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재림-11화 (11/468)

제 5장. 숨기려 해도 숨길 수 없는. -01

정현이 질린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지금 이 자리에 모인 이대제자들은 힘들다고 소리 없는 아우성을 하고 있지만 반호진이 하는 수련을 그대로 시키면 저렇게 투정 부리는 이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이미 지쳐서 기절했을 테니까.

괜히 정현이 군말 없이 반호진의 지시에 따르는 게 아니었다.

“그래도 아직은 버틸 만하지?”

“이 정도는 사백님의 수련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니까요. 그리고 정말 귀신같이 더는 못 버틸 정도까지만 몰아붙이시잖아요.”

“무식한 수련은 몸을 망칠 뿐이야. 수련하는 이유는 강해지기 위해서지 몸을 혹사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니까.”

“그게 되게 신기해요. 다른 사백님들이나 사숙님은 못 하시던데.”

“다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거야. 나만큼 빡시게 수련하는 사람 봤어?”

뒷말은 누가 들을까 봐 작게 얘기하는 정현의 모습에 반호진이 피식 웃었다.

눈치를 보면서도 할 말은 다 하는 게 웃겨서였다.

“저는 하라고 하면 못 할 거 같아요.”

“넌 지금 하면 안 된다니까. 성장기에는 좋지 않아. 몸은 강한 듯하면서도 의외로 약하거든.”

스스로의 몸을 한계치 이상까지 혹사시켜 본 적이 있기에 반호진은 확신하듯 말했다.

그가 직접 겪어 보았기에 확실하게 말해 줄 수 있었다.

혹사는 시간낭비라고 말이다.

“근데 저만 봐주시는 거 아니었어요?”

“특별 대우를 바라는 거야?”

“전 저만 무공을 봐주시는 걸로 알았어요.”

“왜? 경쟁자가 약해졌으면 좋겠어?”

반호진의 얼굴에 장난기가 서렸다.

그러고는 정현이 혼자 호적수라 생각하는 이대제자를 눈짓했다.

말하지 않아도 자신은 다 안다는 듯이 말이다.

그 모습에 정현이 뾰로통한 표정을 지었다.

“제 말은 그런 뜻이 아니라…….”

“경쟁은 정정당당해야지. 그리고 너는 따로 날 찾아오잖아. 아무 때나.”

“어…….”

말문이 막힌 정현이 말끝을 흐렸다.

생각해 보니 모두가 어려워하는 반호진을 아무렇지 않게 찾아갈 수 있는 건 그뿐이었다.

반호진이 딱히 찾아오지 말라고 한 건 아닌데 특유의 분위기가 있었다.

그 분위기가 선뜻 다가가지 못하게 만들었다.

“며칠 봐준 걸로는 실력이 확 늘지 않을 거야. 근데 원래 기본기라는 게 그래. 변화가 없는 것 같은데 어느 순간 확 달라져 있어. 어찌 보면 물이 끓는 것과 비슷해. 일정 온도가 되어 부글부글 끓기 전에는 달궈지고 있는지, 그냥 그 상태인지 육안으로는 구분이 잘 안 되니까.”

“저는 확 달라진 걸 느끼고 있어요. 일단 몸이 완전 가벼워졌어요. 나한권을 펼치는 게 조금 쉬워진 느낌이라고나 할까요. 몸이 보다 더 제 뜻대로 움직이는 거 같아요. 예전에는 제 몸인데 제 뜻대로 안 움직였거든요.”

정현이 두 눈을 초롱초롱하게 빛냈다.

남들이 보기에는 별 차이가 안 나는 것 같아도 정현 스스로는 확실하게 느끼고 있었다.

몸을 다루는 감각이 완전히 달라졌음을 말이다.

거기다 반호진이 해 주는 조언은 버릴 게 진짜 하나도 없었다.

“그걸 왜 진즉 못 했어?”

“그게 제 뜻대로 되나요.”

“뭐, 그래도 많이 나아졌어. 첫날에 비하면.”

“헤헤헤.”

“하지만 아직 갈 길이 멀어. 따라잡으려면 상대보다 두 배, 세 배 더 노력해야 해. 추월하려면 열 배로 노력해야 하고.”

마음만 먹어서는, 다짐만 해서는 달라지는 건 단 하나도 없었다.

중요한 건 실행력이었다.

무엇이라도 해야 변화가 찾아오기에 반호진은 주입시키듯 말했다.

“제가 게을러지면 사백님께서 따끔하게 말해 주세요. 그럼 정신이 번쩍 들거든요.”

“내가 말하기보다는 스스로, 알아서 잘해야 하는 거 아냐?”

“에이, 전 아직 어리잖아요. 파릇파릇한 열다섯 살인걸요!”

“밖이었으면 장가도 갈 수 있는 나이야. 농사짓는 집이었으면 가장도 될 수 있는 나이지.”

“많은 분들께서 본사에 시주해 주신 음식들을 정말 감사한 마음으로 먹고 있습니다.”

어울리지 않게 진중한 목소리로 대답하는 정현의 모습에 반호진이 헛웃음을 흘렸다.

나름 스님처럼 행동하지만 그의 눈에는 여전히 동자승처럼 보였다.

몸이 커지고 목소리가 굵어졌어도 반호진에게는 여전히 애였다.

“알면 됐다. 이제 그만 쉬고 다시 시작해. 초식 수련 다음에는 대련이니까.”

“넵!”

힘차게 대답하는 정현을 일별한 반호진은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나는 이대제자들을 찬찬히 둘러봤다.

속된 말로 싹수가 있어 보이는 아이들을 찾았던 것이다.

‘뭐, 싹수가 있다고 꼭 재능을 만개하는 건 아니니까.’

각자 타고난 재능의 크기도 다르지만 중요한 건 자신이 가진 재능을 만개하느냐, 못 하느냐였다.

대부분의 무인들은 만개시키지 못했다.

남이 도와준다고 해도 한계가 있었고.

하지만 반호진이 지도한다면 가능성은 확실히 높아졌다.

“흐음.”

사부인 담현 역시 그게 가능하지만 방장으로서 해야 할 일이 산더미인 그가 이런 일까지 하는 건 시간낭비였다.

사실 그렇게 따지면 반호진도 개인 수련을 하는 게 더 이득이었으나 그렇게 해서는 미래를 바꿀 수 없었다.

당장은 여유가 있기도 했고.

“남은 남일 뿐이지. 결국 믿을 수 있는 건 가족이니까.”

선우방처럼 소림사 밖에도 인재는 많았다.

나중에 거물이 되는 이들도 제법 알고 있었고.

그러나 재능이 있는 것과 믿을 수 있는 건 달랐다.

자칫하면 남 좋은 일만 해 줄 수 있기에 반호진은 우선 내실부터 다질 생각이었다.

“차합!”

“흡!”

그런 반호진의 생각을 아는지 이대제자들은 힘차게 주먹을 뻗고 발을 내질렀다.

나한권과 나한보가 자연스럽게 어우러질 때까지 끊임없이 반복하고 또 반복했다.

또르륵.

하루를 마무리하기 위해 반호진은 차를 따랐다.

따뜻한 차 한 잔으로 일과를 마무리하려는 것이었다.

“의외로 조용하네.”

고급 품종의 차는 아니지만 숭산에서 자란 찻잎으로 우려낸 차여서 특유의 맛이 있었다.

그렇기에 반호진은 주로 이 차만 마셨다.

익숙함과 동시에 추억의 맛이기도 해서였다.

다시 한번 차를 마시며 반호진은 장필상을 떠올렸다.

“역시 한 곳만 받은 게 아닌가?”

장필상이 큰소리를 쳤지만 반호진은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항렬만 높을 뿐 장필상이 소림사 내에서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걸 반호진은 너무나 잘 알았기에 신경 쓰지 않았던 것이고.

다만 장필상이 그렇게 말했는데 아무런 연락이 없는 게 좀 이상했다.

“나야 좋지. 귀찮게 안 하면.”

친분을 나눠서 나쁠 건 없었다.

다만 문제는 그게 친목질로 변할 가능성이 크다는 점이었다.

만약 반호진이 전생의 기억을 몰랐다면 인정받았다는 사실에 헬렐레 하고 다닐 수도 있겠지만 아쉽게도 그는 미래의 기억을 알고 있었다.

선우방과 같은 이들이 떼로 모여 있다면 모를까 지금 소림사에 있는 후기지수들은 굳이 친해질 필요가 없었다.

똑똑똑.

“들어오시죠.”

“귀신같구나. 입도 안 열었는데.”

“일부러 기척을 내셨지 않습니까. 숨기지 않으셨으니 당연히 알 수밖에요.”

문이 열리며 법무가 안으로 들어왔다.

놀란 기색을 숨기지 않고서 말이다.

“그래도 너처럼 당황하지 않는 사람은 드물어.”

“애초에 이 시각에 찾아오는 사람도 몇 없지요.”

“타박하는 것이냐?”

“확률을 말씀드린 겁니다.”

반호진이 씨익 웃었다.

애초에 선택지가 몇 개 없음을 말한 것이었다.

그러고는 익숙하게 찻잔을 챙겨 자리에 앉은 법무에게 차를 따라 주었다.

“말도 없이 갑자기 찾아와서 미안하구나.”

“괜찮습니다. 아직 자기에는 이른 시간이니까요. 그리고 대사형께서도 지금 말고는 여유 시간이 없지 않습니까.”

“네가 이해해 주니 고맙기는 한데, 적응이 안 되는구나. 성격이 왔다 갔다 하는 것 같아서.”

“이제는 좀 열어 놓고 살려고 합니다. 예전에는 너무 조심스럽게 산 것 같아서요.”

반호진이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내면에서 많은 변화가 있었음을 알려 주는 미소에 법무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지금의 모습이 의아하기는 하나 그렇다고 싫은 건 절대 아니었다.

또한 반호진이 사고를 친 것도 아니기에 법무는 사제의 결정을 존중할 생각이었다.

“속가제자인 사제에게 진산제자의 규율을 적용하는 것도 이상한 일이지.”

“제가 그렇다고 사고를 친 건 아니지 않습니까?”

“맞아. 언제 사고를 칠까 조마조마하신 분들은 제법 계시지만.”

“사부님께도 말씀드렸지만, 소림사의 이름에 먹칠하는 행동은 안 합니다.”

“알지.”

법무가 씨익 웃었다.

비록 속가제자이지만 반호진이 소림사를 사랑한다는 건 그가 잘 알았다.

사부인 담현도 마찬가지고.

다만 승려도 사람인지라 걱정이 되는 것뿐이었다.

“나중에는 작은 소란을 일으킬 수도 있겠지만요.”

“소란 정도야. 싸움도 심심찮게 나는 곳이 무림인데. 본사가 사찰이라고 하나 무림의 세력인 것 또한 사실이니.”

법무는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속가제자라고 하나 반호진은 소림사 방장의 단둘뿐인 제장 중 한 명이었다.

그렇기에 무림에서의 신분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혹시 생길 수도 있다고 말씀드린 겁니다.”

“나도 안다. 사부님을 제외하면 너에 대해서 가장 잘 아는 게 나인데 그걸 모르겠느냐. 그보다 이대제자들을 봐주고 있다고 들었다.”

“문제가 된다면 그만하겠습니다.”

“그런 뜻이 아니라 잘했다고 칭찬하려 말한 것이다. 무슨 바람이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개인적으로 나는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

차를 한 모금 들이켜며 법무가 말했다.

반호진 정도 되는 고수에게 시간이 어떤 의미인지 알기에 법무는 처음 소식을 들었을 때 믿기 힘들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반호진이 그럴 줄은 몰라서였다.

하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고마웠던 것도 사실이었다.

“다 가족이지 않습니까. 어떻게 보면 제가 받은 걸 아이들에게 돌려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허허허.”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들어서일까.

법무의 눈이 살짝 커졌다.

그러나 이내 법무는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스무 살이 되더니 확실히 성숙해진 것 같아서였다.

“남을 핍박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지키기 위해서라도 힘은 필요하니까요. 평화가 되었든, 명예가 되었든 말이지요.”

“맞다.”

“그런데 고민거리가 있으십니까?”

반호진이 찻잔을 내려놓으며 법무를 지그시 바라봤다.

전생을 합쳐도 법무가 살아온 시간보다 적었지만 그래도 삼십 년이 넘게 살아온 그였다.

척 보면 알았다.

단순히 칭찬하러 온 게 아님을 말이다.

“고민거리라기보다는 개인적으로 너에게 부탁할 것이 있어서 왔다.”

“편히 말씀하시지요. 우리가 내외하는 사이는 아니지 않습니까.”

“녀석.”

점차 무거워지는 분위기를 자연스럽게 환기시키는 농담에 법무가 피식 웃었다.

그러면서 새삼 반호진이 훌쩍 컸다는 걸 느꼈다.

예전에는 마냥 아이 같았는데 지금은 눈빛도, 생각도 많이 달라졌다.

“속앓이해 봤자 달라지는 건 없습니다. 풀 수 있는 건 그때그때 푸는 게 정신 건강에 좋습니다. 육체 건강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보면 그보다 더 중요한 게 정신 건강이더라고요.”

“경험담처럼 말하는구나.”

“직접 경험해 봤으니까요.”

“흐음. 나와 비무를 한 번 해 주겠느냐?”

편안하게 만들어 주는 반호진 덕분에 법무는 어렵지 않게 방문한 목적을 말했다.

이상하게 잘 나오지 않은 말이라서 그런지 내뱉고 나니 조금 후련한 느낌이 들었다.

“얼마든지요.”

“전력을 다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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