녀석이 나를 부른다.
벌써 두 번째다. 어설프게 이어폰을 꼈어도 목소리는 다 들렸다. 고작해야 둘인 집에서 들리지 않을 리 없지. 소파에 무릎을 모으고 앉아 있던 난 리모컨을 붙들고 TV 볼륨을 올려 보지만, 그래 봤자 방문 하나 너머로 들어오는 목소리를 막을 순 없었다. 무시한 건 나면서도, 또 괜히 초조해졌다. 어쩌지.
하지만 난 답을 알고 있었다. 뭘, 새삼. 평생 그랬잖아.
“한정현!!!”
네가 부르는데, 내가 무시할 수 있을 리 없지….
***
고작해야 이름을 불리는 것만으로도 불가항력이다. 이건 좀 많이 억울하다니까. 하지만 이유 없이 내가 뻗대려고 했던 건 아니다. 음, 그러니까 이건 뭐랄까. …매너? 배려 같은 거였는데. 왜냐면 오늘은 날이 날이었으니까. 그러니까….
오늘이 녀석의 맞선 겸 소개팅 날이다.
“나이가 몇인데 너는.”
“뭘 새삼스레.”
“잘못 키웠어….”
슬리퍼를 직직 끌고 가 방문을 연 내게 녀석이 당연한 듯 넥타이를 건넸다. 녀석이 날 애타게 부른 이유였다. 내일모레 서른인 녀석이 아직까지도 넥타이를 맬 줄 모른다고 하면 어느 누가 믿을까. 난 녀석의 목에 걸려 있던 버건디 바탕에 코발트블루 패턴이 들어간 넥타이를 휙 감았다.
이 역사는 유래가 깊어서, 무려 학창 시절부터다.
남자 교복에 넥타이는 필수다. 보통은 귀찮으니까 아예 넥타이 모양으로 고정된 채 핀만 꽂으면 되게끔 교복 회사에서 만들어 나오곤 했다. 허나 유구한 역사를 지닌 모교는 고지식함이 남달랐다. 무조건 학생이 직접 넥타이를 매게끔 끈으로만 판매가 됐다. 무늬도 따로 들어가 있어서 다른 학교 걸 빌려 쓸 수도 없었다.
아마도 사회에 나가서 타이를 못 매는 졸업생은 없게끔 하려는 목적이었겠지 싶지만… 그것에 실패한 녀석이 바로 내 눈앞에 있다. 나는 푹, 한숨을 쉬며 앞머리를 후 날렸다. 하필이면 키도 내가 작아서, 딱 넥타이를 매 주기 좋은 높이라 자존심이 상했다. 그에 비하면 녀석은….
‘어, 풀어졌다. 한정현 빨리.’
…하고 지 넥타이를 나에게 던지곤 했다. 한번 매 주면 그걸로 일주일은 그대로 끈 조절을 하면서 버티곤 했었는데, 그러다 다 풀어지면 나에게 매번 해 달라며 떼를 썼다.
싫다고 해 봤자 내 손해였다. 어차피 등하교를 함께하느라 버리고 갈 수가 없었으니까. 그나마 장점이라면, 덕분에 난 눈을 감고도 무척 빠르게 넥타이를 ‘아주 예쁘게’ 맬 수 있게 되었다는 것.
정말 쓸데없군.
“예쁘게 잘 묶어 봐.”
그리고 그때도 지금도, 잔뜩 성질이 난 내 앞에서 녀석은 뭐가 그리 재밌는지 히죽거리며 내가 매 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정말, 정말 잘못 키웠어…. 후회해 봐야 너무 늦었다.
물론 가르쳐도 봤다. 하지만 정말 정말… 나랑 똑같이 붙어 있는 다섯 손가락으로 어쩜 이렇게 자유분방하게 움직이는지, 내가 차라리 해 주는 게 편했다. 괜히 넥타이만 구긴다니까. 지금 이 타이도 이리저리 구김이 가 있다. 새끼, 이거 비싼 건데….
“하여간 손재주는 알아줘야 해.”
“어쩌라고.”
“너 봉합은 어떻게 하냐? 나중에 가면 다 풀려 있는 거 아냐?”
“그거랑 이거가 같냐.”
말은 이렇게 하지만 나도 알고 있다. 이렇게 헐렁한 한재희와 메스를 쥘 때 의사 한재희는 아예 다른 인간이라는 걸.
한재희는 의외로 노력파다. 물론 노력으로 모두가 극복되는 건 아니기에 한계는 있다. 미술이 특히 그랬다. 단순히 그림 그리는 문제만이 아니었다. 저 나이 먹도록 - 게다가 메스도 잡는 놈이 – 사과도 못 깎고 넥타이도 못 맨다는 걸 누가 믿을까. 옆에서 가르쳐 봐도, 어쩌면 일반인하고 눈이 좀 다르게 붙어 있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녀석은 손재주라곤 타고나지 못했다.
사실은 녀석이 흉부 아닌 돈 잘 버는 성형외과를 누가 시켜 준다고 해도 못 갈 것 같은 게, 녀석은 미적 감각이란 게 없다. 세상이 그나마 공평하다는 증거일까.
그리고 그 결점은 의사가 되어서도 녀석을 괴롭혔다. 외과 의사이기에 수술을 피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손재주 없는 녀석이 타이3)를 연습한답시고 몇 달 동안 실과 가위를 손에서 놓지 않는 것을 보며 나는 솔직히 감탄했다. 봉합은 말할 것도 없었다. 굳은살은 있었지만 비교적 매끄럽던 녀석의 손이 상처투성이가 된 것도 그즈음부터였다. 손끝이 아물 날이 없을 정도로 맹연습한 결과, 재희는 꽤나 준수한 실력을 갖게 됐다고 했다.
오죽하면 인턴 술기 경연대회라고, 상금을 놓고 인턴끼리 외과술 경쟁을 벌였을 때 녀석이 타이 부분에서 우승했다고 하니. 아마도 나처럼 녀석의 원래 손재주를 아는 사람이라면 감탄하기보단 지독하다고 혀를 내두를 것이다.
여하튼. 저주받은 녀석의 센스는 패션에도 영락없이 작용해, 지금 이렇게 차려입은 정장 또한 내가 골라 준 거였다. 애초에 오프를 얻은 이유가 지인의 결혼식 때문이었다는 녀석은 결혼식 정장으로 소개팅까지 한 번에 해치우겠다며 검은 정장을 꺼내 들었다.
소개팅에 검은 정장이라니, 해도 해도 정도가 있지.
쌍욕을 내뱉으며 한재희의 바짓가랑이를 붙든 나는 예전 생일에 내가 선물했던 네이비 정장을 권했다. 물론 말은 권한 거지만 실제로 강요나 다름없었다. 사진 찍을 때 튄다며 질색을 하는 녀석의 입을 닥치게 한 나는 양말부터 셔츠, 넥타이에 코트까지 전부를 골라 주고 나서야 직성이 풀렸다. 자꾸 해 줘 버릇해서인가, 싶지만. 이미 너무 멀리 왔다.
생각해 보면 나도 참 멍청하다. 속도 좋지. 누구 좋으라고….
“너 살 빠졌나 보다.”
“모르겠는데.”
“바지 헐렁해.”
그나마 머리도 적당한 곱슬머리라 망정이지. 녀석의 곰발로도 왁스를 대강 몇 번 쥐고 나면 그럴싸하게 모양이 잡혀서 그것까진 내가 손보지 않아도 괜찮았다. 셔츠를 집어넣은 모양부터 옷깃까지 꼼꼼하게 확인한 나는 얌전히 녀석의 앞에 섰다.
그러니까 우리는 대략… 15cm 정도가 차이가 난다. 내가 녀석의 앞에 서면 내 눈앞에 녀석이 입술이 있는 정도다.
그러니까… 왜 하필 입술이야. 조금만 더 클걸. 엄마 말 듣고 우유 조금만 더 먹을걸.
“왜, 잘생겼냐?”
“오늘은 잘생겨야지.”
“늘 잘생겼거든.”
“씨발놈.”
욕이 절로 나왔다. 사실, 욕밖에 할 수 없었다. …맞는 말이니까.
내가 얼마나 심혈을 기울여서 옷을 골랐는데. 아무리 짜증 나도 한재희가 결혼식이든 소개팅이든 나가서 누군가에게 구리다는 평을 듣는다니 참을 수 없는 일이다. 내 자존심이 걸린 문제였다.
하지만 막상 이렇게 보자니 좀 살살 할걸… 하는 생각도 들었다. 너무 심하게 잘생겼잖아.
복잡한 기분이었다. 내가 골라 준 코트의 먼지를 툭툭 털고 팔에 걸친 채 집을 나서는 녀석의 뒤에다 대고, 괜히 말을 건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야!”
녀석이 날 물끄러미 봤다. 그러니까. 할 말은 없는데…. 뭔가 그냥 보내기 싫었다.
“잘하고 와.”
“잘하는 게 뭔데?”
정곡을 찔렸다. 아주 아프게.
“응?”
한재희가 내뱉는 말에 순간 할 말이 없어진 난 그냥 꿀 먹은 벙어리가 되고 말았다. 현관 아래로 내려선 녀석의 눈이 나랑 같은 높이에서 정확히 마주쳤다. 또, 또 저런다. 빤히 사람 보는 저 버릇. 잘못한 것도 없는데, 결국 먼저 시선을 피하는 건 나다.
“…아니다.”
피식, 웃고는 돌아서는 녀석에게 비루하게 뱉은 말은 고작 이거 하나.
***
녀석의 뒷모습이 멀어지고 난 뒤에야 나도 모르게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았다.
아… 잘생기긴 잘생겼단 말이야. 재수 없는 새끼가.
늘 보던 두 가지 패턴. 목 늘어난 티셔츠나 의사 가운이 아닌 정장을 입고 있는 녀석의 뻔지르르한 모습을 보니까 새삼 심장이 튀어나올 것처럼 두근거렸다. 키도 훤칠하고. 늘 부스스한 곱슬머리가 아니라 적당히 웨이브 진 머리칼에, 샤프한 눈매로 씨익 웃으면서 응? 하고 묻는데…. 순간 기억해 버리고 말았다.
맞다, 내가 얘 잘생겨서 좋아했었지.
30년 가까이를 같이 살았는데도, 왜 적응이 안 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여전히 쌀쌀한 날씨지만 볕만은 완연한 봄이었다. 내가 골라 주고 입힌 옷이 번쩍거리며 녀석의 머리칼을 더욱 다갈색으로 빛나게 했다. 왈칵 짜증이 났다. 짜증 나. 아 졸라 짜증 나. 씨발. 한탄할 것은 날씨뿐이었다. 아, 씨발. 왜 하필 오늘은 햇볕이 이렇게 좋은 거야.
참, 데이트하기 좋은 날이겠구나.
그리고 나는 삽질하기 딱 좋겠구나.
***
어떻게 얼굴을 보지 싶었던 날들은 유야무야 넘어갔다. 어차피 녀석은 매주 내 피 검사를 시행해야 했고, 내가 아무리 피한다고 해도 도망칠 곳이야 내 방이 전부였다. 울며 별 지랄을 다 떤 나와 달리 아무 생각도 고민도 없어 보이는 한재희는 지극히도 멀쩡했다. 나 혼자만 별 유난을 떨다 원래 궤도대로 돌아온 셈이었다.
생각해 보면 늘 이런 패턴이었다. 고등학교 때, 처음 녀석과의 뽀뽀가 키스로 발전해 버린 날에도 그랬다.
사실 그때 나는 차인 것이나 다름없었다.
사춘기였던 난 나와 한재희의 관계가 뭔가 요상하다는 걸 눈치챘고, 녀석에게 대놓고 물어봤었다. ‘좋아하는 사람이 있냐’고.
그리고 녀석은 명쾌하게 대답했다. ‘좋아하는 사람이 없다’고.
그 대답에 희비가 교차한 나는 덩달아 똑같은 척, 그런 척, 센 척해 보려 시도는 했지만 실패. 녀석이 ‘그럼 넌 좋아하는 사람이 있냐’며 되물어 온 그 순간 깨닫고 말았다. 이미 녀석을 좋아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 결과 첫 몽정까지 해 버렸는데, 뭘 더 자존심을 세울 게 있겠는가.
그 이후로 한재희는 내 꿈에 다른 패턴으로 방문하기 시작했다.
예전엔 장례식뿐이었다면, 그 뒤엔 30퍼센트 정도의 확률로 헐벗고 나왔다. 나는 내 무의식의 음란함에 대강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가운데 다리마저도 들어 버린 것 같았다. 잘 들리지도 않는 건데 용하기도 하지.
그 열일곱 이후로 나는 완전히 새 삶을 개척한 것이다. 19세 관람 불가적인 삶을.
징그럽다며 멀리했던 동영상들은 매끄럽게 우회전. 방향을 선회해 즐기게 되었다. 처음이 그랬듯 난 자연스럽게 내가 녀석의 아래에 깔리는 걸 상상했고, 많은 소스들을 섭렵하며 나는 다양한 망상을 전개할 수 있었다. 서양 동양 할 것 없이 게이 야동을 즐기며 나는 소식 없는 내 아랫도리를 한탄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대리 만족을 하며 한창 때인 20대를 견뎠던 것 같다.
모든 게 무위로 돌아간 건 아닌 게, 꿈속의 패턴이 더욱 윤택하고 아름다워지긴 했으니까.
내 짝사랑은 그 정도의 천박함이었고, 청승이었다. 적당히 음란한 게 그나마 무게감을 줄여 주었다. 그냥 남자들 누구나 자신의 자위 상대로 누군가를 설정하듯, 나도 그 정도의 관심이겠거니. 하면서 내 감정을 가볍게 만들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정말 키스로 발기할 줄은 몰랐지만. 그것도 스물아홉 먹고.
난 사실 두려웠다.
분명, 함께 키스한 그날 한재희도 섰고 나도 섰다. 녀석이 선 거야… 워낙 건강한 데다 아침마다 매번 벌떡 서는 걸 알고 있으니까 그러려니 하지만. 내가 잘 서지 못하는 건 녀석도 대략 알고 있었다.
변태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그냥 자연스럽다고 여겼을까. 아무리 눈치를 살펴도 녀석은 무슨 일이 있느냐는 듯 굴어서 나는 도무지 녀석의 심리를 파악할 수가 없었다. 아니, 섰던 거 자체가 꿈이었나? 키스도 꿈이었나?
하지만 녀석은 소개팅에 나갔고, 나는 이렇게 혼자 청승을 떨고 있는 걸 보니 꿈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잘했어, 한정현.”
한재희는 꿈에도 모를 거다.
그 거친 키스 뒤에, 내가 얼마나 기쁘고 괴로웠는지. 몇 번이고 내 입술을 나 혼자서 핥아 보고 매만져 보고 잡아 뜯었는지. 내 가랑이 사이로 들어왔던 네 감촉이 믿어지지가 않아서 심지어 베개도 다리 사이에 껴 보았던 내 궁상을 퍽이나 알까.
그 이후 매일같이 꾸는 꿈이, 네가 나오는 꿈이 장례식이 아님을. 내가 지한테 당하는 꿈으로 내가 몽정 따위를 하는 것은. 아니, 몽정도 못 하고 어설프게 서는 게 다라는 것을 만약에 안다면….
“잘… 한 거야.”
…징그럽겠지. 상종하기도 싫겠지.
***
결국 나는 꼭 불이라도 난 것처럼 후다닥 집을 뛰쳐나와야 했다.
어쩔 수 없었다. 한재희가 그렇게 나가 버린 뒤 나의 망상은 꼬리에 꼬리를 물어 주체할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얼굴 모를 여자와 팔짱을 낀 한재희부터, 멋들어진 턱시도를 차려 입은 한재희. 심지어 한재희의 애까지 떠오를 지경에 이르렀으니 말 다했다.
내가 주저 없이 사랑하고, 또 사랑했다고 고백할 수 있는 - 25년 전, 네 살짜리 – 한재희를 똑 닮은 그 아이가 나더러 삼촌이라 부르는 모습까지 상상하고 나니, 아무리 무기력한 잉여 인간이라도 벌떡 자리를 박차고 일어설 수밖에 없었다.
도저히 안 되겠어. 그래도 쓸모 있는 쓰레기가 되어야겠다고 다짐했다.
외출하는 것도 거의 3주 만이다. 그사이 계절은 분명 흐르고 있었다. 그 무거운 지구가 열심히 돌고 있다고 증명이라도 해 보이듯이. 마스크 너머의 바람이 그저 날카롭고 따갑지만은 않았다. 날씨는 정말 좋았다. 마스크에 패딩까지 완전 무장을 하고 나간 게 조금 민망할 정도로 볕은 따사로웠다.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우연히 닿은 발걸음이 멈춰 버린 그 곳. 시선 끄트머리에 닿은 간판을 무심코 나는 소리 내어 읽어 버렸다.
“성인 취미….”
굳게 닫혀 있던 문을 열어 버렸던 게 문제다. 한재희에 대한 마음도, 실제로 열어 버린 그 창고 취급 받는 방의 문도. 문틈 사이에 봄이라도 깃들어 버린 것처럼 묘하게 손끝이 간질거렸다.
충동에 못 이긴 내 걸음은 힘차게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
건물 한 층을 빌린 학원의 실내는 꽤 컸다. 낮의 햇볕을 가득 받은 실내는 가뜩이나 밝은 편이었는데 실내조명까지 번쩍거려 나는 눈을 연신 깜빡여야 했다. 때마침 주말인지라 수강생들은 대부분이 학생이었다. 화폭을 메우는 사각사각 소리가 실내를 채우고 있었다. 난 눈을 감고 숨을 크게 들이마셔 보았다.
물감 냄새….
오랜만이다. 나는 괜히 신이 났다. 봄 뽕을 맞은 게 분명했다.
“성인 취미반은 낮에 있어요. 월수금이나 화목토 중에 선택 가능하시고요.”
“아, 네….”
“주로 주부님들이 오시기는 한데, 다들 좋아하시겠다. 이렇게 예쁜 학생이 오면.”
“네….”
안경을 쓴 인자한 얼굴의 아주머니가 이 학원의 원장이자 강사인 듯싶었다. 학생들을 주로 가르치고 있는 것은 아르바이트 중인 미대생들인가. 수강생은 적지 않아 보였지만, 대부분이 학생들일 테니 낮 시간은 한가하겠지.
그래서인지 아주머니, 아니. 원장님으로 추정되는 분은 주부님이라는 단어에 미심쩍은 표정을 지은 나에게 한층 더 몸을 가까이 숙였다. 조금 부담스러울 만큼 적극적인 영업이었다.
“어떤 걸 배우고 싶으세요?”
“네? 그냥 소묘나 수채….”
실내 이곳저곳을 두리번거리던 내가 문득 벽에 걸린 그림을 보기 전까지만 해도, 나는 이 대화에 별 관심이 없었다.
“유화, 도 배울 수 있나요…?”
“어머 그럼요. 요새 유화가 인기예요. 자격증도 딸 수 있고.”
“…자격증이요?”
“네! 아동 유화 미술 자격증이요. 요새 주부님들 사이에서 핫하잖아요. 낮 타임에 한 시간씩 강의도 있어요.”
내 목소리의 톤이 달라진 걸 느낀 강사는 눈에 띄게 기뻐하며 입의 모터를 돌리기 시작했다. 방과 후 교사로 한 달에 얼마를 벌 수 있고, 무척이나 쉬우며….
자격증이라. 컴퓨터도 아니고 미술에 자격증이라는 게 있는 줄 처음 알게 된 나는 아줌마의 말을 경청할 수밖에 없었다. 그 자격증만 있으면 나도 스스로 독립해서 먹고 살 수 있을 것처럼 느껴졌다. 게다가 그 어려운 유화가 쉽기까지 하다니.
이것이야말로 쓰레기 탈출의 정도, 바른 길 아닐까! 귀가 얄팍한 난 쉽게 흥분해 버리고 말았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미 카드를 긁고 난 뒤였다. 나는 영수증을 쥔 채로 어영부영 이젤 앞에 앉았다. 힐끔거리는 학생들의 시선에 귀가 뻘겋게 달아올랐다. 이렇게 사람 많은 공간은 아무래도 익숙지가 않았다. 게다가 이젤 앞이라니.
“그래도 배우신 적이 있다고 하니까, 기본 실력만 보여 주시면 돼요.”
“너무 오래됐는데…. 그냥 아무렇게나 그리면 되는 건가요?”
“네~ 편하신 대로 하세요. 정물도 괜찮고요. 물감도 있으니까요.”
“아, 그냥…. 4B연필 하나만 주세요.”
말이 마치기 무섭게 아주머니는 연필 하나를 나에게 건넸다. 별다를 것 없는 연필인데도 나는 그 촉감이 생소해 입이 말랐다. 쉽게 획을 그어 내리지 못했다. 사람들의 시선이 주삿바늘만큼이나 따갑게 느껴져, 나는 살짝 눈을 감아야만 했다.
***
…가장 고통스러운 시간이다.
폐가 부풀어 오르지 못해, 혹은 폐가 눌려 숨이 찰 때. 나약한 심장이 보내 주지 못한 피에 세상이 노랗게 빛날 때만큼이나 힘들다. 새하얀 캔버스를 노려보는 그 짧은 찰나가 내게는 늘 절벽 끄트머리처럼 느껴졌다.
내게는 늘, 그림이 무언가를 완성하는 과정이 아니었다. 이미 새하얗게 완벽한 무언가를 망가뜨리는 과정에 가깝게 느껴졌다.
도화지를 노려보던 난 부들부들 떨리던 손을 애써 들었다. 마치 누군가를 찔러 버린다는 심정으로 선을 내지르기 시작했다. 지우개로 지운다고 해도 돌이킬 수 없다. 그어 버리고 나면 선은 제멋대로 각을 긋고 면적을 만들고 궤적이 되어 무언가 운동이 되었다. 음영을 지어 질감을 아우르고 그림자와 빛을 나누었다. 이미 그때부터 내 의도라는 건 사라져 있었다.
내 잘못된 습관이었다. 화가를 꿈꾸기엔 지독히 이기적인 그림. 나약한 몸에 억눌린 마음이 늘 하소연을 하듯 도화지를 엉망진창으로 물들였으니까. 그림을 마치고 나면 모두의 반응은 뻔했다. 이렇게.
“저기….”
“아….”
“혹시, 전공을 하셨던 거면….”
어깨를 두드리는 손가락에 뒤늦게 정신이 들었다. 난감해하는 시선을 마주한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는지도 몰랐다. 날카롭게 깎이어 있던 연필심은 이미 뭉툭해진 지 오래였다. 오른쪽 새끼손가락의 살덩어리 언저리가 새까맣게 물든 게 그 증거였다.
눈앞의 그림은 정물화라기보다 추상화에 가까웠다. 수험생 모두가 그리는 아그리파의 얼굴 반쪽을 뿔이 나고 늙어서 추해진 노파의 얼굴로 그려 놓았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연필심을 누르다 못해 콩테로 그린 것처럼 번지는 질감 표현을 해 상당히 괴상망측했다. 사방으로 돌려 가면서 스케치를 한 까닭에 눈앞의 그림은 결국 아그리파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변이되어 있었다.
쉽게 말해, …보통 사람들에게는 꽤나 기분 나쁜 그림이었을 것이다.
“아뇨. 저, 죄송합니다.”
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대로 학원을 나섰다. 뒤에서 부르는 소리에 마치 쫓기듯 걸음을 옮겼다. 엘리베이터를 타는 것도 잊고 계단으로 뛰어 내려온 나는 마치 100m 달리기를 한 것처럼 숨을 헐떡거렸다. 다행히 아무도 따라 나오진 않았다.
정신없이 쥐고 나온 4B연필만이 손아귀의 땀에 흥건해져 있었다. 나는 어쩔 줄 몰라 하다가 그 연필을 미술학원의 우편함 속에 넣고 도망쳐 버렸다.
…수강료 카드 결제를 했던 사실을 기억해 낸 건 집에 돌아가고도 한참이 지나서였다.
***
내가 가진 재능이라고는 그림이 전부였다. 대학교도 결국 미술로 갔다.
한재희가 수능 만점으로 집 근처 의대에 합격했던 그해, 나는 아예 수능조차 보지 못했다. 의미가 없다고 판단해서였다. 출결도 겨우 채워 졸업한 내 내신 성적은 눈 뜨고는 못 볼 정도였다. 본과에 들어가기 전 그나마 여유로운 생활을 살았던 한재희가 내게 과외를 해 주겠다며 깝쳤지만, 나는 그 새끼를 선생 취급하느니 차라리 잉여로 살겠다며 내내 백수를 고집했다.
그나마 잘할 줄 아는 게 그림이었다. 백수인 나를 안타까워한 부모님이 권유했는데, 그 수업은 배신하지 않고 돈값을 했다. 백수로 데뷔한 고졸 1년차 시절에 심심해서 참가한 공모전에 입상한 것이다. 그 공모전 수상과 면접 한 번이 대학교 입학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예상치 못한 결과였다.
하지만 꿈같은 일은 꿈처럼 허무하게 끝이 났다. 통학 문제로 나는 학교를 그만두었다. 수도권이라지만 애초에 대중교통을 이용하기 어려웠던 나에게는 3월 한 달 출석마저도 무리였다.
그리고 한재희의 초상화를 완성하지 못하고서 그림마저 아예 관둬 버렸었지.
“…그만두자.”
싱숭생숭한 마음이 도를 지나쳤던 것 같다. 자꾸만 내 그림을 보며 경악하던 사람들의 시선들이 떠올랐다. 뇌리에서 떨쳐내기 위해 문득 고개를 드니, 어느새 노을이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내 캔버스 안에선 그저 음영뿐이었던 그 핏빛이 차츰 세상을 물들이는 광경을 나는 한참동안 지켜보았다. 그 때문인지 집 앞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완전히 녹다운 되어 버렸다. 위로하듯 코끝을 간질이는 바람은 대조적으로 차갑기만 했다.
3월인데도, 이름뿐인 봄은 여전히 멀게만 느껴졌다. 나는 어깨를 잔뜩 움츠렸다.
***
나무로 된 낡은 집은 더위에도 추위에도 약하다. 그보다 더 약한 나는 발을 동동 구를 수밖에 없다.
“진짜 보일러 수리를 해야 하나….”
해가 떨어지자 금세 기온이 뚝 떨어졌다. 나약한 봄은 밤에는 영 위력을 발휘하지 못했고, 큰 일교차는 한겨울보다 더한 오한을 선사했다. 수면 잠옷과 모포를 둘둘 감은 것으로 모자라 나는 거실 등만 켜 놓고 방에 쏙 들어왔다.
그래도 둘이 사는 집. 녀석이 돌아오는 날 같으면 웬만해서 나는 마루에서 기다리는 편이다. 어차피 백수기도 하고, 들어오면 당연한 듯이 녀석은 내 상태를 체크하곤 했으니까. 평소 같았으면 마루에서 TV나 보겠지만 유독 오늘은 그러기 싫었다. 한재희 때문만은 아니었다.
오랜만에 연필을 쥔 탓일까. 나는 내내 손이 근질거려 참을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묵혀 두었던 스케치북을 안고 온수 매트 속으로 쏙 들어갔다. 눈을 감고 낮에 그리던 그림을 슥슥 흉내 내어 그리기 시작했다.
“늦네….”
그림을 그리면 시간 가는 줄을 모르게 된다. 화실에서 그렸던 그림을 되새겨 스케치북에 옮기고 난 뒤 시간을 확인한 나는 깜짝 놀랐다. 이 낙서 같은 스케치가 다 끝나도록 실내는 조용했다. 녀석이 오지 않은 것이다. 열한 시가 넘은 지 오래인데….
“진짜 씨발 놈이라니까….”
왜 이런 것만 말을 잘 듣고 난리야.
기분이 이상했다. 잘하라고 한 건 난데, 막상 정말 잘하다 못해 이렇게 늦은 시각까지 돌아오지 않는 녀석이 원망스러울 수밖에. 어쩐지 스케치북 속의 아그리파가 녀석의 얼굴과 닮아 보여 나는 기분이 확 나빠졌다. 손을 씻을 생각도 않고 나는 바로 방의 불을 끄고 누웠다. 아예 귀마개를 껴 버리고서.
***
물론 꿈자리는 뒤숭숭했다. 잠이 올 리 없었다. 하지만 난 억지로 눈을 감았다. 시계를 확인하는 게 두려웠다. 새벽까지 안 들어오다니. 설마 소개팅 첫날에 모텔까지 간 건 아니겠지. 내 날것의 망상을 더 발휘시키고 싶지 않았다. 차라리 야동을 보며 한재희에게 깔리는 상상을 하는 게 나았지만…. 서글퍼서 도저히 시도조차 되지 않았다.
봄치고는 유독 날이 거칠었다. 거센 바람이 몇 번이고 새벽녘에 창문을 때리고 가는 소리에 나는 더욱 잠을 이루지 못했다. 비는 오면 안 되는데…. 잠꼬대처럼 중얼거리다 잠든 순간까지 집안은 고요했다. 이제 바람은 몰아치다 못해 꼭 짐승의 하울링 소리 같았다.
간만의 외출이 곤했는지, 꿈을 기억도 못 할 정도로 깊게 잠든 것은 오랜만이었다. 늦잠을 자기로 유명한 내가 눈을 뜬 건 덕분에 일곱 시. 깜박이는 핸드폰의 불빛이 여전히 어두운 실내를 밝혔다.
무려 새벽 네 시에 온 메시지였다. 발신인은 서글플 만큼 당연했다.
「일어나면 갈아입을 옷 좀 가져와 줘.」
띄어쓰기까지 또박또박. 똑같은 폰트인데도 정갈하게 눈에 들어오는 한재희의 메시지였다.
***
이게 진짜 보자보자 하니깐.
나는 심히 부들댔다. 부들거리고 있었다. 부들거리며 짐을 챙겼다. 속옷 셔틀 한 지 얼마나 됐다고 또. 게다가 소개팅 다음 날 말이다. 일어나자마자 하루의 시작을 와장창 뭉개 버린 메시지에 나는 한참 동안 침대에서 나오지 못했다.
하지만 결론은 명확했다. 어찌 됐건 한재희는 병원에 있다. 설마 모텔에서 옷이 없다고 날 소환할 리는 없으니까…. 명분상으로도 난 재희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다.
차라리 잘된 일이다. 정말이었다. 한재희를 보면 할 말이 많았다. 물어볼 것도 많았다. 무슨 일로 외박까지 하면서 옷도 없이 연락질인지. 데이트는 어떻게 했냐고. 어떤 여자였냐고. 애프터 신청을 했냐고. 하지만 대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고통스러웠다. 예뻤다고 하면 어쩌지. 정말 잤으면 어쩌지. 어떡하지….
병원까지 그 길지 않은 거리를 걸으면서도 나는 도무지 생각이 정리되지 않아 한참을 머뭇거렸다. 녀석이 갈아입을 옷을 챙긴 쇼핑백이 어깨가 빠질 것처럼 무겁게 느껴졌다. 그냥 냅다 얼굴에 내팽개치고 도망쳐 나올까도 싶었다. 하지만.
‘정신은 차렸나. 살아는 있나 모르겠네. 아마 거의 넋이 나갔을 텐데, 재희.’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진다는 게 딱 그 꼴이지 뭐야.’
‘하필이면 그 앞에서 사고가 나는 게 말이나 되냐.’
‘살렸으면 몰라…. 나도 깜짝 놀랐잖아요…’
애석한 얼굴을 한 사람들의 시답잖은 농담 속에 주인공은 분명 재희였다.
드라마에서도 써먹기 부끄러울 정도로 뻔한 이야기였다. 차라리 호출을 받아서 불려 온 거면 좀 뻔하다고 욕이라도 하지. 소개팅하던 카페가 있던 도심 한복판에서 칼부림 난동이 일어나는 바람에 한재희는 환자를 호송한 응급차를 타고 병원으로 귀환. 흉부외과에 남아 있던 인원들과 함께 수술에 투입됐고 마라톤과 다름없던 필사적인 수술의 결과는, 결국….
“망했지 뭐.”
묻지 않아도 듣지 않아도 결론이 보였다. 소개팅도, 수술도.
피로에 찌든 얼굴로 인사말조차 꺼내지 못한 한재희는 거의 침대에 구겨져 있었다. 열두 시간이 넘게 진행되고 있던 수술실에서 방금 풀려 나왔단다. 새벽에 잠깐 틈이 나서 나에게 문자를 한 것이었다. 옷을 가져다 달라고.
“아, 저… 한정현.”
내가 캐비닛을 엶과 동시에 널브러져 있던 한재희가 벌떡 일어났다. 잔뜩 갈라진 목소리가 꼭 귀를 갉는 캐비닛의 금속 소리와 다름없게 느껴져 나는 인상을 확 찌푸렸다. 저벅저벅 다가온 녀석에게서는 지독한 소독약 냄새가 났다. 가로채려는 한재희의 큰 손을 피해, 나는 찾아낸 쇼핑백의 입구를 열어 버렸다.
“잠깐만…!”
긴 말은 필요 없었다. 냄새가 확 끼쳤다. 내가 소독약보다 더 싫어하는 냄새. 바로….
“워낙 급해서. …손으로 지혈하느라.”
구역질이 날 정도로 진하게 올라오는 피 냄새. 그것도 내 것도, 한재희 것도 아닌 다른 누군가의.
그러니까, 30분 전 흰 천을 덮고 수술실 밖으로 나왔다던 그, 망자의 피 냄새였다.
‘오죽하면 재희 선배 옷이 앞면은 죄다 자주색이 되어 가지고…. 피 칠갑이었죠, 완전.’
나도 머리가 장식은 아닌 이상 추측은 됐다.
현장 앞에서 바로 수습을 돕느라 여자고 뭐고 다 내버리고 구급차에 타고 왔다는 녀석이 무슨 경황이 있었겠으며, 어떻게 옷을 간수할 수 있었겠는가. 내가 예쁘게 공들여 입혔던 옷들은 훼방이 되었으면 되었지, 적어도 도움은 못 됐을 것이다. 한재희는 노력파니까. 소개팅이고 나발이고, 내가 선물해 준 옷이고 뭐고 무조건 사람을 살리는 일에만 몰두했을 것이다.
그리고 나한테 문자 보낸 게 새벽 네 시. 그때야 제 상황을 파악했겠지. 비싼 옷이라 제발 아껴 입으라고 온갖 생색을 냈던 내 말이 생각났을까. 쇼핑백에 똘똘 뭉쳐 넣어도 피 냄새가 꾸역꾸역 올라올 정도로 엉망이 된 옷 앞에서, 어쩌지 싶어 그 와중에 고민하다가 나한테 문자를 보냈겠지.
“…미안하다.”
대견하다고 해야 할까. 넝마가 되어 버린 옷을 내려다본 나는 입술을 깨물 수밖에 없었다. 나약한 심장이 착, 가라앉았다.
“뭐가 미안한데.”
“…….”
“나한테 뭐가 미안해?”
우습지만, 묘하게도 화가 났다.
내가 화가 난 건 사실 옷을 망쳤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 옷이 꽤나 고가여서도 아니었고, 기성복도 아니고 맞춤 정장이어서도 더더욱 아니었다. 비록 내가 못 먹을 떡이라고 해도 멋들어지게 꾸민 네가 단번에 추레해진 것 때문도 아니었다.
바로 녀석의 미안하단 말 때문이었다.
오늘이 어떤 날이었는데.
…내가 어떤 마음가짐으로 널 밖에 내놓았는데.
오전 열 시에 산뜻하게 집을 나섰던, 내 눈에만 그런지 몰라도 몸에 해로울 정도로 반짝이던 녀석이 하루 만에 이 꼬락서니가 되어 버려 놓고. 그 와중에 나한테 네가 하고 싶은 말이 ‘미안해.’ 라는 게.
옷이 대수냐고. 비록 살리지는 못했지만 사람을 살리기 위해 노력하다가 어쩔 수 없었다고. 오히려 큰소리를 쳐야 할 네가, 나한테 사과하고 있는 이 상황이 나는 무척이나 쪽팔렸다.
나란 인간이 너에게 어떤 존재인지. 얼마나 믿음직스럽지 못한지 새삼 알아 버려서.
“됐어.”
“야, 정현아.”
“됐다고, 꺼지라고. 씨발.”
“한정현.”
난 네 말대로 하루 종일 하는 일도 없이 방구석 폐인처럼 집에 처박혀서 쓰레기같이 뒹굴다가, 온갖 망상에만 사로잡혀서 그림이나 깨작거리다. 홧김에 뻘짓까지 하면서 무슨 망상을 했는지 알아? 넌 상상도 못 할걸.
병신아. 신체적으로 심장 병신은 맞더라도, 진짜 병신은 내가 아니고 너야. 내가 무슨 치졸한 생각을 하면서 지냈는데, 고작해야 옷 하나 망친 것 가지고 나한테 사과를 해.
“정현아.”
“놓으라고…!”
성질을 내보지만 치미는 자괴감을 막을 수는 없다. 덥석 손목을 잡아 오는 손의 온기가 이전과 달리 미지근했다. 내가 아는 한재희의 손은 가끔 불쾌할 정도로 뜨거운데. 그 미묘한 온기에 나는 불쾌감이 치밀어 몸을 홱 돌렸다. 하지만 내 항거는 늘 그렇듯 비루하고 미미했다. 피 냄새가 나는 봉투는 멀리 던져 버린 한재희가 내 두 팔을 붙들어 날 제 쪽을 바라보게끔 했다.
“야….”
침대에 걸터앉은 채로 날 올려다보는 녀석의 눈자위는 퀭했다. 멋들어지게 왁스로 올렸던 머리는 다 산발이 되어서. 한 시간은 잤을까 싶을 정도로 초췌한 녀석은 하나도 안 잘생겼다. 못생겼다. 그런데….
“한정현….”
못생긴 놈이 올려다보는 눈에 왜 이렇게, 서러워지는 거야….
“화를 내면 내지, 왜 울고 그러냐.”
네가, 안 울잖아.
어릴 땐 이 정도면 펑펑 울어야 하는 거 아니냐? 내 앞에선 그래도 울었잖아. 속상하다고. 힘들다고, 싫다고.
그런데 네가 잘나 빠져 가지고. 어느 순간부터 안 울잖아.
그러니까…. 그러니까 서러워서, 미치겠잖아.
***
뚝뚝 흐르는 내 눈물의 의미도 모르면서 녀석은 차분히 내 허리를 끌어안아 도닥이고 있었다. 나는 어깨까지 들썩이면서 울었다. 여러모로 쪽팔렸다. 이 새끼가 이렇게 고생하고 있는 줄도 모르고, 모텔 가서 야동처럼 박고만 있는 줄 알았던 내가 쪽팔리고, 그 와중에 그 아래 깔린 게 나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나 자신에 쪽팔리고.
그리고 가장 하이라이트는, 어떻게 됐건 소개팅이 파투가 난 게 다행이라고 여기는 나한테 최악으로 실망했다. 보잘것없고 망측스러워서 눈물이 났다. 파김치가 되어 버려서, 욕을 해 주기도 민망할 정도로 지쳐 있는 녀석이 꼴 보기가 싫어서 벗어나려고 해 보았지만, 수술을 열 몇 시간 도왔다는 놈이 완력은 여전히 세서 나를 놓아주질 않았다. 더 쪽팔려….
내 눈물에 재희는 오히려 기운을 얻은 듯 보였다. 묘하게 눈빛을 빛내면서 오히려 협박질을 해 댔다. 변태 새끼.
“나 진짜 힘들어. 한정현.”
“그러니까 내가 진작 때려치우랬잖아, 씨발 놈아.”
“어, 진짜 힘들다. 진짜 뒈질 거 같아.”
“그래라. 때려치우든가. 아니면 같이 뒈지든가.”
“…그럴까?”
예상하지 못한 한재희의 대답에 나는 순간 숨을 헉 들이마신 채 내쉬지 못했다. 차분하게 가슴 정중앙을 도닥이는 손의 움직임에 작게 숨을 토해 냈지만, 나는 여전히 놀란 기색을 감출 수 없었다.
뒈지자니, 죽자니. 내 앞에선 재수 없다고 죽음의 지읒 자도 내뱉지 않던 녀석이 내뱉은 말에 나는 뒷골이 곤두섰다. 침대에 걸터앉은 다리 사이로 내 몸을 끌어당긴 녀석이 팔을 뻗었기 때문이었다. 내려다보고 있던 내 목덜미를 더욱 제 쪽으로 이끌었지만, 힘은 그리 세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항거할 수 없었다. 왜지….
“그럼 이왕 뒈질 거, 죽기 전에….”
그리고 자연스레 나도 녀석의 거칠어진 두 뺨에 손을 올리게 된 이유. 녀석의 입술에 직접 입술을 내리 닿게 한 것은, 녀석이 아닌 내 의지임에도 불구하고 눈을 감아 버린 까닭은.
“소원이나 들어줘.”
…보상이 아닌, 소원이라고 하니까.
***
고등학교 때가 마지막이었을 것이다. 집이 아닌 다른 곳에서 녀석에게 ‘보상’을 주는 것은. 커튼을 치고 누가 들어오지 않을 구석에서 살짝 입을 맞추고 말았던 게 전부지만, 난 그게 늘 조심스러웠다.
의식하지 않았던 때는 하도 오래전이라 기억나지 않는다. 반대로 내가 기억하는 모든 순간 나는 한재희와의 뽀뽀를 의식하고 있었다. 누군가 보면 안 된다. 남자끼리 뽀뽀는 이상하니까. 좋아하지 않는 사람간의 뽀뽀는 이상하니까.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나를 좋아하지도 않는 너에게, 너를 좋아하면서도 아무렇지 않게 뽀뽀를 해 주고 있는 내가 너무너무 이상하니까.
하지만 병원에서. 그것도 녀석이 일하는 이 당직실에서 나는 머리가 돌아 버린 것처럼 녀석에게 입을 맞췄다. 그것도 열렬히. 늘 그랬듯 녀석의 리드가 아닌, 내가 직접 입술을 맞대었다.
난 영 이런 곳에 재능은 없어서, 그저 입술을 맞게 마주치고 난 다음에 뗄 뿐이었다. 고작해야 1분은 되었을까.
하지만 그 영겁 같은 시간이 끝나고 질끈 감았던 눈을 뜨자, 내려다보인 한재희의 얼굴은 꼭 잠이라고 푹 자고 일어난 것처럼 맑았고, 두 눈망울은 또렷했으며, 생기가 일었다.
방금까지만 해도 내 입술이 닿았던 녀석의 입술에 도는 혈색이, 금세라도 열기가 오를 것처럼 뜨겁게 손끝을 간질였다.
…거기까지였다.
“…이제 살 것 같다.”
그 한마디 말과 함께 내 몸을 끌어당긴 한재희 때문에, 내 시야는 다시 어두워지고 말았다.
***
내 허리를 끌어안은 채 뒤로 누워 버린 한재희의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난 저항 한 번 못 하고 그대로 고꾸라졌다. 넘어지지 않으려 허우적거려 봤지만 내 목덜미와 허리를 붙든 한재희의 손은 날 풀어 주지 않았다.
결국 난 그대로 한재희의 위에 엎드린 셈이 되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흡…!”
이제 진짜 미쳤나 봐, 돌았나 봐, 얘가.
그대로 입술을 부딪쳐 온 한재희를 밀어 낼 수 없었다. 아니, 오히려 밀쳐 내려고 힘을 주다가 역으로 입술을 열어 주는 꼴이 되고 말았다. 자연스럽게 내 목덜미를 쥔 한재희가 고개를 엇갈리며 깊게 내 입 안을 빨아들여 왔다. 눈을 질끈 감았다. 검게 물든 사방이 자욱하다 못해 허옇게 트이기 시작했다. 와, 아, 미쳤어….
그래. 내가 충동에 못 이겨 먼저 입을 맞추긴 했다.
날 올려다보는 녀석의 지친 얼굴이 너무나 안쓰럽고, 또 미안해서. 미안한데 미안한 이유를 말할 수 없어 괜히 화까지 낸 나 자신의 자괴감을 조금이나마 덜어 보려는 속셈이었고, 발악이었다.
차라리 싸가지가 없는 게 낫지. 그렇게 녀석이 약해지면 난 몸 둘 바를 모르게 된다. 내가 제일 사랑하는 네 살 한재희가 돌아온 것처럼 느껴져서 약해지고 만다. 녀석을 위로하면서 동시에 날 위로하기 위해 뽀뽀는… 그래 했다.
원인 제공은 내가 했다 치자. …하지만 이렇게 본격적은 아니었잖아!
그러니까, 직전과 다른, 그리고 종전과 다름없는 딥 키스였다.
아웅다웅 다투고 난 다음에 녀석이 ‘특별한 보상’이 필요했다고 하던 그 키스와 비등한 수준이었다. 심지어 여기는 그 녀석의 직장인데!
버둥거리는 내 허리를 안고, 목덜미를 놓아주지 않는 녀석은 마치 무언가를 다급히 갈구하듯이 제 혀를 내 입속에 파고들게 했다. 오히려 몸을 움직일수록 녀석의 몸과 깊게 겹쳐졌다. 내가 좋아하는 녀석의 향취가 깊게 물들기 시작했다. 부드러운 입술을 혀로 충분히 적시고, 또 내가 몸을 일으키려 하면 숨도 쉴 수 없게 빈틈없이 혀와 입 안을 옭아매는 녀석의 섬세한 키스에 난 몸에 힘이 점점 빠지고 있었다.
아, 안 돼. 나른해져 버리는데….
약간 습관 같은 거였다. 뽀뽀가 키스로 바뀐 뒤부턴, 묘하게 난 녀석의 키스만 받으면 잠이 들곤 했으니까. 따스했고 노곤해졌다. 숨을 틔워 주고 다시 입술을 베어 무는 녀석의 완력에 힘없이 이끌리다, 나는 늘 그랬듯 나른해져 버릴 뻔했다. 아뿔싸.
차라리 잠들면 좋았지만 문제는 거기서부터였다.
“흐읍…!!”
아랫배로 열이 몰리기 시작했다. 미치겠다. 징후도 저번과 똑같았다. 허리를 놓아주지 않는 녀석 덕분에 계속 우리는 몸을 부대끼고 있었고, 입고 왔던 옷이 피 걸레가 된 탓에 남의 옷을 빌려 입은 녀석의 옷가지는 무척 얇았다.
문제는 나마저도 청바지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닿는 체온에 서서히 열감이 아래로 쏠리다 못해, 나는 느꼈다. 무릎 근처에 무언가가 닿았다. 무척이나 딱딱하고 뜨거운…. 그걸 느끼자마자 나는 그대로 서 버렸다.
씨발, 돌았어. 이 미친 새끼가.
“야, 이 미친…!”
미안했던 마음마저도 송두리째 뺏어가 버리는 감각에 나는 결국 녀석의 코를 막을 수밖에 없었다. 아가미는 가지지 못한 녀석이 결국 나를 놓아주었고, 그것도 잠시. 무릎으로 일어서려는 내 허리를 팔로 감아 날 제 위로 다시 눕히려 했다.
“괜찮아. 아무도 안 들어와.”
“그게 문제냐고…!”
“왜 그러… 아.”
내 마른 허리를 끌어안은 녀석이 문득 닿은 하체에 흠칫, 했다.
씨발… 엄마 보고 싶어.
“너 혹시….”
망했다. 차라리 청바지였으면 티라도 덜 나지…. 헐렁한 바지를 입은 게 잘못이었다. 쪽팔려서 죽고 싶다…. 이른 봄의 추위는 어디 가고, 난 한여름의 땡볕을 받기라도 한 것처럼 얼굴이 불타오르는 것을 느꼈다.
“서서 그러냐?”
“…씨발 새끼야. 너도…!”
“하기야 너한텐 대형 이벤트이긴 하지.”
서둘러 녀석의 입을 막아 보지만, 손바닥 아래로 느껴지는 짧고 간결한 호흡이 분명 웃고 있었다. 나는 기운이 다 빠져서 그대로 녀석의 배 위에 주저앉았다.
물론 완전히 주저앉지는 못했다. 나와 크게 다르지 않은 녀석의 아랫도리가 느껴져서 나는 토끼처럼 제자리에서 뛰어 올라 옆에 앉았다. 잠깐만, 왜 이 새끼는 왜 쪽팔려 하지도 않지? 진짜 또라이인가?
“야. 같은 남자끼리 뭘 그렇게 부끄러워해. 넌 뭐 내 거 안 봤어?”
“그딴 거 보고 싶지 않거든.”
“게다가 넌 건강해서 정말 다행인 소식 아니냐. …봐봐.”
“아…!”
나는 나도 모르게 터진 신음에 입을 두 손으로 막아야 했다. 난데없이 녀석이 손을 뻗어 왔기 때문이었다. 완전 발기하지는 않았지만 나름대로 각도를 세우고 있던 부위를 완벽히 만진 녀석 탓에 나는 되게 우스꽝스러운 소리를 냈다. 진짜 한 대 칠 요량으로 손을 들자 가뿐히 녀석은 내 손목을 제압했다.
…내 밑을 만진 손과 같은 손으로.
“알겠어. 가자. 가서 하자.”
“…야.”
“갈래. 나 피곤해. 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욕을 해야 할지 몰라 난 그저 분에 넘쳐 씩씩거릴 뿐이었다. 노려보기만 할 뿐 내가 움직이지 않자 녀석이 먼저 일어섰다. 아까 처음 당직실 문을 열었을 때와는 무척 딴판으로, 꼭 수술로 사람을 살린 것처럼 활기가 가득했다.
심지어 ‘또 졸리면 업힐래?’ 하고 침대 밑으로 내려앉아 내보이는 녀석의 등을, 난 실컷 차 주는 수밖에 없었다.
***
며칠 전과 비슷한 패턴이었다. 돌아오자마자 녀석과 나는 바로 몸부터 씻었다. 옷이야 나중에 사면 되지. 병원에다 아낌없이 버리고 나왔는데도, 여전히 정장에서 타인의 피 냄새가 나는 것만 같아서 더욱 샤워가 절실했다.
샤워를 하고 나오니 더욱 노곤해진 얼굴의 녀석이 눈을 껌벅거리며 내 침대에 앉아 있었다. 졸리면 네 방에 가서 누우라고 하니, 우두커니 선 내 팔을 끌어당긴 녀석이 제 허벅지 위에 나를 앉혔다.
“미친놈아…!”
“아까 가서 하자고 했잖아.”
“뭘!”
“검진.”
병원에서 살짝 발기했던 게 여태까지 갈 리가 없잖아. 애초에 제대로 서지도 못한 데다가, 가운데 다리는 내 이성으로 제어하는 게 아니니까….
하지만 나도 모르는 작동 방법을 꼭 녀석은 아는 것처럼 굴었다. 자연스레 입을 맞춰 왔다. 가벼운 듯하면서도 묘하게 성급한 입맞춤에 나는 숨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아직 물기가 채 마르지 않은 녀석의 머리칼이 내 뺨을 스쳤다.바닥을 딛고 일어서려던 내 허리를 꾹 누른 녀석은 마치 씨름을 하듯 매끄럽게 내 침대 위에 날 눕혔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내 위에 녀석이 버티고 엎드리고 있었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야, 이 도른 새끼….”
“아, 섰다.”
“…!”
바로 내 다리 사이로 파고드는 손에 나는 다리를 오므리려 했지만 영락없었다. 묘한 콧소리를 낸 내 코끝을 살짝 깨문 녀석이 내 잠옷 바지 겉으로 느껴지는 내 것을 매만지며 확인했다. 난 진심으로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지 알 수가 없었다.
***
그러니까 고해성사를 하자면.
어제 녀석이 외박했을 때 혼자 잠이 들었던 나는, 녀석이 소개팅 상대와 잘 맞고 눈 맞아 배도 맞은 줄 알고, 아예 모텔까지 가서 방아 찧는 최악의 수까지 마음의 대비를 했다. 그 상상을 하며 내 자신을 다스렸고, 또 괴롭혔다.
물론 망상이었다. 그야 내가 녀석이 열 몇 시간 수술실에 있었을 줄을 어떻게 알았겠어….
여하튼 나와 녀석의 미래를 위해서 나는 열심히 상상했고, 아무래도 얼굴도 모르는 여자를 상상할 수가 없어서 늘 그랬듯이 녀석의 밑에 날 대입했고, 그러니까 그 상상 속에 녀석이 열심히 허리를 돌릴 때 그 밑에 나를 상상해 본 것도 맞기는 맞다. 헌데…!
“요새 자위했어?”
“미친놈아. 그딴 거 묻지 말라고.”
“검진이라고 생각해, 검진.”
“이딴 검진을 누가 해.”
“나니까 하지. 남이랑 할래? 임 교수랑? 안 그래도 너 이쪽 상황 궁금해하기는 해.”
“닥ㅊ… 으응, 아!!”
“오. 이제 꽤 딱딱해지네.”
“잠깐, 잠… 아. 아아. 앗.”
“요샌 강하제는 안 먹지?”
“하아, 하… 아. 아, 그만, 응….”
“너 혈액 순환 좋아졌나 보다. 다행이네.”
씨발, 말발이 좋아서 받아칠 수가 없었다. 늘 그랬다. 말로 싸우는 건 내 손해라니까. 그리고 지금은 손해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러니까 난 작금의 상황을 정리하려고 애를 썼다. 하지만 정리가 도무지 되질 않았다. 어찌 보면 당연했다.
아예 발가벗고 삽입을 하는 거면 몰라. 내 것을 대신 자위해 주는 상상까지는 절대 하지 않았다. 당연하지. 여자랑 자는 한재희를 상상했으니까, 여자 밑에 나처럼 성기가 달렸을 리도 없고….
하지만 상상과 달리, 그리고 나 혼자 맥없이 만졌던 어제와도 달리 내 페니스는 꼭 제가 정상인 것처럼 굴었다. 그것은 착실하게 녀석의 손안에서 크기를 불렸다. 사정까진 가지 못해도 쿠퍼액이 비치기 시작하자, 금세 손과 마찰하는 부분에서 질척이는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난 녀석을 밀칠 생각도 못 하고 멍하니 있었다. 그 때문이었다.
짝사랑하던 건 맞고, 스물아홉까지 키스 외에는 별것 없었는데. 얼마 전에 키스하다가 발기 한 번 한 뒤로 이렇게 이 상황까지 가는 게 말이 되나? 아니, 절대 말이 안 된다.
게다가 너 방금까지는 수술 실패해서 엄청 우울해하지 않았냐고! 그런 새끼가….
“씨발… 놈, 아!”
“씹하자고?”
“미친…. 아, 아아…!”
한창 놀리던 손을 빼더니, 입으로 머금어 버렸다. 그러니까, 내 걸.
환상이 아니었다. 녀석이, 내 페니스를 앙, 하고 물었다. 정말, 진심으로 여태껏. 이 정도까진 상상한 적이 없었다. 생각도, 감촉도, 모든 게 다 처음이었다. 부끄럽지만 스물아홉 먹고 제대로 동정이었던 내가 무슨 재주로 오럴을 받을 수 있었겠는가. 아니, 생각도 않았다. 삽입 섹스는 망상이라도 하지, 맹세하건대 구강성교는 정말 꿈도 꾼 적 없었다.
하지만 이 새끼가 정말 돌아 버렸나 보다. 아니면 지금 이게 꿈이거나. 내가 돌아 버렸거나.
거리낌 없이 내 다리 사이로 고개를 파묻은 한재희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는 질겁하면서 녀석의 어깨를 밀어 보지만, 오히려 내 엉덩이를 제 얼굴 쪽으로 끌어당겨 놓고서는 위아래로 고갯짓을 했다. 내 것을 빨아들이면서.
“으응, 응. 읏…. 아…. 아!!”
한재희가 나보다 뜨거운 건 알았지만, 이렇게까지 뜨거운 줄은 몰랐다. 아까 전 내 혀와 점막을, 입 안을 온통 헤집고 다닐 때까지만 해도, 이토록 뜨거운 줄은 몰랐다. 꼭 델 것 같았다.
아무리 손으로 위로해 보아도, 꽉 쥐어 보아도 이렇게 성기를 쥐어 오는 감각은 느낀 적이 없다. 마치 내 페니스가 녀석의 목 안으로 다 빨려 들어갈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어깨를 밀던 손가락을 녀석의 곱슬곱슬한 머리칼 속으로 넣을 수밖에 없었다. 웅크리던 가슴을 펴고 뒤로 고개를 젖혔다. 저절로 다리가 벌어졌다. 난 그게 쪽팔리면서도, 녀석이 입을 뗄 때까지 신음만 흘리며 요동치려는 가슴 한편을 붙드느라, 벗겨지지 않은 옷자락을 쥐고 있었다.
그리고 그 곁에, 녀석의 커다란 손이 닿았다.
“하아….”
“재희야, 흐으…. 제…바알, 아!”
“내가 체크하고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
…이 미친놈이.
더 쪽팔렸다. 소꿉친구 앞에서 이 꼴을 하고서 헐떡대는 나와는 달리 정말 진찰을 하는 의사처럼 차분한 녀석의 목소리에 나는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말만 그랬지, 입술은 뻘겋게 달아올라서는 타액으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저 번들거리는 액체 속에 내 쿠퍼액도 있을 거란 생각을 하니 갑자기 허벅지 사이가 바들바들 떨리기 시작했다.
원래 계단만 오를 수 있으면 섹스도 다 할걸, 뭐. 하고 어깨를 으쓱인 녀석은 타액과 쿠퍼액으로 번들거리는 내 성기를 쥐고 흔들기 시작했다. 녀석의 큰 손 위에 겹친 내 귀두가 빠끔거리는 게 내 눈에 들어왔다.
물론 순간이었다. 나는 눈을 질끈 감고서 녀석의 손을 붙들었다. 박동하는 심장, 그 위에 놓인 녀석의 큰 손을 붙들고 나는 허리를 비틀었다. 입 안이 바짝바짝 탔다. 시야가 하얗게 점멸했다. 난 목을 뒤로 꺾었다.
“으응, 응. 읏, 아아. 아, 재희… 야,”
“빨갛고 예쁘네.”
“씨발, 그런… 마알, 읏!”
“싸, 괜찮아.”
“아, 아, 응, 아. 하지, 응, 읏….”
어쩌지. 녀석의 말을 듣고 나니까 정말 쌀 것 같다. 진짜로 쌀 것 같다. 진짜 내 것이 내 것이 아닌 기분이었다. 왜 내 건데 쟤 말만 듣지? 얼마 전 자위할 때와는 다르게, 정말 녀석의 허가가 떨어지자마자 사정욕이 급하게 몰려들었다.
이제 정말 한계였다. 나로선 이렇게 치밀어 오르는 쾌감은 감당한 적도 없었고 감당할 수도 없었다. 단순히 기분 탓은 아니었는지, 선단의 주름 끝을 녀석이 자꾸 매만지며 자극을 줬다. 나로선 견딜 수 없는 자극이어서 입을 크게 벌리고 허리를 틀었다.
녀석의 엄지손가락이 예민해진 선단과 귀두의 틈을 문질렀다. 철벅거리는 소리가 내 숨소리보다 더욱 크게 들렸다. 안 된다며 손을 내뻗어 보지만, 내 가슴 고동보다 빠르게 흔들리는 녀석의 손짓과, 잘게 선 팔 근육이 내 나약한 손짓을 가로막았다.
수만 가지 생각이 들었다. 아, 이대로 죽어도 여한이 없는 건가. 그런데 왜 녀석은 갑자기 내 자위를 해 주고 있는 거지. 뭐가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내가 여기서 싸는 게 제일 잘못된 거겠지. 아니, 애초에 옷을 가지고 가면 안 됐을까….
애국가는 아니어도 불교의 삼라만상을 탐구하듯 내 이성은 골똘히 다른 생각에 빠지려 했지만, 현실의 감각은 오롯이 위대했다. 철벅거리며 녀석의 손 안에서 있는 힘껏 최대한으로 발기한 내 페니스는, 기어이 꿈틀거리다 못해 그 끝에 다다랐고, 마치 누가 이기냐 해 보자는 듯이 손으로 꽉 쥐는 것으로 모자라 터지기 직전의 내 귀두를 녀석이 입에 묾으로써, 그렇게 나는 마음도 지고, 몸도 지고 말았다.
“흐으, 하아, 으…아, 아아!!”
결국, 싸 버렸다. 그것도 녀석의 입 안에….
***
녀석을 짝사랑하고도 어언 10년이 훌쩍 넘었다.
물론 시간으로 따지면 압도적인 밀도지만, 현실은 숫자로 세는 것보다 조금 밋밋한 편이었다. 강산이 변한다고 인생이 바뀌지는 않았다. 엄청나게 열렬하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청승까지 떨지는 않았다.
그냥 내게는, 한재희를 좋아하는 일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상이었다.
따지고 보면 고등학교 졸업과 대학교 자퇴 이후 집 안에서 틀어박혀 지내는 처지인 내게 좋아할 대상이라곤 전무. 그나마 꼽는 후보랍시곤 한재희밖에 없지 않은가. 뭐, 녀석에겐 미안한 일이 됐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뭔가를 이룩하려고 욕심냈던 건 아니다.
뭘 하지 않더라도 좋아하는 감정만으로 충분히 미안한 일인 건 알고 있었다. 그래서 조용히 좋아하려고만 했다. 뭐, 야한 상상은 했다. 녀석은 그냥 기분 전환 정도로 생각하는 키스에 혼자 흑심 품고 발 동동 굴리며 자괴감에 빠졌던 것도 맞다. 다 지나가리라고 생각했다.
절대로, 절대로 이 나이까지 이렇게 붙어먹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게다가 이렇게, …좋아하다 못해 녀석의 입에다 사정할 줄은 꿈에도 생각 못 했다고.
“하아, 하아, 하아….”
“사정도 하고. 진짜 많이 좋아졌네, 한정현.”
“…하아, 하….”
혹시 이거 몰래 카메라인가. 아니면 정말 리얼한 꿈인가. 4D 영화처럼.
나는 눈을 차마 뜰 수가 없었다. 터져 버릴 것처럼 뛰는 심장을 달랠 길이 없어 헉헉거렸다. 태연하게 내 가슴을 도닥거리는 녀석의 손에 나는 정신을 차리고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었다. 달싹이는 내 가슴 위에 귀를 대고 있던 녀석이, 조금 진정되는 것을 느꼈는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무언가 물을 적셔 오더니 성기와 벗은 아랫배 주변을 꼼꼼히 닦아 주었다. 허리까지 들게 해 엉덩이 사이를 꼼꼼히 닦는 녀석의 손길에도 난 저항하지 못했다.
평소 같았으면 무슨 애 기저귀 갈아 주냐고 하며 발로 걷어찼을 텐데, 사실 발을 들 기력조차 없었다. 팔로 눈을 가린 채 물기 어린 속눈썹을 비볐다. 호흡도 차츰 돌아왔고 녀석이 가져다준 물로 입술도 축였지만, 몸이 가라앉는 만큼 마음은 심각하게 날뛰었다.
씨발, 얘를 무슨 얼굴로 보지…?
“너, 마지막에 사정한 게 언제였다고 했지?”
물론 이건 내 사정이고, 한재희는 평소와 다를 것 없이 똑같았다. 듣기만 해도 안다.
이 눈치 없는 자식은 정말 내 컨디션을 확인하려는 듯 이것저것을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자꾸 물었다. 자꾸만 부르는 소리에 나는 차라리 내가 기절을 해 버렸으면 좋았겠지만, 자는 척을 하는 것에마저 실패했다. 내 얼굴을 확인하려는 듯 팔을 스윽 내리는 손길에 온전히 얼굴을 보여 주고 말았다. 눈앞의 한재희는 샤워를 마친 멀쩡한 모습 그대로 날 내려다보고 있었다.
“왜 그래.”
“…….”
“…? 뭐야. 왜?”
말없이 노려보는 내 눈빛의 함의를 알아챈 건지, 녀석이 인상을 찌푸렸다. 왜 화가 났냐는 듯한 표정이었다. 난 거기다 대고 할 말이 없어 시선을 돌렸다. 여전히 내 하체는 그대로 날것이었고, 녀석은 늘어진 목티와 잠옷 바지를 입고 있었다. 물론 바지 앞섶은….
“…아, 너만 해서 그래?”
“…뭐?”
“너만 한 게 억울해? 그래서 삐쳤냐?”
“아니, 그게….”
“왜.”
“…아니야. 뭘 삐쳐.”
몸을 돌려 누웠지만 미친 내 시선은 한 군데에서 떼어지지가 않았다. 사실 녀석의 말이 틀린 건 아니었다. 나는 씨발 완전 밑바닥까지 다 보여 줬는데, 여전히 멀쩡한 척 굴면서도 저렇게 커진 녀석에게 복잡한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내 시선을 알아챈 녀석이 허리를 폈다. 나는 화들짝 놀라서 상체를 일으켰다. 아니, 일으키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기운이 빠져서 그대로 자연스럽게 눕고 말았다. 가까이 앉은 녀석의 앞섶이 부담스러울 정도로 불룩 올라와 있었다. 자연스럽게 내 시선은 녀석의 중심부로 돌아갔다. 미쳤나 봐.
“내 거 궁금해?”
“…어?”
“자꾸 보길래. 예전엔 많이 봤잖아.”
“뭘 봐, 미친놈아.”
“샤워도 같이 하고 했잖아.”
그래, 물론 처음이 아니다. 녀석의 말대로 남자들끼리 살면서 뭘 못 보았겠는가. 나와 달리 건강한 녀석의 텐트는 몇 번 봤다. 하지만 이런 상황이 아니었다. 난 당황했다. 그래서 쉽게 대답할 수 없었다.
한재희 거…. 아, 물론 보고 싶은데. 근데, 아 보고 싶다고 하는 것도 이상하잖아. 나는 대답할 말을 잃고 입술을 잘근거렸다. 그때였다.
“…헉.”
…주여. 세상에. 오 마이 갓.
“이제 됐냐?”
녀석이 훌렁 제 하의를 벗어 버린 건 너무나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난 멀쩡한 척을 하려고 애썼다. 하지만 그 노력은 허사로 돌아갔다. 녀석이 속옷도 입고 있지 않았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어쩐지 뜨겁더라…. 그뿐만이 아니었다. 고무줄 바지 밖으로 휑하니 튀어나온 녀석의 발기한 것에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이게 무슨….
“너 왜 이렇게 커. 원래 이랬어?”
“내가 큰가?”
“미친, 엄청 큰데….”
“야동에선 더 큰 것도 많던데.”
“…서양?”
끄덕이는 녀석의 뒤통수를 후려갈기고 싶었다. 야, 씨발. 비교 수준이 다르잖아. 아까 모든 임무를 마치고 전사한 내 것에 자괴감이 들어 나는 괜히 다리를 꼬았다. 발기해서 아예 배꼽 쪽으로 거의 달라붙은 한재희의 것은 내 것과 달리 핏줄도 불거진 데다 두께마저도 거의 내 두 배에 가까웠다. 이 정도는 되어야 가운데 다리라고 하는구나. 같은 남자로서 감탄했다.
물론 한편으로는 다른 음험한 마음도 들었다. 꿈속에서 녀석에게 안기는 상상을 수없이 해 왔어도, 얼굴만 한재희였고 나머지는 야동 배우의 몸이었다. 하지만 실제로 마주한 한재희의 것은 배우의 것에 비교해도 나무랄 데 없이 크고 곧았다.
녀석이 작거나 평균이라고 하는 그 비교군이 흑인인지는 모르겠지만, 저 두껍고 단단한 게 밑을 쑤실 생각을 하니 자연스럽게 뺨이 붉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저절로 아래에 힘이 들어갔다.
“그래서. 너도 해 주려고?”
“…어?!”
눈이 풀리다 못해 시선을 떨군 내가 큰 소리를 내며 반문하자 녀석이 피식 웃었다. 아씨, 쪽팔려….
“뭘 그렇게 쫄고 그러냐.”
“어? 아니, 그게 아니고….”
“걱정하지 말고 넌 하던 거나 해.”
하던 거? 머리가 복잡했다. 머리로 이해하지 못한 대신 먼저 깨달은 건 와 닿는 입술의 촉감이었다.
“읍….”
부드럽게 녀석이 내 입술 사이를 가로질렀다. 침대 위에 널브러진 내 위에서 버티고 선 녀석은 한 손으로는 몸을 지탱하고, 다른 한 손으로는 자신의 것을 매만지고 있었다. 미쳤어, 내 눈앞에서 한재희가 자위를 하고 있는 것이다. 나랑 키스를 하면서. 이게 진짜야? 미쳤다….
이런 스킨십에 재능 없는 내가 할 수 있는 전부는 열렬히 녀석의 키스에 순응하는 것뿐이었다. 최대한 녀석에게 도움이 될 수 있도록. 물론 내 나름의 과업도 있었다. 내 배 근처에서 철벅거리는 소리를 내면서 흥분하고 있는 한재희의 모든 것을 귀로 담으며 나는 지금 이 순간의 감각을 기억하는 데에 열중했다.
녀석의 목소리는 안 그래도 낮은데, 자위하고 있는 지금은 더욱 낮았다. 금세 쿠퍼액이 나오기 시작했는지 손과 성기가 마찰하는 소리가 엄청 음란하게 들렸다. 입 안에서 날 헤집어 대는 혀의 움직임이 평소보다 더욱 거칠었다. 목울대 뒤로 그르렁대는 소리를 내던 녀석이 깊게 넣었던 혀를 빼내어 내 입술을 핥고, 또 갑자기 코를 비벼 댔다.
“아…!”
“음, 하아….”
녀석의 열기 가득한 숨이 내 귀를 간질였다. 씨발, 뭐야…. 아까 쌌는데도 난 지금 누가 자위를 하고 있는 건지 분간이 안 갈 정도로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난 버릇처럼 자연스레 가슴팍을 쥐었고, 그 주먹 위에 뜨끈한 한재희의 체온이 느껴져 어깨를 흠칫 떨 수밖에 없었다.
이쯤 되니 미칠 지경이었다. 보고 싶었다. 입을 맞추면 자동적으로 눈이 감기는 게 내 습관이었지만 이번만은 보고 싶었다. 눈을 뜨고 싶었다. 정확히는 한재희의 것이 보고 싶었다. 내 앞에서, 나와 키스하며 절정에 닿는 한재희가 보고 싶었다.
하지만 용기가 나지 않았다. 나는 시트를 쥐고, 내 입천장을 감싸는 녀석의 혀를 어설프게 감으며 고개를 틀었다. 수천 번의 갈등과 고민 끝에 결국 결심을 했다. 언제 또 올지도 모를 기회인데, 한 번만 용기를 내자고. 질끈 감았던 눈꺼풀을 위태롭게 들어 올렸고, 그때….
“윽…!”
절정에 다다라 사정하는 녀석과 정확하게 눈이 마주쳐 버렸다.
낮게 신음한 녀석의 손짓에 쭉쭉 튀어 나가는 정액이 내 배 위에 이리저리 튀어 얼룩이 졌다. 마치 달리기를 한 것처럼 가쁘게 숨 쉬는 녀석을 따라 보기 좋게 자리 잡힌 대흉근이 펄떡였고, 성기를 쥔 팔부터 손끝까지 힘줄이 불끈거리며 돋아 올라 있었다. 눈이 마주쳐 놀란 것은 이미 상관없게 되어 버렸다.
늘 거칠게 숨을 몰아쉬던 것은 내 몫이었는데, 지금은 녀석의 심장 고동이 귀에 들릴 것처럼 펄떡이고 있었다. 게다가 뜨끈하게 퍼진 정액이 내 배 위를 흥건히 적시는 양이라는 것에 나는 이성적인 생각을 멈추고 입을 떡 벌렸다.
거기다. 날 더욱 경악게 한 것은 따로 남아 있었다.
“이제 됐냐?”
“…어, 어?”
“뭘 그렇게 쳐다봐.”
“아니, 그게…. 너, 끝난 거야?”
“아, 가만 놔두면 작아져.”
아연실색한 나는 힘겹게 시선을 피했다. 분명 사정을 한 뒤인데도 녀석의 것은 더욱 더 커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새끼 직업 잘못 정한 것 아닌가.
하얀 정액을 힘차게 내뱉고도 여전히 번들거리는 선단에 나는 내 몸이 안 좋아서 다행이라고 생애 최초로 생각했다. 만약 내 몸이 멀쩡했다면 다 들켰을 테니까. 정말… 마음만으로는 몇 번을 더 섰을 테니까.
나는 배배 꼰 다리를 풀지 않은 채로 녀석이 제 정액을 닦는 것을 얌전히 지켜보았다. 그 섬세한 손놀림에 묘한 기분이 들었다. 여자들은 얼마나 좋아할까. 미수로 끝난 그 모텔에서의 망상 속, 얼굴 모를 달걀귀신이 될 여자가 나는 부러웠다.
잘생긴 한재희가 저걸로 엄청나게 박아 주면 얼마나 좋을까. 게다가 한 번으로 끝이 날 것 같지도 않다. 세상에.
나라도 한재희랑 결혼하자고 달려들겠다. 내가 여자라도 그럴 것이다. 이번에 파투가 나서 다행이지, 밤일까지 했다면 바로 결혼하자고 난리가 날 것 같았다. 녀석에게 목매달고, 또 허리까지 매달릴 여자들이 나는 진짜, 진심으로-.
“…부럽다.”
“…뭐?”
“어? 아…. 아니 그냥….”
너무 넋을 놓고 있었다. 자칫 잘못하다간 미친 소리를 할 뻔했다. 너랑 결혼하고 네 아이를 낳을 여자가 부럽다고. 하지만 녀석은 인상을 찌푸렸다. 왜 계속 표정이 구리냐는 눈치였다. 내 시선이 부담스러운지 바지를 입은 녀석 앞에 나도 허리를 세워 앉았다.
씨발, 너한테 박힐 여자가 부러웠다고 말할 수는 없잖니.
“넌 몰라도 난… 이게 처음이고. 어쩌면… 이게 마지막일 수도 있는데.”
“…….”
“너도 알다시피 나는… 그런 건 텄잖아.”
“나랑 해서 싼 게 그렇게 싫었냐?”
“…아니 그럴 리가…!”
“…….”
“아니. 아, 그러니까. 그런 말이 아니고.”
어휴, 좋았다고 말할 뻔했다. 젠장….
“그냥, 난 사정도 제대로 못하고. 연애도 못하고. 그냥 여러 가지로 심란해서 그랬어….”
“…….”
“너랑 다르니까 나는. 그냥, 네가 부럽더라고. 난 그런 거 꿈도 못 꾸니까. 근데 너 하는 거 보니까….”
차라리 아까 잠들었어야 했는데. 녀석의 거대한 것에 잠이 화들짝 깨어 버린 나를 탓할 수밖에. 난 수습되지 않는 말들을 만들어 내려 애썼다. 뭐, 아예 거짓말은 아니었다.
애초에 심장병은 유전 인자가 크기도 하고, 자위도 못하는 내가 어떤 여자를 만족시킬 수 있을까. 물론 이성적인 감정을 겪어 보지 않은 도움도 컸지만, 내게 연애나 결혼은 별나라 이야기였다. 한재희를 좋아하는 것도 마찬가지 맥락이었다.
늘 체온 유지를 해야 하고, 가려야 하는 음식은 수천 가지에, 죽을 때까지 평생 병원을 끼고 살아야 하는 내가 누군가를 감히 사랑한다고 고백할 수가 있을까.
할 수야 있겠지. 하지만 그건 정말 무책임한 일이다. 내 삶 하나도 간수하지 못하는 내가 단순히 감정에 미쳐서 그걸 함께 나누자고 할 이기심은 없다. 그건 우리 가족과 한재희만으로 충분했다.
…그래놓고 그 한재희를 좋아해 버린 게 가장 큰 문제지만.
여하튼. 내 진실을 반 섞은 거짓말은 녀석에게 꽤 크게 작동된 듯싶었다. 내 토로를 경청한 한재희는 고개를 작게 끄덕이며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보였다. 나는 물론 작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까지는 몰랐다. 그저 앞으로의 망상질이 괴롭고 또 행복해지겠구나. 내 배 위에 퍼지던 뜨끈한 온도를 잊지 않아야겠다. 결국 그딴 망상만 하고 있다가.
…자업자득의 결과를 얻고 만 것이다.
“어떤 스타일이 좋은데?”
“…어?”
***
“이쁘네.”
“닥쳐.”
“평소에도 좀 이렇게 입어 봐라.”
“히키코모리라 이러고 나갈 일이 없거든.”
방문 옆으로 비스듬히 선 한재희가 치장한 내 차림새를 보고 작게 휘파람을 불었다. 난 퉁명스레 말했지만, 녀석의 말에 그나마 합격점을 얻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녀석의 안목은 절대적으로 신뢰할 수 없긴 하지만, 적어도 오늘 내 상태가 평소보단 나쁘지는 않다는 것에 안심했다.
집에서 노닥거리거나 동네를 산책할 때는 늘 트레이닝복 차림으로 한다. 병원에 갈아입을 옷 심부름을 갈 때는 무조건 방한을 생각한 패딩이거나 편한 면바지 차림.
하지만 오늘은 그럴 수 없었다. 어제 하루 종일 옷장을 뒤집었다. 나갈 일이 없어 쇼핑을 하는 일도 드물었기에, 옷장에서 해묵은 지 오래인 옷들을 꺼내 최대한 촌스럽지 않도록 애를 썼다. 20대 초중반 때 입었던 옷들이 대다수지만, 살이 빠진다면 빠졌지 찐 적이 없었기에 다행히 몸에는 맞았다.
다만, 이렇게 꾸민 게 하도 오랜만이어서 거울 속 내 모습에 나 스스로가 어색했다. 그나마 봐줄 사람이 녀석 하나니, 그 눈이라도 괜찮다면 다행이었다.
“춥지 않겠어?”
“빨리 들어올 텐데 뭘.”
“착한 애니까, 아마 마음에 들지도 몰라.”
“너 표정 맘에 안 들어.”
“양말이라도 골라 줄까?”
녀석의 구린 패션 센스가 날 살렸다. 만약 옷이라도 볼 줄 알았으면 보름 전 내가 했던 일들을 고스란히 부메랑으로 받을 뻔했다. 이미 두 눈 가득히 신난 녀석은 아무래도 춥다며 고집을 부리더니 두툼한 목도리 하나를 어쭙잖게 권했다. 마지못해 둘렀다. 다행히도 무난하게 어울릴 만한 보라색 머플러였다. 몇 년 전엔가 녀석이 나한테 생일 선물로 주었던.
“너도 나가게?”
“어. 출근해야지. 너 내려다 주고 갈게.”
“…….”
진심으로 사양하고 싶었지만 이미 내 몸은 보조석에 앉혀진 지 오래였다. 녀석이 자연스레 안전벨트까지 매 주고 있었다.
같이 밖에 나가는 일은 드물다. 게다가 출근 거리도 걸어서 30분. 물론 긴급 환자로 호출되는 일이 종종 있어 녀석은 1주일에 사나흘은 차를 몰고 다녔다. 나는 면허조차 없는 몸이지만….
여하튼, 친절하게도 가슴에 압박이 가지 않게 매 준 안전벨트를 손에 꽉 쥔 채, 나는 지금 이 거지 같은 상황을 되새겼다. 정리된 결과는 깔끔했다. 이 씨발 놈은 진짜 날 안 좋아하는 것 같다는 사실.
왜 이렇게 되어 버린 건지 모르겠지만. 그로부터 보름 뒤. 나는 난데없이 녀석으로부터 소개팅 주선을 받게 되었다.
물론 그 화근은 나였다.
그때, 오만 걸 다 해 버리고 나서 멘탈이 날아간 내가 대강 얼버무리는 말에 녀석은 나름대로 깨달은 바가 있었던 모양이다. 제발, 깨닫지 못했던 게 지금으로선 나았겠지만….
여하튼, 제가 생각하기에도 내 처지가 불쌍했나 보다. 스물아홉 먹도록 여자랑 손도 못 잡고 연애 못 해 서러운 귀신이 들린 것으로 생각했는지, 정말 일주일 만에 소개팅을 잡아 온 것이다.
물론 나는 거절했다. 부담스럽다고. 이 병신 같은 몸으로 여자를 만날 수 없다고. 그건 오히려 여자분에게 결례를 범하는 일이라고. 무척이나 차분한 어조와 정중한 태도로 거절을 했으나, 받아치던 녀석의 말은 지금 운전대를 잡고서 하는 말과 변함이 없이 내 정곡을 찔렀다.
“그쪽한테도 기대하지 말라고 했으니까 괜한 걱정 말고 그냥 밥이나 먹고 와.”
“…씨발 놈아.”
“뭐, 그렇게까지 고마워할 일은 아니고.”
비실비실 웃는 모습이 정말 마음에 안 들었지만, 굳이 쏘아붙일 말이 없어 나는 입을 꾹 다물기로 했다.
여자라니. 소개팅이라니. 복잡 미묘한 감정을 추스르려 애를 썼지만 마음의 준비는 그리 쉽게 되지 않았다. 한재희는 내가 첫 소개팅에 긴장하고 있다고 착각을 하는 모양인데, 난 애석하게도 여자에 대한 울렁증은 없다.
물론 성격 자체가 거지 같은 덕분에 낯가림은 있다. 히키코모리로 살아왔으니까. 사람들의 주목을 받는 것도 싫고 특이 체질을 티 내는 것도 반갑지 않다. 하지만 뭐 말을 버벅거리거나 얼굴이 시뻘게지는 정도는 아니다. 게다가 게이 야동을 보는 내게, 여자는 이성적으로 설렐 일조차 없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다만 한재희가 소개해 주는 소개팅이라는 상황 자체가 내겐 거북스러웠다. 하지만 다 내가 저지른 말이 되돌아온 일이라, 이제 와 발을 뺄 순 없다. 원망 어린 시선으로 운전대를 잡은 녀석의 옆모습을 흘끔 쳐다봤다.
아직 오전이라 해가 비껴서 길게 그림자를 드리웠다. 눈이 부신지 인상을 찌푸린 채로 운전대를 잡은 녀석의 차림새는 평소와 다를 것 없었다. 정말, 지난번이랑은 정반대네. 괜히 손만 꼼지락거리고 있던 나는 스쳐 지나가는 풍경이 눈에 익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맞다. 그 옛날, 고등학교로 가던 통학로였다.
“이리로 가면 우리 학교 나오지.”
“어. 웬일이냐, 아직까지 기억을 다 하고.”
난 지독한 길치다. 같은 길도 다른 방향에서 걸으면 못 찾을 정도로 심각한 수준인데, 중학교까지 도합 6년을 다녀서 그나마 외우고 있는 몇 안 되는 길이었다. 그건 녀석 덕분이었다.
통학 버스를 탈 수 없는 날 매번 자전거 뒤에 태우고 다닌 녀석 덕분에, 대강의 지리는 기억하고 있었다. 물론, 완전히 안다는 것은 아니다. 나에겐, 이 똑같은 길도 비가 와서 어두워졌다고 못 찾고 삽질했던 어두운 과거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여하튼, 답답하다는 내 말에 녀석이 창문을 조금 열어 줬다. 먼지 때문에 하늘이 맑은 건 아니었지만, 머리칼을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은 충분히 기분이 좋았다. 자연스레 고등학교 때 생각이 났다. 아직 녀석을 좋아하는 줄 정확히 모르고 괜히 사춘기에 이래저래 방황했던, 참 어렸던 내가.
그리고 지금은 조수석에 앉아서, 별 볼일 없이 똑같이 녀석 신세를 지고 있는 내 처지 또한 처량해 한숨을 폭 내쉬었다.
“옛날엔 자전거 타고 지나갔는데 이젠 자동차네.”
“왜, 자전거 타고 싶어?”
“아니 그냥. 그때가 좋았는데 싶어서.”
“그래?”
의아한 듯 녀석이 반문했다. 대답 대신 돌아본 말에 녀석은 깜박이를 켜며 유려하게 좌회전을 했다. 멀미도 느낄 새 없이 부드럽게 커브를 도는 차체를 따라 휘익 기울던 몸이, 자연스레 팔을 붙든 녀석 덕분에 똑바로 섰다.
“난 지금이 더 좋아.”
“…왜?”
다시 직진 코스였다. 대학가 근처의 좁은 도로에 녀석이 속도를 낮추었다. 날 잡았던 손은 다시 운전대로 돌아갔다.
의미심장한 한재희의 말에 나는 자연스레 녀석을 쳐다보았다. 녀석은 날 보고 있지 않았다. 똑바로 정면을 바라보고 있는 그 무표정한 얼굴에 나는 괜히 고개를 갸웃거렸다. 궁금해하는 내 시선을 뻔히 알면서도 내 쪽을 돌아다보지 않는 한재희는 마치 날씨가 좋다는 것처럼 무덤덤하게 내 말에 대답했다.
“그땐 아무것도 할 수 없었으니까.”
가끔 이럴 때가 있다.
20년이 넘는 시간을 함께 살아왔는데도 녀석을 종잡을 수 없을 때가 있다. 손을 뻗으면 닿을 만큼 바로 옆에 있으면서도, 나는 내가 보고 있는 한재희가 가끔 한재희가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 손이 닿지 않는 곳에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이렇게 코앞까지 다가오는데도, 잡을 수 없는 것처럼, 실체가 없는 것처럼 멀게만 보인다.
그래서 나는 아무런 대응도 할 수 없었다. 툭, 하고 벨트가 풀리는 소리에 나는 눈을 깜박였다. 살짝 내 입을 스치고 간 촉감은 분명, 말라 있었다. 한재희 특유의 입술이었다.
“내려, 다 왔어.”
“어? 어….”
버드 키스를 받는 것은 실로 오랜만이라, 나는 무척이나 서투르게 대답했다.
하기야, 까먹고 있었다. 이렇게 태워 주는 날에는 녀석이 ‘보상’을 원했었으니까. 잠금이 풀린 차 문을 열고 내리는 와중에 나는 휴대폰도 좌석 앞에 떨어뜨렸다 주우려고 몸을 숙이기도 전에, 이미 긴 팔을 뻗은 한재희가 내게 휴대폰을 건넸다.
뭔가 민망했다. 문을 딛고 내려선 내가 어정쩡하게 걸음을 옮기려 하자, 녀석이 차창을 내리고서 나를 불렀다.
“한정현.”
“…어?”
한낮 볕이 꽤나 따갑게 느껴졌다.
그리고 녀석이 여며 준 목도리는 지나치게 두꺼웠다. 내가 생각한 오늘의 콘셉트에는 그다지 어울리지 않았지만, 그래도 마스크를 대신할 만큼 품이 넓고 보들보들했다. 패션보다는 실용성을 생각하는 녀석다웠다. 마스크를 대신해 눈을 빼꼼 내민 채 둘둘 말린 목도리를 쥐고 돌아보자, 녀석은 그러한 내 꼬라지가 마음에 드는지 씨익 웃고 있었다. 허리를 쭉 내밀어 보조석 창 쪽으로 얼굴을 향한 녀석의 얼굴이 봄볕을 받아서 빛이 났다.
아아, 그래서였나.
생각해 보니 녀석은 봄의 아이였다. 내가 겨울에 태어난 것과 달리, 조금 있으면 다음 달, 완연한 봄이 물들면 녀석의 생일이 온다.
그래서인지 녀석은 봄을 닮았다. 딱히 봄을 닮은 게 뭐라고 지칭할 수는 없지만. 이랬다저랬다 변덕스럽다가도, 어느 순간 꽃망울을 모두 터뜨려 버릴 정도로 따사롭다가. 또 어느 순간 뜨거워졌다 이내 사라져 버리는. 알 수 없는 봄 같은 한재희.
성격은 거지 같고 사람 마음도 몰라주고. 가끔은 감정이 메마르다 못해 사이코 같으면서도 공부도 운동도 잘해서 재수 없는 나의 첫사랑은. 나를 부르는 목소리마저도 봄볕처럼 나른해서, 나는 꼭 이름을 불린 것만으로도 녀석의 입술에 내 입을 맞추고 있는 듯한 기분에 빠졌다.
봄을 앓는 것일까. 춘곤증처럼, 혹은 환절기에 감기라도 걸린 것처럼,
나른하고, 따스하다 못해… 온몸을 시들어 버리게 한다.
“잘하고 와.”
있지, 한재희. 내가 널 정말 좋아하기는 하는 거 같은데.
…그래도 진짜. 정말 넌….
***
“…정말 씨발 놈이죠.”
“맞아, 맞아.”
씨발 놈 한재희의 말대로였다. 소개팅 상대인 신예나 씨는 착했다. 착하다 못해서, 엄청나게 말이 잘 통하는 사람이었다, 여러 의미로.
“예나 씨만큼 그 성격 아는 사람 정말 없는데.”
“크, 그렇죠? 이게 뭐 특권까지는 아니지마안.”
“특권 맞아요오. 앗, 고기.”
“제가 자를게요. 저 이런 거 완전 잘 잘라요.”
“기름 튀면 어떡해요.”
“튀면 빨면 되죠오.”
말로만 하는 소리가 아니라 정말 시원시원하게 잘 잘랐다. ‘직업이 의산데 이런 거 못 자르겠냐’는 말에 나도 모르게 웃었다. 그러고 보니 우리 집 의사도 고기는 잘 잘랐지.
나는 사이다, 그리고 예나 씨는 맥주를 따른 잔을 부딪쳤다.
“아. 진짜. 그럴 사람이 아닌데 갑자기 연락이 온 거예요. 처음엔 전화 오류인 줄 알았잖아.”
“오.”
“아시죠. 하늘이 무너지지 않고서야 연락할 사람이 아니거든요.”
“하기야. 저한테도 속옷 셔틀 시킬 때만 연락 와요.”
“셔틀 진짜 뭐야.”
예나 씨는 한재희의 대학교 후배. 즉, 같은 의사였다. 다만 흉부외과 소속은 아니고 피부과 레지던트 1년 차. 공부도 엄청 잘했던 모양인데 꽤 예쁘기까지 했다. 청순한 긴 생머리에 단정한 옷차림. 주변의 시선이 오가는 것만 해도 그녀가 충분히 이상적인 소개팅 상대였다는 것을 입증했다.
처음엔 경계했다. 녀석의 여자 친구를 목격했던 슬픈 트라우마가 날 괴롭혔지만 그 긴장은 10분도 안 가 풀렸다. 예나 씨는 엄청나게 친화력이 좋은 사람이었다. 물론, 서로 간의 긴장감과 기대감은 0에 수렴한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알거든요. 재희 선배 자기가 필요할 때 외엔 찾을 인간이 아닌데. …그래서 냉큼 오케이 했죠. 궁금했어요.”
학교 근처라 꽤 저렴하고도 맛난 곳을 안다며 그녀가 이끈 화로구이 집은 주말이지만 저녁 식사를 먹기엔 이른 시간이라 다행히 한산했다. 대강 내 이야기를 전해들은 듯, 메뉴가 괜찮겠냐고 물어 왔지만 나는 야채와 버섯 위주로 먹겠다며 동참했다. 사실 육류를 안 먹은 지도 꽤 오래라 먹고 싶기도 했고, 이미 화로구이 집의 부옇게 깔린 고기 냄새에 내가 먼저 구미가 당겼기 때문이었다.
화로 위에 노릇노릇 구워지는 살치살에 나는 소개팅이라는 사실도 잊고 몰두했다. 물론 그녀는 그런 것에 서운해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서로 말문이 터진 것은 각기 1인분씩은 해치워 배를 두둑하게 만든 뒤였다. 나는 뒤늦게 샐러드를 열심히 입 속에 차곡차곡 채웠고, 그녀 또한 고기처럼 물이 가득한 버섯을 내 앞으로 얌전히 밀어 주었다. 한 번 고기 먹는다고 뭐 잘못되진 않는다는 위로와 함께.
난 처지도 잊고 웃으며 생각했다. 한재희가 사람 볼 줄 아나 봐…. 상당히 의외였다. 이런 사람이 한재희 주변에 있다니.
게다가 한재희의 본모습을 아는 사람이.
“벽이 느껴진달까. 범접할 수 없는 아우라가 있었죠. 사적으로 누구랑 친해지는 성격도 아니고. 잘생기고 성적도 매번 톱에. 그래서 학교 내에서도 좋아한다는 사람 엄청 많았어요.”
“…고등학교 때도 그랬어요.”
“…저도 그중 한 사람이었구요.”
“…….”
“…….”
그리고 그녀는 덧붙였다.
“이런 성격인 줄은 절대 몰랐으니까.”
그녀가 생맥주 두 잔째를, 그리고 내가 샐러드 두 접시째를 비우자 본격적으로 한재희 이야기가 나왔다. 처음부터 작당한 것은 아니었다. 첫 시작부터 먹어 댔더니 약간 뻘쭘했던지라, 중간 다리인 한재희가 그나마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공통된 소재였다.
애초에 그녀도 나도 정말 연애를 하기 위해 만난 게 아니었다. 안 그래도 바쁜 레지던트 1년차가 직업도 없는 남자를 만나러 순순히 나올 리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 진솔할 수 있었다. 나의 의도는 어느 정도 왜곡된 게 있었겠지만, 그녀도 한재희를 궁금해했고, 나도 내가 모르는 한재희가 궁금했다. 자연스레 우리는 서로의 정보를 공유했다.
대학 시절의 한재희, 그리고 내가 20여년을 살며 같이 지낸 한재희. 그녀는 내가 모르는 시간과 공간 내에서 재희를 지켜본 사람이었고, 또 어느 정도인지는 몰라도 재희의 본모습에 대해 꽤나 알고 있었다. 덕분에 우리는 자연스레, 마치 취미 생활을 공유하듯 한재희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눴고, 의도치 않게 그녀의 과거까지 듣게 되었다.
“정말 좋아했어요. 진짜, 내가 이 대학에 온 이유가 저 사람이랑 함께하려고 그랬구나 생각이 들 정도로.”
“…고백했어요?”
“그럼요.”
“헉….”
난 마치 내 일처럼 가슴을 졸였다. 고백이라니!
한재희가 대학 시절 여자를 몇 명 사귀었다는 것을 모르지는 않았다. 그게 예나 씨가 아니라는 것은 알지만, 동시에 신기한 건, 그녀가 한재희를 좋아했다는 것에 아무런 감정의 동요가 느껴지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만큼 그녀는 과거야 어쨌건 지금은 일말의 감정도 없다는 것이 느껴졌고, 오히려 똑같이 한재희를 좋아했던 사람으로서 묘한 동질감이 일었다.
물론, 나 혼자만의 느낌이었지만.
“까였죠, 뭐. 사실 기대도 안 했어요.”
“개새끼네.”
“아니, 뭐. 예상은 했어요. 다들 말렸거든요. 절대 안 받아 줄 거라고.”
“…제가 알기로 여친이 없진 않았는데.”
“네. 근데 다 얼마 못 가지 않았나요? 별 소문이 다 돌았어요.”
“매달려서라도 사귀어 보겠다?”
“…잘생기긴 했잖아요.”
“뭐, 그렇죠….”
수긍했다. 그 마음 이해 안 가는 것도 아니니까. 나는 드레싱 없이 얇게 갈린 양배추를 퍽퍽 씹어 먹으며 그녀의 말에 경청했다. 묘하게 초조해진 마음이 티가 날까 봐 나는 괜히 입가를 휴지로 닦고, 그것을 꾸깃꾸깃 접어 댔다. 다행히 조금 취기가 오른 그녀는 자신의 과거를 재현해 내느라 내 반응까지는 눈치채지 못한 듯 보였다.
“근데 고백하길 잘한 게. 그때 눈치챘거든요.”
“…뭘요?”
“한재희는, 음. 사이코패스다!”
“…엥?”
“아, 말이 좀 심했구나.”
사이코패스라니. 생각지 못한 욕설에 의아해하자 그녀가 맥주를 들이켠 뒤 정정했다.
“집에서는 안 그래요? 재희 선배. 감정이 없어. 뭐랄까.”
“…공감 능력이 좀.”
“맞아요! 아, 물론. 좀 이과는 그런 애들이 많긴 하거든요. 그래서 이해는 하는데… 그 정도가 심각했어요. 아니, 사람이 고백을 하는데. 그것도 질질 울면서.”
“…예나 씨 울었어요?”
“…네.”
“…….”
“…….”
나는 고기 한 점을 그녀의 앞으로 건넸다. 익살스럽게 두 손을 모아 받은 그녀는 야무지게 고기를 씹으며 말을 이었다.
사실 타이밍도 별로였다고 했다. 그러니까 그녀가 본과 1학년 올라갔을 때다. 두 살 많은 한재희는 본과 3학년. 그것도 실습을 앞두고 한창 머리 터질 때. 난데없이 불려 나가서 얼떨떨한 한재희를 세워 두고 십 원짜리 학관 종이컵 커피를 든 예나 씨는 그 안에 무수히 눈물을 떨어뜨리면서 제 묵혀 둔 사랑을 고백했다고 한다.
물론 그녀는 작게 덧붙였다. 지금 생각하면 제 고백이 한재희가 아닌 다른 누구라도 좀 부담스럽고 무서웠을 것 같긴 하다고.
“내가 얼마나 선배가 좋고… 막, 구구절절 울면서 이야기하는데 진짜 표정 하나 바뀌지가 않는 거예요. 난감해하기는 하는데, 이게 진짜 마음에 와 닿는 난감함이 아니고. 딱 겉모습인 거 같은 느낌!”
“오…!”
“이렇게 철철 우는데 말야. 진짜 이야기를 듣고만 있는데 문득 벽을 보고 있다는 생각이 확 드는 거 있죠. 제가 그래서 코 팽 풀고 한마디 했거든요. 목소리 착 깔고.”
“……!”
“선배, 지금 제가 하는 말 하나도 이해 못했죠.”
의미심장하게 던진 예나 씨의 낮은 목소리에 나는 나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마치 내가 한재희라도 된 것처럼 손에 땀을 쥐었다. 펑펑 울던 여자가 던진 말에 한재희는 적잖이 당황했다고 한다.
“…그래서요?”
“그런 얘기 처음 듣는다고 했어요.”
“헐.”
“그리고 제 말이 맞다고 시인했죠.”
“대박.”
손가락으로 브이를 그린 그녀가 생맥주를 한 잔 더 주문했다. 난 나도 모르게 살치살 한 덩어리를 마구 씹어 삼켰다.
그래서 그 눈물 젖은 고백은 심도 있는 상담 타임으로 변모했고. 스물네 살의 한재희는 후배인 예나 씨 앞에서 공손히 무릎을 모으고 앉아서 하나씩 취조를 당했다고 한다. 사랑이 무엇이며, 연애가 무엇인지에 대해. 술 한 모금 마시지 않고.
정리하자면, 그녀의 결론은 간단했다.
한재희는 ‘사랑’을 이해하지 못한다.
“너무 신기하대요. 누가 자길 좋아하는 게.”
“걔가 그랬어요?”
“네. 좋아한다는 감정이 너무 신기하대요. …그리고 그걸 맞힌 것도 제가 처음이라고.”
받아 주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분위기에 연애를 한 게 전부였다고 했다. 그래서 연애 따위는 하지 않는다고. 좋아해서 목매다는 여자들에게 사귀어 줘 봤자, 에너지 소모고 시간 낭비 같더란다.
즉, 결론적으로 그때 당시. 스물넷까지 단 한 번도 누군가를 좋아해 본 적이 없다고 재희는 토로했다고 한다.
“아는 후배 정도로나마 남은 게 어디에요.”
“우와.”
“그렇게 들이댔거나 사귀고 헤어졌던 여자들은 아예 병풍 취급당했으니까.”
하지만 그렇게 굴어도 아무도 욕 안 했어요. 신기하죠.
말을 덧붙인 뒤 예나 씨는 새로 나온 생맥주의 거품을 빨아들였다. 나는 이야기를 들을수록 뭔가 복잡한 마음에 그저 고개만 끄덕이고 있었다.
나는 재희 여친들의 얼굴을 되새겨 봤다. 내가 절망할 만큼 하나같이 미인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키 크고 잘생긴 한재희와 그 곁의 어여쁜 여자들은 그림부터 어울렸다. 하지만 그 공대 여신이네 문과대 퀸이네, 의대 김태희네 하는 여자들이 모두 다 좋아한다며 목을 매 겨우 사귀어 주었다는 사실에 나는 오히려 뭔가 마음이 가라앉았다.
그렇게 예쁜 여자들이 들이대도 좋아하는 마음 한 번 들지 않고, 아무 감정이 없었다니. 뭐랄까 큰 벽을 다시 한 번 깨달았다고나 할까. 내가 확인하듯 물었던 그 열일곱 때도 좋아해 본 적 없다고 한 말이, 수년이 지난 본과 3학년 때까지도 유효했던 것이다.
그로부터 5년이 지난 지금도, 어쩌면 그대로일 것은 불 보듯 뻔했다.
약간 침울해진 내 표정을 살핀 예나 씨가 나에게 건배를 청했다. 탄산이 다 빠져 밍밍해진 사이다를 마시는 내게, 꼭 위로하듯 그녀는 말을 돌렸다.
“그래도 재희 선배는 대단해요. 존경스럽긴 해요. 인간적으로는 아니지만.”
“…그 정도예요?”
“괴물. 오죽하면 괴물이라고 부르겠어요. 하루에 세 시간은 자나? 제 동기가 그 심혈관 센터에 있어서 전해 듣고 있거든요. 당직 나와 있는 시간은 한숨도 안 잔다고. 센터는 물론 전국적으로 소문이 자자할 걸요. 미친놈이라고. 공부랑 일에 미친놈.”
“…….”
“임상도 미친 듯이 하고, 논문도 미친 듯이 준비하고. 교수가 말하는 거 다 암기하고 있고. 솔직히 이 바닥 인간들 다들 머리 좋기로는 아쉬울 거 없는 사람들인데 재희 선배는 차원이 달라요. 왜, 사람이 잠을 못 자면 머리도 둔해지잖아요? 그런데 새벽에 응급 환자 수술하고 30분 쪽잠 자고 아침 회진에 일어나서 줄줄줄 대답 다 하는 거 보고 있으면 누가 덤비겠어요? 그냥 인정하고 끝내지.”
“…….”
“아, 저런 놈이 흉부외과라서 다행이다. 오히려 그런 생각부터 들걸요. 아마 치프 확정에 교수까지 탄탄대로일 거예요. 그거 노리고 목숨 건 사람처럼 사니까.”
나는 입을 떡 벌렸다. 내가 알고 있는 한재희의 공부는 고등학생 때가 전부였다. 대학교 때야 의대는 다들 당연히 그렇게 공부했다고 들어 넘겼으니까 정확히 알 수 없었다. 인턴 시절 백 일을 집에 들어오지 못하고 씻지도 못하는 와중에도 내 앞에서는 힘든 내색을 보이지 않았던 녀석의 모습을 이렇게 들으니 새로웠다.
그리고 그것은 나에게 막연한 부채감으로 다가왔다.
“저는 신기했어요. 왜냐하면 내가 아는 재희 선배는 그렇게 뭐, 인간 말종 이런 건 물론 아니지만, …뭐랄까 인간 생명에 공헌한다거나 인류애. 이런 게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거든요. 아니, 누굴 좋아한다는 감정조차 이해 못 한다는 사람이. 왜 그렇게 누굴 살리는 일에 몰두할까. 차라리 돈 되는 치대나, 뭐 성형외과 그쪽으로 가면 몰라도.”
“성형외과는 좀….”
“아, 그렇죠. 뭐 여하튼. 더 어울리잖아요? 아예 냉혈한처럼. 돈 보고 성공에 야욕이 있는 의사요. 그런 것도 아니고, 진짜 흉부는…게다가 심장은 사명 의식이 있는 사람도 족족 나가떨어지는 분야인데. 잘해야 본전이고 못하면 사람 죽어 나가는 험지(險地)예요. 왜 거기서 그 고생을 하고 있는지 전 이해가 가질 않았어요.”
나는 문득, 얼마 전의 사고에 대해 떠올렸다. 결과적으로 환자는 죽었지만. 그 환자를 보고 카페에서 뛰쳐나와, 정장이 피범벅이 될 정도로 지혈하고, 그대로 병원에 호송되어 열 몇 시간을 수술에 참여했던 한재희의 일상을. 내가 목격한 그 힘겨운 모습을.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흉부외과는 녀석과 어울리지 않는 전공 분야라는 건 확실했으니까.
“그러게요. …왜 그렇게 사는 걸까요.”
“그래서 물어봤어요. 왜 그렇게 사냐고. 일에만 미쳐서. 연애도 않고.”
“……?”
“선배가 뭐라고 한 줄 아세요?”
이미 새 맥주잔을 반은 비운 그녀가 입술을 매만졌다. 오늘, 뒷담화에서 처음으로 조금 누그러진 태도였다. 마치, 안쓰러운 것처럼. 아주 나지막한 목소리로, 이 말을 덧붙이고는 말을 이었다.
…제가 차였을 때 들었던 소리랑 같은 말을 하더라구요.
“자긴 아무도 믿을 수 없대요.”
“…….”
“저도 못 믿고, 어느 누구도 못 믿는다고.”
제가 고백했던 사랑도. 그 누가 가진 호감도. 책임감도, 믿음도. …어느 맹세도 약속도. 선배라는 것도, 후배도. 어느 동료도, 신도, 종교도. 오로지 자기 자신만 믿을 수 있대요. 그래서 제 고백도 이해할 수 없고, 그 한낱 감정에 휘둘릴 수 없대요.
그래서 자기만 믿으며 살고 있는 거라고.
“반박하려고 보니까, 어느새 나도 더 이상 선배를 좋아하지 않더라구요. 할 말이 없었죠.”
“…….”
“그런 남자를 어떻게 좋아하겠어요.”
***
갓 따른 맥주 잔 위의 거품이 꼭 구름같이 탐스러워 나는 주저하지 않고 잔을 들었다. 목구멍을 헤집는 탄산의 느낌에 저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맞은편에 앉은 그녀 또한 다른 의미로 얼굴을 찌푸리고 있었다. 나는 절로 나오는 탄성을 잇새로 흘리며 대수롭지 않게 말을 건넸다.
“걱정할 게 뭐 있어요.”
“정말 괜찮겠어요?”
“기껏해야 죽기밖에 더하겠어요?”
“…정현 씨.”
꼭 아들을 혼내려는 엄마 같은 표정을 지은 그녀에게 나는 농담이라고 힘주어 말해 보았지만, 그 우려 섞인 눈빛은 좀처럼 가시질 않았다. 맥주병에 남은 맥주를 전부 그녀의 잔에 쏟아 붓고 나서야 그나마 표정이 풀렸다.
내 잔에 남은 건 기껏해야 반잔은 되려나. 나는 유리잔을 좌로 한 번, 우로 한 번 흔들어 일렁이는 노란 액체를 보고 피식 웃었다. 가볍게 마주치는 잔에 챙강, 소리가 꼭 모가지를 자르는 칼날처럼 날카로웠다. 다시 한 번 잔을 비우며 나는 속 깊게 애도했다.
내가 이 정도쯤이야 해 줄 수 있지.
…몇 년을 곱게 묵힌 마음이었는데.
***
결론적으로 녀석이 내게 권한 소개팅은 대성공이었다.
소개팅의 본래 정의와 조금 어긋났을지 모르겠지만, 녀석의 무딘 눈치에도 우리는 얼핏 죽이 잘 맞을 것 같았나 보다. 물론 그건 예나 씨의 위력이었다. 의사라는 직업이 주는 선입견을 완전히 깨부순 그녀는 매우 털털하고 속 시원하게 주눅 든 내 속을 긁어 주었다.
외로움을 딱히 새삼스레 느껴 본 적이 없었지만, 난 그제야 내 자신이 참으로 외로웠다는 걸 느꼈다.
누구는 하고 싶어도 못 한다는 백수의 삶. 딱히 돈 쓰고 싶은 것도 없고, 누군가 재촉하지도 않는 삶에서 먹는 것과 하는 것만 조금 제약이 있는 복 받은 삶이라 스스로를 위로해 왔었는데, 생각보다는 괴로웠던 모양이다.
평소에 사람을 만날 기회가 자주 없던 난 오랜만에 길게 나눈 대화에 목이 다 칼칼하게 아플 정도였다. 눈치껏 물을 마셨지만, 이미 테이블 위의 맥주병은 다섯 손가락을 넘어서고 있었다.
술의 위력은 실로 대단하다. 이렇게 누구와 단번에 친해질 수 있다니!
변명이 아니고 정말로, 가끔 와인을 한두 잔 마시기는 했다. 혈액 순환을 돕는 건 사실이었으니까. 혼자 잠드는 밤, 유난히 바깥의 바람 소리가 셀 때. 깊이 잠들고 싶어서 몇 번 마시다가 또 피 검사 수치로 들통이 나서 멀리한 지 오래였다.
하지만 오늘의 맥주는 그 와인 여러 잔보다 오히려 더 달았다. 아마 혼자 마신 청승이 가셔서일 것이다. 물론, 그녀가 좋은 상대였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예나 씨의 두 뺨은 이미 발그레하게 달아오른 지 오래였다. 취한 것 아니냐고 묻자 이 상태로 길게 간다며 걱정 말라 했지만, 확실히 술김인지 언행이 거침이 없어졌다. 덕분에 나는 오늘 처음 만난 그녀의 일대기를 감상할 수 있었다. 한재희 이외에도 그녀가 훑고 지나갔던 연인들에게 나는 덩달아 욕을 하기도 하고, 예나 씨와 같이 시무룩해지기도 하며 적절히 감정을 배설해 냈다.
실로 오랜만에 만나는 이야기 상대였다. 애석하게도 한재희는 나에겐 어느 순간부터 이야기 상대로는 그다지 적절하지 못한 존재가 되어 버렸으니까. 물론 예나 씨에게 내가 품은 한재희에 대한 마음을 토로한 건 아니었지만, 적어도 녀석을 ‘좋아해 본 적 있는’, 동시에 ‘걷어 차여 본’ 동지로서의 공감이 무언가 유대감을 이뤘다.
게다가 어느 시점 이후로 한재희는 등장인물로도 나오지 않았다. 친해지기 위해 반찬 역할을 해 주었던 녀석의 화제는 소각되었고, 어느 시점 이후 우리는 각자의 인생을 넋두리하기에도 바빴다. 이제 내 차례였다.
“근데 정현 씨이, 눈 저엉말 크다.”
“아, 그래요?”
“엄청 예쁘장하게 생겼어요오. 앗, 남자한테 이런 말 기분 나쁘려나.”
“아뇨오. 칭찬이잖아요. 고마워요오.”
“인기 엄청 많았을 거 같아요. 완전 미소년 스타일!”
“저언혀 안 그랬어요.”
“거짓말!”
“그냥 눈 큰 해골? 눈만 크고 뭐. 키도 작고. 깡말랐고.”
“에이. 못 믿겠어. 어렸을 때 사진 없어요? 지금 이렇게 눈이 크면 어렸을 땐 얼마나 컸을까.”
“어, 음….”
“……?”
“사실 제가 사진, 을 좀 싫어해요.”
“아….”
“애기 때는 계속 입원해 있었고. 수시로 좋아졌다가 갑자기 나빠졌다가. 뭐랄까. 대중없었어요. 물론 저 안 들리게 말하려고 애는 썼겠지만. 그래도 제 얘긴데 모를 리가 없잖아요? 사람들이 안쓰럽게 보는 시선만 봐도 눈치를 채는데. 맨날 하는 소리는 같은데 얼굴이 말해 주는 거예요. 다 괜찮다고 하는데 엄마는 울고 있고. 누구는 혀를 차고.”
“…….”
“그래서 그런가? 어릴 때부터 늘, 뭔가. 유념해 두는 거 있죠? 그냥 찍을 때도 있는데 꼭 굳이. 다른 사진도 찍으면서 한 장씩. 꼭, 뭐랄까. …준비해 두는 것처럼. 그래서 찍히는 것도 싫어하고 그래서….”
“…죄송해요.”
“아니에요, 아니에요. 그냥, 저도 말하고 싶었어요. 예나 씨가 편했나 보다. 이런 이야기, 걔한텐 못 하거든요.”
“오 이걸로 막 재희 선배 놀려도 돼요?”
“간에 기별이나 가겠어요?”
화로구이 집 사장님의 눈빛이 매섭다 싶어 휴대폰을 보니 시간이 훅 지나 있었다. 어느새 밖은 어두컴컴했다.
학기 초의 커피 집은 대학생들로 붐비고 있었다. 겨우 난 구석 자리에서 각각 따뜻한 차와 아메리카노를 마시면서 우리는 이야기를 마저 나눴다. 음료가 나오기 전 예나 씨는 마스카라가 번진 자국을 고쳤고, 나는 오랜만에 신어 발이 아픈 구두를 잠시 벗었다.
대학생들의 눈에도 우리는 친구로 보였을 것이다. 정확했다.
“근데 정말, 환자들은 보통…. 음. 일반화는 아니지만. 가까이서 봐도 정현 씨는 되게 피부 상태가 좋아 보여요.”
“그래요? 그럼 다행이네요. 다크 서클 장난 아닌데.”
“피부도 곱고. 멍은 항응고제 때문에 그렇죠?”
“네. 그것도 있고 원래 살성이 좀 그렇다고 들었어요.”
재킷을 입고 있어서 뭐 속살이 보이는 편은 아니었지만, 나는 곧잘 링거를 맞곤 하는 손등이나 팔 부위의 살을 그녀에게 보여 주었다. 유심히 내 살을 내려다보던 예나 씨가 마치 무엇인가 기억난 듯이 작게 아, 하고 탄성을 냈다.
“정현 씨. 음, 그러니까. 제가 피부과잖아요.”
“네.”
“사실, 음. 선배가 제 전공 정해지고 난 다음에 몇 번 뜬금없이 물어본 게 있었어요.”
“……?”
“흉터 수술요.”
“아….”
나도 모르게 작게 주먹이 쥐였다. 버릇처럼 가슴 언저리를 쥐는 버릇을 겨우 참은 결과였다. 따뜻한 차를 마시는데도 양쪽의 뺨에 열기가 확 오르는 게 느껴졌다. 마치 그것이 맥주라도 되는 것처럼.
“여기서 제가 뭐 상태를 보여 달라! 이런 변태는 아니지만.”
“아하하.”
“그, 원래 가슴 쪽 피부는 장력이 기본적으로 작용이 돼서요. 숨을 쉬면서 자연스레 흉골이 팽창되다 보니까. 살이 계속 양쪽으로 잡아 당겨지는 거거든요. 보통 흉터 재건은 주변의 살을 끌어서 하는 경우거든요. 그래서….”
“고마워요. 신경 써 줘서.”
“그래도 과학은 발전하니까요.”
“…그러게요.”
나는 그녀와 나누게 된 동지애에 감사하며, 또한 그 이면의 얄팍한 질투를 어리광을 부리는 것으로 소화했다. 그리고 그녀는 퍽 친절한 사람으로, 다정함에 굶주렸던 나에게 상냥한 말벗이 되어 주었다.
여러모로 한재희에게 배알이 꼴렸다. 넌 여기까지 나를 파악하고 있구나 싶어서.
하지만 무제한 어리광을 부릴 순 없는 법이다. 일어섰을 때는 이미 열 시가 다 되어 가는 시각이었다.
밖으로 나서자 밤공기가 유독 찼다. 나는 녀석이 건넸던 머플러를 더욱 둘둘 말았다. 두 눈만 쏙 내놓은 내 꼬락서니를 보고 예나 씨는 웃었다. 쑥스러웠지만 머플러를 풀 생각은 하지 못했다. 그만큼 추운 날씨였다. 녀석의 말을 듣길 잘했다 싶을 정도로.
알딸딸하게 취했다 생각한 것도 착각인가 싶을 만큼 한기가 스며들어 취기 따윈 가신 지 오래였다.
거리의 네온사인이 온통 하늘의 별과 마찬가지로 물을 먹은 것처럼 희뿌옇게 번쩍였다. 앞이 흐릿해 눈을 껌뻑이는데 이미 택시 한 대가 우리 앞에 알아서 섰다. 물을 것도 없이 예나 씨가 먼저 뒷좌석으로 들어갔고, 나도 나란히 탔다.
목동 쪽에 산다는 그녀는 기사님에게 행선지를 댔다. 무려 우리 집 번지수였다. 경악하는 내 표정에 예나 씨는 어색하게 웃었다.
“오해하지 마요. 나 스토커 아니니까.”
“…못 살아.”
“나 확인 메시지도 보내야 하는데. 제대로 잘 완수했다고 증언해 주셔야 해요?”
“원래 이런 거 제가 바래다 드려야 하는데.”
“어휴, 목동 갔다 다시 신촌 오게요? 기름 아까워. 환경을 생각하자구요.”
나는 쓴웃음을 지울 수 없었다. 안 봐도 뻔했다. 대체 어디까지 얘기를 해 두었는지 모르겠지만 예나 씨는 한재희가 부여한 소개팅 미션을 수행했고, 택시는 낮에 내가 왔던 길을 고스란히 되돌아갔다.
택시 안에서 우리는 연락처를 주고받았다. 신예나. 저장하는 이름에 정이 없다는 타박을 들었지만, 내 휴대폰에 고작해야 열 몇 개의 이름들은 다 그 모양이었다. 한재희마저도 한재희였으니까. 그녀는 그 저장된 이름을 보고 나서야 납득한 듯 보였다.
“우리 친구 되는 거죠?”
“그럼요.”
“가끔 만나서 대화 상대는 해 드릴 수 있어요. 전 그래도 누구보다 인간미는 있으니까.”
나는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녀는 내도록 옳은 말만 했다.
급한 커브 길에 몸이 휘청거려 조금 기분이 나빠졌다. 속이 울렁거렸다. 다행히도 차내가 어두워 예나 씨는 그런 내 표정까진 발견하지 못한 듯 보였다. 말을 꺼내는 목소리는 조금 차분했지만.
“조금, 걱정하는 거 같았어요.”
“…네?”
“요새, 많이 우울해하는 거 같다고. 그런데 네가 알다시피 자기는 공감 능력이 전무하니까 네가 좀 만나 달라고.”
그러니까, 소개팅을 빙자한 카운슬링 아냐.
“자기 이야기 안 하는 사람이 난데없이 부탁이라고 하는 소리가 생뚱맞았고 그래서. 사실 호기심에 나왔어요. 기분 나쁘셨으면 미안해요.”
“아니에요. 예나 씨 정말 좋은 분인데, 괜히 시간 낭비를 하셨을까 봐….”
“아뇨! 절대요. 저야말로 대나무 숲 만난 기분이었어요.”
아! 개운하다. 하며 진심으로 속이 시원한 듯 작게 기지개를 펴는 그녀에 나도 설핏 웃었다. 덜컹이는 차체에 나는 몸을 깊숙이 기대며 차창에 머리를 기댔다. 쉴 새 없이 조잘거리는 그녀의 목소리가 그래도 귀찮게 들리지는 않았다.
그저 넌지시 느꼈다. 내가 어색해 할까 봐 많이 고생해 주고 있구나, 하고.
“제 친한 동기가 공부 잘해서 정신과에 갔어요.”
“…기사님이 들으면 오해하시겠다.”
“여튼 그래서 사알짝 물어봤거든요. 물론 누구 얘기라는 거 안 하고.”
“오.”
“사이코패스는 아닐 거고, 음. 사랑받지 못한 경우가 크대요.”
“…….”
“부모에게나, 뭐. 가정환경이나. …방어 기제라나 뭐라나.”
오던 길이 짧았던 것처럼 돌아오는 길도 턱없이 짧았다. 주어 하나 없는 대화가 무리 없이 이어질 정도로. 내가 대답할 말을 고르기도 전에 택시는 집 앞에 도착해 버렸다.
그리고 대답은 애초에 바라지도 않은 것처럼, 예나 씨는 지체 없이 손을 흔들었다. 조심히 들어가라는 말과 함께.
“힘내세요, 정현 씨.”
“오늘 고마웠어요.”
“재희 선배가 지랄하면 저한테 이르세요.”
“네에.”
여전히 명랑한 예나 씨의 웃음소리가 닫히는 차 문 사이로 흐트러졌다. 멀어져 가는 택시의 번호판을 보고 메시지를 보내자 간략한 단문 몇 번이 오갔다.
불을 켠 집 안엔 당연히 아무도 없었다. 나는 마치 허물을 벗듯 옷가지를 하나하나 벗어 던지고 바로 화장실에 들어가 대강 샤워를 마쳤다. 몸이 노곤해졌다. 몸속에 남아 있는 알코올의 힘을 빌려 빨리 자고 싶었다.
***
분명 즐거웠음에도 불구하고, 집에 돌아오니 완전 녹초가 되어 버렸다. 두툼한 샤워 가운을 입고서 나는 계단을 겨우 올랐다. 그리고 내 방으로 올라가려다 문득, 건너편 방을 바라봤다.
물론 재희의 방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주인을 기다리는 빈 침대는 선득하기만 했다. 하지만 나는 과감히 녀석의 침구 속으로 쏙 들어갔다. 추워서 턱이 조금 떨렸지만 나는 그 푸른 이불 속에 몸을 폭 넣고 기다렸다. 숨을 쉴 때마다 한재희 특유의 체향이 폐 속에 가득 들이찼다.
그리고서 나는 내 지난 열 몇 해를 넉넉잡아 헤아려 봤다.
열일곱의 한재희부터, 오늘 낮의 한재희까지. 수많은 장면과 장면들이 스쳤고 그 속의 한재희는 여러 표정을 짓고 있었다. 조금은 미화되었을 수도 있고 조금은 왜곡되었을 수도 있는 여러 한재희들이 한 번씩 내 명치를 때리고 가는 것처럼 가슴에 묵직한 통증이 들었다.
이런 게 후폭풍인가.
한 번도 이뤄질 거라 기대한 적도 없고, 고백할 거라 결심한 적도 없는 마음이었지만.
“사랑을 받지 못해서라니….”
내가 최선을 다해 한재희를 좋아했던 시간들이, 결국 본인에겐 아무것도 아닌 사소함이었다는 것을 확인 사살당해 버리고 말았다. 친절한 예나 씨로 인해서.
“아무도, 믿지 못해 왔다니….”
내가 널. …얼마나 사랑해 줬는데. 내가 얼마나 널 보살펴 줬는데.
물론 제아무리 최선을 다해도 친부모의 사랑과 비견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나로선 최선이었다. 싫어하는 당근을 먹어 준 것도, 울 때마다 방에 가서 달래 주고, 그 보상과 같은 뽀뽀를 한 것도 전부. 유치할지 몰라도, 모두 재희를 향한 애정의 발현이었다.
하지만 그 모두가, 한재희에겐 아무것도 아니었던 걸까.
나를 좋아하고 사랑해 주진 않더라도, 그 사랑을 받아 주고는 있는 줄 알았는데.
***
이대로 잠들기는 틀렸구나 싶었다. 나는 후들거리는 다리를 이끌고 다시 1층으로 내려가 재킷 속에 들어 있던 내 휴대폰을 꺼내 쥐었다. 그리고 종종걸음으로 다시 녀석의 방 침구 속에 폭 들어갔다. 아까만큼 춥지는 않았다. 잘 들어갔다는 예나 씨의 메시지를 휙 무시하고, 나는 냅다 번호를 눌렀다.
당연하게 뜨는 석 자는, 녀석의 이름이었다.
“받아라, 한재희.”
하지만 받지 않는다.
“받으라고.”
세 번은, 아니 다섯 번은. 늘 그랬다. 병원에서는 늘 세 번은 기본이고, 열 번을 해도 받기 어려운 걸 안다. 이럴 때면 포기하고 메시지를 남겨 두는 나였지만, 오늘 밤만은 그럴 수가 없었다.
“누가 이기나 해 보자.”
정말, 누가 이기나. …해 볼 거야.
***
44번째.
“받아 봐….”
받지 않을 거라는 건 알고 있다. 그래. 그렇게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의사 선생님이 되겠다 이거지.
…48번째.
“…어디 한 번 사랑 받아 보라구….”
나는 이렇게 죽어 가는데….
휴대폰이 배터리가 없이 끔뻑거렸다. 내 체력도 함께 끔뻑거렸다. 눈꺼풀이 무겁게 끔뻑인다. 내 체온으로 데워진 이불이 따스하다 못해 나른함이 밀려왔다.
56번째. 내 뇌가 기억한 마지막 통화 시도였다. 깜박이는 한재희의 이름이 덧없게 검은 액정 속으로 풍덩, 또 그렇게 빠져들었다.
***
분명, 술에 취했다. 그래서 깊이 잠들었고 나는 꿈을 꾸었다.
오랜만이었다. 장례식 꿈은.
날이 날이니만큼 기왕이면 야한 꿈이었으면 좋았을 텐데. 애석하게도 나는 내 의지와 상관없이 그 곡소리 가득한 현장을 내려다볼 수밖에 없었다.
이번엔 청승맞게도 비까지 우중충하게 내리고 있었다. 눈은 아니고 비가 내리는 것을 보니 적어도 겨울은 아닌 듯 보였다. 태어나기는 한겨울에 태어났지만, 선택이 가능하다면 가는 날짜는 좀 온화한 계절이면 좋겠다 싶었다. 엄마도 아빠도 속상할 텐데, 추울 때보다 따스할 때면 걱정을 좀 덜 할까 싶어서.
그래, 녀석의 생일 정도인 4월 즈음이 딱 좋은데….
아, 생각하는 틈에 어느새 시야에 한재희가 보이기 시작했다. 늘 그랬듯 녀석은 내 영정을 들고 있었다.
문득 궁금해졌다. 저 사진은 대체 언제 찍은 걸까. 설마 고등학교 졸업 사진은 아니겠지. 민증 사진이려나. 하지만 저렇게 해맑게 웃으며 증명사진을 찍을 리가 없는데. 아무리 기억을 되짚어 봐도 그런 사진을 찍은 적이 없다. 워낙 사진을 싫어해서 최근 몇 년은 찍은 적도 없는데. 대체 사진 속의 내 얼굴이 언제쯤인지를 알 수가 없어서 나는 그 사진을 좀 더 들여다보려고 했다. 그 순간.
의도치 않게, 녀석의 어깨에 기대어 울고 있는 긴 생머리 여자를 발견했다.
여태껏 그렇게 궁금해 했어도, 늘 꿈속에선 볼 수 없었던 낯선 여자의 모습이었다. 나는 고개를 돌리려고도, 혹은 눈을 감으려고도 했지만 꿈속에서 카메라 역할을 하는 나의 시야는 내 의지와 상관없이 그녀의 얼굴을 또렷하게 비춰 버렸다.
나는 숨을 잠시 멈췄다.
세상에. 모르는 사람이 아니었다. 낯이 익었다.
…예나 씨였다.
***
정말, 친절하고 착한 그녀는.
예나 씨는 내 죽음에 무척이나 슬퍼하고 있었다. 꼭 누가 보면 내 연인이나 되는 것처럼. 액자를 든 재희의 반 발자국 뒤를 따르며 거의 허리를 숙이며 울고 있었다. 그러다 휘청인 그녀가 겨우 재희의 팔뚝을 붙들고 몸을 추슬렀다. 내리는 비를 아랑곳 않고 맞고 있는 녀석의 머리 위로 그녀가 다정하게도 우산을 씌워 주었다.
자연스럽게 녀석이 안고 있던, 속도 없게 헤헤거리고 있는 내 액자 위도 함께 가려 주었다.
…정말 난 나쁜 새끼였다.
그녀는 참으로 다정한 사람이었다. 아마도 내가 죽으면 정말 그녀는 저렇게 울 것이고, 한재희를 위로할 수 있을 것이다. 날 위해 진심으로 울어 주는 그녀가 참 좋은 사람이라서 고마웠고, 이제는 나도 없이, 혼자 처량 맞게 비를 맞고 있는 한재희의 옆에 이런 사람이 있다는 게 다행이라고 분명 난 생각했다.
아니, 생각해야 했다.
마치 빛이 비치면 자연스레 그림자가 생기듯, 그녀에 대한 고마움이 클수록 동시에 질투마저도 모락모락 피어났다.
오늘 하루 종일 내가 마주하지 않으려고 무던히도 애썼던 청승이었다.
만약에, 언젠가. 저 장면이 현실이 된다고 하면 정말 외톨이가 되어 버릴 녀석의 곁에 남아 있을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에 안도해야 했다. 분명, 나보다 좋은, 건강한 사람이기에 안심이 됐고, 무척이나 따스하고 밝아서 외로운 녀석의 마음을 녹일 수 있을 것 같았다. 감정 표현엔 익숙지 않은 녀석이 제 상처도 솔직하게 털어놓을 만한 누군가여서 다행이었다. 나 때문에 고생했던 삼십 년 가까이를, 그래도 보상받을 수 있지 않을까. 정말, 사랑받을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런데….
…근데 싫어.
내려다보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나까지 비를 맞는 것처럼 주변에 물기가 어리기 시작했다. 손등에 후두둑 뜨거운 비가 흐드러졌다. 아, 깨달았다. 꿈속의 내가 울고 있었다.
신기한 일이다. 귀신도 울 수 있는 건가.
여태껏 수백 번 되풀이해서 꿨던 꿈인데도, 이렇게 무언가 감정의 동요가 느껴졌던 적은 없었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마음이 고요해지지 않았다. 마치 원한 맺힌 귀신처럼 엉엉 소리 내어 울부짖고 싶어졌다. 귀곡성이라고 하던가. 뭐, 그런 것처럼.
싫다.
재희야 나, 그거 싫어. 날 액자 속에 넣어 두지 마. 그렇게 못 박아 두지 마.
싫어. 무서워. 외로워. 계속 있고 싶어. 같이 있고 싶어. 응?
고백하지 않을게. 이대로, 이대로 그냥 친구로 남아도 좋아. 네가 결혼하면, 떠나 버리면 환자로라도 남을 수 있잖아.
그냥 참을게. 이대로만, 이대로만 내 곁에…. 영원히, 아니. 영원은 못 되어도, 조금만 더. 응?
그러니까…. 그러니까, 나….
죽기, 싫….
***
“…현.”
“싫ㅇ….”
컥, 하고 숨이 막혔다. 숨이 막히는 느낌에 괴로워 고개를 흔드니, 능숙하게 고개를 뒤로 젖히고 내 기도를 확보하는 손길이 느껴졌다. 물론, 그 온기보다 먼저 닿은 것은 날 부르는 목소리였다.
“한정현!!”
뭐야, 부르는 목소리가 왜 이렇게 매정해. 그립지도 않냐, 이제 죽어서 볼 수도 없는데.
거칠어졌던 호흡이 겨우 진정되고 나니, 정신이 든 이곳이 내 방이 아닌 녀석의 방 침대 위라는 걸 깨달았다. 입고 있던 샤워 가운이 흐트러진 채로, 내 몸을 붙들고 있는 누군가가 있다는 걸.
난 더듬더듬 내 팔뚝을 쥔 녀석의 체온을 확인했다. 그리고 안심했다.
…아, 꿈이었구나.
“이 미친 새끼가….”
녀석에게 바람 냄새가 났다. 짐승이 울 듯 몰아치던 그 바람 냄새가.
같이 자위할 때에도 이렇게 헐떡이지 않았는데. 막 숨을 몰아쉬고 있다. 뛰어온 걸까.
“너… 그러고 온 거야?”
이른 봄날의 밤, 아직은 겨울마냥 춥다. 녀석이 건넨 머플러를 꽁꽁 동여매도 추웠던 귀갓길을 기억하자면 그랬다. 너는 뭘 입고 갔었지? 정확히 기억은 안 나도 이 모양새는 아니었다.
지금 날 붙들고 있는 녀석은 지금 수술실에 들어갈 때 맨몸 위에 있는 퍼런 수술복을 입고 있었으니까.
“걱정했어?”
“…너.”
“걱정했냐고.”
“뭐하는 거야. 이 정신 나간 새끼야.”
“한재희….”
“부재중 전화를 그렇게 해 놓고 전화를 안 받으면 내가…!”
“재희야아.”
나는 그 예뻤던, 예나 씨의 말투를 흉내 냈다. 모음을 길게 끄는 말투로.
꼭 이렇게 부르니까, 어린 시절 ‘희’ 발음이 제대로 안 되어 흘려 불렀던 때가 생각이 난다. 내가 너를 무척이나 아끼고 달래던 시절이. 아무리 울고 화가 나도, 내가 입만 맞추면 화를 사르르 녹이고, 예쁘게 너도 웃어 주었던 그 어린 시절이.
너는 싫다고 했지만, 나는 …조금 그립네.
“너… 취했냐?”
“푸흐흐.”
“진짜 씨발….”
“놀랐어?”
“…….”
“그러니까 애초에 전화를 받든가, 씨발 놈아.”
빈정거리는 말에도 반응 없이 무표정한 녀석의 얼굴에, 나는 이 새끼 꽤 빡쳤구나 직감했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아무렇지 않았다. 난 꽤 대담해졌다. 정말 술에 취해서였을까. 조금은 술 핑계를 대어 보지만 솔직한 마음은 이거였다.
네가 왜 화를 내. 내가 얼마나 널 찾았는데. 이제 와 한다는 소리가 고작 그거야?
감히, 내가 너를 어떻게 사랑해 왔는데. 그거 하나 받지도 못한 주제에.
…하지만 어쩔 수 없다. 굳어 버린 재희의 뺨에 내 두 손을 감고서 나는 배시시 웃었다.
늘 나는 약자니까. 몸도 마음도.
“잘했어….”
“저리 치워.”
“상을 줘야지.”
“……!”
정말, 금방이라도 욕을 중얼거릴 것 같던 녀석의 입술을 내 입 안으로 모두 삼켜 버렸다.
엉거주춤 서 있던 녀석이 그대로 내 위로 스러졌다. 감동스럽게도, 그 와중에 내 상체를 깔아뭉개지 않고 두 팔로 버틴 팔에 나는 몸을 감았다. 내 나름대로의 어리광이었다.
나는 최대한 녀석의 흉내를 내어, 갈라진 입술에 내 타액을 축이고, 그 부드러운 살점 속으로 혀를 집어넣었다. 고른 치아를 서툴게 훑다가 움츠리고 있던 재희의 혀에 닿았다. 서로의 점막이 닿은 촉감에 절로 내가 흐느끼자, 자연스레 녀석이 내 허리를 감았다. 샤워 가운 사이로 들어오는 녀석의 손이 찼다.
네가 차갑다니, 모르는 소리, 아니. 말도 안 되는 소리지. 네가 얼마나 따스한 사람인데.
“하아….”
녀석의 숨결과 체향이 나른하게 코끝을 간질였다. 나는 눈을 깜박였다. 물을 잔뜩 먹은 속눈썹이 무겁게 느껴졌다. 불 하나 켜지지 않은 실내는 어두웠다. 바깥에서 새어 들어오는 불빛에만 의존하는 흐릿한 시야 속에서 유일하게 날 내려다보는 녀석의 눈빛만이 또렷했다.
그리고, 내가 마구 어질러 놓은 너의 입술도….
재희야.
“하자.”
내가 이토록. 무척이나, 무척이나 너를….
“으응, 재희야아.”
힘껏 사랑해 줄게, 어디 한 번 받아 봐.
“…키스.”
재희는 무표정한 그대로 나를 한참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내 의중을 가늠하려는 것처럼. 물론 나는 실실 웃고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무서웠다. 싫다고, 꺼지라고. …혹은 더럽다고 녀석이 나를 밀어낼까 봐.
하지만 술의 힘은 대단했다. 아니, 술의 힘을 빌려 머리를 들이민 내 이기심이, 그 오기가 대단하다고 말해야 하겠지. 이기적인 나를 두고 화를 내는 녀석을 애써 무시하고 나는 결국 녀석의 목덜미를 먼저 감쌌다. 수없이 중얼거리면서.
밀어내지 마, 밀어내지 마….
“키스… 해 줘.”
과연 내가 술을 마시지 않았다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까. 글쎄, 구차하게 변명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정확한 시각은 모르겠지만 아마도 깊은 밤. 내 부재중 수십 통을 보고서 수술복도 갈아입지 못한 채로 미친 듯이 뛰어나와 준 너를 마주하고서 결심한 게 있다면.
이대로, 이대로 관에 묻을 순 없다는 거다. …내 몸도 마음도.
“읍…!”
거칠었다. 마주한 내 입술을 파고든 녀석의 입맞춤은 종전에 내가 시도했던 키스와는 차원이 달랐다. 고개를 틀고 내 혀뿌리까지 잡아챌 것처럼 파고드는 재희의 혀에 나는 숨을 쉴 수 없었다. 하지만, 좋았다. 이렇게 숨이 막히는 건 얼마든지 반갑다.
“으응, 아… 재희야.”
턱 끝, 그리고 귓불을 따라 내 목덜미로 파고드는 뜨거운 입술에 나는 너절하게 녀석의 이름을 흐느꼈다. 약하게 깨물어 대는 애무에 나는 절로 허리를 들썩이며 녀석의 옷깃을 쥐었다. 샤워 가운은 이미 팔에만 걸려 있게 된 지 오래, 부끄러움도 모르고 헐벗은 나와 달리 녀석의 수술복은 온전했다.
조금 심술이 나서, 나는 내 오른쪽 쇄골을 깨물고 있던 녀석의 고개를 들게끔 했다.
넌, 언젠가의 나를 이렇게 마주하고 싶다고 했지? 나는 싫은데.
“…밉지?”
…예나 씨한테, 물어봤다면서. 내 흉터.
평소 같았으면 목소리를 내어 물어봤겠지만, 꿈의 여파가 가시지 않은 탓일까. 그녀의 이름을 입에 올리기 버거워 나는 멋쩍게 웃으며 내 흉터를 아래위로 쓰다듬었다. 길게 난 칼자국. 현대 과학으로는 없애지도 못한다는 그 수술 자국을 난 어설프게나마 손으로 가렸다. 손가락 사이로 삐져나온 것까지는, 어쩔 수 없었지만.
재희의 표정은 키스하기 전에도, 후에도. 또 내 흉터를 마주 본 지금에도 변화가 없었다. 다만 서툴게 가리고 있던 내 손가락을 그 큰 손으로 쥐어 내리게 하고는, 살며시 입술을 갖다 대었다.
“읏…. 아!”
“얼마나 더 말해 줄까.”
종전까지 잇자국을 내던 것과 달리, 강아지가 핥는 것처럼 부드럽게 상처를 따라 아래위로 핥아 올리고 내리는 녀석의 애무에, 나는 나도 모르게 눈물이 핑 고였다.
“안 미워.”
“아… 아읏.”
“안 밉다니까.”
귀를 내 가슴에 대고서, 마치 내 귀가 아닌 그 흉터에 속삭이듯 왼 녀석의 그 말에, 나는 내 한쪽 다리를 녀석의 허리에 감았다. 옷 너머로도 느껴지는 뜨거운 녀석의 체온에 흐느끼며. 보챘다. 빨리, 빨리 만져 달라고.
모르겠다. 왜 눈물이 나는 건지. 정확히 어디가 아픈 건지. 심장인지, 어디 붙어 있는지 모를 내 마음인지. 녀석의 입술이 닿는 곳곳마다 멍든 마음처럼 느껴졌다. 더 만져 달라고, 핥아 달라고 응석을 부리는 것처럼 군데군데가 화끈거리고, 달아올랐다.
이윽고 내 다리 사이를 파고든 녀석의 호흡에 나는 내 이성 따윈 놓아 버렸다.
사랑을 못 받아서 그런다면. 어디 한 번 실컷 받아 보라고 분명 호언장담을 했는데. 오히려 내가 사랑받고 있는 거 같아.
염치없게도 나는, 녀석이 내 것을 빨아들일 때마다 허리를 들썩이며 더 해 달라고 졸랐다. 눅진한 땀이 서려 있는 재희의 목덜미를 쓸어 올렸다. 그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쥐었다 펴며, 나는 녀석의 입 안에서 구르는 내 성기가 그랬듯, 신음을 흘렸다.
“하아, 응… 아! 재, 희야아….”
입으로는 내 페니스를 빨아들이고서, 한쪽 손으로는 고환을 문질러 주는 녀석의 행위에 난 완전히 내 자신을 놓았다.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난 내 다리 사이를 헤집는 녀석의 숨결에 반응하고 있었다. 자꾸만 들썩이는 내 허벅지를 잡아 누른 재희의 손은 언제 차가웠냐는 듯 뜨거웠다. 손만이 아니었다. 와 닿는 녀석의 아랫도리 또한 지나치게 뜨겁게 느껴졌다. 나는 안달이 났다.
안 되는데, 내가 사랑해 줘야 하는데. 내가 너를….
“씨발….”
“하아, 그만… 읏.”
“저번에 해서 그런가.”
“으응….”
내 아랫도리 사정과는 물론 상관없는 일이었다.
벌게진 입술로 고개를 든 재희에 나는 배시시 웃었다. 녀석이 공을 들여 애무해 주고 빨아 줬지만 내 성기는 소식이 없었다. 그저 반쯤 커졌을까. 심술궂게 내 선단을 놀리는 엄지손가락에 나는 입술을 깨물고 시트를 쥐었다.
“술… 먹어서 그런, 아…읏!”
“얼마나 마셨어.”
“으응, 읏, 아! 살, 사알…!!”
미간을 찌푸린 채 녀석은 다시 다리 사이를 파고들었다. 내 성기가 발기되지 않는 게 마음에 들지 않은 듯했다. 게다가 손으로는 유두를 쥐고, 비틀었다. 내 허리가 요동치자 아예 빨고 있던 성기를 뱉어 내고는, 이제는 젖꼭지를 빨아 대기 시작했다. 단 한 번도 누군가에게 빨려 본 적 없는 부위가 녀석의 입안으로 빨려들어 가자, 나는 아예 신음을 넘어선 비명을 지를 수밖에 없었다. 아랫배에 힘이 쏠렸다. 나도 모르게 내 손을 내 다리 사이로 가져갈 수밖에 없었지만, 이미 자기 것인 양 쥐고 흔들고 있는 녀석의 커다란 손등이 잡힐 뿐이었다.
“색깔이, 똑같아졌어.”
“아!!”
마치 아이가 젖을 빨 듯 내 유두를 핥고 깨물던 녀석이 결국엔 입을 뗐다. 녀석과 내 손이 겹쳐 쥔 내 성기는 여전히 소식이 없었다. 물론 서지 않는다고 해서 느껴지지 않는 건 아니었다. 미약하게 쿠퍼액이나마 흐르기 시작한 성기가 우리 둘의 손바닥과 마찰해 질척거리는 소리를 냈다. 물론 젖이 나올 리 없는 내 유두도 녀석이 물고 빠는 행위로 인해 붉어지기 시작했다. 둘 다 짙은 분홍빛으로 빛나는 것을 지켜본 녀석이, 그보다 더 붉은 혀를 내밀어 다시금 빨아들이려 했지만, 내가 먼저 다른 손으로 그 앞을 막았다.
“나도 해 볼래.”
“…뭐?”
“나도, 해 보고 싶었어. 해 줄래.”
녀석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나는 녀석의 바지춤에 손을 댔다. 천 너머로 느껴지는 두툼하고 뜨거운 것을 어루만지자 재희는 짧게 숨을 몰아쉬었다. 성기를 밖으로 꺼내자 튕겨 오르듯 바로 녀석의 배꼽에 달라붙었다. 어루만지는 손바닥에 닿아 오는 열감은 뜨겁다 못해 델 같았다. 재희는 말없이 내 목덜미를 그러안았다. 자연스레 나란히 누운 재희의 곁에서 일어난 나는 몸을 숙였다.
“씨발, …너 반칙이야.”
“…왜.”
“왜 더 커지는데.”
“그러니까 넌 받기나 해.”
“꺼져.”
오기로나마 나는 입을 가까이했다. 코앞에 꺼떡거리는 녀석의 것에서 특유의 짙은 체향이 나서 나도 모르게 아랫배에 힘이 들어갔다. 입을 크게 벌리고 선단을 빨아들이자, 낮게 울리는 녀석의 신음소리가 뒷골을 짜릿하게 물들였다.
“하아….”
일단 입에 품었다. 하지만 움직일 수조차 없었다. 배꼽에 달라붙은 녀석의 것을 쥐어 품어 봤지만, 그저 입 안에 물고 있는 것만으로도 턱이 아팠다. 게다가 입천장에 닿은 녀석의 것이 더욱 두께를 불리는 느낌에 나는 좀 더 몸을 낮췄다. 코로 숨을 몰아쉬며 어떻게든 혀로 문질러 보자, 머리맡의 녀석이 크게 한숨을 내쉬는 게 종아리 근처에서 느껴졌다.
마치 몸을 떠받들 듯, 녀석의 커다란 손이 내 배를 받치고 감싼 채 어루만지고 있었다. 급기야 여전히 늘어져 있는 내 성기를 감싸자 나는 그대로 주저앉을 뻔했다. 오럴을 받을 때보다 오히려 더 흥분되는 건 왜일까. 아마도 녀석이 내 서툰 애무에 흥분하고 있다는 것에 대한 정신적인 쾌감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정신은 몸으로 반영된다. 입의 열감이 마치 아랫배로 전달되는 것처럼, 들썩이던 내 엉덩이를 움켜쥔 녀석이 갑자기 내 허벅지 한쪽을 벌렸다. 단번에 휘청이던 허리가 방향을 틀었다. 녀석의 머리 위로.
“아…!”
품고자 했던 녀석의 것을 뱉을 수밖에 없었다. 재희가 그대로 내 성기를 올려 물었기 때문이었다.
녀석의 고환을 쥔 채로 나는 그 육중한 기둥에 내 이마를 부빌 수밖에 없었다. 내 골반을 단단히 쥔 녀석은 내가 아무리 엉덩이를 흔들어도 손을 놓아주질 않았고, 더욱 강하게 내 성기를 빨아들였다. 자지러지는 내 뺨과 코에 녀석의 것이 엉망으로 부딪혔다. 이미 흥건히 흘러나오던 쿠퍼액이 마구잡이로 내 얼굴에 묻었다.
“좋아? 재희야. 응?”
“…그래.”
갑작스레 터져 나온 기침에 녀석이 내 몸을 다급히 일으켜 세워 안았다. 그리고 등과 가슴을 도닥이며, 내 뺨과 입술에 얼룩진 타액과 쿠퍼액을 닦아 냈다. 다급히 내가 묻는 말에, 여태껏 무표정했던 녀석의 눈빛이 달라졌다. 사레에 걸린 것뿐인데, 호들갑을 떠는 녀석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좋아….”
“하윽, 읏… 아!!”
제 허벅지 위에 녀석이 나를 앉혔다. 내 고환을 스치고 지나간 재희의 것에 나는 밭은 신음소리를 냈다. 아랑곳 않은 재희의 큰 손은 내 것을 쥐고, 그 귀두에 자신의 귀두를 갖다 대었다.
죽을 것 같았다. 뒤로 넘어지려는 내 등을 나머지 손으로 받친 재희는 벽에 제 등을 기댔다. 내 말랑거리는 성기에 녀석의 쿠퍼액이 퍼부어지기 시작했다. 이윽고 기둥이 비벼지고, 녀석의 젖은 음모가 내 고환 밑을 적셨다. 나는 녀석에게 애원했지만, 매정하게도 재희는 내 가슴까지 물어 버렸다.
“흐읏, 아! 재희, 재희야, 으응, 윽, 아아!!”
내 거칠어진 호흡 따위, 들리지 않았다. 오직….
녀석이 내 유두를 빠는 소리가, 또 녀석이 내 것과 제 것을 함께 쥐어 비비는 마찰음이, 그 질척하고 탁한 소리가 내 귀를 물들였다. 흉터 언저리에 녀석이 코로 내쉬는 가쁜 호흡이 느껴졌다. 녀석도 나도, 누가 질세라 거칠게 숨을 내뱉고 있었다.
유두 언저리를 이를 세워 무는 녀석의 머리를 헝클어뜨리며, 나는 참을 수 없는 느낌에 절로 허리를 움직였다. 마치 녀석의 뻣뻣한 것에 달궈지듯, 내 연약한 성기마저도 점차 녀석의 손아귀 안에서 힘을 받기 시작했다.
“아, 재희, 재희야, 으응, 읏, 아, 좋아. 아!”
재희의 바쁜 손짓에 내 예민한 귀두는 짓눌리고 달궈졌다. 정말, 녀석만이 컨트롤할 수 있는 것처럼. 완전히 발기되어 느껴지는 아랫배의 묵직함에 나는 엉망으로 재희의 이름을 부르며 울었다. 빳빳이 선 유두 역시 녀석의 입 안에서 아주 작은 열매처럼 굴려지며, 한쪽이 비기라도 하면 나는 그게 서러워서 내 스스로 내 유두를 문지를 수밖에 없었다.
녀석을 한없이 사랑해 주기로 했는데. 욕심만 내고 있었다.
극도의 흥분에 이른 나는 녀석의 혀 앞에 내 흉터를 내밀었다. 더욱 빨아 달라고, 만져 달라고, 핥아 달라고. 사랑해 달라고.
“하윽, 아…!!!”
그리고 재희가 내 흉터를 깊게 빨아들인 순간. 녀석의 악력에 압박을 견디지 못한 나는 결국 먼저 사정해 내고야 말았다. 허리를 곧추세우며 바르르 떠는 내 절정에, 재희는 제 것을 손에서 놓고 오로지 내 것만을 위아래로 어루만졌다. 보잘것없는 정액을 녀석의 손안에 쏟아 내며 난 몇 번이고 녀석의 이름을 불렀다. 기껏해야 손을 적실 만큼은 되었을까. 그대로 쓰러져 내리는 내 몸을 침대에 누인 녀석이, 손바닥 위에 작게 퍼진 내 정액을 여전히 성이 나 있는 제 것에 펴 바르기 시작했다.
아, 미쳤어… 한재희.
“…씨발.”
“아!!”
널브러져 있던 내 마른 허벅지 사이로 녀석의 육중한 것이 오가기 시작했다.
이것마저도 녀석에겐 부족했다. 비쩍 마른 내 허벅지로는 녀석의 것을 찰지게 물 수 없었다. 하지만 재희는 아랑곳 않고 허릿짓을 빠르게 했다. 사정하고 난 뒤 힘이 풀어진 내 물렁거리는 살들을 비집고, 내 고환을 뭉개고, 마치 몸 안으로 파고들 것처럼 거칠게 움직이는 녀석의 허릿짓에 나는 정말 녀석에게 안긴 것처럼 허리를 뒤틀며 신음을 질렀다. 완전히 움츠러든 성기 기둥에까지 가끔 닿는 녀석의 뜨거운 선단에 나는 비명을 질러야 했다.
아무리 손을 내저어도, 내 허벅지 바깥을 쥔 녀석의 두 손은 날 잡아 주지 않았다. 문득 두려운 마음이 들어 나는 왈칵 눈물이 났다. 퍽퍽 소리를 내며 살을 비집는 재희의 것에라도 닿고 싶어, 나는 내 배꼽 아래로 손을 뻗었다.
치고 빠지려는 녀석의 귀두를 손끝으로 만지며, 나는 울었다.
“재희, 재희야, 아읏, 응,”
“…씨발. 한정현, 너….”
“응, 응읏, 으. 아! 뜨거, 뜨거워, 아!!”
내가 기억하는 마지막 감각은, 욕을 지껄이며 내 다리 사이를 파고들던 재희의 것이, 내 몸 위에 파정하던 흔적이었다. 무릎 뒤에 닿던 뜨거운 호흡도, 낮게 내뱉던 녀석의 신음까지도. 그 온전한 촉감.
마지막으로, 이곳저곳에 흥건히 튀던 녀석의 정액에 나는 나도 모르게 안심하며 그대로 눈을 감았다. 그래도, 네가 좋았던 것 같아서 다행이었다. 그 묘한 성취감에 자조하며 내 의식은 다시 빠져들어 갔다. 무척이나 안락한 어둠 속으로.
***
건강해져야겠다.
눈을 뜨자마자 든 생각이었다.
몸은 생각보다 가뿐했다. 손바닥으로 느껴지는 따스한 온수 매트와 포근한 촉감의 이불. 늘 쓰는 섬유 유연제 냄새까지. 나는 친숙한 내 방 침대 속에서 멍하니 눈을 깜박였다. 대체 어디부터 꿈이고 현실인지를 분간하기 어려웠다. 분명 의식이 끊기기 직전까지 재희와 내 체액으로 더럽혀졌던 몸은 언제 그랬냐는 듯 깔끔히 닦여, 잠옷까지 얌전히 입혀져 있었다.
다만 살포시 고통이 일었던 것은 왼쪽 손등. 올려다보니 링거가 꽂혀 있었다. 그런데.
“아….”
꽂혀 있는 링거 바늘 주변에 피멍이 들어 있다.
낯설다. 익숙하면서도, 낯설 수밖에 없다.
태어나자마자 셀 수도 없을 만큼 주사를 맞아 왔다. 30년이면 익숙해질 법도 한데, 나는 그 차가운 것이 몸속에 파고드는 이물감을 참기 어려웠다. 애써 괜찮은 척 눈을 감아도, 힘을 주어 멍이 드는 건 예삿일이었다.
하지만 한재희의 주사만은 예외였다. 녀석이 대학에 입학하고 실습을 시작하면서 내게 주삿바늘을 꽂게 된 이래로, 녀석은 내게 멍 한 번 들게 한 적이 없었다. 바늘이 꽂히는 걸 눈으로 보면서도 아픔을 느끼지 못해 신기할 정도였는데, 뭐지.
상태를 보니 한 번이 아니고 여러 번 꽂았다가 혈관을 찾은 것 같았다. 녀석답지 않은데.
…설마, 복수라도 한 거야 뭐야.
조심스레 바늘을 빼낸 나는 손등 언저리에 물든 피멍을 보고 어깨를 으쓱였다. 이렇게 아프게 찔렸는데도 깨지 않고 잔 나 자신이 신기한 한편으로 한심했다. 그때 깼으면 출근하는 거 배웅이라도 했을 텐데….
곱게 입혀졌던 잠옷을 머쓱한 마음을 떨치듯 훌훌 벗은 난 화장실 거울 앞에 섰다.
요샌 근육보다는 스키니한 게 취향이라는 사람도 있다고는 하지만 이 정도로 빼빼 마른 몸은 또 예외겠지. 가슴의 뼈가 보일 정도로 마른 몸이 영 볼품이 없어 나는 혀를 찼다. 사진은 물론 거울도 나에겐 늘 기피 대상이었다. 마르다 못해 가슴을 가로지르는 흉터는 시간이 지나도 영 아물지 않아, 보기 흉했으니까.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하얀 백지장 같은 몸 위에 세로로 남겨진 흉터 외에도, 군데군데 남은 지난밤의 흔적에 난 거울 속의 나를 한참이고 들여다보았다. 귀 아래, 쇄골 주변. 어깨. …유두 언저리부터 골반까지.
처음으로, 멍이 잘 드는 내 몸이 마음에 들었다.
정말, 꿈이 아니었구나. 내 기억은 희석되었어도, 몸은 오히려 더 적나라하게 지난 재희와의 시간을 간직해 주고 있었다.
…고마워, 진짜 고마워.
욕조에 가득 채워진 따뜻한 물속에 몸을 담근 채, 나는 푸르게 든 멍을 매만지며 혼자 실없이 웃었다. 미친놈이거나, 변태 같았다. 아니, 변태나 마찬가지였다. 녀석의 것이 스치던 허벅지 가장 안쪽을 매만지면서 지난밤을 떠올렸다. 한재희 말만 듣지 정작 주인 몸을 듣지 않는 아랫도리는 감감무소식이었지만, 나는 진이 빠지도록 오래, 반신욕을 즐기며 행복감에 도취해 있었다. 내 몸 구석구석 아주 깊은 곳까지 따스하게 물들이는 온기가, 정말 재희 같았다. 재희에게 안겨 있는 것 같았다.
아, 벌써 보고 싶어….
***
“예나 씨. 정말 미안해요.”
한참이고 늘어져 있다가 발견한 휴대폰의 충전 케이블을 연결했다. 켜 보니, 예상 그대로 난리가 나 있었다.
부재중 전화는 물론, 메신저까지. 한재희의 기록은 뭐 그렇다 치지만 문제는 예나 씨였다. 나는 너무나 놀란 나머지 몇 번을 메신저 창 위에서 헛손질하다가 결국, 전화를 걸어 버렸다.
그리고 때마침 그녀는 전화를 받았다. 그녀에게 보이진 않겠지만, 난 무릎을 꿇고 두 손 모아 전화를 받았다. 석고대죄라도 해야 할 판이었다.
안 봐도, 아니 듣지 않아도 뻔했다. 재희에게 보고까지 받으면서 소개팅에 나왔던 그녀는, 갑자기 연락 두절된 나 때문에 꽤나 곤욕을 치렀겠지. 얼마나 황당했을까. 택시로 집 앞까지 데려다주고 갔는데 대체 어디로 샜을까 하고.
그나마 예나 씨가 제 결백을 호소하며, 집 앞까지 데려다줬다는 말을 듣고서 재희가 수술복도 갈아입지 못한 채로 집으로 돌아와 줬을 테니. 나로서는 그녀에게 진 신세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 그래도, 아무 일 없었던 거죠?
“아….”
있었어요, 하지만 미안해요. 말할 수 없어.
내가 미안해할 것은 단순히 잠수 후 연락 두절 건만이 아니었다.
술이 깨고 나니 하나둘씩 맞춰지는 지난밤의 퍼즐 조각에 난 참으로 내가 한심스럽게 느껴졌다.
그냥 꿈일 뿐이었는데.
그렇게 만나서 재미있게 놀고,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해 놓고서는. 내 개꿈 속에서 단순히 재희의 곁에서 울고 있었다는 사실 하나로 그녀를 원망하고 질투했던 내 치졸한 마음이 시간이 지날수록 크게 부풀어 올랐다.
예나 씨는 수화기 너머에서 피곤이 뚝뚝 떨어지는 목소리로, 덕분에 심란해서 잠도 잘 못 잤다는 둥, 다크 서클 어떻게 할 거냐는 둥 귀엽게 타박을 주곤 있었다. 하지만 내 안부를 걱정한 그녀의 진심이 전해졌기에 난 송구함에 더 위축되어 갔다.
정말, 정말 한심해. 이렇게 좋은 사람을 지인으로 두기엔 난 아무래도 부족한 걸까. 스물아홉 해 살아오면서 친구라고는 한재희밖에 - 아니 이젠 한재희마저 친구로 두지 못하게 된 내 좁은 마음과 사고방식에 자괴감마저 들었다. 예나 씨는 확실히 내게는 과분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예전 같았으면 그저 자학하고 괴로워하는 것으로 전부였겠지만 이제는 다르다. 생각이 바뀌었다.
내가 이 사람들에 어울릴 수 있도록, 용서받고 떳떳할 수 있도록 좋은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네, 없었어요.”
- 다행이다. 정현 씨 진짜.
“미안해요, 진짜.”
- 됐어요. 다음에 밥 사요.
“그럼요.”
고작 밥을 사서 이 부채감을 갚을 수 있다면, 얼마든지요.
***
미세 먼지로 가득해, 봄 하늘은 그 이름과 어울리지 않게 잿빛이었다.
하지만 난 무작정 밖으로 나섰다. 그리고 걸었다.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마스크는 물론 어제도 하고 나갔던 그 목도리까지 칭칭 매 중무장을 한 나는 의욕 만땅으로 운동을 나갔다. 운동복에 패딩, 목도리까지 맨 내 우스꽝스러운 모습에 사람들이 쳐다보는 것도 같았지만, 나는 개의치 않았다. 나에게 준엄한 목표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운동해야 해. 건강해져야 해.
하지만 늘 현실과 이상은 괴리가 있는 법.
고작해야 15분은 걸었을까. 뭔 운동을 했다고 허벅지 사이가 땅겨 왔다. 게다가 미세 먼지가 심하다고 야무지게 챙겨 쓴 방진 마스크는 호흡하기가 힘들어 내겐 영 무리였다. 나는 재빨리 포기하고 집에 들어왔다. 길바닥에서 또 쓰러지면 안 되니까. 하지만 이대로 포기할 순 없지. 나는 내 몸과 누가 이기나 내기라도 하는 것처럼 플랜 B를 선택했다.
계단 2층 오르는 게, 섹스랑 똑같댔어.
나가서 운동하기도 어려운 지금, 우리 집이 2층 집인 게 때마침 천만다행이었다.
몸이 약한 내가 거동하기 편하게 1층 방으로 옮기자는 엄마의 말에도 생활 속에서 운동해야 한다며 내 방을 2층으로 정한 아빠의 선견지명에 감탄했다. 물론, 아들내미가 무슨 목적으로 이렇게 계단을 오르락내리락하는지는 예상 못 하셨겠지만.
살짝 부모님께 드는 송구함과 민망함을 외면하며, 나는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내쉬며 계단을 오르내렸다. 계단 손잡이에 흥건히 땀이 배었다. 어제에 이어 오늘도 고통받는 허벅지가 다 후들거렸지만, 나는 이를 악물었다.
이렇게까지 삶에 대한 의욕이 생긴 적이 있던가?
모두가 살아 주길 바라고, 살아야 한다고 했지만 막상 나 자신이 살겠다는 의지를 불태운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죽지 못해 사는 거고, 모두가 살길 바라니까 사는 거였다. 다른 생각을 가질 여유가 없었다.
하고 싶은 건 있지만, 그렇게 절박하지는 않았다. 미술이 좋았지만, 모든 걸 감내할 정도로 원하진 않았고 몸이 힘들면 마음도 함께 내려놓게 되어서 생각보다 갈등이나 고뇌는 없는 평탄한 삶이었다.
물론, 재희를 좋아하는 감정 또한 크게 다르지 않았다. 외로움에 겨워 좋아한다고 내 감정을 깎아 누르기만 바빴다. 외면하고 싶었다. 안 그래도 힘든 삶에, 이뤄지지 못할 감정으로 허덕이고 싶지 않았다. 그저, 현상 유지만을 바라왔던 마음이었다.
하지만 어제의 일을 계기로 뭔가 핀이 틀어진 것처럼 나는 살짝 머리가 돌아 버렸다.
이제는 살고 싶었다. 욕심이 났다. 사랑받고 싶었다. 아니, 사랑하고 싶었다.
모두를 믿지 않는다는 녀석에게 보란 듯이, 나를 믿을 수밖에 없지 않냐며 인정받고 싶었다. 오기였고, 치졸한 뒤끝이었으며, 그리고 어쩌면 발악일지도 모른다.
적어도 내 앞에선 모든 것을 내려 두고 솔직해지는 재희를 믿고 싶었고, 믿게 해 주고 싶었다.
그런 마음에서 저질러 버린 어젯밤이었지만 이제 와 생각해 보면 부끄러웠다. 기껏 사랑해 주기로 마음먹었으면서, 결론은 참담했다.
술을 빌미로 대범해져서 기껏 재희를 꼬셔 놓고는, 사정하자마자 그대로 나가떨어진 내 체력이 부끄럽고 쪽팔렸다. 패기 있게 녀석의 것을 오럴해 주려다가, 결국 기침이 터져 나와서 입에 물고만 있던 게 전부였던 것마저, 시간이 지날수록 선명하게 떠올라 나는 허공에 몇 번이고 발을 찼다.
하지만 그 와중에, 크고 잘생겼던 녀석의 것이 내 몸 구석구석에 닿았던 게 떠올라 혼자 뺨을 붉히기도 했다.
더 깊게 안고 싶었다. 안아 주고, 또 안기고 싶었다. 단순히 허벅지 사이가 아니라 진짜 재희가 내 몸속에 들어와야 온전히 재희가 내 것이 되어 줄 것 같았다.
대책 없는 생각이었다. 서로 연인 사이도 아닌데 몸부터 틀 생각을 하다니. 내가 언제부터 이렇게 음란했지 싶으면서도, 가장 솔직한 삶의 욕구가 그것이기에 나는 가뿐히 나를 포기했다. 뭐, 좀 음탕하면 어때. 건강해지면 좋은 거잖아.
자괴감이 쓰나미처럼 밀려 올 때면, 나는 지난밤, 아직도 생생한 재희의 온기와 목소리를 떠올리면서 내 자신을 북돋웠다.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푸르러진 멍 자국이 날 응원해 주는 것 같았다.
낮게 지껄이던 욕, 내 것을 핥아 주고 빨아들이던 그 뜨거움, 온몸에 와 닿던 가쁜 한숨과, 내 배 위에 흩뿌려지던 네 모든 것까지…. 모두 놓치기 싫었다. 다음에 또 너를 안게 되는 날에는 기꺼이, 모든 걸 받아 낼 수 있도록 좀 더 건강해지고 싶었다. 그러다보면 언젠가 너도, 날… 날 자연스레 사랑해 주지 않을까.
네 주삿바늘이 그랬듯, 네가 하는 모든 건 겁이 날 만큼 내겐 익숙할 테니.
***
「오늘 늦어?」
계단 오르기를 하다 중도 포기하려던 마음을 다잡기 위해 난 재희에게 문자를 보냈다.
답장은 오지 않았다. 오랜만에 몸을 움직여 노곤하기도 했지만, 입이 짧은 내가 꽤 허기가 질 만큼 시간이 지났을 무렵까지 휴대폰은 잠잠했다.
나는 얌전히 기다렸다. 내가 지은 죄가 있기에 더욱 그랬다. 말이 부재중 오십 몇 통이지. 인터넷에 올리면 소름 끼친다고, 스토커 아니냐는 소리를 들을 정도라는 걸 알았기에 나는 녀석이 일부러 늦게 보낸다고 해도 기꺼이 인내할 자신이 있었다.
기다리는 동안 나는 밀린 드라마를 봤다.
뭔가 이전과는 사뭇 다른 기분이 들었다. 감흥 없이 남 일처럼 봤던 로맨스가 유독 재밌게 느껴졌다, 알콩달콩하게 시작하는 사랑 이야기들만 골라 봤다. 괜히 간지러운 마음에 무릎을 껴안고서 그 주인공이 나와 재희인 것처럼 감정 이입하기도 했다.
키스에 몰입하는 건 뭐, 언제나와 같았지만.
「3일간 당직. 밥 챙겨 먹어.」
배가 고파 시리얼에 우유를 붓던 와중에 녀석에게서 온 답문은 간결하고, 또 녀석다웠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조금 실망했다. 지극히 일상적이고 다를 것 없는 재희의 문자에 나는 풀이 죽어서 붓다 만 우유를 냉장고에 넣었다.
“화났나….”
내가 잘못하기는 했지. 하지만 사과할 틈도 없이 당분간 못 본다고 생각하니 허탈했다. 달력을 살펴봐도 당직 표시는 없는데. 갑자기 무슨 일이 생겼나. 또 어디 인력이 쏠리거나 하면 툭하면 병원에서 사는 게 일상이긴 했으니까.
평소에는 그러려니 넘어가는 것들이었는데, 나는 안달이 났다. 사흘이 꼭 한 달인 것처럼 아득하게 느껴졌다. 재희가 더 보고 싶었다. 혼자 잠드는 밤이 싫었다. 일어났을 땐 혼자라고 해도 잠이 들 때만큼은 재희와 함께 있고 싶었다.
몽실몽실 피어나는 답 없는 욕심에 고개를 젓다가, 나는 문득 우유를 넣을 때 스쳐보았던 냉장고 한쪽 구석을 기억해 냈다.
“엄마가 보내 준 사골이… 남았었지?”
어쩔 수 없지.
건강해지기로 마음먹은 김에 나는 기꺼이, 내가 가장 기피하는 모든 것들을 깨부수기로 마음먹었다.
***
솔직히 내가 유난인 것은 아니다. 세상 어느 환자가 병원 오는 것을 좋아하겠는가.
와서 뭐 재밌는 걸 한다면 몰라도. 매번 알 수 없는 영어 뭉텅이와 숫자들을 보고 저들끼리 알 수 없는 암호 같은 말을 건네며 진지한 얼굴로 이러쿵저러쿵 떠든다. 그래 봤자 내 인생이고 내 팔자에 내 몸뚱이인데. 나는 모르고 남들이 더 속속들이 잘 안다는 게 기분 나빴다.
실컷 그러고서는 내게는 정작 하는 말이, 늘 다 괜찮아질 거라고. 하지만 그다지 괜찮아진 적이 없다. 물론 죽지 않은 걸 감사히 여겨야 한다는 건 안다. 하지만 수술만 받으면 다 정상이 될 것처럼 굴더니 지금은 매번 위태롭다고. 위험하다고. 조심하라고.
의사 선생들은 다 거짓말쟁이야. 병원도 다 돈독 오른 걸지도 몰라. 그러면서도 평생을 벗어나 본 적 없고, 벗어날 수도 없다. 의사의 아들로 태어나서, 인큐베이터에서 자라나고, 미끄럼틀보다 수술대를 익숙하게 오른 내 팔자가 이런 것을.
이 피해의식도, 고정관념도.
하지만 이제는, 그 속에 네가 포함되어 버렸으니. 그리고 너를 사랑하기로 마음먹은 이상 나의 변심은 온당한 것이다.
…라며 합리화를 해 본다.
***
“해가 서쪽에서 뜨겠구나.”
“그러게요. 하하….”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귀신 본 것처럼 대하실 건 또 뭐람.
나의 등장에 황당함을 떠나 경악까지 하는 교수님 앞에서 나는 입꼬리만을 올려 겨우 웃었다.
내가 그렇게 병원 오기 싫은 것을 티를 냈던가. 아무리 그래도 교수님 앞에서는 태연한 척했던 것 같은데. 반성해 보지만 이제 와 소용이 있을 리 없다.
“게다가 이렇게 차려입고. 데이트라도 가니?”
“아니요….”
여자 친구는 아니니까, 거짓말은 아니죠?
겸연쩍은 마음에 뺨을 긁으며 난 내가 입은 옷을 내려다보았다.
원래 불편한 옷을 좋아하지는 않는다. 어울리게 입으려면 몸에 꽉 붙게 입어야 하지만, 워낙 마른 탓에 오히려 빈티 나 보이기도 했으니까. 게다가 혈액 순환도 안 좋은 내가 그런 옷을 입으면 자학 행위나 다름없었다. 그래서 늘 몸을 압박하지 않는 편한 옷차림에, 마실 다녀오는 기분으로 패딩을 입고 병원을 오갔던 나였다.
하지만 오늘은 선심을 써서, 녀석이 얼마 전 내게 잘 어울린다고 한 상의와 비슷한 파스텔 계열의 니트를 챙겨 입었다. 늘 우중충하고 펑퍼짐한 무채색의 옷만 입다가, 새삼 채도 있는 옷을 입으니 거울 속의 내가 낯설긴 했다. 백지장같이 혈색 없는 얼굴이 그나마 좀 화사해 보이는 데는 도움을 줬다. 패딩을 입는 것보다는 추웠지만, 그 정도는 감내할 수 있었다. 마침, 봄이기도 하고….
‘평소에도 좀 이렇게 입어 봐라.’
…이 정도쯤이야, 어렵지 않지.
내 차림새를 보면 그래도 웃어 줄까 싶어서, 나는 불편함을 기꺼이 감수했다.
여하튼 30년 단골의 특권을 앞세워 말 그대로 ‘특진’을 얻어 낸 날 교수님은 몇 번이고 신기한 듯 살피셨다. 예약도 없이 불쑥 온 탓에 오랜 시간 교수님을 붙들 순 없었다. 예약 환자가 오기 5분 전이 내가 할당된 최선의 시간이었고, 간단한 문진이 내 검사의 전부였다. 차트를 보여 주시는 교수님 앞에서 마치 난 까막눈처럼 고개만 주억거렸다.
삼십 년을 들어 왔어도 잘 모르는 것은 똑같다. 오히려 내 몸을 잘 아는 것은 나보다 주변 사람들이다. 어렸을 땐 부모님이, 지금은 재희였다. 재희가 집에서 뽑아온 피로 검사를 돌리고 그 수치에 맞는 항응고제 농도를 조절하거나, 다른 장기의 기능 정도를 확인해 추가 약을 복용해 왔었으니까.
나로서는 그게 편했고, 그들이 당연히 하는 일인 것처럼 여겼지만, 막상 내가 나 자신에 대해 하나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쪽팔림이 밀려들었다. 그저 시키는 대로 자리에 가 앉는 게 최선이었던 지난 검진과는 사뭇 다른 기분이었다. 줄곧 아는 체했고, 사실은 하나도 모르는 말투성이의 향연을 이제 와 일일이 묻는 것도 부끄러워서 나는 그 짧은 검진을 영혼 없는 고갯짓으로만 넘겼다. 오늘따라 이상하게 교수님 말이 더 이해가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
“그나저나, 재희는 어디….”
“…음?”
“네, 그. 속옷이랑 주려고. 음식 가져왔거든요.”
어차피 내 목적은 잿밥에 있었다. 교수님은 내 말에 흠칫 놀라시는 모습이었다. 조금 과도하게.
그래. 거기에서 눈치챘어야 했다.
“아, 그래. 내가 세미나를 보냈지. 나 대신에 재희가 참석해서….”
“당직이라고 들었는데요.”
그 짧은 5분. 별것 아닌 문진에도 그토록 횡설수설하며 어쩔 줄 몰라 하셨던, 평소답지 않았던 교수님의 태도가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재희를 만나고 싶어 설레는 마음에 눈이 멀어 너무 늦게 눈치채고 말았다.
“…아니었나요?”
***
‘너 그렇게 걱정하는 녀석 아니냐. 의산데 제 몸 하나 처치 못 할까 봐. 걱정 마라.’
결론부터 말하자면 한재희는 병원에 없었다. 당직도 아니었다, 세미나도 아니었다.
한재희는, 병가를 내고 쉬고 있단다. 우리 집에서. 많이 아프단다. 아니, 매년 아파 왔단다.
물론 나는 죄다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들어설 때까지만 해도 느끼지 못했던 소독약 냄새와 피비린내가 병원 안을 채운 모든 이들에게서 풀풀 풍겼다. 더 있다가는 구역질을 할 것 같았다. 여기서 그랬다간 난 바로 입원행이다. 아물지도 않은 손등의 멍을 숨기며 나는 재빠르게 병원을 뛰쳐나왔다.
이래서 병원이 싫어. 늘 좋았던 일이 없어. 평생, 평생 구릴 거야. 반드시.
넌덜머리가 났다. 나는 분노로 필름이 끊기기 직전에 가까스로 택시를 잡아타고서 예나 씨가 말해 준 주소부터 택시 기사님께 읊었다. 기본요금도 안 나오는 거리를 가 달라고 요구하는 나에게 기사님은 들으라는 듯 투덜댔지만, 평소 같았으면 몰라도 지금의 난 남들의 하소연 따위에 귀 기울일 형편이 못 됐다.
***
「감기 몸살이 심하게 온 것 같아서, 며칠 혼자 쉰다고 들었어요.」
「인공 판막 환자한테 합병증이 제일 큰 사망 원인이라면서요. 게다가 정현 씨 폐 질환 모를 리가 없는 사람이고. 병원에선 그런 모습 보여 주기 싫어서 그 청승 떠는 거. 그리고 내가 이제 정현 씨랑, 둘 사정을 아니까, 혹시 무슨 일이 생기면 부탁한다 이거였죠.」
「△△모텔 302호요. 매번 거기에 묵는 걸로 알고 있어요.」
그저 건강하기만 했던 녀석이 인턴 일을 시작하면서 1년에 꼭 한 번은 꼭 앓아눕게 되었다고 한다. 온갖 질병에 노출된 직업이기에 어찌 보면 아픈 게 당연했지만, 제대로 병간호를 받을 수도 없고, 2차 감염까지 걱정한 녀석은 늘 일정한 시기에 병가를 냈다고 했다.
사정을 아는 임 교수님은 차라리 병원에서 쉬는 게 어떠냐고 권했지만, 주변 사람들 시선에 마음이 편치 않을 것 같다며 거절한 녀석은 매번 근처 모텔에 머물렀단다.
혹시나 무슨 일이 생기면 - 한정현이든, 한재희든. 연락을 받지 않으면 와 달라는 의미에서. 매번 같은 모텔에 녀석은 투숙했고 그 위치는 임 교수님과 예나 씨, 두 사람이 알고 있었다.
나는 아니었다. 인턴이라면 이미 4년도 전부터, 녀석은 그렇게 혼자 아파 왔던 것이다.
***
그래. 어쩐지. 좀 뜨거웠어. 몸이 차가운 나와는 다르게 원체 열이 많던 너라고 쳐도, 유독 그날 너는 그랬어. 그 추운 날에 외투는 입고 온 걸까. 정말 그 상태로 뛰어왔다면 감기에 걸리고도 남지. 목도리를 하고도 추웠었는걸.
난 그냥 내가 취해서 그런 줄 알았어. 너한테 안기고 싶어서 졸라 대느라, 기분 탓이려니 했어. 네가 뜨거웠던 게. 나를 안고 있는 네가 뜨겁다는 사실이 너무 좋아서, 그저 그 자체로만 생각했어. 멍청하게도.
‘너 열 있지.’
‘…없어.’
‘인마, 이리 와 봐.’
치킨을 먹다가도. 애들과 공을 차고 놀다가도. 시험공부에 집중하다가도.
숨소리 하나에도, 조금 흐트러진 내 시선에도 넌 늘, 기가 막히게 내 문제를 눈치챘었는데. 왜 나는 눈치채지 못했을까. 왜일까. 너를 분명 좋아하고, 늘 함께해 왔는데 아무것도 몰랐을까.
아냐, 모르지 않았어.
내가 무심했을 리가 없잖아. 아무리 건강해도 그렇게 살인적인 스케줄을 버티다 보면, 당연히 지치고 힘든 거, 나는 모르지 않았는데. 나는 알고 있었는데.
‘나 진짜 힘들어. 한정현.’
‘그러니까 내가 진작 때려치우랬잖아, 씨발 놈아.’
‘어, 진짜 힘들다. 진짜 뒈질 거 같아.’
네가 괴물 따위 아닌 거…. 그냥 평범한 사람이라는 거. 모르지 않았는데.
그냥 그게 당연한 줄 알았나 봐. 아니, 믿었나 봐. 내 앞에서는 솔직하게 말해 줄 줄 알았나 봐. 어리석게도.
그래서 네가 나를 믿지 못했구나, 나는 덜컥 이해해 버렸다.
내 사랑이란 참으로 글러 먹어서, 망상에만 능숙했지 현실의 도움과 신뢰는 아무것도 주지 못했다. 살아 숨 쉬는 모든 순간이 그저 민폐 덩어리인 나는 재희가 아플 때 쉴 안식처조차 되어주지 못했다.
그러면서 사랑을 주겠다고? 네가 날 믿을 수 있게 해?
가당치도 않다. 한정현. 난 주제 파악도 못 하는 얼간이었다. 재희와 섹스하고 싶다며 한껏 망상에만 젖어 있던 나를 흠씬 두들겨 패고 싶었다. 볼썽사나웠다. 흔들리는 택시 안에서 나는 구역질 대신 왈칵 눈물이 터질 뻔했다. 억지로 눈두덩을 손등으로 막았다.
녀석이 편지처럼 남기고 간 손등 위의 피멍이 욱신거렸다. 마치 지금 재희가 아픈 것을 재현하듯이.
그래서였니. 주삿바늘 하나 제대로 못 꽂을 정도로 아팠어? 기침한 거야?
여태껏 아픈 것은 내 몫이었다. 재희가 아픈 모습을 난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찢어지다 못해 어지러워서, 나는 눈을 감았다. 가장 가까이에서 가장 사랑한다고 생각해 온 내 모든 게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교수님과 예나 씨는 가지 말라고 날 말렸다. 괜히 가서 재희의 노력을 헛수고로 만들지 말라는 뜻이었다. 모른 척해 주라고. 사흘이면 나을 테니 기다리고 있으라고.
그들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따져 묻고 싶은 마음 한편으로, 지금 혼자 아파하고 있을 재희를 상상하니 미쳐 버릴 것 같았다. 내가 아플 때마다 늘 재희가 곁에 있었는데 막상 재희는 구린 모텔 방구석에서 혼자 앓아누워 있어야 한다니.
아니. 난 절대로 모른 척할 수 없었다. 혼자 놔둘 수 없었다.
설사 녀석을 찾아가 내가 앓아눕게 되더라도 상관없었다. 네가 지금 아픈데, 그 곁에 있어 주지도 못하는 목숨 따위야, 그렇게 연명해 봤자 아무런 의미가 없잖아.
걸었으면 분명, 방향 감각을 잃어버린 멍청이처럼 또 맴맴 돌다가 길바닥에 쓰러졌겠지. 하지만 다행히도 헤맬 틈도 없이 나는 목적지에 도달했다. 고작해야 병원에서 5분 거리. 만 원짜리를 건네며 거스름돈은 됐다고 말하며 택시에서 내린 나는 눈앞의 건물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그리고 쓰게 웃었다.
스물아홉, 난생처음 모텔을 이런 식으로 방문하게 될 줄은 몰랐다.
***
다행히도 모텔 접수원은 내 출입을 제재하진 않았다. 나는 엘리베이터도 기다리지 못하고 모텔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운동한 게 이따위로 써먹힐 줄은 꿈에도 몰랐기에 나는 허허 웃었다. 숨이 차서 그런지 웃음소리 대신 헉헉 소리만 났다. 후들거리는 무릎을 붙들고 나는 예나 씨가 알려 준 모텔 방 앞에 섰다.
처음에는 노크를 했다. 답이 없었다. 이미 교수님이나 예나 씨가 녀석에게 연락을 취해 뒀을지도 모른다. 그 긴 생각의 끝에 나는 이제는 주먹을 쥐어 쾅쾅 두드렸다. 하지만 대답이 없었다. 초인종을 누르고, 거칠게 손잡이를 돌려 봤지만, 답은 없었다.
혹시 다른 방일까, 하는 생각조차 없었다. 얼룩져 앞이 잘 보이지 않는 눈을 수없이 깜박여 확인한 그 호수는 분명했으니까. 3층이나 오른 두 다리가 후들거려도, 덜 되어 먹은 심장이 차분히 가라앉은 걸 느끼면서 난 직감할 수 있었다.
너, 여기 있구나.
“문 열어, 한재희.”
휴대폰을 꺼냈다. 58통에서 멈췄던 전화를 다시 걸어 본다. 고객님이 전화를 받지 않아… 매정하고도 다정한 인사말에 나는 이를 악물었다. 목울대가 뜨겁게 치밀어 올랐다. 나는 꼭 문 너머의 녀석이 죽을병에 걸린 것처럼 펑펑 울기 시작했다.
“나와.”
…왜 자꾸 날 계속 비참하게 만들어.
“…나오, 라고…. 한재희!!!”
왜 날 아무것도 모르는 바보로 만들어, 응?
***
두 번째 고함에야 문은 열렸다. 다만, 내가 바랐던 문이 아닌 다른 문들이.
그때 나는 모텔 한 층에 참 많은 방들이 있으며, 평일 낮에도 참 많은 커플이 해피 타임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원치 않게 알게 되었다.
“뭐야?”
“아, 어떤 새끼야!”
옷도 제대로 갖춰 입지 않은 남자들이 하나둘씩 튀어나왔다. 문을 두드리며 질질 짜던 난 그것이 나에게 하는 소리인 줄도 몰랐다. 전화 받고 올라온 카운터 직원이 내 어깨를 잡아채기 전까지는.
“안에 일행이 있어요. 많이 아파서….”
“이러시면 안 됩니다. 영업 방해예요.”
막무가내로 날 문에서 떼어 내려는 직원에게 아무리 저항해 봐도, 평생 약골이었던 내가 그걸 이겨 낼 리가 없었다. 모텔 방의 문고리를 쥔 채로 난 그대로 주저앉아서 버텼다. 서럽고 무서운 마음에 왈칵 더 눈물이 터졌다.
“잠시만요, 정말이에요. 안에 재희가….”
“자꾸 이러면 사람 불러? 좋게 말할 때….”
“재희야, 한재희!!!”
뒤에서 내 겨드랑이 쪽을 붙들어 질질 끌고 가려는 힘에 나는 젖 먹던 힘을 다해서 재희를 불렀다. 거의 눕다시피 다리를 뻗어 방문까지 찼다. 정말 조폭을 부른다고 하면 어쩌지 싶어 두려우면서도, 그래도 이대로 쫓겨날 수는 없을 것 같아서 난 막무가내로 몸부림을 쳤다. 잘못 스친 팔꿈치가 운 좋게 그 사람의 명치를 건드렸는지 직원은 나를 놓쳤고, 그사이 나는 엉금엉금 기어 다시 한 번 문을 두드리려 팔을 뻗었다. 그런데….
두드릴 곳을 잃은 내가 앞으로 나동그라지는 동시에 문이 열렸다.
“그 손 놔.”
머리 위에서 쏟아져 내리는 위태로운 목소리는, 분명 재희 것이었다.
열린 문에서 훅 끼친 열기는 단순히 난방 문제가 아니었다.
그러니까, 그날 밤. 잠든 날 흔들어 깨우던 녀석에게서 느껴지던 열기. 그 비정상적으로 달아오른 열이 녀석의 온몸에서 훅훅 끼치고 있었다.
“…일행이에요. 미안합니다.”
내 멱살을 잡은 직원의 손은, 녀석의 커다란 기침 소리와 함께 사라졌다.
***
“마스크.”
녀석의 말에 난 서둘러 마스크를 썼다. 언제 다시 쫓겨날지 모르니까. 목도리까지 돌돌 매고 얌전히 녀석의 뒤를 따랐다.
그리고 보기 좋게 내 코앞에서 문이 닫혔다.
문이 닫히는 소리보다 더 큰 기침 소리가 나자 눈물마저 쏙 들어가 버렸다.
그러니까, 내가 아까 고함을 지른 그 현관문 안에는 침실로 향하는 중문과 화장실이 있었다. 마스크를 쓰고 엉거주춤 들어선 내 코앞에서 그 중문이 보기 좋게 쾅 닫혀 버리고 만 것이다. 게다가 찰칵 소리까지.
미친, 이 새끼 문 잠갔어.
“야, 문 좀 열어 봐….”
아까의 패기는 한풀 꺾인 지 오래라, 나는 조심스레 문을 노크했다. 대답 대신 들려오는 건 녀석의 기침 소리뿐. 문고리를 돌려 봐도 철컥거리는 쇳소리만 났다.
방문에 귀를 대 봐도 기침 외엔 별다른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나는 주먹을 쥐고 다시금 쾅쾅, 두드려 보았지만 미처 소리까지는 지를 수 없었다. 더 이상 사고를 치기는 싫어 나는 그대로 주먹을 노크하듯 문에 갖다 대기만 했다.
꼭 잘했다는 것처럼 안에서 거친 기침 소리가 났다. 가래가 담뿍 낀 소리. 눈이 화끈거렸다. 진짜 이렇게 아픈 거였어. 진짜, 나 때문에 집에 못 들어온 거야? 묻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그래도, 만나긴 만났네.
웃기게도 묘한 안도감이 들었다. 녀석의 기침 소리에 드디어 만났다는 게 실감이 났다. 그 때문인지 갑자기 피로가 몰려왔다. 신발장이고 뭐고, 바닥에 그대로 철퍼덕 주저앉은 나는 무릎을 끌어 모았다.
그렇게 보고 싶어서 미칠 것 같았는데. 왜 이런 데서 혼자 삽질이냐고, 멀쩡한 집 놔두고 뭐 하는 짓이냐고 지랄을 해 주려고 마음을 딱, 먹었는데.
……막상 재희 얼굴을 보니까 욕이고 뭐고 아무 생각도 안 나.
아까 전 그렇게 씨발 새끼니 뭐네 욕을 하고 울었던 건 언제 적 일이냐 싶게, 또 심장이 쿵쾅댔다. 나는 별다른 말 하나도 하지 못하고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버렸다.
이틀 만에 만난 재희의 모습에 마음이 아프다가도, 때를 모르게 설레는 것도 사실이었다. 이전엔 어떻게 참아 왔지 싶을 정도로, 나는 재희의 일거수일투족에 심하게 설레고 있었다.
이 냉정한 문자마저도.
「집에 가. 나중에 얘기해.」
나는 답장했다.
「싫어문열어 열어줄때까지여기있을거야」
문에 귀를 찰싹 대 봤지만 녀석의 반응은 딱히 없었다. 무음으로 해 둔 모양이다. 간헐적으로 들리는 기침 소리만이 들렸다.
“너 좋아하는 곰탕 싸 왔어. 이거라도 먹어. 내가 도가니… 아 씨발.”
오 마이 갓. 아까 병원을 뛰쳐나갈 때 인턴에게 다 줘 버리고 나온 것을 깜빡했다.
“아, 여튼. 야. 내가 뭐 사올 테니까 뭐 이거라도 먹고….”
다시 진동이 왔다. 녀석이었다.
「여기 있으면 네가 먼저 죽어.」
나는 알림으로 노랗게 뜨다 가라앉는 메시지들을 차분히 내려다보았다.
「그대로 문 열고 집에 가 있어.」
할 말이 없었다. 너무나 녀석답다. 여태껏 녀석이 내게 해 왔던 행동 그대로.
모든 게 내 몸 위주, 내 상태 위주로 돌아가는 녀석의 사고관.
오늘따라 난 그 일방적인 사고방식에 구역질이 났다. 아픈 건 내가 아니고 너야.
“개소리 하지 마, 병신아. 아직 덜 아픈 모양이네, 네가.”
이건 어쩌면 기회였다. 내 평생 녀석에게 기댔던 것을 조금이나마 보은할 수도 있을지도 모르니까. 나는 조금 기운을 냈다. 자리에 누웠는지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녀석의 밭은기침 소리가 났다. 내 자극하는 말에도 메시지는 없다. 누가 이기나 해 보자는 거겠지.
그래, 나야 병신이고 멍청해서 널 모른다 치자. 넌 날 아직도 모르냐.
“죽어도 안 가.”
너라면, 내가 이러고 있으면 가겠냐고….
“야 한재희. 너 진짜 사람 바보 만드는 데 소질 있는 거 아냐? 내가 얼마나 민망했는지 알아? 너 내가 이제까지는 병원 안 가고 검진 안 가서 방심한 모양인데, 이제 포기해. 앞으로 나 건강해지려고 발악할 거야. 기쁘지? 너 그렇게 원했던 거잖아. 내가 선심 한 번 쓰려고. 완전 독하게 건강해질 거야. 왜냐하면….”
의식의 흐름을 따라 아무렇게나 말하다가 순간 난 나도 모르게 아무 말이나 내뱉을 뻔했다. 미쳤어. 마스크를 쓴 채로도 그 위를 손바닥으로 막은 나는 안의 기척을 살폈다. 여전히 고요했다.
“자냐?”
대답은 여전히 없었다. 정말 자는 듯했다.
나는 다리도 저리고 해서 몸을 일으켰다. 갑자기 일어서려고 하자 머리가 빙빙 돌아 순간 현기증이 났다. 어지럽던 찰나에 문고리를 확, 잡았는데 불현듯 어떤 생각이 들었다.
모교의 낡은 건물은 그 정도가 심해서 툭하면 문이 제멋대로 잠기는 게 일상이었다. 체육 수업은 물론 외부 활동에 배제되었던 난 교실에 남아 있다가 툭하면 갇혀 버리곤 했었다. 처음엔 놀라고 무서웠고 재희를 부르고 난리를 쳤지만, 이내 익숙해져 능숙하게 문을 따고 화장실을 오갈 수 있었다. 그 말인즉슨….
이것도… 될 거 같은데.
***
탈칵, 하는 소리에 정말 심장 떨어질 뻔했다. 손안에 흥건히 밴 진땀을 추스르고서 나는 겨우 실내에 들어갈 수 있었다. 이미 휴대폰 배터리는 꺼진 지 오래. 못해도 한 시간은 신발장에서 버틴 결과였다. 그 인고의 시간이 허무할 만큼, 모텔의 중문은 내 스킬에 간단히 열렸다.
“진짜 잠들었네.”
난 발뒤꿈치까지 들며 잠든 재희 곁으로 조용히 다가갔다. 쌕쌕거리는 숨소리는 여전히 열이 있어 보였다. 게다가 땀이 정도 이상으로 흘러서 온몸이 푹 젖은 상태였다. 갈아입힐 옷이 있나 싶어 둘러보는데, 평소 깔끔한 성격답지 않게 옷가지며 이것저것이 좁은 방안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약 봉투는 물론 끼니를 대신한 듯한 편의점용 죽 쪼가리와 컵라면에 나는 어이가 없어서 웃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동병상련? 뭐 주객전도? 잘은 몰라도. 의사는 아니지만 30년 경력의 환자인 내가 모를 리 없잖아.
“이래 가지고 내일이면 낫는다는 게 말이 되냐고….”
몰랐는데, 간호하는 사람은 슬퍼할 여유도 없구나.
만년 환자였던 것도 이 사태에는 도움이 됐다. 열부터 떨어뜨려야 한다는 걸 알기에 나는 분주히 움직였다. 예쁘게 갖춰 입은 옷들이 구겨져도 상관없었다. 난 소매부터 야무지게 걷어붙이고 녀석의 옷가지를 하나둘씩 벗겨 냈다. 옷이 땀에 흠뻑 젖어 오히려 녀석을 덜덜 떨게 만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녀석은 완전히 의식을 잃어 얌전했지만, 역으로 나 혼자 팔다리를 운신하기도 버거워 셔츠 하나 벗기자마자 나도 순식간에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어 버렸다.
우선 옷을 벗기고, 모텔 수건들을 챙겨 따스한 물로 녀석의 몸을 닦았다. 구석구석 닦으며 묘한 기분이 들지 않았다는 건 거짓말이지만, 녀석이 기절한 내게 했듯이 나도 그것을 되갚겠다는 생각으로 시선을 피했다. 어느 정도 땀을 닦은 뒤엔 챙겨 왔던 속옷을 입히려다가 도저히 온몸에 힘이 들어가지가 않아 야무지게 이불을 덮는 걸로 대신했다. 나도 완전히 녹초가 되었다.
“기분 이상해.”
나도 샤워를 하고 나왔다. 걱정이 무색하게 샤워기 물소리에도 깨지 않은 녀석은 아이 같은 얼굴로 깊게 잠이 들어 있었다. 여전히 열은 가시지 않아 입술은 말랐고, 내쉬는 호흡이 뜨거웠지만 그래도 아까처럼 땀을 많이 흘리진 않았다. 체온계를 가져오지 못해 내 손으로 이마를 짚어 보는데, 365일 차가운 내 손이 이마에 닿자 녀석은 작게 신음 소리를 냈다.
“…따뜻하다.”
이 열기가 나에게는 좋은 온기지만, 녀석에겐 물론 좋지 않을 것이다. 해열제야 사 오면 된다지만 딱 봐도 빈속인 녀석에게 그걸 먹이고 싶지는 않았다. 게다가 모텔 밖을 나서면서 그 직원을 마주할 용기도 나지 않았다. 널어 두었던 수건을 다시금 적셔서 이마와 목둘레를 닦아 봤지만, 내 형편없는 악력으로는 수건에서 물기가 뚝뚝 떨어져 별반 도움이 되지 못했다. 찬물에 얼어 버린 손끝은 살에 닿으면 깜짝 놀랄 정도로 더욱 차가워졌다.
그리고 뒤늦게 깨달았다. 생각해 보니, 굳이 수건으로 이럴 필요가 없었잖아.
***
“야, 오해하지 마. 진짜… 간호하려고 그러는 거니까.”
물론 잠든 재희는 대답이 없었다. 그 곁에서 훌훌 옷을 벗어 내린 난 알몸이 되었다. 아무도 보는 눈이 없는데 혼자 민망해져서, 살며시 이불을 들추고 그 아래를 파고들었다. 출렁이는 침대에도 여전히 녀석은 미동도 없었다. 오히려 곁에 누워 저를 안아 주는 내 체온이 시원한 듯, 내려다보이는 녀석의 미간에 주름이 사라졌다. 나는 좀 더 녀석의 머리를 가까이 끌어당겼다. 가슴 언저리에 닿는 녀석의 호흡이 뜨겁지만, 그래도 규칙적이었다.
“어떡하지 한재희….”
물론 내 사정은 달랐다.
고작 이틀만인데, 알몸으로 부둥켜안은 재희의 모습에 혼자 가슴이 뛰어 좀처럼 제어가 되질 않았다. 무의식적으로 나를 끌어안아 더욱 밀착한 재희의 뜨거운 몸에 아랫배가 간질간질했다. 아픈 녀석을 보고 걱정하기도 바쁜 찰나에 이것저것 딴생각하는 나 자신에게 자괴감도 들었지만, 온전히 무방비 상태가 된 재희가 한편으론 사랑스러웠다. 내 옆이 아니고서는 잠을 이루지 못했던 그 어린 시절의 재희가 보이는 것만 같아 나는 녀석의 머리칼에 입을 맞추고 연신 머리를 쓰다듬었다. 마스크를 쓰고 있어서 버석거리는 소리가 전부였지만.
그래도 입술 대신 내 차가운 몸이 너에게 또한 위로가 되기를.
“나 이제 중증 됐어. 책임져, 네가.”
TV에서만 몸 맞고 마음 맞는 줄 알았는데. 다 현실 기반이었어. 좋아한다고 해도 그 추상적인 개념에만 허우적거리고 있던 난, 이렇게 만지고 느낄 수 있는 사랑의 존재에 차차 익숙해져 가고 있었다. 혼자만의 사랑이라도, 혹은 응석이라도. 곁에서 이렇게 살을 부대끼고 어루만질 수 있는 체온은 상상이 안겨 줄 수 없는 진한 행복감을 선사했다. 물론, 행복만 줬다면 문제가 없지만.
“내 입장도 생각해 봐. 억울하잖아. 내 몸이 네 말만 듣는데 어쩌겠어.”
이거 봐. 나 혼자 만지면 서지도 않아. 풀죽은 채 그대로인 내 아랫도리가 부끄러워 이불로 쓱 가리고선, 나는 이마에 흥건한 재희의 땀을 닦아 냈다. 아이처럼 잠드는 재희는 그저 쌔근거리고, 전처럼 내게 키스해 주지 않지만, 난 녀석이 품 안에 잠든 것만으로도 만족했다.
단순히 키스로는. 고작 두 달 전만 해도 상상도 못 했던 충만함. 그것을 넘어서는 욕구. 지리멸렬하고 못나더라도, 인정해야 했다. 그게 날 살게 할 거라는 걸. 그러니까.
“재희야….”
“…….”
“재희야, 진짜 자는 거 맞지.”
“…….”
“한재희….”
오뚝한 콧날, 한일자로 굳게 다문 입술. 까끌까끌한 마른 입술을 엄지손가락으로 매만지며 나는 연신 재희의 이름을 부르고 또 불렀다. 내 품에 있는 걸 확인이라도 하듯이.
재희야. 재희야….
아무것도 할 수 없어 무기력한 내 삶에도, 그래도 너와 관련해선 뭐든 할 수 있다는 게 감사해. 그게 고작 네 살이 마지막이 아니라, 지금까지도 이 기회가 있다는 게.
“너도 날 좋아했으면 좋겠다….”
그랬으면 좋겠어. 그랬으면, 정말 나 열심히 살 수 있을 거 같아. 상상만 해도 기뻐. 건강해질 수 있을 거 같아. 이렇게 가끔은, 나도 아픈 너를 돌볼 수 있을 만큼 건강해져서, 이제는 내가 잔소리도 하고. 너도 마음 놓고 내 앞에서 응석을 부릴 수 있다면.
“…그랬으면.”
아주, 아주 잠깐이라도 말이야….
***
뭐지.
몸이 유난히 무거웠다. 담요에 닿는 감촉이 달랐다. 온수 매트도 아니고, 포근한 이불 감촉도 아니다. 조금은 까슬까슬한…. 잘 뜨이지 않는 눈으로 본 천장도 낯설었다.
게다가 가장 어색한 건, 내 몸에 닿는 살결의 느낌.
아, 눈에 익었다. 헐벗은 재희였다. 오랜만이네….
분명 엄청 아팠던 재희를 돌보다가 그대로 잠이 들었던 것 같은데. 재희의 땀을 식혀 준답시고 옷을 벗겼던 게 음란한 내 머릿속에서 계속 재생이 되고 있나 보다. 묘하게 대견스럽네…. 게다가 오랜만에 1인칭 시점이다. 늘 두 사람을 멀리서 지켜보는 조망이었는데, 코앞에서 벗은 재희의 나신을 볼 수 있다니. 아픈 애를 가지고 이런 상상을 하다 못해 꿈까지 꿔 버린 내가 좀 부끄럽긴 하지만, 뭐 어때. 꿈인데.
게다가, 꿈이라서 그런지.
끙끙 앓고 파리했던 녀석은 온데간데없고, 내 몸 구석구석을 쓰다듬고 있는 헐벗은 녀석의 것은 아팠던 현실과 달리 완전히 발기한 채 내 사타구니 사이를 쿡쿡 찌르고 있었다. 그 단단한 감촉에 나는 다 뜨지도 못한 눈으로 실실 웃었다.
아, 오히려 뭔가 색다른데? 한창 하는 중이 아니라 하기 전인가, 아니면 후인가. 보통 나신의 재희가 나오면 이렇게 가만히 있을 리가 없는데. 나에게 팔베개를 해 주고 있는 재희의 표정은 늘 그랬듯 차분했다. 유독 집요하게 내 몸 어딘가를 쓸고 있을 뿐. 그제야 녀석의 의도를 눈치챘다. 이게 1인칭이라서 그런가.
아, 맞아. 아직 멍이 들어 있었지, 나….
“흐음….”
항응고제 덕분에, 이틀 전 녀석에게 안겼을 때 남았던 키스 마크는 내 몸 여기저기에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 있었다. 녀석이 손이 내 유륜 근처에 남은 푸른 잇자국에 다가갔을 때, 나는 나도 모르게 신음을 흘렸다. 색이 옅은 내 유두 색 곁에 더욱 붉게 남은 잇자국을, 꿈속의 재희는 손톱 끝으로 살살 긁듯이 매만지고 있었다. 그 테두리를 따라 흐르는 촉감에 난 응석을 부리듯 재희의 겨드랑이 새로 고개를 파묻었다. 짙은 살 내음이 느껴졌다. 아, 재희 냄새다.
“재희야….”
궁금해졌다. 꿈속에서 나와 너는, 어떤 상황에서 몸을 섞고 있던 걸까? 혹시나 사귀고 있던 걸까.
장난치듯 매만지는 재희의 손길에서 내가 30년 동안 느껴 보지 못했던 애정과 섬세함이 느껴져 나는 막연히, 꿈속의 우리는 사귀고 있구나 생각했다. 현실처럼 그저 몸만 섞고 마는 관계라면, 이렇게 따스할 리 없지, 네가. 사랑할 줄도, 받을 줄도 모른다는 네가. 이렇게 애절하게 날 올려다볼 리 없잖아.
그래서 안심하고 나는 꾹꾹 묵혀 왔던 말들을 뱉었다.
“좋아해….”
…꿈이니까, 뭐 어때.
“네가 좋아….”
하다못해 꿈이라도, 꿀 수 있잖아.
***
부럽다. 어차피 꿈인 걸 알면서도. 또 질투가 나.
내 몸 곳곳에 입을 맞추기 시작한 재희의 머리를 안고, 나는 대담하게도 속삭였다. 하지만 재희는 대답이 없었다. 뼈까지 도드라진 내 손등 위에, 아마도 바늘을 꽂다가 멍이 남은 그 흔적 위를 마치 내 입술인 것처럼 혀를 내밀어 핥고 비볐다.
간지러워. 아, 꼭 강아지 같아….
그런 데 말고, 더 좋은 데. 더 깊은 곳을 네가 예뻐해 줬으면 좋겠다. 그래서 잽싸게 녀석이 쥔 손목을 빼낸 나는 그대로 녀석의 목덜미에 내 두 손을 두르고 다리로 허리를 감았다.
온전히 발기한 녀석의 것이 내 아랫배를 쿡쿡 찔렀다.
“하고 싶어….”
머리가 나른했다. 어딘가가 홧홧 달아오르는 것처럼 간지럽고, 몸이 뜨거웠다. 술을 마셨던 때와는 달랐다. 나는 절로 허리를 들썩이며 내 앞을 재희의 것 앞에다가 가져다 댔다. 완전히 발기한 재희의 것에 비벼 대자, 녀석 역시 약하게 신음을 흘렸다. 까슬까슬한 음모가 다리 사이와 내 가장 깊숙한 부근 사이를 재촉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현실과 달리, 이제는 또렷하게 나를 바라보는 재희에게 나는 꿈을 빌미로 털어 두었다.
“안에 넣어 주면 안 돼? 나….”
나와는 달리 탄탄하고 단단한 재희의 가슴 근육을 어루만지며 나는 어설프게나마 흉내를 내 본다. 손끝으로 녀석의 짙은 유두를 문지르고, 이미 젖어 들기 시작한 녀석의 선단을 내 손바닥으로 어루만졌다.
재희가 잘 보이지 않았다. 벌써 꿈이 깨는 건 싫은데….
“정현아….”
“응, 재희야. 나…. 너랑 하고 싶어. 넣어 줘. 응?”
목이 간질간질했다. 아니, 녀석이 입을 맞추는 내 온몸이, 무언가가 피어오르듯 간지럽고 뜨거웠다. 절로 뜨거운 숨이 뱉어졌다. 늘 그렇듯 내 흉터 위에 입술을 문대고 어루만지는 재희의 머리칼을 쥔 채로, 나는 더욱 녀석의 허리를 쥔 두 다리에 힘을 주었다. 내 나약한 힘에 고개를 든 재희는, 물끄러미 날 내려다보고 있었다.
“왜 그렇게, 보고만 있어….”
재희가 몽롱해 보였다. 막 구름이 낀 것처럼. 그래서 재희가 하고픈 말이 뭔지 난 잘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손을 뻗어 재희의 손목을 쥐었다. 억지로 뺨을 비비고, 내 가슴을 어루만지게 하고, 이윽고 내 엉덩이 사이로 가져가게끔 했다.
하지만 재희는 아무런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오히려, 조금은 슬퍼 보였다. 그런 표정은 싫은데. 왜 예전 꿈처럼 그렇게 거칠게 날 안아 주지 않을까. 역시 1인칭이라 나의 서툰 스킬이 탄로 난 것만 같아 조금 대담해지기로 했다. 코를 부딪치는 그 가까운 거리에서 나를 내려다보는 재희의 얼굴과 내 비부에 들이친 재희의 손길에 나는 눈을 감았다. 마치 유언처럼, 가까스로 한마디 말을 남기고서.
“사랑해 줘….”
***
기껏해야, 꿈에서라도.
재희의 대답은 말이 아닌 행동으로 돌아왔다. 다만 어김없이 내 입술 사이를 파고들 줄 알았던 재희의 혀는 바로 내 가슴으로 향했다.
흐려진 시야 속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재희의 얼굴은 무척이나 슬퍼 보였다. 왜, 뭘 걱정하는 걸까. 내가 아플까 봐 주저하는 걸까. 괜찮다며 두 다리를 감아도 몇 번이고 내 머리칼을 쥐었다 펴는 그 커다란 손바닥에, 난 스스로 내 관자놀이를 비비며 코와 입술을 갖다 대었다. 몸속 자꾸만 터 오르는 열기가 나를 가만히 버틸 수 없게 만들었다.
기어이 움직이기 시작한 재희가 마지막으로 뇌까렸던 말을, 난 내 신음 소리 탓에 듣지 못했다. 재희와 닿는 피부가 전해 주는 열기 외에 다른 감각들은 마치 닳아 버린 몽당연필처럼 뭉툭했고, 흐리멍덩했다. 작은 혼잣말만으로도 전신이 웅웅 울릴 정도로.
“좋아, 아…. 좋아.”
마치 어린아이처럼 젖꼭지를 빠는 재희의 입술에 나는 절로 허리를 들썩였다. 어루만지는 손길이 하나하나 불에 덴 듯 뜨거웠다. 그래서 이리저리 몸을 뒤틀고 고개를 젖히자 들썩이는 가슴을 도닥인 재희가 자연스레 내 성기를 쥐어 왔다. 잡는 것만으로 민감하게 달아오르는 느낌에 나는 신음했다. 만족스러운 듯 낮게 웃는 목소리가 쭈뼛하고 서늘한 기분을 느끼게 할 정도로 야했지만, 나는 마음을 굳게 먹고 그 손을 잡아 멈췄다.
“거기, 말고….”
꿈속이라고 하지만 1인칭이니까. 또 자칫 먼저 쌌다가, 재희 것은 나 몰라라 기절해 버리면 안 되니까.
나는 내 성기를 매만지던 재희의 손을 내 엉덩이 사이로 인도했다. 고환 밑 회음부 근처를 간질이는 손끝이 절로 아래를 조이게 했다. 머뭇거리듯 배회하는 손길에 난 급기야 수치도 모르고 다리를 벌렸다. 긴장한 비부가 바르르 떨리는 것이 나 자신에게도 느껴졌다.
“여기…. 응?”
손에 겨우 틀어쥔 선단이 꿈틀거리는 느낌이, 머리를 팽팽 돌게 했다.
“넣어 줘, 넣고 싶어.”
천박한 말일지라도 사실이었다. 내 몸 안에서 날뛰는 재희가 보고 싶었다. 느끼고 싶었다. 여자보다, 아니 평범한 남자보다 부실한 몸에 밋밋하기만 하고 예쁘지도 않지만, 그래도 아무도 들인 적 없는 내 몸속은 좀 어떨까. 살점 없는 깡마른 몸을 부대끼는 것보다는 그게 낫겠지.
뭐 조금 아프더라도, 조일 자신은 있으니까. 네 기분, 좋게 하고 싶어….
“싫어…? 재희야….”
꿈속에서라도, 마음껏 안기고 싶은데. 나른한 몸을 겨우 일으켜 나는 쓰러지듯 재희의 위에 엎드렸다. 엉덩이 사이를 자연스레 쿡쿡 찌를 정도로 재희의 것은 단단하고 뜨거웠다. 그 앞에서 서툴게 허리를 들썩이며 나는 막무가내로 그것을 내 안에 넣으려고 했다. 맘처럼 쉽게 되지 않아 낑낑거리다, 간단히 내 몸을 돌아 눕히는 재희의 완력에 다시 거꾸로 드러눕고 말았다.
“그러다 다쳐.”
“재희야아….”
“쉬….”
무언가를 잡아 쥔 재희가 그것을 물고서, 이내 이로 포장지를 뜯었다. 마치 쿠퍼액처럼, 묘하게 투명한 액체가 그 손끝을 적시는 것을 난 헉헉거리며 지켜보았다. 가장 흥분해 있는 건 재희인데, 왜 내가 이렇게 숨이 가쁠까. 나는 마치 물에 흠뻑 빠졌다 나온 사람처럼, 다가온 입술에 날 가져갈 수밖에 없었다.
“사랑해 줘, 안아 줘. 응?”
발버둥 치며 나아가 겨우 닿은 입술은, 파고들지 못해 그저 표면으로 끝났다 해도 충분히 달콤한 키스였다.
***
“아, 응… 아. 이상, 해…. 흐윽, 재희….”
젤을 충분히 묻힌 재희의 손가락 하나가 내 입구를 지분거리다 다시금 안으로 파고들었다. 묘한 이물감에 나는 허리를 뒤틀었지만, 유두를 물고 놔주지 않는 재희의 머리통을 그저 감싸 안을 수밖에 없었다. 포장지의 액체를 전부 다 내 입구에 흘려보낸 재희는 오가는 손가락의 움직임을 더욱 깊숙이 묻었다.
이미 콘돔으로 한 차례 풀어냈음에도 두 손가락은 빠듯했다. 내 아래가 긴장하는 게 느껴졌다. 밀부는 내 의지와 따로 놀았다. 힘을 풀라는 듯, 가슴 주변에 퍼부어지는 입맞춤에 나는 허리를 들썩였다. 둥글게 마디를 굴려 안을 넓히는 적나라한 감각에 나는 베개를 쥐며 흐느꼈다. 가슴이 주체 없이 들썩였다. 입으로 헉헉거리는 내 숨소리가 시끄럽게 들릴 정도로.
“아응, 읏!! 아, 재희야. 아!!”
“쉬…. 괜찮아.”
다정했다. 재희는. 내 흉부가 눌리지 않게 아까처럼 날 위로 앉힌 채 끌어안은 채로 아슬아슬하게 버티는 가슴 모든 곳에 쪽쪽거리며 입을 맞춰 주고 있었다. 내 흉터 자국에 이르러 길게 혀를 빼내어 핥아 내리는 촉감에 나도 모르게 아래를 조였다. 그것을 시작으로 철벅거리는 소리를 내며 빠르게 재희의 손가락이 오가기 시작했다. 그 뭐라 형언할 수 없는 감촉에 비명을 지를 것만 같아 나는 숨을 쉬다 못해 참았다.
기어이 세 개의 손가락이 들어서고, 재희의 가슴 아래에 주저앉아 있던 난 등을 곧추세울 수밖에 없었다. 묘하게도 반쯤 일어선 내 성기가 신기할 정도로, 간질거리는 느낌은 오럴을 받을 때와는 또 다른 감각을 선사했다. 간지러워….
“숨 쉬어, 깊게….”
“재희, 재희야… 빨리, 아…. 이제….”
“천천히, 응…?”
못 참겠어….
다시 두툼한 재희의 것을 쥔 내가 엉거주춤 일어나 앉았다. 후들거리는 허벅지에 비틀거리자 재희가 내 허리를 받쳐 주었다. 그 힘줄이 돋아난 팔 한쪽을 쥐고서 나는 서서히 재희의 것 위에 내려앉았다. 이틀 전, 내가 가 버렸을 때처럼 상체를 세운 재희가 낮게 신음했다. 그 커다란 선단이 몸 입구를 서서히 열어 가는 것이 느껴졌다.
손가락과는 비교할 수 없는 중압감이었다. 그리고….
“아….”
뜨거웠다. 컸다. 이상하게… 눈물이 났다.
이상했다. 아프면서도, 하나도 아프지 않았다. 비집고 들어오는 그 단단한 촉감이, 차가운 주삿바늘 따위가 아니라 온전히 재희여서였을까. 나 때문에 흥분한 재희의 살덩이가 내 몸을 비집고 들어와, 기어이 전부 품고 난 뒤에 나는 재희 위에 엎드린 채로 울었다.
아래로 치받쳐 오르는 생경함과 이물감. 하지만 뭔지 모를 벅차오름에, 눈물을 핥고 입을 맞추는 재희의 두 뺨에 내 얼굴을 비비며 응석을 부렸다. 그리고 몸을 일으켜 더욱 깊숙이 들어오는 성기의 열감에, 나는 나도 모르게 내 아랫배 쪽을 매만졌다. 얄팍한 살갗, 그 아래로 느껴질 것만 같은 재희의 것에, 몸이 걷잡을 수 없이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네 안, 너무 좋아….”
그 말을 마지막으로 날 돌려 눕힌 재희는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걸로 됐어.
마치 달궈진 것처럼 마찰되는 아래는 쓰라렸고, 뜨겁다 못해 화끈거렸지만, 나는 하마터면 재희의 쾌락을 앗을까 싶어 최선을 다해 다리를 벌리고 아래를 올렸다. 서툴게 위아래로 움직였을 때와는 다르게 올곧게 몸속을 파고드는 재희의 얼굴이 보고 싶어 수없이 눈을 깜박였다.
잘못 본 게 아니라면, 재희의 두 눈도 조금 풀려 있었다. 마치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나는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재희는 자신을 놓지 않고 천천히 움직였다. 오히려 그토록 느린 움직임이 나에게는 더욱 적나라하게 재희의 것을 느끼게 했다. 중간이 두텁고, 유독 선단 아랫부분이 두껍고 큰 재희의 것이 빠져나갈 것처럼 끄트머리에 걸칠 때는 나도 모르게 이를 악물었다. 나는 나른하게 내쉬는 재희의 숨소리에 겨우 파르르 숨을 내뱉을 수 있었다.
물론 날 생각해서라는 건 알지만, 부둥켜안아 주지 않는 재희에게 서러워졌다. 나는 손을 뻗어 허우적거렸다. 허벅지를 잡고 있던 한쪽 손을 내뻗은 재희가 손을 마주 잡아 주기 전까지, 나는 엉망으로 소리를 질렀다.
숨이 차분해지고, 그리고 눈물로 가득 찼던 눈과 코가 어느 정도 가라앉을 때까지. 멍든 손등 위를 몇 번이고 입 맞추면서도, 재희는 점차 허릿짓을 빠르게 했다. 내 손가락 엄지부터 새끼손가락까지를 입 안으로 물고, 마치 아이스크림을 빨 듯 삼키고 내뱉는 행위조차 내게는, 내 몸을 범하는 행위나 다름없이 느껴졌다. 그 덕분일까. 삽입 뒤 아예 죽어 버렸던 성기에서도 음란한 물기가 일기 시작해 내 배 위를 적셨다. 물론, 아래에서 연신 철벅거리며 미끄러지는 젤과 체액을 이길 순 없었지만.
“정현아….”
“흐응, 앗, 으읏, 응.”
“너무 좋아….”
“아!!”
쿵, 하고 찔러 올린 성기가 각도를 틀어 안쪽으로 쑤욱 휘어져 들어와 나는 허리를 좌우로 비틀었다. 연신 빨고 물던 내 손을 이끈 재희가, 최대한으로 벌어진 입구 주변을 갖다 대어 내게 어루만지게 했다. 몸 안으로 느끼고 있으면서도, 결합된 부위와 적셔진 음모의 끈덕짐을 손끝으로 느끼자 나는 더할 나위 없이 흥분해 버렸다. 내 아래가 절로 오므라드는 것이 손끝으로 느껴졌다. 터질 것처럼 빨개진 내 뺨을 사랑스럽게 어루만진 재희가, 거칠어지는 움직임과는 다르게 차분하게 속삭였다.
“온통, 핑크색이야 너….”
“하응, 아, 나! 아, 응, 읏, 아! 재희, 야!”
“예쁘다….”
아프게 머리칼을 쥔 재희가 절정에 향하듯 내 허벅지를 바깥으로 크게 벌리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목을 뒤로 꺾은 나는 엉망으로 울기 시작했다. 밀부를 놓친 내가 허겁지겁 잡은 재희의 손은 그대로 내 가슴으로 향했다. 나약하게 뛰는 심장 위에 내 손등이, 그리고 그 위로 깍지를 낀 재희의 커다란 손이 놓였다. 몸은 겹치지 않았어도, 커다란 재희의 손은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나는 마음껏 소리 질렀다.
너무 커, 아. 아파, 하지만. 너무, 좋아, 아. 드디어, 재희야. 아. 네가, 네가… 내 안에….
“사랑… 해….”
그리고 내 안에서 절정을 맺은 재희의 손이 거칠게 주먹 쥐였을 때, 나는 그 손목을 붙들고서 그대로 정신을 놓았다. 버릇처럼 중얼거린 말은, 이미 고백이라 하기엔 지나치게 오래되어 퇴색된 뒤였다. 너무 오래 숨겨 둔 탓에 이제는 별로 빛나지도 않는 말들. 이리저리 나뒹구는 체액과 눈물과 다름없이 덧없는 고백은 내쉬는 숨과 함께 흘러나갔다.
온몸이 뜨겁다. 나른했다. 정말로 봄이 오긴 한 걸까? 따사로운 봄볕에 드는 낮잠처럼 나는 정신을 잃었다. 단단한 재희의 품속에서.
***
눈을 뜬 곳은 모텔이 아니었다. 물론, 집도 아니었다. 무엇보다 코 안까지 이어진 노즐의 불편함에 나는 깨달았다. 낯설다 못해 익숙하기까지 한 이곳이 어딘지. 게다가….
“아빠…?”
“그래. 정신이 좀 드니?”
아빠 목소리. 환청이 아니었다. 시골에 계셔야 할 아빠가 내 옆에 와 있었다.
뭐지. 왜 아빠가 와 있지. 진짜 꿈이었나. 그나저나 나 왜 병원….
“너 계속 혼수 상태였다.”
“…어?”
“자가 호흡 돌아온 게 어젯밤이야.”
오랜만에 본 아빠의 모습에 나는 어리둥절했다. 엄마도 아니고 아빠가 서울에 올라오다니. 반가움에 응석을 부리려다가도 아빠의 낯빛이 그리 좋지 않아 나는 나대지 않기로 했다. 무슨 상황인지 짐작하기 전에는 섣불리 행동하지 않는 게 절반은 가는 최선의 길이었다. 게다가 내 처지를 생각한다면 더욱.
“…엄마는?”
기어 들어가는 내 목소리에 아빠는 표정을 굳히며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말 안 했다.”
“고마워, 아빠.”
나 역시 안도하며 표정을 풀었다. 병원에 실려 온 와중에 엄마의 안부를 묻는 내 처지가 안쓰러운지, 내 머리칼을 조심스레 쓰다듬는 아빠에게서 옅은 담배 냄새가 났다. 그러고 보니 아빠도 많이 늙었네. 흰머리와 군데군데 주름진 얼굴에 한몫하기 바쁜 불효자는 애써 웃으려 했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하도 어릴 때부터 수술을 받고, 전신 마취 몇 번을 겪다 보니 걸핏하면 필름이 끊기듯 기억이 깜박깜박한다. 오래간 누워 있다 보면 내 기억 속 타임라인을 짜 맞추는 데 서툴러진다. 난 필사적으로 눈을 굴리며, 병실 구석 TV에 비춰진 날짜를 확인했다.
그러니까 아빠의 말대로라면 난 또 폐렴 증상으로 실려 왔던 모양이다. 쓰러진 건 하루 이틀 됐고, 이렇게 정신을 차렸다는 건 위험한 고비는 넘겼다는 거겠지. 무시무시한 대왕 주삿바늘과 몸 이곳저곳에 연결된 기계음이 열심히 일을 해 주는 걸 느낀다. 뭐, 살아남았으니 다행인가. 싶지만….
문제는 그 뒤다. 짚이는 데가 없다면 거짓말이니까. 교수님과 문진을 깽판 치고 나가서 울고불고 난리를 쳤으니, 진작 아빠에게 연락이 갔겠지…. 앞서나가다가 죄를 스스로 까발리는 것은 바보 같은 짓이라는 건 알지만.
“뭐 찾아. 아프니?”
“아니, 아빠 근데요.”
“응?”
“재희는…?”
어디까지 알고 있으려나. 내가 병원에 와 있다는 건 아무래도 재희가 데려왔을 확률이 높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말문을 꺼내 보는데, 아빠의 표정이 심상치가 않았다.
“아직 많이 아파? 재희, 많이 아팠거든요…. 아빠. 들었어요? 재희 감기 걸리면 나 때문에 집에 안 오고….”
“정현아.”
“아빠도, 혹시 알고 있었어요?”
아빠는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았다. 직감적으로 나는 그 대답이 긍정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굳은 표정이 영 마음에 걸렸다.
아빠는 본디 성정이 온화한 사람이었다. 내 신경질적인 성격은 늘 아파 왔던 탓도 있지만 아무래도 엄마 쪽과 닮았는데, 그나마 아빠의 아들이라 반쯤 희석된 거 같다며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말해 오곤 했다. 그런 아빠가 내 앞에서 얼굴을 굳히는 일은 좀처럼 보기 어려웠다. 무척 화가 난 게 아니라면 더욱.
“아빠, 재희 잘못이 아니라.”
“사정은 나중에 들으마. 넌 우선 좀 쉬어야 돼.”
“아빠, 정말로….”
난 팔을 내뻗었다. 힘없이 걸쳐진 내 손가락을 아빠는 마주 잡았다. 여전히 얼굴은 못마땅한 표정이다. 재희의 이름을 꺼내자마자 더욱 어두워진 표정에 나는 안 그래도 마른 입 안이 바짝바짝 탔다.
“재희한테 뭐라 그러지 마.”
“…….”
“내가 억지 부린 거야. 내가, 사실 듣고 너무 흥분해서. 재희가 끝내 문 안 열어 주려고 했는데, 내가 난리를 치니까 거기 사람들이 나 쫓아내려고 해서…. 그래서 나 들여보내 줬어. 걘 나한테 가라고 했는데. 근데 내가 어떻게 걔 아픈 거 두고 혼자 가.”
“그래도 갔어야지.”
“아빠….”
“네가 사지 멀쩡한 놈도 아니고. 이렇게 발칵 뒤집힌 거 보면, 넌 엄마 아빠 생각은 조금도 않니?”
역시 화가 났구나, 우리 아빠. 미안해 아빠.
물론 아빠의 심정을 모르는 건 아니다. 다소간의 미안함은 지울 수 없었지만 오히려 난 홀가분했다. 죽다 살아났건, 혼수 상태였던 간에 지금의 나는 몸의 고통 따윈 잘 느껴지지도 않았다.
“넌 네 걱정이나 해라. 재희는 어련히 혼자….”
“혼자 아팠다니까.”
그만큼 마음의 충만함은 내 정신력을 굳건하게 만들었다.
“안 그래도 온 세상에 혼자인 애를 두고, 아빠는 어떻게 그렇게 이야기할 수가 있어.”
끙끙 앓던 재희의 머리를 품에 꼭 끌어안고서 잠들었을 때의 그 벅찬 기분은, 위로였던 뽀뽀 이후로 처음 겪는 거였다. 뿌듯함, 벅참…. 게다가 살아났다니 더할 나위 없지 않은가.
“막말로 내가… 누구 덕분에 이러고라도 사는데. 나도 그 정도 은혜는 갚을 수 있는 거잖아.”
어느 순간부터 부쩍 쭉쭉 앞만 보고 달려 나가던 재희, 그리고 그 뒤에 한참이나 뒤처진 나. 나이만 먹고 여전히 철부지에 제멋대로인 나는, 함께 달려가는 건 꿈도 못 꾼 채 재희의 뒷모습만 보고 지냈던 걸까. 그래서 용기가 나지 않았다. 감히 붙잡았다간, 널 불렀다간 오히려 네 앞길에 민폐가 될까 봐.
하지만 이제야.
겨우 딱 한 번. 내 앞으로 멀찍이 걸어 나가던 재희가 유일하게 돌아봐 준 기분이었다. 잠시 숨을 돌리고, 내 주변에서 멈춰 줬다. 퇴보라고 해도 어렸을 때처럼 유약한 모습 그대로를 재희가 보여 줬기에, 나 또한 솔직해질 수 있었다.
그래, 덕분에 내 생애 첫 고백을 할 수 있었다.
“재희 불러 줘요. 응? 아빠.”
“…정현아.”
하지만. 정말 다 꿈이었던 것처럼.
이렇게 된통 앓고 난 뒤, 겨우 눈을 뜨면 뚱한 얼굴로 날 반겨 주곤 했던 녀석이 내 시야 안에 들어오지 않아 나는 불안해졌다. 덕분에 어디까지가 꿈이고 진실인지 도통 모르겠다. 정말 손에 닿을 정도로 따뜻하고, 절실했는데….
“나 재희 보고 싶어…. 봐야겠어.”
다 꿈이었다고 해도 좋으니까 보이는 곳에, 볼 수 있는 곳에 있어 줘.
***
“죄송해요.”
“아뇨, 괜찮아요….”
“아유, 혈관이 너무 약해서….”
당황해하는 간호사 뒤로 허겁지겁 수간호사가 들어온다. 익숙한 상황에 나는 설핏 웃었지만, 피투성이가 된 한쪽 팔에 한숨이 나오는 것은 사실이었다. 안 그래도 항응고제 복용 때문에 지혈이 되지 않는데, 이리저리 혈관이 터져서 꽤나 보기 처참했다. 그나마 1인실인 게 다행이었다.
“죄송해요. 불편하시겠지만 우선 이게 최선이네요.”
“아니에요. 어차피 계속 누워 있을 걸요 뭐.”
발에 링거를 꽂으면 다른 것보다 화장실을 갈 때 불편하다. 하지만 별수 있나. 두 팔이 남아날 데가 없이 엉망인지라 나는 욱신거리는 팔을 추스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입원한 뒤로 매일 같은 일을 겪고 있었다. 급기야 오늘은 발등까지 내놓았다. 이거, 진짜 중학교 때 이후로 없던 일인데….
“저기, 죄송한데요.”
“네?”
“혹시 한재희 선생님은….”
“아, 한 선생님은 지금 외래 보세요.”
“아… 네.”
깨어난 지 이틀 동안 난 재희의 머리카락 한 올도 보지 못했다.
내 거동이 불편한 건 둘째 치고, 아예 녀석이 내 근처에 오질 않아서였다. 어떤 핑계를 대고 휴가를 냈는지 알 길이 없었다. 며칠 내내 내 곁에 붙어 있던 아빠가 겨우 자리를 비운 사이, 나는 알은체를 한 인턴 하나를 붙들었다. 그나마 안면이 익은 사람에게 재희의 안부를 묻는 게 최선이었다. 그것도 아빠가 옆에 있을 땐 여의치 않았다. 말로는 내 몸부터 생각하고 재희는 나중이라 달래지만, 눈치가 영 아닌걸.
“재희, 감기는 다 나았죠?”
“네. 환자분들에게 영향 갈 정도는 아니라서 멀쩡하게 회진도 돌고 계세요. 진찰도 보시고.”
“아… 다행이다.”
보고 싶은데….
“뭐 전해 드릴 말씀 있으세요?”
“아, 아뇨…. 됐어요.”
꾸벅, 인사하고 사라지는 인턴을 미처 붙들지 못하고 나는 입술만 만지작거렸다. 어설프게 말을 전한다고 해서 올 녀석이 아니다. 게다가 확실한 건 재희는 날 피하고 있었으니까.
임직원 동거인의 자격 덕분일까. VIP 병실에 머물러서 일반 병동하고는 조금 떨어져 있다지만 그래 봤자 엘리베이터로는 얼마 걸리지도 않는다. 제아무리 바빠도 회진 돌 때 정도는 마주칠 수 있을 텐데.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다니.
서운한 건 둘째 치고, 짐작되는 이유가 너무 많아서 골치가 아팠다. 지끈거리는 머리에 한숨을 쉬다가, 이내 문을 열고 들어오는 인기척에 고개를 들었다. 아빠였다.
“아빠.”
“결국 뺐니?”
“응.
호기롭게 발등에 놓았던 수액은 결국 얼마 못 가 혈관이 터져 다시 빼 버렸다. 빼고 난 자리가 꽤 부풀어 올라 흉했다. 안쓰러운 듯 혀를 차는 아빠의 눈치를 보며, 나는 무심한 척 툭, 말을 흘려 보았다.
“재희가 나 링거 하나는 기가 막히게 놓는데….”
“…….”
이거, 봐. 아빠의 표정이 심상치 않다. 내가 정신을 잃은 동안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게 분명하다.
재희에게서 감기가 옮아 폐렴으로 전이된 건 눈 감고 봐도 자명한 사실이었고, 이 문제에 있어서는 내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잘못한 건 나지만 재희가 혼이 났을 수도 있었다. 부디 그러지 않았기를 바라고 있지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 일거수일투족을 놓치지 않는 재희가, 게다가 멍 하나 남기지 않고 바늘을 꽂을 수 있으면서 괜히 다른 사람에게 날 맡겨서 고생을 시킬까? 재희나 아빠나 둘 다 내 몸이라면 끔찍하게도 생각하는 사람들인데.
이유가 뭘까. 아빠가 크게 혼이라도 낸 것일까. 단순히 혼을 낸다고 안 올 녀석인가 싶기도 하고. 거꾸로 재희도 아빠에게 불편한 게 있는 걸까. 이유를 알면 화해라도 시킬 텐데, 내가 재희 언급만 하면 민감하게 구는 아빠가 아무래도 큰 문제였다. 나 혼자 머리를 굴려 봤자, 그 이유를 아빠가 말해 줄 리도 없고.
뭐,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밖에 없었다. 난 빠른 화제 전환을 유도했다.
“교수님하고 내 얘기했지?”
“네 얘기 너 깨기 전에 이미 실컷 해서 할 말 없단다.”
“그럼 뭐야. 나 귀 완전 간지러웠는데.”
“오랜만에 그냥 이야기 좀 나눴지. 나도 내려가야 하니까.”
오.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아, 아빠 언제 내려가?”
“왜. 내 아들 내가 돌보겠다는데.”
“그냥….”
“내일까지 휴가인데, 아들 때문에 서운해서 더 있어야겠다.”
나는 도끼눈을 떴다. 하기야 내가 생각하기에도 내 억양이 서운함보다 ‘이제서야’의 뉘앙스를 너무 짙게 띄우긴 했다. 뭐, 난 불효자니까.
“불편해요. 아빠 불편하게 자는 것도 그렇고.”
“VIP 병실이 얼마나 편한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니.”
“아빠 집에 환자 따로 있잖아. 엄마 돌봐야지. 휴가 이렇게 길게 내서 의심하면 어떻게 해.”
“정현아.”
“진짜로. 나 괜찮아. 하루 이틀 일 아니잖아.”
“그런 녀석이 이렇게 사람을 놀라게 하니?”
“헤헤….”
하나뿐인 아들이 이렇게 빌빌거리는 것도 문젠데, 또 말썽까지 피워서 미안해요. 하지만 아빠, 나 이 상황에서도 아빠 엄마보다 더 보고 싶은 사람이 있어 가지고….
아빠한텐 정말 미안하지만, 아빠가 사라지지 않고서는 재희가 나타나지 않을 것 같단 말이에요.
그렇게 애써 딴 맘을 숨기는 내 곁에 다가온 아빠는 내 이마와 뺨을 연신 쓸어 주었다. 살짝 죄책감도 더해질 만큼. 안쓰러운 눈으로 내려다보는 아빠의 얼굴은 단순히 자기 환자를 진찰할 때와는 또 다를 것이다.
종교도 없던 아빠가 나와 엄마를 위해 기도를 하고, 또 이를 악물며 일과 가정을 돌봤다. 집이 여유롭다지만 마음이 여유로운 것과는 다를 테니까. 유약한 아내와 아들 사이에서 혼자 버텨야 했던 아빠는 참으로 외로웠겠지.
“정현아. 난 네가 살기만 하면 된다.”
하지만 아빠 기도 성공했나 봐. 아빠 아들 이제 살다 못해, 여유가 생겨서 이 난리잖아요.
시큰한 코를 훌쩍이며 나는 최대한 생긋 웃었다. 응, 알아요.
“네가 무슨 이유로든 삶에 애착을 가지는 건 찬성이다만.”
“으응….”
“늘 네 몸을, 엄마 아빠를 잊지 않아 주었으면 좋겠다. 응?”
하지만 왜일까.
기분 탓인지, 그 말이 나에게는 경고처럼 느껴졌다.
***
다음 날 점심을 함께 먹고 아빠는 집으로 내려갔다. 배웅하겠다고 일어선 나를 아빠가 오히려 도로 눕혔다. 나는 몇 번이고 당부한 말을 귓등으로 들으며 문을 닫고 나가는 아빠의 뒷모습을 눈으로 좇았다. 혼자 쓰기엔 안 그래도 커다란 병실이 더욱더 썰렁해졌다. 아빠 말대로 지나치게 잘 꾸민 방이었다.
어렸을 적엔 오히려 이 큰 병실이 감옥 같아서 싫었다. 아예 화장실까지 병실 안에 있어서, 병원 안에서도 격리 조치된 기분이었다. 문을 열고 나가면 기겁하는 사람들.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며 내가 잘못될까 봐 안절부절못하는 시선. 물론 감염을 주의해야 하는 건 알지만, 철없던 어린 시절엔 할 수 있는 것보다 할 수 없는 것, 하지 말아야 할 것들만 강조하는 어른들이 모두 다 내 적처럼 느껴졌다. 얼마 못 가 체념하고 말았지만.
지금은 그보다 조금 머리가 커졌다고, 조금 꾀를 부리게 되었지만. 큰 틀에서 달라진 건 없다.
병실 내 화장실 거울 앞에 서서 나는 조심스레 내 환자복 단추를 끌렀다. 그리고 예의 그 부위들을 확인했다. 멍은 조금 옅어졌지만 그래도 확실히 흔적은 남아 있었다. 유두 근처, 그리고 겨드랑이 안쪽. 배꼽 옆….
모두 재희의 흔적들.
나약해진 기억보다 더욱 확고하게 기록된 몸에 난 그나마 위안을 받았다. 재희가 내게 남겼던 흔적이라고 생각하면 위로가 됐다. 무엇보다, 이렇게 살아 있으니까. 나도 녀석도.
눈물까지 보이며 날 위해 기도하던 아빠에겐 조금 미안했지만, 내게 지금 제일 중요한 건 재희였다. 어느 정도의 시간은 짐작하고 있다. 회진 시간을 기다리며 나는 백색의 병실 안에서 조용히 때를 기다렸다. 조금은 혈색이 좋아 보이게. 조금은, 좀…. 나아 보이게.
그리고 나의 계획은 적절했다. 다소 이변은 있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일반 병동으로 내려가려던 계획은 바로 코앞에서 무산되었다. 왜냐하면 그 엘리베이터에서 재희가 떡하니 내렸으니까.
정말 재희는 멀쩡했다. 안경을 끼고, 가운을 입고, 예의 그 크록스 신발을 신고 내 앞에 우뚝 섰다. 주변의 다른 의사들이 내게 인사를 건넸지만 나는 받아 줄 생각도 못 하고 재희를 따라 차렷 자세로 섰다. 밀고 있던 링거 거치대만 쥔 채로.
“어디 가.”
재희가 먼저 말을 걸어 왔다.
“아, 그게.”
너 보러 가는 중이었다는 말도 꺼내지 못하고 나는 후다닥 시선을 내렸다. 그리고 거치대를 쥐지 않은 한 손도 등 뒤로 가렸다. 멍투성이인 걸 혹시나 들킬까 봐.
“역류하네. 링거.”
“어? 어.”
“우선 병실로 돌아가.”
그리고 녀석은 아무렇지 않게 앞장서서 내 병실로 먼저 들어갔다.
조금 긴장이 풀렸다. 아무렇지 않게 굴기로 마음은 먹었지만, 오히려 녀석 쪽이 이렇게 나오니까 혼자 설레고 난리를 쳤던 스스로가 부끄러워졌다. 조금 성질이 났다가도, 또 침대에 드러눕는 내 등 뒤를 받치는 녀석의 손에 혼자 풀어졌다가, 마음이 정말 널뛰기하듯 춤을 추었다.
부끄러워서 재희의 눈을 마주치기가 쉽지 않았다. 질리도록 보고 또 본 얼굴인데, 멀쩡히 옷 갖춰 입고 있는 재희를 봐도 지난 정사의 기억이 더 선연하게 비쳤다. 멀쩡한 놈이 마치 옷을 홀딱 벗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 탄탄하고 너른 가슴이 떠올라 절로 열감이 오르는 게 느껴져서 난 속으로 오만 슬픈 상상을 해야만 했다. 하얗게 마른 입술에 연신 침을 발랐다.
이런 나와는 사뭇 다르게, 내 가슴까지 이불을 덮어 주고 난 재희는 기어이 내 팔뚝의 흔적들을 발견하고 작게 인상을 찌푸렸다. 그게 사실 아빠의 한숨보다 더 무겁게 느껴졌다.
“간호사 부를게. 기다리고 있어.”
“잠깐만.”
“……?”
“재희야….”
재희가 자신이 직접 하지 않고 간호사를 부르려 하자 나는 솔직히 당황했다. 멀쩡하던 링거가 때마침 역류한 것도 내가 일어나 설쳐서 그랬던 거지만, 곤란한 일을 만들어서 책임을 전가하려던 의도는 아니었다. 바쁜 걸 모르는 것도 아니었고.
하지만 누군가를 부른다면 난 내 계획에 있던 모든 것을 하나도 할 수 없게 되어 버린다. 그래서 퉁퉁 부은 엄지손가락으로 녀석의 가운을 잡았다. 돌아본 녀석의 표정이 어땠는지 난 확인조차 못 했다.
“미안해. 아빠가 뭐라고 했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미안.”
“…….”
“미안해. 정말, 정말 미안해….”
만약에 정말 내가, 네 곁에서 간호를 하다 옮아서 이 지경이 됐다면.
넌 또 엄청나게 자책했겠지. 그리고 내 욕도 했을 거다. 또 날 업고 병원에 뛰어 왔을까. 의식을 잃은 날 보면서 속상했겠지…. 다 내 잘못이다. 하지만, 그날 널 찾아간 걸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백만 번 같은 상황에 놓인다 해도 똑같은 선택을 할 거라는 내 마음을 알면, 과연 넌 나를 얼마나 미워하게 될까.
그래서 사과해야 했다. 네 탓이 아니라고. 혹시나, 혹시나 그게 꿈이 아니었다면. 그건 전적으로 내가 널 원해서였다고. 이유를 말할 수 없었지만 나는 무조건 미안하다고 중얼거렸다. 사과하는 주제에 펑펑 울고 싶어지는 걸 참느라 혼이 났다. 이윽고 내 손목을 잡아 다시금 이불 속에 넣어 주기 전까지, 나는 두려워서 재희의 얼굴을 마주 보지도 못했다.
“그 사람 때문이 아냐.”
이윽고 재희가 내게 답을 내뱉은 순간, 그 무표정한 얼굴을 본 순간 나는 뭔가가 잘못됐다는 걸 느꼈다.
“너도 익숙해져야지.”
“응?”
“당분간 나 파견 나가기로 했어.”
강원도에 있는 병원이야. 덧붙이는 재희의 말에 나는 잠깐 머릿속이 하얗게 비었다.
파견, 강원도.
…그러니까. 볼 수 없다는 말이다. 나는 차분해지려고 애를 썼다. 귀에서 이명처럼 파고드는 목소리의 울림이 꼭 스산한 집의 괘종 소리처럼 형체를 알 수 없게 일그러져 맴돌았다. 그렁그렁하던 눈물이 쏙 들어갔다. 나는 말을 한참이고 더듬어야 했다.
“아… 얼마만큼?”
“…….”
“괜찮아. 핏줄 터지는 거야 하루 이틀 일도 아닌데 뭐. 그래…. 그렇구나….”
어째서? 여태껏 일부러라도 가지 않았다면서. 갑자기 왜?
따져 묻고 싶은 마음을 애써 참으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침착하려 애썼다. 벌벌 떨리는 입술을 감추려 나도 모르게 손톱을 뜯기 시작했다. 내려다보는 재희의 눈을 마주치기가 두려웠다.
재희는 온전히 정상으로 돌아와 있었다. 몸도, 마음도. 아니… 눈빛까지도. 병원에서 늘 그랬듯이. 누군가에게 선을 지키고, 자신의 감정을 잘 내보이지 않는 멀쩡한 한재희의 모습 그대로.
그러나 분명한 건, 재희가 온전한들 나는 여전히 병신이라는 거였다. 그래서였다.
“네 마음이 진정될 동안, 그러기로 했어.”
마치 녹이 슬어 버린 것처럼.
몸 안에서 일렁이는 기계 소리가 불길하게 찌걱거리는 소리를 냈다. 귓가에 맴도는 이해할 수 없는 말에 내가 마주해 버린 재희의 눈동자는, 아주 조금의 연민도 없이 그저 차분했다.
“마음 정리해.”
“……!”
“그래 주리라 믿어.”
<2권에 계속>