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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신재생-21화 (21/318)

<검신재생 21화>

21. 와 줘서 고맙다! ……발놈아!

기루는 돈이 되는 사업이다.

온갖 상단들부터 흑도방파까지 뛰어드는 대표적 사업이다.

하나 이권이 걸린 만큼, 그 사업을 차지하고 운영하기 쉬운 건 아니다.

웬만한 흑도방중엔 기루를 소유한 흑도는 손에 꼽을 정도다. 그저 동네 상점에서 보호비를 명문으로 갈취하는 게 전부지 않은가. 기루를 소유했다고 해도 삼류 취급받는 작은 기루가 대다수다.

그걸 떠올리면, 능허가 연화루를 운영하는 건 분명 그에게는 행운일지도 모른다.

비록 그것이 천무백에게 잡혀서 그가 시키는 대로 하는 일이지만, 루주 자리에 앉아 들어올 돈은 얼마며, 자리에서 생기는 나름의 권력은 어떠한가.

그랬다. 따지고 보면 대형 기루의 루주 자리.

응? 모든 흑도인이면 다 노릴 만한, 탐나는 자리가 아닌가?

‘시발. 그것도 살아야 누릴 수 있는 거지.’

물론 능허도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다.

천무백이 루주 자리를 준 건, 그를 이용하려는 속셈인 건 충분히 알았지만.

어쨌거나 루주가 아닌가.

하남 원양현 최고인 연화루의 루주!

그래서 처음 며칠간은 꿈만 같았다. 뭐 한두 명씩 찾아오는 혈사문 놈들은 치가 떨릴 정도로 살벌했지만, 어쨌건 천무백이 처리해 주지 않았나.

기루도 조금씩 정리됐다. 기녀들도 예기들은 내버려 두고 창기들은 다시 내보내면서 일전에 하남제일청루의 명성을 되찾기 시작했다.

찾아올 혈사문 놈들만 조심하면, 제법 꽤 행복한 인생이 펼쳐지리라 여겼다.

하나 능허는 실수했다.

제아무리 밑바닥 전전하는 흑도여도, 칼 차고 무공 익히고 조잡한 내력도 사용하니까.

어쨌건 강호에 한 발 걸친 인생이 아니던가.

그래, 강호엔 편안이란 단어는 존재하지 않는다.

‘흑도에서 평생 굴려 먹어 놓곤, 흑도의 생리를 내가 정녕 잊고 있었다니. 나도 감이 무뎌졌군.’

능허가 씁쓸한 얼굴로 자신의 칼을 내려다보곤, 맞은편에서 비열하게 웃고 있는 동생을 바라봤다.

아니, 동생처럼 여겼던 수하였지.

“거, 시발. 우리 의리가 이 정도였냐.”

“아이고, 형님. 흑도가 흑도인 이유가 이거 아니요.”

그치.

흑도가 이렇지 뭐.

동생이었던 놈이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비죽였다.

“그 청성표국의 이쁘장한 주인이 신경이라도 쓰겠습니까. 누가 루주 자리에 앉든 돈만 꼬박꼬박 갖다 바치면 되는 거 아니요.”

“흐흐흐. 네가 그 인간을 잘 모르는구나.”

“모르긴 하지. 기녀들 말로는 원양현 제일 미공자라고도 하는데, 그거야 내 알 바 아니고. 어차피 이리된 거. 원망치 말고 가시오, 형님. 내 묫자리는 양지바른 곳에 묻어 줄게. 우리 옛날 의리가 있지? 응?”

능허는 씩 웃었다.

핏물이 배어든 잇몸이 드러나자 기세 좋게 넉살을 늘어놓던 상대가 흠칫했다.

능허가 실소했다.

평생을 같이한 박도는 오른손이 아닌 왼손에 잡혀 있었다.

그 감각이 어색했다.

‘그래, 이게 흑도지.’

흑도의 의리?

세상에 그딴 게 어디 있나.

저 녀석들이 고갤 숙이고 아우를 자처했던 건 다 제 놈들보다 강해서지.

오른손이 병신이 됐으니, 이제 만만한 거다.

밑에 놈들에게 얕보였다?

‘그러면 바로 하극상이지. 시발 거.’

능허가 씁쓸하게 웃었다.

자신도 한창때 그런 식으로 윗놈들을 찍어 누르면서 올라왔으니까.

그래서 놈들에게 원망의 마음은 없다.

그저 루주 됐다고 좋아서 다 풀어진 자신이 병신 같을 뿐이지.

하나 그렇다고 순순히 목을 내놓을 멍청이가 어딨겠는가.

능허는 단 하나 남은 왼손과 한쪽 눈을 시퍼렇게 부릅뜨며 소리쳤다.

“나 독안사(獨眼蛇) 능허야! 호로 자식들아!”

* * *

“제가 연화루로 모시겠습니다.”

천무백에게 호위가 필요할 리가 없다.

하나 허성은 부득불 그런데도 모시겠다고 나섰다.

일전에 천무백에게 질타를 받은 걸 다 잊은 듯한 얼굴이었다.

슬쩍 허성의 표정을 살펴본 천무백은 속으로 실소했다.

‘나름 감은 잡은 거 같은데…….’

말 한마디, 검 몇 번 휘둘러 준 것만으로도 감을 잡은 걸 보면 재능이 영 없는 건 아니다.

물론 천무백의 눈에 찰 정도라면, 직전 전생의 제자인 검존 정도가 되어야 하리라.

아무튼, 천무백에게 그런 평가를 받은 것만으로도 허성은 스스로 자랑스러워할 만했다.

“자신 좀 생겼나 봐?”

“아직 갈 길이 멉니다.”

“주제 파악도 잘하네. 그것만으로도 절반은 먹고 들어간다.”

“…….”

허성의 표정이 괴상하게 일그러졌다.

칭찬인지, 욕인지 헷갈렸다.

천무백이 실소하곤 그저 던지듯이 말을 던졌다.

“양오검은 누가 창안했지?”

“문헌에 따르면 ‘문 도인’이란 사람이 창안했다고 들었습니다.”

“그래. 우리 적현이.”

“네?”

“문적현이라고. 양오검 만든 놈이.”

“……그걸 어떻게?”

“책 좀 읽으시오. 허 표사. 응?”

아니, 어느 책에 무공 창시자가 나와?

화산의 장로들도 모르던데.

하나 허성은 더는 물어보지 못했다. 천무백의 표정이 약간은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듯한 아련함이 느껴져서다.

천무백은 걸어가며 흘려보내듯 입을 열었다.

“뭐, 하여간 그 양반. 여자였어.”

“네?”

“하물며 같은 성별도 체질과 근골이 완전히 다른 법인데. 팔 길이도 다르고, 손짓, 발짓의 습관도 달라. 거기에 성별도 달라. 근데 말이지.”

천무백이 허성을 똑바로 바라봤다.

“전해져 오는, 그리고 화산이 배우는 양오검의 초식은 늘 똑같아.”

“……!”

“사람마다 다 다른데. 다 똑같은 초식에 얽메여 있단 말이지. 각자에게 맞는 초식이 아니라.”

이야. 이 정도면 거의 떠다 먹여 준 건데.

허성은 순간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의 몸이 땅에 박힌 듯 움직이지 않았다.

“표국에서 생각 정리 좀 하라고. 능허 놈은 나 혼자 만나고 올 터이니.”

그저 넋을 놓아 버린 허성을 뒤로한 채 천무백은 천천히 걸었다.

가끔 이랬다.

전생의 기억과 조금이라도 연관되면, 뭔가 쉽게 지나치기가 좀 그렇다.

단지 허성이 절망하며 막혔던 벽이, 그의 친우가 처했던 상황과 유사해서라는 이유였지만…….

‘뭐, 늙은 놈의 주책이지.’

하여간 허성을 질타하다가 자신도 큰 깨달음을 얻지 않았는가.

굳이 허성을 표국에 내버려 두고 혼자 연화루를 나선 것도 바로 이 이유였다.

표국을 나와 나름 인적이 드문 곳에 들어서자, 천무백은 기지개를 켜며 소리쳤다.

“거. 이제 좀 나오지? 사내새끼들이 좀스럽게 아직도 눈치를 봐?”

그러자 주위에 인기척이 들렸다.

저벅거리는 발걸음 소리가 부산하게 들리더니 복면을 뒤집어쓴 사내 일곱 명이 나타났다.

당연히 모르는 놈들이다.

다만 짐작은 할 수 있다. 강호 경력 10년이면 이놈이 대충 어느 쪽에서 노는 놈이구나 알게 된다.

하물며 천무백은 경력 10년이 뭔가. 수백 년이다. 수백 년.

“흑도 새끼들 하는 짓거리는 진짜 시간이 지나도 변하질 않아요.”

딱 보니 각이 나오네.

껄렁거리는 다리, 눈빛에서 드러나는 음험함과 지독한 폭력성, 드러난 손발에 상처며……. 느껴지는 내력은 건달치곤 많이 쌓였지만, 질은 현저하게 나쁘다.

흑도다.

천무백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흑도에서 날 노릴 이유가 있나?

곰곰이 생각해 보니 곧장 연결되는 건 연화루였다.

“내가 아는 흑도는 두 곳뿐인데. 흑도제일문 태룡방이고, 최근엔 능허 놈이 원래 있었다는 흑심방이란 곳인데.”

흠칫.

“오호라. 흑심방이구나. 하면 능허 놈 때문에 왔을 터인데. 능허가 날 죽이라고 모의할 정도로 빡대가리 새낀 아니고.”

천무백이 말 한마디 할 때마다 복면인들은 눈에 띄게 흔들렸다.

일부러 목소리도 내지 않았다, 말도 하지 않았다. 심지어 그나마 정체를 알아볼 만한 무공도 쓰지 않았다. 그냥 순전히 나타난 것뿐이다. 그것도 미리 천무백이 눈치채서 나오라 한 게 아닌가.

‘대체 이 새끼 뭐야?’

복면인들의 심중에 그런 의문이 떠올랐다.

그러든 말든, 천무백은 계속 중얼댔다.

“알 만하군. 능허 놈이 연화루 차지했단 소리가 퍼졌나 보지? 원래 주인이었던 무시무시한 놈들이 사라졌겠다, 능허 놈 파 보니 뒤에는 청성표국의 약골 막내가 있겠다, 이야. 이거 쓱싹하면 연화루 하나 꽁으로 먹는 건 일도 아니겠다? 그치?”

“……이제 알았으니 죽을 수밖에 없겠군.”

고작 몇 가지 단서만으로 상황을 완벽하게 추론해 내자, 천무백을 덮친 복면인들, 흑심방에서 나온 이들은 모두 굳은 얼굴로 칼을 뽑았다.

천무백이 피식 웃으며 하늘을 올려다봤다.

“달이 밝아.”

“뭐?”

“칼이 달빛을 머금으면, 유난히 잘 들더라고.”

“그게 무슨 개소리……”

말은 더 이어지지 못했다.

목이 잘려 바닥에 떨어진 머리가 말을 할 순 없었으니까.

“자. 새로 개발한 내공심법 좀 시험해 볼까?”

천부백의 새하얀 미소가, 달빛 아래에서 빛났다.

* * *

연화루 루주가 거처하는 방안은 쑥대밭이었다.

벽이란 벽은 모두 피칠 됐고, 바닥엔 시체 몇 구가 굴러다녔다.

그 시체 대부분이 한솥밥 먹던 아우였던 놈들인 걸 떠올리면, 능허는 입안이 씁쓸했다.

“거. 산다는 거 참 힘드네.”

이건 일종의 권력 싸움이다.

능허의 자리를 노리던 밑에 놈들의 반란.

이 악물고 싸웠다. 팔다리, 가슴, 허벅지에 수많은 상처를 얻었지만 놀랍게도 열두 명을 베었다.

비록 오른손을 못 쓰지만, 죽을 위기에 처하니 살게 되더라.

하나 산 넘어 산이라더니…….

“썅. 흑도 새끼들이 갑자기 없던 예의가 생겼나. 시발. 대기표 뽑아놓고 순서대로 들어와서 싸우냐?”

“여어, 능허. 팔자 좋네. 형님이 왔는데도 늘어지게 누워서 맞아?”

“형님은 지랄. 내가 흑심방 나온 지가 언젠데 아직도 형님은 무슨.”

흑심방 간부 등초는 금니를 갖다 박은 잇몸을 드러냈다.

“캬. 우리 능허, 출세했어. 내 밑에서 똥 닦던 놈이 이런 번듯한 기루 주인이 되고 말이야.”

“거, 주인은 내가 아닌데.”

“알아. 조사 좀 했지. 표국의 막내 놈이 주인이라면서? 너도 참. 그런 애송이한테 꼬릴 흔드냐. 아무리 돈이 좋아도 그렇지. 이미 애들 보냈다. 실력 좋은 놈들이니까.”

“흐흐흐흐. 거 좁은 곳에서 놀다 보니 보는 눈이 없어졌나 보오.”

“뭐라고?”

“하긴, 그러니 그 나이 처먹고 아직도 애들 거나 뺏어먹고 다니지.”

“이야. 우리 능허, 죽을 상황에서도 입이 살아있네?”

“뭐 내 애들하고 싸우다가 칼 들 힘없을 때 나타난 거 보니, 내가 겁이 나나보오?”

“…….”

“참 치졸해. 참. 딱 보니까 우리 애들 선동시킨 것도 그짝이구만?”

“능허야, 밑에 놈들 관리 못 하는 네 잘못 아니겠냐?”

“좆이나 까잡수시오.”

등초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늘 이랬다. 실력 하나는 기가 막힌 놈이고, 독한 놈이다. 제 밑에 있었지만, 부담스러웠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오른손이 병신이라지만, 솔직히 맞상대하기 껄끄러운 놈이다. 그래서 밑에 놈들을 부추겼다. 한데도 놈은 죽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인 건 이제 놈이 손에 칼 들 힘조차 없다는 거다.

“흐흐. 보니까 여기 기녀들이 아주 잘빠졌더라고. 뭘 먹었는지 피부도 기가 막히고. 캬아. 봐봐. 야 데리고 와봐라.”

등초의 말에 다른 흑도인이 기녀 둘을 데리고 왔다.

두 명 다 단순히 기녀라고 여기기엔 아름다운 외모를 가졌다.

“흐흐흐. 애들 손님 맞기 전에 주인이 먼저 맛보는 게 관례 아니냐. 어떻더냐?”

“……그 애들 예기요. 창기가 아니라.”

“오? 그래? 키야. 그러면 이게 웬 떡이냐. 기녀치곤 풋풋한 맛이 있겠어? 응?”

등초가 징그럽게 웃자 능허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비록 그 역시도 흑도였지만, 그래도 사람 정이란 게 있다. 자신을 무서워하지만 나름 살갑게 대하는 아이들이 아니던가. 물론 그것이 일종의 기루에서 잘 봐달라는 아첨 같은 것이었지만, 어쨌거나 딸이나 막냇동생뻘의 애들이니 제아무리 능허라도 정이 들 수밖에 없던 터.

그런 애들이 등초의 더러운 손에 붙잡혀 오들오들 떠는 꼴을 보니 속이 뒤집혔다.

“이 개새끼야. 한판 붙자.”

“잠깐만. 애들 맛 좀 보고.”

“이런 썅!”

허리춤을 푸는 등초에게 능허가 있는 힘을 쥐어짜 박도를 던졌다.

하나 박도는 등초가 고개를 한 번 숙여 피해 낼 뿐이었다.

“흐흐. 우리 능허, 많이 사람 됐네. 인간적이야. 아주, 응?”

등초가 이죽이며 기녀의 몸에 손을 대는 순간.

능허가 핏발선 눈으로 바닥을 기며 전진하는 그때였다.

팟!

방안의 촛불이 모조리 꺼졌다.

그리고 스걱! 하는 소리가 연이어 들렸다.

“으아악!”

이어 흑심방에서 나온 흑도인들의 비명이 방안에서 미치듯이 터져 나왔다.

그제야 바닥을 기어 다니던 능허의 입에서 웃음이 터졌다.

“능허야, 능허야. 왼쪽 손도 잘렸냐?”

단지 듣는 것만으로 온갖 애증이 느껴지는 그 목소리.

능허가 버럭 소리쳤다.

“와 줘서 고맙다!…… 발놈아!”

“뭐? 방금 욕했지?”

“아닌데요.”

“넌 애 처리하고 보자.”

일부러 마지막 말을 씹어서 말했건만, 저 괴물 같은 놈은 그것마저 들었다.

한데도 능허는 웃음을 잃지 않았다.

“그래 시발! 와줘서 고맙다고! 이 시발놈아!”

거 까짓것.

몇 대 시원하게 맞고 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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