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재생-314화 (314/318)

<검신재생 314화>

314. 나는 지금 끝에 이르렀다

공교롭게도 둘다 같은 표정을 지었다.

천마도, 천무백도.

이 상황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이었다.

“검을 잡는 파지법이야 그렇다 쳤어. 검을 휘두르는 궤적도, 초식도, 호흡도 착각이려니 했지. 그런데 검을 나누면 나눌수록 착각이 아니더란 말이야.”

천무백도 쉽사리 확신할 수 없었다.

눈앞의 천마가 죽은 줄로만 알았던 군천악이라는 사실을.

만일 군천악이 살아 있다면 지금 나이는 백 살이 넘는다.

생각지도 못했다. 상상도 하지 않았다. 똑같은 건 검뿐만이 아니다. 검을 휘두를 때 두 다리의 간격, 근육의 움직임, 호흡, 집요한 눈빛과 아주 사소한 습관까지 전부.

익숙하다. 낯익다.

수도 없이 부딪쳐 본, 군천악이 분명했다.

그러나 어찌 확신할 수 있으랴.

눈앞의 천마는 군천악의 외모에서 어느 부분도 똑같지 않았다.

반로환동이란 개념 자체가 천무백은 전설에 불과함을 잘 안다.

하나 만약, 천무백이 몰랐던 반로환동의 비법이란 게 있다고 치자.

그렇다면 적어도 군천악이 가졌던 외모의 특징은 일부 요소나마 남아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한데 눈앞의 천마는 전혀 다른 사람이다. 골격 자체가 틀리다.

그래서 물었다. 너 군천악 맞냐고. 반응은 충격적이다.

자신이 군천악이란 이름을 거론한 순간.

천마의 몸은 우뚝 멈춰 섰다.

천마의 얼굴 너머로 다채로웠던 빛무리가 마치 폭발이라도 하듯이 빨갛게 미친 듯이 점멸하기 시작했다.

그런 반응을 보자 천무백은 더더욱 이해할 수 없는 표정이 됐다.

틀림없다. 놈은 군천악이다.

“군천악. 대체 무슨 짓을 한 거냐?”

한편 천마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동공이 거칠게 진동했다.

“넌······ 뭐지?”

천마는 간신히 쥐어짜는 목소리로 물었다.

천무백은 헛웃음을 터뜨렸다.

“이 새끼, 기본이 안 돼 있는 거보니 군천악 맞네. 질문을 했는데 질문으로 답변하는 건 예나 지금이나 똑같네?”

“······.”

천마, 군천악은 혼란스런 표정을 지었다. 하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얼굴은 무서우리만큼 딱딱하게 굳었다. 형형한 안광이 불처럼 타올랐고, 낮고 깊은 목소리고 무겁게 깔렸다.

“어떻게 알지? 본좌가 군천악임을 어찌 아느냐.”

“어떻게 알긴 뭘 알아. 칼 쓰는 것 보니 영락없는 군천악인데. 내가 너랑 한두 번 싸워 보냐?”

천마의 몸이 한차례 흔들렸다. 선안 너머로 보이는 색채가 온갖 색으로 다채롭게 점멸했다. 천마가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게 떠듬떠듬 말했다.

“한두 번 싸워 봐······?”

“뭐야. 넌 감이 없냐? 이쯤 되면 오는 거 없어? 난 칼 쓰는 거 보고 딱 알았는데. 너도 알아차려야 맞지 않냐?”

천무백의 말에 천마의 얼굴은 괴상하게 일그러졌다.

마치 머리를 둔기로 맞은 듯 머릿속이 둔중한 충격으로 크게 뒤흔들렸다.

아무리 익숙한 상대라고 해도, 단순히 싸우는 움직임만으로 누군지 확신할 수 있을까?

얼굴도 다르고, 나이도 틀리고, 완전히 다른 사람을?

‘있다.’

군천악의 몸이 순간 벼락이라도 맞은 듯 부르르 떨렸다.

딱 한 명 있다.

자신의 치열한 마음으로 휘두르는 검을 그저 오만한 눈빛으로 오시하던 사람.

아무리 검을 휘둘러도 이길 수 없던 사람.

그럼에도 수없이 도전하고 싸우고 결국엔 패배만을 안겨 줬던 사내.

단언컨대 머릿속에 떠오르는 인물은 유일했다.

“창천…… 검신?”

그의 목소리가 잘게 떨렸다.

사실 천무백의 검이 익숙하고, 무공이 무엇인지는 단번에 알아차렸다.

당연한 일이다.

창천검신과 수도 없이 싸웠으니까. 매번 좌절했고, 패배했으며 절망했으니까.

그 검을, 그 눈빛을, 그 무공을, 그 내공을 어찌 잊으랴!

그러나 그것만 보고 설마 창천검신이라고 누가 생각할까.

무덤 앞에 직접 술을 올리며 죽음을 애석해 했던 게 본인 아니었는가.

상대가 창천검신의 무공을 쓰는 것?

그야 창천검신의 무공을 배웠으니까.

검존한테 배웠든 어쨌든, 창천검신의 후인이니까.

그렇게 크게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너무 완벽하게 창천검신의 무공을 구사하는 것을 봐도, 그냥 제대로 배웠구나라고 생각했다.

한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 이상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똑같다. 소름 돋을 정도로 똑같아.’

아무리 같은 무공을 전수받아도, 똑같을 수가 없다.

개인의 신체 조건과 사소한 습관이 검에 묻어나기 마련이다.

군천악은 등줄기에 소름이 타고 달리는 걸 느꼈다.

‘전부 똑같다. 전부.’

창천검신의 그 모든 것들.

이 세상에 군천악만큼 창천검신을 증오하면서도 그 모든 걸 샅샅이 파헤친 사람은 없으리라.

어떻게든 이기기 위해서 아주 사소한 모든 요소를 분석하고 머릿속에 집어넣었던 군천악이다.

군천악의 몸이 파르르 떨렸다.

그랬다. 눈앞의 사내는, 믿기지 않지만 분명하다. 군천악은 가슴이 뜨겁게 차오르는 기분이었다.

창천검신은 죽었다. 그리 믿었다.

하나 지금, 전혀 다른 외모, 완전히 틀린 나이, 전혀 다른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 있다.

마치 자신처럼.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천하의 창천검신도 그랬으리라.

허리를 뒤로 젖히며 광소를 터뜨렸다.

“으하하! 그런가. 너도 역천을 행했던 거냐? 결국엔 곤륜의 노괴들을 찾아갔던 것이냐! 하하하! 너도 나랑 똑같은, 그저 똑같은 죽음이 두려운 한낱 인간이었구나!”

“······?”

“천하의 창천검신이여, 신선조차 우습게 알고 마귀조차 한칼에 벨 수 있던 지고한 경지의 창천검신도, 결국 죽음이 두려워 역천을 행하고, 끝내 새로운 몸뚱이를 강제로 빼앗았던 게냐? 으하하하. 평생 살면서 창천검신과 동질감을 느낄 줄이야. 그것도 이 비열하고도 지저분한 짓에 말이야.”

천무백은 헛웃음을 터뜨렸다.

‘뭔가 단단히 착각하는 것 같은데.’

역천이라니. 곤륜의 노괴들이라니.

자신은 전생을 끝내고 새로운 삶을 지금 살아가는 것인데.

하긴, 환생 따위를 생각할까.

‘본인이 지금의 모습을 한 이유랑 똑같이 생각하나 본데.’

붉게 충혈된 군천악의 눈동자에는 언뜻 광기가 감돌았으나, 그보다 더 큰 건 희열이었다.

“나는 그것도 모르고 네놈의 무덤을 찾아가 절을 했지. 사실 그때 결심했다. 세상을 오시하던 창천검신도 죽음 앞에 무력한 걸 보고. 허망해지더구나. 하면 내가 죽음을 극복한다면, 그 창천검신조차 뛰어넘을 수 있는 것 아니겠는가. 그리 생각했단 말이다.”

천무백은 침묵했다. 천마의 말을 통해 그는 어떻게 일이 진행됐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역천을 행한 뒤에 영험한 곤륜산에서 그저 목숨을 연명하고 있는 전대, 전전대, 아니 어쩌면 수백 년 묵은 괴물도 있을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가득한, 곤륜의 노괴들. 그 늙은이들을 찾아갔던 거였어.’

중원오재.

곤륜의 노괴들은 가장 신비한 존재이면서도, 동시에 혐오스러운 족속들이다.

하나같이 전대, 전전대, 심지어 그 이전의 고수들.

죽음이 싫어, 역천을 행해 곤륜으로 들어가 은거한 이들.

역천을 행하며 육신을 유지할 정도라면 당대에 손꼽는 고수다.

그런 고수들이 가끔 곤륜을 내려와 중원에 모습을 드러내면 끔찍한 사건이 벌어지곤 했는데, 그리하여 중원오재 중 하나가 됐다.

물론 그들은 세간에 모습을 웬만해선 드러내지 않는다.

역천이란 것이 결국 내공으로 억지로 육체를 유지하고 수명을 붙잡는 일이기에.

강호에 나왔다가 힘 한번 제대로 잘못 썼다간, 육체의 붕괴를 막지 못해 결국 죽음에 이르게 되니까.

“곤륜의 노괴들이 괴악한 사술을 만들어 냈나 보군. 그래서 새로운 육신을 빼앗은 거냐? 그렇게 목숨을 연명한 거야?”

“연명이 아니다. 본좌는 새로 태어난 것일 뿐, 군천악은 죽었고 본좌는 오롯이 천마다. 그 어떤 이름도 필요 없는, 마의 정점이다.”

천무백은 혀를 내둘렀다. 광기가 번들거리는 두 눈을 보니, 어떻게 된 일인지 짐작이 갔다.

“그렇게라도 오래 살아서 뭐 하게?”

“창천검신, 나에게 수많은 좌절과 절망을 안겨 준 정점. 그 정점을 넘으려면 나에겐 시간이 필요했다. 한데 이제야 증명할 수 있게 됐구나. 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지랄.”

천무백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지만, 군천악은 여전히 번들거리는 눈빛이었다.

“보라. 본좌는 널 상대로 조금도 밀리지 않았다. 하물며 과거 느꼈던 창천검신의 넘을 수 없는 벽 같은 건 이제 느껴지지 않는다.”

틀린 말은 아니다.

지금 군천악의 경지는 말 그대로 인간의 한계를 깨부순 인외의 경지.

과거 천무백이 창천검신으로서 정점에 올랐던 그 경지와 거의 동수를 이루고 있었다.

천무백은 인정했다.

“많이 노력하긴 했네. 때론 좌절감과 열등감이 성장의 거름이 되는 법이지.”

하나 천무백은 냉소했다.

“지금까지 창천검신으로만 싸웠다.”

천무백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조용히 퍼졌다.

“그러니 네가 창천검신과 똑같은 수준에 올랐다고 자부해도 좋다. 훌륭하다. 한 사람의 삶으로서 그 경지에 오른 건, 정말 축하할 일이거든.”

천무백은 그 점만큼은 존중했다. 하지만 거기까지다.

“이젠 창천검신이 아닌, 천무백으로 싸워 주마.”

전생의 창천검신이 아니라, 현생의 천무백으로서.

그의 전신이 서서히 끓어올랐다.

전신의 모든 공력이 거칠게 울부짖으며 주위를 공명했다.

그간의 무수한 깨달음과 기연으로 만들어진 천무백의 일월기가 철신고검을 불태우듯이 화려하게 타올랐다.

무언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군천악이 얼굴을 굳혔다.

이미 단단히 자신감이 붙었다.

평생 두려워하던, 그리고 증오하던 일생일대의 적수를 뛰어넘었음을 두 눈으로, 두 손으로 확인하지 않았는가.

그것도 창천검신의 후인 따위가 아니라, 진짜 창천검신 본인에게.

‘그리고, 끝내 내 손으로 벤다.’

평생을 패배자로 살게 했던 적수를 지금 벤다.

우우우우웅!

군천악의 검이 강렬하게 휘몰아쳤다. 어마어마한 마기가 집약되고, 단숨에 발출된다. 천무백의 철신고검이 느릿하게 부딪쳤다.

“……!”

하나, 놀랍게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강렬한 충격파도, 강기와 강기가 부딪쳐 땅이 뒤집히지도, 거센 폭발도 없었다.

아무것도 없었다.

군천악이 힘껏 휘둘렀던 마기는 흔적조차 없이 사라졌다.

반면 천무백의 일월기는 타올랐다. 아니, 더 맹렬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마치 군천악의 마기를 연료삼아 더 타오르듯이.

그 순간, 군천악은 놀랍게도 과거를 떠올렸다.

창천검신과 검을 맞댔던 기억을.

그때의 본능이 되살아나 미친 듯이 비명을 내질렀다. 매번 그의 목숨을 살려 준 특유의 감각이 속삭였다.

‘도망쳐야 한다.’

군천악의 몸이 훌쩍 날아올랐다.

이 순간, 군천악은 과거의 공포에 사로잡혔다. 자칫하다간 목이 잘릴지도 모른다는 익숙한 감각이 사십 년 만에 되살아나 그의 본능을 마구 쑤셨다.

하나 애석하게도 군천악은 벗어나지 못했다.

훌쩍 벗어나 단숨에 산봉우리를 하나 넘었다고 생각하는 순간.

“새끼, 옛날 버릇 나오지? 툭하면 도망치는 버릇 아직도 못 고쳤냐?”

어느새 천무백의 코앞에 있었다.

군천악의 몸이 싸늘해졌다.

천무백이 그런 반응에 내심 즐거운 미소를 지었다.

“설마 내가 설치한 진법이 고작 마인들 환상이나 보여 주는 걸로 보였어?”

“……!”

“매번 놓쳤지. 죽일 수 있는 기회에서, 도망은 더럽게 잘 쳤지. 그래서 널 죽이지 못했고, 마도는 기사회생했지. 그런 경험을 했는데, 내가 설마 그냥 내버려 둘 줄 알고?”

몽혼마라광진은 단순한 환상과 감각을 혼란시키는 진법이 아니다.

“여긴 감옥이다.”

“하…….”

“그리고 무덤이기도 하지.”

군천악의 동공이 흔들렸다.

“너와 네가 데리고 있는 모든 마인이 죽을 무덤. 단 한 명도 빠져나갈 수 없는 감옥. 이 안에 들어온 순간, 너희 모두 죽는다.”

누구도 도망칠 수 없다. 이 진의 포석이 바로 천무백 본인이었으니까.

결론은 간단하다.

천무백이 죽으면 이 감옥은 열린다. 일부러 기다렸다. 천마와 그를 따르는 모든 마인이 끝내 다 모여들기를.

전부 모였을 때 진법을 가동했다.

단 하나도 남기지 않고 멸하기 위해서. 이들 전부를 멸한다면, 이제 이 세상에는 천무백이 살려 놓은 마도만이 남지 않겠는가.

이 모든 게 천무백의 계획임을 깨달은 군천악의 몸이 잘게 떨렸다.

천무백이 검을 겨눴다.

“나는 수없이 살아왔다. 삼재검성으로서, 패천검마로서, 암천검제로서, 산동검호로서, 검왕으로서,”

숱한 삶을 살았다.

모든 삶에서 투쟁했고 싸웠고 검을 휘둘렀다.

“삼재검성으로서 무림을 열었다.”

검이 서서히 진동했다.

“패천검마로서 천마를 벌하고 마의 정점에 올랐다.”

검신에서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듯 열기가 타올랐다.

“암천검제로서 마도를 손바닥에 올려놓고 우롱했고.”

검끝이 새하얗게 반짝였다.

“검왕으로서 한평생 검을 휘둘렀으며.”

천무백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맺혔다.

“연이어 거듭되는 지독한 운명에서, 거듭되는 전생에 이어지는 운명을 잊지 않았다. 오로지 하나, 내 뜻, 검의 끝에 닿고자하는 염원으로서 살았다. 네가 봤던 창천검신이 그런 사람이다. 오로지 검극만을 바라온 그냥 검에 미친 귀신. 그게 나다.”

천무백의 느릿한 목소리가 또렷이 울려 퍼졌다. 강렬한 웅변도, 사자후도 아니다. 그저 말했으나, 가장 또렷하게 들렸다.

그 모든 전생, 모든 삶, 모든 역사, 모든 순간순간을 통틀어.

천하제일을 논했고, 고금제일이라 자부했으나.

그건 잘못된 짓이었다.

“하지만 지금 본좌의 이름은 천무백이다.”

처억!

철신고검이 거친 금속음을 내며 울었다.

천무백의 무심한 시선이 군천악을 오시했다.

“그 어느 순간보다, 나는 가장 강하다.”

지금이 고금제일(古今第一). 모든 전생을 통틀어 천무백은 지금 가장 강했다.

그러니 이전까지 논했던 고금제일은 모두 거짓이고, 실언이다.

고금제일인(古今第一人) 천무백.

검사로서 닿을 수 있는, 보이지도 않던 칼날 맨 끝.

지금이야 말로 단언한다.

“나는 지금, 그 끝에 이르렀다.”

검극(劍極).

천무백의 검이 어둠을 베었다. 군천악의 머리가 허공에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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