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 격리 조치 (3/14)

에어컨 바람 가득한 실내는 차라리 겨울을 닮은 게 아닐까.

창밖을 내다보면 화창한 볕으로 가득한데. 답답한 기분에 걸어 잠갔던 창문을 살짝 열어보았다. 계절은 여름과 가을이 겹쳐 드는 즈음이었다. 입맛이 안 난다고 점심을 거른 탓인지 기운이 없어서, 정현은 그대로 책상 위에 드러누웠다. 새어드는 온후한 바람, 그리고 이명처럼 울리는 함성과 웃음소리에 멍하니 넋을 놓다가 문득 가슴을 죄었다.

교실 벽에 걸려 있는 커다란 시계 소리는 텅 빈 교실 안에서는 소리도 날 것처럼 거대하게 움직였다. 가장 바삐 움직이는 초침을 따라 주먹을 쥐었다. 탕, 탕. 몇 번 가슴을 두드리다가 다가오는 발자국 소리에 살며시 눈을 감았다.

사르륵 소리를 내며 흐트러진 앞머리 사이로 이마를 쥐는 손이 느껴졌다. 상처라곤 하나 없이 매끄러운, 하지만 농구공은 한 손에 쥐어 버리는 큰 손과, 따뜻한 손바닥.

“숨 쉬어.”

“아….”

“눈 떠.”

옆으로 누운 하늘이 유독 높고 깊었다. 한 손에 쥐어 든 손끝이 마치 하늘에 풍덩 넣었다 뺀 것처럼 푸르게 빛나고 있었다.

재희는 주저 없이 정현의 몸을 일으켰다. 점심시간이 20분도 채 남지 않았다.

***

예년보다 이른 추석 탓에 학교는 분주했다. 축제에 눈치 없이 개교기념일. 뒤이어 닥쳐올 중간고사까지. 아이들의 들뜬 마음을 붙잡아 수업 진도를 빼야 하는 선생들의 노고는 대단했다. 그 반대급부로 점심시간의 내기 배드민턴의 열기는 실제로 불을 뿜을 정도로 치열했다. 오죽하면 저들끼리 땀 빼던 아이들마저 옹기종기 둘러앉아 스승들의 혈전을 지켜보고 있었을까.

저무는 계절이라고 하기엔 여전히 뜨거운 9월. 흙먼지가 뿌옇게 이는 운동장 스탠드에서 나이와 직분을 잊고 질러 대는 함성과 환호 혹은 조롱이 유독 푸른 하늘 아래 교차하고 있었다. 그 와중에 잔걸음으로 다가가는 그림자는 가볍고 날렵했다. 이리저리 휘둘리는 셔틀콕에 시선을 좌우로 가누다, 몇 번이고 입을 벙긋거려 봐도 들리지 않는 터에 제 목소리를 드높였다.

그 와중에도 저음의 나지막한 목소리는 신경질적이기보다 감미롭기만 했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공정한 경기를 위해 참전이 아닌 심판을 맡은 체육 선생은 집중을 흐트러뜨린 목소리에 신경질적으로 돌아섰지만, 제 앞의 낯익은 얼굴을 확인하고 언제 그랬냐는 듯 금세 인상을 폈다. 꾸벅 인사를 하는 녀석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단정했고, 체구도 선생과 거의 비슷했으나 남색 재킷에 1학년에 해당하는 배지를 달고 있었다.

사립고에서 올해로 20년을 재직 중인 그는 유달리 예뻐하는 학생이라곤 없다는 주의였다. 사내 녀석들이야 축구 한 번 농구 한 번 어깨를 치대고 나면 어려울 게 없었고, 또 그 나이의 치기나 민감함도 예체능 과목의 특성을 살려 너그러이 풀어 낼 수 있었다. 담임을 해도 제 새끼들 또한 그놈이 그놈이었고, 자수가 되어 있지 않고서는 이름을 외우기 어려워 늘 거시기로만 부르곤 하는 그에게, 이 아이는 그만큼 특별한 존재였다.

“어, 재희냐. 무슨 일이고.”

“5교시가 저희 반 체육이거든요.”

“네가 10반이냐? 그래서.”

“죄송한데 저희 반 정현이가 오늘 몸이 안 좋다고 해서요.”

1학년 10반 반장이었고 학생회 소속인 한재희의 손끝을 따라 그 역시 시선을 옮겼다. 흘낏 바라보자마자 아, 하고 작게 탄성을 낼 만큼, 멀리 있는 녀석도 낯이 익었다.

이 녀석과는 상반될 만큼, 아직 고1이라고 하기에는 왜소한 체구. 꾸벅 인사하다가 앞으로 고꾸라지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위태롭게 마른 몸. 거기에 파리한 낯빛은 딱 봐도 나쁜 의미로 각인되기 쉬웠다.

1학년 10반 한정현.

그러니까, …‘그 녀석’. 모르지는 않았다. 체육 선생으로선 가장 친하기 어려운 학생의 부류에 속했으면서도, 이렇게 따로 보는 경우가 많았기에 그는 바로 대화의 목적을 파악했다.

“아, 그럼 양호실에서 쉬라고 해야지. 너도 살펴볼 거냐?”

“예. 연락을 드려야 해서요.”

“흠. 알았다. 중간에라도 나와.”

체육 수업은 한 달에 한 번 참석할까 말까. 하지만 어떻게든 밖에 나와 앉아 있으려고 애를 쓰는 모습이 안쓰러운 한편 기특하기도 했던지라 이름은 기억하고 있었다. 이번처럼 도저히 몸이 따라 주지 않는 날에는 자연스레 두 녀석이 다가와 공손히 허락을 맡으러 오곤 했다.

한재희와 한정현. 꼭 형제처럼 이름도 비슷한 두 녀석의 이야기는 언뜻 들어 알고는 있었다. 그 소문에 한몫 보탰던 가정 선생이 호들갑스럽게 두 손을 쥐며 말을 이었다.

“참 남자애 같지 않게 다정해. 그렇죠?”

“대학 가면 여자애들 여럿 울리겠어.”

“왜 ‘대학 가면’으로 한정하세요?”

“저 녀석 보게.”

다시 터져 나오는 웃음소리가 저물기도 전에, 경기는 재개되었다.

너털웃음을 터뜨리는 체육 선생과 그에게 결국 등짝을 한 대 얻어맞고서도 하하 웃는 재희. 그리고 두 사람에게서 멀리 떨어진 나무 그늘 아래 위태롭게 서 있던 정현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가을이라지만 볕만은 여름 못지않게 따가워 그늘 안에서도 숨이 점점 가빠지는 게 느껴졌다. 티를 내지 않으려 코로 숨을 쉬어 보려 하지만, 시도뿐으로 여의치 않았다.

여름도 겨울도 괴로운 건 매한가지였지만 닥친 지금이 가장 힘든 법이다. 성큼성큼 돌아온 재희가 그 앞에 섰을 즈음에 정현은 멀쩡한 척하려던 것을 포기했다. 이끄는 손에 제 손목을 맡기고 힘없이 걸음을 옮겼다.

“됐지? 정신 차려.”

업히지 않는 것은 정현의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

늘 그랬듯, 구관의 양호실은 인기가 없었다.

70년 전통의 사립 학교는 빵빵한 재단 덕에 2년 전 신관을 세웠고, 덕분에 구관에도 신관에도 양호실을 하나씩 구비하고 있었다. 에어컨에 신식 시설이 가득한 신관 양호실로 아이들이 몰리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했다.

하지만 두 사람의 경우는 달랐다. 애초에 열쇠를 갖고 있던 재희는 당연한 듯 비어 있는 양호실 창문을 열어 환기시킨 뒤 익숙하게 캐비닛에서 가방 하나를 꺼냈다.

휴대용 산소 호흡기였다.

“그러니까 왜 발악을 하냐.”

“꺼져….”

호흡기를 뗀 정현의 입술은 여전히 색이 옅었다. 날 선 말에도 재희는 주저 없이 체온기를 정현의 귀에 꽂아 넣었다. 마치 이물질이라도 들어간 것처럼 한쪽 눈을 찡그리는 모습에 피식 웃으며, 정말 병실다운 푸른색 모포를 정현의 가슴 위에 올려 덮어 주었다. 마른 몸을 여미고 있던 교복 앞 단추도 풀어냈다. 그 아래 드러난 흰 셔츠에는 희미하게 흉터의 선이 비쳤다.

정현이 판막 치환 수술을 받은 지도 1년이 훌쩍 넘었다.

주치의와 정현의 부모는 긴 논의 끝에, 수명이 짧아 꾸준히 재수술을 해야 하는 조직 판막이 아닌 인공 판막을 선택했다. 그것도 최신의 소재로.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것은 정현과 상성이 좋지 않았다. 부작용 또한 많았다. 쉽게 말해 가슴 속에 금속이 들어가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기에 째깍거리는 소리도 났고 피가 그 주변에 뭉치는 것을 막기 위해 평생 항응고제를 복용해야만 했다.

그 합병증의 폐해를 경계해야만 했기에 정현의 주변을 지키고 있는 사람들은 늘 노심초사하고 있었다. 사실 휴학을 하는 게 어떻겠냐며 회유했지만 정현 본인이 완강하게 거부한 탓에 우선은 재희와 함께 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그 절반은 양호실 신세를 지고 있었긴 하지만.

“열나는데.”

정현의 사정을 먼저 학교에 고지한 덕에 두 사람은 중학교 때 또한 그랬듯 고등학교에 들어서도 같은 반으로 배정받았다. 출석 번호도 이름 덕분에 앞뒤인지라, 늘 이렇게 정현의 상태가 좋지 않을 때면 재희가 빠르게 처치하고는 했다. 체온이나 혈압을 재는 게 전부이지만, 그 일에마저 성실했던 재희는 삐빅 소리를 내며 측정을 마친 체온계를 확인하고 심상치 않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생각보다 높은 숫자였다.

“안 되겠다. 병원 가야….”

“싫어.”

“…….”

“재희야. 응? 싫어….”

열이 오른 탓에 눈에 물기까지 어린 정현이 옷깃을 잡았다. 단번에 뿌리칠 수 있을 만큼 미약한 힘이었지만 재희는 그것을 가만히 내버려 두었다. 뺨에 닿는 숨결이 뜨겁다고 느끼면서도 가만히, 저를 부른 목소리를 따라 내려보았다.

작은 체구에 핏기라곤 없이 창백한. 게다가 입술도 푸르스름한 병색이 완연한 얼굴에 유독 더 까맣게 보이는 눈동자, 그만큼 까만 생머리. 흑과 백이 대비되듯이 무채색으로 빛나는 정현의 얼굴을 재희는 물끄러미 보았다. 작은 얼굴에 마치 강아지처럼 커다란 눈 속에 비친 저마저 물기에 함께 일렁이고 있었다.

살짝 고민하며 안경테를 추어올리자 더욱 울상이 되는 얼굴에, 재희는 삐져나오려는 웃음을 간신히 참으며 저를 붙든 손목을 쥐었다. 늘, 언제나 느끼는 거지만 참 볼품없는 손목이었다. 한 손에 쥐고도 남아, 잘못 힘을 주면 부러뜨릴 것처럼 작고 연약해서….

“그럼, 보상.”

“…….”

“그래야 네 말 듣지.”

가끔, 이렇게 심술궂은 마음이 치밀어 오르고 만다.

‘보상’이 무얼 뜻하는 것인지 모르지 않기에 정현은 머뭇거렸다. 그러는 동안 덧없이 수업 종이 울렸다. 예비 종은 아까 쳤기에, 이제 체육 시간일 것이다. 자연스레 창가로 다가가 창문을 다 걸어 잠그고 커튼을 친 재희가 돌아올 때까지, 정현은 여전히 고민하는 눈치였다. 혈색 없던 얼굴에 조금은 두 뺨이 붉혀졌을까, 싶을 정도로.

“그러면 옆에 가만히 있을게.”

“…아까 체육이, 너 나오라고.”

“그건 내가 알아서 해.”

습관이 된 듯, 미간을 찌푸리자 가늘게 주름이 졌다.

봄에 있었던 시력 검사에서 재희는 난시가 조금 심해졌다는 이야기를 들어 안경을 맞췄다. 수업시간에 칠판을 필기할 때나 책을 읽을 때 정도만 끼고 있어서일까, 아직 적응되지 않아 콧등이 얼얼하다고 불평하고는 했다. 그래서 쉬는 시간만 되면 바로 벗어 던지곤 했는데, 점심시간부터 지금까지 재희는 안경을 끼고 있었다. 호흡이 거칠어진 정현을 데리고 나와 체육 선생을 찾아 헤맨 탓이다.

굳은살이 유난히 툭 불거진 셋째 손가락이 가볍게 가는 안경테를 빼냈다. 비스듬히 침대에 기대어 있던 정현은 그것을 마치 느린 화면이 지나가는 것처럼 지켜보고 있었다. 그리고 곧이어 제게 닥칠 체온을 생각하며 살짝 시트를 쥐었다. 뻣뻣한 양호실 침대의 시트는 힘없이 서걱거리는 소리를 냈다.

아직 적응하기엔 한없이 낯선, 몸 안에서 나선 안 될 기계 소리가 우습도록, 박동하는 심장은 마치 건강한 것처럼 날뛰어 정현의 시야를 흐렸다. 그래서 눈을 감았다. 그리고 코로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나무로 만들어진 구관은 습기에 취약해 호흡기엔 좋지 않았지만, 이토록 볕이 따사로운 날에는 실내 전체가 달구어진 듯 향긋한 나무 냄새를 풍겼다.

정현은 그게 좋아서 이곳을 늘 고집했다.

재희의 손끝에서도 늘 이 냄새가 난다고 정현은 생각했다. 샤프보다 사각거리는 연필을 더 좋아하는 재희는 굳은살이 아프다며 인상을 찌푸리면서도 꼭 육각으로 된 연필을 썼다. 궂은 날이면 어김없이 치미는 절개 부위의 고통에 방문을 열어젖히면, 먼저 자라며 침대를 내준 재희가 책상에 앉아 작게 불을 켜고서 노트에 사각거리는 소리가 났다. 그 소리를 자장가 삼아 잠이 들곤 했다. 그래서일까.

“음….”

구관 양호실에서의 입맞춤은 조금이나마 편안하게 느껴졌다.

곱게 가슴까지 덮인 이불, 그리고 침대 맡에 기대어 앉은 정현에게 한 손을 짚고 다가간 재희가 작게 고개를 틀었다. 학생회라 다행이지, 잘못 찍혔으면 몇 번이고 학생 주임에게 오해 받았을 법한 곱슬곱슬한 앞머리가 정현의 코끝을 간지럽혔다. 작게 숨을 멈추고 밀어내려는 시도에 아랑곳하지 않고, 살며시 닿은 입술은 숨결처럼 보드라웠다.

색을 잃어 하얗다 못해 파랗게 질렸던 정현의 입술이 몇 번이고 작게 비비는 행위에 조금의 혈기를 되찾았다.

고작해야 1분. 그 짧은 찰나의 접촉이 끝나고 나면 어김없이 눈을 질끈 감아 버리고 마는 정현의 긴 속눈썹을 바라본 재희는 장난스레 입김을 후, 불었다. 간지러운 촉감에 긴 속눈썹이 이리저리 흐트러졌다. 창을 등진 재희 탓에 한낮에 드리운 그림자가 겨우 눈을 뜬 정현의 얼굴을 반쯤 가렸다. 깜박이는 새카만 동공 속에 비치는 제 모습에 만족스러운 듯 재희가 미소 지었다.

“한숨 자…. 깨워 줄게.”

그리고 그 말이 마치 주문인 것처럼, 정현은 무거운 눈꺼풀을 그대로 스르륵 감아 내렸다.

환청처럼 들리는 마지막 매미의 울음소리가 마치 겨울이란 계절은 오지 않을 것처럼 우는, 여름의 한낮이었다.

***

하지만 그저 여름이라기엔, 해가 분명 짧아졌다.

노트 위로 길게 늘어지는 붉은 그림자를 깨닫고 재희는 고개를 들었다. 사각거리던 연필 소리가 그치자 그 공백을 규칙적인 호흡 소리가 채웠다. 낮게 가래가 끓는 소리가 귀를 간질이듯 규칙적으로 들려오고 있었다.

환절기엔 더러 있는 일이었다. 낮의 열기는 여전하다지만, 스산한 기운은 분명 가을의 입김을 드러내고 있었다. 작게 벌어진 마른 입술을 쳐다보던 재희는 이내 시선을 노트로 돌렸다. 6교시는 수학이지만, 다행히도 담임선생이 들어오는 시간이었다. 같은 반 녀석들이 알아서 말해 줬겠지.

사각거리며 노트 위를 정갈하게 수놓는 글씨는 그날 1교시였던 영어 수업의 칠판을 고스란히 옮겨 둔 듯했다. 소리 없이 중얼거리는 입술은 잠든 정현의 호흡 소리에 마치 리듬을 타는 것처럼 보였다. 안경을 벗고 눈자위를 꾹 누른 재희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 정도 됐다는 표정이었다.

그러고도 30분은 지났을까.

나무로 된 문은 이게 단점이었다.

삐거덕, 하고 요란스럽게 문이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든 재희는 낯선 이가 들어선 제 등 뒤가 아니라 침대 위의 얼굴부터 살폈다. 다행히도 정말 깊게 잠들었는지 정현은 소음에 미동도 하지 않았다.

안도한 재희 곁에 선 사람은 담임이었다. 상황을 파악하고선 수업을 좀 일찍 마치고 내려온 차였다.

“어머님께 연락은 드렸고, 재희 너도 바로 집에 갈 거니?”

“예.”

담임은 침대 맡에서 끄적이고 있던 재희의 노트를 발견했다. 천부적인 머리를 타고난 재희는 수업 시간에 본 판서 내용을 보자마자 암기해서 복습하고 있었다. 수업을 빠진 것이 문제기는 했지만 사실 더는 가르칠 게 없는 녀석이었다. 수업 시간에 나눠준 유인물을 건네자 한재희는 꾸벅 감사를 표했다. 담임이 그 어깨를 두들기며, 한편으로 잠든 정현을 일으키려 모포를 쥐었을 때, 재희가 그 손을 만류했다.

“제가 할게요.”

재희가 필기구를 내려 두고 일어섰다. 그는 잠든 정현의 상체를 추슬러 침대 헤드에 기대게 한 뒤에 익숙하게 정현을 업었다. 곁에 서 있던 담임이 한 일은 유인물과 노트를 재희의 가방에 챙긴 뒤 정현의 두 팔을 재희의 어깨에 걸치도록 돕는 게 전부였다.

때마침 6교시를 마치는 종이 울려 퍼졌다.

마치 종의 음파가 멎기를 기다리기라도 하는 듯, 걸음을 멈춘 재희는 제 목덜미에 닿는 규칙적인 숨소리를 확인하고 있었다. 또한 걸음을 옮기기 전, 제 목덜미를 껴안듯이 앞으로 늘어뜨린 정현의 손끝을 내려다보았다. 이제는 혈색이 조금이나마 돌아와 있었다. 하지만 아까는 분명 푸르게, 물들어 있었다. 청색증이었다.

***

합리적인 거짓말은 올해 들어 이번이 다섯 번째.

휴대용 산소 호흡기로 대강의 처치를 마친 뒤, 양호실에서 정현이 깊이 잠든 걸 확인한 재희는 늘 그랬듯 집과 병원에 연락을 취했다. 그리고 정현이 깊게 잠들어 의식을 차리지 못한 사이에 병원으로 옮겨 검진을 받았다. 조치한 뒤엔 다시 업어서 집으로 데려가 정현의 방 침대에 누였다. 정현이 눈을 뜨면 익숙한 침대 위로, 학교에서 집에 올 때까지 내내 잠이 들어 있었나 보다, 하고 넘겨짚기를 바라며.

기형이었던 정현의 폐동맥 판막을 대신해 심장 속에 들어간 기계 판막은 피의 역류를 막아 주기는 했으나 그만큼의 악영향 또한 끼쳤다.

혈전2)을 막는 항응고제 투여로 인한 합병증은 둘째 치고, 비대해진 우심실이 폐를 눌러 온갖 부작용을 일으켰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정현에겐 감기조차도 위험했다. 해열제나 감기약으로 해결되면 좋을 것이나 항응고제를 복용하는 탓에 함부로 약물 처치를 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성장기인 몸은 부피를 늘리느라 관절은 물론 내장까지 요란하게 성장통을 앓고 있었다.

부디, 이번이 마지막이길 바랄 뿐.

“녀석, 열심이구나.”

일어서서 인사하려는 재희에게 손사래를 쳐 자리에 앉힌 사람은 주치의 임성학 교수였다. 심장 판막술로는 국내에서 제일로 꼽히는 권위자인 그는 정현을 손수 집도해왔다. 그뿐 아니라 정현의 부모와도 사적으로도 아는 사이였으니, 그 말인즉슨 재희와도 안면 있기는 다를 바 없었다.

“우리 재희가 의대에 오겠다고?”

“성적이 되어야 가죠.”

“녀석, 겸손하기는.”

임 교수 또한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재희가 중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전교 3등 밑으로 떨어져 본 적이 없다는 것을. 영특한 아이는 지금도 학교 선생이 가져다줬다는 유인물을 막힘없이 풀고, 또 노트에 옮겨 재독하고 있었다.

머리 좋은 녀석이 이토록 성실하기까지 하면 당할 자가 없다. 게다가 제 시간을 쪼개 정현을 돌보는 헌신적인 자세까지. 아이보다 몇 배 인생을 더 산 어른이라고 해도, 가끔은 존경스러운 마음도 들어 임 교수는 자연스레 다른 이의 얼굴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너도 소질은 있을 게다. 네 아빠가 그랬으니까.”

“…….”

“열심히 해. 기다리고 있으마.”

사고로 유명을 달리한 재희의 아버지 또한 외과 의사였다. 임 교수는 다소 먹먹해진 표정으로 어깨를 두드리면서, 야무지게 고개를 끄덕이는 녀석이 의사가 된 모습을 떠올렸다. 단지 좋은 머리로만은 할 수 없는 의사라는 직업이 녀석에겐 안성맞춤일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며, 아마도 녀석의 첫 환자가 될 정현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생각한다. 참으로 얄궂은 인연이라고.

물론, 자신과도 말이다.

“재희야, 교수님.”

뒤늦게 연락을 받고 온 정현의 모친 연주가 병실에 들어섰다.

이래저래 검사 결과를 이야기한 두 사람은, 정현이 열도 내리고 호흡도 안정되었으니 우선은 귀가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역시나 정현을 깨우려는 손짓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재희는, 제 가방을 챙기고선 등을 내보였다.

“업고 갈게요.”

“괜찮겠니? 안 무겁겠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사실, 무겁지도 않아서 더 문제니까.

“신기해. 어쩜 깨지도 않고 말이에요.”

“그만큼 정현이가 재희를 믿는 거지요.”

대견스러워하는 어른들의 대화를 마치 남의 이야기인 것처럼 흘려들으며 재희는 걸음을 옮겼다. 쌀쌀한 날씨에 모포를 덮은 정현의 몸을 조심스레 추어올렸다. 그새 체중이 조금 무거워졌나 싶다가 이내 깨달았다. 오늘은 업고 있는 제가 조금은 지쳤는지도 모르겠다는 것을.

***

돌아가는 길은 삼십 분 거리. 멀지는 않지만 걷기 가까울 정도도 아니었다. 게다가 누군가를 업고 걷기에는.

연주는 차를 타고 가자고 했지만, 재희는 혹시나 정현이 눈을 뜰까 봐 한사코 제가 업고서 가겠다고 했다. 그 곁에서 두 녀석의 가방을 들고 걷는 연주는 미안함과 고마움이 뒤섞인 복잡한 심경에 쓸데없는 말을 줄곧 잇기 바빴다.

퇴근 시간이 지난 거리는 대학생들 또한 개강에 맞춰 이리저리 모임이 많은 듯 북적였다. 이리저리 주택가를 찾아 돌아가느라 평소보다 먼 길로 돌아가는 재희의 목덜미엔 어느새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연주가 이를 올려다보며 고기를 먹자고 제안해도 재희는 고개를 저었다. 고기를 싫어하는 게 아니었다. 등에 업힌 정현이 식단을 조절해야 한다는 이유로 고기를 먹지 못하는 것을 배려하는 것이리라.

하나하나 고마움을 표현하기엔 저 열일곱 난 아이에게 지은 죄와 폐가 많아, 연주는 손에 쥔 손수건만 애꿎게 만지작거렸다.

“재희 공부해야 하는데, 늘 방해해서 어쩌지.”

“아니에요.”

어른스럽게 웃는 재희에 비해 연주는 착잡한 표정을 지우지 못했다.

네 살, 그 어린 나이에 낯선 집에서 살게 된 이후로도 아이는 투정 한 번 부린 적이 없었다. 늘 괜찮다며 고개를 끄덕였고, 울지 않았다. 아픈 정현을 돌보느라 소홀한 게 많았던 날들에도 정말 혼자 스스로 컸다. 그걸로 끝이 아니라 오히려 저희를 돌보고 있었다. 냉정하게 말하자면 그랬다.

머리 검은 짐승은 거두는 게 아니라지만, 연주는 수백 번 선택의 기회가 돌아간대도 재희의 손을 잡을 것이다. 아니, 잡아야만 했다.

만약 재희조차 정현의 곁에 없었더라면. 가정만으로 눈앞이 캄캄했다. 아이에게 닥친 크나큰 불행을 기회 삼아 의존하고 있는 제 아들과 자신의 삶이 어떤 핑계로도 면피가 되지 않아 부끄러웠다. 이따금은 생각을 멈춰야만 살아질 정도로 삶은 고통스러웠다.

거둬 먹여 살리고 있는 것만으로는 너무나 큰 빚을 아이에게 지고 있구나.

“아줌마가 재희한테 늘 고마워하는 거 알지?”

그리고 앞으로도 지게 될 업이었다.

계절이 코끝을 시리게 하면 할수록, 그 청천벽력과 같았던 날들은 어김없이 어제 일처럼 가슴을 파고들었다. 그래서 연주는 쉬이 저 자신을 ‘엄마’라고 칭할 수 없었다. 아이에 대한 미안함도 있었지만, 저세상으로 간 친구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다음에 아줌마랑 둘이 한번 다녀올까? 이제 곧인데.”

“괜찮아요. 저 혼자 다녀올게요.”

“그런 게 어디 있어. 정현이는 몰라도 아줌마도 친구 보러 가는 건데.”

남자애여서 다행이지. 저를 마주 보는 또렷한 이목구비는 제 엄마이자 자신의 친구인 승연을 꼭 닮아 더욱 서글펐다. 마치 손으로 빚은 것처럼 날렵한 코와 눈매가 그랬다. 외모뿐 아니라 명석한 머리까지 닮은 모양이라, 처음엔 제 무릎에 오던 아이를 이제는 올려다보며 연주는 시큰거리는 눈을 깜박였다. …닮아서 더욱 그리웠다.

“엄마 아빠 안 보고 싶어?”

그래서였을 것이다. 툭, 던져 버린 말은.

워낙에 어른스럽고 태연자약한 아이의 성정을 어지럽히고자 한 심술은 아니었다. 정말 괜찮니, 괜찮은 거니. 아니, 괜찮을 리 없잖아. 어른들은 확인하려 들었다. 어른조차 견디기 어려운 현실을 네가, 어린 네가 어떻게 견디겠냐고.

재희의 대답은 바로 이어지진 않았다. 대학가를 벗어나 조금은 한적한 주택가. 집에 다다르려면 한 백 걸음은 남았을까. 오가는 차와 인적 소리에 묻힐 뻔한 작은 목소리에 동요란 없었다.

“돌아가신 게 벌써 몇 년 전인데요.”

반파가 된 차에서 기적처럼 살아남아 커다란 상주 완장을 매고 있었던 네 살배기 그때와 다를 것이 없었다. 열일곱의 한재희 또한, 차갑게 느껴질 만큼 가지런했고, 정갈했다. 빈틈이라고는 없었다.

“사실, …이제 기억도 잘 안 나요.”

영특한 아이는 오래전부터 깨달았다. 약점은 제 몸 가장 가까이에 감추는 법이라는 것을.

무심하게 던진 대답과 동시에 재희는 제가 업고 있던 몸을 가볍게 추어올렸다. 무게감 없이 가뿐한 동작이었다. 정현의 두 팔이 재희의 목덜미를 안고 있었다. 진득하게 땀이 났다. 다행히 집은 코앞이었다. 둘, 아니 세 사람이 아무 말 없이 걸어가도 어색하지 않을 만큼.

***

낮에는 매미가, 그리고 밤에는 귀뚜라미가 쉴 틈 없이 귀를 간질이는 계절이 되었어도.

시간이 조금 지나고 나면 적응될 거라고 모두가 위로했지만, 여전히 정현은 제 신체가 된 이물질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었다. 잘랐다가 붙인 흉골도, 절개했다 봉합한 가슴 부위도, 모두 아팠지만 가장 정현을 괴롭힌 건 제 몸 안에 뛰고 있는 인공 판막이었다. 자려고 누우면 시계 소리를 닮은 그 기계의 철컥거리는 소리가 점점 커져만 갔고 그래서 쉽사리 잠이 들지 못했다.

평생 이렇게 살지도 모른다고 상상하면 그저 까마득했다. 그리고 두려웠다. 하지만 누구에게도 솔직히 털어놓을 수 없었다. 그래서 참아 보려 했지만 잘 참아지지 않았다. 가끔은 기계 소리에 묻힌 제 심장 소리가 들리지 않아서 덜컥 겁이 나 크게 호흡을 해 보기도 했다.

그래서 재희의 등에 기댈 때면, 정현은 그 낮은 고동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말을 할 때면 더욱 좋았다. 잠이 들 때도 깰 때도, 저보다 훨씬 낮은 재희의 목소리는 귀가 아닌 맞댄 뺨으로, 귓가로 진동이 되어 정현을 두드렸다.

똑딱거리는, 째깍거리는 그런 기계소리가 아닌, 힘차게 펌프질하는 심장 소리를 기억하고 싶었다. 제 가슴도 이렇게 뛰고 있을 거다. 기계가 뛰는 게 아니니까. 이렇게 업혀 있을 때면, 재희의 심장 소리가 마치 제 것인 것 같아 좋았다. 걸음을 뗄 때마다 작게 흔들리는 움직임에도, 정현은 마치 잠꼬대를 하듯 꼼지락거리며 더욱 깊게 재희의 등에 제 얼굴을 파묻기도 했다. 누구도. 엄마도, 또 재희도 알아채지 못하도록. 더욱 깊숙이.

‘…이제 기억도 잘 안 나요.’

그래서 아무도 알아채지 못했다. 정현의 커다란 눈이 살며시 열렸다 닫혔다는 것을.

***

오늘따라 정현의 방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보스락거리는 이불 속에 고개를 묻고 정현은 연신 몸을 뒤척였다. 아무래도 잠이 오지 않았다. 오늘 하루 종일 자고도 남은 탓이다. 환절기 탓에 더욱 욱신거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왼쪽으로 오른쪽으로 몸을 기울이다, 이러면 또 새벽에 숨을 못 쉬겠지 싶어 똑바로 누웠다. 천장에 비뚤게 붙은 큰곰자리 야광 스티커가 희미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나쁜 새끼….”

수액을 맞고 온 팔은 저릿해서 운신하기도 버거웠다. 하지만 덕분에 열은 내렸고 깜박이는 눈도 맑게 개어 있었다. 어느 정도까지는 잠이 들었다 다시 또 깨는 것을 반복하느라 의식이 오락가락했다. 아무래도 전신 마취를 몇 번 한 탓일까. 짜 맞춰지지 않는 퍼즐에 몽롱했던 정현이었지만 집에 다 다다랐을 때 즈음에는 분명히 깨어 있었다.

비겁할 만큼 너른 재희의 어깨 위에서 눈을 뜨다가, 들어 버린 그 말들.

“…그럼 나도 까먹겠다는 거 아냐.”

차라리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 싶다가도, 욱신거리는 가슴 통증 때문에 고개를 저었다. 열은 내렸는데 숨은 가빴다. 가래가 끼는 것도 아니었다. 흉터가 아픈 걸까, 그것도 아닌 것 같은데. 정현은 원인을 알 수 없는 통증으로 새벽녘까지 뒤척였다. 시린 손발을 옹송그린 정현은 이불 속으로 꽁꽁 숨어들었지만, 울어대는 귀뚜라미 소리가 다가오는 것을 멈출 수는 없었다. 이미 가을이었다.

***

그리고 이틀을 쉬고 나온 학교에서 정현은 놀라운 소식을 듣게 되었다.

“…여자 친구?”

어이없다는 듯 안 그래도 큰 눈을 더욱 크게 뜨는 반응이 대답을 대신하고 있기에, 마주 본 같은 반 아이들은 고개를 갸웃했다. 같이 사는 한정현이 아니라면 아닌 거였다.

입학 후, 번호는 앞뒤에 자리 배정도 창가 맨 뒷자리의 옆자리로 받아서 앉아 있던 정현과 재희. 아픈 정현을 마치 형제처럼 챙기는 재희의 모습에 이란성 쌍둥이냐는 오해도 받았다. 물론 정현은 딱 잘라 아니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덧붙였다. 사정이 있노라고.

평범한 아이들도 중학교에서 고등학교를 진학하면 한동안 낯선 환경에 적응하기 어렵기 마련이다. 입학 후 오리엔테이션은 꿈도 못 꿨던 정현은 당연히 3월 한 달은 반 친구라는 것이 없이 홀로 지냈다. 그마저도 몸이 약해 단체 활동에는 빠지다 보니 겉돌게 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한 학기를 지내고 이리저리 몸을 부대끼고 나니 얼굴을 익힌 녀석들 몇몇하고는 말을 틀 수 있었다. 굳이 재희가 곁에 없어도 이렇게 수다를 떨 수 있을 정도로.

“진짜야. 저번 간부 수련회에서 재희가 그랬다니까. 좋아하는 여자 있다고.”

학생회 운영 위원이 된 재희는 축제를 앞두고 하루 종일 바쁜지 교실에 없었다.

입학해서부터 3월 모의고사 성적으로 반장 자리에 낙점, 지난 1학기 내내 반장을 하다 못해 선생님들에게는 여전히 10반 반장으로 불리고 있었다. 이제까지 입학해 단 한 번도 전교 1등을 놓치지 않은 데다가 이미 내년도 전교 회장은 따 놓은 당상이라는 의견이 압도적이었다. 단순히 공부만 잘하는 게 아니라 학생들은 물론 교직원들 사이에서도 평이 좋았기 때문이었다.

문제는 이랬다. 지금도 학생회 모임 때문에 재희가 자리를 비우자, 나름 친해졌다 싶은 몇몇이 정현을 다른 의미로 괴롭히고 있었다. 남고도 아닌, 제 누나나 동생이 재희 이야기를 캐묻는다며 간곡히 애원하는 탓에 정현은 늘 떨떠름한 표정으로 그들의 의문을 해결해 주어야 했다.

사소하게는 재희의 생일. 좋아하는 것, 싫어하는 것…. 정현의 입장에선 달갑지 않았지만, 그나마 말을 튼 몇 없는 아이들을 홀대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본인에게 물어보면 될 텐데, 싶으면서도 적당히 대답하며 무료함을 달래고 있었다. 하지만 이건 좀 너무 생뚱맞지 않은가.

“…한재희가 뭐라고 그랬는데? 언제 만났대? 어떤 사람?”

“뭐라더라. …아.”

여자 친구라니. 정현이 상상조차 해 보지 않은 단어였다. 한재희가 여자 친구? 아니, 그 전에 좋아하는 여자가 있다고? 당황스러운 나머지 안 그래도 큰 눈을 굴러떨어질 것처럼 크게 뜨며 반문한 정현에게, 앞의 두 녀석 역시 당황해하며 기억을 더듬었다.

“눈이 크고, 피부가 하얗고… 아담한 사람.”

기억났다는 듯 큰 목소리로 들려온 단어들을 정현은 되짚었다. 결이 좋은 앞머리 아래 정갈한 눈썹 사이, 그 고운 이맛살을 잘게 찌푸렸다. 정말, 듣도 보도 못했다. 그런 이야기.

***

비가 온다고 하더니, 다행히 구름만 잔뜩 끼었다. 집에 가는 길은 적당히 선선했다.

정현은 자전거를 타고 돌아가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물론 함께 다니는 한재희 탓이다. 같은 재단의 중, 고등학교를 나오면서 한재희는 나름대로 유명인사가 되어 있었다. 중학교 때도 전교 회장을 했었고 선도 위원 등을 역임하느라 이리저리 불려 다니지 않은 곳이 드물었기에 등하굣길에도 어른은 물론 주변 또래들마저 인사를 건네 왔다. 물론 같이 다니는 정현은 성가시기만 했다.

혼자 다니면 딱 좋을 텐데…. 정현은 자전거 뒤에 탄 제 처지에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여전히 지열이 남은 더운 하굣길을 걸어서 돌아가는 것은 무리였다. 그렇다고 복잡한 대중교통을 이용할 수도 없었다. 사람들 사이에 껴서 흉부가 압박당하기라도 하면 큰일이니까.

최선은 자전거뿐이었다. 문제는, …정현이 자전거를 탈 줄 모른다는 것.

“꽉 잡아.”

“싫다니까.”

“그러다 떨어져, 새끼야.”

아빠는 뭐 했을까. 나 자전거 하나 안 가르쳐 주고.

이 오그라드는 하교 풍경도 전교생에겐 이미 유명해진 지 오래다. 담임선생의 양해를 받아 청소 시간을 면제 받고 먼저 돌아가긴 하지만, 덕분에 하교하지 못한 다른 전교생들의 이목을 받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중학교 저학년까지만 해도 먼저 집에 간다는 것만으로도 신이 났던 정현이었지만 이제는 아니다. 얼굴이 시뻘게진 채로 최대한 인적이 드문 곳을 돌아서 가라고 성화였기에, 오늘도 주택가를 비잉 돌아 집으로 가는 길이었다. 포장도로를 헤치는 자전거는 그리 빠르지 않았지만, 덜컹거리는 자전거가 뚫고 지나가는 바람은 무형의 빗이라도 된 듯 정현의 까만 머리칼을 이리저리 쓸어 올리고 있었다. 바람에 부신 눈을 가늘게 뜨자 깜빡이는 속눈썹은 마구잡이로 흩날렸다. 머릿속도 마찬가지로 뒤엉켜 있었다.

…물어볼까?

종전의 질문은 별다른 해답 없이 흐지부지 끝나 버렸지만, 이제는 정현이 더 궁금해졌다. 여자 친구라니. 하얗고 눈이 크고 아담한 이상형이라니. 그런 게 있었단 말야?

한재희의 주변엔 늘 여자애들이 몰려다녔다. 고백 또한 일상이었다. 결과는 늘 한결같이 거절. 울어 버리는 여자애들도 더러 있었다. 정현은 늘 그 상황을 원치 않게 목격하며 고통받아야 했다. 제가 다 민망하고 뻘쭘했다. 다행히 오늘은 아무도 없었지만.

하나씩 떠올려본다. 확실히, 저번에 거절한 그 애는 눈이 작기는 했다. 아, 그때 그 애도 피부는 좀 하얗지 않았지. 흠, 그래도 그 봄에 그 애는. 그래… 저기 4단지에서 튀어나왔던 걔는 괜찮지 않았나. 그 때 받았던 초콜릿 맛있었는데….

“으앗!!”

생각에 잠겼던 정현이 재희의 등에 코를 쿵 박아 버린 건 집까지 5분 정도를 남긴 사거리 앞에서였다. 후각에 예민한 정현 탓에 은행나무는 없는 쪽으로 요리조리 길을 피하고 나면, 멀리 돌아 차가 쌩쌩 달리는 사거리에 도착한다. 여느 때와 달리 교복 재킷 끝자락만 양쪽으로 잡고 버티던 정현은 갑자기 서 버린 자전거 탓에 그대로 무게 중심을 잡지 못했고, 완전히 재희의 허리를 안은 채 얼굴을 처박고 말았다.

아픈 코를 부여잡고 낑낑거리는 정현을 휙 돌아보는 재희의 앞머리는 결이 좋게 웨이브가 져 있었다. 마구 휘어잡는 바람에도 마치 왁스로 고정된 것처럼 멀쩡해서, 그에 비해 생머리인 정현은 부럽기도 하고 억울하기도 했다. 저도 모르게 잡고 있던 탄탄한 허리의 손을 빼려다가, 손목을 도리어 아프게 잡아 버리는 재희에 큰 눈을 부라려 보았지만….

“내가 뭐랬냐, 오빠 허리 잡으랬지.”

“…씨발 새끼가.”

낮게 웃는 소리에 반박하려던 정현은 이내 파란불로 바뀌어 버린 신호에 입을 꾹 다물었다. 점차 속도가 붙는 자전거에 정현은 자연스럽게 재희의 등에 기대고 말았다. 새끼, 위험하게 왜 한 손으로 자전거를 타고 지랄이야. 핸들을 쥐지 않은 다른 손으로 자신의 손목을 잡고 있는 재희 때문에 정현은 여전히 허리를 감싼 팔을 풀지 못했다.

완전 여자애처럼 안겨 버렸다. 이제는 큰 거리에서 목격당할 제 초라한 모습이 부끄러워 정현은 아예 고개를 등에 처박아 버렸다. 두 뺨과 귀가 시뻘겋게 달아오르다 못해, 정현은 살짝 눈가도 붉어졌다.

여자 친구고 뭐고, 내가 알 게 뭐야, 씨발.

마치 재희를 원망하듯 정현은 쿵 박아 버린 그대로 한 번 더 이마를 박았다. 엊그제 업힌 때와는 달랐지만 여전한 연필 냄새가 은은히 느껴졌다. 묘하게 기분이 조금 풀려 눈을 감은 정현을 달래듯, 자전거는 익숙한 길을 따라 가볍게 달렸다. 재희의 날렵한 다리가 이내 속도를 냈다. 아무래도 밤에는 비가 쏟아져 내릴 것처럼 하늘이 어둑해진 탓이었다.

***

오랜만에 넷이 모인 저녁 밥상이라지만 휘황찬란하기보다는 단출했다. 정현이 함께했기에 고기반찬이라곤 눈을 씻고 찾아볼 수 없이 몸에 좋은 채소와 나물로 가득했기 때문이었다. 신경 쓰지 말고 맛있는 거 먹으라고 제아무리 정현이 강권해도 소용없었다. 큰 대접에 밥 두 공기. 양념 고추장을 푹 떠서 반숙 계란 프라이까지 척척 두 개를 올리고 야무지게 밥을 비벼 먹는 재희에게 연주가 다진 소고기를 넣어 주는 것 정도가 그날 고기반찬의 전부였다.

“맞아, 너희 진로 정해야 한다면서.”

가정 통신문을 확인한 승환이 말문을 열었다. 성적표 이야기도 아닌데 밥을 깨작거리던 정현은 흠칫 어깨를 움츠렸다.

원래 성적에는 관심도 없었을 뿐더러 혼을 내는 사람도 없었다. 민망해지는 것은 정현의 자격지심일 뿐이었다. 같은 서식에 같은 날짜와 학급이 기입되어 있음에도 극과 극을 달리는 한재희의 성적표에 승부욕이나 열등감을 느끼는 것은 이미 십 년은 전에 포기했다.

다만, 정현은 다른 일로 우울해져 있었다.

“재희는 의대 가려면 이과에 가야겠고. 그치?”

정현은 연주의 말에 눈을 내리깔았다. 제 엄마가 바라는 바는 이미 알고 있었다.

본디 이과생들은 공부를 잘하면 으레 의대를 지망하고는 한다. 아빠를 봐도 돈을 잘 버니까. 하지만 제 엄마가 단지 그런 의도로만 바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에, 안 그래도 오늘 내내 심기가 불편했던 정현은 이내 젓가락을 탁 내려놓고 말았다.

그 소리가 유난히 커서 나머지 세 사람의 이목이 동시에 쏠렸다. 정현은 최대한 담담하게 제 의사를 전달했다. 세 사람 중 어느 누구도 궁금해하지 않는 제 진로를.

“나는 문과 갈래.”

“…….”

“…수학 너무 싫어.”

화목하던 저녁 식탁이 마치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고요해졌다. 야무지게 그릇을 비우던 재희 역시 숟가락을 멈췄다. 하지만 정현은 제가 한 말에 대한 결과를, 그 분위기를 수습하려 들지 않았다.

알고 있었다. 대학 진학은커녕 어딜 가서도 정규 수업도 온전히 듣지 못하면서 굳이 문과 이과를 나누는 일이 제게는 의미가 없음을.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시 또 재희에게 끌려가긴 싫었다. 하굣길 내내 자전거 뒷자리에서 고개를 파묻었던 정현이 나름대로 내린 결정이었다.

“물론 우리 현이도 하고픈 과를 선택해야지.”

정적을 깬 건 승환이었다. 변함없는 인자한 말투였지만, 그 말을 들은 정현의 두 눈은 크게 흔들렸다.

“원하는 대로 써 내렴.”

원하는 대답을 얻어 냈음에도 울렁이는 속이 가라앉지 않아, 정현은 일찍 자리에서 일어섰다. 고소하게만 느껴졌던 참기름 냄새에 구역질이 치밀었다. 뚫어지라 저를 쳐다보는 엄마의 시선이 날카로운 화살이 되어 뒤통수에 꽂혀 따끔거리는 것만 같았다. 아무것도 게우지 못한 헛구역질 끝에 정현은 몇 번이고 입을 헹구고 침대로 파고들었다.

문은 단단히 걸어 잠갔다.

***

예상대로. 정현이 제 방에 올라가 버린 뒤의 분위기는 처참했다.

예기치 못한 정현의 말에 연주는 눈에 띄게 당황했고, 또 불안해했다. 단순히 계열 선택의 문제가 아니었다. 당연했다. 정현이 이과를 간들 문과를 간들, 대학에 진학할 수 없을 수도 있는데 그 뭐가 문제이겠는가.

다만 서로 다른 계열을 선택한다면 둘은 내년부터 같은 반이 될 수 없다. 때문에 은연중에 당연히 정현의 진로는 재희를 따르기로 되어 있었다. 근시안적으로는 정현의 의사를 무시한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멀리 본다면 오히려 그게 정현을 위한 길이기 때문에.

“현이는 내가 한 번 더 설득해 볼게, 재희야.”

“놔둬요. 애가 하고픈 대로….”

“…정현이가 재희 없으면 어떻게 버틸 수 있겠어요!”

날카로운 연주의 목소리는 다시 한 번 긴 침묵을 이끌어 냈다. 제 배 아파 낳은 모성의 한탄을 그들이 함부로 위로할 수 없었다. 그녀의 절망 앞에서 두 남자는 철저히 타자他者였다. 태어나자마자 돌을 넘기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했던 아이는 어느덧 열일곱의 고등학생까지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이후의 삶을 낙천적으로 바라볼 수는 없는 법이다. 어머니의 숭고한 욕심은 끝이 없다. 그걸 자제하라고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우리 정현이를, 어떻게….”

“여보.”

약한 몸으로 고이 품어 낳은 아이는 기쁨의 몇 곱절만큼의 슬픔 더미를 그녀에게 안겼다. 물론 누구도 연주를 탓하진 않았다. 심지어 아이마저도 엄마에게 투정부리지 않았다. 다른 누구보다 연주 자신이 성치 않은 아이를 낳았음을 자책하느라 바빴다. 마음의 나약함은 몸을 갉아먹어 아주 작은 일에도 예민하게 반응했다. 그 감정의 옳고 그름을 따지거나 설득할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었다.

오열하기 시작한 아내의 어깨를 다독이는 승환 또한 침통한 얼굴이었다. 달래는 손길에 더욱 크게 울음을 토해 내는 연주와 달리, 한참이고 묵묵히 침묵을 지키던 재희가 입을 열었다.

“제가 설득해 볼게요.”

“재희….”

“제가.”

마치 다른 의사는 용납하지 않는 것처럼, 재희는 제 이름을 부르는 승환의 말을 잘랐다. 예의 없다고 혼을 내기엔 너무나 부드럽고 나긋한 목소리가 같은 말을 반복했다.

아주 단호하게. 꼭 명령이라도 하는 것처럼.

“제가, 설득해 보겠습니다.”

마주친 두 남자의 시선이 허공에서 복잡하게 얽혔다. 하지만 꾹 다문 입술은 어느 쪽도 쉬이 열리려 하지 않았다. 분명 어느 쪽에서도 호의를 찾을 순 없었지만, 얼굴을 감싼 연주는 두 사람의 미묘한 기류까지는 파악할 수 없었다.

오히려 승환이 먼저 눈을 피했다. 식탁 위에 널브러진 연주의 손을 마치 친아들처럼 익숙하게 쥐고 달래는 건 재희의 몫이었다.

“너무 걱정 마세요.”

“재희야, 정말, 아줌마가 정말 미안해….”

“제가 치울게요. 들어가 쉬세요.”

저를 쳐다보는 승환의 시선을 노골적으로 피한 재희는 마치 대화는 끝났다는 듯 익숙하게 식기들을 정리했다.

마치 아이를 다스리는 것처럼, 재희는 주변인의 감정에 의연하게 대처했다. 아직 열일곱. 고작해야 고등학교 1학년인 재희는 어리광이라곤 없이 늘 어른스러웠다. 어른이 아닌 어른스러움 앞에 ‘실제 어른’들은 두 가지 반응을 취하기 마련이었다. 대견스러워하거나, 오히려 경계하거나.

각기 다른 선택지를 선택한 부부는 함께 안방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겨우, 아무도 없이 재희 홀로 남았다.

세 가족 모두가 들어가 버리고 난 텅 빈 실내를 작은 한숨이 가로질렀다. 행주로 식탁을 훔치고 난 뒤 지친 듯 의자에 걸터앉은 재희는 식구 수에 비해 과하게 너른 거실과 주방을 둘러보았다.

차분히 정리되어 있는 집. 윤택하고 화목한 가정. 조금 유약하기는 하지만 사랑스러운 외동아들과 그를 사랑하는 부모가 함께하는 오붓한 가족.

물론 겉모습으로는 어떤 것도 예단할 수 없다. 병마가 갉아먹는 것은 몸뿐이 아니니까. 늘 그랬듯 재희는 눈을 감고 머릿속을 차근히 정리했다. 일찍 떠난 부모는 재희에게 비상한 기억력을 유산으로 남겨 주었다. 마치 사진을 찍듯 각각의 장면을 머릿속에 저장하는 재희는 백 페이지의 책이나 지워진 판서도 금세 떠올리는 게 가능했다.

그 기억력은 공부에만 한정된 능력이 아니었다. 차곡차곡 개켜져 있던 기억들 가장 아래에 묻혀 있던 빛바랜 장면 하나를 떠올렸다.

오붓한 부부, 그들의 외동아들.

…어쩌면 이들과 무척 닮은 모습으로 남았을지 모를, 잊힌 한 가정을.

거짓말은 아니었다. 네 살. 벌써 10여년 전 기억. 시간이 지날수록 기억은 점차 퇴색되어 갔고 아무리 기억력이 좋다고 한들 그것이 온전히 남을 순 없었다. 아침마다 마주하는 거울 안에서 제 엄마의 얼굴을 떠올리고, 의사답지 않게 덥수룩했던 아빠의 수염을 떠올리며 면도를 하곤 했다.

분노는 불이 아닌 얼음을 닮은 게 아닐까. 창밖에 퍼붓는 빗소리에 맞춰 느긋이 계단을 오른 재희는 제 방문 앞에 멈춰 서서 뒤를 돌았다. 틈도 보이지 않게 굳힌 문. 어쩌면 잠겨 있을까. 하지만 굳이 문고리를 잡아 돌리진 않았다.

“…성가시게 됐네.”

네 살, 그날의 밤과 달리 재희는 정현에게도 들리지 않을 만큼 작게 읊조릴 뿐이었다.

***

전날 오후에 내리기 시작한 비는 아침까지 그치지 않았다. 정현으로선 불행 중 다행이었다. 비가 오는 날엔 당연히 자전거를 타고 등교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정현은 식탁 위의 토스트와 현금 2만원을 발견했다. 어젯밤 소동 탓인지 아이들의 등교 시간까지도 일어나지 못한 엄마 대신 일찍 출근한 아빠가 마련해 둔 흔적이었다. 정현은 그릇 아래 깔려 있던 만 원짜리 두 장과 똑같은 모습으로 겹쳐져 있던 토스트 두 장 중 하나를 물었다. 거기까진 나쁠 게 없었다.

다만, 뒤이어 거실로 내려온 재희에게 나머지 한 장을 건넨 것은 정말, 통탄할 만한 버릇의 발현이었다.

“…가자.”

제가 저지른 행위를 깨닫고 그대로 표정을 굳어 버린 정현을 힐끗 본 재희는 피식 웃었다. 갑자기 확 혈액 순환이 되듯 정현의 하얀 얼굴이 온통 붉어졌다. 먼저 집을 나서는 재희는 정현에게 건네받은 토스트를 그대로 식탁에 내려 두었다. 이유를 물을 새도 없어서 정현은 부리나케 그 뒤를 따랐다.

4인용으로 보기에도 지나치게 너른 식탁 위에는 그렇게 토스트 하나만이 덜렁, 남았다.

***

도둑이 제 발 저리다더니 딱 그 꼴이었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은 축제 준비로 재희는 교실에서 보기 힘들었고, 밤새 내리던 비는 그칠 줄을 모르고 퍼붓는 통에 아침부터 모든 수업이 실내에서 이루어져 굳이 재희의 도움이 필요 없었다는 점이었다.

궂은 날씨면 으레 몸이 쑤시는 통에 정현은 눈비라곤 질색을 했지만 오늘만은 예외였다. 정말 비가 고마웠다. 택시비를 내고도 남은 잔돈과 만 원짜리를 생각하자면, 제발 이번 주 내내 비가 오기만을 바랐다.

하지만 모든 게 다 뜻대로 흐르는 것은 아니었다. 몸은 편했지만 마음은 더욱 불편해졌다.

…왜 아무 말도 안 하지.

평소 같았으면 욕을 했어도 수백 번인데.

한재희는 우등생이지만 그 이상의 호감을 사는 인물이었다. 대외적으로는 참으로 친절하고 상냥한 성격으로 알려진 그는 정현 앞에서만은 조금 다른 태도를 보였다. 여느 남고딩과 다름없이 욕도 질펀하게 했고, 친절하기보다는 냉소적인 모습이 더 많았다. 정현은 그게 재희의 본모습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정현은 그런 재희가 나쁘다든가 고발해야 할 정도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저 또한 남들 앞에선 늘 괜찮은 척을 하면서 살고 있으니까. 사람이면 누구나 남에게 보이기 위한 나와 실제의 나가 따로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정현의 경우 오래 못 가 탄로나 버리는 게 문제였지만.

그래서 제 앞에서만은 솔직한 표정을 짓고 말을 내뱉는 재희가 정현은 싫지 않았다. 오히려 묘한 만족감이 들기도 했다. 만인의 스타와도 같은 녀석의 진짜 모습을 알고 있는 건 오랜 친구인 자기 자신밖에 없다는 묘한 우월감에서였다. 그래서 집에 돌아와선 젠틀한 척하던 재희를 흉내 내며 그를 이중인격자라고 나불대며 놀리는 것을 즐거워하기만 했는데.

하지만. 요사이 뭔가 예전 같지 않았다. 정현은 자신도, 그리고 알 수는 없지만 재희도 뭔가 달라진 것 같았다. 예전 같았으면 그냥 대놓고 물어봤을 말도 뭔가 한참을 고민하고, 눈치 보게만 됐다. 사소한 것에 예민해지고, 신경이 쓰였다.

이런 게 사춘기일까?

막상 다들 사춘기를 겪는다는 중학생 때에는 내도록 병원에서 지내느라 그 티를 낼 틈이 없었다. 적절한 때를 놓친 제 마음과 몸은 여전히 어린애나 다름없다고 정현은 생각했다. 흔히 2차 성징이라고 칭하는 흔적도 제게는 별것 없었다. 다들 한다는 몽정조차 아직 정현은 해 본 적이 없었다. 수염도 나지 않아 재희의 면도기를 매만지다 손끝을 베이는 게 고작이었다.

멀쩡하지 않은 몸이라도 하나둘씩 어른이 되어 간다고 생각하면 조금 느긋해졌지만, 널뛰는 맥처럼 감정만은 제대로 사춘기다웠다. 열일곱이란 나이에 버티기에는 터무니없이 버거웠던 불행이 차곡차곡 쌓인 결과이기도 했다.

되도록 착한 아이가 되고 싶었지만 마음만은 사춘기답게 쉽게 제어되지 않았다. 어제의 일도 마찬가지였다. 미안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특히 심약한 엄마는 제가 웃어도 눈물 바람인데 오죽했을까. 보지 않아도 안다. 제가 난장판 치고 나간 식탁의 분위기를 누가 어떻게 수습했을지를. 작게 한숨을 내쉰 정현은 비어 있는 재희의 책상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사과하고 싶진 않았다. 하지만 미안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복잡한 마음에 정현은 가슴이 답답한 것도 잊고 그대로 책상 위에 엎드렸다.

아무리 제 부모가 강권한다고 해도 재희가 문과에 올 리 없다고 정현은 확신했다. 듣기로 재희의 아버지도 의사였던 데다가, 그에 못잖은 명석한 두뇌의 소유자인 재희가 재능을 썩히는 것 또한 낭비였으니까. 아니, 재희라면 의대가 아니더라도 분명 좋은 대학에 갈 것이다. 그리고 물론, 정현은 그 대학에 따라갈 수 없다.

결론은 뻔했다. 억지로 같은 반이 되는 것도 기껏해야 2년 뒤까지가 한계다.

늘 함께였지만, 그게 마지막까지 같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정현은 사과할 수 없었고, 후회하지도 않았다. 제 몸은 제가 챙겨야 한다. 고작 뽀뽀 하나에 저를 챙기느라 제 공부마저 내팽개치는 재희에 대한 감정은 슬슬 고마움의 정도를 넘고 있었다.

어차피 집에서야 함께 살 테니까. 심란한 마음에 혼자 고개를 끄덕이다가도, 오늘 아침 아무렇지 않게 저를 대했던 재희의 얼굴을 떠올렸다.

뭐야, 내 말 따위 신경도 쓰지 않겠다는 거야?

묘한 마음이 가시처럼 삐죽삐죽 솟았다. 나름대로 결심했던 ‘쿠데타’가 이렇게 허무하게 소강되다니, 허무했다. 옆으로 고개를 뉘인 채 바라본 창밖에 퍼붓는 빗물이 맥없이 흘러내리듯, 그렇게 오늘 하루도 아무 의미 없이 흘러내릴 모양이라고, 정현은 어림짐작했다.

***

하지만 그 예감은 보기 좋게 빗나가 버렸다.

마지막 두 시간은 미술이었다. 이동 수업이기에 자리를 옮기는 아이들을 따라 필기구를 챙기던 정현의 앞을 재희가 가로막고 섰다. 과목 선생들에게 양해를 받고 내내 축제 준비에 한창이더니, 미술 시간만은 참석하게 된 모양이었다.

사근사근하게 말을 걸기도 어색해서 정현은 애써 모른 척하고 나서려고 했다. 이미 둘을 제외한 학급 전원은 내려가고 난 뒤였다. 본인이 문을 잠그고 가겠다고 한 재희가 마지막인 건 당연했다. 보통 때 같았으면 문을 잠그고 함께 내려가겠지만, 정현은 마치 티를 내듯 먼저 나서려고 했다. 유치하다고 해도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넌 교실에 남아 있어.”

“왜?”

꼭 몰라서 묻느냐는 말투였다. 물론 정현도 속으로는 뜨끔했다.

이론이 아닌 실기 수업이었기에 미술실로 이동해야 했고 그 수업 과제가 판화라는 것을 정현 역시도 모르지 않았다. 단순한 회화나 수채화 정도라면 큰 어려움이 없었겠지만 독한 잉크를 쓰는 판화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어련히 정현의 호흡기 문제를 먼저 가늠한 재희는 늘 그랬듯 정현이 수업을 듣지 않는 편이 좋다고 결론을 내린 것이다. 평소 같았으면 정현도 이견이 없었을 것이다. 아쉽긴 하지만 혼자 남아 빈 노트에 깨작거리며 수업이 마치기를 기다리며 홀로 교실에 남아 있겠다고 했겠지만.

애석하게도 오늘의 정현은 평소와 달랐다.

“…밑그림 정도는 상관없잖아.”

“어차피 끝까지 참석도 못할 걸 왜 굳이 욕심을 부려.”

“내가 왜 네 뜻대로 해야 해.”

“한정현.”

“내가 하고 싶고, 내가 알아서 무리다 싶으면 그만 갈 거야. 미완성이면 무조건 하면 안 돼? 나도 수업료 냈고, 1학년 10반 학생이야. 나도 할 거야. 내가 어린애야?”

미술 수업은 정현이 유일하게 의욕을 보이는 과목이었다. 진로로서의 회화를 포기하긴 했지만 그나마 본인이 가장 잘하고 관심이 많았기에 유일하게 성적에 목숨을 걸었다. 물론 어떤 수업이냐에 따라 달랐지만, 참석하지 못하는 수업에도 최대한 스케치라도 해서 과제를 보완하려고 노력했다. 정현의 사정을 뻔히 아는 미술 선생은 그 노력을 참으로 기꺼워했고, 그 사실을 재희가 모를 리가 없었다. 이번 수업 역시도 재희가 내려가고 나면, 어련히 미술 선생이 정현 앞의 개별 과제를 부여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정현은 욕심을 부렸다. 재희의 말이 맞았다. 사춘기일지도 모를 치기에 휩싸여, 굳이 못된 말을 더욱 내뱉었다. 티격태격하는 둘 사이가 용인되는 것과는 분명 어울리지 않는 상황이었다. 울컥, 괜한 서운함이 몰려든 정현이 그 커다란 눈을 깜박이며 애써 눈물을 참았다. 재희의 냉정한 판단을 이해하면서도, 이해하지 못했다.

어차피 내 인생이고, 내 선택인데. 네가 왜….

“내 몸이고 나도 내가 알아서 할 수 있어. 어차피 내년에 넌 이과 가고 난 문과 가면….”

“네가.”

“…….”

“네가 혼자 알아서 할 수 있다?”

마지막, 비웃음과도 같은 재희의 말에 정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대답 대신 재희를 스쳐 지나갈 뿐이었다. 교실 문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닫힐 때까지 재희는 미동도 않았다. 그 뒷모습을 차마 확인할 수 없어 정현은 잔걸음으로 미술실로 향했다. 계단을 내려가다가 자칫 넘어질까 두려워 몇 번이고 손잡이를 되잡아야 했다. 발자국보다 더 크게 뛰는 심장 소리에 귀는 먹먹해졌다. 넘어지면 안 된다는 일념으로, 정현은 붉어진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따스한 등 뒤에 기대면 늘 들려오던 재희의 규칙적인 고동 소리와 달리, 느렸다가 빨라졌다하는 - 부정맥 환자 특유의 심장 고동이 제멋대로 날뛰고 있었다.

***

마치 지붕 위에서 빗방울이 토도독 결을 따라 흘러내려 가는 것처럼.

정현의 발걸음이 점차 멀어져가는 소리에 재희는 쓰고 있던 안경을 벗었다. 갑자기 두통이 밀려왔다. 아직도 안경에 적응하지 못한 탓이다. 보다 또렷하게 세상을 보기 위해 만들어진 도구가 오히려 머리를 어지럽히고 있었다.

머리가 지끈거려 눈을 질끈 감았다 뜬다. 종전까지 명확하다 못해 머리를 어지럽게 만들던 세상이, 고작해야 안경 하나를 잃어버리자 뿌옇고 흐리멍덩하게만 보인다. 손에 잡히는 것은 없어 답답하기는 해도 오히려 이쪽이 마음이 편한 것은 왜일까.

교실 창가 맨 뒷자리인 정현의 책상 위에 걸터앉은 재희는 창밖을 내다보았다. 손가락 끝에 걸치고 있던 안경을 들어 올려 얼굴에 쓰는 대신 창가 쪽 어딘가를 비추었다. 한쪽 눈을 감자 렌즈 밖의 시야는 보다 섬세해졌다. 왜곡된 렌즈를 통해 보이는 세상. 구불거리는 피사체들 가운데 딱 하나, 미술실이 있는 별관으로 가로질러 가는 작은 그림자를 멀찍이 지켜보았다.

삐져나온 와이셔츠 자락으로 안경의 렌즈를 닦고 난 재희가 제가 앉은 책상의 표면을 조심스럽게 손바닥으로 쓸어내렸다. 마치 잠든 아이의 뺨을 쓸어내리는 것처럼. 아무리 쓸어 봐도 온기 따위는 남아 있지 않았지만, 재희는 버릇처럼 눈을 감았다. 영민한 머리가 무언가를 외울 때는 늘 하는 버릇이었다.

“한정현….”

아까 전까지만 해도 명확하게 제 곁에 머물렀던 존재. 하지만 지금은 없다. 마치 아기 새가 서툴게 날갯짓을 하듯 파드득거리며 꼬리를 내빼고 도망간 녀석. 눈을 감으니 오히려 선명해졌다. 그 말투와 목소리. 시선. 네 살 어린아이의 얼굴 그대로 커 버린 것처럼 커다랗고 까만 눈동자.

마치, 시간이 멈춰 버린 듯 유약함은 그대로 품고 있는 두 눈.

멀리 가진 못할 것이다. 그래서 재희는 서두르지 않았다. 눈을 떴을 때는 사로잡혔던 분노 따위는 홀가분하게 가셨다. 다시금 안경을 끼고서 책상을 내려다보는 얼굴엔 옅은 미소까지 어려 있었다. 마치 아주 아끼는 이름을 되뇌듯. 말과 달리 목소리는 달콤했다.

“너만은 이러면 안 되지.”

***

어쩌면 반란이었고, 혁명이었다.

그건 충동적인 선택이었고 뒷감당은 물론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사전에 재희와 이야기를 나누었기에 으레 정현이 불참할 거라 생각했던 미술 선생은 깜짝 놀란 표정을 했다. 괜찮겠냐는 물음에 스케치 정도는 할 수 있다며 정현은 일부러 활짝 웃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분명 뒷감당에 대한 염려까지는 생각이 닿지 않은 상태였다. 제 의지대로 한 사소한 선택에 신이 난 정현이 살짝 도를 지나치기 전까지는.

수업은 시작되었고 재희는 그 뒤에야 조금 늦게 와 자리에 앉았다. 그때쯤 미술 선생은 조를 나눠 각기 다른 주제를 구상해 보라고 아이들에게 설명하고 있는 중이었다. 자연스럽게 번호순으로 조가 묶였고, 앞뒤 번호인 재희와 정현은 늘 그랬듯 이번에도 같은 조가 되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정현이 제 앞앞 번호가 결석한 빈자리로 냉큼 가 버리고 만 것이다. 그리고 변명이랍시고 한 말이 한 건을 해냈다.

“…저 새끼 그림 존나 못 그려.”

정곡을 찌르는 정현의 말에 모두가 웃음을 터뜨렸고, 심지어 재희마저도 피식 웃었다. 오히려 정현이 얼굴을 붉혔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뭐든 다 잘하는 한재희에게도 약점은 있었다. 유독 손재주가 서투른 편이었다. 100이 넘쳐흐르는 성적표의 옥의 티가 바로 미술 점수였다.

물론 재능이 아닌 노력과 의지로 상위권을 유지하곤 했지만 기본적인 재능 차이를 뛰어넘기는 어려웠다. 차라리 필기라면 100점을 따겠지만 실기에서는 중상위권을 넘지 못했다.

정현은 그와 정반대였다. 죄다 50점 미만의 점수였으나 미술만은 열과 성의를 다해 100점을 맞으려 애를 썼다. 유일한 자존심이었다.

그래서 미술 시간만큼은 평소의 관계가 역전되곤 했다. 늘 신세만 지던 정현이 콧대를 높이며 재희를 긍휼히 여기던 시간. 미술 선생 몰래 눈치껏 스케치를 도와주거나 했는데.

이제는, 다른 조가 되어 버렸다.

4B 연필을 쥔 정현의 하얀 손은 거침없이 도화지를 채우기 시작했지만, 마음은 그렇지 못했다. 먼 자리에 앉은 재희의 표정이 잘 보이지 않았다. 잘 그리고 있으려나? 생각하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알아서 잘하겠지. 제 그림을 보며 감탄사를 내뱉는 아이들의 칭찬에 어깨를 으쓱이며 정현은 정신을 집중하려 애썼다.

이것부터가 시작인 거다. 시작이니까….

***

“택시 타자, 한정현.”

“너나 타.”

…비에게 감사한 거 죄다 취소.

하교 시간. 비는 아침보다 더욱 거세지고 있었다. 교실을 나서는 것까지는 좋았는데 뒤따라 나온 재희를 어찌해야 할까 정현은 고민에 빠졌다. 뭐, 같은 집에 사는데 택시 타고 가면 아무렇지도 않겠지. 하지만 그러다 보면 오늘 오전 토스트 사건처럼 어영부영 예전처럼 돌아가 버릴 것 같아서 정현은 살짝 망설였다.

“자.”

“…….”

“너 혼자 타고 가.”

그래서 정현은 저도 모르게, 제가 쥐고 있던 돈을 재희의 주머니에 욱여넣었다. 충동이었다. 택시를 잡으려 주위를 둘러보던 재희가 정현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쿨하게 돈을 주고 우산을 펴려던 정현의 몸이 빙글 돌아섰다. 팔을 잡고 이끈 재희의 얼굴과 다시 마주해 버렸다. 웃음기는 없었다.

“적당히 해.”

“뭐가.”

“…….”

“집에 가는 것 정도는 나 혼자 할 수 있어.”

모두가 자신을 생각해서 걱정해 주는 것을 안다. 하지만 정현은 그것을 몇 번이고 걷어찼다. 미술 시간에 참석하는 게. 수학이 싫어서 문과에 가겠다고 하는 게. 그 사소한 것들에 고집을 부리는 게 유치하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알면서도 정현은 일부러 성질을 내고 있었다. 엄마 아빠에게도, 그리고 재희에게도.

하지만 아무도 자신을 혼내지 않았다. 화내지 않았다. 먼저 성질을 낸 건 저였음에도 모두 다 아무렇지 않은 척 구는 게 오히려 이상했다. 사과해야 하는 건 나인데. 이미,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저를 대하는 재희의 뒷모습이 괜히 더 미워 보였다.

모두가 배려해 주는 그 모든 것들에 갑자기 환멸이 났다.

“내가 너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런 병신인 줄 아는 모양인데….”

“…….”

“타고 싶으면 너나 타고 가.”

하지만 재희는 이번에도 아무 말이 없었다.

정현은 장우산을 펼쳤다. 순간 휘청할 정도로 크고, 튼튼했다. 땅에 물기가 고여 있을 만큼 흠뻑 내리는 비에 살짝 입술을 깨물다, 이내 발을 내딛었다. 정현은 자신에게 되뇌고 있었다. 할 수 있어. 혼자 하나씩 해 나갈 거야. 이제 열일곱이잖아. 아주 사소한 거라도, 혼자 할 수 있을 거라고… 그런 의욕에 차서 세차게 내리는 빗길을 걷기 시작했다.

물론, 5분도 지나지 않아 정현은 자신의 선택에 후회를 하고 말았다.

가능하다면 시간을 되돌리고 싶을 정도로.

***

비는 더 이상 지금이 여름이 아니라는 것처럼, 갈증을 해소하는 것을 넘어서 세상 만물을 차갑게 식히려 하고 있었다. 가을의 문턱을 직접 열어 버리는 것처럼. 하늘을 수놓았던 녹음이 떨어져 내리는 낙엽으로 져 버리도록. 그리고… 정현마저도.

이미 발끝은 감각을 잃었다. 운동화가 아닌 구두를 신고 온 것부터가 잘못이었다. 체육 수업도 하지 않고 등하교도 자전거 아니면 택시를 탔으니. 게다가 비가 오니까 운동화 속으로 빗물이 들어올까 봐 구두를 신었던 게 오히려 지금은 정현의 두 다리를 무겁게 만들고 있었다. 마스크 또한 오히려 정현에게 악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호흡과 빗물 덕분에 마스크에 맺힌 수분은 역으로 정현의 입 속에 찬 기운을 옮기고 있었다. 몸이 점차 식어 가는 게 느껴졌다. 목과 입 안은 말라서 쌕쌕거리는 소리를 냈다.

하지만 정현에게 가장 힘겨운 건 퍼붓는 비도, 점차 바닥을 드러내는 제 체력도, 온몸에 가득 서린 추위도 아니었다. 그건 바로 느린 제 걸음보다 스무 발자국은 뒤에서 천천히 저를 따라오고 있는 재희의 존재였다.

이미 중학교 들어서서 제 키를 넘어서 훌쩍 커 버린 재희는 정현보다 10센티는 더 컸다. 다리 길이도 훨씬 길었다. 같이 걸음을 걸어도 제가 네 걸음 만에 갈 거리를 세 걸음 만에 갔다. 놀릴 수 있는 건 미술만이지, 체육은 늘 특급인 녀석은 달리기도 빨랐고 몸도 가벼웠다. 즉, 이렇게 빗길이라고 해도 원래 재희의 걸음걸이라면 충분히 자신을 따라잡다 못해 이미 지금쯤에 집에 돌아가고도 남았을 것이다.

감시하는 걸까. 지켜보는 걸까. 이런 제 모습을 비웃고 있을까. 하지만 정현은 차마 뒤를 돌아볼 수 없었다. 저절로 아래턱이 떨리기 시작했다. 보지 않아도 입술이 퍼렇게 질렸을 것이다. 학교를 나설 때처럼 멀쩡한 시늉을 할 자신이 없었다.

그냥, 차라리 먼저 가 버렸으면.

화도 났고 서글퍼지기도 했다. 정현은 자신이 오늘 몇 번이고 재희에게 내뱉었던 말들을 주워 삼키며 되새겼다. 혼자 할 수 있다. 병자 취급하지 마라.

재희는 그 말들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정현의 뒤를 묵묵히 따르는 게 전부였다.

하지만 재희의 말이 다 맞았다. 정현은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재희가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집에 돌아가는 일조차도.

제 존재가 모두에게 민폐로 느껴졌다. 이렇게 태어나지만 않았어도. 아니, 차라리 이럴 거면 엄마 뱃속에서 먼저 잘못됐더라면 슬프긴 했겠지만 큰 고생은 아니었을 텐데. 저 때문에 더욱 약해지다 못해 몸도 마음도 병들어 버린 엄마와 그런 엄마를 돌보며 돈을 버느라 눈에 띄게 수척해진 아빠. 그리고… 재희.

“재… 희야….”

부르는 목소리는 퍼붓는 빗소리에 묻혀 아주 가까운 거리에도 들리지 않을 만큼 작았다.

…그래도 한때는 내가 너를 위로할 수도 있었는데.

부모님을 잃고 엉엉 울던 재희를 꼭 마법처럼 뚝 그치게 만들었던 뽀뽀. 정현은 그게 뭣이라도 되는 것처럼 뿌듯했다. 나약하고 병들게 태어난 제가 별 힘을 들이지 않고도 재희의 울음을 멈출 수 있다는 것이.

나도 누군가를 기쁘게 할 수 있구나. 늘 착하다고 제 머리를 쓰다듬으면서도 슬픈 눈으로 웃고 또 우는 엄마와는 달리, 재희는 정말 기쁜 듯 웃어 주었으니까. 그래서 즐거웠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이렇게 훌쩍 커 버린 우리에겐, 이제 그 뽀뽀는 효력을 잃은 것은 아닐까.

고등학생이 되고 그만큼 머리도 크면서 이게 조금은 이상한 게 아닐까. 정현은 생각했다. 드라마에서도 어디에서도, 남자와 여자가 뽀뽀하는 이유는 서로를 좋아하고 사랑해서인데.

물론 재희가 싫어진 것은 아니었다. 말로만 틱틱거릴 뿐 정현은 재희가 좋았지만, 드라마에 나오는 절절한 사랑과는 다르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재희에게 여자 친구라도 생긴다면, 그 여자 친구와 하는 게 진짜 ‘뽀뽀’가 아닐까. 아무래도 이상해. 남자끼리 뽀뽀하는 것도, 그게 보상인 것도. 내가 무조건 재희 곁에 있는 것도.

이성은 그렇게 정현에게 속삭이고 있었다. 그래서 정현은 결심했다. 아주 작은 거라도 혼자 해 보기로. 하지만….

온몸에 스미는 오한을 견딜 수 없게 되어 버리자 정현은 이제는 뭐가 됐든 좋다고 체념해 버렸다.

걸어서 집까지 가는 데 이렇게 오래 걸렸던가. 재희가 이끄는 자전거 뒤에 앉아서 휙휙 지나가는 풍경을 볼 때면 그게 매우 짧고 순식간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래서 가끔 날씨가 좋은 날엔 걸어서 가자고 조를 때도 있었지만, 씨익 웃으며 들은 체도 않던 재희는 분명 이토록 먼 길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서 그랬었나 보다.

그냥 객기 부리지 말고 택시를 탈 걸 그랬지. 정현은 후회하고 있었다. 매번 재희가 이끄는 길로만 갔기에 멀지 않은 귀갓길도 이게 맞는지 틀린지 구분하기 어려웠다. 같은 재단의 중학교까지 해서 4년째인 학교를. 이사 한 번 다닌 적 없음에도 길을 헤매고 있는 스스로가 정현은 어이없다 못해 부끄러웠디. 궂은 날씨에 빗물로 어두운 시야는 방향 감각조차 잃어버리게 만들었다. 가끔 이 길이 맞나 싶어 걸음을 멈춰 봐도, 그래도 뒤따라오는 재희의 걸음걸이에 안심하듯 정현은 걸음을 디뎠었다.

자괴감이 치밀었다. 이 와중에도 자연스럽게 너에게 의존하는 나에게….

하지만 자존심을 굽히기 싫었다. 혼자 가겠다고 떵떵 큰소리를 쳐 놓고 이제 와 우는소리를 내기는 싫었다. 재희에게 내뱉었던 말들이 고스란히 정현의 나약한 몸과 마음에 스며들었다. 아무것도 못 하는. 재희 없이는, 아무것도 못 하는 나약한 병자…. 병신 같은, 한정현….

몸의 떨림은 이미 참는다고 참아지지 않는 정도가 되었다.

가방이 천근만근 무거웠다. 어지러워서 발이 떨어지지 않아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아니 사실, 그대로 주저앉고 싶었다. 하지만 발을 적시다 못해 교복 바지 무릎까지 흠뻑 젖어 버린 지금, 이 길바닥 앞에서는 그럴 수 없었다. 하지만 우산을 쥔 손아귀에서 점차 힘이 빠져나가고 있었다. 거센 바람에 꺾이지 않도록 튼튼하게 만들어진 우산의 무게가 오히려 방해가 되고 있었다. 느리게 눈을 깜박여 봐도 빗물로 얼룩진 시야는 맑게 개지 않았다.

더운 호흡이 훅 끼쳐 왔다. 아, 몸에서 열이 나고 있구나. 이제야 정현은 제 상태를 파악했다. 그리고 생각했다. 안 되는데, 열이 나면 안 되는데. 열이 나면 또 병원에 가게 된다. 늘 그랬듯, 재희가 절 업고서. 상황을 들은 엄마는 또 울 거고, 아빠는 한숨을 쉴 것이다. 재희는 또 제가 간수를 못 해서라고 죄송스러워하겠지.

안 돼, 그것만은. 더 이상은… 싫어.

이를 악물었다. 간질거리는 목이 그대로 잠겨 버리기만을 빌며 호흡을 참았다. 하지만 생각하자마자 그것에 반발이라도 하듯 가래가 잔뜩 끼인 기침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마른 몸이 마치 구역질을 하듯 기침을 하다가, 결국 그 기세에 못 이겨 무릎이 꺾이고 말았다. 기침에 눈도 채 온전히 뜨지 못한 정현의 얼룩진 시야는 우수수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넘어질 것이다. 우산을 쥐던 손에 힘이 빠져나가며 몸을 파고드는 빗물의 타격이 느껴졌다. 좀 있으면 아스팔트에 그대로 나자빠지겠지. 아플까. 추운 게 먼저일까. 수술한 보람도 없이 심장이 그대로 멈춰 버리는 게 아닐까.

아니… 차라리 이대로 죽어 버리는 게 낫지 않을까.

이대로… 모두 다 행복하게….

***

이상했다.

이대로 넘어진다면 분명 몸의 절반이, 혹은 전신이 푹 젖어 버리고, 또 상처가 마구 나거나 머리가 깨질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예상했던 통증은 닥쳐오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제 머리 위 우산에 퍼붓는 빗소리는 여전히 정현의 귓가를 맴돌고 있었다.

잠깐만. …우산, 아까 분명… 놓쳤는데. 그렇다면 이건.

“혼자….”

“…허억, 헉….”

“할 수 있다면서.”

힘겹게 눈을 뜨는 정현의 긴 속눈썹은 빗물이 아닌 눈물로 흠뻑 젖어 무거웠다.

그 뜨거운 물기를 엄지손가락으로 쓸어내린 재희는 물기로 엉긴 시야 너머에서 정현을 안고 있었다. 어떤 표정인지는 이미 흐려진 정현의 시야로는 확인할 수 없었다. 사실 누구인지 얼굴도 보이지 않았다. 다만, 정현은 알 수 있었다. 저를 안고 있는 사람이 바로 재희라는 것을. 이 체온, 촉감, 목소리, 체향. 모든 것을.

“응? 정현아.”

아마도 쓰러져 내리기 전 뛰어들어 정현의 몸을 끌어안은 모양이었다.

사람의 체온은 확실히 뜨겁다. 마치 한여름의 정오처럼 저를 감싼 그 뜨거운 체온에 정현은 오히려 오한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만큼 정현의 온몸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파랗게 질린 입술과 턱이 소리까지 내며 떨리는 것을 보고, 재희는 제 옷이 젖는 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정현을 더욱 힘주어 안았다.

“추워?”

“…ㅈ… 재….”

“정현아.”

시야가 가물가물해 잘 보이지 않았지만, 정현은 재희의 품속에서 오로지 재희의 음성만을 듣고 있었다. 이제는 빗소리도 잘 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반박할 기력도 없었다. 미안하다고 용서를 빌기에는 힘이 달렸다. 온기를 찾자 살기 위해 미친 듯이 뛰는 심장 소리가, 그 기계 소리가 귀를 때리기 시작했다.

싫어… 이거. 이거… 재희야, 싫어….

“재… 히야.”

의식도 가물가물한 정현이 유일하게 할 수 있었던 것은 그 두 가지가 전부였다.

마치 살기 위해 몸부림치는 생명 그 자체의 발악처럼. 엄마의 젖을 놓지 않으려는 아이처럼 있는 힘을 다해 재희의 와이셔츠를 쥐는 일.

그리고 아이의 울음소리보다 더욱더 나약하지만, 분명히 재희를 부르는 그 목소리.

그 두 가지 일을 받고 나서야 재희는 살며시 미소 지었다. 차갑게 식은 정현의 몸에 따스한 제 온기를 불어넣었다. 입술로, 호흡으로, 촉감으로.

 아주 섬세하게, 고요히.

“잘했어….”

“…ㅎ…ㅣ….”

“이제, 괜찮아.”

여전히 퍼붓는 빗속에서.

정현은 재희의 그 목소리를 끝으로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

결국, 재희의 예언은 현실이 되어 이번 과제도 스케치만으로 끝이 나 버렸다.

중환자실에서 눈을 뜬 정현이 가장 먼저 느낀 현실의 감각은 고통이었다. 기도로 삽입된 인공호흡기 때문에 입부터 목구멍 안쪽까지가 전부 아팠다. 그 뒤를 이어 주삿바늘로 엉망이 된 몸이 욱신거렸다. 몸속과 바깥에서 열렬히 작동하는 기계 소리가 정현을 현실 세계로 이끌었다. 주인의 의사와는 별개로 살겠다고 몸부림치는 장기들이 가여울 정도였다.

정현은 힘없이 눈을 몇 번 뜨고 감았다가 다시 잠이 들었다. 열일곱, 사춘기의 어린 치기는 진한 탈력감과 허무감만을 안겨 주고 끝났다. 정현은 꽤 오랜 시간 그 속에서 허우적거려야 했다.

중환자실에 있는 동안 두어 시간을 제외하고 정현은 늘 잠들어 있었다. 의식이 들면 목구멍을 틀어막는 이물감에 미쳐 버릴 것 같아 괴로웠다. 하지만 그 지루하고 고통스러운 시간이 오히려 정현에게는 다행인 점도 있었다.

재희를 마주하지 않을 수 있었으니까.

셋 있는 가족에서 혼자만 멀쩡한 아빠가 미안한 듯 내려다보았지만, 정현은 괜찮다는 뜻으로 눈을 깜박였다. 연주에게 가 보란 소리였다. 아이는 제 엄마의 신변에 어떠한 일이 생겼다는 것을 짐작했다. 아마도 다른 병실에 입원해 있겠지.

건강하게 지내는 효도야 평생 무리라 해도 이 정도는 제 마음만 다스리면 가능한 일이었다. 어차피 중환자실에서는 보호자가 크게 할 수 있는 일도 없으니. 그래서 이번에도 정현의 곁을 지키는 것은 재희의 몫이 되었다.

학교 행사로 한창 바쁠 때도 재희는 면회를 잊지 않았지만 도착하면 늘 정현은 잠들어 있었다. 정현으로선 다행이었다. 피해 다닐 수만 있다면 피하고만 싶었지만 그렇다고 늘 중환자실에만 있을 순 없었고 있어서도 안 됐다.

자가 호흡이 안정되고 산소 포화도가 맞추어지자 정현은 일반 병실로 내려가게 되었다. 물론 그날 저녁에도 재희는 병문안을 왔다. 자는 시늉을 하면 좋았겠지만 마침 밥을 깨작거리고 있던 정현은 밥상을 내팽개치면서까지 연기할 자신은 없었다.

큰 눈을 굴리는 정현 앞에서 재희는 늘 그랬듯, 예전처럼 침대 곁에 앉아 차분히 공부를 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노트에 가지런히 적히는 알쏭달쏭 수학기호를 보는 것만으로도 정현은 머리가 아팠다. 조금은 마음이 상할 정도였다. 1인실도 아닌 왁자지껄한 6인실에서 공부에 집중한 재희의 곱슬곱슬한 머리통을 쳐다보다가 그렇게 정현은 잠이 들곤 했다.

***

그렇게 사나흘이 흘렀을까.

퇴원하는 날. 여름이 언제였고, 제가 언제 비를 퍼부었냐는 듯 하늘은 깊고 푸른 얼굴로 시치미를 떼고 있었다.

집에 들어서기 전 잠시 걸음을 멈춘 정현은 조금은 허탈한 표정으로 그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재희가 전날 챙겨다 둔 옷가지가 아니었다면, 입원했던 동안 바뀌어 버린 계절을 버틸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문병을 오던 재희 역시도 춘추복 재킷을 입고 있었지.

재희는 학교에 가야 했기에 아빠인 승환이 시간을 내겠다고 했지만 정현이 그것을 거절했다. 피곤하니까 쉬고 싶다는 말로. 거짓말은 아니었다. 기다리고 있던 이모님의 환대를 받으며 방으로 올라간 정현은 바로 침대에 쓰러지듯 누웠다.

삶이 지루하지 않게 가끔 한두 번 돌발 행동을 하곤 했던 정현이었지만, 이번에는 차원이 다른 사고를 쳤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정현을 혼내지 않았다. 재희가 어떻게 말을 전했는지 알 수가 없는 정현은 초조하기만 했다.

재희가 신경 쓰였다. 퇴원한 지금은 6인실에 입원해 있을 때와는 사정이 다르다. 문이 닫히면 단둘이 있게 된다. 어떤 걸 물어 와도, 조롱한다 해도, 추궁해 와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최대한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정현은 재희가 무척이나 바쁘기를 바랐지만, 제아무리 학생회라고 해도 시험 전날까지 부려먹지는 않았다.

계단을 오르는 걸음걸이를 듣자마자 정현은 그게 재희인 것을 눈치챘다. 허둥지둥 자는 체를 해 보려고 했지만 이미 늦었다. 계단을 마치 평지처럼 가뿐히 오르내리는 재희는 숨 하나 벅차지 않은 상태로 문을 열었다. 그리고 인사 하나 없이 정현의 앞에 노트를 내려 두었다.

“한 번은 보고 가라.”

내일부터 중간고사였다. 어차피 곧 추석 연휴니 좀 더 입원해 있으라는 권유에도 굳이 정현이 퇴원하겠다고 나선 이유이기도 했다. 다 찍고 조는 한이 있더라도 시험과 출결 일수는 챙겨야 했다. 곧 죽어도 한재희의 후배는 되지 않으리. 그래서 침대에 누워서도 책을 만지작거리곤 있었지만 내용물은 새것이나 다름없었다.

“…내일 시험 뭐야?”

“과학이랑 국어.”

재희의 말에 정현은 제가 펴고 있던 영어 교과서를 얌전히 덮었다.

건네받은 노트의 표지에는 한재희, 라고 또박또박 이름이 적혀 있었다. ‘너는?’ 하고 묻자 재희는 다 외워서 자긴 쓸데가 없다고 답했다. 이제는 질투도 나지 않았다. 가지런한 글씨로 정리된 노트를 들여다본 정현은 뺨 주변을 긁었다.

이미 문이과 신청은 옛날에 끝이 났겠지. 어떻게 되었나 물어볼 용기도 나지 않았다. 작은 한숨과 함께 노트마저도 덮어 버린 정현은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미안해.”

“……?”

“…내가 제멋대로 굴어서.”

갑작스러운 정현의 사과에 재희는 살짝 눈썹을 찌푸렸다.

“괜찮아. 하루 이틀 일이냐.”

마치 당연한 것을 왜 새삼 그러냐는 것과 같은 뉘앙스였다. 아니, 당연할 리 없다. 정현은 이불을 꾹 쥐었다.

당연해서는 안 된다. 정현은 제가 재희에게 응석을 부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게 민망했다. 부모님이야 그렇다 쳐도, 제 삽질을 온전히 지켜본 재희 앞에선 아무래도 체면이 서지 않았다.

재희는 타인이다. 아무리 식구인 척하고 사촌인 척하고 지낸다지만 냉정하게 말해서 친구 아닌가. 제아무리 얹혀사는 신세라지만 무슨 빚을 진 것도 아니고. 내내 자신의 뒤치다꺼리를 하느라 지친 것은 재희일 텐데, 애꿎은 그에게 화풀이를 한 게 부끄러웠다. 자신을 책망하지도 않는 재희를 보고 더욱. 두 달 차이지만 먼저 태어난 제가 너무나 철부지였단 걸 깨달았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재희는 정현을 몇 번이고 살렸다. 정말 목숨을 구해 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단순한 고마움만이 아니었다. 지금 느껴지는 이 감정은.

빗속에서 쓰러지는 저를 안아 주던 재희의 체온이 아직도 선명했다. 죽음의 문턱 그 가까이에서, 차라리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한 게 부끄러울 정도로 정현은 재희에게 매달렸었다. 오로지 재희의 체온만이 자신을 살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일까. 재희와 단 둘이 있는 지금이 유독, 낯설고 이상하게 느껴졌다. 기분이 묘했다.

“재희야.”

“왜.”

“…너 좋아하는 사람 없어?”

약간은 상기된 표정의 정현이 묻는 말에 재희는 대답이 없었다. 황당해하는 표정이 그 대신이었다. 그게 무슨 해괴망측한 소리냐고. 더욱 얼굴을 붉힌 정현은 부리나케 말을 이었다.

“나한테 애들이 물어보더라고.”

“……?”

“간부 수련회에서 네가 그랬다고 애들이 그러던데.”

“아, 그거.”

이제야 질문의 저의를 이해했는지 피식 웃음을 터뜨리는 재희와 달리 정현은 마른침을 삼켰다. 왜 이렇게 긴장하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어깨를 으쓱하는 재희 몰래 정현은 이부자락에 손바닥의 진땀을 훔쳤다.

“새끼들이 자꾸 물어봐서. 고백 받고 그러면 사귄 적 없냐고. 그래서 대강 둘러댄 거야. 내 타입 아니라고.”

“…아.”

“이상한 놈 취급 받더라고. 아무도 좋아해 본 적 없다고 그러면.”

뭐야, 내가 모르는 새에 언제 또 고백을 받은 거야!? 짐작했던 뒷이야기와는 다소 방향은 달랐지만, 재희가 털어 둔 이야기는 안 그래도 커다란 정현의 눈을 더욱 크게 뜨이게 만들었다.

…‘아무도’라는 말에 왜 방점이 찍혀 버린 걸까.

“아무도… 좋아해 본 적이 없다고?”

“응.”

“왜. 적어도 너네 엄마, 아버지라도….”

“없어.”

재희의 대답엔 일말의 망설임도 없었다. 오히려 단호한 편이었다. 마치, 아빠나 엄마라는 이름의 친구 이야기를 하듯이. 고개마저 절레절레 저었다.

“너무 오래됐잖아. 다 까먹었어.”

오래됐다는 말은 사실이었다. 그 사고가 네 살. 그리고 지금이 열일곱. 무려 13년 전 일이다. 10년도 더 지난 지금, 같은 키에 올려다보지 않아도 눈을 마주칠 수 있던 그때의 한재희는 없다. 시간은 흘렀고 기억은 퇴화되기 마련이다.

늘 부모의 품에 있던 정현과, 부모를 잊은 지 오래라는 재희.

애초부터 ‘우리’의 세계는 함께한 적이 없던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정현은 당황하고야 말았다. 적어도 자신만은 재희를 가장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같은 일에 웃고, 울고, 떠들고. 함께 같은 시간을 겪어 왔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공유했던 세계가 격리될 만큼 오랜 시간이 지나 버리긴 했다. 정현은 막연히 그때가 다가왔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서로의 위치나 생활 반경이라고만 짐작했을 뿐, 아예 사고의 틀이 바뀌어 버릴 것이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아니. 공유해 왔다고 생각했던 그 과거의 순간마저 어쩌면….

어쩌면 재희는, 단 한 번도 함께하고 있지 않았던 것은 아닐까.

“…그러면. 재희야.”

“어.”

“넌 나랑 뽀뽀해도, 아무렇지도 않아?”

“그건 좋아.”

“왜?”

“…편해. 기분 좋아져.”

“…….”

“왜, 넌 싫어?”

대답하지 못하는 정현의 얼굴을 살피던 재희가 아, 하고 작게 탄성을 내더니 목소리를 드높였다. 무언가 짐작이라도 간다는 듯이.

“설마, 너 좋아하는 사람 생겼냐? 그래서….”

“아니. 아니.”

아무래도 재희는 정현의 갑작스러운 말이나 행동의 이유를 다르게 파악한 모양이었다. 반사적으로 정현은 좌우로 고개를 돌렸다. 결 좋은 생머리가 이리저리 찰랑거렸다. 뺨을 간질이는 머리카락이, 다급하게 떨리는 속눈썹이 가쁜 호흡에 흩날렸다.

“없어, …좋아하는 사람.”

그리하여 정현은 깨닫고 만다. 지금 자신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

심장의 통증은 서글플 만큼 익숙하다. 호흡이 가빠져 오는 것도. 들숨과 날숨이 서로 다른 길이로 엇갈리는 것도. 산소가 부족해 시야가 노랗게 번지는 것도. 온몸에 스며드는 오한도, 미열도. 물론 참는 게 능사가 아니었지만 자연스레 고통에 대한 역치가 높아진 건 어쩔 수 없었다. 기억도 하지 못하는 그 어린 날부터 고통은 늘 함께해 왔으니까.

하지만, 태어나서 처음 겪어 보는 통증에 정현은 자신도 모르게 가슴을 쥐었다. 마주 보고 있던 재희 역시도 눈썹을 꿈틀거렸다. 괜찮다는 뜻으로 고개를 작게 저은 정현은 다급하게 말을 이었다. 본인도 제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잘 모르는 것처럼.

“있잖아, 재희야.”

“어?”

“…만약에.”

약간 상기된 표정의 정현이 입술을 깨물며 올려다보았다.

“만약에,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생겨서, 너랑… 하기 싫다고 하면 그땐 어떡할래.”

“흠….”

“뽀뽀는 원래, 좋아하는 사람끼리 하는 거잖아.”

뽀뽀가 싫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그나마 제 뽀뽀만은 좋아하고, 위로가 되었다는데. 자신만이 가진 특권을 맘대로 놓을 순 없었다. 하지만 만약, 재희에게 좋아하는 사람이 생긴다면. 지금은 없다지만, 언젠가… 언젠가 그 때가 온다면.

생각만으로도 마음이 너무 아파서 아무렇지 않게 말을 잇기도 버거울 정도였다. 난데없이 자각해 버린 감정은 수습할 길이 없어 이곳저곳, 정현의 작은 몸 구석구석을 헤집고 있었다. 하지만 정현은 커다란 눈을 재희에게서 떼지 않았다. 뭔가 생각에 빠진 듯 재희가 살짝 눈을 감았다 뜨는 동안 정현은 숨을 삼켰다.

“그때가 오면 말해.”

이 눈치 없는 새끼야.

이미. …생긴 것 같단 말야. 그게….

“…생기면. 그 대신….”

이번에도 재희의 대답은 간단하고도 명쾌했다. 그리고 부쩍 다가오는 체온 또한 거침이 없었다. 출렁, 하고 침대에 닿는 무게감에 정현은 저도 모르게 이불 시트를 쥐었다. 다가와 앉는 재희에게선 늘 그랬듯 나무 냄새가 났다.

“한정현.”

“어…?”

“나 이번에 정말 힘들었다. 알지? 완전 개고생했어.”

생색을 내는 말에 할 말이 없어 정현은 시선을 떨궜다. 작게 옷깃을 쥔 채로 입술을 깨물고 있던 정현과는 대조적으로 코앞에 다가온 재희는 여전히 살며시 미소 짓고 있었다. 바깥에서 서글서글한 체를 하던 그런 웃음과는 차원이 달랐다.

지나친 과소평가. 정현의 우려와는 달리, 그 오랜 시간이 아예 헛된 것은 아니었다. 어린 시절부터 본능적으로 제 진심을 숨겨 버릇했던 재희가, 제 앞에서만은 진심이 되어 버린다는 것을. 그게 일종의 어리광이라는 것을.

정작 정현 본인은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도 알 수 없었지만.

“기본 보상만으로는 꽤 부족하거든.”

“…….”

“이자도 꽤 쌓였고.”

“…무슨 적금이냐.”

작게 투정을 부려 보지만 낮게 웃는 웃음소리에 훅, 길게 숨을 내쉰 정현은 호흡을 가다듬었다. 가슴 속에 박힌 기계 소리가 부디 제 온전한 두근거림은 묻어 주길 바라며. 갓 시작된 가슴앓이 앞에 아무렇지 않은 척 시늉하는 말들이 정현이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내게는 이 입맞춤이 더는 고마움도, 보상도, 위로도 아니게 되었지만.

…그래도 그게 너에겐 위로가 된다면.

…그것만은 좋아해 준다면.

“알겠어.”

“…….”

“네가 원하는 대로… 해.”

그 순간만이 열일곱 정현에게 허락된 유일한 선택이었다.

***

고작해야 10초의 마법.

쪼옥, 소리를 내고 떨어진 입술에 깜박이던 재희의 눈에 매달렸던 눈물이 멎어 버린다. 먼저 골랐던 로봇을 정현에게 양보하면서 부루퉁하던 얼굴도 금세 배시시 웃는다. 정혀나. 부르는 목소리에 까르륵거린다. 숨이 가쁜 줄도 모르고 우당탕 뛰다가 혼나는 일이 있어도 입을 맞춘다. 답답하게 코에 노즐을 낀 정현을 먼발치에서 바라만 보고 있던 재희는 허공에 늘 하던 것의 시늉을 한다.

코끝이 시린 계절이 되면 유독 우는 날이 잦았던, 아직 키 차이가 벌어지기 전이라 고개를 살짝 발돋움하는 것만으로도 닿을 수 있었던 그 예전.

너의 입술, 그리고 나의 입술.

‘울지 마’ 였지만, 이제는 ‘울지 않을게…’

오히려 위로를 받고 있던 것은 정현이었을지 모른다. 늘 함께였기에 표현하진 못했지만. 위로할 수 있는 자격을 준 재희가 고마웠고, 이제는 위로받을 수 있어서 또한 감사했다.

그리고 미안했다. 그런 재희를 배신해 버린 것 같아서.

하지만 재희야.

태어난 건 후회할지라도, 이것만은 후회하지 않을 거야.

입술이 닿는 순간까지도 정현은 그랬다.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고작해야 그 혀의 움직임 하나가 모든 것을 뒤흔들어 버리고 말았다.

고작해야 10초, 가 아니었다.

“으음….”

살며시 두 입술 사이를 가른 살덩이는 몹시 따스했다. 정현의 마른 입술을 촉촉이 적시고, 부드럽게 오른쪽 그리고 왼쪽으로 쓸어 주었다. 그래서 정현은 저도 모르게 작은 신음 소리를 냈다. 동시에 약간의 틈을 보인 입술 사이를 비집고 들어온 재희의 혀는 문을 두드리듯 정현의 앞니를 톡톡 건드렸다. 흠칫 몸을 떠는 그 마른 어깨를 쥔 재희가 고개를 좀 더 틀었다. 자연스레 제 목덜미를 잡고 머리카락 속을 파고든 재희의 손에 정현은 반대 방향으로 고개를 틀었다.

더욱 깊숙이, 재희의 혀가 정현의 입 속으로 파고들었다.

“흐읍…!”

숨이 가빠지기가 무섭게, 각도를 바꾸어 틈을 열어 주었다. 숨을 들이마시려 부푸는 가슴에 소리 없이 웃은 재희는 제 손가락에 결 좋게 휘감기는 정현의 검정 머리칼을 살포시 쥐었다 놓았다. 물기가 어린 그 속눈썹 역시 머리칼과 닮아 있어 먹물처럼 짙고, 또 푸르렀다. 더 이상 제 가슴팍이 아닌 재희의 옷깃을 쥔 정현은 빗속에 쓰러졌던 그때처럼 손의 힘을 놓지 않았다.

따스한 키스에 온 몸이 녹아내릴 것처럼 나른해졌다. 자칫 그 손을 놓았다간 저 수천만 리 밑으로 꺼져 내릴 것만 같았다.

“하아, 아… 재희, ….”

살짝 입을 뗀 사이로 이어지는 타액에도 장난스레, 아이스크림을 핥듯 핥아 올린 재희가 다시 아래에서 위로 입을 맞춰 왔다. 가쁜 숨에 의식이 멀어지다가도, 여린 점막을 훑어 내리는 열기에 정현은 다시 재희에게 매달려야 했다.

재희의 혀가 제 입 안이 아니라 머릿속을 헤집는 것처럼 정현은 생각이란 걸 할 수가 없었다. 아니, 그런 생각까지도 모두 앗아 가겠다는 듯이. 거칠지는 않지만 입안의 부드러운 모든 곳에 제 흔적을 남기고 스치는 재희의 온기에 정현은 그 모든 생각을 잊어버렸다.

시작해 버린 슬픈 사랑도. 태어나 버린 모진 운명도. 모두.

지금 이 순간 하나면, 모두 괜찮을 것 같았다.

파리하던 얼굴빛이 온통 붉어지도록. 내도록 이어진 키스의 끄트머리, 눈이 풀린 정현이 잠이 들 때 즈음엔 정현의 두 손은 재희의 옷깃이 아닌 목덜미를 감싸고 있었다. 마주한 두 가슴이 눌리지 않도록 정현의 목덜미부터 허리를 쓸어내린 재희가, 마치 주문처럼 가볍게 버드 키스를 날렸다. 코끝을 간질이는 숨결에도, 정현은 이미 깊게 잠이 들었다.

그래서 대답해 줄 수 없었다.

“됐어.”

“…….”

“이걸로.”

…아니, 전혀.

어느 무엇도 되지 못했다. 오히려 시작되어 버리고 말았다… 고.

***

처음 소위 말하는 ‘보아서는 안 되는 것’을 보았을 때 정현은 그게 징그럽다는 생각을 했다. 동물들의 교미처럼 뒤에서 여자의 금발 머리를 잡은 근육질의 남자가 삽입 행위를 하는 모습이었다. 거칠게 덜렁거리는 여자의 유방이 아파 보여 저도 모르게 가슴을 쥐는 게 전부였다. 물론, 흥분은커녕 구역질이 치밀었다.

이후로도 큰 관심은 생기지 않았다. 간혹 혼자 TV를 볼 때 채널이 잘못 돌아가 목격하게 된다면 모를까. 반 남자애들끼리 수군거리는 소리에도 인상만 찌푸릴 뿐이었다.

한편으로 궁금하기는 했다. 재희도 그런 걸 볼까? 정현과 달리 재희는 반 친구들과 잘 어울려 지내는 편이었고, 귓속말로 무어라 속닥거리다 변태 새끼라고 서로에 대고 낄낄거린 적도 있었다. 저야 관심이 없는 거고, 보통 또래 남자애들은 본다고 들었으니까. 아무래도 보겠거니 넘겨짚었지만 막상 둘이 있을 땐 그런 이야길 꺼내기 어색했다.

궁금하기도 했다. 그런 게 어디가 좋냐고. 하지만 물어볼 수 없었다. 또래라면 당연히 호기심을 가질 것들에 관심이 없는, 혐오감을 가진 제가 비정상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정현은 그냥 입을 닫았다. 억지로 찾아본 적도 있었지만 아무래도 무리였다. 헐벗은 남녀의 모습도, 쾌감에 젖어 우는 신음들도 모두 몸서리만 났다.

…싫었다. 저와는 평생 연관이 없을 일만 같았다.

하지만 그 징그럽기만 했던 영상이 정현의 뇌리엔 아주 깊게 새겨져 있었나 보다.

***

정현은 꿈을 자주 꾸는 편이었다. 자신의 장례식부터, 제가 돌고래가 되거나 하늘을 나는 새가 되는 꿈, 별별 종류의 올 컬러 꿈을 하룻밤 만에 여러 개를 꾸기도 했는데, 그날은 딱 하나에 올 컬러. 게다가 처음 보는 레퍼토리였다.

헐벗은 두 나체가 뒹구는 장면이 눈앞에 펼쳐졌다. 적당한 근육질 남자가 엎드린 채로 거칠게 허리를 놀리고 있었다. 아래 깔린 이의 모습은 미처 보이지 않았지만, 적어도 여자는 아니었다. 남자였다. 하얀 다리를 제 위에 엎드린 남자의 어깨에 걸친 채로 마구잡이로 흐느끼는 신음이 분명 낮았기 때문이었다.

서라운드로 울리는 교성과 성기끼리 마주쳐 질퍽거리는 소리가 맞물려 귓가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정현은 그 장면이 더는 징그럽지 않았다. 왜냐하면….

질펀하게 몸을 흔들고 교성을 지르고 있는 건 다름 아닌 정현 자신이었기 때문에.

그리고 그런 정현의 위에서 성기를 박아 대고 있는 것이, …아까 전 제게 키스를 했던 재희였기에.

한집에서 살더라도 함께 목욕을 한 건 초등학교 저학년 때가 마지막이었다. 크고 나서는 굳이 둘이서 들어가 씻기엔 화장실이 비좁은 데다가 정현이 워낙 다른 사람에게 제 알몸을 보이는 것을 꺼렸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재희의 사정은 달랐다. 워낙 열이 많은 데다가 학교 체육 시간이나 점심시간 농구나 축구를 하고 나서 땀이 나는 게 싫다고 웃통을 훌렁 깐 채로 돌아다녔기 때문이다.

상체는 그렇다 치고 하체도 의도치 않게 목격할 때가 있었다. 한집에 살다 보니 2층 화장실에서 어쩌다 마주칠 때도 있었고, 여름날 시원한 마룻바닥에 대자로 누워 자는 재희가 자연스레 텐트를 치고 있는 것을 의도치 않게 목격하기도 했다. 별다른 감흥은 없었다. 같은 남자들끼리였으니까. 정현은 왜 제 것은 아무런 소식이 없나 입을 비쭉이는 게 다였다.

그렇다고 해도.

아무리 꿈속이라지만 이렇게 재희의 알몸을 본 경우는 없었다. 게다가 꿈속이라 치부하기엔 터무니없이 선명하기만 했다. 고등학생답지 않게 넓은 어깨도, 마른 근육이 자리 잡힌 상체도. 정현과 달리 이미 키가 180이 다 되게 훌쩍 커 버린 재희는 긴 팔과 다리로 상대방을 애무하고 있었다. 그것도 꽤나 거칠게.

팬티 속에서만 기립했던 것을 목격했던 페니스는 예상보다 컸다. 마지막으로 언뜻 브리프 사이로 봤던 건 물론 발기하지 않은 평소 상태였으니까 비교할 만한 게 못 됐었다. 상대방의 다리 사이를 드나들고 있는 재희의 것은 제 엄지와 검지만으로는 잡히지도 않을 것처럼 두텁고 단단해 보였다. 흉하게 힘줄이 선 그대로 상대방의 몸속을 거침없이 꿰뚫고 있었다. 아플 것 같으면서도, 상대방 - 그러니까 꿈속의 정현 – 은 재희가 파고들면 파고드는 대로 몸을 뒤틀며 흐느꼈다.

언뜻 보기엔 고통스러워 보였지만… 아니다. 아니었다.

‘으응, 읏 아. 거기, 으응.’

‘좋아…?’

‘아, 아!! 응, 재희… 야!!’

재희의 이름을 연신 부르며 흐느끼고, 요분질하고 있는 건 다름 아닌 자신이었다. 또 다른 자아를 목격하면서 동시에 정현은 눈앞에서 재희와 섹스하고 있는 ‘꿈속의 정현’이 느끼고 있는 쾌감을 희미하게나마 전달받고 있었다.

하얀 몸 곳곳에 남겨진 키스 마크. 체위를 바꾸자 허리와 엉덩이 사이의 손자국은 더욱 붉게 돋보였다. 앞으로 납작 엎드린 채로 엉덩이를 치켜들고서, 조금이라도 피스톤질이 멈추면 어서 빨리 움직여 달라고 엉덩이를 흔들고 떼를 쓰는, 쾌감에 얼룩진 한정현, 자기 자신을.

‘아응, 응, 좋아…으응, 재희야….’

‘…하아, 너 너무 조여 한정현….’

‘싸 줘, 응, 아! 좋아, 아! 안에… 안에!’

몸을 치열하게 가르고 드는 뜨거운 살덩이. 이미 난잡하게 배와 몸뚱이에 퍼뜨리고 만 체액들. 제 목소리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드높게 울며, 저를 범해 달라고 호소하는 교성. 찌걱거리는 움직임을 더욱 거칠게 허릿짓하며, 교성에 대답하듯 유두와 사정하여 쪼그라든 제 성기를 손으로 문지르는 재희의 손. 연필을 돌리며 사각거리던 재희의 커다란 손이. 농구공을 쥐던 손이 제 마른 몸과 엉덩이를 매만지며 지극한 쾌감에 이르는 것을 보며….

“허억… 헉… 헉.”

‘꿈속의 정현’도, 그리고 ‘정현’도… 사정해 버렸다.

첫 몽정이었다.

***

누가 깰까 숨을 죽이며, 발뒤꿈치를 든 채로 정현은 화장실로 향했다. 세면대 물만 틀까 하다가 아예 옷을 훌훌 벗어 버리고 샤워기를 틀었다. 혹시 들키더라도 이쪽이 좀 더 자연스러울 것 같았다.

비누칠을 하고 속옷을 조물거리며 정현은 어쩌다 제가 이렇게 건강해졌을까 생각했다. 허탈하게 웃던 정현은 문득 샤워기의 물기와는 달리 뜨뜻미지근한 액체가 제 손등을 적시는 것을 깨달았다. 정현은 울고 있었다. 소리도 없이.

징그럽기만 했던 그 성행위가, 처음으로….

“음….”

처음으로, 너무 좋았다. 설렜다. 그게 꿈이 아니라 현실이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싶을 정도로.

재희의 아래에 깔려 두 다리를 벌리고 헉헉대던 제 모습이 그저 부럽기만 했다.

가슴 사이를 가로지른 흉터조차도 없는, 꿈속의 자신은 거리낄 것 없이 재희에게 제 몸을 치대며 사랑해 달라고 표현하고 있었다. 그리고 재희는 자연스럽게 저를 품고, 입을 맞추고, 몸 곳곳에 흔적을 남기며 거침없이 페니스를 삽입하고, 또 배 속 그득히 정액을 뿌려 주었다. 정현은 그 열기에 몸부림치다 못해 저절로 허리를 들썩였다. 제 성기마저 어루만져 주었던 재희의 손끝이, 조금이라도 생각날까 싶어 정현은 최대한 거칠게 제 앞을 비비기 시작했다.

“아….”

거리낌 없이 소리를 내지르고 싶다. 재희야, 하고 부르고 싶다. 너무 좋다고. 더 해 달라고 하고 싶었지만 마른 아랫배에 힘이 들어가는 만큼 입술을 더욱 세게 깨물어야 했다. 신음 소리조차 들리지 않도록, 정현은 샤워기의 레버를 돌려 제 몸을 때리는 물길이 따갑게 느껴지도록 만들었다. 맨살에 와 닿는 모든 감촉이 꿈속의 그것과 같기를 바라며. 제법 단단해진 성기를 부여잡고, 또 그 앞을 벽에 문대며, 정현은 그 위태로운 몸을 바르르 떨었다.

“재… 희…!”

작게 뇌까리는 것만으로도, 성기는 그렇게 두 번째 파정을 해내고야 말았다.

저절로 무릎이 꺾였다. 정현은 그대로 주저앉았다. 덜덜 떨리는 다리 사이에 뜨거운 물을 갖다 대며 무릎을 감싸 안았다. 손바닥에 범벅된 정액은 채 씻겨 내려가지도 않았다. 달아오른 입술을 연신 매만지며 정현은 이제 갓 시작된 비극을 헤아렸다.

어쩌면 그때까지도 얕보았는지도 모른다. 고작해야 첫 키스, 사춘기의 치기, 호기심.

그리고 언젠가는 격리될, 너와 나의 세계.

그 찰나의 응석일 뿐이라고 위로하는 게 열일곱의 최선이었다.

고작해야 찰나, 그 잠깐의 착각. 풋사랑일 것이라고…….

***

재희는 정현이 유리 벽 너머에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곳은 무균실이었다. 세균은 물론 체념 혹은 절망 따위가 틈타지 않도록, 매우 안전하게 보호된 공간.

그 공간 밖은 유약한 정현이 머물기엔 지나치게 위험하고 거칠었다. 아까 제가 업고 뛰었던 그 빗속만큼이나, 아니 그보다 더.

“이럴 줄 알았으면!! 왜 그렇게 수술을…! 우리 현이가…!”

“여보, 제발!”

일반 중환자실에서도 격리된 그 공간 속에서 정현은 홀로 고요했다.

재희는 참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유리창 너머의 정현에게는 들리지 않을 것이다. 이 아비규환 모두가 당사자인 정현이 격리된 채 휘몰아치고 있다는 것에 안도했다. 그래서 차분해질 수 있었다.

만약 이 모든 사실을 알게 된다면, 아마도 착하디착한 정현은 견딜 수 없을 테니까.

진실이 늘 옳은 것만은 아니다. 오히려 잔혹하다. …재희에게도 그랬듯이.

‘재… 히야.’

그 어떤 서운함도, 이름 한 번에 녹아내렸다. 꽁꽁 얼어붙었던 눈도 단번에 녹여 버리는 봄볕처럼. 새파랗게 질린 입술이 내뱉은 제 이름에 재희는 주저하지 않았다.

…다만, 다 녹고 난 뒤 질척거리는 진흙탕은 어쩔 수 없겠지만.

기절해 버린 정현을 업고 그 위에 우산을 받친 재희는 무작정 병원으로 뛰었다. 물론 재희는 단번에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됐다. 앞으로 멨던 배낭은 아마 병원 응급실 입구 어딘가에 내팽개쳐져 있을 것이다. 그래도 달리기가 빨라서 다행이었다. 병원 관계자의 배려로 샤워실을 빌려 씻고 나온 재희에게, 10분만 늦었다간 다시 가슴을 열었어야 할지도 몰랐다며 정말 잘했다고 의료진들은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재희는 평소답지 않게 조금은 경직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내가 살렸다. …너를.

찢어지는 연주의 울부짖음을 한 귀로 흘리며 재희는 유리창 너머의 정현을 눈에 새길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여전히 물기가 가시지 않은 머리칼을 흔들었다. 그리고 두 손바닥을 내려다보며, 빗물에 흠뻑 젖은 몸으로 고꾸라지던 그 연약한 무게감을 기억했다.

너무나 가벼워서 허탈했다. 빗물이 가득 묻어도, 고작해야 이 정도 무게가 네 생명 값이구나 싶어서.

결국 이번엔 연주가 침대에 실렸다. 아들에게 자신과 똑같이 부실한 장기를 물려준 엄마는 아들과 같은 산소마스크를 썼다. 멍하니 있던 재희도 정신을 차리고 그녀의 마른 손을 쥐었다.

아들의 의식불명이 진행되어 가면서 난동을 부리기 전까지 연주는 내도록 재희에게 고맙다는 말뿐이었다. 그녀에겐 재희가 신이나 다름없는 존재였다. 저를 진정시키는 열일곱 살 소년에게 그녀 또한 위로를 받았다. 그래, 신은 별것이 아니다. 기도해도, 기도하지 않아도 늘 이렇게 붙들 수 있는 존재면 된다.

재희는 모자에게, 그러기에 충분한 존재로 거듭나고 있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아시잖아요.”

또 다른 어린 양을 다독이며, 재희는 제가 쥔 마른 팔에 꽂히는 바늘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눈을 잠시 감았다가 떴다. 진정제가 효력을 발휘하는 데는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아들과 멀어지는 엄마의 이동 침대를 물끄러미 보며, 그리고 그 아비까지 그 뒤를 따라 사라질 때까지 재희는 움직이지 않았다.

모두가 사라지고 남은 그 복도에, 재희 또한 홀로 남았다.

***

승환은 평소보다 일찍 귀가했다. 다름 아닌 하나뿐인 아들이 퇴원하는 날이니 어느 누군들 이해하지 못하랴. 가족 중에 저 빼고 둘이 병원 신세를 지고 있는 상황에 멀쩡한 승환마저도 볼이 확 팰 정도로 수척해졌다. 근무를 마치고 연주가 있는 병원에서 머물다 집에는 자정이 되어서 눈만 붙이러 오는 수준의 일상이 벌써 3주째 계속되고 있었다.

이 사태의 원흉이되, 그래도 꿋꿋이 퇴원한 미운 아들을 얼굴이라도 봐야 했다.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는 몰랐다. 그 전날 크게 심통을 낸 녀석이 제멋대로 행동을 했다는 것 정도는 추측할 수 있었다. 재희가 빠르게 응급실로 업어 오는 덕분에 최악의 상황까지는 가지 않았지만 정현답지 않은 위험천만한 행동이었다.

진지하게 심리 치료도 병행할까 고민하고 있었다. 말수가 눈에 띄게 줄은 정현의 상태가 심히 걱정되었다. 겉으로는 어른스럽게 엄마의 안부나 물어 오지만 그래도 아직 열일곱이다. 오늘만은 아들과 오붓한 시간을 지내보겠다고 연주에게도 일러둔 승환이었다.

하지만 아들의 방문을 연 승환은 깜짝 놀랐다.

한낮, 가장 따스할 시간에 퇴원했다던 정현은 이미 푹 잠들어 있었다. 낮잠을 자기엔 조금 늦었고 밤잠이라고 하기엔 터무니없이 이른 수면에 놀란 건 아니었다. 가지런히 정돈된 이불 그 옆으로 보이는 정현의 손등에, 링거가 꽂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의료진이 꽂아 두었을 리는 없다. 정현이 혼자 퇴원해 쉬고 있다고 이모님께도 전해 들었으니까. 그렇다면 이 링거의 출처는 대체 뭐란 말인가. 그가 길게 생각할 겨를도 없이 등 뒤의 방문이 열렸다.

“손대지 마.”

그가 궁금해하던, 제 아들에게 링거를 꽂은 범인의 목소리였다.

“…마세요.”

말끝만 높인다고 해서 그 말투가 바뀌는 것은 아니었다. 씻고 나온 듯 머리의 물기를 모두 털지도 못한 재희가 완연히 경계하는 빛을 띠며 방 안으로 저벅저벅 걸어 들어왔다. 그리고 마치 정현을 보호하듯 승환과 침대 사이를 가로막고 섰다.

“…네 팔에다 직접 해 본 거냐?”

“신경 끄시죠.”

반팔 티를 입고 나온 덕분에 그대로 노출된 재희의 왼쪽 손목부터 팔뚝 곳곳은 이미 시퍼렇게 멍이 들어 있었다. 승환의 짐작대로였다. 실제로 정현에게 바늘을 꽂기 전, 몇 번이고 연습을 한 흔적이었다. 그리고 그 연습은 무위로 돌아가지 않았다. 제 팔에 뭐가 꽂혔는지도 모른 채 깊게 잠든 아들의 얼굴을 바라본 승환은 표정을 굳혔다.

어차피 제가 할 일이었다.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자고 자신에게 되뇌었다. 무사한 걸 봤으면 됐다. 겉으로 보기에도 열도 나지 않고 다만 조금 야윈 정도인 듯 보이는 정현을 다시 한 번 눈에 담으며 승환은 발길을 돌렸다. 아니, 돌리려 했다.

“어찌 됐건 고맙다. 그리고, 그때 말한 건은….”

“전, 이 녀석과 가족이 될 생각 따윈 없어요.”

내뱉는 말의 삼엄함과 달리, 같은 눈높이에서 승환을 바라보는 재희의 얼굴은 오히려 느긋할 정도였다. 제가 어른이라는 자각이 없었다면, 승환은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칠 뻔했다. 다가오지 않음에도 거리낌 없이 내뿜는 그 혐오감의 원인을 알기에, 등 뒤로 감춘 주먹을 연신 쥐는 게 승환이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당신의 아들이 될 생각도 없고.”

대답 없이 문은 닫혔다. 물론 반박이랄 게 없을 만한 화제였다.

부모가 물려준 재산은 온전히 제 이름으로 보관되어 있었다. 그래서 재희는 제 앞날을 자유로이 계획할 수 있었다. 고등학생이 된 순간부터도 제가 모든 생활비를 알아서 하겠다고 나서 봤지만, 나약하고 상냥한 연주가 그것을 서운해하는 바람에 그 통장의 봉인이 깨지는 것은 몇 년 뒤의 일이 되었다.

그리고 어른이 되는 그 날에, 재희는 이곳이 더욱 안전해질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그리고 그게, 제 꿈을 위한 ‘첫 발걸음’이 될 것이라는 사실 또한.

“입양이라니. 말도 안 되지.”

길고, 또 다디단 입맞춤의 끄트머리에 곤히 잠들어 버린 정현이 신기하기도 하고, 또 묘하게 심술이 나기도 했다. 매너 없는 녀석. 하지만 혈색을 갖추게 된 그 도톰한 입술이 보기 좋아 얼굴엔 미소가 지워지지 않았다. 모두가 나가 버린 채 둘만이 남겨진 방. 제가 꽂은 링거를 맞고 푹 잠든 정현의 입에 재희는 작게 제 입술을 비볐다.

“그치, 정현아.”

집안에 병자가 둘이기에 도구는 늘 준비되어 있었다. 그렇다고 아무나 손을 댈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재희는 늘 눈으로 보고 익혔다. 어렸을 때부터 수백, 아니 수천 번은 봤을 것이다. 정현을 돌보고 이 집에 살면서 승환이 아내와 아들에게, 또 병원 간호사가 정현에게 주사를 놓고 링거를 꽂는 것은 셀 수 없이 봐 왔다.

제 손발이 자라고 그 손끝이 섬세해지기를 기다리며, 언젠가의 오늘과 같은 순간이 오기만을 고대해 왔다.

주사에 익숙해진 것처럼 구는 정현이 무엇보다 주삿바늘을 싫어한다는 걸 안다. 어릴 때 모습 그대로 커다란 정현의 눈은 감정을 잘 숨기지 못했다. 곤란할 때면 눈을 꾹 감으며 아예 웃는 시늉을 했지만 재희를 속일 순 없었다.

내도록 고통 받았어도 익숙해질 수 없는 게 정현에게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재희가 할 일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약한 혈관에 푸르게 멍이 드는 것을 내려다보며 재희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간호사에게 말을 걸었다. 어떻게 꽂아야 하는지를 귀동냥하기도 했다. 하지만 듣는 것만으로는 물론 부족했다. 결국 실험 대상은 자신밖에 없었다. 아프지도 않았다. 그저 서툰 제 손재주를 탓할 뿐.

그리고 지금. 귀엽게도 제 입맞춤에 잠이 들어 버린 정현을 확인한 재희는 한걸음에 내려가 승환이 보관해 둔 링거액과 수액 세트를 챙겼다. 막연한 자신감이 깃들었다. 계단을 오르내렸지만 호흡은 단번에 차분해졌다. 링거 병과 수액 줄까지 연결하고, 가장 마지막, 정현의 손목을 바늘로 꽂는 순간에는 숨조차 쉬지 않았다.

작게 가래가 끓는 규칙적인 정현의 호흡 소리가 심장 박동처럼 재희의 귀를 두드릴 뿐이었다.

“걱정 마.”

똑, 똑, 흘러내리는 링거액을 올려다보던 재희가 살며시 정현의 곁에 몸을 드리웠다. 작게 출렁이는 침대에 뒤척이던 정현은 부자유한 팔에 조금 인상을 찌푸리기도 했지만, 이내 제 머리칼을 쓸어내리는 재희의 손길에 표정을 풀면서 다시 깊게 호흡을 내쉬고 들이마셨다. 멍투성이인 왼손이 꿈결에나마 보일세라 수건으로 덮은 재희는, 잠이 든 정현의 귓가에 마치 자장가를 부르듯 낮게 속삭였다. 입을 맞추던 그 순간처럼.

“넌 안전하니까.”

…네가 내 곁에 있는 한.

***

시간은 소름끼치도록 빨라 허무할 지경이었지만, 그 와중에도 변치 않아 안심이 되는 것은 있다.

스물아홉이 된 지금까지.

해가 길어져도 짧아져도, 늘 새벽 다섯 시에서 여섯 시 사이에 재희는 눈을 뜬다. 출근하던 아빠와 엄마 탓이다. 병원의 아침도 마찬가지다. 어릴 때부터 박힌 취침 사이클이 지금의 저를 도울 줄이야. 하루에 기껏해야 다섯 시간 정도를 자는 재희는 별 무리 없이 이른 새벽을 맞이했다.

다만 오늘은 출근하는 날이 아니었다. 그래서 일부러 눈을 다시 감아 보지만, 한번 수면에서 벗어난 의식은 쉽게 다시 잠들려 하지 않았다. 정현이 말하는 것처럼 노인네여서가 아니었다. 단 한 순간도, 마음을 두고 푹 잔 적이 없다. 아마 이 집에 사는 동안은 평생 그럴 것이다.

하지만 벗어나거나 고칠 생각은 없었다. 이 직업을 택한 이상 축복 받은 수면 사이클을 재희는 십분 활용하고 있었다. 작년, 중환자실에 정전 사고가 일어났을 때가 그랬다. 당직실에서 졸고 있던 모든 인턴과 레지던트들이 30초도 안 되어 뛰어 들어왔지만, 아예 잠조차 들지 않았던 재희가 제가 맡고 있던 환자를 제외한 나머지 – 인공호흡기를 끼고 있던 환자들 – 의 베드 넘버를 불러 주지 않았다면. 비상 전력이 들어오기 전까지 사태가 어떻게 되었을지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그 공은 모두에게로 돌아갔지만, 특히 재희를 치하하는 것은 당연했다. 어떻게 잠을 그렇게 안 자냐며 놀라는 것을 떠나서, 재희와 함께 병동 생활을 한 모두는 그를 괴물 같은 놈이라고도 불렀다. 그 칭찬 같은 욕이 재희는 무척 흡족스러웠다.

오히려 재희는 자신이 인간다워지는 것을 가장 두려워했다. 어찌 보면 최근의 정현에게도 그런 태도가 문제였는지도 모른다. 인간답다는 것은 늘 허술하고, 실수를 유발하고는 하니까.

세월은 빠르고, 또 허무하지만 무시할 수는 없는 존재이기에. 정현은 재희의 거짓말을 유독 잘 알아챘다. 물론 서로가 서로에게 해당하는 일이었다. 얼마 전 불거진 다툼도 다 그러한 맥락이었다. 재희도 정현도, 각자가 가진 초조함을 감출 수 없었다.

그래서 결국, ‘한정현의 뜻대로’의 일이 성사되기로 한 날이 밝고야 만 것이다.

***

다시 잠들기를 포기한 재희는 1층 화장실로 내려왔다. 2층 화장실을 쓰다간 잠든 정현을 쓸데없이 깨울지도 모르기에.

한적하다 못해 스산한 집안 공기는 슬리퍼를 신은 재희의 발에마저 한기를 전해 주었다. 집 전체의 보일러 온도를 올린 재희가 온수를 틀었다. 낡은 보일러는 요란스런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훌훌 옷을 벗은 재희가 거울 앞에 섰다. 확실히 살이 조금 빠졌다. 3년 차가 되어 조금 한가해졌다지만 그것도 과 나름이다. 심혈관 센터는 인원이 부족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몰아치는 외래 환자를 케어하려면 시와 때를 가리지 않고 스탠바이 상태여야 했다.

하지만 오늘만은 그럴 일이 없기를. 센터의 모두는 재희가 소개팅에서 건승하기를 진심으로 응원해 주었다. 오늘 하루는 호출기 꺼 두고, 소개팅을 하다가 뛰어오는 레퍼토리는 식상하니 그만두라는 악담은 덤이었다.

성가신 듯 머리를 이리저리 흔든 재희는 샤워기를 들었다. 따스하진 않지만 미지근한 물이 흘러내려 몸 구석구석을 적시기 시작했다. 욕조에 걸터앉은 재희는 제 다리 사이에 불뚝 솟아 있는 그것을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하아….”

벌써 보름 전의 일이 되었다.

오랜만에 정현과 크게 다투었다. 홧김에 한 키스가 깊어진 끝에 재희는 온전히 발기하고 말았다. 마른 종잇장 같은 몸을 파고들어 아랫배를 문대니, 묘하게 반응이 오는 게 오히려 흥분을 돋웠다. 아침 발기조차 제대로 된 적이 드문 정현이 제 어깨를 밀어내면서도 아래를 세우고 신음을 흘리는 모습에 자칫하면 이성이 마비될 뻔했다.

늘 침착해야 했는데, 실수였다. 어리석었다.

그 고간 사이에 허릿짓을 했던 그날을 기억해 내자, 자위를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어 성기는 쿠퍼액을 내뱉기 시작했다. 바쁜 일상에 자위마저도 미뤄두었던 탓에 성기는 유독 커다랗고 단단하게 발기해 재희의 큰 손아귀로도 버거울 정도였다.

질척이는 소리와 더불어 미끈한 쿠퍼액이 연신 씻겨 내려갈 정도로 벽에 비벼 보지만, 배에 착 달라붙은 성기는 아무래도 사정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유독 점프와 달리기에 능한 건 다 허벅지 힘이라며 모두가 부러워한 재희의 대퇴근 부위가 도드라지기 시작했다. 위로 쳐 올리는 허릿짓에도, 벽에 그 선단을 갖다 대는 행위도 소용없었다.

“하아…. 씨발….”

결국, 상상하지 않으면 싸 버릴 수 없는 건가.

재희는 눈을 감았다. 소파 위에서 나뒹굴며 제 아래에서 헐떡이던 나약한 가슴의 진동을 떠올렸다. 아랫배를 맞부딪치며, 옷자락 너머로 서로 발기된 것을 느꼈을 때 찌르르 울리던 정현의 마른 허리를. 저를 밀어내는 듯 또 쥐며, 흐느끼던 신음을.

…불러 주던 그 이름을.

“읏…!”

펄펄 끓을 정도로 뜨거운 물이 펑펑 쏟아져 나온 뒤에야 재희는 파정해 냈다. 진하고 탁한 정액은 이리저리 튀다 못해 제 턱 언저리까지 묻어 있었다. 감흥 없는 얼굴로 제 정액을 닦아 낸 재희는 눈을 감았다. 한 번 사정하고 나서도 좀처럼 열기가 식지 않았다. 곤란했다.

날렵하게 근육이 곤두선 몸을 욕조 속에 묻는다. 다리 사이의 성기는 여전히 화가 잔뜩 나 있었다. 왜 하필 오늘일까. 신경질이 났다.

그 모든 원흉의 이름을 나지막이 부른다. 여전히, 열에 들뜬 채로.

***

“한정현.”

“…….”

“한정현, 빨리. 이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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