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신재생 172화>
172. 평화주의자라서.
천무백이 이후 한 일은 간단했다.
사로잡은 녹림도의 점혈을 짚어 내공을 봉했다.
사실 점혈법 자체가 강호에서 보편적인 것이지만,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혈도에 해박한 지식이 필수니까.
더구나 혈자리에 어느 정도의 힘이 가해지느냐에 따라 점혈은커녕 사망에 이를지도 모른다. 상당한 경험과 감각이 필수다.
그러니 천무백이 녹림도 전원의 내공을 봉(封)해 버린 건 놀라운 일이었다.
“······대체 한낱 흑도방파의 방주가 어찌.”
지켜보던 왕전유도 혀를 내둘렀다.
이 정도면 자신보다 겨우 한 치 아래로 보일 정도의 능숙함이 아닌가.
‘이런 놈이 고작 작은 흑도방파 하나를 운영하고 있다고?’
불쑥 의문이 떠오르고 의심이 드는 건 당연했다.
하지만 의심은 곧 접을 수밖에 없었다.
‘하오문도 놈들이 마음에 들지 않기야 하지만, 이쪽 정보력에선 틀릴 일이 없지. 특히 흑도들에 관한 정보에서야.’
하오문과 흑도가 견원지간인 건 누구나 아는 일 아닌가.
따라서 역설적으로 신뢰할 수 있다.
서로를 껄끄럽고, 적으로 여기는 만큼 누구보다 방대하고, 자세하게 알고 있으니까.
제법 비싼 잔액을 치르고 흑심방에 관한 정보를 구했다.
‘부방주의 이름이 화웅이란 거 보니, 애당초 저 친군 부방주였군. 그래서 그렇게 자연스럽게 밑에 애들을 잘 지휘했던 거였어.’
다만 방주가 문제였다.
‘모든 실체가 안개처럼 흐릿하다는 거지.’
정확한 정보가 없었다. 하오문에서도 흑심방주에 대한 정보는 없다고 고개를 저었다. 더 많은 금액을 제시했는데도.
돈을 더 제시해도 하오문에서 모른다는 건, 정말 알 길이 없다는 거다.
‘흐음. 뭔가 있는 놈인데. 완전히 신뢰하긴 힘드나······.’
왜인지는 모르나 태룡방주에 대한 적개심이 있는 건 분명하다.
그리고 지금은 서로의 목적이 일치하지 않는가.
왕전유는 일단 천무백과 함께 하기로 했다.
물론 그로서는 꿈에도 모를 것이다. 하오문에서 일부러 조작된 정보를 내주고 진실을 감췄음을. 그것이 하오문주 곡지흠의 명이었고, 정작 곡지흠은 천무백의 부탁을 위장한 명령에 따랐다는 사실을.
왕전유의 묘한 시선이 수하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천무백에게 향했다.
“막내야.”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곡지흠은 흠칫했다.
어째 천무백의 눈빛이 심상치 않다.
곡지흠의 머릿속이 아득해졌다.
‘들켰나?’
너무 힘을 많이 드러냈나 싶기도 했다.
‘적당히 조절해야 했는데.’
안 갈구겠다는 능허의 말에 저도 모르게 너무 의욕적으로 싸웠다.
천무백이라면 자신이 휘두른 초식을 보고 눈치챘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징검다리를 건너고 있어서 못 봤을 줄 알았는데······.
부랴부랴 천무백에게 다가간 곡지흠은 최대한 내기를 감췄다.
“제법 칼 좀 쓰더라?”
“그······ 그것이 한때 낭인 생활을 했던지라.”
“그래. 그럼 네가 녹림도 포로들 잘 관리하고 있어라.”
“제가 말입니까?”
곡지흠의 눈이 커졌다. 천무백이 별안간 손가락 세 개를 펼쳤다.
“······?”
“네가 서열 3위다.”
“엑?”
“수봉이나 밑에 애들 데리고 애들 잘 잡고, 거력왕이든 녹림이든, 관련된 정보는 싹 다 캐내고 있어.”
곡지흠의 눈이 번뜩였다.
순간 이게 좋은 기회라는 생각이 번쩍 들었다. 녹림의 2인자인 염광채주. 그리고 직계 수하들이 아닌가.
이들을 조금만 족쳐도 녹림 내부의 은밀한 정보를 충분히 얻을 수 있다.
당장 하오문에게도 좋은 정보가 아닌가.
하나 곡지흠은 마음속에 차오르는 이 고양감도 같은 기분이 무엇인지 뒤늦게 깨달았다. 좋은 기회를 직면한 기쁨이 아니다.
과거 하오문의 밑바닥에서부터 차근차근 올라갔을 때의 짜릿함.
좀 더 높은 직위를 얻었을 때의 기분.
그래, 승진할 때의 쾌감이었다.
‘내가?’
순간적으로 머릿속에 드는 감정은 자괴감이었다.
‘하오문주인 내가, 고작 흑도방파의 삼인자가 됐다고······ 녹림에 관한 정보를 얻게 됐다는 것보다 더 좋아해?’
곡지흠의 얼굴이 괴상하게 일그러졌다.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슬픔과 자괴감이 물밀 듯이 밀려올 때.
곁에 있던 능허가 어깨를 툭 쳤다.
“오, 축하한다. 막내에서 3위라니. 열심히 해라.”
“······.”
“어쭈? 대답 안 해? 새끼. 이제 바로 내 밑 됐다고 벌써 헤벌쭉하고 대드냐? 이 자식아. 이 바닥 겸손해야 한다.”
“······네.”
……안 갈군다고 하지 않았나?
* * *
천향호(天香湖).
중원의 유명한 절경에 비하면 손색이 있고, 규모도 작지만 제법 풍류를 즐길만한 꽤 아름다운 호수였다.
천무백은 염광채주를 반쯤 겁박해 거력왕이 천향호를 끼고 있는 기루에서 머무른다는 걸 파악했다.
“때마침 거력왕이 뱃놀이를 즐긴다 하니, 그때를 노립시다.”
“뱃놀이라. 산에서만 빌어먹고 사는 놈이니, 뱃놀이에 아주 눈이 뒤집힌 모양이다.”
왕전유가 껄껄 웃었다.
천무백이 거력왕을 치자고 했을 때, 승낙은 했지만 사실 걱정도 들었다.
수적들의 숫자는 많이 줄어들었고, 녹림도는 많지 않은가.
더구나 녹림은 부족한 숫자만큼 언제든 충원할 수 있다.
당장 근처 야산을 뒤지면 녹림 산채가 몇 개쯤은 튀어나오니까.
한데 뱃놀이를 즐길 때 기습하면 문제없다.
배 위에서 산적은 수적을 이길 수 없다. 엄청난 무력의 격차가 아니면 모를까.
왕전유 자신도 거력왕에게 손색이 있으리라 내심 여겼는데, 배 위에서라면 대등하게 아니, 이길 수 있으리라 여겼다.
진다?
그건 예상조차 하지 않는 일이다.
‘적어도 이놈이 곁에서 협공해 준다면야.’
자신보다 한 수 정도 아래로 보이는 강자.
적절한 지원만 해 준다면야 거력왕을 칠 수 있다.
물론 거력왕을 죽일 생각까지는 하지 않았다.
‘녹림과 전쟁을 할 필요도 없고, 우리 둘이 싸워서 세력이 쪼개지면 태룡방주만 좋은 일이니.’
그래서 협력을 제안할 것이다.
저들이 염광채주를 보내서 했던 것처럼.
먼저 기선제압 후에 원하는 흐름대로 협력하리라. 장강이 녹림보다 좀 더 우월함을 가진 그런 관계.
왕전유가 눈을 빛냈다.
“그럼 가 볼까.”
“갑시다. 산왕(山王)을 잡으러.”
달도 구름 속에 가려져 달빛 한 점 없는 밤이건만, 천향호는 낮처럼 밝았다.
그리 넓지도 않은 호수다.
가령 동정호를 떠올리면, 감히 비교조차 할 수 없다. 동정호 옆에 두면 연못에나 불과할까.
물론 그건 동정호가 그만큼 크다는 뜻이지만, 천향호는 중원 전체에 이름이 날 만한 명승지가 아니었다.
그저 이쪽 동네에서 제법 절경이라고 소문이 난 것에 불과했다.
하나 그것만으로도 족했다.
여기저기 떠오른 연등은 운치를 더해 줬고, 호수 주위에 꽃이 흐드러지게 펴져 있어 은은한 향이 수면 위로 안개처럼 자욱하게 퍼졌다.
괜히 천향(天香)이란 이름이 붙인 게 아니었다.
“거 떠들썩하게 노는구나.”
작은 호수라 그런가.
조그만 소리도 크게 들리는데, 이 녹림도들의 목소리는 유난히 쩌렁쩌렁 울렸다.
여러 배가 떠올라 있었는데, 그중에 가장 큰 배가 눈에 띄었다.
“더럽게 크네요. 구척장신이란 말이 거짓인 줄 알았더니, 나 살면서 저렇게 큰 인간 처음 봅니다.”
거인(巨人).
말 그대로였다.
“거력왕이 아니라 거인왕으로 불려야겠구나.”
천무백 역시 감탄할 정도로 키가 무척 컸다. 왕전유와 옆에 같이 두면 꽤 볼 만하리라. 적어도 둘 사이의 신장은 두 척 가까이는 나 보였으니까.
목표를 확인한 능허가 물었다.
“우린…… 안갑니까?”
천무백은 대답하지 않고 별안간 낚싯대를 드리웠다.
“오늘 저녁은 생선구이가 어떻냐.”
“……천하태평이십니다? 지금 우리 수적 친구들이 열심히 자맥질하고 있는데요.”
“내버려 둬라.”
“네?”
능허의 표정이 괴상하게 일그러졌다. 천무백과 능허는 조각배에 올랐지만, 나머지 수적들은 호수 밑으로 잠수하여 천천히 거력왕에게 접근 중이었다.
그 모습이 얼마나 은밀한지, 능허는 단 조금의 기척도 못 느꼈다.
정말 물속의 물고기 같았으니까.
하물며 노느라 바쁜 거력왕도 웬만해선 눈치채지 못하리라. 어디 평범한 수적들인가. 장강을 지배하는 수적 중에서도 정예가 아니던가. 평생을 물과 함께 살아온 거북이들 말이다.
“그러니까 내버려 둬.”
“같이 안 싸웁니까?”
그러자 천무백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내가 왜?”
“……거력왕 잡자면서요?”
그 황당한 반응에 능허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능허야, 세상에서 가장 재밌는 게 뭔지 아냐.”
“뭡니까.”
“싸움구경이다.”
“…….”
“술 한잔 기울이자고. 언제 수적들의 왕과 산적들의 왕이 싸우는 꼴을 보겠느냐.”
“…….”
능허는 입을 다물었다.
어째, 저 자식의 혓바닥에 속아 거력왕을 공격하러 가고 있는 왕전유가 안타까웠다.
“잘 안 보인다. 좀 가까이 가자.”
“허허허…… 예예.”
거력왕의 배가 좀 더 가까이 보일 때쯤.
은밀하게 접근했던 수적들이 행동을 개시했다.
콰앙! 쾅! 콰앙!
갑자기 별안간 녹림들이 타고 있는 배들이 쩍 쪼개지며 수면 아래로 가라앉기 시작했다.
“으아악! 물 들어온다!”
“구멍 막아! 구멍! 판자 대!”
구멍이 뻥뻥 뚫리고 배가 가라앉자 녹림들은 당황했다. 물을 가까이하지 않은 사람에게, 갑자기 허리춤 이상까지 물이 차오르면 당황을 넘어 공포를 느끼기 마련이다.
평생을 산에서 산적질을 해 댄 녹림도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다들 한가락하는 무공을 익혔기에, 물에 빠져 허우적대는 사람은 없었다.
다만, 수적들의 공격이 개시되기 전까지는.
서걱! 푸욱!
가라앉은 배의 난간이나 판자 위에서 간신히 버티고 있던 산적들의 발목이 싹둑 잘려나갔다.
물속에서 불쑥 튀어나온 갈고리가 마치 농작물을 수확하는 것처럼 잘라갔다.
“끄아악!”
“장강의 형제들이여! 모두 죽여라!”
몇몇은 배를 흔들어 버티고 있던 녹림을 호수에 빠뜨렸다.
물이 순간적으로 눈코입에 들어가면 제정신을 차리기 어렵다. 반면 수적들은 물속에서 움직임의 제한이 하나도 없는 족속들.
물에 빠진 녹림들은 온몸에 구멍이 낭자 되며 죽어갔다.
“이놈드으으으을!”
순식간에 벌어지는 아비규환.
상황을 파악한 거력왕이 사자후를 쩌렁쩌렁 내지르며 튀어나왔다.
꽈아앙!
그의 대검에서 벼락과도 같은 강기가 발출됐다.
강기는 수면 위를 쩍 갈랐고, 그사이에 있던 수적들을 문자 그대로 찢어 버렸다.
“어떤 개자식이, 감히 본좌를 습격하느냐!”
“나다. 이 새끼야.”
거력왕의 밑에서 배 갑판을 꿰뚫고 왕전유가 솟구치며 도를 휘둘렀다.
까가가가강!
왕전유와 거력왕이 거칠게 얽혔다. 수적들이 분분히 배 위에 올랐다. 거력왕이 타고 있던 배는 최측근들, 다 간부들이었기에 살벌한 싸움이 벌어졌다.
어느새 천무백의 배가 그들과 가까워졌다.
“달밤에 고생 많네. 모두 힘내시오. 여기서 죽으면 시체가 퉁퉁 불어서 꼴이 말 같지 않을 테니, 모두 조심하시오.”
거력왕과 거칠게 싸우던 왕전유가 눈을 부릅뜨며 소리쳤다.
“너…… 뭐 해! 이 개…… 새끼!”
파악!
그 순간 거력왕의 검이 왕전유의 허벅지를 벴다.
천무백은 진심으로 안타깝다는 듯 한탄을 내쉬었다.
“아이고야. 그거 좀 아프겠소. 좀 깊게 베였네?”
그러자 싸우느라 바빴던 수적들이 배신감에 치를 떨며 소리를 질렀다.
“이 개새끼야! 같이 싸우자면서!”
“아, 이것만 다 마시고.”
수적들은 입을 쩍 벌렸다. 그 대단한 왕전유도 천무백의 언행에 치를 떨었다.
그렇다고 거력왕을 비롯한 녹림들이 천무백을 호의적으로 여긴 건 아니다.
“저 개새끼는 너희 물고기 친구냐?”
어쨌거나 피를 흘리며 싸우고 있는데, 옆에서 태평하게 술을 마시고 있지 않은가.
거기에 천무백의 폭언이 쏟아지자 거력왕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뭔 개나 소나 나보고 다 개새끼래. 어이. 거력왕인지 거인왕인지, 개왕인지. 니가 더 개같이 생겼어. 지나가는 동네 사람들 다 불러봐라. 맹인도 너보고 개처럼 생겼다 할 거다.”
“……!”
거력왕의 입도 쩍 벌어졌다. 얼마나 황당한지 순간적으로 뻗어 나간 검이 일순 멈칫할 정도였다. 그 찰나를 놓치지 않고 왕전유의 대도가 발등을 찍었다.
콰득!
“으으으윽! 저 개새끼! 너는 이 자라 새끼들 죽이고 반드시 죽인다!”
“잘~ 싸운다~ 잘 싸워~”
아랑곳하지 않고 연신 손뼉을 쳐대며 응원하는 천무백의 모습에 양측은 모두 말을 잃었다.
그렇다고 한번 부딪친 싸움이 끝나지는 않았고, 오히려 머리끝까지 차오르는 분노를 상대에게 토해냈다.
그렇게 서로 살벌한 싸움이 한참 이어졌다. 어느새 왕전유, 거력왕 둘 다 피투성이가 되며 비틀거렸다. 치열한 싸움이었다.
“싸움 구경도 다 했네.”
천무백이 그리 중얼거리곤 별안간 허공으로 솟구쳤다.
쿠웅!
천무백이 있던 작은 조각배가 당장이라도 무너질 듯 크게 요동쳤다. 천무백은 어마어마한 도약력으로 단번에 혈투가 벌어지는 배 위로 뚝 떨어졌다.
까가가가가강!
“……!”
“……!”
천무백의 새하얀 칼날이 왕전유와 거력왕 둘 사이를 갈랐다.
어마어마한 충격파에 왕전유도, 거력왕도 식겁하며 뒤로 두 걸음 물러났다.
사이로 천무백이 오연하게 내려앉았다.
“자. 싸움은 좋지 않은 거요.”
“……뭐?”
“거, 같은 흑도끼리 싸우면 쓰나. 내 싸움을 말리러 온 중재자외다.”
“뭐 이런 개 같은…….”
하나 거력왕도, 왕전유도 황당은 금치 못할망정, 칼을 겨눌 순 없었다. 이미 둘은 지칠 대로 지쳤고 피를 너무 많이 흘렸다. 그리고 단숨에 둘 사이를 갈라 버린 천무백에게서 흘러나오는 기세는 만만치 않았으니까.
천무백이 싱긋 웃었다.
“내가 평화주의자라서 말이오.”
황당한 시선이 쏟아졌다.
“싸움질하는 거 보면 말려야 직성이 풀리거든.”
그렇고말고.
그 광경을 멀리서 지켜보던 능허가 허탈하게 웃었다.
“지가 싸우게 만들어 놓곤, 지가 말리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