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장. 그의 대계(大計)? -02
남궁소연이 눈을 반짝였다.
잔뜩 기대하는 표정으로 말이다.
“그렇게까지 이기고 싶어?”
“이왕이면 자존심도 챙기고, 승리도 하고. 좋잖아? 언니도 그 남자가 궁금하다며?”
“궁금하기는 하지. 근데 소림사에서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으니까. 하물며 오빠도 만나지 못하는 마당에.”
“혜정이라면 방법을 찾아내지 않을까?”
“정 보고 싶으면 직접 찾아가지 그래?”
남궁수연의 말에 남궁소연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절대 그것만은 할 수 없다는 듯이.
“그건 모양이 너무 안 살잖아. 내가 그래도 남궁세가의 금지옥엽인데.”
“자존심만 세우다가 더 초라해지고 비참해질 수도 있어.”
“그러니까 방법을 찾아야지.”
남궁수연은 나지막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상한 곳에서 자존심을 세우는 것 같아서였다.
“혹시 지금의 관심이 진짜 관심인 거야?”
“그게 무슨 말이야?”
“남자로서 관심이 생긴 거냐는 뜻이야.”
“에이, 그럴 리가. 나 눈 높은 거 언니도 알잖아. 내 취향 아냐.”
남궁소연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실력은 출중할지 모르나 남궁소연은 외모도 중요했다.
물론 그녀가 원하는 남자와 혼인을 하게 될 가능성은 전무했지만.
“근데 왜 그렇게 집착을 해. 나중에 기회가 되면 만나면 되지. 꼭 둘이서만 만날 필요는 없잖아? 괜히 이상한 소문나면 우리만 피곤해져, 아빠도 난감해지고. 그러니 이쯤 해.”
“셋이서 보면 되지.”
“쓸데없는 곳에 용쓰지 마. 괜한 일에 승부욕 불태우지도 말고.”
“알았어.”
지금의 말이 최후통첩이라는 걸 알았기에 남궁소연도 더 이상 떼를 쓰지는 않았다.
이만큼 했는데 안 된다면 사실상 더 할 수 있는 것도 없었고.
대신 남궁소연은 이 굴욕을 가슴속 깊이 새겼다.
언젠가는 반드시 반호진에게 이 굴욕을 되돌려주겠다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
정오가 꽤 지난 시각에 반호진은 처소를 나섰다.
수많은 이들이 만남을 청했음에도 그는 그 어떤 곳에도 응하지 않았다.
애들 놀음에 어울려 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서였다.
그러나 지금 찾아가는 이는 달랐다.
“헙!”
선우세가가 배정받은 숙소에 다가가자 자연스럽게 주변을 경계하고 있던 무인이 화들짝 놀랐다.
설마하니 반호진이 찾아올 줄은 몰라서였다.
어제부터 소림사에 방문한 모든 후기지수들이 반호진과 만나기를 바랐다.
그와 교분을 나누길 원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 뜻을 이룬 이는 없었다.
심지어 삼봉조차도 말이다.
“소가주를 뵙고 싶은데, 가능하겠습니까? 지금 힘들다면 다음에 찾아오지요. 가능한 시간대를 말씀해 주시면 더 좋고요.”
“지, 지금 안에 물어보겠습니다.”
목례와 함께 용건부터 꺼내는 반호진의 말에 장년인이 당황한 기색 그대로 대답했다.
그러고는 근처에 있던 무사에게 반호진이 왔음을 알렸다.
“천천히 하셔도 됩니다. 급한 일은 아니니까요.”
“아닙니다. 이렇게 직접 찾아와 주셨는데. 아, 안으로 들어가시죠.”
“감사합니다.”
부담스러울 정도로 황송해하는 장년인을 따라 반호진은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반호진의 눈에 서서 기다리고 있던 청년이 들어왔다.
그만큼이나 평범한 인상의 청년인데 갑작스러운 반호진의 방문 때문인지 얼굴에 놀람이 가득 담겨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반 공자님.”
“갑자기 찾아와서 많이 놀라셨죠?”
“하하. 솔직히 말씀드리면, 네. 이곳에 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놀란 기색을 좀처럼 떨쳐 내지 못하며 선우방이 대답했다.
두 눈에는 의문을 잔뜩 담고서 말이다.
“그렇다고 제가 못 올 곳에 온 건 아니지요.”
“그렇긴 합니다만 저는 다른 곳에 가실 거라 생각했습니다. 반 공자님을 만나고자 하는 분들이 많으니까요.”
“갑자기 연락이 많이 오기는 하더라고요.”
반호진이 능글맞게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굳이 사실을 감출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서였다.
“삼봉도 거절했다고 들었습니다.”
“본사가 좁은 모양이네요. 벌써 그 소식이 퍼진 걸 보면.”
“그만큼 충격적이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혹 마음에 두신 분이 계십니까?”
“그럴 리가요.”
훅 들어오는 반호진의 질문에 선우방은 대경해서 손사래를 쳤다.
언감생심 꿈도 꿔 본 적이 없어서였다.
“맺어질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현실적으로 가능성이 희박한 건 사실이니까요. 그런데 저를 왜 찾아오셨는지요?”
반호진의 찻잔에 차를 따르며 선우방이 물었다.
두 눈 가득 의문을 담고서 말이다.
“선우 공자와 친해지고 싶어서요.”
“네?”
주르륵.
선우방의 두 눈이 토끼 눈이 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찻잔이 넘쳤다.
당황해서 차호를 꺾어야 한다는 걸 까먹은 것이었다.
찻잔이 넘쳐서야 퍼뜩 정신을 차린 선우방은 당황한 얼굴로 황급히 무명천을 찾아서는 다탁을 닦았다.
“죄, 죄송합니다. 너무 놀라서 그만.”
“이해합니다. 그런데 제가 돌려 말하는 걸 잘 못해서요.”
“그러니까, 저와 친해지고 싶다고요?”
“예.”
“어…….”
선우방이 멍한 표정으로 차를 들이켰다.
이게 무슨 상황인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아서였다.
현재 오대세가의 후기지수들이 만나고 싶어 하는 인물이 눈앞에 있는 반호진이었다.
심지어 그에게는 오르지 못할 나무나 마찬가지인 삼봉도 만나고 싶어 했다.
“보면 아시겠지만, 농담은 아닙니다. 저는 실없는 농담이나 시간낭비 하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거든요.”
“그래서 더 의아합니다. 오대세가도 있는데 왜 저를…….”
“친해지는 데 이유가 꼭 필요한 건 아니니까요. 그렇다고 아예 이유가 없는 건 아닙니다만.”
당최 알 수 없는 말만 내뱉는 반호진의 모습에 선우방은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지었다.
말을 하기는 하는데 하나같이 이해가 되지 않아서였다.
전부 다 뚱딴지같은 소리에 선우방은 말문이 턱 막혔다.
‘성격은 여전하네.’
입을 벌리고서 멍한 표정을 짓고 있는 선우방의 모습에 반호진은 속으로 피식 웃었다.
십 년 후나 지금이나 성격은 똑같은 거 같아서였다.
그래서 선우방이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훤히 보였다.
아마 별 볼일 없는 자신을 찾아온 게 납득이 되지 않는 상태일 것이다.
‘지금은 그저 그런 명문세가의 후기지수지. 지금 당장은.’
후르릅.
도무지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선우방을 일별하며 반호진은 차를 들이켰다.
지금은 조금도 두각을 드러내지 못하는, 그래서 존재감이 전혀 없는 후기지수였으나 십 년 후에는 달랐다.
대기만성의 의미를 몸소 보여 주는 인물이 눈앞에 있는 선우방이었다.
구룡이라 불렸던 이들이 천하사패와의 전쟁에서 허무하게 스러져 갈 때 선우방은 뜬금없이 등장해서는 엄청난 활약을 보였었다.
‘인생은 정말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르는 것이니까.’
후기지수일 때는 누구의 관심도 끌지 못했던 이가 선우방이었다.
수많은 후기지수들 중 한 명일 뿐이었지만 십 년 후에는 달랐다.
당연히 천하십대고수의 자리를 물려받을 거라 생각했던 구룡들이 하나둘 죽어 나갈 때 오직 선우방만이 찬란히 빛났었다.
“혹 이유를 알 수 있을까요?”
“친해지고 싶어서요.”
“아.”
“저도 친구가 필요하거든요.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지만요.”
단순하지만 그렇기에 묘하게 더 가슴에 와닿는 한마디에 멍했던 선우방의 눈동자에 초점이 잡혔다.
진심이 담긴 한마디가 그의 마음을 움직였던 것이다.
그렇다고 선우세가의 위세를 노리고 다가온 것도 아니었다.
객관적으로 신분만 따지면 그는 감히 반호진에 비벼 볼 수 없었다.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제 첫인상이 어땠을지는 저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게 전부는 아닙니다.”
“저는 사람의 단면만 보고 판단하지 않습니다.”
“역시 그럴 것 같았습니다.”
“근데 느낌이 좀 이상하네요. 분명 대화를 하는 건 처음인데 이상하게 편안합니다.”
선우방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본 건 두 번째이고 말을 섞은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도 어색한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았다.
마치 오래된 친구와 함께 있는 듯한 느낌이었기에 선우방은 신기했다.
“나이가 비슷해서 그렇지 않을까요.”
“아, 그러고 보니 나이를 묻지 않았네요. 저는 스무 살입니다.”
“이거 참 공교롭게도 동갑이네요.”
“그렇습니까?”
선우방의 나이를 알고 있었지만 반호진은 전혀 몰랐다는 듯이 대답했다.
이번 생에서는 대화하는 게 처음이었기에 반호진은 그 상황에 맞게 행동했다.
“동갑인데 편하게 말하죠.”
“어, 그럴까요?”
“그러자고. 앞으로 자주 보게 될 사이가 될 텐데.”
“하하하.”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말을 놓는 반호진의 모습에 선우방이 헛웃음을 흘렸다.
어제의 모습대로 정말 거침이 없어서였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 모습이 그리 나쁘게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시원시원해 보였다.
“아직 어색하면 다시 원래대로 돌아가고. 난 어느 쪽이든 상관없어.”
“이미 놓은 마당에 다시 서로 존칭하는 것도 이상하지 않아?”
“그건 맞지.”
“근데 그게 무슨 소리야? 앞으로 자주 보게 될 거라니?”
“무인에게 있어 친구는 역시 이런 대화도 나눠야 하지 않겠어?”
반호진이 개구쟁이처럼 웃으며 허리춤에 있는 검을 손가락으로 툭툭 건드렸다.
그러자 선우방의 눈동자에 묘한 열기가 서렸다.
세간의 주목을 받지 못한다고 해서 강해지고 싶다는 열망이 없는 건 아니었다.
높은 벽을 보고 좌절하는 사람도 있지만 반면에 승부욕을 불태우는 이들도 있었다.
“저, 정말?”
선우방은 당연히 후자였다.
다만 그도 염치는 있었다.
비무가 자신에게는 큰 도움이 되겠지만 반호진에게는 아닐 것이기에 선우방은 조심스럽게 눈치를 살폈다.
“경험은 중요하니까. 선우세가의 무공을 견식해 보고 싶기도 하고.”
“우리 가문의 무공은 그렇게 대단하지 않은데.”
“뭐야? 가문의 무공을 믿지 못하는 거야?”
“세간의 평가가 그러니까.”
선우방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맺혔다.
가문의 무공에 자부심이 없는 건 절대 아니었다.
그러나 자부심과 현실은 별개였다.
결국 중요한 건 결과와 성과였기에 선우방은 받아들여야 하는 건 겸허히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너의 생각은?”
“당연히 천하제일을 노려 볼 만하지. 모든 무공이든 극의를 깨달으면 천하제일무공이 될 수 있다고 하니까.”
“삼재검법만으로도 무림을 평정한 이도 있었고.”
“맞아.”
선우방이 씨익 웃었다.
객관적인 평가를 무시할 생각은 없었다.
다만 그는 노력할 뿐이었다.
사룡과 같은 천부적인 재능은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포기한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그러니까 너도 할 수 있어. 가능성은 모두에게 있으니까. 단지 지금은 누가 좀 앞서가고 있을 뿐이지.”
“너도 그런 생각을 해?”
선우방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최고의 후기지수라 불리는 남궁광을 제압한 반호진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줄은 몰라서였다.
“나도 사람이야. 후기지수라고 불리는 나이지만 나 역시 무인이지. 그리고 무인에게 나이는 중요하지 않아. 무인은 결국 무공으로 말하는 거니까.”
“그렇지.”
선우방은 내심 놀랐다.
설마하니 반호진이 이렇게나 먼 곳을 보고 있을 줄은 몰라서였다.
그리고 깨달았다.
자신이 얼마나 좁은 세상 안에서 살고 있고, 벗어나려 하지 않았는지를.
‘이런 게 개안이라는 건가.’
보이지 않게 자신을 감싸고 있던 틀이 깨지는 듯한 느낌에 선우방은 묘한 설렘과 두려움, 그리고 호승심을 느꼈다.
자신도 반호진과 같은 곳에 서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더불어 막연하게만 생각했던 목표가 뚜렷해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지금 바로 가능할까?”
“물론. 난 언제든지 준비가 되어 있어.”
“그럼 부탁할게.”
열망으로 활활 불타오르는 눈빛의 선우방을 보며 반호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