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신재생 171화>
171. 복수 안 할 거요?
염광채주의 선택은 당연했다.
지금 자존심 내세울 때가 아니다. 상대는 부채주를 벌레 죽이듯이 짓밟아 죽인 정체불명의 고수.
옆엔 혼자선 감히 대적을 생각할 수 없는 왕전유가 있다.
녹림도들은 단숨에 일변해 버린 상황에 급격하게 무너지고 있지 않은가.
명백하다.
이건 패배다.
자존심 살린답시고 싸우다간, 계획과 달리 여기서 모두 죽을지도 모른다.
‘하왕의 신병은커녕, 내가 죽게 생겼구나!’
눈앞이 깜깜해졌다.
손실을 감수하지 않은 건 아니다.
왕전유의 신병을 확보하기만 하면야 손실쯤은 감수할 수 있다.
이대로는 무의미한 손실이다.
지금 데려온 수하들은 염광채의 직속 부하들.
이들을 잃으면 추후 녹림에서 2인자의 자리를 지키기는 어려울 터. 아무리 거력왕과 사이가 좋다고 한들, 이쪽 세계가 워낙 살벌해야지.
그러니 염광채주의 결정은 정해져 있었다.
“항복입니다! 하왕 선배, 살려 주십시오!”
쨍그랑!
염광채주는 도를 내팽개치고 냅다 엎드렸다.
그것으로 상황은 끝이었다.
수장이 무릎을 꿇었는데, 수하들이 어쩌겠는가.
하물며 하왕은 멀쩡하고, 곁엔 정체를 알 수 없는 고수도 있지 않은가.
어디 한 명뿐인가.
미친 듯이 칼을 찔러 적어도 십수 명은 죽인 능허부터, 저 뒤에서 흑도패를 지키는 덩치 큰 사내, 곡지흠까지.
새삼 피해를 확인한 염광채주의 등에 식은땀이 한 줄기 흘러내렸다.
왕전유는 허탈한 웃음을 지으며 무릎 꿇은 염광채주를 바라봤다.
“이 개같은 자식이…… 기세 좋게 덤벼 놓고 지금 목숨을 구걸하겠다고?”
흉악하게 일그러진 얼굴에서 흉흉한 살의가 쏟아졌다.
당장이라도 대도로 목을 벨 기세였다.
하나 왕전유는 그러지 않고 고개를 돌렸다. 때마침 능허가 그 자리에 도착했다.
왕전유의 차가운 시선이 능허에게 닿았다.
“날 속였겠다?”
“어, 그것이…… 어.”
순간 자신에게 쏟아지는 냉막한 눈빛에 능허는 적잖이 당황했다.
그는 원망의 눈빛으로 천무백을 흘깃 바라봤지만, 가면 아래 숨겨진 표정을 어찌 알 수 있겠나.
다만 능허는 짐작했다.
‘실실 웃고 있겠지. 네가 알아서 잘 해결하라면서.’
방금 전까지 녹림도를 죽일 땐, 어떤 일이든 시키는 대로 다 처리해 내고 말겠다는 결심이 있었지만.
글쎄.
지금은 또 은근 억울하네.
‘아니, 역할극은 지가 제안해 놓고. 정작 재미없으니까 바로 엎어 버리는 거야 뭐야?’
저만한 무력을 보여 줬으니, 누가 일개 흑도의 호위무사로 여기겠는가.
지금까지 자신에게 보여 준 호의는 온데간데없이, 왕전유의 시선은 차갑다 못해 살벌했다.
여차하면 대도로 대뜸 목을 치겠다는 듯 흉흉한 기색이다.
능허는 비상하게 머리를 굴렸지만, 아무리 임기응변이 좋은 능허라도 이런 상황을 어떻게 타개한단 말인가. 그가 원망의 시선으로 천무백을 흘깃거릴 때.
왕전유의 화가 난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어째서 흑심방주인 걸 숨기고, 호위무사로 분하였는가?”
“……?”
능허의 표정이 묘해졌다.
왕전유가 말을 한 건 천무백을 향해서였으니까.
그제야 능허는 왕전유가 무슨 오해를 하고 있는지 깨달았다.
‘주군이 방주인데, 정체를 숨긴 거로 생각하고 있구나.’
곰곰이 생각해 보니.
은근히 천무백을 두고 주위 사람들이 제멋대로 생각하는 경향이 간혹 있지 않았던가.
능허가 생각에 잠겨 일순 말을 잃자, 왕전유는 기세등등한 표정으로 콧방귀를 꼈다.
“흥. 정체를 숨기고 날 염탐하려고 했나? 그대를 흑회로 초청한 것도 태룡방이었지. 태룡방주가 나에게 접근해서 감시라도 시켰나보지?”
“……!”
어째서 그런 오해를 하게 됐는지 능허는 일견 이해가 갔다.
아무 대답도 없자 왕전유가 고개를 돌려 다시 능허를 쳐다봤다. 그의 목소리엔 다소 안타까움이 살짝 깃들어있었다. 진실로 실망했기에 나오는 반응이었다.
“날 속이다니. 실망했다. 그래도 제법 마음에 들었거늘…….”
“속인 게 아니오.”
천무백의 목소리가 조용히 울려 퍼졌다.
“속인 게 아니다?”
“내가 방주는 맞소.”
“허! 모습을 감췄던 이유가 그럼 뭣이냐. 호위무사로 분하면 아무래도 관심이 덜하니까 부담 없으니 그런 거 아니더냐?”
어쨌거나 속인 건 맞기에, 같이 싸웠던 수적들은 어느새 흉흉한 눈빛으로 칼을 겨누고 있었다.
천무백은 어깨를 으쓱였다.
“내가 왜 그쪽을 감시하오?”
“뭐?”
“그쪽이 뭐 얼마나 대단하다고, 모습까지 감추면서 감시를 해?”
“이익……!”
“고작 산적 나부랭이들한테 잡혀갈 뻔했던 양반이, 구해 줬더니 부끄러움도 모른 채 나대는 게 과연 뻔뻔한 수적답구려.”
“……!”
연이은 독설에 주위는 정적에 잠겼다.
차마 분노마저 토해낼 수 없을 정도로 어처구니없는 독설이었으니까.
다만 천무백의 말은 일견 옳았다.
“수장 목숨 구하겠다고 싸우는 수하들마저 다 죽을 뻔하게 해 놓고, 뭐 그리 잘났소?”
“…….”
그제야 왕전유는 시선을 돌려 쓰러진 수하들의 시신을 바라봤다.
제법 많은 수가 싸늘한 시신이 되어 있었다.
왕전유의 얼굴에 괴로운 기색이 떠올랐다. 침중한 물음이 흘러나왔다.
“하면 어째서냐. 어째서 방주인 걸 숨겼지? 네가 방주라고 해 봤자 내가 널 죽일 이유도 없는데 말이야.”
“감시는 아니고, 그대가 얼마나 큰 사람인지 알아보려고.”
“큰 사람?”
“가령 태룡방주를 몰아내 흑회를 차지할 만한 인물인지.”
“……!”
이번엔 왕전유뿐만이 아니다. 바닥에 엎드린 채 어떤 상황인지 좀처럼 짐작하지 못하고 있던 염광채주마저 화들짝 놀랐다.
흑회를 차지한다니?
“그 무슨…….”
“모든 흑도방파가 태룡방주에게 절대복종하는 건 아니오. 흑도를 통합해 절대복종을 요구하는 태룡방주에게 불만을 가지는 흑도들이 제법 있지.”
순간 듣고만 있던 염광채주의 얼굴이 묘하게 바뀌었다.
실제로 그랬으니까.
녹림이 그런 흑도들을 포섭하고 있지 않은가.
때마침 왕전유가 그런 염광채주의 표정 변화를 목격했다.
“너, 뭘 알고 있느냐!”
“그, 맞습니다. 흑도방파 중에도 태룡방을 싫어하는 이들이 있고, 거력왕께서 이들을 품에 끌어들이고 있지요. 하여 하왕 선배 역시 같이 협력하여…….”
“닥쳐라! 이 같잖은 새끼가!”
어쭙잖게 협력 운운하자 왕전유가 대노했다. 염광채주가 자라목이 되어 급히 고개를 숙였다.
다시 천무백을 향해 돌아간 눈빛은 비교적 아까보단 누그러졌다.
천무백의 말이 영 틀린 말은 아니었으니까.
“그러니까, 네놈은 태룡방주에 반기를 들고 싶고, 내가 그 적절한 인물인지 판단하려고 정체를 감췄다?”
“아무래도 내가 방주인 걸 알면, 그쪽도 유심히 날 살필 테고, 그러면 좀 불편하니까.”
“……나보고 그 말을 믿으란 말인가? 태룡방주를 무너뜨리고 흑회를 차지해?”
“어차피 흑회는 자연스러운 흐름이오. 이미 전 중원의 흑도가 모이고 있으니까. 연합체의 탄생은 당연한 일이니. 나간 놈에겐 태룡방주가 왕이 되는 것만큼 끔찍한 건 없소. 지금도 흑도의 큰형님 자처하며 온갖 간섭을 다 하는데, 아예 명분에 완장까지 줘 버리면?”
“…….”
“그럴 바엔 뒷골목의 일까진 관심 없는 수적이 낫지. 세력도 충분하고, 명성도 높고.”
왕전유의 눈빛이 묘해졌다.
곰곰이 생각하면 자신을 고평가하는 말이 아닌가.
태룡방주를 대신해 흑회를 차지할 만한 인물이라는 판단이니까.
‘그렇다면야…….’
왕전유라고 욕심이 없겠는가.
장강을 손아귀에 넣고, 모든 것에 만족할 줄 알았지만, 야심이란 건 절대 그렇지 않다.
야망은 만족을 모른다.
왕전유라고 중원 흑도를 아우르는 집단의 우두머리가 못 될 이유가 무엇인가.
천무백이 은근히 그 점을 자극하자, 왕전유의 눈에 묘한 열기가 일렁였다.
‘뭐, 괜찮군.’
천무백이 속으로 내심 웃었다.
그의 야망을 자극해 태룡방주를 적대하게 만드는 것만으로도 천무백으로선 좋은 결과다.
“결국, 넌 날 속여서 날 이용할 생각이었군.”
“뭐. 틀린 말은 아니다만.”
“만일 내가 네 마음에 들었다면, 태룡방주를 몰아낼 만한 인물이었다면 어떻게 하려고 했느냐?”
천무백은 속으로 실소했다.
그 말에 담긴 욕망을 읽었으니까.
“있는 힘껏 다해 도와줄 생각이었소. 나야 태룡방주가 아니면 그만이니까.”
“…….”
그래도 왕전유는 끝까지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다. 물론 많이 희석됐긴 했지만.
천무백은 웃으며 쐐기를 박았다.
“뭐, 태룡방주 목이라도 베어 드리리까?”
“……!”
왕전유의 눈빛이 흔들렸다.
“물론 허세지. 내가 그럴 수 있었다면 진즉 그랬을 테니까. 하나 그만한 각오는 하고 있소.”
“…….”
한참 노려보던 왕전유는 이내 시선을 거두고 생각에 잠겼다.
고민하는 기색이 역력했으나, 천무백은 그가 어떤 답을 내놓을지 믿어 의심치 않았다.
흑회의 우두머리를 차지하기 위한 투쟁.
천무백은 그걸 적당히 충동질해서, 녹림, 태룡방, 장강으로 대표되는 삼분지계를 만들 속셈이었다.
그러려면 비교적 세가 약한 왕전유를 도와줄 필요가 있었고.
‘뭐, 태룡방이 혈귀곡과 연수가 확실하다면, 아예 왕전유와 거력왕을 충동질해서 죽여 버리는 것도 나쁘지 않아. 그리고 왕전유와 거력왕 둘이 남은 흑도세력을 차지하겠다고 서로 싸우다 양패구상하는 꼴도 괜찮고.’
얼마 지나지 않아 왕전유는 답했다.
그의 눈이 불길로 활활 타올랐다.
“어땠나?”
“……?”
“호위무사로 정체까지 감추면서, 날 관찰한 결과가 어떤가.”
“나쁘지 않소. 당신을 구하겠다고 녹림에 미친 듯이 달려드는 수적들을 보아하니, 인망도 높을 테고. 땅 위라면 모를까 적어도 장강을 장악한 지배력도 대단하고.”
“그 말은…….”
“기세만 탄다면야 흑회를 장악하지 못할 게 뭐가 있겠소.”
왕전유의 입꼬리가 실룩였다.
생각보다 단순한 위인이었다. 멧돼지 같은 인상이 괜히 그런 게 아니었다. 비교적 맹장에 가까운 유형이다. 싸움도 잘하고, 수하에게 인망도 높고.
“그렇다면, 자네는 어찌할 셈인가.”
네놈에서 자네로 호칭이 바뀌었다. 답이 나왔다.
천무백은 고개를 끄덕이며 포권을 취했다.
“흑심방은 하왕 선배를 도울 것이오. 오로지 태룡방을 몰아내기만 한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소.”
“과연 그것만이냐?”
“물론…… 태룡방이 기존에 가졌던 이권을 소화할 수 있을 만큼만 나눠 주신다면야.”
천무백이 그리 말하자 왕전유는 그제야 껄껄 웃었다.
일부러 적당히 탐욕스러운 모습을 보인 것이다.
만일 태룡방의 몰락만 원했다면, 왕전유는 심중에 의심을 남겼으리라.
적어도 흑도라면 이익 앞에서 때론 부나방같은 존재가 되는 법이니까.
어느 정도의 욕심을 읽은 왕전유는 오히려 그제야 의심을 덜어냈다.
“좋다. 그럼 나와 같이 흑회로 가자.”
“그 전에, 들릴 데가 있소.”
“들릴 곳?”
천무백의 시선이 염광채주에게 향했다.
그 시선을 따라간 왕전유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자네 목적은 태룡방이 아니던가?”
“태룡방은 강하지요. 녹림과 힘을 합칠 수 있으면 합쳐야 하지.”
“힘을 합쳐?”
“흑회의 우두머리를 차지하려면, 나중엔 녹림마저 무릎 꿇려야 하나. 이것 역시 쉽진 않소. 최소한 상대적 우위를 차지하여 연합체의 우두머리가 되는 게 최선이지. 가령 당신이 거력왕을 동생으로 삼거나 하면 말이오.”
“…….”
“그러니, 협력제안 하러 갑시다.”
“협력제안이라니…….”
왕전유가 못마땅한 기색으로 망설였다.
“아, 내가 말한 협력제안은, 여기 염광채주가 우리에게 제안했던 협력과 같은 의미요.”
“……?”
순간 주위의 공기가 바뀌었다. 천무백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떠올랐다.
“먼저 공격했는데, 그대로 있을 거요? 복수 안 할 거요?”
그 말뜻을 알아들은 왕전유의 얼굴이 경악에 물들었다.
무슨 뜻인지 이해했으니까. 비단 그뿐만 아니라 주위에 몰려있던 수적들마저 이해할 수 있는 말이었다.
하나 경악과 함께 동시에 묘한 열기가 떠오르는 걸, 천무백은 놓치지 않았다. 그는 고삐를 강하게 잡아당겼다.
“당한 만큼 갚아 준다. 은혜는 두 배로, 원한은 열 배로, 백 배로. 이게 수적들의 신념 아닌가?”
왕전유의 입가에 슬며시 웃음이 걸렸다.
왠지, 마음에 드는 말이었다.
“거력왕 잡읍시다.”
협력제안 하러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