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신재생 20화>
20. 아주 사는 게 편했지?
허성은 부국주 천유하의 부름에 집무실로 향했다.
온몸이 불덩이처럼 뜨거웠다. 거의 달포가 넘게 검을 휘둘렀다.
이렇게까지 치열하게 검을 휘두른 건, 화산에서 처음 검을 배우던 이후로 처음이었다.
‘즐겁군.’
사실 수련이란 게 즐거울 리가 없다.
몸을 깎는 노력을 동반하고, 스스로 몸을 혹사하는 과정이니까.
한데도 허성은 기꺼웠다.
수련이 어려운 건, 성장의 성과가 눈에 띄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 조금의 깨달음을 얻은 허성은 그간 정체됐던 걸 모두 해소하듯이 뚫고 지나갔다.
물론 아직 벽을 깬 건 아니다.
그러나 벽을 깰 실마리를 발견했다.
이 실마리를 붙잡고 놓치지 않는다면 분명 막혔던 벽을 넘을 수 있으리라.
무엇보다 이 실마리를 제공해 준 천무백에게 고마운 마음이 컸다.
처음엔 이해하지 못했다.
그저 검 몇 번 대충 휘두른 것으로 양오검이라니?
하나 그때 맡은 매화향은 화산에서 느껴졌던 매화향보다 더 진했다.
천무백이 어찌 양오검을 아는지는 이젠 중요치 않다.
단지 천무백의 진짜 실력에 대한 호기심이 컸다.
‘스승의 함자가 궁금해지는군. 아니지, 아무리 스승이 엄청난 무인이라고 해도, 스스로 성장은 본래의 오성이 중요한 것이 아니겠는가.’
천무백의 진짜 힘은 어느 정도가 될까.
아직 기초 체력도 안 된다고 혼자 투덜대는 건 듣긴 했지만, 그건 외형적으로 그럴 뿐. 허성이 보기엔 웬만한 표사들도 단순 신체 능력으로는 천무백을 넘보지 못하리라 여겼다.
‘힘을 아주 효율적으로 쓰시던데.’
아주 적은 힘만으로도 최상의 결과를 내는 근육의 움직임.
장노가 말했던 내용 그대로였다.
솔직히 말해 허성은 내공 없이, 무공 없이, 그저 단순한 박투술, 또는 힘겨루기를 하면 자신이 이긴다고 확신 못 했다.
분명 아직 성장이 끝나지 않은 체형이었고, 근육 역시 많이 붙지 않은 호리호리한 메마른 체격이건만.
단순히 힘의 총량이 아니라 사용 효율 자체가 달랐으니까.
만일 거기에 내공과 무공까지 더한다면?
부르르르!
‘으음!’
절로 소름이 돋고 한숨이 나왔다.
이미 천무백은 내공을 사용하고 있다.
그렇지 않다면 매화향을 피워 내지 못했으리라. 다만 적어도 그가 느끼기엔 겉으로 내공을 쌓은 흔적을 아예 느끼지 못했다.
하면…….
‘내가 감히 가늠하지 못할 정도로 내공을 쌓았거나, 아니면 천혜의 심법이라 절대 누구도 눈치챌 수 없다거나.’
어느 쪽이 진실이든…….
‘만일 도련님이 강호에 나간다면……’
허성은 알았다.
천무백이 언젠가, 그 시기가 문제지 곧 강호로 나갈 거란 사실을.
연화루에 있던 혈사문이 천무백에게 철저히 당한 이후, 현재까진 조용했다.
하나 그건 태풍의 눈이었다.
강호의 일이란 그런 것이다.
분명 어디선가 천무백을 노리는 혈사문의 손길이 가까워지고 있을 터.
천무백은 그 혈사문에 맞서 결국 강호에 나가게 되리라.
‘그때, 나 역시도 그 앞에서 칼이 되어 싸우겠다.’
허성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천무백 대신 검을 맞고, 앞에서 대신 싸우리라. 그것이 큰 깨달음의 실마리를 내어준 천무백에 대한 도리이리라.
여러 생각을 하며 걷는 사이.
어느새 천유하의 집무실에 당도했다.
조용히 문을 열고 들어가니 여러 종이에 파묻힌 천유하가 보였다.
피로에 잔뜩 찌든 얼굴임에도, 그 외모는 빛이 났다.
‘남매가 맞긴 하군.’
탁자에 앉아 서류를 처리하는 천유하를 얼핏 보면 천무백이 떠올려진다.
그만큼 남매는 닮았다.
하긴, 저 남매의 외모가 표국을 운영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고 천문경이 술자리에서 농담처럼 말한 적이 있지.
‘틀린 말은 아니야.’
천무백은 이상하게도 사람을 끌어들이는 타고난 매력이 있었다.
뭐, 그런 거 있지 않나?
특별히 친한 사이도 아닌데, 괜히 잘해 주고 싶어지는 사람 말이다. 괜히 친해지고 싶은 그런 유형 말이다.
천무백이 그러했다.
천유하 역시 천무백 정돈 아니지만, 타고난 외모의 부드러운 목소리에 많은 사람이 호감을 느끼곤 했다.
신뢰가 중요한 표국의 일에서, 단순히 첫인상만으로도 상대에게 신뢰와 호감을 줄 수 있는 두 남매의 외모.
사람들이 농담처럼 말하긴 하지만, 청성표국이 성장하는 데는 두 남매의 외모가 분명 영향력을 끼쳤다.
천문경이 매번 큰 의뢰 자리에 천무백을 불러와서 악기를 연주하게 했던 것이 바로 그런 이유이리라.
“아, 오셨어요?”
천유하가 조금은 피로한 목소리로 허성을 반겼다.
“아버님이었다면 표사님들을 모셔 늘 얘기를 나눴을 텐데. 저는 아직 미숙해서 밀린 서류 처리하느라 그러질 못했네요.”
“아닙니다, 부국주님. 표국의 절반 이상이 빠져나간 사이인데, 바쁜 게 당연한 일이죠.”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고마워요.”
천유하는 부드럽게 웃고는 한쪽 탁자에 앉길 권했다.
직접 차를 우려내는 동안 잠깐의 침묵이 가라앉았다.
침묵을 깬 건 천유하였다.
“일단 감사해요. 우리 무백이 가르치느라 많이 힘드시죠?”
“…….”
허성은 순간 당황스러웠다.
‘내가 뭘 가르친 적 있나.’
오히려 가르침을 받은 건 자신이 아니던가. 하나 살다 보면 경험이 쌓이고 눈치가 늘긴 마련이다. 허성은 내심 표정을 고치곤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도련님에게 오히려 도움을 받는 건 저입니다. 최근 저 역시도 연무장에서 끊임없이 수련했는데, 이 모든 게 도련님으로부터 큰 자극을 받아서입니다.”
“그런가요?”
“정말입니다. 도련님의 재능은 훌륭합니다. 하물며 그 치열한 노력은 두말할 것도 없지요. 저는 도련님이 장차 큰 명성을 떨치리라고 생각합니다.”
천유하가 살포시 미소지었다.
“고마워요.”
왠지 진심으로 받아들이는 것 같진 않았다.
하긴,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골골거리던 어린애를 두고 큰 명성을 떨친다고 운운하니, 그저 듣기 좋게 칭찬하는 말이라고 여긴 것이겠지.
다만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윽고 천유하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다름이 아니라…… 혹시 무백이가 방안에서 무얼 하는지 아시나요?”
“네?”
“다시 방에 들어가 나오질 않는다고 들었어요. 열병을 앓기 전처럼 돌아갔나 싶었지만, 연주 소리도 들려오지 않으니…….”
허성이 실마리를 잡아 수련에 몰두한 사이, 천무백도 갑작스레 방 안에서 나오질 않았다.
점박이를 통해 식사와 깨끗한 의복이 방에 들어가니 식사는 분명 하고 있을 터.
하나 늘 들려오던 대금 소리도 들려오질 않고, 심지어 점박이도 도련님의 명이라며 천유하마저 들어오는 걸 굳은 얼굴로 막아서니 당황스러울 노릇이다.
심지어 장노가 빠져나간 사이, 표사들의 최정점이 된 허성마저 방 앞을 지키고 있으니 안을 확인할 방도가 없었다.
허성이 걱정스러운 기색이 가득한 천유하를 똑바로 바라보며 차분하게 말했다.
“너무 심려치 마십시오, 부국주님. 도련님은 부국주님이 여기시는 것보다 더 대단한 분이십니다. 도련님이 아주 중요한 일을 하니, 아무도 들이지 말라 하셨지요. 그렇다면 그건 정말로 중요한 일을 행하고 계신 겁니다.”
그러자 천유하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천무백이 비록 다른 사람들에게 호감을 주는 매력이 있을지언정, 누군가에게 이렇게 강한 신뢰를 받을 줄은 몰랐던 터였다.
그것도 일전까지는 그렇게까지 깊은 관계라고 여겨지지 않았던 허성에게서 말이다.
심지어 허성마저 달라진 듯한 느낌이었다.
일전의 허성도 분명 제 할 일은 똑 부러지게 잘하는 좋은 사람이었다. 그러나 간혹 보이던 매사에 무기력한 모습이 종종 있었다. 일종의 권태감에 시달리는 모습 말이다.
때론 그 무기력함이 기루에서 회포를 푼다고, 암암리에 천유하는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러고 보니, 같은 사람인지 잘 모르겠네.’
두 눈에서는 뜨거운 열기로 가득했다. 무언가 열정적으로 변했다. 그 변화가 어디서 온 걸까.
아마도 천유하의 기억에 따르면, 장노 대신 천무백의 수련을 봐주면서다.
정말로, 천무백 때문에 변화한 것일까.
물론 알 길은 없다. 때마침 그녀의 안색이 확 변할 목소리가 밖에서 들려왔으니까.
“누님, 천무백입니다.”
* * *
“뭐 해? 안 가?”
예의 퉁명스러운 말투.
천유하의 집무실에서 나오는 천무백을 보고 그저 넋 놓고 쳐다보던 점박이가 퍼뜩 정신 차렸다.
“어디로 모실깝쇼?”
“어디로 모시긴. 점박아. 나 방 안에 있는 동안 점소이로 취업이라도 했냐?”
“헤헤. 그야 도련님 모시고 다니는 게 부려 달포만이니까 그렇죠!”
“신났군, 신났어.”
천무백이 피식 웃으면서 투덜댔지만, 그도 점박이의 행동에 기분이 나쁘진 않은지 미소를 머금었다.
그런 천무백을 점박이는 새삼스러운 눈빛으로 흘깃 쳐다봤다.
“뭘 그렇게 봐?”
“우리 도련님, 방 안에서 대체 무얼 하신 겁니까요?”
“말해 줘도 모른다.”
“흐음. 뭔가…… 뭔가 달라졌는데.”
“그러더냐?”
“아휴, 그럼요. 딱 뭐라 꼬집어 설명하기 힘든데, 분위기라고 해야 하나. 하여튼 뭔가 더 달라졌습니다.”
점박이는 예전에 들었던 말이 있었다.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냐는 말이었던가.’
그건 꽤 유명한 말이다.
글자를 모르는 점박이마저 잘 알고 있는 얘기니까.
간혹 점박이처럼 천한 사람들이 종종 저런 말을 하며 열불을 토했으니까. 점박이도 처음엔 그 말이 맞다고 여겼다.
그가 본 몇몇 고귀한 신분의 사람들.
겉으론 고귀한 척 온갖 내숭을 다 떨면서도, 안으로는 온갖 추잡한 짓을 다 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던가.
그런 한심한 인물들을 보고 있노라면, 저 사람들이 도대체 뭐가 귀한 사람들인지 잘 몰랐다.
그러니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냐는 말에 은근 공감했었다.
한데……
‘가만 생각해 보니 따로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슬쩍 다시 천무백을 쳐다봤다.
뚱한 시선으로 또 뭘 봐. 하는 듯이 천무백이 쳐다봤지만, 점박이는 이상하게도 기분이 나쁘질 않았다.
‘방안에서 산삼이라도 뿌리 째 몇 개 먹으셨나.’
달포 만에 방 안에서 나온 천무백의 분위기가 확 변했다.
일전에도 사람을 끌어들이는 매력은 있었는데, 지금은 더 했다.
두 눈은 잠깐만 쳐다봐도 마음이 편안해질 정도로 맑았다. 한데 감히 얕잡아볼 수 없을 정도로 거칠 거 없는 패기도 느껴졌다. 그러면서도 감히 쳐다보기도 어려운 고귀함이 느껴졌다. 뿐이랴. 어쩔 땐 마치 신선을 보는 듯한 신비감도 느껴지지 않나.
‘정말 이건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는 게 아닐까. 국주님도, 부국주님도 대단하셨는데. 도련님도 성장하시니 정말 비범하구나!’
점박이로선 그렇게 여길 수밖에 없었다.
“연화루로 가자.”
“연화루요?”
“그래. 이 새끼들이. 누구 맘대로 기루 문을 닫아?”
천무백의 미간이 좁혀졌다.
사실 천무백은 천유하에게 연화루를 인수해서 운영하겠다고 얘기했다. 그 말에 천유하는 적잖이 당황했다. 천무백은 그간 있었던 일을 특별한 오해가 없도록 설명했다. 최대한 말을 맞춰 연화루를 얻게 됐다고 고했다. 자연스럽게.
한데…….
“무려 5일 동안 문을 닫아?”
하니 천무백이 직접 연화루에 가서 확인할 생각이었다.
“능허 이 새끼, 아주 사는 게 편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