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장. 달라달라. -01
“아마 알고 계실 거 같은데. 그리고 아빠뿐만 아니라 오빠에게도 알려 줘야지. 폐관수련 중이라고 해서 연락이 아예 안 되는 건 아니니까.”
“알겠습니다.”
흑의복면인은 눈치껏 밖으로 나갔다.
여자 혼자 있는 방에 너무 오랫동안 머무는 건 좋지 않아서였다.
“달마삼검을 익힌 소림사의 무기명제자라. 거기다 최고의 신랑 후보감인 남궁광을 쉽게 제압했단 말이지.”
당서린이 입술을 만지작거렸다.
최고의 후기지수라 불리는 남궁광을 이긴 건 분명 대단한 일이었다.
절대 패배하지 않을 것 같았던 남궁광이었기에 지켜보던 후기지수들이 받은 충격은 컸다.
하지만 당서린은 단순히 승패에만 집중하지 않았다.
“제자리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았어.”
다른 이들이 승패에 집중할 때 당서린은 다른 걸 봤다.
격렬한 비무였음에도 끝끝내 자리를 이동하지 않은 반호진을 말이다.
게다가 표정이 점점 다급해지는 남궁광과 달리 반호진은 시종일관 여유로웠다.
마치 그의 검격이 다 보인다는 듯이 말이다.
“남궁 공자보다 몇 수는 위야.”
검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그럼에도 당서린은 한 가지만은 확실하게 느꼈다.
적어도 검술에 한해서는 남궁광보다 반호진이 몇 수는 위라는 사실을 말이다.
괜히 남궁광이 섬전십삼검뢰에서 창궁무애검법으로 바꾼 게 아니었다.
거기다 남궁광은 검강을 꺼냈음에도 패배를 시인했다.
“내공도 부족하지 않다는 거지.”
만약 내공에서 밀렸다면, 같은 경지가 아니었다면 아무리 검술이 뛰어나더라도 검강을 버티는 건 불가능했다.
검기조차도 잘 제련된 청강검을 가볍게 베어 낼 수 있는데 검강이면 두말할 필요가 없었다.
그런데도 남궁광의 검강을 받아 낸 반호진의 검은 흠집도 생기지 않았다.
“소림사는 소림사란 말이지.”
당서린은 피식 웃었다.
반호진 같은 후기지수를 꽁꽁 숨겨 두고 있을 줄은 몰라서였다.
남궁광을 비롯해서 사룡의 이름이 중원을 진동시키고 있을 때 소림사는 과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아마도 우리와 같은 생각을 했겠지.”
당서린의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맺혔다.
분명 남궁광은 현재 최고의 후기지수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정확하게는 어제까지지만.
이제는 두 번째가 되어 버렸고, 그 자리도 언제까지 지킬 수 있을지 아무도 몰랐다.
소림사를 찾은 모든 후기지수들이 자신에 대해서 알아보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한 채 반호진은 늘 그렇듯 자신의 처소 앞마당에서 수련을 하고 있었다.
정현은 요즘 너무 빈둥거리는 거 아니냐고 말하지만 실상은 달랐다.
아무리 반복 수련에 질렸다고 해도 습관이 어디로 가는 건 아니었다.
더욱이 아직 정신과 육체의 합일이 완전하지 않았기에 반호진은 매일같이 수련을 하고 있었다.
스윽. 슥.
단지 그게 남들에게는 보이지 않을 뿐.
게다가 반호진에게는 정신과 육체의 합일뿐만 아니라 신경 쓸 게 한 가지 더 있었다.
“확실히 체력이 좋아. 정말 달라.”
이 당시의 반호진은 속가제자들이 배우는 기본적인 경신술을 익히고 있었다.
하지만 이걸로는 상승의 경지에 오르기는 요원했다.
정확하게는 달마삼검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말이 맞았다.
어떤 이들은 검술만 뛰어나면 되지 보법이나 신법이 뭐가 중요하냐고 하지만 그건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얘기였다.
검술은 제자리에서 펼치는 게 가능했다.
하지만 대련이나 비무 그리고 실전에서는 절대 제자리에서만 싸울 수 없었다.
특히 생사가 오가는 절체절명의 상황에서는 보법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막고, 튕겨 내고, 공격하는 건 검이 하지만 회피하고 달려드는 건 발이 했다.
“내공이 후달리기는 한데, 이건 어쩔 수 없지. 그래도 하던 가락이 있어 이 정도면 빨리 느는 거지.”
넘치는 체력과는 별개로 내공은 정말 한숨이 나올 정도로 부족했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점은 그가 직접 만든 경신술인 금광신보(金光神步)를 몸에 각인시키는 데 내공보다는 체력이 더 필요하다는 점이랄까.
물론 기본 투로를 익힌 다음에는 내공을 사용해서 기맥에 재차 각인 작업을 해야 하지만 그건 나중 일이었다.
그리고 그때쯤이면 내공도 충분해져 있을 터였다.
“뭐, 내공이 없어도 전에 이룩한 경지가 사라지는 건 아니니까. 다만 유지 시간이 짧아서 그렇지. 근데 이거 되게 지루하네.”
머리는 알고 있지만 몸은 달랐다.
그렇기에 단순 반복 행동을 끊임없이 해야 했다.
반호진은 그게 너무 힘들었다.
예전이었다면 눈 감고도, 아니 굳이 생각하지 않아도 몸이 알아서 금광신보를 펼쳤을 텐데 지금은 모든 걸 신경 써야 했다.
“어후.”
보폭과 자세, 몸의 균형, 힘의 분배 등등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걸 전부 다 신경 써야 했다.
게다가 문제는 이게 기본형이라는 것이었다.
응용까지 몸에 적응시키려면 갈 길이 구만리였기에 반호진은 한숨이 절로 나왔다.
하지만 그렇다고 안 할 수도 없었다.
최상의 실력은 완벽한 몸 상태에서 나오는 법이었기에 지겹고 지루하지만 계속 반복할 수밖에 없었다.
이번 생은 설렁설렁, 대충대충 살겠다고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단명하고 싶지는 않았다.
“아미타불.”
얼굴에는 지겹다는 기색이 잔뜩 서려 있었지만 한 걸음 한 걸음에는 진지함이 가득 담겨 있었다.
지루한 반복 수련을 반호진은 계속 이어 갔던 것이다.
그런데 그때 앞마당의 한쪽에서 익숙한 불호 소리가 들렸다.
“오셨습니까.”
“내가 온 걸 알고 있었느냐?”
한눈에 봐도 세월이 느껴지는 백팔염주를 목에 건 노승이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보아하니 기척을 내기 전부터 반호진이 알고 있는 듯해서였다.
“지켜보고 계셨다는 건 알고 있었습니다.”
“허어.”
담담히 대답하는 반호진의 모습에 사부이자 소림사의 방장인 담현이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기척을 숨기지 않았다고 하나 그렇다고 쉽게 느낄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담현은 눈을 살짝 크게 떴다.
동시에 근래 경내에서 도는 소문이 헛소문임을 느꼈다.
“차라도 한 잔 드릴까요?”
“괜찮다. 잠깐 보러 온 것이니. 더욱이 제자의 수련을 사부가 되어서 방해할 수는 없지.”
놀람은 잠시 담현은 이내 빙그레 웃었다.
온몸을 적신 땀의 의미를 모를 수가 없어서였다.
더욱이 제자는 헛소문이라는 걸 어제 몸소 증명해 보이기까지 했다.
“어제의 일에 대해서입니까?”
“그래. 남궁세가의 소가주와 비무를 했다고 들었다.”
“예. 비무를 청하기에 응해 주었습니다.”
“너를 나무라려고 온 게 아니다. 그렇다고 칭찬하기 위해 온 것도 아니지만. 그저 하도 안 찾아오기에 내가 직접 온 것뿐이다.”
“바쁘신 것 같아 망설였을 뿐입니다.”
담현이 실소를 흘렸다.
지금의 말이 빈말임을 너무나 잘 알아서였다.
그러면서 새삼 세월이 많이 흘렀음을 느꼈다.
꼬꼬마였던 반호진이 이제는 어엿한 약관의 청년이 되어 있었다.
‘기도가 묘하게 변한 것 같기는 한데.’
담현의 눈썹이 살짝 꿈틀거렸다.
그는 일찍이 반호진의 재능을 알아보았기에 평범한 가문의 자식이던 반호진을 소림사로 데려왔다.
그리고 능력이 되지 않으면 입문조차 할 수 없는 달마삼검을 가르친 건 그만큼 반호진의 재능을 높이 평가해서였다.
한데 성장세가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어느 순간 갑자기 몇 단계를 뛰어넘기도 한다지만 그래도 이건 정도가 심한데.’
분명 반호진은 재능이 있었다.
소림사 역사상 최소 세 손가락 안에 드는 재능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정도 성장이 당연한 건 아니었다.
무경이라는 게 계단처럼 올라가기도 하고 어느 순간 급격하게 상승 곡선을 그리기도 하나 이건 말이 안 되는 수준이었다.
“걱정거리가 있으십니까?”
복잡한 심사가 느껴지는 담현의 모습에도 반호진은 당황하지 않았다.
사부가 어째서 이러는지 그는 알고 있어서였다.
그러나 말해 줄 수도 없었기에 반호진으로서는 두루뭉술하게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말한다고 해도 믿기 힘들 테고 말이다.
“걱정거리야 늘 있지. 너도 그랬고. 근데 이제는 다른 걱정거리가 생겼구나.”
“그냥 있는 그대로 보시면 됩니다. 이상한 것도, 잘못된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마치 내 속에 들어갔다가 나온 것처럼 말하는구나.”
“전후사정을 알면 유추하는 게 그리 어려운 건 아니지 않습니까.”
“다른 건 몰라도 성격은 확실히 변한 것 같구나. 아니, 예전으로 돌아갔다고 해야 하나.”
담현이 인자하게 웃었다.
대자대비라는 말이 절로 떠오르는 미소였다.
그러나 반호진에게는 너무나 섬뜩하게 다가왔다.
저 미소가 보이는 것처럼 인자하지 않다는 걸 너무나 잘 알아서였다.
“싫으십니까?”
“전혀. 오히려 나는 좋다.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 법이고, 변해서 좋을 것도 없다. 사람에게는 타고난 본성이 있는데 그걸 헤집고, 비트는 건 옳지 않아. 그리고 숨기고 감추는 것보다는 차라리 자연스럽게 드러내는 게 좋지. 지금은 술(術)과 식(式)이 중요한 단계이지만 절정 이상의 경지에서는 몸이 아니라 머리가 더 중요한 법이다. 억눌리고 꽉 막힌 사고로는 발전의 한계가 있어.”
“명심하겠습니다.”
“근데 이상하게도 너는 이미 알고 있는 듯하구나.”
“꼭 그런 건 아닙니다.”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담현을 향해 반호진이 씨익 웃었다.
속을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던 것이다.
“짧은 사이에 너무 큰 것 같기도 하고.”
“소림에 누를 끼치는 일은 없을 겁니다.”
“어제의 일을 탓하려는 게 아니다. 네가 예의를 다했다는 건 다 들어서 알고 있다. 오히려 결례를 범한 건 무작정 비무를 청한 남궁세가의 소가주지. 자고로 모든 일에는 절차가 있는 법인데, 그런 의미에서 어제의 일은 잘했다. 한 번 정도는 오만함을 깨닫게 해 주는 게 좋아. 자신이 최고라고 생각하는 순간 발전은 없는 것이니까. 그런 의미에서 넌 무엇을 보고 있느냐.”
“건강하고 행복하게 사는 꿈을 꾸고 있습니다.”
“허허허허.”
담현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생각지도 못한 말에 놀라서였다.
당연히 그는 천하제일인 내지는 천하제일검을 말할 줄 알았다.
이왕 무인이 된 거 최고가 되겠다고 늘 말하고 다녀서였다.
“이제는 저도 어른이지 않습니까. 스무 살이 되었으니 어른다워져야지요.”
“그래서 천하제일인이라는 꿈은 포기한 것이더냐?”
“그럴 리가요. 행복한 삶은 천하제일인이 되어야 이룰 수 있는 꿈입니다. 제 기준에서는 말이지요.”
“허허허!”
담현이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호기를 넘어 패기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게 단순한 치기로 들리지 않았다.
예전이라면 모를까 지금의 반호진이라면 왠지 가능할 것 같았다.
“아마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자신감이 대단하구나.”
“그만큼 노력할 것이기도 하고요. 물론 그렇다고 수련에만 목을 맬 생각은 없습니다. 그렇게 꽉 막힌 삶은 너무 괴로울 것 같아서요.”
정확하게는 지난 생을 그렇게 살았기에 똑같이 살고 싶지 않았다.
무공 수련이 반복의 연속이라지만 환경도 지난 생과 똑같을 필요는 없었다.
“정신적으로도 정말 많이 성장했구나. 성숙해졌다고나 할까. 이제 불경은 외지 않아도 되겠어.”
“하하하.”
반호진이 살짝 질린 표정을 지었다.
명경지수를 가르친다고 몇 년 동안 불경을 읊던 기억이 떠올라서였다.
그와 동시에 새삼 젊어진 사부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더해서 담현이 현재 이룩한 경지도.
‘사부님께서는 십 년 넘게 정체되셨구나.’
반호진의 눈에는 보였다.
담현이 현재 올라 있는 경지가 말이다.
그렇기에 순간 가슴이 착잡해졌다.
‘잠깐만. 꼭 후기지수들만 강해질 필요는 없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