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장. 그의 대계(大計)? -03
끼이익.
낡은 경첩 소리와 함께 오랜 세월이 느껴지는 목문이 열렸다.
그와 동시에 오래된 책 냄새와 나무 특유의 냄새가 콧속 가득 파고들었다.
“오랜만이네, 장경각도.”
개인 수련을 마치고 장경각을 찾은 반호진이 씨익 웃었다.
장경각 특유의 냄새가 그에게는 정겹게 다가왔다.
예전에는 정말 오기 싫은 곳 중 하나였는데 오늘은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직접 찾았다.
“불경이나 도경은 다음에 보기로 하고.”
소림사의 역사가 긴 만큼 장경각에 쌓여 있는 서책들도 어마어마했다.
그런데도 정리는 깔끔하게 되어 있었다.
장경각을 관리하는 제자들이 매일같이 깔끔하게 정리한 덕분이었다.
특히 분류가 정말 잘되어 있는 모습에 반호진은 새삼 감탄했다.
“다시 봐도 어마어마하네. 관리도 엄청 잘되어 있고.”
보기 좋게 잘 정리되어 있다는 뜻은 그만큼 엄청난 정성을 쏟았다는 말과도 일맥상통했다.
매일 들어오는 불경이나 무공서가 적지 않은 만큼 그걸 분류하고 정리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안목 또한 뛰어나야 했고.
그런데 이런 것들이 예전에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뭐, 그땐 그게 정상이었으니까. 여유가 없기도 했고.”
과거의 반호진은 하루 중 대부분을 수련으로 보냈고, 그 수련의 대부분을 달마삼검에만 매달렸었다.
그렇기에 다른 일을 할 여유가 없었다.
누가 보채는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도 그때의 반호진은 무공 수련에만 매진했었다.
“어디 보자.”
감상을 끝낸 반호진은 찬찬히 장경각 내부를 둘러봤다.
방장인 담현의 제자이지만 그는 속가제자이기에 들어갈 수 있는 방이 제한되어 있었다.
칠십이종절예의 무공서나 역대 소림사의 방장들과 장로들이 남긴 무공비급이나 주석들은 제아무리 반호진이라도 볼 수 없었다.
그렇기에 반호진에게 허락된 건 속가제자들에게 개방된 방들뿐이었다.
“흐음.”
어떻게 보면 차별이라고 할 수 있으나 소림사 입장에서는 당연했다.
같은 제자라고 해도 진산제자와 속가제자는 다를 수밖에 없으니까.
그리고 주어진 게 다르다고 투정 부릴 시간에 더 노력하는 게 나았다.
스르륵. 스륵.
무공을 숙달시키는 것도, 내공을 늘리는 것도 전부 다 시간이 필요했다.
서두른다고 해서 하루아침에 전생의 힘을 회복하는 게 아니었기에 반호진은 조급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어설프게 탑을 쌓는 것보다는 조금 느리더라도 확실하게 쌓는 게 결국에는 더 빠르다는 걸 잘 알아서였다.
그렇다고 그가 이룩한 경지가 어디로 도망치는 것도 아니었다.
때문에 반호진은 서두르지 않고 차근차근 무경을 회복해 갔다.
“확실히 장경각은 장경각이라니까.”
그렇다고 반호진이 이곳에 놀러 온 건 아니었다.
속가제자로서 볼 수 있는 무공서에는 제한이 있지만, 분류 역시 사람이 하는 일이었다.
장경각주라고 해도 모든 무공비급의 가치를 정확하게 판단하는 건 불가능했다.
아는 것과 깨달은 것의 차이가 현격하듯이 반호진 정도의 수준이 되면 안목 역시 평범한 기준을 아득히 벗어났다.
“호오, 이건 괜찮네.”
지난 생에서는 시행착오를 참 많이 겪었었다.
그게 결국에는 거름이 되어 반호진을 초월경으로 이끌어 주었지만 꽤 적지 않은 시간을 날린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이번 생은 그럴 일이 없기에 반호진은 장경각을 찾았다.
혹시나 도움이 되는 무공서가 있을까 싶어서였다.
“나쁘지 않아.”
반호진은 자신이 아는 것만이 전부라는 생각을 가지지 않았다.
과거에는 그랬었으나 지금은 달랐다.
천재는 다른 이들보다 재능이 조금 더 뛰어날 뿐이지 모든 걸 다 아는 건 아니었다.
자신은 다르다고, 모든 걸 안다고 착각하는 순간 오만과 아집에 빠지게 되고 결국 성장은 거기서 끝이었다.
그걸 깨면 천재나 기재, 혹은 귀재의 수준을 넘어 천하를 호령하는 고수가 되는 거고, 깨지 못하면 세상에서 자연스럽게 잊힐 터였다.
천재와 전지(全知)는 단어 자체도 완전히 달랐다.
그런데 이걸 알지 못하는 이들이 의외로 많았다.
“어른들이 괜히 겸손하라고 한 게 아닌데 말이지. 뭐, 진짜 모든 걸 다 아는 이가 있을 수도 있지만 아직은 나타나지 않았으니까.”
무릇 모든 일에는 예외가 있는 법이었다.
그것도 반호진은 알고 있기에 섣불리 단정 짓지는 않았다.
탁.
잡념을 털어 낸 반호진은 이내 하는 일에 집중했다.
한쪽 책장을 가득 채우고 있는 무공서들 중 눈길이 가는 것들을 빠르게 읽어 내려갔던 것이다.
그러나 기대했던 것들과 달리 그의 눈을 번쩍 뜨이게 만드는 무공서는 없었다.
“목적이 그거 하나만 있는 건 아니니까.”
“무슨 목적?”
“장 사형.”
“그래, 나다.”
“저에게 할 말이 있으십니까?”
장경각은 넓었으나 반호진의 기감이 감당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렇기에 반호진은 진즉부터 알고 있었다.
장필상이 장경각에 들어오자마자 누군가를 찾듯이 두리번거리다가 이쪽으로 온 걸 말이다.
“싸가지 없는 건 여전하구나.”
“사람은 쉽게 안 변하는 법이죠.”
“참나.”
장필상이 눈에 힘을 주었다.
그러나 고작 째려보는 짓에 겁을 먹을 반호진이 아니었다.
더욱이 천하사패와의 전쟁 때 장필상이 무슨 짓을 했는지 알기에 반호진은 입에서 좋은 말이 나오지 않았다.
“용건이 없으면 이만 가 보겠습니다.”
“천재라고 치켜세워 주니까 이제는 사형도 사형으로 안 보이는 거냐?”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습니다.”
“지금 네 행동을 말하는 거잖아.”
말을 섞기 싫어 자리를 떠나려는데 장필상이 앞을 가로막았다.
그러고는 검지로 반호진의 어깨를 찌르듯이 툭툭 건드렸다.
“제가 사형 대접을 안 했다고요? 그럴 리가요. 저는 예의를 다했습니다만?”
“그 눈빛으로?”
“제 눈빛이 어떤 눈빛인데요?”
“사형을 잡아먹을 눈빛이지.”
장필상이 으르렁거렸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는 반호진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속가제자 주제에 방장의 제자가 되었다는 것도, 그리고 집안이 별 볼일 없다는 것도 다 거슬렸다.
재능 하나만 믿고 설치는 게 심히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진짜 잡아먹어 드려요?”
“이 새끼가……!”
거기다 장필상을 더욱 짜증 나게 하는 건 바로 이 싸가지 없는 성격이었다.
아무리 방장인 담현의 막내제자라고 하나 항렬은 엄연히 그가 위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반호진은 그에게 단 한 번도 공경을 보인 적이 없었다.
“소림사의 제자가 육두문자라니. 참 그 성격도 여전하네요. 말 함부로 해서 혼난 걸 꽤 오래전부터 본 것 같은데.”
“닥쳐라!”
“이제는 일대제자 배분이라고 막 나가는 겁니까? 아니면, 집안을 믿고 설치는 것이려나? 근데 그거로는 많이 부족할 텐데요?”
“닥치지 못하겠느냐!”
반말과 존대를 오가는 반호진의 화법에 장필상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작은 도발에 지나치게 흥분했던 것이다.
그러면서 당장이라도 손찌검을 하려는 듯이 팔을 움찔거렸다.
“때릴 거면 참지 마시죠. 물론, 그에 따른 책임은 본인이 져야 할 겁니다. 아니면 정정당당하게 비무 신청을 하시든가.”
부르르르!
흥분했으나 그렇다고 이성을 잃은 건 아니었다.
손을 쓰는 순간 자신이 어떻게 될지는 장필상 본인이 잘 알았다.
분하고 짜증 나지만 무경은 그보다 반호진이 몇 수는 위였다.
그렇기에 장필상은 악귀 같은 얼굴로 이를 악물었다.
“……충고 하나 하지. 그렇게 건방 떨다가는 언제고 크게 다칠 거다.”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적당히 숙이는 법도 배워야 할 거다. 나중에 개망신당하기 싫으면.”
“또 어디선가 뒷돈을 받은 모양이네요. 그렇게까지 참으면서 꿋꿋하게 할 말을 하는 걸 보면. 평소였다면 마주치더라도 알은척은 하지 않았을 텐데.”
“흥!”
콧방귀와 함께 장필상이 몸을 돌렸다.
어찌 됐든 할 말은 다 했으니 부탁은 들어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나머지는 그쪽에서 할 일이었기에 장필상은 뒷간에서 빠져나오듯이 황급히 장경각을 나섰다.
“무공을 복구한다고 깜빡 잊고 있었네. 사문에서 치워 버려야 할 것들이 남아 있다는 사실을.”
한편 순식간에 멀어지는 장필상의 뒷모습을 주시하며 반호진이 중얼거렸다.
그런데 반호진의 목소리가 더없이 싸늘했다.
장필상을 보니 천하사패와의 전쟁 중에 그가 저지른 행위가 떠올라서였다.
외부의 적보다 더 무서운 게 내부의 적이라는 사실을 장필상은 소림사와 반호진에게 직접 보여 주었었다.
“마음 같아서는 지금 당장 파문시키고 싶지만 이왕이면 일망타진하는 게 좋으니.”
반호진은 입맛을 다셨다.
지금도 암암리에 온갖 더러운 일을 하고 있을 게 뻔했다.
하지만 타초경사라는 말처럼 장필상을 지금 잡으면 정작 뿌리라고 할 수 있는 이들이 숨어 버릴 게 분명하기에 반호진은 확실한 때를 기다리며 증거를 수집하기로 마음먹었다.
소림사 내에서 입지는 그리 크지 않지만 장필상이 어떤 짓을 하는지 알기에 증거를 모으는 건 어렵지 않았다.
“뭐, 꼭 내 손을 더럽힐 이유도 없고.”
반호진이 씨익 웃었다.
이런 일에 적합한 이들이 소림사에는 많아서였다.
그리고 청정사찰이라는 이름에 걸맞으려면 장필상 같은 이들은 모조리 치워 버리는 게 좋았다.
“어쨌든 고맙네. 잊고 있었는데.”
이번 삶은 설렁설렁 사는 게 목표였지만 그렇다고 해야 할 도리를 안 하겠다는 건 아니었다.
할 건 하되 여유롭고 행복하게 사는 게 이번 삶의 목표였다.
***
“차합!”
“이야압!”
이른 아침부터 연무장에서 힘찬 기합성이 터져 나왔다.
내공도 중시하지만 소림사의 근간은 외공이었다.
그렇기에 현재까지도 소림사는 외공수련을 등한시하지 않았다.
“주먹이 흔들린다. 설마 이 정도 하고 벌써 지친 거야?”
“아, 아닙니다!”
“대답만 하지 말고.”
정현을 비롯해서 이대제자들이 악을 쓰며 나한권을 펼쳤다.
갓 동자승을 벗어난 아이들이 땀을 뻘뻘 흘렸으나 반호진은 눈 한 번 깜빡이지 않았다.
수련이 고되고 힘든 건 당연하다고 생각해서였다.
이게 싫다면 포기하면 되었다.
“으아앗!”
“나라면 기합에 쓸 힘을 나한권 펼치는 데 쓰겠다.”
“흐읍!”
나지막하지만 신기하게도 연무장 전체로 퍼져 나가는 반호진의 목소리에 이대제자들이 이를 악물었다.
냉정하지만 맞는 말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남아 있는 힘이 한정적이라면 최대한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게 맞았다.
“딴 거 필요 없어. 딱 하나만 생각해. 나한권의 기본형만 몸에 익힌다고. 응용은 가장 기본적인 걸 다 익힌 후에 하는 거야. 숙달도 안 됐는데 응용을 하려 하면 이도 저도 안 된다.”
“네!”
“명심하겠습니다!”
반호진이 매의 눈으로 이대제자들을 살폈다.
나한권은 속가제자들도 전수를 받는 소림사의 기본공이었다.
또한 소림사의 모든 권법의 근간을 이루는 무공이기도 했다.
그렇기에 소림사의 제자에게 나한권은 너무나 중요한 무공이었다.
“정현아. 발의 위치가 틀렸다.”
“시, 시정하겠습니다!”
“나한권과 나한보를 같이 펼치는 건 누구에게나 어려워. 예외인 사람도 있지만 대개는 그렇지. 그러니까 더 열심히 해야지.”
“예!”
정현은 예외인 사람이 누구인지 단박에 알아들었다.
실제로 반호진은 나한보를 며칠 만에 완벽하게 펼쳐 보인 것으로 유명했다.
기본공이고 속가제자이기에 후반부를 전수하지 않았다고 하나 대단한 건 사실이었다.
그래서 은연중에 전설처럼 회자되었다.
“나라고 노력을 안 하는 건 아냐. 그건 너도 잘 알잖아?”
“……알죠.”
잠시 쉬는 시간이 되자 정현이 바닥에 주저앉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경내에는 반호진이 재능만 믿고 게을러졌다는 소문이 여전히 도는 중이었다.
하지만 그가 수련하는 걸 본 정현은 그게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헛소문인지 바로 알게 되었다.
‘미친 수련이지. 단순 반복 수련을 그렇게 쉬지도 않고 할 줄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