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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신재생-22화 (22/318)

<검신재생 22화>

22. 평생 모시겠습니다!

사실 연화루와 능허가 어찌 되든, 천무백에게 치명적인 문제가 되겠는가?

답은 아니다.

연화루가 없다 한들, 천무백이 검극에 도달하는 과정이 어려워지는 건 아니다.

그러나 그건 너무 간단하게 생각한 거다.

어쨌거나 연화루는 현재 혈사문과 이어지는 유일한 끈이다.

‘그 자식들은 원래 뱀들처럼 굴속에 숨어 사는 놈들이라. 머리를 내밀었을 때 잡아야 해.’

당장 연화루만 지키고 있어도 혈사문이 다시 접근해 올 터.

일전에 장로 구진해가 죽었으니 지금은 그저 조용히 상황을 지켜보고 있는 듯했다.

더구나 천무백은 무수한 전생을 살아왔지만, 지금 청성표국 막내아들로서의 정체성도 분명 갖고 있다.

관아의 지역 봉쇄, 표행 실패로 신뢰 추락, 일감이 없어 점점 악화하는 표국 재정.

수심이 깊어지는 천유하의 어두운 얼굴을 보면 천무백도 그저 편안하게 자기 하고 싶은 대로 검만 휘두를 순 없었다.

‘언제든 기댈 수 있는 안정된 기반이 있다는 건 수련에 있어 큰 힘이 되지.’

대체로 천무백은 숱한 전생 중에 독보강호 하는 경향이 짙었다.

매번 반복되는 끊임없는 윤회의 삶.

저주받은 지독한 윤회의 굴레는, 그에게서 망각이란 선물도 빼앗아 버렸다.

생생히 기억난다.

매번 전생에서 만난 이들을 잊지 못한다.

처음엔 고통이었다.

삶이 끝나고도 이전 생의 인연이 잊히지 않는 것.

그건 곧 심마다.

하여 천무백은 어느 순간부터 새 삶이 시작되면, 주위 환경과 단절하고 홀로 지냈다.

진짜 문제는 그때마다 정진하지 못하고 정체됐다.

안정된 기반이 없다는 것.

늘 칼 위에 서는 듯한 아찔하고 치열하게 살아야 하는 강호에선 치명적이다.

마음이 안정되지 못하니 검끝은 흔들렸고, 심마는 찾아왔으며 주화입마에 숱하게 빠졌다.

그렇게 몇 번의 삶을 허비하고 나서야 천무백은 깨달았다.

‘나는 나다.’

삶이 끝나고 새로운 삶이 시작되어도.

어떤 이름을 가지게 되고, 어떤 환경에 놓이게 되더라도 천무백은 천무백이다. 검신이든 검마든 삼재검성이든 그 모든 것이 천무백이다.

‘하니 매번 삶을 소중한 내 삶으로 여겨야 한다.’

주어진 환경을 최대한 소중하게 여겨야 한다.

하여 천무백은 청성표국에 강한 책임감을 느꼈다.

마음에 한가락 심마가 찾아올 때, 언제든 기댈 수 있는 안정적인 기반.

곧 강호에 뛰어들어 세상 모든 풍파에 정면으로 맞설 천무백을 생각하면 청성표국은 태풍 앞에 언제 꺼질지 모르는 촛불이다.

강호가 그렇다.

아니, 적어도 천무백이 묵묵히 걸어 나갈 강호는 그러하리라.

그러니 천무백은 청성표국을 그 어떤 풍파에도 무너지지 않을 철옹성으로 만들 생각했다.

그 첫 번째로는 연화루 흡수를 통한 재정적인 안전책 확보였다.

표행이 끊겨도, 관아가 행패를 부려도.

적어도 천무백이 숱한 전생을 살아오면서 느낀 게 있는데.

‘기루 장사는 늘 제철이야.’

술과 여자, 풍류는 언제나 성행했다.

더구나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하남제일청루라 불릴 정도로 하남성에서 가장 큰 규모이니, 청성표국에 재정적 위기가 닥쳐도 연화루가 그걸 지탱해 줄 기반이 되어 주리라.

한데…….

‘그 연화루를 뺏으려고 들어?’

푹! 푹! 푹!

천무백의 손속은 깔끔하면서도 과격한 느낌이 들었다.

그저 살이 꿰뚫리는 섬뜩한 소리가 지나고 나면, 여지없이 목에 구멍이 뚫린 채로 사람들이 픽픽 쓰러졌다.

칠흑 같은 어둠속에서 섬뜩한 소리 한 번에 비명과 바닥에 쓰러지는 소리가 연이어 들려오니 그야말로 내부는 쑥대밭이 됐다.

파앗!

누군가 간신히 촛불에 불을 붙였을 때, 드러난 광경에 아직 살아남은 이들은 아연실색했다.

“세상에…….”

드러난 광경은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말 그대로 목불인견의 참상이었다.

숱한 오물을 뒤집어쓰며 굴러다니던 흑심방의 흑도들도 충격받은 표정으로 벌벌 떨었다.

“고작 촌각도 지나지 않은 거 같은데…….”

누군가 중얼거렸다.

그의 중얼거림대로 촛불이 꺼지고 비명이 들린 건 아주 잠깐이었다.

그 짧은 사이에 내부에 있던 흑심방 대다수가 쓰러졌다.

그나마 두 다리로 서 있는 자들도 드러난 광경과 지독한 공포에 바지가 젖어 들었다.

“으으으!”

특히 오른손이 잘린 등초는 개구리처럼 꿈틀거렸다.

천무백이 핏물이 뚝뚝 떨어지는 검을 거둬들이며 능허를 바라봤다.

뚱한 표정.

“뭐라고 욕했더라?”

“죄송합니다. 머리 박고 사과드립니다.”

“넌 배알이 없는 게 장점이야.”

“칭찬입니까?”

“있었으면 진즉 뒤졌을 것 같거든.”

“흑도한테 배알이 뭐가 필요합니까.”

“그치. 그게 흑도지. 그럼 마무리해.”

“네?”

“흑도답게 말이야.”

천무백이 오른손이 잘린 채 공포에 질린 등초를 바라보며 얘기하자, 능허는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어디서 난 힘인지, 모든 힘을 쥐어짜 벌떡 일어나 박도를 쥐었다.

그 역시도 왼손이었다.

“사, 살려다오, 능, 능허야! 내, 내가 네놈을 거둬들이고 삼시세끼 따뜻한 밥 먹여 주지 않았냐?”

“지랄한다, 등초야. 옛날부터 네놈 모가지 따고 싶었는데 이제 기회가 왔구나.”

“능허야!”

“칼 잡아라. 갈 땐 가더라도, 흑도답게 죽자. 응?”

“흑도답게가 대체 뭔데!”

“살려고 발악해 보라고! 내가 했던 것처럼!”

그 외침에 등초는 입을 꾹 닫고 검을 잡았다.

오른손이 잘렸기에, 좌수로 검을 쥐었건만 그 자세는 어설프기 짝이 없었다.

이윽고 둘의 싸움이 시작됐다.

초반엔 등초가 우세했다. 이미 피를 잔뜩 흘리고 지칠 대로 지친 능허였으니까.

등초는 이대로라면 자신이 이기리라고 여겼다.

시간이 지날수록 능허는 더 지칠 게 분명하니까.

그게 착각임은 곧 밝혀졌다.

능허는 시간이 갈수록 지치긴 했으나 힘이 빠지진 않았다.

오히려 점점 밀리는 건 등초였다. 어색한 왼손으로 칼을 잡으니, 둘의 싸움은 격식 있는 비무나 손에 땀을 쥐는 생사결도 아니었다.

그냥 동네 건달들의 개싸움이나 다름없었다.

그런 개싸움에서 승패를 결정 짓는 건, 바로 독기다.

“능허 너……!”

등초는 순간 능허의 애꾸눈을 보고 몸서리를 쳤다.

한쪽밖에 남지 않은 애꾸눈에서 시퍼런 독기가 줄기줄기 뿜어져 놓았다는.

그제야 등초는 능허의 별명을 떠올렸다.

‘독안사!’

한쪽 눈의 뱀.

그러나 독한 눈을 가진 뱀이란 의미도 통했다.

그랬다. 놈은 뱀이었다.

교묘하면서도 독한 놈.

그놈이 독니를 드러냈다.

“꺼억!”

“잘 가쇼! 시발 거!”

“사, 살려다오!”

“그래! 시발 죽기 전에 목숨 구걸하는 것도 흑도답지! 그러면 다음 일도 알지? 인정사정없이 비참하게 죽여 버리는 것도, 흑도다운 일이지.”

능허는 되는대로 말을 지껄이며 칼을 등초의 턱밑으로 쑤셔 박았다.

무식한 박도가 등초의 머리통을 꿰뚫었다.

즉사였다.

“허억, 허억.”

“지랄한다. 누가 보면 천마하고 싸운 줄 알겠네.”

“그 대단한 창천검신처럼 보입니까?”

“와. 진짜 어처구니가 없어서 말이 안 나오네.”

“천마하고 싸운 것 같다면서.”

“너는 정말 듣고 싶은 것만 듣는구나. 그것도 재주다.”

“그래야 머리 아픈 거 없이 오래 삽니다.”

순간 천무백은 입을 다물었다.

가만 생각해 보니, 그 말이 맞았다.

머리 아픈 게 없어야 수련할 때도 더 깨닫는 바가 많다.

천무백의 눈이 샐쭉해졌다.

“너 환생자냐?”

“그건 뭔 참신한 개소리입니까.”

“물에 빠진 놈 구해 줬더니 태도 봐라.”

“죄송합니다. 그리고 정말로 감사합니다.”

능허가 넙죽 부복했다.

오체투지에 가까울 정도로 온몸을 납작 엎드렸다.

처음엔 또 장난인가 싶던 천무백은 이내 느껴지는 절절함에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겉으론 투덜대고 자유분방한 놈이지만, 지금 저 인사는 진심이었다.

“저 가진 거 하나도 없는 놈입니다. 그래서 고마운 인사를 이렇게밖에 못 해 드립니다. 이게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감사 인사입니다.”

“고마우면 연화루부터 제대로 운영해.”

“네.”

“혈사문들 처리되면 청성표국 소속이 될 거다. 뭐, 지금도 혈사문 놈들 귀에 연화루를 실질 운영하는 건 표국이라고 알려지긴 했겠지만…… 그래도 확신보단 긴가민가한 게 더 헷갈리겠지.”

“하면…… 혈사문 애들이 조만간 찾아오겠군요.”

“구진해 놈이 죽었으니 놈보단 강한 놈이 오겠지.”

“…….”

“표정이 왜 그래?”

“솔직히 말하겠습니다. 저 못 막습니다.”

“알아.”

“도망갈지도 모릅니다.”

“그래. 가려면 가. 그전까진 제대로 운영해.”

“그래도 됩니까?”

“너 가면. 뭐 대충 사람 한 명 붙여서 운영하면 되지.”

“너무 매정한 거 아닙니까?”

“지랄.”

“젠장. 시발. 어차피 흑도인생. 살다가 뒈지는 게 인생인데. 여긴 저만 믿고 맡기십쇼. 혈사문인지 독사문인지, 누가 진짜 독사인지 보여 주겠습니다!”

“허세 부리다가 훅 간다.”

“때론 허세가 먹힐 때가 있습니다.”

“됐고, 저것들 마무리나 해.”

천무백이 턱짓으로 뒤를 가리켰다.

살아남은 흑심방 애들이었다. 천무백과 능허의 시선이 향하자 그들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제가 합니까?”

“내가 잔챙이들까지 손봐 주랴?”

“흑도답게 마무리하겠습니다.”

“오냐.”

능허는 저 어린 얼굴에서 노인네 같은 말투가 튀어나올 때마다 적응되지 않았다.

하지만 간혹 돌아가신 조부 생각나서 나름 정겹기도 했다.

아무튼, 능허는 한쪽에서 겁에 질려 벌벌 떠는 놈들에게 다가갔다.

남은 건 고작 네 명이었다.

그들은 능허가 다가오자 넙죽 엎드렸다.

“살려 주세요!”

“응.”

“……네?”

“자. 어서 여기 정리하고 치워. 부서진 거 고치고, 시체 치우고, 피 닦아. 청소부터 해. 내일 저녁에 등 올리고 장사할 수 있게.”

엎드린 네 명은 순간 저들끼리 눈치 보다가 급히 일어났다.

그리고 능허에게 허리 숙였다.

“감사합니다. 목숨 다해 충성하겠습니다!”

“응.”

네 명은 심지어 천무백에게 쪼르르 다가왔다.

“감사합니다! 최선을 다해 일하겠습니다!”

“너희 어딜 가서 일해도 잘하겠다, 야.”

그 상황에서도 권력관계까지 파악해 굳이 다가와 인사하는 거 봐라.

이놈들, 꽤 눈치 빠르다.

“너희 이름 버려라. 흑심방 소속 아니다. 원래 이름 잊어. 왼쪽부터 일석, 이석, 삼석, 사석이다.”

능허는 그렇게 말하곤 천무백에게 다가왔다.

“제 밑에 놈들 다 죽었습니다. 당장 기루 돌리려면 사람 필요해서 살려 줬습니다.”

“너 죽이려고 온 놈들인데?”

“저놈들이야 등초 새끼가 시켜서 따라온 겁니다. 기루서 일하는 기둥서방 놈들은, 일단 기녀애들 건들지 않아야 합니다. 한데 이 녀석들은 등초 녀석이 애들 희롱할 때 좀 불편한 표정으로 빠져 있더라구요.”

“그래?”

“음심은 당연히 있겠지만, 적어도 제어할 줄은 아는 놈들이고, 인간 도리는 아는 놈들입니다. 제아무리 흑도여도 짐승 아닌 인간이니 기본 도리는 있어야겠지요.”

“얼씨구, 공자님 제자 납셨네.”

“감사합니다.”

“그만해라, 인사. 제대로 운영이나 해.”

천무백이 손을 휘휘 젓자 능허는 입을 꾹 다물고 허리를 숙였다.

사실 그는 짐작하고 있었다.

천무백이라면 촛불이 꺼졌을 때 다 죽이고도 남았으리라.

한데 굳이 저 네 명을 살려 뒀다.

능허는 천무백의 깊은 생각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앞으로 표국 운영에 필요한 부분을 정확히 짚은 게 아닌가. 더구나 등초를 직접 처리하지 않고 넘겼다.

그건 앞으로 수하가 될 저 네 명에게 능허의 권위를 확인시켜 준 셈이다.

팔을 잃고 피를 철철 흘리는 상황에서도 죽였으니까.

함부로 할 수 없는 무력의 소유자이며, 독기를 지녔다고 생각하지 않겠나.

하물며 그 뒤에 천무백이 있음을 은근히 암시했으니, 저 네 명은 일전의 수하들처럼 하극상은 꿈에도 꾸지 못하리라.

‘등초를 맡긴 것도, 어쩌면 내가 처리할 수 있으리라 믿었던 것이겠지.’

순간 몸에 짜르르하고 전기가 흐르는 기분이었다.

누가 그 상황에서 능허가 이기리라 짐작하겠는가.

한데도 자신에게 마무리를 맡긴 것

결국, 믿었다는 거 아닌가?

순간 울컥하는 게 솟구치는 기분이었다.

흑도서 이리저리 밑바닥 인생 전전하면서 ‘형님! 믿습니다!’이라 아첨은 들은 적 많지만, 글쎄. 이런 느낌은 또 처음이다.

‘허허. 능허 이 새끼야. 너도 나이 처먹을 대로 처먹었구나. 감성적이야. 아주.’

능허는 천무백의 작은 뒤통수를 바라보다 별안간 소리쳤다.

“거 시바! 죽을 때까지 평생 모시겠습니다! 도련님, 아니, 주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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