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장. 황산일세(黃山一勢)-황산에 오직 하나
“무슨 일이오?”
수문 무사의 물음에 고덕이 답했다.
“여기 강태명의 사제가 있다던데 그를 좀 불러주게.”
어려 보이는 고덕의 반말에 검미를 꿈틀거린 수문 무사가 물었다.
“지금 누구라고 하셨소?”
“강태명 몰라? 철추도 강태명.”
여전히 반말인 고덕의 행동에 수문 무사는 화를 삭이는지 심호흡을 하고는 말을 이었다.
“후우~ 철추도 강태명 대협의 사제라면 호원(護院)의 차석(次席)으로 계시오. 그분을 뵈러 온 것이오?”
“그래. 좀 불러주겠나?”
“누구라 전해드리면 되겠소?”
“사돈이라고 전하면 돼.”
“사돈… 이라고 하셨… 습니까?”
인상은 여전했지만 무사의 말투는 변했다.
“그래. 사돈이 찾아왔다면 알 게야.”
“알겠습니다. 잠시 기다리시지요.”
“그러지.”
고덕의 답에 수문 무사가 안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남겨진 고덕과 일행을 다른 수문 무사들이 고까운 시선으로 바라보았지만, 고덕은 개의치 않는 표정이었다.
“차석 호원님 계십니까?”
“누구요?”
문이 열리며 걸어 나온 이는 다부진 체격의 중년인이었다.
“수문전의 아성입니다.”
“아, 자네가 어쩐 일인가?”
“그게…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손님?”
“예. 사돈… 이라고…….”
“사돈? 내게?”
“예. 철추도 강태명 대협의 이름을 들먹인 것이…….”
수문 무사의 음성에 방 안에서 강유화와 여린이 고개를 내밀었다.
“오라버니를 들먹였단 말인가요?”
“예, 부인. 한데, 나이가 이제 약관 정도밖에…….”
수문전의 조장인 남궁아성의 말이 누구를 가리키는 것인지 알아차린 여린이 손뼉을 쳤다.
“아! 작은할아버지다!”
여린의 행동으로 찾아왔다는 이가 매일같이 여린이 자랑하던 고수 할아버지라는 것을 알아차린 이명리가 물었다.
“어디에 계신가?”
“신분이 확실치 않아 일단 정문에 계시게 하였습니다.”
“이런 결례가. 알았네. 내 지금 나가 봄세.”
신을 신고 나서는 이명리를 따라 강유화와 여린도 함께 나섰다.
그들의 뒤에 남겨진 남궁아성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작은할아버지라고……?”
정문에서 기다리고 있던 고덕은 달려 나오는 여린의 모습에 미소를 지었다.
“작은할아버지-!”
“어이쿠, 우리 숙녀 분께서 이렇게 뛰어다니면 어찌하나.”
“헤헤헤.”
혀를 내밀며 웃는 여린의 뒤를 따라 나온 강유화가 반색을 했다.
“시숙부님…….”
“아, 잘 지냈느냐?”
“그저…….”
침울한 표정을 보이는 강유화에게 고덕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소식은 들었다. 조만간 해결될 것 같으니 너무 걱정하지 말거라.”
“예……. 하온데 숙부님은 어찌 이곳에……? 혹시 한도회에 무슨 일이라도……?”
걱정스럽게 묻는 강유화를 지그시 바라보던 고덕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달리 알아볼 것이 있어서 근처로 오게 되었구나.”
“그, 그렇군요…….”
잔뜩 긴장했던 강유화의 표정에 작은 안도의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
“그런데 인사는 안 시킬 요량이더냐?”
“아, 죄송해요. 제가 정신이 없어서. 명리 오라버니, 제 시숙부님 되세요.”
강유화의 소개에 이명리가 나섰다.
“이명리라 합니다. 동도들이 천패도(天敗刀)라 부르지요.”
‘천패도 이명리. 이자가 인연으로 묶여 있는 줄은 몰랐군.’
“반갑소. 여린이의 작은할아비라오.”
마주 포권을 해 보인 고덕에게 이명리가 손을 안쪽으로 향했다.
“안으로 드시지요.”
“고맙소.”
그렇게 당당하게 남궁세가로 들어가는 고덕을 바라보는 왕팔은 어이없는 표정이었다.
“저분, 도대체 누구십니까?”
“알아서 좋을 것 없으니 신경 끄시오.”
쌀쌀하게 답한 단목하진이 고덕을 따라 안으로 들어가자, 아니꼬운 표정으로 단목하진의 뒤를 노려보던 왕팔도 따라서 움직였다.
이명리의 안내로 접객원에 자리를 잡은 고덕은 강유화의 질문 공세에 처했다.
“한도회엔 다녀오신 건가요?”
“잠시 다녀오긴 했다.”
“어떻게 되어가던가요?”
“잘 해결될 것 같더구나.”
“잘 해결되다니요?”
“상대 쪽에서 대화로 풀 생각 같았다.”
고덕의 말에 이명리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혈가, 그 무식한 인간들이 말로 한다고요?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이명리의 놀람에 꿔다놓은 보리 자루처럼 앉아 있던 왕팔이 슬쩍 단목하진의 얼굴을 보았지만, 그는 아무런 표정의 변화도 없었다.
“그쪽도 나름대로 이유가 있을 것이오.”
“아무리 그래도 혈가인데…….”
“믿기 싫으면 안 믿어도 상관없소.”
고덕의 퉁명에 이명리가 미안한 표정이 되었다.
“미안합니다. 내 사돈의 말을 못 믿는다는 의미는 아니었습니다.”
“흠흠…….”
마뜩치 않은 표정으로 헛기침을 하는 고덕에게 강유화가 물었다.
“그이와 진명이는 보셨어요?”
“한도회를 가볼 시간이 없어 보질 못했구나.”
“그래요…….”
시무룩해지는 강유화를 바라보던 고덕이 말했다.
“걱정하지 말거라. 아무런 일도 없을 테니.”
“그렇겠죠?”
“그래.”
자신의 말에 조금이나마 표정이 나아지는 조카며느리를 바라보는 고덕의 마음은 그다지 편치 않았다.
“그런데 일행 분들은……?”
강유화의 물음에 고덕이 에둘러 답했다.
“내 길잡이들이로구나.”
고덕의 답에 단목하진이 일어나 포권을 취했다.
“하진이라 합니다.”
“파, 팔이라 합니다.”
단목하진을 쫓아 이름만 말해놓고 보니 웃긴 이름이 된 탓인지 왕팔의 표정이 좋지 못했다.
“풋-”
그 탓에 여린이 웃음을 참지 못했지만, 강유화의 눈총에 서둘러 신색을 바로 했다.
“오신 김에 잠시 머물다 가시면 어떻겠습니까?”
스스로도 객인 신분의 강유화의 입장을 생각해 이명리가 권하자, 고덕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신세를 지겠소.”
“아닙니다. 피곤하실 텐데, 그럼 쉬시지요.”
이명리의 말에 자신들이 먼 길을 온 사람을 너무 잡고 있었다고 판단한 강유화와 여린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머, 내 정신 좀 봐. 오늘은 쉬시고 내일 다시 말씀을 나누시는 게 좋겠네요.”
미소를 지은 고덕이 고개를 끄덕이자 이명리와 강유화, 여린이 접객원을 나섰다.
그렇게 물러가는 이명리에게 고덕이 전음을 보냈다.
-조용히 시간을 좀 내주시오.
갑작스런 전음에 잠시 흠칫했던 이명리가 역시 전음으로 답했다.
-잠시 후에 다시 오겠습니다.
그렇게 돌아가는 이들의 모습을 바라보는 고덕의 표정이 좋지 못했다.
사람들이 나가자 고덕이 왕팔을 불렀다.
“야- 팔.”
“예? 아! 예.”
“흔적이 분명히 이리로 이어진 거 맞지?”
“확실합니다. 너무 확연해서 이상할 정도지만…….”
“다시 나간 건 아니고?”
“우리가 이곳으로 들어올 때까진 없었습니다.”
“그렇단 말이지…….”
중얼거리는 고덕에게 단목하진이 물었다.
“이제 어찌하실 생각이십니까?”
“그래도 명색이 남궁세가야. 우리끼리 들쑤실 수 있을 만큼 만만한 곳이 아니라는 의미지. 전음으로 이명리를 불렀으니 그가 오면 방법을 논의해봐야겠지.”
“설마… 사실대로 말씀하실 생각이십니까?”
“그래야 하지 않겠어?”
고덕의 답에 단목하진이 곤란한 표정으로 물었다.
“어디까지 말씀하실 생각이신지……?”
“일단 아이들이 사라진 것까지.”
“하면, 저나 대협의 신분까지 포함되는 것입니까?”
“난 아니지.”
“그 말씀은 제 신분은 밝히신다는 것입니까?”
“남궁세가의 눈이 해태가 아니라면 넌 곧 알아보게 되어 있어. 그러니 미리 밝혀 두는 게 좋아.”
듣고 보니 틀린 말이 아니기에 단목하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군요. 그럼 저자는 어쩌실 생각이십니까?”
단목하진의 물음에 고덕의 시선이 왕팔에게 향했다.
“저놈도 밝혀야겠지.”
“하오면 수색대가 되는 것입니까?”
“그렇지. 그게 사실이기도 하고.”
“한데, 왜 저희 단목세가가 숙이고 들어가냐고 물으면 무어라 할까요?”
“그럼 한도회를 끝장내도 괜찮냐고 오히려 물으면 되지.”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말귀를 알아듣지 못한 단목하진의 물음에 고덕이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머리 좀 써라. 한도회가 아무리 정천맹에 가입하지 않은 문파라곤 해도 백도야. 그런 문파가 마도인 혈가에 멸문을 당하거나 그에 준한 피해를 입으면 정천맹의 입장이 무엇이 되겠어?”
“아!”
“아는 무슨. 그러니 너흰 한도회를 대충 혼도 좀 냈겠다, 정천맹이 신경 쓰여서 이쯤에서 그만두고 싶은 거야. 무슨 말인 줄 알겠어?”
“예, 대협.”
단목하진의 답에 고덕의 시선이 왕팔에게 향했다.
“추적 과정을 제대로 설명해야 할 거야.”
“염려 마십시오, 대협.”
“쓸데없는 말은 하지 말고.”
“명심하겠습니다.”
왕팔이 고덕에게 고개를 숙여 보일 때, 이명리의 음성이 들려왔다.
“저 이명리입니다.”
“들어오시오.”
고덕의 허락에 방 안으로 들어선 이명리는 혼자가 아니었다.
상대방의 시선이 자신의 뒤에 선 두 사람에게 향한다는 것을 알자 이명리가 재빨리 소개를 하고 나섰다.
“외총관과 수석 호원이십니다.”
이명리의 소개에 두 사람이 차례로 인사를 건네 왔다.
“남궁단입니다.”
“한백입니다.”
‘호천검(昊天劍) 남궁단, 오성창(五星槍) 한백이라. 거기에 천패도까지 얹으면 남궁가 전력의 이 할은 이곳에 들어선 셈이군.’
거론된 이들이 하나같이 초절정에 이른 고수들이다.
다른 이들이었다면 그 셋을 한 번에 마주 대하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혔을 것이다.
옆에서 잔뜩 주눅이 들어 있는 왕팔처럼…….
자신의 느낌에 희미한 미소를 지어 보인 고덕이 마주 포권했다.
“고덕이오.”
외모상 자칫 분란이 일어날 수 있을 인사말에도 불구하고 상대방들의 표정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내 이야기를 조카며느리에게서 들으신 모양이외다.”
고덕의 질문을 받은 이명리가 고개를 저었다.
“여린입니다. 그 아이의 이야기 중 절반 이상이 사돈의 이야기니까요.”
이명리의 답에 고덕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그랬소… 허허, 거참…….”
멋쩍어하던 고덕이 자신의 뒤에 선 이들을 돌아봤다.
“이쪽도 인사를 다시 해야겠구려.”
그 말에 단목하진이 먼저 나섰다.
“단목세가의 단목하진입니다.”
“흐음…….”
순간 흐르는 불편한 침묵. 그 침묵을 깨고 왕팔이 자신을 소개했다.
“하오문의 왕팔입니다.”
“혹, 추귀?”
외부 소식에 민감한 남궁단의 물음에 왕팔이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 제가 그 추귀 왕팔입니다.”
왕팔의 확인에 남궁세가 사람들의 시선이 고덕에게 몰렸다.
“앉읍시다. 서서 할 이야긴 아닌 듯하니.”
“그러죠.”
이명리의 동조에 사람들이 앉자, 지난 이야기를 간단하게 고덕이 설명했다.
“하면, 단목세가가 정말로 한도회와 화해를 모색했단 말입니까? 그것도 먼저?”
고덕의 설명을 다 들은 이명리가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 다는 표정이자 단목하진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렇습니다.”
“이유가 뭔가?”
“그들이 백도니까요.”
“그게 무슨 말인가?”
“우리가 끝장을 볼 수 없었단 말입니다.”
단목하진의 말을 들은 남궁단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백도의 문파를 끝장내기엔 정천맹이 걸렸겠군.”
“맞습니다. 윗분들은 적당한 선에서 멈추길 원하셨습니다.”
그 말에 남궁세가 사람들의 고개가 끄덕여졌다.
“그나저나 사라진 이들이 누구기에 단목세가의 소가주가 직접 나선 겐가?”
“사절이 사라진 지역이 저희 단목세가의 권역이었기 때문입니다. 이건 도전이니까요.”
단목하진의 말에서 피 냄새가 물씬 풍긴다는 느낌을 받은 남궁세가 사람들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하면, 고 대협은 왜……?”
남궁단의 물음엔 고덕이 답했다.
“사라진 아이들이 내 조카와 존카 손자였기 때문이오.”
“저, 정말입니까?”
놀란 이명리의 경악성에 고덕이 침통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맞소. 추적 상황은 왕팔이 말해줄 거요.”
고덕의 시선을 받은 왕팔이 추적의 세부적 상황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 설명을 모두 들은 남궁단이 물었다.
“우리 남궁세가로 흔적이 이어졌다?”
“맞습니다.”
“말도 안 되는!”
“되고 안 되고는 찾아보면 알 수 있게 되겠지.”
고덕의 싸늘한 음성으로 장내의 공기가 급속도로 차가워졌다.
그 말은 고덕 일행이 남궁세가를 뒤져 보겠단 의미가 되기 때문이다.
상대가 아무리 초극이라지만 감내할 이야기가 아닌 탓에 방 안의 분위기는 이미 깨어졌다.
“갈! 말도 안 되는 소리. 수색이라니, 그게 이루어질 것이라 생각했소이까?”
가지고 있던 호감이 모조리 날아간 듯 딱 잘라 거절하는 남궁단의 음성은 차가웠다.
“아니라면 거절할 까닭이 없을 텐데.”
희미한 미소로 묻는 고덕의 신형에서 아지랑이 같은 기운이 일어섰다.
상대의 반응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탓이다.
“지금 남궁세가에 와서 시비를 거는 겐가!”
존대마저 사라진 남궁단의 일갈에 고덕의 입가에 어린 미소가 짙어졌다.
그 모습에 긴장한 단목하진이 나섰다.
“단목세가의 입장에선 반드시 풀어야 할 숙제입니다.”
“단목세가의 숙제를 풀고자 남궁의 이름에 먹칠을 하란 말인가?”
고자세로 일관하는 남궁단의 말에 단목하진은 속으로 욕설을 퍼부었다.
‘빌어먹을 인사, 먹칠이 피 칠보다 나은 걸 몰라? 지금 눈앞에 누굴 놓고 버티는 거야!’
“우리가 나서지 않아도 좋습니다. 자체적으로 조사해봐도 되지 않습니까? 우린 그저 그 상황을 지켜보기만 하겠습니다.”
단목하진의 제안에 이명리가 조심스럽게 나섰다.
“그 정도는 양보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 차석!”
“저도 부탁드립니다. 사사로운 일이나 제 가족이 연관된 일입니다.”
“아무리 그래도…….”
난색을 표하는 남궁단의 옆에서 그간 잠자코 듣고만 있던 한백이 나섰다.
“수색도 좋고 자체 조사도 좋습니다만, 그걸 우리가 결정할 순 없습니다.”
“그, 그거야…….”
다소 난감한 표정인 이명리에게 고덕이 물었다.
“설마 장로 회의라도 열어서 승인을 받자, 뭐 그런 고리타분한 이야기는 아닐 거라 믿소만?”
“그게… 비슷합니다. 아무래도 문규도 있고…….”
이명리의 답에 고덕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전통을 따지는 대문파의 명분 찾기가 나온 탓이다.
“회의가 열리면 시간만 흘러갈 공산이 큰 게 아니오.”
마뜩치 않은 고덕의 물음에 이명리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건 가주께서 무슨 생각을 가지셨는지에 따라…….”
이명리가 뒷말을 흐리자 발작하려는 고덕을 대신해 단목하진이 재빨리 나섰다.
“좋습니다. 그럼 결정을 받아주십시오. 문제는 납치된 이들의 안전상 시간이 별로 없다는 것입니다. 그걸 유념해주셨으면 합니다.”
“혈가가 언제부터 그리 타인의 생명에 관심을 가졌다고…….”
남궁단의 못마땅한 음성이 흘렀지만, 단목하진은 탁자 아래의 주먹을 피가 나도록 꽉 쥐는 것으로 화를 삭였다.
“이제부터 가져 보려 합니다. 부탁드립니다.”
포권을 취하는 단목하진의 손에 비치는 혈흔을 발견한 남궁단의 입이 다물렸다.
잠시 후, 남궁세가 사람들이 물러가자 지루하고 애가 타는 기다림이 시작되었다.
그런 와중에 잔뜩 찌푸린 표정으로 의자에 앉아 있는 고덕을 바라보던 단목하진은 생각했다.
남궁세가가 벽력탄을 불 위에 올려놓고 굽기 시작한 것이라고…….
* * *
그 시각 남궁세가의 중심, 창궁전(蒼穹殿)에선 심각한 대화가 오고 가고 있었다.
“그걸 믿어야 한단 말인가?”
“단목세가의 소가주가 직접 나선 일입니다. 아니라면 예까지 찾아올 일은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수색에 가장 난색을 표했던 남궁단이 회의석상에선 적극적으로 수색을 종용하고 있었다.
상대에게 보여 주어야 하는 모습이 있는 반면, 내부에선 문제가 발생되지 않도록 힘을 써야 하는 모순된 직책이 바로 외총관이었기 때문이다.
“하면, 외총관은 수색을 용인하자는 말인가?”
“외부인에게 수색을 맡기는 것이 아닙니다. 의심을 불식시키기 위해, 또 만약을 위해 우리 스스로가 점검해보는 것입니다.”
“점검이라……?”
가주의 중얼거림에 남궁단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점검을 해봐야 할 정도로 세가 내 정보에 자신이 없는 겐가?”
“세상의 일은 간혹 봐야만 확신할 수 있는 일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흠… 틀린 말은 아니지.”
가주의 반응에 두 사람의 대화를 조용히 듣고만 있던 내총관이 나섰다.
“설마 허락하실 생각은 아니시겠지요?”
“왜? 내총관은 생각이 다른가?”
“당연합니다. 외부 인사의 말 한마디에 세가에 대한 수색이라니요. 있을 수 없습니다.”
“하면, 내총관은 이 문제를 그냥 덮어두자는 말인가?”
“그렇진 않습니다. 각 담당자들을 통해 자신의 부서에서 혹시라도 최근에 다른 이들을 잡아들인 일이 있는지만 조사해도 충분하리라 생각합니다.”
“그것도 나름 괜찮군.”
이것도 좋다, 저것도 괜찮다 말하는 가주 때문의 장로들의 표정이 혼란스럽게 변했다.
그에 슬쩍 미소를 지어 보인 가주가 말했다.
“병행하지. 내총관부는 내총관의 뜻대로, 외총관부는 외총관의 뜻대로. 체면도 살리고 명분도 생길 것 같은데, 어떤가?”
가주의 말에 내총관과 외총관은 고개를 숙였다.
부드럽게 말해도 그것이 권고가 아니라 명인 것을 알기 때문이다.
“명을 받습니다.”
두 사람의 답에 남궁세가의 가주, 진천신검 남궁창천의 입가에 만족한 미소가 어렸다.
회의가 파한 이후 불현듯 남궁세가가 부산스러워졌다.
내총관부 관할 부서들은 부서장들이 회의에 불려 간 일로, 외총관부에 속한 이들은 갑작스런 기찰이 벌어진 탓이었다.
한참 예하 전각과 부서들을 돌아보던 남궁단에게 외총관부 소속인 기찰전주가 다가왔다.
“외총관님.”
“무슨 일인가?”
“수문전을 조사하던 중에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는지라…….”
“뭔데 그러나?”
“실은 며칠 전에 수석 호원께서 가마 하나를 들인 적이 있답니다.”
“가마?”
“예.”
“가마를 왜?”
“그게… 가끔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외부에서 여인을 들이는 분들이…….”
수석 호원이 성혼을 하지 않은 혼자의 몸이니 여인이 있는 것은 상관이 없었다.
하지만 나가서 만나는 것이 아니라 안으로 들인다는 것은 결코 좋은 행동은 아니었다.
“수석 호원 외에도 그런 사람들이 있단 말인가?”
“내총관께서도 그렇고 몇몇 분들이…….”
“이런!”
내총관은 자신과 생각이 다르다고는 해도 같은 피를 이어받은 사촌 형제였다.
물론 지금 보고하는 기찰전주도 한 핏줄인 사촌이었지만…….
“그렇다면 특별한 것은 아니질 않나?”
“그게… 가마가 들어왔던 시간이 밤이 아니라 낮이었다고 합니다.”
“낮에?”
“예.”
기찰전주의 답에 골똘히 생각하던 남궁단이 물었다.
“호원이면 내총관부 관할이지?”
“그렇습니다.”
“손을 쓸 수 있겠나?”
“그것이 민감한 사안이라…….”
문제가 없으면 개인적인 일을 들춰내 모욕을 준 게 된다.
일반 무사라도 참기 힘든 일을 한백 정도의 고수가 어찌 반응할지 알 수 없었다.
“난감하군.”
남궁단의 말에 기찰전주가 조심스럽게 의견을 제시했다.
“내총관님과 상의를 해보심이 어떻겠습니까?”
“아무래도 그래야겠네. 내 다녀올 테니 다른 곳을 세심하게 살피게.”
“예, 외총관님.”
기찰전주의 복명을 받은 남궁단은 그길로 내총관부를 찾았다.
“어쩐 일인가? 바쁘다고 들었는데.”
“잠시 부탁이 있어 들렀네.”
“내게?”
“그래.”
“어디, 무슨 일인지 들어보지.”
검토하던 서류를 한쪽으로 밀어놓은 내총관, 남궁영호가 탁자로 내려앉았다.
“그게 수문전을 조사하다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게 발견되어서 말이야.”
남궁단의 말에 남궁영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마음에 걸리는 일?”
“그게… 수석 호원이 며칠 전에 가마 하나를 세가 안으로 들였네.”
그 말에 살짝 안색을 붉힌 남궁영호가 헛기침을 했다.
“험험. 그, 그거야…….”
“아네. 왜 그런 줄은. 문제는 그 시간일세. 가마가 들어온 시간이 낮일세.”
생각 못했던 말에 조금 더 붉어진 얼굴로 남궁영호가 웃었다.
“크크, 수석 호원에게 그런 취미가 있는 줄은 몰랐군. 낮이라……. 하긴 낮도 색다르긴 하겠어.”
“흠흠. 나, 나도 그게 걱정되어 자네에게 부탁하는 걸세. 조용히 알아봐주게.”
“내가?”
“그래.”
“내가 물으면 자네보다 나을 거라 생각하나?”
“그런 말이 아닌 건 알지 않나.”
사촌인 남궁단의 말에 잠시 생각을 고른 남궁영호가 책상으로 돌아가 벽 쪽에 늘어진 붉은 줄 중 하나를 잡아당겼다.
그러자 잠시 후, 검은 야행복 차림에 복면까지 쓴 사람이 들어왔다.
“부르셨습니까?”
“수석 호원의 최근 행적을 뒤져 봐. 특히 가마가 들어온 날의 행적을 유심히 조사해서 보고해주게.”
“알겠습니다.”
대답한 복면인이 나가자 다시 탁자 앞에 앉은 남궁영호가 못마땅한 기색을 띠었다.
“비영전을 이런 일로 사용하다니, 이건 인력 낭비야.”
사촌 형제의 투덜거림에 남궁단은 작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고맙네.”
“일단 기다려 봐. 일각 정도면 정보가 정리돼서 올라올 거야.”
“알았네.”
“그나저나 단목세가의 소가주와 함께 왔다는 사람 말이야.”
“누구? 이 차석의 사돈이라는 사람?”
“그래. 그 사람, 정말 초극이야?”
“모르지. 그의 무위를 확인할 만한 어떤 계기도 없었으니까.”
“기파는? 이야길 나누었다면 기파를 느꼈을 게 아닌가?”
사촌의 물음에 남궁단이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 보니 기파를 느끼지 못했군.”
“뭐? 아무리 정신이 없었다지만 상대의 기파를 못 느끼다니. 너무 방심한 거 아니야?”
“그게 꼭 그런 건 아닌데… 모르겠군.”
“설마… 아니겠지?”
“뭘?”
남궁단의 되물음에 남궁영호가 고개를 저었다.
“에이~ 아닐 거야. 있을 수 없는 일이지.”
“뭐? 서, 설마 그가 화경을 넘었을 걸 생각하는 거야?”
“네가 기파를 못 느꼈다니까…….”
남궁영호의 말을 듣고 골똘히 생각해보던 남궁단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화경이 뭐가 아쉬워서.”
화경이면 강호 전체를 내려다볼 경지다.
물론 비슷한 경지의 인물이 십여 명 정도 있고, 그 위 단계인 현경의 고수가 다섯이나 더 있지만, 분명 화경만 되어도 천하를 굽어볼 위치 정도는 스스로 만들어낼 수 있었다.
“하긴 그런 인사가 시골에서 농사나 지을 린 없겠지.”
“그래. 화경의 고수가 은거한 형태라고는 믿기 어려워.”
두 사람의 의견이 처음으로 일치된 상황에 둘은 서로를 바라보곤 피식 웃어버렸다.
“우리가 같은 의견일 때도 다 있군.”
남궁영호의 말에 남궁단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뭐, 이런 일도 있어야겠지.”
“그런가…….”
두 사람의 대화가 끊어질 때쯤 복면인이 다시 들어왔다.
“조사 결과는?”
물음에 고개를 조아린 복면인이 답했다.
“내총관께서 관심을 가지실 만한 변화는 오 일 전에 들어온 가마뿐입니다.”
“일이 아니라 변화?”
“예. 가마가 수석 호원의 숙소가 아니라 예서원(禮徐垣)으로 향했습니다.”
“예서원?”
“예.”
예서원은 그 이름과 달리 부드러운 곳이 아니었다.
“기녀를 감옥으로 불렀단 말이야?”
“그게… 기녀도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그게 무슨 소리야?”
“들어온 이들이 아직 예서원에 있답니다.”
“뭐?”
남궁영호의 놀람에 복면인이 말을 이었다.
“그들이 아직 갇혀 있습니다.”
“하지만 호원에선 누굴 가둔 적이 없다고……. 이런, 즉시 수석 호원을 모셔 와.”
“알겠습니다.”
복면인이 명을 좇아 나가자 남궁영호가 어두운 표정으로 남궁단을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감이 안 좋아.”
“이번에도 같은 생각이군.”
남궁단의 말을 듣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 남궁영호가 밖을 향해 고함을 질렀다.
“누구 없느냐?”
“다윤이옵니다.”
문밖의 수신 무사가 바로 답하자 남궁영호의 명이 떨어졌다.
“청풍검대주를 들라 이르라.”
청풍검대는 내총관부 휘하의 전투 집단이었다.
“예.”
답이 들려온 후 멀어지는 발소리를 들은 남궁단이 물었다.
“청풍검대주는 왜?”
“감이 아주 안 좋아.”
“설마……?”
“일단 대비라고 말해두지. 말뿐일지라도 더는 나가지 말자구.”
그 말에 남궁단이 입을 다물었다.
잠시 후, 복면인이 달려 들어왔다.
서두른다는 건 문제가 생겼다는 의미였기에 기다리던 두 사람의 표정이 일그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