 사십 년 전의 정마대전에 이어 일 년 전의 정마대전까지 함께 싸운 친우이자 전우였고, 이제는 동시에 무림에서 은퇴해 버린 노고수였다.

이 넷은 싸움이 끝나자 인생의 황혼기를 같이하겠다는 의지로 함께 유람을 떠났다. 유백기는 스승 곁에 남겠다고 했으나, 천무백은 그를 보냈다.

유백기는 이제 무공을 더 쓸 수 없는 상태였다. 역천으로 억지로 몸의 수명을 유지하고 있던 터. 그는 천마가 죽고 나서 망설임 없이 삶을 마무리하려 했지만, 친우들과의 마지막 여행을 결심하고 떠났다.

‘다시 보긴 힘들겠지.’

언젠가 유람에서 돌아오겠지만, 세상을 등지기 전 마지막으로 스승에게 보이는 인사겠지. 씁쓸했지만, 이것 또한 천륜이고 순리이니 미련 없이 보내야 하리라.

천무백은 쓴웃음을 지었다.

“여러모로 강호가 재편되고 있소. 아, 얼마 전에 귀마의 시체가 북해에서 발견됐소.”

“결국, 죽었군.”

1년이면, 용케도 오래 산 셈이다.

“그리고 장노가 자신을 검마라 선언하며 새로운 마도의 선포를 알렸소. 마교의 부활이라며 여기저기 떠들썩해졌지만, 오히려 소림과 무당의 인사들이 신마도문파의 설립을 공인했소.”

“큰 결단을 내렸군.”

천무백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곡지흠은 헛웃음을 흘렸다.

그 결단을 내리게끔 뒤에서 종용한 게 천무백임을 다 아는데, 저 뻔뻔함이란…….

“뭐, 어찌 됐든 십만대산의 천마신교가 아니라, 오로지 무학을 다루는 문파라고 명시했으니 지켜봐야 할 일이오. 천마신교의 부활을 꿈꾸던 귀마를 죽인 게 장노라는 게 세간의 통설이니, 지금까지의 마도와는 확연히 다를 것이오.”

“그럼 다행이겠지.”

천무백은 담담히 말했다. 곡지흠은 이 보고가 무슨 의미가 있나 불쑥 생각이 들었다. 장노의 뒤에 천무백이 있으니, 사실 그 문파도 천무백의 소유 아닌가.

“아, 그리고 이건 곤륜으로 간 혈랑에게 온 서찰인데 내 해석이 어렵소. 중원문자인지, 어디 문자인지.”

천무백은 그 서찰을 받아 단번에 읽었다.

“곤륜의 노괴들을 추적해서 죽였다는군. 하지만 그들의 수뇌부는 놓친 것 같다는데…….”

“거참, 중원오재 중 두 집단인 대막의 늑대들과 곤륜의 노괴들이 부딪치다니.”

“재해는 재해로 잡는 법이니.”

천무백은 군천악의 얘기를 잊지 않았다. 직접 나서지 않고 대막의 늑대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그들 역시 중원오재 중 하나. 마음먹고 날뛰기 시작하자 곤륜의 노괴들 역시 큰 피해를 볼 수밖에 없었다.

다만 수뇌부를 놓친 게 아쉽지만…….

“중원을 떠나 서장으로 도주해서 추적중이라니, 거기서 죽어버리거나 영영 안 돌아오면 좋겠군.”

그러면 귀찮은 일은 없을 텐데 말이야.

“이만하면 내가 얘기 드릴 건 다 했소. 혹시 궁금한 게 더 있소? 이건 정보 값 안 받으리다.”

“능허는 뭐 하고 살고 있소? 뒤늦은 신혼여행이라도 떠난다더니 소식이 없군.”

“여행 중에 둘째가 생겨서 애 낳고 돌아온다고 했소.”

“둘째? 거참…….”

능허 이 새끼, 이제 오십줄 되어가는 나이 아닌가?

“하하하하. 독안사 능허 아니오, 능허. 염왕을 죽여 정마대전의 영웅이 된 자. 그정도 정력은 확실하지.”

“거참, 어휴.”

천무백은 혀를 내둘렀다. 곡지흠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이만 가 보겠소.”

“벌써 가시게?”

“대협을 찾아온 손님이 계시는데 내 자릴 피해 줘야지.”

천무백은 쓰게 웃었다.

“그렇군.”

“잘해 보시오. 독안사 능허도 노익장을 발휘해 애가 둘인데, 아직 젊잖소?”

천무백으 떪은 표정으로 그를 내보냈다.

곡지흠이 웃으며 나간 뒤에, 방에 들어선 사람은 가녀린 체구였다.

“잘 지내셨어요? 공자님.”

천무백은 오랫동안 많은 생각을 정리하고 고민했다.

1년이란 시간을 그렇게 보냈다.

대부분 많은 생각을 정리하고 끝냈다. 하지만 딱 하나. 지금 이 순간까지 고민을 거듭했다.

“오랜만이구려, 소저.”

“공자님도요. 집안 정리하느라 너무 바빴거든요.”

제갈설아가 애써 웃으며 그리 말했다. 무언가 핑계를 대는 듯한 모습이었지만 진짜였다.

전쟁이 끝나고 전쟁의 핵심 역할을 맡은 제갈세가가 뒷정리를 하는데, 얼마나 노력을 기울였는지 천무백도 잘 알았다.

정의맹을 유지하고, 백도무림의 연합을 굳건히 하고……제갈설아도 아버지를 도와 열심히 일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전쟁이 끝나고 1년.

둘은 처음 만났다.

“갑자기 찾으셔서 깜짝 놀랐어요.”

“해야 할 말이 있어서 그렇소.”

“해야 할 말이요?”

“일 년 동안 말할지, 말지, 비밀로 간직할지 고민한 내용이오.”

“비밀이요……? 그래서 고민하다가 이제는 말할 결심을 하신 건가요?”

천무백이 쓰게 웃었다.

솔직히 지금까지 결정을 못 내렸다. 그래서 제갈설아의 얼굴을 보면 결심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이 자리를 마련했다.

천무백이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결심했소.”

“대체 무슨 비밀이시길래…….”

“한 치의 거짓도 없는 얘기오, 부디 이상하다고 여기지만 마시고 일단은 들어주시구려.”

그리고 천무백은, 서서히 입을 열었다.

자신의 비밀.

수십, 수백의 전생을 거듭해 오며 지금까지 살아온 그 모든 삶의 역사를.

* * *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중천에 떠올랐던 해가 지고 어둠이 찾아왔다.

그만큼 긴 시간을 할애하고 나서야 천무백은 자신의 비밀을 간략하게나마 전달할 수 있었다.

침묵하던 제갈설아가 복잡한 표정으로 이마를 짚으며, 간신히 입을 열었다.

“잠깐만요. 그럼 우리 몇 살 차이죠?”

천무백은 침묵했다.

그리고 곰곰이 생각하다 말했다.

“그건 모르는 게 좋을 것 같소.”

그러자 제갈설아가 모든 기운이 다 빠져나간 듯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모르는 게 더 좋을 것 같은 얘기네요. 그래, 차라리 모르는 게 나을 거 같아…….”

이게 말이나 되나 싶지만, 저런 거짓을 자신에게 말할 이유도 없다.

더구나 제갈설아는 천무백의 눈을 봤다.

그녀가 한번 빠져 버렸던, 깊고도 깊은, 칠흑 같은 눈동자를.

흔들림 없는 진실이 보석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제갈설아가 어지러운 표정으로 천무백의 눈을 바라봤다. 그때였다. 별안간 천무백의 갑작스러운 목소리가 제갈설아의 심장을 뒤흔들었다.

“소저가 내게 연정을 품고 있음을 잘 알고 있었소.”

“……그, 그건”

제갈설아가 당황해서 얼굴이 빨개진 채 말을 더듬거렸다. 천무백은 담담히 웃었다.

“그러나 나는 그걸 알면서도 모른 척하고 있었소. 소저도 내가 일부러 외면하는 느낌을 받았을 것이오.”

“…….”

제갈설아는 순간 몸이 딱딱하게 굳는 기분이었다.

그랬다. 자신을 일부러 외면하는 것인지, 아니면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건지. 아무래도 전자가 아닐까 싶었지만, 애써 아니라고 자위했다.

정말 일부러 외면하는 것이라면, 그것만큼 고통스러운 짝사랑은 없을 테니까.

차라리 눈치가 없어서 아예 모르는 게 희망적이니까.

“하지만 받아들일 순 없었소. 고통스럽거든. 정말 고통스럽소. 나는 죽고 다시 태어나지만, 기억은 사라지지 않소. 내 기억에는 아직도, 내가 사랑을 나눴던 여인, 그리고 그 사이에서 낳은 내 자식이 있소.”

제갈설아가 가만히 고개를 숙였다. 차마 저 눈동자를 더 바라볼 수 없는 심정이었다.

“그것들은 곧 심마가 됐소. 난 잊지 못하니까. 아무리 수련하고, 경지에 오르고 만독불침이 되고, 어떤 쇠붙이도 내 몸에 상처 하나 못 내는 수준이 되어도, 지독한 비수가 되어 내 머리와 심장을 찌르오.”

천무백의 목소리는 담담했으나, 묘하게 그 끝이 살짝 떨렸다.

제갈설아도 그것이 느껴졌다.

매번, 모든 상황에서 단 한 번도 떨지 않던 천무백의 목소리가 떨린다.

제갈설아의 고개가 다시 서서히 들어 올려졌다.

“그래서 소저가 나에게 연심을 품고 있는 걸 알면서도 모른 척했소. 답답했을 거요.”

천무백이 쓰게 웃었다.

“그러나 이 모든 건 내 잘못이오. 모른척할 거면 차라리 냉정해져야 하는데, 그렇지 않았지. 소저의 도움이 필요 하다는 핑계로 소저를 계속 곁에 뒀소.”

그랬다. 천무백은 늘 제갈설아의 도움이 필요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하면, 그녀의 도움들도 사실 천무백이 시간만 투자하면 어떻게든 해낼 수 있는 종류였다.

그런데도 천무백은 제갈설아를 필요로 했다. 일의 효율성 때문에?

“아니, 그저 소저와 같이 있으면 좋겠단 생각을 나도 은연중에 했던 거지.”

제갈설아는 끝내 고개를 들어 올렸다. 천무백의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눈망울에 이슬이 맺혔다. 그녀의 얼굴은 아쉬움, 기쁨, 안타까움, 슬픔이 뒤섞여 매우 복잡했다.

대체 왜.

왜 이제야 저런 말을 하는 걸까.

입으로 말하지 않아도, 천무백은 그 뜻을 짐작하곤 대답했다.

“난 이번 삶이 마지막일 것이오.”

“……!”

“거듭되는 전생이 끝나리라 생각하오.”

“그러면…….”

“늘 매번 이 윤회의 고리를 끊고 싶었지. 이승을 떠나고 싶었소. 그런데 막상 이번 삶이 마지막이라 생각하니, 나도 간사한 인간인가보오. 아쉽구려. 아쉽고 너무도 아쉬워 내 마음이 가는 대로, 내 원하는 대로 해야겠소.”

제갈설아의 가슴이 서서히 뛰었다.

“사실 말이오, 난 확신하지 않소. 이번 삶이 마지막이라 짐작하지만, 막상 또 그 달걀을 보면 모르겠거든. 놈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가늠이 안 되는 작자니까. 어쩌면 또 거짓말처럼 놈에게 패배하고 다시 멀쩡한 옴팡이놈으로 각성할지도 모르지. 그렇지만, 만일 그렇지 않다면?”

“…….”

“난 그 후회를 하기 싫어, 내 마음대로 할 생각이오. 내 원하는 대로. 내가 왜 이 말을 소저 앞에서 꺼내는지 아시오?”

제갈설아는 아무 말도 못 했다. 굳이 선안 너머로 그 작은 얼굴을 보지 않아도 감정이 느껴졌다. 천무백이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혹여 이 삶을 끝내지 못하고 전생을 거듭해서 내가 느낄 고통보다, 이번 삶에서 소저를 외면하고 내가 느낄 고통이 더 클 것 같소. 참을 수 없을 것 같소. 소저, 나를 향한 그대의 연정은 아직도 그대로요?”

일순 세상이 멈춘 듯했다. 제갈설아는 천무백을 똑바로 바라봤다. 천무백은 선안을 뜨지 않았다. 그 감정을 감히 엿보기가 싫어서다. 그저 조용히, 굳게 닫힌 옅은 붉은 빛의 입술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얼마나 지났을까.

어쩐지 천무백은 일생일대의 대적을 상대할 때보다도 더 긴장되는 순간, 입이 열렸다.

“아니요. 그대로가 아니에요.”

“…….”

그런가, 그렇겠지. 천무백은 자조적으로 웃었다. 왠지 씁쓸했다.

천무백은 멍청이가 아니다. 눈치가 없는 숙맥도 아니다.

그 역시 오랜 삶을 살았고, 몇 번의 사랑을 나눴던 반려자가 있었다.

자신이 제갈설아에게 보인 태도가 어떤 것인지 잘 안다.

완전히 밀어냈으면 모를까. 다 알면서도 애써 모른 척했던 것이니.

야속하다 못해 품고 있던 연정이 사라지는 거야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천무백은 자신의 뒤늦은 태도를 반성하며 그저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의 얼굴에 쓴웃음이 떠올랐다.

“미안하오, 끝까지 난 내 처지에서만 생각했구려.”

“아니, 그 말이 아니에요.”

“……소저?”

“내가 공자님에게 품은 연심은 공자님이 아시던 그대로가 아니라…… 더 커졌다구요.”

“…….”

순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천무백은 입을 다물었다.

제갈설아가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희미하게 떠오른 기쁜 낯으로 말했다.

“더 커졌는데, 계속 커져갔는데, 왜 이제야…….”

천무백은 아무 말 없이 조용히 제갈설아를 품에 안았다.

조금은 늦은, 그러나 많이 늦지는 않은 포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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