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5장 (6/129)

제5장. 인식(認識)-적의 꼬리를 잡다

단목하진의 안내로 흔적이 끊긴 지역으로 나온 고덕은 주변을 면밀히 살피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도 이내 시들해졌다.

‘젠장, 이럴 줄 알았다면 추적술을 제대로 배워두는 건데 잘못했어.’

적을 죽이는 무공은 알아도 적을 찾는 기술은 모르는 것이다.

“추적에 능한 이들을 투입해본 것이겠지?”

“예. 본 세가에서 추적술에 가장 뛰어나다는 무사들을 투입했지만 소득이 없었습니다.”

“근데 그 추적술에 뛰어나다는 놈들, 정말 뛰어난 거 맞아?”

고덕의 의심에 단목하진이 펄쩍 뛰었다.

“확실합니다. 분명 세가 내에서는 추적에 최고의 기량을 가진 자들이었습니다.”

“그게 그러니까 혈가 내에서만 뛰어난 게 아니냐는 말이야?”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알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마교는 추적에 능한 이들을 보유하지 못했다. 아니, 안 했다. 남의 뒤나 캐는 따위의 일에 신경 쓰는 이들이 없었기 때문이지.”

때문에 그런 일을 할 땐 하오문을 시켜 뒤를 잡고, 고수를 파견해 척살하는 방식을 취해왔다.

“그 말씀은……?”

“혈가도 그런 게 아니냐고 묻고 있는 것이다.”

“그게…….”

뒷말을 흐리는 모습이 틀린 지적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내 그럴 줄 알았지. 최선은 무슨 얼어죽을…….”

“아, 아닙니다. 우린 정말 최선을 다해서…….”

“아, 아, 됐어. 지금은 그걸 따지자는 게 아니니까.”

“예…….”

자신의 말에 입을 다무는 단목하진을 바라보던 고덕이 물었다.

“이름이 모라고?”

“하진입니다. 단목하진.”

“그래, 하진.”

“예, 대협!”

“주변에 추적에 능한 놈을 알고 있나?”

“추적에 능한 자라면…….”

잠시 생각을 가다듬던 단목하진이 무릎을 쳤다.

“아! 흥국에 추귀(追鬼)가 있습니다.”

“추귀?”

“예. 하오문 소속으로 추적엔 귀신같다는 작자입니다.”

“하오문 소속이라……. 잡아다 쓸 수 있겠나?”

“그냥 의뢰를 하심이…….”

“검마의 조카와 조카 손자를 혈가가 잃어버려서 찾는다고 의뢰를 할 생각인가?”

“그, 그건…….”

“그러니 잡아다 쓸 수 있나만 생각해.”

“그것까지는 모르겠습니다.”

“결국은 가봐야 안다?”

못마땅한 기색에 단목하진이 다급히 말했다.

“원하신다면 다른 이들을 시킬 수 있습니다.”

“누구, 너희 애들?”

“예. 만약을 대비해 혈참대를 써도 좋다는 언질을 받았습니다.”

혈가에선 혈검대 다음으로 뛰어난 고수들로 구성된 이들이 바로 혈참대였다.

“싫어. 내 일에 다른 놈들이라니. 이번에도 네들 믿다가 이런 일이 생긴 거니까, 직접 간다. 위치는 아나?”

“아, 예. 일을 나가지 않았다면 흥국의 구룡 표국에 있을 겁니다.”

“구룡 표국?”

“하오문이 운영하는 표국입니다. 그곳에서 분실물 조사 책임자로 있습니다.”

“좋아. 찾긴 쉽겠네. 가지.”

“예, 대협.”

백운산에서 흥국은 지척이다. 말로 달리면 한두 시진, 상승의 경공으론 수각이면 닿을 거리다.

단목하진의 뒷덜미를 잡은 고덕은 그 거리를 반 각 만에 주파해버렸다.

자의가 아닌 타의에 의해, 더구나 볼품없는 모습으로 이동한 단목하진이었지만 불평 한마디 하지 못했다.

“구룡 표국이라…….”

표국 앞에 도착한 검마가 현판을 바라보며 중얼거리자 단목하진이 물었다.

“어찌, 문을 두드릴까요?”

“하진아.”

“예, 대협.”

“지금이 몇 시냐?”

“대략… 축시 초쯤 됩니다. 대협.”

“지금 시간에 두드리면 누가 나올 것 같냐?”

“그야 경비 무사가 나올 겁니다.”

“그럼 걔한테 뭐라고 할래?”

“추귀를 찾는다고…….”

“네가 누구냐고 물으면?”

“제 신분을 밝히면…….”

“너 바보냐?”

“예?”

“하오문에 혈가의 소가주가 추귀를 찾아왔다면 무슨 소리가 돌 거 같아?”

“아!”

“아? 이거 말귀를 잘 알아듣고 머리 회전이 빠른 놈으로 붙여 달랐더니 어디서 순…….”

“죄, 죄송합니다.”

고개를 조아리는 단목하진을 못마땅한 눈빛으로 바라보던 고덕이 물었다.

“들어가서 조용히 잡아올 수는 있겠냐?”

“그, 그게…….”

“너, 경지가 뭐야?”

“내, 내경입니다.”

“내경이면 일류?”

“상승… 의 일류입니다.”

일류에 이른 무사층이 두터운 탓에 나누어진 구분이다.

상승의 일류란 절정으로 넘어가기 직전의 일류 무사들을 아우르는 것이었다.

“그놈이 그놈이지 무슨……. 하여튼 네놈으론 안 된다는 말이군.”

“죄, 죄송합니다.”

고개를 푹 수그리는 단목하진을 두고 고덕이 움직였다.

“조용히 기다려.”

“예.”

단목하진의 대답은 허공만 울렸다. 그가 답하기 전에 이미 고덕의 그림자가 사라진 까닭이다.

그 공허함을 단목하진의 감상이 채웠다.

“빠르긴 무지하게 빠르네.”

표국 밖에 단목하진을 세워두고 담을 넘긴 넘었는데, 추귀라는 자가 어느 전각에 묵고 있는지 알 수 없었던 고덕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젠장, 돌아나가서 물으면 우습게 되겠지?’

결국 고덕이 선택한 것은 가장 보편적인 방법이었다.

“흡!”

경비를 서다가 갑자기 몸이 굳고 입이 막힌 채 나무 그늘로 끌려 들어온 표사의 눈이 당황으로 부릅떠졌다.

그런 표사의 귀로 차가운 음성이 들렸다.

“추귀의 위치?”

맹렬히 고개를 젓는 표사의 모습에 마뜩치 않은 표정을 지은 고덕의 손가락이 두 번째와 세 번째 갈비뼈 사이를 지그시 눌러왔다.

“크흡!”

순간, 머리 꼭대기에서 발바닥까지를 단박에 꿰뚫고 내려가는 고통에 바르르 떠는 표사에게 고덕이 차가운 음성으로 다시 물었다.

“추귀의 위치?”

“으으읍흡.”

“아! 아혈.”

입까지 봉쇄시킨 걸 깨달은 고덕의 손놀림에 말문이 트인 표사가 답했다.

“왼쪽으로 두, 두 번째 전각…….”

“확인해보고 틀리면…….”

서늘한 음성에 표사의 표정이 확 바뀌었다.

“오, 오른쪽 네, 네 번째 전각입니다.”

상대의 잔머리에 슬며시 미소를 지어 보인 고덕이 표사의 수혈을 짚고선 알려 준 대로 오른쪽 네 번째 전각으로 스며들었다.

톡톡.

누군가 자신의 머리를 건드린다는 것을 느낀 왕팔이 슬며시 눈을 떴다.

“허억!”

코앞에 들이밀어져 있는 미지의 시선에 기겁을 한 왕팔에게 고덕이 물었다.

“추귀?”

“아, 아니요!”

상대의 답에 검미를 슬쩍 일그러트린 고덕은 두말없이 상대의 목을 쥐었다.

“그럼 살려 둘 필요가 없지.”

“커억, 마, 맞… 스니… 으헉!”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목을 조르는 상대에게 기겁한 왕팔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말에 목을 놔준 고덕이 다시 물었다.

“말 바꾸는 거 싫어한다.”

“아, 안 바꿉니다.”

“네가 추귀가 맞나?”

“예. 마, 맞습니다.”

“옷 입어라. 갈 데가 있다.”

“어, 어딜 말입니까?”

왕팔의 물음에 벌써 걸어 나가던 고덕의 고개가 돌려졌다.

“묻는 건 내가, 넌 답만. 어기면…….”

그리고 웃어 보이는 상대의 눈동자에 떠오르는 파르스름한 광기를 확인한 왕팔의 고개가 맹렬히 아래위로 움직였다.

삐이걱-

정정당당히 정문으로 걸어 나오는 고덕을 바라보는 단목하진의 얼굴엔 어이없음이 가득했다.

그렇게 고덕을 앞세우고 나서는 왕팔에게 정문의 경비를 맡은 표사가 물었다.

“이 밤에 어딜 가시는 겁니까? 왕 각주님.”

“잠시 외출하는 것이니 소란 떨 거 없다.”

“저 사람은 누구구요?”

“낮에 들어온 내 손님이시다.”

“금세 돌아오시는 겁니까?”

“글쎄… 나도 그랬으면 좋겠구나.”

“예?”

“그냥 그렇다고. 문 닫아라.”

“예. 다녀오십시오.”

“그래.”

삐이걱-

다시금 닫히는 표국의 문을 바라보는 왕팔의 눈은 불안으로 가득했다.

“뭐해, 안 오고.”

앞서가던 고덕의 짜증에 왕팔이 화들짝 놀랐다.

“가, 갑니다.”

뒤따라온 왕팔의 뒷덜미를 잡은 고덕은 단목하진을 바라보았다.

“하아~”

그 시선에 한숨을 내쉰 단목하진이 포기의 표정으로 뒤로 돌아 뒷덜미를 내주었다.

그렇게 셋은 다시 백운산 자락으로 반 각 만에 돌아갔다.

내려 주자마자 구토를 한 왕팔을 마치 더럽다는 듯이 발끝으로 건드린 고덕이 말했다.

“찾아.”

“예? 뭐, 뭘요?”

“흔적. 둘이 납치당했다. 우리가 찾을 수 있는 흔적은 이곳에서 끊겼다.”

고덕의 말에 왕팔은 그제야 이 불한당 같은 인사가 자신을 데려온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런 이유라면……. 그나저나 꼭 이렇게 데려와야 했던 거요?”

자신의 가치를 알자마자 태도가 변한다. 역시 풍파에 씻기고 닦인 하오문도다웠다.

문제는 상대가 그리 좋지 못하다는 걸 알지 못했다는 것이지만…….

“하진.”

“예, 대협.”

“이놈 말고 다른 놈이 또 있나?”

고덕의 물음에 왕팔을 슬쩍 일별한 단목하진이 답했다.

“악안에 유명한 추노꾼인 나칠이 있습니다.”

“그놈 잡으러 가자.”

“예? 그, 그럼 저자는 어찌……?”

“필요 없으니 묻어.”

고덕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왕팔의 음성이 울렸다.

“대협, 여기 흔적입니다.”

자신의 음성에 고덕의 시선이 돌아오자 왕팔이 허리를 최대한 깊숙이 숙였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런 왕팔의 행동에 피식 웃어 보인 고덕이 말했다.

“지금의 마음가짐을 잊지 마라. 잊으면…….”

고덕의 뒷말이 이어지기 전에 왕팔이 결연하게 외쳤다.

“뼈에 새기고 절대로 잊지 않겠습니다.”

“좋아, 믿어보지.”

“감사합니다, 대협.”

“됐으니 하던 이야기나 계속해봐.”

고덕의 물음에 왕팔이 주변을 일일이 손으로 짚어가며 설명했다.

“여기 이 족적이 아마 마지막으로 확인하신 흔적일 것 같습니다.”

“맞아.”

“그럼, 여기를 보시죠. 풀이 꺾여 있습죠.”

“그렇군.”

“방향은 북동. 풀이 꺾인 형태로 봐서 부피는 있지만 무게는 가벼운 것에 의한 것입니다.”

“그게 무슨 소리야?”

“보법이나 경공으로 몸을 가볍게 한 이가 남긴 흔적이란 말씀입니다.”

“호오~ 그래서.”

“문제는 이 풀 옆에는 그런 흔적이 없다는 겁니다.”

“그게 어떻다고?”

“사라진 이들이 둘이라면 아무리 경공의 고수라도 둘이 필요합니다.”

“왜? 난 혼자도 됐는데?”

왕팔과 단목하진 둘을 데리고 다닌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건 흔적이 남습니다. 여기 이것이 대협께서 남기신 흔적이지요.”

왕팔의 지적에 보니 옅게나마 족적이 남았다.

“흠…….”

미처 생각지 못한 흔적 때문인지 고덕의 표정이 좋지 못하자 왕팔이 잽싸게 말을 이었다.

“세 사람의 무게에 눌린 까닭입니다. 이건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타인을 안고 무게를 가볍게 하는 것은 한계가 있으니까요.”

“그 말은?”

“예. 흔적이 하나만 남은 것은 뛰어난 경공의 고수 한 명과 무지막지하게 강한 고수 한 사람이 사라진 두 사람을 나누어 옮겼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흔적이 하나만 남았다?”

“맞습니다.”

“추적은 가능하겠나?”

“예. 다행히 한 명의 것은 계속 남겨져 있으니까요.”

“그럼 앞장서.”

“예. 이쪽으로…….”

앞서 가는 추귀 왕팔의 뒤를 따라 고덕이 움직였다.

그렇게 검마의 추적이 시작되고 있었다.

* * *

어두운 실내엔 세 사람이 모여 있었다.

셋 모두가 똑같은 복면에 똑같은 야행복을 입었다.

그런 이들의 주변으로 심상치 않은 기세들이 흩어지고 있었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둘은 부복한 상태고, 다른 한 명은 서 있다는 것뿐이었다.

“물건은?”

“삼 호가 안휘로 끌고 갔습니다.”

부복한 복면인 중 한 명의 답에 서 있는 이가 물었다.

“안휘의 안배는?”

“일 호가 준비를 마쳤다는 연통을 보내왔습니다.”

“남궁세가의 반응은?”

“아직은 조용합니다.”

“인지를 못한 탓인가? 아니면 고의적인 방치?”

“아직 눈치를 못 챈 모양입니다.”

“남궁세가도 요사이 자만심이 하늘을 찌르는 모양이군.”

“정천맹의 테두리에선 소림과 무당을 제외하곤 상대가 없으니까요.”

“그게 우물 안 개구리라는 것이지.”

“이번 일로 달라질 것입니다.”

“그래야겠지. 그래야 재미도 있어질 테고……. 안휘가 시끄러워지면 하남이 반응을 보일 텐데?”

“예. 마교와 달리 정천맹은 소속 문파들의 일에 민감하니 반드시 참견해올 것입니다.”

“대책은 세워져 있나?”

“사패련에 손을 써놓았습니다.”

“그 미련한 놈들이 제대로 일을 할 수 있을까?”

“길은 저희가 잡아야겠지요. 그래서 구 호가 나가 있습니다.”

“잘했군. 그나저나 목표는?”

“물건의 뒤를 쫓고 있답니다.”

“길잡이는 누군가? 나칠, 아니면 왕팔인가?”

“왕팔이랍니다.”

“젠장, 둘 중 하나를 찍는다는 게 잘못 찍은 셈이로군.”

“워낙 급히 변경된 사항이라 둘을 다 바꿀 여유가 없었으니까요.”

“그럼 나칠 대신에 바꿔치기했던 우리 측 사람은?”

“빼냈습니다.”

“뒤처리는?”

“진짜 나칠의 시신을 원한을 품은 노비에게 당한 것처럼 해서 버려두었습니다.”

“의심을 사진 않겠지?”

“사 호가 처리했습니다.”

“그렇다면 믿을 수 있겠군.”

“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요사이 적면조의 일이 급물살을 타고 있어. 이렇게 가다간 뒤처져. 뒤처지면 어찌 되는지 잘 알겠지?”

“예, 조장.”

“알고 있다니 다른 말은 하지 않겠네. 하지만 적면조에 뒤져선 정말 곤란해. 교내에서의 위치는 물론이고, 우리의 미래가 뒤바뀔 가능성도 배제하지 못한다고. 그것이 우리 흑면조가 이번 일을 반드시 성공시켜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고.”

“명심하고 있습니다.”

부복한 이들의 답에 서 있던 이, 흑면조장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 마음을 항상 유지하고, 가서 일을 추진해.”

“명!”

복명과 함께 사라진 두 수하의 빈자리를 바라보던 흑면조장도 이내 모습을 감추었다.

* * *

왕팔의 선도로 강서와 안휘의 접경까지 이동한 고덕이 미덥지 못한 표정으로 물었다.

“너 정말 잘 찾고 있는 거야?”

“제대로 찾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오래 걸려? 이건 다르잖아.”

“무슨 말씀이신지……?”

“강아지도 아니고, 몇 걸음 가다 킁킁거리고 또 몇 걸음 가다 주변을 온통 헤집고. 이렇게 흔적을 찾는다는 말은 들은 적이 없다.”

고덕의 말에 왕팔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 혹시 그냥 쓰윽 훑어보고 이쪽입니다, 그리곤 한참 달리다 저쪽입니다, 뭐 이런 거 말씀하십니까?”

“그래. 소문하고 달리 네 실력, 형편없는 거 아니야?”

“에효~ 하여간 이야기책이 사람들 다 버려 놓는군요.”

“뭐?”

“흔적을 쫓는데 어떻게 그렇게 쉽게 찾아갑니까? 당연히 흔적을 지속적으로 따라 움직여야죠. 더구나 흔적이라고 개미 똥자루만 한 것을 쫓는 것인데, 중간에 방향이라도 바꾸면 어쩌라구 달려가요. 현실에선 턱도 없는 일입니다.”

“정말이냐?”

“예.”

왕팔의 답을 듣고는 자신을 돌아보는 고덕에게 단목하진이 고개를 저어 보였다.

자신도 아는 게 없는 까닭이다.

“나중에 거짓이면…….”

“죽여주십시오.”

왕팔의 자신감에 고덕은 씁쓸한 표정으로 입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 고덕을 대신해 단목하진이 물었다.

“그런데 이쪽으로 가면 안휘가 아니오.”

“맞습니다. 안휘로 접어든 모양입니다.”

“안휘면 정천맹의 영역인데…….”

남궁세가, 단리세가, 안휘협가.

안휘에 뿌리를 내린 쟁쟁한 무림 세가들이 모조리 정천맹에 소속된 탓이다.

마교와 한배를 탄 단목세가의 소가주로서는 방문하기에 적당한 지역은 아니었다.

“안휘 땅이 모두 지들 땅은 아닌데 무슨 상관이야. 괜찮아.”

망설이는 단목하진과 달리 고덕은 전혀 신경 쓰는 눈치가 아니었다.

“그럼 계속 쫓겠습니다.”

왕팔의 말에 고덕의 눈치를 살핀 단목하진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추적은 지루하고 느리게 진행되었다.

강서의 백운산 자락에서 안휘의 황산까지 자그마치 보름이 걸린 여정이었다.

그것도 중간 중간 너무나 선명한 흔적 때문에 속도를 높일 수 있었던 덕이었다.

“이건 아무래도 좋지 않습니다.”

“왜?”

“이번에도 흔적이 너무 선명합니다.”

“그게 어때서?”

“흔적을 잃어버리기 직전에 마치 알려 주기라도 하듯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다음 여정지를 한눈에 알아버릴 정도로 강렬한 흔적이 말입니다.”

“한 번은 우연, 두 번은 필연, 세 번은 고의다 그건가?”

“이런 경우, 두 번도 고의라고 판단해야 합니다. 거기다 제가 추적할 수 있는 한계를 교묘히 이용한다는 느낌이 강합니다. 어쩌면 저들은 이미 우리를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왕팔의 말에 고덕의 입가에 비틀린 미소가 떠올랐다. 추적을 시작하기 전 단목운정이 한 말이 생각난 탓이다.

‘대협을 노린 것일 수도 있습니다.’

“한번 해보자는 말이로군.”

싸늘한 고덕의 기세에 주변의 기가 요동을 친다.

그 전율스런 느낌에 왕팔의 목은 잔뜩 움츠러들었다.

“어, 어찌할까요?”

조심스러운 왕팔의 물음에 고덕이 답했다.

“원한다면 놀아주는 게 손님의 도리겠지. 추적해.”

“알겠습니다.”

답하는 왕팔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잘못 걸려도 이건 완전히 빼도 박도 못하도록 제대로 걸려든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 다시 이어진 왕팔의 추적은 황산에서 벽에 부딪쳤다. 흔적이 황산일세(黃山一勢)라 통칭되는 남궁세가로 이어진 탓이었다.

하지만 왕팔의 보고에 고덕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남궁세가로 향했다.

그런 고덕을 바라보는 단목하진과 왕팔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켜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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