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장. 천재 위의 천재. -02
하지만 실망감은 창졸간에 사라졌다.
대신 남궁광의 두 눈에 경악이 서렸다.
분명 방금 전까지만 해도 반호진의 검은 검집에서 반도 채 빠져나오지 못했었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 그의 검극을 튕겨 낸 건 반호진의 검이었다.
‘어느 순간에!’
보고도 믿기지 않는 광경에 남궁광의 두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그러나 놀란 그의 표정과 달리 검을 잡고 있는 오른손은 기민했다.
막히기 무섭게 검로를 틀어 재차 찔러 넣었던 것이다.
땅!
하지만 이번에도 역시 반호진은 남궁광의 검을 튕겨 냈다.
심지어 방금 전과 똑같이 정확히 검극으로 검극을 밀어냈다.
겉으로 보기에는 느릿하기 짝이 없는 움직임인데 정확도는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특히 남궁광은 자신의 검을 완벽하게 튕겨 냈다는 사실에 가장 크게 놀랐다.
‘내, 내 검이 보인다는 건가?’
남궁광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비록 섬전십삼검뢰(閃電十三劍雷)가 남궁세가 최강의 검법은 아니라지만 그래도 방계는 익힐 수 없는 상승절학이었다.
제왕검형과 창궁무애검법을 제외하면 남궁세가의 그 어떤 검공도 위에 두지 않는 검법이기도 했고.
그런데 그 섬전십삼검뢰를, 쾌검으로는 중원에서도 손꼽히는 섬전십삼검뢰를 반호진은 너무나 쉽게 받아치고 있었다.
‘헛소문은 아니라는 건가.’
놀람도 잠시 남궁광은 이내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예상했던 것보다 더 실력이 뛰어나기는 했으나 딱 거기까지였다.
정확히 받아치는 게 충격적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그가 밀리는 건 아니었다.
또한 그는 아직 전력을 다하지 않았다.
‘지금부터는 다를 거다!’
남궁광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사실 남궁광은 반호진을 내심 얕잡아 봤다.
고수다운 풍모가 전혀 보이지 않기에 창궁무애검법이 아닌 섬전십삼검뢰를 펼쳤다.
굳이 창궁무애검을 펼칠 거 없이 섬전십삼검뢰면 충분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우우웅!
그러나 이제는 달랐다.
반호진의 수준이 예상보다 높다는 걸 알았기에 남궁광은 이제야 제대로 비무에 응했다.
그리고 그걸 반호진도 알아차렸다.
“후후.”
조금 전과는 확연히 달라진 남궁광의 기도에도 반호진은 웃었다.
그에게는 남궁광의 생각이 너무나 훤히 보여서였다.
아니, 기수식만 봐도 반호진은 알 수 있었다.
지금 남궁광이 창궁무애검을 펼치려고 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쌔애애액!
역시나 예상했던 대로 남궁광의 검세가 웅장하게 펼쳐지며 반호진에게 쇄도했다.
지난 생에서 제법 많이 보았던 창궁무애검이었다.
제왕검형을 제외하면 남궁세가 최고의 검법이라 할 수 있는 창궁무애검법이었으나 안타깝게도 숙련도가 많이 부족했다.
검공의 오의나 진의는 몰라도 검로가 반호진에게는 익숙하기도 했고.
까앙! 까가가강! 깡!
그래서 반호진은 처음과 마찬가지로 딱히 긴장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건성으로 보일 정도로 검을 대충 휘둘렀다.
그런데도 신기한 건 남궁광의 공격을 단 하나도 허용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으득!
느릿하게 휘둘러지는 데도 귀신같이 검로와 궤적을 틀어막는 반호진의 방어에 남궁광이 이를 악물었다.
처음과는 완전 다른 표정을 짓고 있었던 것이다.
그 정도로 남궁광은 답답했다.
그리고 믿을 수가 없었다.
‘어떻게 이런!’
남궁광의 동공이 격렬하게 흔들렸다.
처음에는 단순히 호기심이었다.
더불어 천하무공출소림이라는 아성을 뛰어넘고자 하는 욕망도 조금 있었다.
비슷한 또래라면, 소림사 역대 최고의 재능이라는 반호진을 자신이 쓰러뜨린다면 아성을 아주 조금 깨부수는 것도 가능하다고 생각해서였다.
따아앙!
그러나 소림은 소림이었다.
또한 소문 역시 사실이었다.
반호진의 재능은 진짜배기였다.
후발선제(後發先制)를 넘어 반호진의 검술은 그보다 확연히 위에 있었다.
땅!
벌써 수십 합을 겨루었으나 반호진은 단 한 번도 그의 검을 놓치지 않았다.
정확히 그의 검극을 검 끝으로 맞받아쳤다.
남궁광의 검이 어디에 있든, 어디를 노리든 절대 놓치는 법이 없었다.
그렇다고 창궁무애검법을 아는 게 아니었다.
‘……예측하는 거지. 말이 안 되지만.’
남궁광은 아랫입술을 피가 나도록 깨물었다.
믿고 싶지 않지만, 인정하기 싫지만 그것 말고는 설명이 되지 않았다.
그러면서 동시에 이해가 안 되었다.
반호진의 나이를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꾸욱!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남궁광의 집중력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잡생각이 한 번 물꼬를 틀자 꼬리에 꼬리를 물고 계속 생각났던 것이다.
하지만 아직 남궁광은 포기하지 않았다.
“하시죠.”
“예?”
“검강을 생각하시는 거 아닙니까?”
“어, 어떻게?”
“시간을 드리죠. 이왕 하는 거 미련 없이 해야죠.”
남궁광의 두 눈이 크게 떠졌다.
그의 속을 너무 훤히 알고 있어서였다.
그래서 남궁광은 자기도 모르게 멈춰서고 말았다.
“……배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러나 고민은 짧았다.
이대로 비무를 끝내면 반호진의 말마따나 너무나 아쉬울 것 같았다.
지더라도 모든 걸 쏟아 내고 패배하면 미련은 없을 것 같았기에 남궁진은 합장 대신 반장을 하고는 자세를 잡았다.
그러고는 단전의 공력을 전부 끌어 올렸다.
“가, 강사다(罡絲)다!”
검기성강(劍氣成剛)의 입문이라 할 수 있는 강사가 남궁광의 검에서 솟구치자 멀찍이 떨어져서 구경하던 후기지수들이 탄성을 터트렸다.
검강은 절정고수의 상징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경지를 보아하니 이제 막 발을 들여놓은 듯했지만 남궁광의 나이를 생각하면 저 정도만 하더라도 엄청난 것이었다.
“역시 천룡!”
“괜히 사룡의 수좌가 아니지!”
같은 절정지경이라고 하더라도 수준은 천지 차이라지만 그래도 절정고수는 절정고수였다.
일류무사 정도는 수십 명도 도륙할 수 있는 게 절정고수였기에 대부분의 후기지수들이 부러움과 질시 가득한 눈빛으로 남궁광을 바라봤다.
뭇 여인들의 눈빛은 몽롱해졌고 말이다.
그러나 정작 남궁광의 귀에는 그들의 말들이 전혀 들리지 않았다.
꿀꺽!
모든 신경을 검과 반호진에게 집중한 채로 남궁광은 침을 삼켰다.
얼마나 집중한 것인지 그는 눈도 껌뻑이지 않았다.
하지만 검강을 일으켰음에도 반호진의 표정은 조금도 변화가 없었다.
시종일관 얼굴에 여유가 있었다.
“……가겠습니다.”
“오시죠.”
“하압!”
시작할 때와는 입장이 완전히 바뀌었다.
그러나 남궁광은 그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자존심이 높은 만큼 상대의 실력에 대해 잘 알 수밖에 없어서였다.
눈앞에 있는 반호진은 그저 그런 후기지수가 아닌 어쩌면 그가 평생 동안 경쟁해야 할 호적수일지도 몰랐다.
쌔애액!
그렇기에 남궁광은 처음과 달리 전력을 다했다.
가진 바 모든 것을 지금의 일검에 전부 다 담았던 것이다.
그리고 보고 싶었다.
여유가 사라진 반호진의 표정을 말이다.
쩌어엉!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날이 오늘은 아닌 듯싶었다.
모든 걸 담아 일격을 날렸지만 이번에도 역시 반호진에게는 닿지 못했다.
반호진의 검이 그의 검을 도중에서 막았던 것이다.
“……제가 졌습니다.”
“고생하셨습니다.”
어느 정도 예상하기는 했으나 이렇게 허무하게 막힐 줄은 몰랐기에 남궁광의 표정은 허탈했다.
물론 순순히 패배를 시인한 건 아니었다.
충돌한 순간 남궁광은 온 힘을 끌어올려 검을 밀어붙였다.
근력으로 반호진의 검을 밀어낸 후 재차 공격하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남궁광은 실패했다.
얼굴이 시뻘게질 정도로 밀어붙여도 반호진의 검은 밀리지 않았다.
“많이, 배웠습니다.”
“저도 그렇습니다.”
패배를 인정하기는 했으나 그렇다고 분기가 없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그 어느 때보다 분한 감정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하지만 남궁광은 그걸 티 내지 않았다.
“다음에 다시 비무를 청해도 되겠습니까?”
“그건 그때 가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완곡한 거절에 남궁광은 다시 한번 자신의 패배를 자각할 수 있었다.
동시에 정말 오랜만에 좌절감을 느꼈다.
산의 정상에 서 있다가 넘어져서 밀려난 느낌이라고 할까.
그러나 엄밀히 따지면 그가 서 있던 곳은 절대 정상이 아니었다.
“일단 거절하신 건 아니니 눈치껏 다시 청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러시죠.”
“우, 우와!”
짧게 대답한 반호진이 몸을 돌렸다.
볼일이 끝났으니 돌아가려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모습조차도 정현에게는 너무나 멋있어 보였다.
천룡이라 불리는 남궁광을 가볍게 제압하는 모습은 정현이 꿈에 그리던 모습이었다.
“허어!”
반면에 오중건은 다른 의미로 놀랐다.
범상치 않을 거라 예상하기는 했으나 이 정도로 차이가 날 줄은 몰랐다.
말 그대로 격이 다른 수준을 반호진이 보여 주었기에 오중건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리고 그건 지켜보던 후기지수들도 마찬가지였다.
“누구지?”
“혹시 아는 사람 없어?”
“남궁 공자님은 알고 계시는 거 같은데.”
“제갈 공자님은 알고 계시지 않을까?”
무려 삼봉이 한자리에 모여 있음에도 비무가 끝나기 무섭게 휘적휘적 걸어가는 반호진의 모습에 후기지수들이 웅성거렸다.
특히 여인들의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다들 눈을 반짝이며 반호진의 뒷모습을 주시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중에는 삼봉들도 있었다.
***
또르륵.
사위가 어둑어둑해진 야심한 밤임에도 침의가 아닌 백의경장을 입은 여인이 방 안에서 홀로 차를 따랐다.
마치 누군가를 기다리듯이 말이다.
-접니다.
“들어와.”
그때 그녀의 귓가로 익숙한 전음이 들려왔다.
이윽고 창문이 소리도 없이 열리며 흑의복면인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인상만큼이나 냉랭한 어조였으나 흑의복면인은 그런 것에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이 여인의 앞에 부복했다.
“알아본 건?”
“방장께서 늘그막에 거둔 두 번째 제자라고 합니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기명제자가 아니라 무기명제자랍니다.”
“무기명제자? 그 말은 속가제자라는 거 아냐?”
“그렇습니다.”
“근데도 그 정도 수준의 무공을 전수했다고?”
여인의 고운 아미가 찡그려졌다.
어느 문파나 무가든 진산제자와 속가제자, 직계와 방계에 차이를 두는 건 똑같았다.
몇몇은 차별을 한다고 말하는데 문주나 가주 입장에서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
피는 물보다 진하고, 팔은 안으로 굽을 수밖에 없으니까.
“재능이 뛰어나나 불가와는 연이 없어 승적에 올리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 정도로 엄청난 재능이란 말이지. 하긴 오늘 남궁 공자와의 비무만 봐도.”
부하의 대답에 여인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오늘 있었던 비무만 보더라도 어떤 재능인지는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아니, 정확하게는 그녀로서도 가늠이 되지 않았다.
반호진이라는 인물이 쌓아 올린 무경이 말이다.
“속하가 알아본 바에 의하면 달마삼검을 익히고 있다고 합니다.”
“달마삼검이라.”
무표정한 얼굴의 여인, 세간에는 독봉(毒鳳) 또는 독빙화(毒氷花)라 불리는 당서린이 눈을 살짝 크게 떴다.
달마삼검에 대해서는 그녀도 조금은 알고 있어서였다.
더욱이 최근 이백 년 동안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기에 당서린은 눈을 반짝였다.
소림사를 대표하는 건 칠십이종절예지만 그건 널리 알려져 있어서였다.
알려지지 않은 무공들 중에는 칠십이종절예보다 더 뛰어난 무공들이 많았다.
달마삼검 역시 그중 하나였다.
“소림사에서 수학한 지는 십삼 년 정도 되었다고 하는데 대부분의 시간을 개인 연공실에서만 보내 일대제자들도 아는 게 그리 많지 않다고 합니다.”
“이게 다란 말이지?”
“그렇습니다.”
흑의복면인이 겸연쩍다는 듯이 고개를 숙였다.
더는 할 말이 없어서였다.
“다른 곳들은 어때? 예를 들면 남궁세가나 제갈세가는?”
“저희와 마찬가지로 반호진 공자에 대해 알아보고 있습니다.”
“역시.”
당서린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역시나 예상을 벗어나지 않아서였다.
하지만 그녀도 마찬가지였기에 더 이상 뭐라 말하지는 않았다.
“가주님께도 보고드릴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