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신재생 170화>
170. 징검다리 건너기
싸움에는 기세가 존재한다. 누가 우세하고, 어디가 열세인지.
대체로 무인은 기세에 둘러싸여 휩쓸린다.
하나 때로는 분위기를 주도하고 기세를 이용하는 이가 있는데, 곧 변수다. 능허는 변수를 만들어 냈다. 이제는 능허좌검이라 명명한 좌수검법에 완숙해진 그는 거침없었다.
지독할 정도로 집요하고, 또 아찔한 공격.
능허의 시야가 극도로 협소해졌다. 주위의 모든 배경이 흐릿해진다. 대신 적의 미간, 목젖이 유난히 선명해진다. 그 위에 새빨간 점이 떠오른다.
천무백에게 수없이 비무를 빙자한 수련을 겪어오며, 능허는 어느 순간부터 점이 보였다.
극도로 작은 점. 아무리 눈을 크게 뜨고 안력을 돋워도 보이지 않을 크기.
분명 그랬었다.
‘크다. 눈 감고도 내 검이 꿰뚫을 수 있도록.’
발끝에서부터 짜릿한 감정이 휘몰아쳤다.
좌수검법을 익히던 초기는 보이지도 않았고, 어느 순간부터 보일 때엔 너무 작아 저걸 어떻게 찌르냐고 한탄도 했다.
‘보인다. 크게 보이고, 뚫을 수 있으리라 확신이 든다.’
능허의 입가에 웃음이 걸렸다.
‘하, 이 자식. 내가 이래서 이 양반 곁을 떠날 수 없어요.’
이 모든 게 천무백으로부터 비롯됐다.
능허좌검을 얻게 된 것부터, 완숙한 경지에 이르기까지.
때로는 참으로 대책 없는 것 같은, 그저 폭력을 빙자한 비무라 몇 번이고 생각도 해 봤지만.
결국, 그가 옳았다.
쉐에에에엑!
검이 점을 꿰뚫는다. 능허는 모르지만, 그건 천무백이 가진 삼재검의 관(貫)의 묘리가 담겨 있었다. 피보라가 시야에 가득 찬다. 그리고 다음 빨간 점을 향해 찌른다.
손끝을 타고 전율이 전신을 울린다. 고양감이다. 동시에 이루어 말할 수 없는 은혜에 고마움.
한낱 흑도에 불과했던 자신을 무인으로 만들어 준 천무백에 대한 은혜.
비록 표현하긴 어렵지만, 능허는 그만의 방식으로 보답하기로 결심했다.
능동적으로 무언가를 못 하더라도, 적어도 시키는 것 하나만큼은 제대로 해내야 한다는 의무감.
어느새 능허는 천무백의 명이라면 무엇이든 따를 심복이 되어 있었다.
푹푹푹푹!
계속해서 퍼부어지는 연격에 얽혀 싸우던 녹림도의 미간과 목에 구멍이 송송 뚫렸다.
마치 소 돼지를 도살하듯, 무심정 하게 찌르고 죽이는 과정을 기계처럼 반복했다.
천무백이 한쪽에 뭉쳐 싸우고 있는 수적들을 바라봤다.
배의 선장들과 갑판장이었던 나름 간부들이다.
“이 병신들아. 언제까지 웅크린 채 소심하게 싸울래?”
“뭐라고?”
“저러다가 너희 큰형님 뒈지겠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달려들어야지?”
간부들은 천무백의 독설에 눈을 치켜뜨면서도, 이내 결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능허가 만들어 낸 변수를 그들 역시 놓치지 않았다.
“장강의 형제들이여! 저 더러운 산지렁이 새끼들을 짓밟고 채주님을 보위하자!”
“저 쓰레기 같은 녹림들을 자 찢어 죽이자!”
핏발이 잔뜩 선 눈동자를 치켜뜬 채 수적들은 능허의 뒤를 쫓아 돌진했다.
간부들이 직접 맨 앞에 앞장서서 나서니, 여기저기 흩어져서 난전을 펼치던 수적들이 순식간에 규합해 한 덩어리처럼 뭉쳤다.
숫자도 녹림이 훨씬 많았고 지형도 불리하다. 하물며 개개인의 무력차이도 눈에 훤히 드러날 정도다. 그런데도 수적들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왕전유를 향해 돌진했다. 오로지 제 수장을 구하자는 마음 하나로.
싸움의 기세가 바뀐다.
그리고 거기에 천무백이 방점을 찍었다.
녹림과 수적이 일제히 부딪치는 한 가운데, 천무백이 별안간 뛰어들었다.
콰앙!
사람이라고 보기에 힘든 영역.
입신지경에 접어들어 한계를 초월한 자들이 가진 각력이 땅을 강하게 박찼다.
각력이 얼마나 무시무시한지, 있던 자리가 둥그렇게 파이며 굉음이 터졌다. 맞부딪쳤던 두 집단의 시선이 일순 집중될 정도였다.
“저, 저 미친!”
누군가 질린 낯빛으로 기겁했다.
도움닫기 따위의 준비과정이 모두 생략됐다. 제 자리에 솟구친 천무백의 도약은 말 그대로 비상(飛上)이었다. 고개를 치켜드는 게 아니라 목을 뒤로 확 꺾어야 시야에 모습이 담긴다.
날개가 달린 게 아닐까 의심이 들 정도로 압도적인 도약력.
다만 그에게도 날개는 없었다.
떠오르는 건 가능하나, 추락하는 건 막을 수 없었다.
제아무리 천무백이어도 중력이란 자연의 가장 강력한 힘을 이겨 내기란 무리다. 올라간 속도만큼, 더 빠른 속도로 떨어졌다.
“……어?”
하나 그건 낙하라고 보기 어려운 일련의 과정.
어쩌면 급강하(急降下)란 표현이 어울릴지도 모른다. 무작정 아래로 떨어지는 게 아니라, 천무백은 떨어짐과 동시에 사선으로 원하는 목적으로 맹렬하게 내리꽂혔으니까.
콰아아아앙!
높은 곳에서 내려올 때 더 강력한 힘이 실리기 마련이다.
땅이 팰 정도로 엄청난 각력으로 도약했기에, 떨어지며 하체에 실린 힘은 그야말로 미증유의 파괴력.
천무백은 낙하할 때의 무지막지한 충격을 이용했다.
그 순간, 천무백의 발끝으로 어마어마한 내기가 쏠리더니 새하얀 빛무리가 발바닥에 어렸다.
강기였다.
고공에서 떨어지는 낙하력, 거기에 강기까지.
천무백의 발이 창백하게 질린 낯으로 올려다보던 녹림도의 머리통에 내리꽂혔다.
콰직!
“······!”
비명조차 내지르지 못할 끔찍한 죽음이다.
속도와 파괴력, 둘 다 피하거나 막을 수 있는 종류가 아니었다.
머리가 수박처럼 터졌다. 아니, 머리뿐이 아니다. 가슴 위로 터지듯이 찢어지며 형체조차 남기지 않고 사라졌다.
근처에 있던 녹림도는 그저 그 죽음을 불쌍하게만 여길 수는 없었다.
콰득! 콰직! 콱!
그토록 끔찍한 죽음은 연이어 발생했으니까.
곁에 있어도, 더 멀리 있어도 죽음은 여지없었다. 머리를 터뜨리고 반탄력을 이용해 다시 뛰어오른 천무백은 연이어 녹림도의 머리 위로 꽂혔다.
“등평도수?”
누군가 그리 중얼거렸다.
등평도수(登萍渡水).
물 위 부평초를 밟아 건너는 상승의 경신법.
웬만한 무인은 꿈조차 꾸지 못하는 꿈같은 경신이 눈앞에서 펼쳐졌으니 감탄이 물든다. 하나 감탄은 이내 공포로 둔갑하여 번졌다.
부평초를 밟는 게 아니라 사람의 머리를 밟고 있었으니까.
‘굉장한 걸 넘어서 저건 미친 건데?’
무력을 숨기지 않고 적당히 드러내며 녹림을 베어 넘기던 곡지흠의 입이 쩍 벌어졌다.
부릅뜬 눈은 천무백의 움직임을 쫓기에도 바빴다.
부평초를 밟아 펼치는 경신법도 상승의 공부지만, 사람의 머리를 밟으며 건너가고 있다니!
말처럼 쉬운게 아니다. 사람은 움직인다. 몇몇은 이를 악물고 칼을 위로 든 채 떨어지는 천무백을 찌르려고도 한다. 발악에 불과했다.
여지없이 머리가 터져나가거나, 그도 아니면 어깨가 부서지며 바닥에 처참하게 처박혔다.
오히려 물 위에 잔잔하게 떠다니는 부평초를 밟는 기존의 등평도수보다 더한 경지다.
‘강기를 하반신에 응축시키고, 그 반탄력으로 뛰어오르는 것 자체가······.’
내공의 수발이 자유롭다 못해 완벽하게 통제한다는 뜻이다.
무게를 원하는 대로 조절할 수 있어 경공의 효율을 압도적으로 높일 수 있는 경지.
‘······저 나이에?’
이제 열아홉을 넘어 약관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걸 뒤늦게 떠올린 곡지흠이 말을 잃었을 때.
녹림의 머리를 짓밟아 단숨에 공간을 단축하여 뛰어넘은 천무백은 왕전유에게 닿았다.
“……!”
왕전유와 싸우던 염광채주, 그리고 염광채의 부채주는 싸움을 멈추고 멍한 시선으로 천무백을 올려봤다.
아무리 싸움에 집중한다고 해도, 천무백이 여기까지 오는 그 지옥도를 어찌 모르겠는가.
“호위무사……?”
뒤늦게 천무백의 가면을 본 왕전유의 넋 빠진 목소리를 귓등으로 넘기며.
천무백은 그대로 내리꽂혔다.
“어어억!”
염광채주는 거리가 좀 더 있던 터.
그사이에 있던 부채주가 애석하게도 희생양으로 낙점됐다.
하나 부채주도, 염광채주와 함께 협공으로 왕전유와 비등하게 싸웠던 실력자.
그는 급히 호신강기를 일으켰다. 지금껏 다른 녹림도들은 호신강기는커녕, 아무런 방어동작도 하지 못한 채 죽어 나간 걸 생각하면 천무백은 손뼉까지 쳐 주고 싶을 지경이었다.
콰아앙!
“꺼억!”
호신강기가 반쯤 부서지면서 부채주의 어깨가 무너졌다. 호신강기가 완전히 깨지진 않았지만, 그 충격파가 어깨에 전해져 뼈를 박살 낸 것이다.
천무백은 그대로 뛰어오르며, 짓밟기를 반복했다.
진각(震脚).
말 그대로 벼락과도 같은 각법이 부채주의 몸통을 마구 짓밟았다.
그야말로 완벽한 내공의 수발이었다.
몸이 부서져 나가는 게 아니라, 부채주의 몸이 땅바닥에 못을 박듯이 처박혔다.
“끄어…… 어억.”
이미 충격으로 정신줄을 놓은 부채주의 입에서 침이 줄줄 흘러나왔지만, 천무백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
언제 치열하게 싸웠냐는 듯, 주위는 정적에 잠겼다.
녹림, 수적, 염광채주, 왕전유 할 것 없이.
사람을 못 박듯이 땅에 박아 버리는 기행은 지켜보고 있는 두 눈을 의심할 정도로 지독하고, 잔인했으니까.
꽈앙!
끝내 숨이 끊어진 부채주는 땅에 처박힌 채 고개를 떨궜다.
“거. 깔끔하게 무덤까지 만들어 줬다.”
“……!”
천무백은 그리 말하며 주위를 슥 둘러봤다.
일부러 이랬다.
일전에 천무백이 능허를 제압할 때, 그리고 흑심방을 털 때, 최근엔 중경성의 적룡방까지 무너뜨릴 때.
천무백이 취했던 방식은 바로 지독한 공포였다.
그것만이 거칠고 독한 흑도들을 단숨에 제압하기 가장 쉬운 무기였다.
물론 쉽다는 건 천무백에게나 통용되는 말. 웬만해선 흑도가 두려움을 느끼진 않으니까.
하나 지금 천무백이 넉살 좋게 조롱하는데도, 녹림 중 그 누구도 덤벼들지 못했다.
하물며 염광채주마저 창백하게 질린 낯으로 한걸음 물러서 있었다.
“너…… 호위무사가 어찌…….”
다만 왕전유만이 믿기 힘들다는 시선으로 쳐다봤지만, 천무백은 그리 신경 쓰지 않았다.
애당초 자신이 호위무사로 있는 역할극은 영 마음에 들지 않았으니까.
‘천룡검협이란 것만 안 들키면 되지.’
뭐. 들키기야 하겠어.
능허가 알아서 할 거다.
천무백은 그리 생각하며 염광채주를 바라봤다.
“……누, 누구냐.”
“네놈 모가지 가져갈 저승차사.”
“이익, 하왕 선배! 이만한 괴물을 잘도 숨겨놓으셨구려!”
“……으음.”
왕전유는 침묵하며 흘깃 천무백을 쳐다봤다.
처음 능허가 호위무사라고 소개할 때 느꼈던 묘한 위화감이 신경을 툭툭 건드렸다.
아무리 내공을 잘 숨겨도, 절대 고수에겐 오감을 넘어선 직감이란 게 생겨 위화감을 느끼곤 한다.
‘하면…… 저 화웅이란 친구가 호위무사고, 오히려 이 작자가 흑심방주란 말인가? 어째서 왜 역할을 바꿨던 거지? 뭘 염탐하려고?’
왕전유로선 그렇게 오해하는 게 최선이었다.
“내가 졌소. 하왕 선배, 사과드리리다. 녹림은 이대로 물러나겠소.”
부채주가 있기에 왕전유를 협공으로 몰아붙일 수 있었지, 지금은 죽었다.
하물며 하왕 왕전유뿐 아니라 듣도 보도 못한 괴물 한 마리가 등장하지 않았는가.
염광채주는 그리 머리를 굴렸다.
하나 염광채주를 빤히 주시하던 천무백은 코웃음을 쳤다.
순간이었다.
서걱!
천무백의 발검이 염광채주의 오른손을 갈랐다.
“끄아아악!”
천무백이 냉소를 지었다.
“어디서 기습을 하려고 수를 써?”
바닥에 떨어진 오른팔엔 암기를 쏘아 보낼 수 있는 기관이 장착되어 있었고, 암기는 독을 머금은 듯 반짝였다.
“으으으윽…….”
“자. 이제 오른팔 잘렸으니까, 순순히 말 잘 들어라. 응?”
염광채주를 죽이진 않는다.
이 녀석을 무력화시켜서, 나아가 거력왕을 친다.
그것이 천무백의 계획이었기에 천무백은 오른손잡이인 걸 익히 알고 베어낸 것이다.
자고로 무인이면, 제 주손이 잘리면 다시 무공을 처음부터 배워야 하는 법이니까.
하나 염광채주는 눈을 번뜩이며 왼손으로 도를 잡았다.
“이 개자식이……! 나 염광채주다! 네까짓 애송이에게 얕보일 상대가 아니란 말이다!”
분노에 찬 채 바락바락 소리 지르는 모습에 천무백의 고개가 좌로 꺾였다.
왼손에 도를 든 모습이 어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시선을 느낀 염광채주가 이죽였다.
“양손잡이다. 이 새끼야.”
“아…….”
천무백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럼 양팔 다 잘라야지. 좀 귀찮게 됐네.”
“…….”
염광채주의 낯빛이 새하얗게 질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